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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네가 내 오라비 같았었다면(아8_1~4)
서 론
롬8:23에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이제 아가서 강해의 종착점에 왔습니다. 아가서 8장은 성도의 탄식과 재림을 통한 영애(永愛)에 관한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당연한 귀결이며 또한 차고 넘치는 소망스러운 말씀입니다(롬15:13).
먼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1절~4절까지는 성도의 탄식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아가서에 나타난 성도는 그의 신앙성장에 있어서 비로소 영화의 단계에 다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화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완성될 영화의 지극히 작은 부분이었지 전체는 아닌 것입니다. 성도가 완전히 영화롭게 되지는 못하고 그 맛만 보았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성도 자신의 이중적인 자아(自我)로 인해 내적갈등이 심화(深化)되어져 가는 현상의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거듭난 영혼이 성화되면 될수록 몸과 영혼에 남아있는 죄악의 잔제가 선명해지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도 육체자체는 병들고, 늙고, 죽게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롬8:23에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성도가 완전한 성화를 이루기 전의 지상생활은 탄식으로 지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속에서도 완성을 향한 소망은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 네가 내 오라비 같았었다면
① 내 오라비
8:1에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다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자가 없었을 것이라”
이 말씀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술람미 여성도가 주님의 신부로서 주님을 향하여 나의 신랑 혹은 나의 사랑하는 자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오라비라는 대명사를 쓴 점입니다.
오라비라는 말은 동복형제라는 뜻입니다. 형제라는 것은 한 몸, 한 피 받은 골육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남녀의 연인적 관계나 부부관계 보다도 더 깊습니다.
다시 말해서, 형제는 생명의 본질을 나누어 가진 사이로써 영원히 서로가 저버릴 수 없는 사이인 것입니다. 성적관계로 맺어진 부부는 사랑이 식어질 때 서로 나누어지며 남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잠재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는 서로가 결코 남이 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차원에서 뛰어넘어 형제의 관계로 승화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와같은 관계를 몇 군데 말씀하고 있는 것을 묵상해 봅니다.
히1:6에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때에”
이 말씀에는 그리스도를 맏아들이라고 하였으며
롬8:19에는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였으며
히2:11~12에는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이 성구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맏형으로서 고난을 통하여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사 그의 형제로 삼아 주시었습니다.
한 가지 신학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것은 주님과 성도가 한 형제가 되었다고 해서 범실론적인 사상은 있을 수 없습니다. 즉, 주님은 나, 나는 주님이라고 할때 동성, 동질적인 것으로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주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이며 구속자이신 것입니다. 성도는 피조물이었으며, 타락된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성도가 일체감을 이룬다는 것은 동질로서 일체가 아니고 이질적인 상태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신비스러운 것이며 피조물로서는 도무지 그 영광스러움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성도에게 있어서의 영화요, 구원이요, 영생인 것입니다.
②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 맞추어도
유대풍속에 남남끼리의 남녀는 말할것도 없고 심지어 부부간이라도 공중석상에서 입 맞추는 것은 저속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나 자매끼리 입 맞추는 것은 허용되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요셉이 애굽에서 형제들을 만났을 때 서로가 입을 맞추고 회포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창45:15).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형제가 격이 없이 형제애를 나누는 예절이기도 합니다.
시133:1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려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신령한 뜻으로 성도가 밖에서 주님을 만나 입을 맞추기를 원한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이점에 대해서 세가지로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 구약시대의 성도들의 예언적인 소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누구나 할것없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은 죽음을 당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뵈옵고 싶다고 하는 모세를 향해 나를 보는 자는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출33:20)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다가 “화있을진저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사6:5)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외가 없었습니다.
특히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계명을 받을 때 하나님의 강림하시는 광경을 보면 산은 마치 화산이 터진양 불꽃이 타오르고 뇌성소리가 들려오며 요란한 나팔소리와 지축이 흔들리는 것과 같은 광음이 들려왔던 것입니다. 모두들 이 광경을 보고 벌벌 떨었던 것입니다(출19:1~25). 이와같이 두려운 하나님이 아니고 다정한 하나님, 인간적인 하나님을 소망했던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인간성을 입으시므로 죄인들과 교제함에 있어서 담대하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엡3:12에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렇게 되는 때는 성도들이 주님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다고 하였습니다(히2:11). 그 소원대로 과연 주님은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였습니다. 그는 오셔서 각양의 인간적인 모습으로 우리의 형제와 같이 살아주셨던 것입니다.
병자에게는 의사로써, 종들에게는 종의 모습으로, 죄인에게는 친구로써, 잃어버린 양에게는 선량한 목자와 같이, 길을 잃은 자에게는 생명의 빛으로써, 주리고 헐벗은 자에게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자선가로써, 도적맞은 자에게는 선량한 사마리아 사람같이 나타나셔서 면면이 필요한 은혜를 주시고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둘째, 신약시대의 성도가 내세에 대하여 가지는 소원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주님과 영교함에 있어서는 무언가 완전치 못한 교제를 탄식하면서 내세에서야 말로 완전한 교제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소망하는 것입니다.
중생하고 의롭게 되고 성화의 단계에서 영화의 일부를 맛보았어도 주님과 성도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타락된 성품입니다. 중생할 때 죄의 본질은 파괴되었다 할지라도 그 잔제는 남아있어 때로는 잠복하고, 때로는 떠들고 일어나서 주님과 완전한 연합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롬7:23에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것을 보는 도다”
이 말씀 중에 다른 법은 죄의 법이요, 정욕의 법입니다. 그것은 죽을 때에 성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는 한 주님과 완전한 연합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부분적이나마 완전성의 맛을 보았으므로 모든 인간적인 부패성이 없어져버린 상태에서 주와 연합되기를 원합니다.
요일3:2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 어떻게 될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같은 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것을 인함이니”
이 말씀과 같이 주님과 교제하는데 꺼리끼는 장벽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는 천국에서만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주님에게 충분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해 안타깝기가 이를때가 없음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거룩한 간증입니다.
셋째, 성도가 이 땅위에 살아가는 동안 주님과 갖는 교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밖에서 입 맞춘다는 것은 불신사회에서 마치 주님과 입을 맞추는 것같이 기도하며 감사하며 전도하며 묵상할지라도 감히 모욕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형제라는 말의 뜻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는 한 피받아 한 몸이 된것으로 둘이지만 하나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좋은 성도를 보면 불신자들은 ‘그 사람 보니 예수를 믿고 싶은 감동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후3:2~3에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낸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것이며 또 돌비에 쓴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것이라”
이 말씀에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자신과 같은 신앙과 행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대통령이 남북전쟁을 하고 있는 중에 노예를 자유인이 되게 하는 선언서를 발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때 상황으로 봐서 그 선언서에 서명을 하고 공포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하고 노예 선언문에 서명을 하고 발표할 때 그 당대의 시인이요, 상원의원이었던 사무(Samou)는 시적인 표현으로 이와같이 칭송한바 있습니다.
“옛날에 갈릴리 호수가에 예수가 걸어가시더니 여기 백악관 앞에 한 작은 예수가 걸어가는구나”
신앙이 성숙한 성도는 작은 예수입니다. 그가 공적으로 예수님과 입 맞추는 행위와 같은 신앙고백을 할지라도 모욕할자가 없고 차라리 칭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5:14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2. 내가 너를 이끌어
2절에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집에 들리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
① 내가 너를 이끌어
이 말씀에서 주목되는 것은 성도가 주님을 이끌어 모시는 장면입니다.
1:4에는 성도가 주님을 향해서 이끌어 달라고 하였는데 주객이 전도 되다시피 하여 성도가 주님을 이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 이끈다는 말은 그만큼 주님과 형제같이 친근함을 가리키며 또한 주님역시 자기를 낮추셔서(빌2:7) 우리에게 자신을 제공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마20:28).
그러나 그 뜻은 좀더 깊어서 성도가 주님과 교제하는데 장애물이 되는 내적인 죄의 부패성에 대해 탄식하고 있습니다(롬7:24). 이 탄식을 해소할 수 있는 분은 주님밖에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주님만 의지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모시고 어머니 방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어머니 방은 3:4에서 해석한바가 있습니다. 좀더 첨가해서 말씀한다면 어머니 방은 참된 교회요, 위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갈4:26). 주님을 모시고 왜 어머니 방으로 들어간다고 하였을까?
하나님은 교회를 영혼의 모체로 삼았으며, 또한 진리의 기둥과 터로 삼으셨습니다(딤전3:15). 이 땅위에서 미완성된 성도는 교회를 떠나서는 자기완성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곳에서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고 또한 모든 선한일을 행할 수 있는 교훈과 진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시114:1)고 하듯이 교만한 자가 교회를 떠나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인 것입니다.
② 교훈을 받으리라
위에서 말씀해 온 것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다시금 되새긴다면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머니 방에서 성도를 진리로 가르치고 깨닫게 하는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의 종들을 개체로 삼아서 성도를 가르치고 인도하는 줄로 믿습니다.
엡2:17에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강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헨리포드가 본문 해석한 것에 의하면 ‘또 오셔서’ 라는 말씀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입술을 당신것으로 사용하시고 영으로 임재하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신비적인 사실중에 핵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다만 대변자로서 진리를 전하는 것뿐이며, 그 진리가 생동성있게 역사하도록 하는 것은 주님 자신이 바로 이 자리에 오셔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떡으로 비유해서 성도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어 줄 자격이 없습니다. 다 손이 깨끗지 않고 마음이 정결치 않고 입술이 거짓됩니다. 그들이 비록 최선의 성직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분배해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할 수 있습니다(눅24:30).
그러나 감사하옵게도 주님은 주의 사역자들은 성별하셔서 그들을 통해서 생명과 평강의 진리를 주시고(말2:6~7), 영혼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십니다(벧전2:2)
③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겠고
4:3과 6:3에 “너울속에 너희뺨은 석류 한조각 같구나” 하는 말씀에 대해 말씀한 바가 있습니다. 한번 더 되새긴다면 뺨이 석류 한조각 같다고 할때에는 지난날에 지은죄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회하는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석류속은 붉고도 희다라는 것은 주님을 향한 성도의 중심이 아름답다고 표현한 말씀인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한다면 성도의 중심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덕으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의미합니다(살전1:3).
이제 한 조각 같은 석류를 찢어서 즙을 얻어 주님께 드린다는 것은 자기를 잊은듯한 사랑의 헌신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교훈을 받는중에 황홀경에 빠져 들어가서 석류즙을 주님께 한 사례로써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는 자기를 잊은 사랑의 헌신이 아니겠습니까?
눅7장에 나오는 한 여인이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아 주님발치에 가까이 가서 눈물로써 그 발을 적시고 그 머리채를 풀어 발을 닦고 기름을 붓는것과 같습니다(눅7:38).
여기서 대해서 키에르케고르는, “아! 행복한 자기자신을 잊어 버린듯한 눈물이여!
만일 울고 있는 자신이 그것까지도 기억할 수 없으리만큼 울고 있었다면 그야말로 그녀는 참으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사실은 사랑하는 것이 많다고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이와같이 자기를 완전히 비워버리고 감격과 감사에 넘치는 헌신을 한다는 것은 달콤한 석류즙을 주님께 바쳐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3. 너는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3절에 “너는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았으리라”
이 말씀은 2:6에서 말씀을 드려 은혜 받은바 있으나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반복해 말씀을 드립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해석과 교리적인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① 일반적인 해석
이는 성도로 악에 빠지지 않고 불행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시37:24에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려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 손으로 붙드시니라”
시63:8에는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리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이렇게 성도들을 세밀하고도 능력있게 붙드시고 보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시41:3에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이 말씀은 주의 능력의 손은 성도가 병이 들었을 때 신유의 능력으로 병을 고쳐 주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139:5에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루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나아가서 우리의 구원도 틀림없이 완성하실 것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요10:28~29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손은 보호의 손이요, 구원의 손이요 병을 고치시는 신유의 손이요 나아가서 궁극적 구원의 손이기도 하십니다.
② 교리적인 해석
예수님의 왼손은 인성을 의미하고 오른손은 신성을 의미합니다.
익나시우스(Ignatius)라는 교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구원의 완성에 대해서 너무 괴로워 어느 해변가에 거닐고 있을 때 한 노인을 만났습니다. 그 노인은 익나시우스의 괴로움을 꾀뚫어 보는듯이 이와 비슷한 시한수를 읊고 있었습니다.
“나는 두렵지 않네
내 비록 지옥갈 죄가 있을지라도
그의 인성의 손이 나를 붙드셔서
용서의 길을 걷게 하시며
그의 신성의 손이 나를 붙드셔서
의롭게 하사 천국가게 하시네
나는 두렵지 않네
그의 손이 나를 붙드시고 계시네”
인성의 손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4. 성도의 잠
4절에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
본문과 같은 말씀은 2:7에 기록되어 있어서 이미 해석한 바가 있습니다. 좀더 부연해서 말씀드리고져 합니다.
성경에서 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죽음의 잠입니다.
다윗은 주께 기원하기를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데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시13:3)라 하였습니다.
어떤 학자는 사망의 잠의 원인을 두 가지로 분석해 봤는데 아무리 깨어 있는 성도라도 원인 모르게 사망의 잠에 빠져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안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는 신앙생활중 모종의 죄를 범하고 신속히 회개하지 못한 심령은 죽음의 잠을 잘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잠에서 깨어나는 비결은 솔직하고 정직한 회개가 따라야 할 줄 믿습니다.
엡5:14에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잠자다가 범죄하였고(삼하11:2) 나단의 책망을 받고 죄악의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의 깨어나는 과정에는 한 주간동안 금식기도가 있었으며(상하12:18) 철저한 참회가 있었습니다(시50:1~90). 참으로 두려운 것은 범죄한 이후 끝까지 고집하다가 다시 깨어날 수 없는 사망의 잠을 잘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상의 해석과는 달리 좋은 뜻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으셔서 죄를 속하심을 가르치고 있으며 부활하셔서 우리를 의롭다 하셔서 구원을 얻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또 신성의 손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계1:17에 요한이 밧모섬에서 영광의 주를 보다가 죽은 사람같이 되었을 때 주님은 다가오셔서 오른손으로 그에게 얹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자라.”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참사람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죄와 허물에서 죽은 우리를 살리시고 영생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신33:27에 “영원하신 팔이 너희 아래 있도다”
이상의 해석에 의해서 양손은 인성과 신성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구원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성도가 주의 계명을 지키려고 아무리 노력하여도 지킬 도리가 없고 점점 죄인이 되어서 지옥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인성과 신성의 손으로 붙들어 구원하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2:6절의 말씀을 성숙기에 다달은 성도가 다시금 반복하는 것은 신앙의 완성은 어디까지나 주안에 있는 것이지 주 밖에는 없음을 고백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는 겸손한 성도의 고백이며 자세인 것입니다.
약4:6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느 니라”
본문은 후자의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잠은 주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시127:2). 수면은 평화의 표상입니다. 그러한 내용을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①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음으로 얻어진 양심의 평안입니다.
성도가 거룩해지면 질수록 마음의 부패성으로 인해서 온전한 평안을 스스로 누리지 못하지만 주님의 피의 은총으로 사죄의 평안을 얻게 됩니다.
② 모든 것을 주께 맡김으로 얻어진 신뢰의 평안입니다.
시55:22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벧전5:7에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려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요14:27에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것은 세상에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와같이 주께 맡긴 상태에서 성도는 평안을 얻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습니다.
③ 죽음의 평안입니다.
시30:5에 “그 노여움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성도가 죽음을 맞이할 때 평안히 죽을 수 있는 것을 잠이라고 합니다.
말퀴스(Marquis)라는 순교자는 사형집행을 당하는 아침에 깊은 잠을 잤으며,
리들레(Ridley)라는 순교자는 순교하기 전날밤에 위로하려고 찾아온 동생을 돌려보내고 자신은 평안히 잠을 잤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살전4:13에 “형제들아 자는 것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없는 다른 이와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성도는 주의 품에 평안의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정신병리학자인 융박사는 현대인들의 불면증에 대해 “현대인들의 정신이상은 그 조상의 신앙을 버린데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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