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감기도 잡고 숙취도 해소해
글 박태균 중앙일보 식품의약전문기자

배는 과육보다 껍질에 웰빙 성분들이 집중돼 있다.
배나무는 장수를 상징한다. 수령(樹齡)이 500여 년에 이르기 때문이다. 특히 돌배는 약(藥)배로 통한다. 이처럼 배는 노화 억제를 돕는 과일로 꼽힌다. 노화의 주범인 유해(활성)산소를 없애는 폴리페놀, 플라보노이드 등 항산화 성분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에 풍부한 펙틴(수용성 식이섬유의 일종)은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준다. 식이섬유는 또 변비를 예방하고 대장에서 음식의 탄 부위에 생긴 발암물질과 결합한 뒤 함께 몸 밖으로 빠져나간다.
배는 겨울나기도 돕는다. 민간에선 기침, 가래 등 기관지 질환이 겨울에 심해지는 사람에게 배를 깎아 제공했다. 술자리가 잦아지는 연말에 배는 숙취 해소용 과일로도 그만이다. 배에 함유된 아미노산의 일종인 아스파라긴산은 주독(酒毒)을 풀어준다. 과음한 사람에게 배, 아스파라거스, 콩나물국을 추천하는 것은 이런 식품에 아스파라긴산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해마다 배를 1인당 6㎏가량 섭취한다. 예부터 배를 희망, 건강, 장수, 귀중한 것을 상징하는 과일로 여겼다. ‘배 썩은 것은 딸 주고 밤 썩은 것은 며느리 준다’는 속담도 있다. 비록 썩었더라도 밤보다는 배가 낫다는 의미다.
영양적으론 탄수화물, 식이섬유, 칼륨, 아스파라긴산이 풍부하다. 배를 먹은 뒤 금세 힘이 솟는 것은 과당, 자당(설탕), 포도당, 솔비톨 등 단순당(糖)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이 중 솔비톨은 단맛이 설탕의 절반 정도지만 혈당을 서서히 높이기 때문에 당뇨병 환자 음식의 감미료로 유용하다.
게다가 배의 당지수(GI)는 32로 바나나(55), 포도(50), 사과(36)보다 낮다. 당지수가 낮다는 것은 해당 식품을 섭취한 뒤 혈당이 급격히 올라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당뇨병 환자의 갈증 해소용 과일로 배를 추천하는 것은 이래서다.
배의 식이섬유는 대부분 석세포(石細胞, Stone Cell)이며 과육의 1, 2%를 차지한다. 칼륨 함량도 신고배의 경우 100g당 171㎎에 달한다. 사과 100g당 칼륨 함량(후지 95㎎, 아오리 99㎎, 홍옥 39㎎)보다 훨씬 많다. 칼륨은 체내에 쌓인 여분의 나트륨(고혈압 유발)을 몸 밖으로 배출시켜 혈압을 낮춰준다.
사과, 포도와 마찬가지로 배도 과육보다 껍질에 웰빙 성분들이 집중돼 있다. 배 껍질에 든 건강 성분의 양이 배 4개의 과육에 함유된 성분의 양과 비슷하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황금배(430g짜리)를 껍질째 먹을 경우 항산화 성분인 플라보노이드의 양이 21.5㎎인데 깎아서 먹으면 3.3㎎으로 급감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황금배, 한아름, 스위트스킨, 조이스킨 등이 껍질째 먹을 수 있도록 개량된 품종이다.
배는 맛이 달고 시원하다. 사과보다 신맛은 적다. 신맛이 나는 유기산의 함량이 배 100g당 0.2g에 불과해서다. 게다가 즙이 많고 과육 안에 단단한 석세포가 들어 있어 씹을 때 과즙이 많이 나오는 것도 단맛을 높여준다.
배는 알칼리성 식품이다. 산성 식품인 쇠고기 등 육류와 ‘찰떡궁합’이다. 육회, 불고기, 갈비찜 옆에 배를 썰어 두면 세 가지 면에서 이득이다. 고기의 육질이 부드러워진다. 단백질 분해효소가 배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고기의 탄 부위에 생긴 벤조피렌 등 각종 발암물질의 독성을 일부 상쇄시킨다. 고기를 먹은 뒤 배를 디저트로 먹으면 소화가 잘된다.
충치 예방도 도와
나이 들어서도 치아가 멀쩡하다면 오복(五福)의 하나이며 장수의 비결이다. 배를 즐겨 먹으면 충치가 생기지 않아 오래도록 건치(健齒)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충치 예방을 돕는 것은 석세포와 솔비톨이다. 석세포는 배를 먹을 때 오톨도톨하게 씹히는 작은 알갱이로 구강을 청결하게 한다. 솔비톨은 당분의 일종이나 자일리톨처럼 충치균의 먹이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일거양득(一擧兩得)이란 의미를 지닌 ‘배 먹고 이 닦기’란 속담의 과학적 근거다.
배는 감기나 기관지염의 예방과 치료에도 유용하다. 감기, 기관지염에 걸려 기침이 잦다면 배의 속을 긁어내고 여기에 꿀을 채워넣은 뒤 천으로 싸서 푹 삶아 먹는 것이 좋다. 목소리를 트이게 하는 데는 강판에 간 배즙이 유용하다. 천식, 아토피, 비염 등 알레르기 질환 환자도 배는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배를 먹은 뒤 알레르기가 생긴 사례는 찾기 힘들다.
배는 후식용 과일로 인기가 높다. 말린 배는 떡, 송편, 백설기, 배 조청은 한과의 재료로 사용된다. 조선의 3대 명주 중 하나인 이강주엔 전통 소주, 생강과 함께 배가 들어간다. 통후추를 박은 배에 생강 물을 넣고 설탕과 함께 끓인 배숙도 우리 전통 음료다. 중국인들은 배를 탕 요리에도 넣는다. 냉장고의 채소 칸이 배를 보관하기 알맞은 장소다.
박태균 중앙일보 식품의약전문기자
국내 유일의 식품의약전문기자. 중앙대학교 의약식품대학원 겸임교수, 서울대학교 초빙교수로도 일하고 있다. 대통령 표창을 비롯해 한국 기자상, 올해의 의과학 기자상, 한국천식알레르기협회 언론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음식과 건강』, 『100% 신종플루 예방법』, 『아이의 완벽한 식생활』 등이 있다.
[2014-02-17]
<출처: 미래에셋은퇴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