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晉州) 탐방(2023. 3. 21 예정지)
1. 진주성(晉州城) 진주성(晉州城)은 역사와 문화가 집약된 진주의 성지(聖地)다. 원래 토성(土城)이던 진주성을 고려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석성(石城)으로 축조하였고, 조선 선조 24년(1591) 7월, 경상감사 김 수(金睟:1537∼1615)는 진주성 밖을 경계하기 위해 외성(外城)을 쌓았다고 한다. 이걸봐서도 당시의 진주는 군사적 전략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선조 25년(1592)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여 명의 왜군을 크게 물리친 '진주성 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한산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 중 하나로 유명하다. 그러나 다음 해인 계사년(1593) 6월에 전년의 패배를 설욕하려고 10만여 명의 왜군이 다시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7만 명의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이 전투는 치열한 백병전으로 김해부사 이종인이 전사하고,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 충청도병마절도사 황진 등 여러 장군들이 전사하거나 남강에 투신하였다. 이때, 논개(論介)는 적장을 의암(義巖)으로 유혹하여 남강(南江)에 함께 몸을 던져 충절한 곳이기도 하다. 동 37년(1604)에는 합포(合浦 : 현 마산)의 우병영(右兵營)을 진주성으로 옮겨 온 이래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고종 32년(1895)에는 진주관찰부, 이듬해인 건양(建陽 : 고종 황제의 연호) 원년(1896)에는 경상남도 관찰사의 감영(監營)이 이곳으로 옮겨온 후, 1925년까지는 30여 년간 경상남도의 도청이었던 곳이기도 하다.
진주성 촉석루
진주성에는 우리나라 3대 누각(진주의 촉석루, 남원의 광한루, 밀양의 영남루)의 하나인 남강(南江)의 바위 벼랑 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은 영남(嶺南) 제일의 아름다운 촉석루(矗石樓)와 임진왜란 때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패전하여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인 의기사(義妓祠),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충혼들을 위무(慰撫)하기 위해 세운 임진대첩계사순의단(壬辰大捷癸巳殉義壇), 진주성의 정문(正門)인 공북문(拱北門), 조선 시대의 경상남도 관찰사가 업무를 처리하던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가 있다.
진주 영남포정사
또 조선 시대의 각종 비석 30여 기를 한 곳으로 모아 세워둔 비석군(碑石群),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은열공(殷烈公) 정신열(鄭臣烈)과 고려 말 물레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따뜻한 무명옷을 입게 한 문충공(文忠公) 정천익(鄭天益)의 위패를 봉안한 청계서원(淸溪書院)과 고려 때 거란의 침입에 끝까지 항거하다 순절한 하공진(河拱辰 : 진주하씨의 시조) 장군의 위패를 모신 경절사(擎節祠), 진주성 내 북쪽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북쪽 군사를 지휘하던 북장대(北將臺),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國立晋州博物館)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국립진주박물관
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무공 김시민 장군 등 39명의 신위를 모신 사당인 창렬사(彰烈司), 고려 시대 승군이 왜적 침입에 대항하며 머문 사찰인 호국사(護國寺), 장군이 올라가 군사를 지휘하던 서쪽의 서장대(西將臺), 논개가 왜병 장수를 끌어안고 투신한 것으로 전해오는 의암(義巖) 등 진주시의 많은 문화유적이 경내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다.
남강의 의암
특히, 촉석루는 2012년에서 선정한 한국의 50명소로 건축미와 풍광의 아름다움을 고루 갖춘 누각이다. 촉석루에서 남강과 함께 내려다보이는 경치도 아름답지만, 강 건너편 망경동 강변에서 바라보는 야경 또한 아름다워 진주성을 찾는 시민과 관광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진주성 촉석문
2. 진주 강주연못 진주(晉州)는 신라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강주(康州)라고 불렸다. 특히 지리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군사를 주둔시켰는데, 지금의 강주연못이 바로 군사를 주둔한 강주 진영(鎭營)이 설치되었던 자리라고 한다. 진양지(晋陽誌)에 의하면 하륜(河崙:1347~ 1416)은 그의 촉석성 성문기(矗石城 城門記)에서 "기미년(1379) 가을에 배극렴(1355~ 1392)이 강주진장(康州鎭蔣)으로 와 있으면서 ‘촉석성'이 흙으로 된 것을 돌로 쌓게 하였더니 공사가 반도 이루지 못하고 왜구에게 함락되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곳이 고려 말 우왕 5년(1379년)에 배극렴이 진을 치고 있던 군영 터라는 것은 분명하며, 이곳의 석축이 오늘날의 진주성(晋州城)을 있게 한 근원지이다.
진주 강주연못
진주 강주연못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못 둑에 5~6백 년 정도의 고목이 우거져 있고, 이곳의 이팝나무는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전하는 것 등으로 보아 이 강주연못 일대는 진주의 역사상 중요한 지역으로 평가되고 있다. 봇둑에는 오래된 고목이 무성하고 여름에는 연꽃이 만발하여 경치가 좋아 연중 관람객과 학생들의 소풍 장소로도 많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2004년 생태공원의 조성으로 환경과 교육, 휴식이 어우러진 장소로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휴식 공간의 강주연못
3. 진주 인사동 골동품 거리 2013년부터 협동조합 기본법이 시행되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하나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 끼리 조합을 만들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그중 진주 전통고미술보존협동조합이 진주 골동품 경매장을 운영하면서 과거 90년대 전국에서 명성을 크게 얻었던 진주의 골동품 시장이 부활을 꿈꾸고 있다. 골동품 경매장은 인사동 골동품 거리의 상인들이 진주의 골동품 시장을 부활시키기 위해 수년간 고민하다 협동조합 기본법이 제정되면서 뜻을 모으고 있다.
진주 인사동은 골동품 조합이 설립되기 3년 전에 이미 고미술보존회가 조직되었다고 한다. 당시는 조합원이 40여 명 정도였으나 중간에 그만두시는 이도 있어 현재는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분들이 20여 명 정도가 조합을 이끌어가고 있으며, 인사동 골동품 거리의 상인이 대부분이고, 조합을 통해 이쪽 업계의 발전을 위해 뭔가를 해보려는 의지가 강하다고 한다. 골동품 경매는 매주 화요일 오후 1시부터 진행되며, 경매장은 50여 명 이상의 고미술품·골동품 전문가와 일반 시민들이 경매장을 찾아올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진주 골동품 경매장을 탄생시킨 주역인 전통고미술보존협동조합은 전국의 골동품 상인과 일반 시민들이 많은 관심을 두고 있어 진주 골동품 경매장의 장래는 아주 밝다며 많은 사람이 경매장을 찾아와 즐길 수 있는 아이템은 구상하고 있으니, 부담 없이 찾아주길 바란다고 한다. 현재의 인사동 거리는 예전보다 다소 위축되어 가게 문을 열고 있는 곳도 몇 군데 되지 않지만 조합이 설립되고 경매장을 운영하면서 변화가 오기 시작하였다. 다만 확실히 눈에 띄는 변화는 전국 각지에서 문의 전화가 오고 있다. 또 조합에 동참하고 싶다는 다른 지역의 골동품 전문가들의 문의도 있어 전망이 아주 밝다고 한다. 이곳 진주 외에도 골동품 경매장이 서울, 부산, 대구, 경주, 마산 등에 있다.
진주 인사동 골동품 거리
4. 지수 승산 부자 한옥마을 한국의 부자들을 배출한 마을은 어떤 특별한 기운을 안고 있는 걸까? 지수 승산 한옥마을은 풍수지리로 보면 마을 뒤에 산이 있고 앞으로 물이 흐르는 영락없는 배산임수(臨山背水)의 지형으로 방어산을 배경으로 남강이 휘감아 흐른다. 하지만 전국에 배산임수형이 많고도 많은데, 유독 승산마을에만 부자가 번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만석꾼도 3대를 넘기지 못한다는 옛말이 승산마을만큼은 해당하지 않는듯하다. 대대로 아무리 부를 누려왔어도 시대의 흐름을 좇아가지 못하면 부자로 살아남기 어려울 터인데도 승산마을이 부자마을을 이루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형제애와 가족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600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진주시 지수면 승산 부자마을은 김해 허씨가 제일 먼저 세거한 이래, 300년 전부터 능성 구씨가 이주하여 삶의 터전을 일구어 온 유서 깊은 곳이다. 승산 부자마을 한가운데 있던 지수초등학교는 1921년 5월 9일 개교해 100년의 오랜 역사와 함께 많은 기업가를 배출하기로 유명한 학교로 2009년 옛 송정초등학교와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현재 지수초등학교는 지수면 압사리로 이전하였고, 현 위치는 옛 지수초등학교가 있던 자리다.
지수 승산 부자 한옥마을 진주의 지수(智水)는 의령과 함안이 인접한 곳으로 비록 나이는 차이가 있으나, 이곳 출신인 구인회(LG 창업주)를 비롯하여 의령 출신 이병철(삼성 창업주), 함안 출신 조홍제(효성 창업주)가 같이 지수초등학교를 다녔으며, 교정에는 이 세 사람이 함께 심었다고 전하는 ’부자 소나무‘가 있다. 그리고 이 셋 창업주 이외에도 일일이 이름을 열거하기도 벅찬 대기업 회장들의 생가가 12채나 들어앉아 있다.
지수초등학교 교정의 부자 소나무
마을 주민은 “1980년대만 해도 대한민국 100대 부자 중 30명이 이곳 출신이었다.”라며 “예전에는자녀의 성공을 기원하는 학부모들이 매년 입시를 앞두고 찾았으나, 최근 들어 지수면이 ‘기업가 정신의 수도’가 되면서 기업인과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부쩍 늘었다.”라고 말했다. 지수초등학교의 주요 출신 기업인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구인회 : (1회 졸업생) LG 창업자 조홍제 : (1회 졸업생) 효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 (1회 졸업생) 삼성창업자(3학년 때 7개월간 재학함) 구철회 : (3회 졸업생) LIG 그룹창업주 허정구 : (5회 졸업생) 삼성 물산 초대 사장, 삼양통상 명예회장 구태회 : (12회 졸업생) LS 전선 명예회장 허준구 : (13회 졸업생) GS건 설 명예회장 구자경 : (14회 졸업생) LG 명예회장 구평회 : (15회 졸업생) E1 명예회장 구두희 : (17회 졸업생) 예스코 명예회장 허신구 : (18회 졸업생) GS 리테일 명예회장 허남각 : (26회 졸업생) 삼양통상 회장 구자정 : (28회 졸업생) 전 보람은행장 허동수 : (30회 졸업생) GS 칼텍스 명예회장 허경연 : (38회 졸업생) 국가혁명당 명예대표.
5. 진주 용강서당(龍江書堂) 용강서당은 1902년에 지었으며,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 김우옹(1540∼1603) 선생은 성주 대가면 출신으로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에게 학문을 배워 문장과 도학으로 명망이 높았다. 조선 명종과 선조 양대에 이조판서와 대제학, 경영관을 지냈으며, 시호(諡號) 문정공(文貞公)이다. 20권의 문집과 속강목(續綱目) 36권을 펴내기도 하였으며, 속강목은 동양사에 대한 저술로 후세 사학도에게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동강은 남명 조식 선생의 외손서(外孫壻)이며, 홍의 장군 곽재우의 손위 동서이기 하다. 이곳 용강서당에 위패를 모시게 된 연유를 알고자 여러 자료를 검색했으나 아직 알지 못해 아쉬움이 많았다. 용강서당의 전체 배치는 크게 강학공간(講學空間 : 학문을 가르치는 장소), 사당(祠堂 : 제사 지내는 장소), 전각(殿閣 : 판각 보관 장소)의 세 부분으로 구획되어 있다. 이 중 강학공간이 가장 앞에 놓이고, 그 뒤로 사당과 전각이 나란히 옆으로 배치되어 있어 서당이라기보다는 서원이다. 용강서당은 1922년에 사림의 성금으로 강당과 장경각이 창건되고, 연이어 동재와 사우를 건립해 동강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여 향례를 올리고 있다. 1988년 사우에 신주를 봉안하여 서당에서 서원의 규모를 이미 갖추어서 자연스레 서원 격상의 의견을 수렴하고자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도내 유림의 만장일치로 '용강서원'으로 승격하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이번 기회에 서당(書堂), 서원(書院), 향교(鄕校), 성균관(成均館)의 차이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당은 조선 시대에 초등교육을 맡아 했던 사립학교로, 오늘날의 초등학교와 비슷하지만 규모는 훨씬 작았고, 거의 마을 단위로 유학에 바탕을 둔 한문교육이 이루어졌다. 서원과 향교는 선현의 위패를 모신 제향공간(祭享空間)과 교육을 담당하는 강학공간(講學空間)이 있으며, 각각 중등교육을 담당하는 지방교육기관이다. 그러나 서원의 설립 주체는 사림의 양반이 세운 사학(私學)이고, 향교의 설립 주체는 조정에서 지방교육을 위해 세운 관학(官學)이다. 또, 서원은 우리나라의 선현에 대해서만 위패를 모시고 배향을 하지만, 향교는 공자(孔子)를 위시하여 중국의 성현과 우리나라 선현을 함께 배향하는 점이 크게 다르다. 그리고 성균관은 전국에 하나뿐인 최고의 국립대학교육기관으로 중국의 공자와 성현, 우리나라 18선현을 함께 모신 문묘(文廟 : 공자를 위패를 모신 사당)가 있다.
진주 용강서당
6. LG ‘인화경영’의 발원지 모춘당(慕春堂) 일찍이 승산마을은 허씨 문중이 부(富)를 일구어 융성할 때는 기와집만도 200여 채에 이르렀다고 하니, 가히 마을의 세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이런 승산마을에 능성 구(丘)씨가 뿌리를 내린 것은 1700년경이었다. 학자이자 행정가로 명망이 높았던 구씨 10대조 예곡공(禮谷公)이 상주 현감으로 있을 당시 이 고장의 만석꾼인 허 병사(許 兵使)가 청혼하여 첫 사돈의 연(緣)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예곡공이 한양으로 발령을 받아 올라가게 되어도 허 병사의 사위인 11대조 성재공(省齋公)은 남아서 부인 허씨의 친정 마을에 기거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 후 김해 허씨와는 여러 차례 혼인이 거듭되면서 양가의 연을 더욱 돈독히 하였다. 이리하여 하동(下洞)에는 허씨가, 상동(上洞)에는 구씨가 중심이 되어 살면서 문중이 번성하였다. 특히 하동에는 재(財)가 성해 부자가 많았고, 상동에는 학(學)이 세어 벼슬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허씨 열 사람이 구씨네 한 사람을 못 당한다.”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상동의 구씨 문중은 청렴결백하며 벼슬한 이가 많았고, 하동에는 벼슬보다 재(財)를 크게 일군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성재공 이후 문중이 자리를 잡고 번성하는 데에는 구자경 회장의 증조부 만회공(구연호)이 두드러졌다. 고종 때 홍문관 교리(정 5품)를 하였다. 홍문관 교리는 옥당(玉堂)이라 불리었고, 과거에 급제한 선비들이 가장 탐내는 자리였다. 그러나 낙향하신 후 '창강정사'에 은거하며 일체의 외출을 삼가하였고, 일가의 문상을 가거나 급히 외출을 할 때는 늘 왕갓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승산마을 밖을 나간 일은 딱 한 번 있었는데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한 손자 구인회 회장의 초청을 받아들여 진주로 나가셨을 뿐이라고 한다. 승산마을에는 집안의 가풍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여럿 곳에 남아 있다. 남촌에는 선비들의 교류장이자 학문의 도장으로 지은 창강재(滄江齋)와 후손들이 공부하던 양정재(養正齋)가 한 울안에 있다. 양정재는 성재공이 사위로 맞을 때 장인인 허 병사가 지어준 살림집이고, 또 증조부(만회공)를 추모하는 기념관으로 방산정(芳山亭)이 있고, 조부(춘강공 구재서)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모춘당(慕春堂)이 있어 고향을 찾을 때마다 옷깃을 여미게 한다고 한다.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 장남 구자경 회장, 손자 구본무 회장의 생가
방산정은 구자경 회장의 조부께서 선친과 함께 4칸 크기로 지었던 것을 터가 좁아 동향으로 옮겨지었고, 모춘당은 조부의 추모당으로 자녀들의 교육과 가풍을 익히는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했으나, 6ㆍ25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연암(蓮庵 : 구인회 회장의 아호)의 장남인 구자경 회장이 다시 지었다고 한다.
진주 모춘당(慕春堂)
모춘당을 지은 후에는 집안에 새 며느리나 사위를 맞으면 1년에 한 번씩 그들과 함께 고향을 방문하도록 하였다. 이 행사는 주로 안사람이 주도하는데, 조상을 기리는 곳에서 함께 자며 가훈(家訓)을 새기고 가풍(家風)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춘당의 눈에 가장 잘 뜨이는 곳에 구자경 회장의 증조부이신 만회공이 내리신 가훈이 걸려있다. - 선비가 세상을 살아감은 도를 좋아하고 분수를 지킴이다. -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공경함으로 몸을 닦아라. - 어버이 섬김에는 효성껏 하고 임금을 섬김에는 충성을 다한다. - 덕 좋아함을 색 좋아하듯 하고 악을 보면 끓는 물 보듯 하라. - 선조에게 제사하는 날에는 반드시 엄숙하고 조심하여라. - 나의 정성과 공경을 다 하면 혼령이 앙양하게 계신 듯하리. - 형제간과 종족 사이에는 서로 좋아할 뿐 따지지 마라. - 작은 분을 참지 못하면 마침내 어긋나게 된다. - 자손이 착하지 못하면 조상을 욕되게 하기 쉽다. - 선대 훈계를 삼가 이어서 바르게 할 뿐 변하지 말라. - 아득하게 어두운 세상을 만나면 자취를 거두고 빛을 숨겨라. - 두려워해서 스스로 조심함이 깊은 못을 만난 듯 엷은 얼음을 밟듯 하라.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할 만큼 엄격하지만 이런 덕목들이 가통(家統)을 지켜 온 울타리라고 생각된다. 증조부께서는 가훈을 통해 주로 수신의 자세를 가르치셨다. 그 중에도 신계(身計)를 으뜸으로 당부했다. 그래서 모춘당은 LG의 최고 기업문화로 자리 잡은 ‘인화경영’의 발원지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구자경 회장의 조부께서는 예의범절과 절약 정신을 강조하면서 특히 ‘주색잡기를 하지 말 것’, ‘함부로 남의 보증을 서지 말 것’, ‘민사재판 때 소송하지 말 것’ 등을 당부하셨는데 이는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라는 의미로 새기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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