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감상 소감 / 평론】
재미있고 맛있는 시를 읽는 즐거움
― 색 바랜 『서구문학』 ‘창간호’에서 발견한 반가운 문인들
― 숨어 있는 ‘보석’을 캐내는 기분으로 문학작품을 읽다
윤 승 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전 금강일보 논설위원
시가 어려워야 할 이유가 없다. 재미있고, 맛있고, 즐겁게 읽히는 시가 명시(名詩)다. 문단 경력 33년 필자가 읽은 시에 대한 소감이다. 좋은 시에 대한 나름의 정의이자 나누고 싶은 서평(書評)이다.
등잔 밑이 어두운가, 내 정보력이 부족한 탓인가. 전국 단위 또는 광역시 단위 문학단체는 잘 알고 작품으로도 참여한다. 하지만 정작 내가 사는 ‘구(區) 단위 지역 문학회’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새삼 알았다.
누리소통망[SNS]에서 우연히 ‘서구문학회’ 행사 사진을 발견했다. 잘 알고 지내는 L 수필가가 이 문학모임에 신입회원으로 가입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으면서 서재를 뒤져보았다. 과거 내가 이 문학모임에 언제까지 참여했는지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서구문학회’에서 펴낸 책이 두 권 발견됐다. 1995년 제1호(창간호)와 1996년 제2호. 책장에 보관된 두 권의 책을 살펴보니 나의 졸고 수필도 수록됐다.
▲ 책장에서 찾아낸 두 권의 『서구문학』 - 1995년 제1호(창간호)와 1996년 제2호
▲ 『서구문학』 창간호 차례 일부
그렇다면 나는 『서구문학』 창간호에 참여했던 ‘초창기 회원’이면서 어째서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을까.
아마도 일선 치안현장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현직 경찰관 시절에 여러 문학단체에 빠짐없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란 사실상 어려웠던 불가피한 사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누가 뭐래도 대전광역시 ‘서구 주민’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서구 탄방동 셋방살이를 시작으로 용문동, 변동, 내동을 거쳐 현재 도마동에 이르기까지 50여 년을 거주했으니 웬만큼 토박이 주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색 바랜 『西區文學』 창간호에서 맨 먼저 ‘창간사’와 ‘편집후기’를 다시 읽었다. 초대 회장인 박동규 시인(1928~2014)의 글이다. 교육자 출신 원로 문인의 품격이 느껴지는 명문 창간사였다.
“[前略] 사람의 삶이 있는 곳에 문화가 있고 문화의 한가운데에 문학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문화는 말에 의해서 창조전승(創造傳承) 되며 말은 문학에 의해서 갈고닦아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명리(名利)에 마음이 쏠리고 문학은 변두리로 몰리어 소외되는 것을 우리는 때때로 느끼고 있습니다. [後略]”(「창간사」 일부)
“별 것 아닌 것 같은 사람도 머리가 있어야 하고 손톱이 있어야 하고 심장이 있어야 사람이라 할 수 있듯이 볼품없는 책 한 권도 구색을 갖추어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요령부득도 있었고 근본적인 문제도 있어서 번화가 사거리에서 차가 밀리듯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한 권이 책으로 엮어지게 되었다”[後略](「편집후기」에서)
짧은 문장 한 대목에서도 선비 스타일 원로 문사의 멋스러움이 풍긴다. 박동규 회장은 당시 대전수필문학회장을 맡았던 분이어서 나와의 인연도 각별했다. 한 고장의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도 다정한 친필 편지를 보내 주었다. 작품 교류도 잦았다.
▲ 서구문학회장 박동규 시인의 친필 편지 일부
모임에 참석하면 연세가 가장 높은 문단의 어르신으로서 행사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려고 우스갯소리도 즐겼다. 인자한 할아버지 웃음소리 같은 특유의 “껄껄껄”도 일품이었다. 나는 모임에 참석하면 박동규 회장의 멋과 낭만이 깃든 말씀 한마디 듣는 것만으로도 회원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꼈다.
창간호를 찬찬히 넘겨 보니, 고인이 된 문인들이 많다. 이 책에 실린 작품 모두 인상 깊고 감동을 주지만, 그중에서 재미있게 읽은 몇 작품을 소개한다.
먼저 생시에 빛나는 문학작품을 많이 남긴 임강빈 시인(1931~2016)의 작품이다.
♧ ♧ ♧
할버지
任剛彬
할버지라 한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할아버지 네 마디가 힘든지
그렇게 부르기로 한 녀석
그래그래 편하도록 해라
귀엽고
꾸밈이 없고
그놈은 나를 좋아해
나 또한 그놈이 좋아
의기투합 살아간다
참이란 무엇인지
바르게 산다는 것
아름다움은 또 무엇인지
사랑이란 엄두도 못 낸
그런 나약한 할버지였다.
너는 꿈을 세워라.
순수하라.
건강하라.
창조하는 인간이 되어라
사랑은 클수록 좋은 것
생각 않기로 한다.
하늘에 떠 있는 한 점 구름
어느 날의 우리들의 헤어짐
작은 손을 연신 흔들며
날보고 할버지라 한다.
이 시를 30년 전에 처음 읽을 때는 몰랐다. 그저 한 노인이 손자를 귀엽게 바라보면서 일기처럼 쓴 글이려니 생각했다. 이제 시인의 나이쯤 돼 손자를 둔 할아버지가 되고 보니, 내게도 이 시가 유독 가슴 따뜻하게 스며든다.
또 한 분, 내가 좋아했던 유동삼 시인(1925~2021)의 시조도 그냥 넘길 수 없다. 생시에 연치가 한 참 아래인 내게 꼭 “윤 회장님”이라고 높임말 하셨던 어른. 한글 사랑과 각종 꽃씨 사랑이 유별나셨던 멋스러운 원로 문인. ‘콩나물밥 예찬’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 ♧ ♧
콩나물 밥집
유동삼
옹솥 바닥 살코기 서너 점 깐 다음
콩나물 한 옴큼 뿌리 잘라 다독다독
그 위에 다마금 햅쌀 두 옴큼쯤 얹겠지
김 오르자 보글보글 소리 나면 불을 끄고
갖은양념 한 가지만 떠놓고 비벼도
군침이 고기보다도 더하는 분 많겠지
맛있고 값싸고 몸에 좋은 콩나물밥
정다운 말 들으면 시골의 따스함이
귀 익은 콩나물 밥집 한 번 가면 단골집
이 시조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유동삼 시인의 명시 「할머니 말씀」과는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시조에서 ‘옹솥’(작고 오목한 솥), ‘옴큼’(한 손으로 옴켜쥘 만한 분량을 세는 단위), ‘다마금’(多摩錦 : 벼 품종)을 요즘 밥상머리에서 이야기하면 알아들을 젊은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또 책장을 넘기면 역시 생시에 나와 특별히 인연 맺고 지냈던 전영관 시인(1950~2016)의 작품이 등장한다. 전영관 시인은 내가 졸저 문집을 펴낼 때마다 과분한 찬사를 보내 주었고, 나는 전 시인의 시집 출판기념회 때마다 꼭 참석하여 소감을 칼럼으로 쓰기도 했다.
아동 문학가이기도 한 전영관 시인과의 작품 교류 인연은 끝없이 이어졌다. 2007년 대전경찰청 개청식 행사에서 나의 청탁으로 ‘축시’를 써 주었던 일도 잊을 수 없다. 전영관 시인이 내게 지어준 「고마운 경찰관 아저씨」 제목의 축시는 ‘대전 경찰 역사’에 남을 작품이다.
대전경찰청 전 직원들이 참석한 대강당에서 시인의 제자(초등학생)가 낭랑하고 예쁜 목소리로 낭송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당시 시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대전경찰청장 명의의 감사장을 드렸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작품 교류뿐만 아니라 술자리도 가끔 가졌는데, 넉넉한 인품에다가 베풀기 좋아하는 천성이라 많은 문인이 격의 없이 좋아했다. 외양만 보면 우람한 몸집에서 어떻게 저런 아름답고 고운 시가 나올까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영관 시는 우선 재미가 있다. 다 읽고 나면 남는 것은 ‘즐거움’이다.
♧ ♧ ♧
아침 산
전영관
산이
떠오르는 해를
어깨너머로 가리우고 있다
산꽃이
이슬에 세수를 마칠 때까지
산새가
둥지에서 이불을 다 갤 때까지
나무들이
바람에 머리를 다 빗을 때까지
산이 떠오르는 해를
어깨너머로 가리우고 있다.
동심(童心)과 평생 함께해 온 문학박사 선생님으로서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은 작품에서도 천진무구함이 묻어난다. 「아침 산」, 얼마나 신선하고 재미있는 발상인가. 수많은 동시집을 펴낸 아동문학가 전영관 시인이 아니고는 이렇게 깨끗하고 순수하고 맑은 작품을 빚어내기 어렵다.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셋이다. <산꽃>, <산새>, <나무>. 이 세 친구가 세수하고, 이불도 개고, 머리도 빗을 때까지 ‘떠오르는 해’를 ‘산이 가려’ 주고 있으니, 얼마나 예의가 반듯하고 마음이 너그러운가.
남을 위해 헌신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봉사 정신,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 따뜻한 인정과 사랑, 그리고 ‘베풂의 미학’이 시의 행간에서 정겹게 묻어난다.
마치 깊은 산속에 묻혀 있던 순도 높은 원석(原石)을 캐내는 기분으로 색 바랜 대전 『西區文學』 창간호를 다시금 꼼꼼히 살펴보았다. ♧
2023.02.22.
윤승원 소감 記
♧ ♧ ♧ ♧ ♧ ♧
첫댓글 재미있습니다. 맛있습니다. 즐겁습니다.
<할버지>, <콩나물 밥집>, <아침 산>
'할버지'는 재미있고,
'콩나물 밥집'은 맛있고,
'아침 산'은 즐겁다고 평할 만합니다.
'명작을 읽는 즐거움'을 평론 해설을 통해 맛봅니다.
공감합니다.
훌륭한 작품을 다시 읽는 즐거움을 맛봅니다.
"전영관 선생님의 글은 동시이지 시조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시조의 율격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네요!!!"
페이스북에서 조근호 시인이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필자가 답했습니다.
"저도 동시라고 생각하는데, 장르를 <시조>로 편집해 놨더군요."
책자의 본래 편집 장르 구분에 관계 없이
본문 해설에서도 전영관 시인의 '시조' 표기를 '작품'으로
수정 표기합니다.(필자)
소중한 자료를 보관하셨다가 공개하시면서 좋은 작품을 칭찬해 주시는 윤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늘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는 생활 태도가 저희들에게 귀감이 됩니다. 고맙습니다.
30여 년이 지난 색바랜 책인데
찬찬히 훑어보니 인상 깊은 작품이 있어
소개했습니다.
모두가 고인이 되신 분들입니다.
사람은 가도 작품은 남는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과분한 격려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