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草청초, 푸른 풀은 靑春청춘을 생각나게 하기도 하지만 무덤에 우거진 푸른 풀은 무덤을 돌보는 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시가 되니 쓸쓸하고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청춘의 시절에 죽었거나 청춘의 시절만 기억에 남긴 채로 죽은 무덤의 주인이 靑草 우거진 곳에 있으니 어울리지 않는다. 장안의 선비 한량들이 얼굴 한 번 보려고 줄을 섰던 황진이의 무덤이 있는 곳은 푸른 풀만 우거진 ‘골[谷]’이다.
푸른 풀로 뒤덮인 무덤에는 白骨백골이 있을 것. 백골은 紅顔홍안과 대조된다. 현실은 백골이고 보지 못했을지라도 기억 속의 모습은 홍안이다. 제아무리 미색에 지성을 겸비한 황진이였지만 현재의 모습은 백골이다. 白骨은 육탈되고 하얀 뼈만 남은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白骨은 죽은지 오래 되었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황진이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紅顔도 사라지고 풀만 우거진 무덤을 지키는 것은 白骨. 군더더기 없이 요체만을 담고 있는 황진이의 정신과의 대면이라 할 수 있다. 紅顔은 이 세상을 살면서 가지고 있던 세상과의 조화와 在世的재세적인 세계관의 상징이라면, 白骨은 황진이가 原初的원초적으로 가지고 있던 초월적이고 타협 없는 고고한 정신세계의 상징이다.
임백호는 황진이와 초월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고고한 정신세계에서 만나고 있다. 잔을 잡아서 권하는 주체는 임백호도 되고 황진이도 된다. 이제 저러한 정신세계에서 허물없이 잔을 권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
백골만 남아 있는 청초 우거진 골, 마음과 정신을 허통하며 잔 잡아 권할 이가 없는 이곳은 황진이의 무덤이기도 하고 백호 임제가 처한 현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