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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지 제3권 / 충청도(忠淸道) 좌도(左道)○청주진(淸州鎭)
직산현〔稷山縣〕
동쪽으로 진천현(鎭川縣) 경계까지 33리, 경기 안성군(安城郡) 경계까지 ①31리이고, 북쪽으로 같은 군 경계까지 25리이고, 남쪽으로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10리, 목천현(木川縣) 경계까지 21리이고, 서쪽으로 평택현(平澤縣) 경계까지 22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189리이다.
한전(旱田)
수전(水田)
건치연혁(建置沿革)
본래 백제의 위례성지(慰禮城池)인데, 뒤에 고구려가 취하여 사산현(蛇山縣)을 설치하였다. 신라에서 그대로 따라 백성군(白城郡)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이름을 직산(稷山)으로 고쳤고, 현종(顯宗) 때 천안부(天安府)에 편입시켰으며, 명종(明宗) 때에 다시 직산현(稷山縣)을 설치하였다. 본조 태조(太祖) 2년(1393)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본현 사람인 환자(宦者) 김연(金淵)이 명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모시고 있다가 사명을 받들고 왔으므로 승격시킨 것이다. 태종(太宗) 1년(1401)에 다시 현으로 강등시켰다. 관장하는 면은 14개이고, 관원은 현감과 훈도이다. 각 1인이다.
군명(郡名) 위례성(慰禮城), 사산(蛇山)
형승(形勝)
온조(溫祚)의 유허(遺墟)이다. 이자원(李粢源)의 시
산천(山川)
사산(蛇山) 현 서쪽 3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위에 토성(土城)이 있는데, 둘레가 2940자이다. 안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지금은 없어졌다.
성거산(聖居山) 현 동쪽 21리에 있다. 고려 태조가 일찍이 거둥하여 현 서쪽 수헐원(愁歇院)에 머물렀는데, 동쪽을 바라보니, 산 위에 오색구름이 있었으므로 이는 신(神)이 있는 것이라 하여 제사 지내고, 드디어 성거산이라 칭하였다. 우리 태조와 장헌왕(莊憲王 세종)이 온천(溫泉)에 행차할 때에 또한 여기서 제사 지냈다.
양전산(良田山) 현 서쪽 22리에 있다.
망해산(望海山) 현 서쪽 42리, 경양 폐현(慶陽廢縣)에 있다.
휴류암(鵂鶹巖) 현 남쪽 5리에 있다. ②형상이 양(羊), 말, 인물(人物) 같다.
소사평(素沙坪) 혹 홍경평(弘慶坪)이라고도 한다. 현 북쪽 20리에 있다. 서쪽으로 평택현(平澤縣)에 이르고, 북쪽으로 경기 수원부(水原府)의 신영장(新永莊) 및 양성현(陽城縣) 소사원(素莎院)에 이르는데, 평평하고 넓은 땅이 30여 리는 된다. 혹 소초평(所草坪)이라고도 한다. 양성현에도 보인다. ○ 만력(萬曆) 정유년(1597, 선조30)에 왜병이 남원성(南原城)을 함락하고 전라도에서부터 승승장구하여 올라왔는데,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부총병 해생(解生)이 이곳에서 대적하여 철기(鐵騎)로써 몰아붙여 왜병을 크게 격파하였다.
경양포(慶陽浦) 경양 폐현(慶陽廢縣)에 있다. 해포(海浦)이다.
아주천(牙州川) 현 북쪽 20리에 있다. 경기 안성군(安城郡) 남쪽 청룡산(靑龍山)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양성현 소사천(素沙川)에 들어간다.
성환지(成歡池) 성환역(成歡驛) 앞에 있다. 둑 길이는 80보, 둘레는 2리이며, 연(蓮)이 있다.
토산(土産)
황금(黃芩), 안식향(安息香), 산무애뱀[白花蛇], 숭어[秀魚], 밴댕이[蘇魚], 웅어[葦魚], 참조기[黃石首魚], 붕어[鯽魚]
공서(公署)
성환도 찰방사(成歡道察訪司) 현 서북쪽 8리에 있다. 성환(成歡), 신은(新恩), 김제(金蹄), 광정(廣程), 일신(日新), 경천(敬天), 평천(平川), 단평(丹平), 유구(維鳩), 금사(金沙), 장명(長命), 영춘(迎春) 12역을 거느린다. ○ 찰방 1인이 있다.
학교(學校) 향교(鄕校) 현 서쪽 1리에 있다.
궁실(宮室)
객관(客館)
향사당(鄕射堂)
제원루(濟源樓) 객관 동북쪽에 있다.
○ 본조 ③서거정(徐居正)의 시서(詩序)는 다음과 같다.
“영남(嶺南)에 사신으로 갈 때 직산을 지나게 되었다. 직산 객관 동북쪽에 누각이 하나 있기에 올라가서 조금 쉬다가 주인에게 ‘이 누각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니, 주인은 알지 못하였다. 좌우 사람들에게 물으니, 고을 사람이 ‘제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객들은 제원의 뜻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이 고을은 백제의 옛 도읍이니, 이 누각을 제원이라 한 것은 백제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대개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라는 분은 본래 고구려 동명왕(東明王) 주몽(朱蒙)의 아들로서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도망하다가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했으니, 세상에서 이곳을 직산이라 전하고 있다. 뒤에 위례에서 남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곧 지금의 광주(廣州)이다. 대개 온조왕이 이리저리 떠돌며 파천(播遷)하는 와중에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설치해서 600년의 기업을 열었으니, 호걸스럽고 영특한 재주가 아니라면 그럴 수 있었겠는가. 그 후대에 내려오면서 여러 번 그 나라를 옮겼는데, 강한 것을 믿고 혼음(昏淫)한 정사로 결국 망했으니, 아, 슬프다. 이에 이 누(樓)에 오르니 감개를 이기지 못하여 시를 지어 조문한다. 시에,
백제의 옛터에 잡초만 절로 우거졌어라 / 百濟遺墟草自平
내 와서 보니 감개하여 마음이 상하누나 / 我來感慨一傷情
④다섯 용은 천안부에서 다툼을 그쳤는데 / 五龍爭罷天安府
쌍봉은 위례성에서 울며 사라졌네 / 雙鳳鳴殘慰禮城
시조 사당 깊은 곳엔 단풍나무 어우러졌고 / 始祖祠深紅樹合
성거산이 둘러싼 곳엔 푸른 구름 비꼈구나 / 聖居山擁碧雲橫
누에 오르니 추풍에 슬픈 생각 하 많은데 / 登樓多少秋風思
어디에서 부는지 ⑤철적 소리가 들려오누나 / 何處吹殘鐵笛聲
하였다.”
봉수(熢燧)
망해산 봉수(望海山烽燧) 남쪽으로 아산현(牙山縣) 연암산(燕巖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양성현(陽城縣) 괴태길곶(槐台吉串)에 응한다.
우역(郵驛)
성환역(成歡驛) 현 서북쪽 8리에 있다. 찰방사(察訪司) 본역이다.
통수원(通水院) 성환역 옆에 있다.
말원(末院) 현 남쪽 8리에 있다.
수헐원(愁歇院) 현 서쪽 7리에 있다. ○ 고려 김지대(金之岱)의 시에,
꽃은 지고 새 울어 봄 졸음 무거운데 / 花落鳥啼春睡重
연기 깊고 들 넓어 말 가기 더디어라 / 煙深野闊馬行遅
푸른 산 만리 길에 노닐던 곳 멀어졌는데 / 碧山萬里舊遊遠
긴 피리 한 곡조 어느 곳에서 부는가 / 長笛一聲何處吹
하였다.
홍경원(弘慶院) 현 북쪽 15리에 있다. ○ 고려 현종(顯宗)이 이곳이 갈림길의 요충(要衝)인 데다 사람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고 무성한 갈대덤불이 들판에 가득해서 행인이 자주 약탈하는 강도를 만나기 때문에 ⑥승(僧) 형긍(逈兢)에게 명하여 절을 세우게 하였다. 병부 상서(兵部尙書) 강민첨(姜民瞻) 등에게 일을 감독해서 집을 모두 200여 칸을 세우게 하고,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또 절 서쪽에 객관을 도합 80칸을 세우고 이름을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하고, 양식을 쌓고 마초(馬草)를 저장해서 행인들에게 제공하였다. 마침내 비석을 세우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최충(崔冲)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고 봉의랑(奉議郞) 백현례(白玄禮)에게 쓰게 하였다.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원(院)과 비석만 남아 있으니, 드디어 절 이름을 따서 홍경원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 본조 이첨(李詹)의 시에,
홍경사에서 말을 멈추고 / 停驂弘慶寺
다시 옛 비문을 읽노라 / 再讀古碑文
글자가 깨진 것은 야승이 두드린 때문이요 / 字缺野僧打
이끼가 시든 것은 봄에 놓은 들불에 타서라네 / 苔殘春燒焚
⑦현산에 장차 해 지려 하는데 / 峴山將落日
⑧진령을 보니 정히 뜬구름만 자욱 / 秦嶺政浮雲
현종께서는 효도를 극진히 하시고 / 顯廟能敦孝
계모를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건만 / 伊謀及後昆
하였다.
신원(新院) 현 동쪽 20리에 있다.
관량(關梁) 아주교(牙州橋) 현 북쪽 20리에 있다.
사묘(祠廟)
사직단(社稷壇)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현 동북쪽 3리에 있다. 우리 세조 11년(1465)에 처음 세웠으며, 봄가을로 향축(香祝)을 내려 치제(致祭)하였다.
성황사(城隍祠) 현 서쪽에 있다.
여단(厲壇) 현 북쪽에 있다.
사찰(寺刹)
암사(龜菴寺), 만일사(萬日寺), 신암사(新菴寺) 모두 성거산(聖居山)에 있다.
미라사(彌羅寺) 양전산(良田山)에 있다.
고적(古蹟)
위례성(慰禮城) 성거산 위에 있다.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는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이다. 동명왕이 죽자 형 비류(沸流)와 함께 유리왕(瑠璃王)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남쪽으로 달아나 한수(漢水)를 건넜다. 비류는 미추홀(彌雛忽)에 도읍하였고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하였으니, 이때는 한 성제(漢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이다. 온조는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처음에 십제(十濟)라고 일컬었고, 뒤에 여기 올 적에 백성들이 기꺼이 따라왔으므로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이곳에 거주한 지 14년 뒤에 남한산(南漢山)으로 옮겨 도읍하였다. 지금 흙으로 쌓은 옛 성이 남아 있으니, 둘레가 1690자이며 안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모두 허물어졌다.
경양 폐현(慶陽廢縣) 현 서쪽 44리에 있다. 본래 백제 아술현(牙述縣) 지역이다. 고려 초에 이곳에 하양창(河陽倉)을 처음 설치하였고, 뒤에 경양현(慶陽縣)으로 고치고 염장(鹽場)을 겸관(兼管)하게 하였다. ⑨본조 초에 직산현에 편입시켰다.
천흥사(天興寺) 성거산 아래에 있었다. 예전에 없어졌는데 터는 아직 남아 있다. 당나라 때 세운 동장(銅檣 구리 돛대)과 석탑이 남아 있다.
명환(名宦)
본조
이영구(李英耉) 세종조(世宗朝)에 직산 현감이 되었으며, 청렴하고 신중하여 정사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유우(流寓)
신영희(辛永禧) 본조 서울 사람이다. 강정왕(康靖王 성종) 때에 김굉필(金宏弼)과 친하게 지냈는데, 김굉필이 말하기를 “지금 사류(士類)의 기운을 보니, 동한(東漢) 말기와 비슷하다. 재앙이 머지않았으니, 자네는 멀리 떠나 향곡(鄕曲)에서 은둔하기를 바란다.” 하였다. 이에 신영희가 그 말에 따라 직산의 사산(蛇山) 아래로 돌아가 우거하고 당호를 안정(安亭)이라 하였다. 신영희가 일찍이 남효온(南孝溫), 홍유손(洪裕孫) 등과 벗하였고 문장과 행의가 당대에 높아서 동남쪽으로 행차하다가 지나가는 벼슬아치들은 모두 그의 집에 예를 차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인물(人物)
신라
심나(沈那)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백제와 싸울 때 가는 곳마다 무너지지 않는 진(陣)이 없었으니, 백제 사람들이 비장(飛將)이라고 일컬었다.
소나(素那) 심나의 아들로서, 웅걸(雄傑)하여 아버지의 풍모가 있었다. 일찍이 아달성(阿達城)을 지킬 적에 말갈(靺鞨)이 몰래 군사를 몰아 갑자기 쳐들어와서 늙은이와 어린이를 겁략하니, 소나가 칼을 빼들고 크게 외치기를 “너희는 신라(新羅)에 심나의 아들 소나가 있다는 걸 아느냐? 싸우고 싶은 자는 어서 오너라.” 하고 드디어 힘껏 쳐서 적을 무찌르니, 적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다만 소나를 향해서 활을 쏠 뿐이었다. 진시(辰時)부터 유시(酉時)까지 화살이 소나의 몸에 마치 고슴도치처럼 꽂히자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그 아내가 울면서 말하기를 “죽은 사람이 항상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나랏일에 죽어야 한다. 어찌 침상 위에 누워서 부인의 손에 죽을 수 있겠는가.’ 하더니 이제 그 뜻대로 죽은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소나의 부자는 대대로 충의(忠義)를 이었다고 할 만하다.” 하고, 잡찬(迊飡)을 증직하였다.
고려
백문보(白文寶) 성품이 염결하고 정직하였다. ⑩공민왕(恭愍王) 초에 전리사 판서(典理司判書)에 제수되어 10과(科)를 설치하여 선비를 등용할 것을 청하였다. 신우(辛禑)가 대군(大君)이 되자 왕이 명하여 백문보를 사(師)로 삼았다. 관직이 정당문학에 이르고 직산군(稷山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① 31리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충청도 직산현〉에는 ‘21리’로 되어 있다. 지리적인 정황으로 21리가 타당한 듯하나 근거가 불충분하여 대본대로 번역하였다.
② 형상이 …… 같다 : 《여암유고(旅菴遺稿)》 권9 잡저(雜著) 〈휴류암(鵂鶹巖)〉에는 “험한 바위가 수북이 쌓여 있는데, 양 모양도 있고 말 모양도 있으며, 불꽃 같고 솜 같고, 갑주 차림의 군사가 위풍당당하게 읍하는 것 같고 부처가 가부좌하고 염주 세는 것 같은 형상들이 있는데, 부엉이 같은 모양은 없다.[巖磈砢然群積, 有如羊如馬, 如炎如綿, 如介冑之士厲以揖, 如瞿曇之趺坐數球, 未有如鵂鶹者.]”라고 하였다.
여암유고 > 여암유고 제9권 > 잡저3 > 申景濬
여암유고 제9권 / 잡저3(雜著三)
㉠직주기 신유년(1741, 영조17)〔稷州記 辛酉〕
휴류암(鵂鶹巖)
제방의 남쪽 백여 보에 휴류암이 있다. 바위는 높고 커다랗게 무리지어 쌓여 있는데, 양과 같은 것, 말과 같은 것, 불꽃 같은 것, 솜 같은 것, 갑옷 입고 투구 쓴 병사가 꿋꿋하게 읍하는 듯한 것, 부처가 가부좌하고 있는 듯한 것 등 몇 개가 있다. ㉡휴류(鵂鶹)와 같은 것은 있지 않은데 굳이 휴류로 명명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무릇 휴류와 ㉢훈호(訓狐)는 ㉣귀차(鬼車)의 족속으로, 집에서 울면 집에 재앙이 있고 고을에서 울면 고을이 흉하니 지극히 불인(不仁)한 새이다. 그러므로 휴(休)와 류(留)로 글자를 썼으니 머물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것으로 이름이 되었으니 장차 머물기를 바라는 것인가. 이는 반드시 일찍이 부엉이가 이 바위에서 혹 울었거나 혹은 와서 둥지를 틀었기 때문에 그때 사람들이 우연히 이름을 붙인 것이리라. 후세에 이를 생각하지 않고 그 이름을 미워하고 재앙이 장차 이를 것을 두려워하여 ㉤감여가(堪輿家)에게 물어서 가장 비옥한 밭을 버리고 그 아래에 못을 파서 그 그림자를 거꾸로 비치게 하여 재액을 떨쳐버리려 하였으니 어찌 그리 잘못되었는가.
사람이 의심을 하면 미혹되고 미혹되면 두려워하니 두려우면 반드시 이를 피할 것을 생각하여 교묘하고 거짓된 마음이 이로 인하여 생겨난다. 저 사물은 무심(無心)한데 사람이 유심(有心)으로 대하니 저 무심한 것 또한 혹 감응하여 재앙과 흉사가 된다. 내 들으니, ㉥대황(大皇)의 들에 오색의 새가 있는데 머리의 문양은 덕(德)이요 날개의 무늬는 순(順)이며 등의 무늬는 의(義)요, 배의 무늬는 신(信)이며 가슴의 문양은 인(仁)이라 한다.
수컷은 ‘즉즉(卽卽)’하며 울고 암컷은 ‘족족(足足)’이라고 운다. 저물녘에는 ‘고상(固常)’이라고 울고 새벽에는 ‘발명(發明)’이라고 울며 낮에는 ‘보장(保長)’이라고 울며, 날아오를 때는 ‘상상(上翔)’이라고 울며, 모여서는 ‘귀창(歸昌)’이라고 우는데, 그 이름은 봉황(鳳凰)으로 새 중에 지극히 어진 것이다. 도가 있으면 오고 도가 없으면 오게 할 수 없다. 지금 내 청컨대 이 바위의 이름을 고쳐서 봉황이라 부르겠다. 비단 그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풀어줄 뿐만 아니라, 또한 이 바위에 이 새가 와서 둥지를 트는 것을 친히 보기를 바라서이다. 듣는 사람이 말하기를 “아름답구나, 그대의 뜻이여. 해서(海西)의 봉산(鳳山)이 곧 옛날의 휴류군(鵂鶹郡)이었는데 중세(中世)에 또한 그 이름을 봉산으로 고쳤다.”라고 하였다.
㉠ 직주기(稷州記) : 1741년 충청도 직산(稷山)으로 이거하여 쓴 글이다. 성덕제(聖德堤)ㆍ휴류암(鵂鶹巖)ㆍ아주천(牙州川)ㆍ성거산(聖居山) 등 주변의 산천 및 자연 경관에 관하여 서술한 것이다.
㉡ 휴류(鵂鶹) : 수리부엉이, 또는 부엉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 훈호(訓狐) : 부엉이의 별칭인데, 부엉이가 훈호라는 소리로 운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올빼미과에 속하는 수리부엉이라고도 한다.
㉣ 귀차(鬼車) : 귀차조(鬼車鳥)로, 상상 속의 동물 귀차구두조(鬼車九頭鳥)를 말한다. 사람 얼굴에 박쥐날개를 한 흉조(凶鳥)의 일종인데, 성질이 몹시 포악하다고 한다.
㉤ 감여가(堪輿家) : 풍수지리를 보는 사람이다. 속칭 풍수 선생(風水先生)이라고 한다.
㉥ 대황(大皇)의 들 : 크게 황폐한 들판이라는 말이다. 《초사(楚辭)》 〈석서(惜誓)〉에 “아, 끝났도다. 봉황새가 높이 나는 것은 보이지 않고 황폐한 들판에 모여 있네.[已矣哉! 獨不見鸞鳳之高翔兮, 乃集大皇之壄.]”라고 하였다.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김석태 이덕현 안동교 (공역) | 2019
稷州記 辛酉
余自赤城之素沙。辛酉正月上旬。移于稷。其在素沙。旣暑素沙書五千九百餘言。今於玆獨不可無。遂爲之記。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9
鵂鶹巖
堤南百有餘步。得鵂鶹之巖。巖磈砢然羣積。有如羊如馬。如炎如綿。如介冑之士厲以揖。如瞿曇之趺坐數球。未有如鵂鶹者。而必以鵂鶹名之何。夫鵂鶹訓狐。鬼車之族。鳴于家家災。鳴于邑邑凶。至不仁之鳥也。故爲字以休以留。以勿留之意也。今乃以名焉。將欲留之耶。是必曾有鵂鶹或鳴或來巢于玆岩。而時人偶爾名之者也。後世不之思。疾其名而怵其災之將至。乃謀諸堪輿之家。含其上腴之田。池其下而倒其影以祓之。何其謬歟。夫人疑則惑。惑則懼。懼則必思所以避之。巧僞之心。因以興焉。彼物也無心。而人以有心接之。彼無心者。亦或感以爲災與㐫也。吾聞大皇之壄。有禽以五色。頭文曰德。翼文曰順。背文曰義。腹文曰信。膺交曰仁。雄鳴曰卽卽。䳄名曰足足。昏鳴曰固常。晨鳴曰發明。晝鳴曰保長。擧鳴曰上翔。集鳴曰歸昌。其名曰鳳凰。鳥之至仁者也。有道則來。無道則不可以致之。今余請改是巖之名而曰鳳凰。不惟釋其所以疑懼焉者也。亦惟願親覩是禽之來巢于玆巖也。聞之者曰。美哉子之意。海西之鳳山。卽古之鵂鶹郡。中世亦易其名以爲鳳山云。旅菴遺稿卷之九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9
③ 서거정(徐居正)의 시서(詩序) : 〈직산 제원루시서(稷山濟源樓詩序)〉이다. 《四佳集 四佳詩集補遺 卷3》
④ 다섯 …… 사라졌네 : 다섯 용은 《세종실록》 〈지리지 충청도 청주목〉 천안군에 “고려 태조(太祖) 13년(930) 동도솔(東兜率)과 서도솔(西兜率)을 합하여 천안부로 삼았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석에 “전설에 의하면, 술사(術師) 예방(藝邦)이 태조에게 아뢰기를 ‘삼국(三國)의 중심(中心)으로서 오룡(五龍)이 구슬을 다투는 형세이오니, 만일 이곳에 큰 고을을 두면 백제가 스스로 와서 항복하오리다.’ 하므로 태조가 산에 올라 두루 살펴보고 비로소 천안부를 설치하였다고 한다.”라고 하였으니, 왕건이 천안도독부를 설치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것을 비유한 표현이다. 쌍봉은 동명왕의 두 아들로 백제의 건국 시조인 비류와 온조를 가리키는데, 앞 구와 대구를 이루어 삼국을 통일한 왕건과 대비를 이루는 표현이다.
⑤ 철적(鐵笛) : 은자(隱者)나 고사(高士)가 불던 젓대라고 전하는데, 주희(朱熹)의 〈철적정서(鐵笛亭序)〉에 “무이산 속의 은자인 유군은 철적을 잘 불어서, 구름을 뚫고 돌을 찢는 소리가 난다.[武夷山中隱者劉君, 善吹鐵笛, 有穿雲裂石之聲.]”라고 하였다.
⑥ 승(僧) …… 하고 : 《동사강목(東史綱目)》 제7상 〈병진년 현종 7년〉 11월 기사에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충청도 직산현〉 학교조(學校條)에는 1021년(현종12)에 절이 완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⑦ 현산(峴山) : 진(晉)나라 양호(羊祜)가 양양(襄陽)의 수령으로 있을 때 백성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가 죽은 뒤에 그 지방 백성들이 양호가 평소에 휴식하던 곳인 현산에 비석을 세워 그 공을 기렸다고 한다. 《晉書 羊祜列傳》 여기서는 홍경사비(弘慶寺碑)가 세워진 곳을 가리킨다.
⑧ 진령(秦嶺) : 진(秦)나라 장안(長安)에 있던 산으로, 남산(南山)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고려의 서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 듯하다.
⑨ 본조 초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충청도 직산현〉 고적조(古蹟條)에는 ‘태조 5년’으로 되어 있다.
⑩ 공민왕(恭愍王) …… 청하였다 : 《고려사절요》 권26 〈공민왕(恭愍王) 1 임진 1년〉 3월 기사에 “전리사 판서 백문보가 상소하여 선법을 논하고 송나라 사마광의 십과거사의 제도를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典理判書白文寶上疏, 論選法, 請行宋司馬光十科擧士之制.]”라고 하였다. 10과(科)는 송나라 원우(元祐) 1년(1086) 사마광이 상주(上奏)하여 설치한, 인재를 뽑는 열 가지 과목을 말한다. 《宋史 選擧志 6》 ⓒ 한국고전번역원 | 오세옥 (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