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5.
타이어 펑크
공기압 경고등이 떴다. “타이어 공기압 220psi” 계기판에는 조수석 뒷바퀴의 공기압이 규정 이하로 떨어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어라! 순식간에 200psi로 또 떨어진다.
내 애마의 이름은 말리부이다. 현재, 230,000km 정도 주행거리를 가진 2014년 7월형 승용차다. 실제 연비가 리터당 11.2km로 나름 장거리 주행이 많은 차량이다. 실린더 헤드 미세 균열로 부품을 교체한 이력을 제외하면 잔 고장 없이 대체로 무난했다. 하지만 트렁크 윗부분은 오토바이 핸들과 농업용 기계에 부딪혀 찌그러진 형상이며, 네 개의 바퀴 덮개 패널은 하나같이 갈아붙인 자국이 선명하다. 언제 또 같은 부분에 상처를 낼지 모르는 판이라 흉한 모습이지만 그대로 타고 다닌다. 지인들은 서둘러 수리하라 보채지만, 왼쪽 귀로 듣고 오른쪽 귀로 흘려버린 지 오래되었다.
갈 길이 멀다. 비 내리는 토요일이다. 잠결에 줄기차게 내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일기 예보를 미리 확인한 터라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오늘은 장인어른 구순 잔칫날이기 때문이다. 해남에서 대전까지 235km, 3시간 거리다. 장인어른 6남매를 위해 준비한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5호 <해남 진양주>도 잊지 않고 챙겨서 트렁크에 실었다.
말리부의 육중한 움직임이 좋다. 묵직하게 미끄러지듯 굴러가는 내 애마는 13번 국도를 따라 영암을 지나 나주까지 달린다. 노면 상태가 좋아 차체의 흔들림이 거의 없다. 들릴 듯 말 듯한 바퀴 마찰 소음과 간간이 춤을 추는 윈도브러시 소음이 즐겁다. 영산강을 건너 광주광역시 서쪽을 스치듯 지나 남광산 나들목으로 들어선다. 이제부터 논산 JC까지 호남고속도로를 줄기차게 달리면 된다. 충청남도 논산시와 대전광역시 대덕구를 잇는 고속도로는 노선번호가 251번이다. 정식 도로명은 호남지선고속도로이다. 논산 JC에서 호남지선고속도로를 따라 잠시 달리다가 서대전 나들목으로 나오면 지척에 목적지가 있다.
하늘이 맑아진다. 전주와 완주 사이 어느 곳부터 비는 그치고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맏이로 사신 구십 년 세월의 노고를 하늘도 인정하나 보다. 황해도 연백 출신인 장인어른은 해방 후 열두 살 때 월남하여 78년 동안을 충청도 사람으로 살고 있다. 고향 땅에 재산을 몽땅 두고 내려왔으니, 가난이 오죽했으랴. 타향살이의 설움과 동족상잔의 아픔까지 오롯이 감당했으니 그 고생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으랴.
고속도로는 공사 중이다. 최고속도를 80km로 줄이라고 한다. 차선이 하나로 줄어들었으나 막힘이 없어 다행스러울 따름이다. 양촌 나들목을 지난다. “타이어 공기압 220psi” 경고문구와 공기압이 뚝 뚝 떨어지기를 멈추지 않는다. 펑크를 직감했지만 멈출 수 없다. 갓길이 좁아 안전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4km 전방의 벌곡휴게소까지 가면 무슨 수가 있겠거니 생각했다. 휴게소 주차선에 맞춰 정차했을 때 타이어 공기압은 겨우 44psi였다. 타이어 표면 손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재빨리 보험회사에 긴급출동을 요구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했으니 이제 기다릴 뿐이다. 여유 시간 30분으로는 턱도 없이 모자란다는 것을 알기에 온전히 운에 맡겨야 한다.
타이어 수리는 마쳤다. 이미 늦었다는 걸 알고 있으니, 마음은 여유롭다. 긴급출동 기사의 말처럼 안전운전이 제일 중요할 뿐이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꽃바구니를 전달하는 의식은 끝났을 테지만 내가 주인공이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가. 좁은 승용차 안에서 양복을 갈아입었다. 한 해에 한 번 매는 넥타이가 어색하기 짝이 없다. 늦었다고 꾸짖거나 나무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반가이 맞아주니, 손잡아 인사하거나 머리 숙여 답했다. 가족이다.
육즙이 고소하다. 소고기 생갈비와 갈빗살은 연하게 익어 입속으로 사라진다. 빈곤한 내 장기가 깜짝 놀라겠다. 비 그친 꽃샘추위에 벌벌 떨며 긴급출동 기사를 기다렸던 내 몽둥이의 수고로움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해야겠다. 허기가 수그러들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조카들의 힘겨운 사회생활 이야기가 들린다. 다들 힘에 부치는 세상살이와 맞닥뜨리고 있나 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낸 자신이 자랑스러우리라 믿는다. 내가 그랬듯이.
구순이다. 후덕한 인상의 노인네는 동생과 매제들 사이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오랜만에 얼굴을 대하는 처가 어른들은 팔순이 넘는 나이 탓인지 모두가 조금씩 야윈 모습이다. 백세시대라니 아직 10년에서 20년은 더 건강하시길 소망해 본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삐끗했지만 신속하고 안전하게 대처한 하루였다. 장인어른은 90년을 살아오면서 몇 번을 삐끗하셨을까? 몇 번을 넘어졌다 툭툭 털고 일어났을까?
구십 년이다. 결코 만만한 시간은 아니었으리라. 내 짧은 자로 장인어른의 긴 인생을 잴 수는 없다. 그렇지만 젊은 날 가난과 싸워 이긴 맹장이었음은 알고 있다. 사랑과 존경의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알건 다 안다.
첫댓글 복이 넘친다 고속도로에서 큰일날뻔했다
타이어와 브레이크는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라 항시 점검을 잘해야 함.
여하튼 운이 좋았어. 늘 안전운전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