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리지웨이 장군
한돈희
리지웨이 장군은 한국전쟁 당시에 맥아더 장군 후임으로 유엔군사령관을 한 분이다. 지금 나이가 80세 전후인 사람들은 리지웨이 장군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5, 6학년 이었을 때 장군의 이름을 알았다. 장군 이름만 알았지 장군이 어떠한 사람인지는 그 동안 알지를 못하였다. 리지웨이 장군에 대한 책도 보지를 못하였다. 맥아더 장군에 대한 책은 책방마다 많다. 인천에 맥아더장군 동상도 있고 너무 유명한 분이여서 누구나 잘 알지만 리지웨이 장군에 대하여는 아는 사람이 드믈 것이다.
오래 전 서울 대형 서점을 찾아 갔다. 그 때 ‘리지웨이-대한민국을 구한 지휘관’(복거일 지음)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어려서 이름만 알던 장군이다. 궁금해서 읽고 싶었다. 그 책을 읽고 내용를 요약해서 글을 쓴다.
리지웨이는 1895년 3월 3일 미국 버지니아주 몬로기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포병대령이었다. 리지웨이는 1917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때는 육군참모총장 마셜 대장에 의해 전쟁계획부에서 일했고 1942년 1월 준장진급을 한다. 1944년 5월 노르망디상륙작전 때는 부대원들과 낙하산을 타고 떨어져 싸웠다. 1945년 3월 독일로 진격하여 싸우다 수류탄 파편으로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1945년 6월 중장으로 진급한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필리핀, 지중해, 국제연합, 카리브해에서 부대를 지휘하였다. 첫째 부인과는 딸 둘을 낳고 이혼하고 1947년에는 셋째 부인과 결혼하였다. 1949년에는 국방성 육군작전 및 행정담당 부참모장이었다. 6.25전쟁이 터지자 제2대 유엔군 사령관이 된다.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알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 오고 아군의 화력이 강해서 감히 오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맥아더는 아군에게 총공세를 명령하였다. 통일도 눈앞에 있었다. 크리스마스 때는 미군은 고국에 돌아가서 명절을 지낼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때 중공군 30만 명이 몰래 한국에 들어와서 산속에서 기다라고 있었다. 중공군은 밤 기습작전으로 밀고 내려온다. 아군은 3.8선으로 밀려나고 1951년 1월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하였다. 새로운 전쟁을 맞았다. 아군은 공세에서 수세로 몰리었다. 맥아더는 전쟁을 확대해서 중국 본토에 대한 공격방안을 내놓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세계대전으로 확전되는 것을 우려하여 맥아더를 해임하였다. 맥아더는 후임 적임자로 리지웨이 중장을 지명하였다. 리지웨이는 1950년 12월 한국에 부임하였다. 그는 전선을 시찰하면서 미국병사들에게 목적의식을 불어넣어주었다. ‘왜 우리가 여기(한국)에 있는가?’, ‘무엇을 위해 우리는 싸우는가?’를 발표하였다. 중국 국공내전 때 국민당군대가 항복해 공산군에 편입된 일이 있었다. 리지웨이는 미국이 한국을 지켜줄 의지가 있느냐 하고 회의적인 한국군 부대들이 공산군에 투항하는 사태를 걱정하였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나는 한국에 머물러 지킬 생각이다” 하고 안심시키고 한국군참모총장 정일권을 만나서는, “오직 하나의 공통된 운명이 있다.”고 하였다. 물러서지 않고 지켜준다는 뜻 이다. 한국전쟁은 스탈린, 김일성, 마우쩌둥의 합작품이다. 마오쩌둥은 한반도에 군대를 보내기로 결정하였고 외무장관 저우언라이는, “만일 국제연합군이 3.8선을 넘어 북한영토를 진격하면 중국은 개입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맥아더가 중공군이 참전을 못한다고 오판하였다. 리지웨이는 한국을 버리고 떠나지 안겠다는 약속을 하고 한국정부 지도자와 한국군지휘부를 안심시키였다. 리지웨이는 아군의 사기를 높이고 전의를 북돋아 공세로 전환하였다. 아군은 자신감을 되찾았다. 리지웨이는 중공군의 우세한 병력에 대해 아군의 우세한 화력으로 대응하는 전략이다. 중공군은 기세가 꺽이고 반전되었다. 중공군은 아군의 공습으로 보급로가 끊겨 전력이 약화되고 동상과 질병으로 공산군 손실이 5만 명 이상 이었다. 이 때 한국군 1사단이 한강을 넘어 서울을 되찾았다.
1951년 봄 전황이 안정되었다. 미국은 휴전을 모색하였다. 승리 가능성이 없고 미국시민은 전쟁에 염증을 느끼었다. 리지웨이 후임으로 클라크 대장이 부임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임기가 끝나고 아이젠하우어가 대통령이 되었다. 휴전협상이 안 되면 원자무기 사용도 검토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조인식이 있었다. 해리슨 미군중장과 남일 북한군 소장이 서명하였다. 조선인민군총사령관 김일성 원수, 중국지원군사령관 펑더화이 원수와 유엔군사령관 크라크 대장은 각기 근무지에서 서명하였다. 3년 1개월간의 전쟁이다.
1952년 5월 리지웨이는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된다. 1953년 8월 리지웨이 장군은 육군참모총장이 되고 1955년 6월 퇴임한다. 1956년에는 자서전 ‘군인 매튜 리지웨이 회고록’을 발간했고 1967년에는 ‘한국전쟁’을 발간했다. 1986년 5월 레이건 대통령은 리지웨이에게 대통령 자유메달을 수여하면서 말했다. “영웅들은 그들이 필요할 때 나옵니다. 당시 위급한 처지에 놓인 한국은 정말로 영웅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 영웅이 리지웨이 사령관입니다.”
1993년 7월 리지웨이 장군은 피츠버그 교외의 집에서 98세로 영면하였다. 한국을 구해준 영웅인데 리지웨이를 기억하는 한국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한돈희
(문학공간)(1995) 시조등단, (문예사조) (1996)수필등단.
서울고등학교 교사 역임. 한국문인협회 회원, 부천문인협회 회원, 서울교원문학회 회원
전화번호: 010-9344-2719
아내: 010-7769-2719
2025 부천문학 83호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