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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히 13:15,16)
하나님은 어떤 예배를 원하실까요? 정성을 다해 드린 예배를 원하실까요? 맞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리는 그런 예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것만 원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참되게 예배드리려고 하면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런 예배자를 찾으신다”라고 하셨습니다. ‘영으로’라는 말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전인격적으로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진리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성경 말씀대로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영과 진리로 드리는 그런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예배자가 바로 저와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십시다. 우리의 정성과 마음과 생각과 몸과 물질까지 그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을 가지십시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정해주시고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리십시다. 그리하면 이 시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무엇을 말할까요?
진리로 드린다면 것은 성경 기준대로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습관적으로 자꾸만 우리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성경을 맞출 때가 있습니다. 성경이 나를 따라오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를 맞추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분대로 들락날락하는 예배를 드릴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기준대로 예배드려야합니다.
어떤 분들은 예배를 드리고 싶으면 드립니다. 그리고 드리고 싶지 않으면 드리지 않습니다. 사람의 감정에 따라 자기 멋대로 드립니다. 그런 예배는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인간이 정해놓은 기준이 아닙니다. 예배 시간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시고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나오셔서 예배를 받으시려고 기다리고 계시는 시간입니다. 예배 시간은 그런 시간입니다. 사람이 임의로 약속한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배 시간을 꼬박꼬박 잘 지키는 것이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구원의 선물을 받아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라고 한다면 반드시 자기 아버지인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야 하고 그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주일 시간에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 예배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 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드리는 기준이 우리 자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이 이만큼 예배드리면 되겠다고 임의로 기준을 정해놓고 그것을 지키면 예배를 잘 드렸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일 성수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제쳐놓고 주일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주일날 오전 예배는 예배니까 드리고 오후 예배는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자신이 정해놓은 시간에 예배드리면 자기 기준에서는 잘 지킨 것이 됩니다. 그러기에 그것으로 매우 만족해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참된 예배이고 그런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오전 예배를 빨리 드리고 오후에는 약속이 있으니까 빨리 가야겠다.’ ‘오후에는 좀 쉬어야겠다.’ ‘오전 예배만 드려도 충분하지 않아?’ 등등 각자가 정해 놓은 기준에 따라 드립니다. 그러나 온전한 주일 성수는 아닙니다. 오전 예배든 오후 예배든 모든 예배를 정성껏 드릴 때 온전한 주일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드린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반토막 예배는 반토막 신앙입니다. 그러면 반토막 축복과 은혜밖에 받지 못합니다. 사람이 정한 기준은 그렇게 반토막을 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반토막을 받고 사니까 살아갈 때 당연히 힘이 배나 더 듭니다. 더 심한 사람은 ‘꼭 교회에 가서 예배드려야 하나? 혼자서 잘 드리면 되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배는 어디서나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예배는 삶 가운데 쉬지 않고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주일 성수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하루를 구별해놓으셨고 장소도 교회로 구별해놓으셨습니다. 이것을 지켜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라면 일 년에 세 번씩 의무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야 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에는 세계 각지에 있더라도 가야했습니다. 걸어서 가든지 형편이 좀 나아서 나귀나 낙타나 말을 이용해서 가든지 멀리 있으면 며칠씩 잠을 자고 식사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고 얼마나 많은 경비가 들겠습니까? 꼭 그렇게 가서 모여야 합니까?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 모여서 예배드리면 되지 않습니까?
모이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함께 모일 때 하나님 나라와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흩어져 살아도 그 정체성을 가지고 삽니다. 신앙을 잃지 않고 동화되거나 변질되지 않게 합니다. 이렇게 정해진 시간에 정해놓은 장소에 모이라고 한 것은 인간중심의 삶을 살지 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 편의주의대로 살면 잘 살 것 같지만 오히려 망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근본은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원근 각처에서 모이도록 한 것은 모든 일의 지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알아서 세상 풍조의 찌든 생각을 내버리고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성전 중심의 신앙으로 무장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신앙으로 중심이 굳건히 설 때 인간 편에서 보면 어리석어 보이고 잘 안 될 것 같지만 오히려 이렇게 신앙 생활할수록 더 잘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길이 올바르고 진리이고 잘되는 길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주일날 교회에 모이려면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냥 쉬고 싶고 아니면 집이나 직장에서 미루어놓았던 일을 하고 싶은데 굳이 나와야 하니까 힘듭니다. 중요한 사람과의 만남도, 등산이나 운동이나 여행도, 상점 문을 열고 영업해야 하는 일도 포기해야 하니 교회에 오면 손해를 보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실제로 쉬지도 못하고 돈을 벌지도 못하고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친인척들 결혼식 등에도 못가는 등 손해가 많습니다. 거기다가 헌금까지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봉사도 해야 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주일날이 오히려 더 힘든 날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오전 오후 예배를 모두 드리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로 예배드릴 때 진리대로 축복과 은혜를 보상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 인간 멋대로의 예배나 신앙으로는 하나님께서 보상해주시기로 약속하신 축복과 은혜를 반토막도 챙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신령한 관계도 신앙도 점점 사라지고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주일 성수 잘 안해도 신앙만 좋아지더라.’ 그렇지 않습니다. 주일 성수가 약해질수록 점점 신앙도 점점 약해집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그만큼 줄어드는데 어떻게 좋은 결과가 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줄어드는데 어떻게 잘 분별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주일 성수가 약해질수록 신앙도 모든 약속받은 축복도 은혜도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일 성수의 신앙을 회복하셔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시간과 장소에서 예배를 꼭꼭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떤 예배를 드려야 그런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인간 중심의 예배는 인간 스스로 만든 기준에 따라 예배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예배보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예배를 드리는 것을 원하십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을 원하십니다. 자기 자신이 정한 대로 드리고 자기 기분대로 드리는 예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영과 진리 가운데 드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리인 성경 말씀에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본문 15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어떤 예배를 드리라고 합니까? 찬양의 예배를 드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홍해바다를 건넌 다음에 한 일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14장 28-30절입니다.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이 구원을 받은 다음에 무엇을 하였습니까? 크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찬송이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모세와 온 백성들이 하나님께 노래하며 찬송한 것이 나옵니다. 1절부터 18절까지가 있는데 이 가운데 5절까지만 보겠습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해에 잠겼고, 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
우리 역시 죄악된 세상의 포로에서 벗어나 출애굽 받았습니다. 구원을 선물로 받아 멸망의 바다인 홍해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입술에는 무슨 말이 나오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과연 이 구원의 노래가 저절로 나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우리를 힘써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구원받은 것에 대해 기뻐하고 감격하고 감사드릴 때 이 찬양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 찬양을 기뻐하시고 그 찬양의 예배를 기쁘게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아직도 구원을 받은 실감이 덜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패하고 변질된 세상에서 벗어나 새 하늘 새 땅에 들어가면 완전히 실감할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말을 할까요? 이 구원이 얼마나 크고 값진지를 너무도 잘 알기에 주님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찬양을 올려드릴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원수 마귀와 세상을 심판하신 장면 이외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찬양입니다.
4장을 보면 하늘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9-11절입니다.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이어서 나오는 5장도 마찬가지입니다. 9절부터 14절까지입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찬양의 예배입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그 예배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그러한 찬양의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 용서받고 구속받아 구원받는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찬양해야 합니다. 주님의 공로를 찬송하고 구속받은 것에 대해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좋은 악기와 목소리와 음향시설을 갖출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본질은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묻어 나아와 합니다. 그런데 그냥 쥐어짠다고 나옵니까? 구속의 은혜를 깊이 알아야 됩니다. 본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깊이 묵상하고 구속의 은혜를 깊이 체험할 때 깊은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감사와 찬송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에 대해 깊이 묵상하셔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예배를 더 드려야 할까요?
하나님만 찬송하고 끝나면 절름발이 예배가 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교회 문을 나서면서 ‘예배를 잘 드렸다’고 끝내면 안 됩니다. 예배드리고 나가서 이웃을 향해서도 봉사할 때 예배는 완성이 됩니다. 찬송할 때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감사는 이웃에 대한 섬김으로 나타납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리지만 이웃에 대해서도 감사하게 여기고 함께 베풀어주려고 합니다. 이렇게 이웃에게도 흘러가야 제대로 된 예배입니다.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다음 주일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상반기의 수확에 대해 감사드리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감사헌금은 하나님께만 드리는 헌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려지기도 하지만 이 헌금으로 이웃을 향해 드려지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만 위해 사용하지 않습니다. 일부는 총회와 부속기관을 위해 드립니다. 보다 더 어려운 미자립교회와 교역자를 위해서도 사용합니다. 지역의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도 사용합니다. 더 나아가 세계 속의 이웃과 선교를 위해서도 의미 있게 사용합니다.
본문 16절은 말합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찬양의 예배를 드리는 것도 기뻐하시지만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누어주는 산 예배도 기뻐하십니다. ‘선을 행함’(‘유포이이아’)는 ‘유’(잘)와 ‘포이에오’(만들다, 하다, 행하다)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말은 ‘좋은 일을 만들다’는 의미입니다. ‘서로 나누어 주기’(‘코이노니아’)는 ‘코이노노스’(동료, 참여자)에서 유래했습니다. 참여하고 교제한다는 의미입니다. ‘잊지 말라’(‘에필란다노마이’)는 에피(가까이에)와 란다노(눈에 띄지 않다)에서 유래했습니다. 근처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등한지 하지 말라, 무관심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렇게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눠줄 수 있을까요? 앞뒤 문맥에서 제시된 것을 보겠습니다. 앞 문맥 1-5절까지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고, 갇힌 자를 생각하고,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귀하게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5절과 6절을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선을 넘지 않고 이웃의 배우자를 탐내지 않는 것이 이웃을 위한 것입니다.
또한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하였습니다. 돈은 아무리 모아도 모자라는 것이 돈입니다. 그리고 돈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써야합니다. 그러므로 움켜쥐고 있지만 말고 좀 시원시원하게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문을 설명하였고 본문 바로 그 다음 17절에 인도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움으로 인도하게 하고 근심으로 인도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눠 주라고하면 먼저 떠올리는 것은 물질입니다. 그것만 아닙니다. 생각과 마음도 나누어야 합니다. 특히 기도를 나누어야합니다. 18절과 19절을 보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고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 기도로 도와야 합니다. 인도자는 따르는 자를 위해, 따르는 자는 인도자를 위해, 그리고 인도자끼리, 따르는 자끼리 서로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제사를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드리는 것과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누어주는 제사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배를 기뻐하시고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리하여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우리, 수평적으로 우리와 우리, 이렇게 서로가 다함께 더불어 기쁘게 사는 세상이 되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힘써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고 이웃에게도 선을 행하고 나눠주는 예배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 수직적 예배와 수평적 예배를 잘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예배를 인간 중심의 편의대로 드리게 만듭니다. 완고한 인간의 마음은 잘 깨어지지 않습니다. 진리대로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해지면 달라집니다. 인간 중심의 기준과 인간의 기분은 점점 사라지고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게 됩니다. 나에게 성경이 따라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경에 맞추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해지면 곧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임재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품이 충만해져서 당연히 그런 모습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해질수록 그런 예배를 더 잘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성령이 충만해지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충만한 예배자는 어떤 예배를 드릴까요? 수직적 예배와 수평적 예배를 모두 다 잘 드립니다. 오순절에 모두가 성령이 충만해졌습니다. 그러자 나타난 현상이 무엇이지요? 성령의 충만을 받은 초대 교회 성도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대로 영과 진리로 성전과 삶 가운데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도행전 2장 44-46절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일에도 힘쓰고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고 나눠주는데도 힘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예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지요? 사도행전 2장 47절을 보면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지면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어 있고 이웃에게 칭송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의 수를 날마다 더해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수직적 예배도 잘 드렸지만 이웃에게 수평적 예배도 잘 드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런 분이시기에 성령이 충만해지자 그런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 것입니다. 아들도 아끼지 않고 주시고 아들과 함께 그 모든 것도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께는 찬미를 드리고 이웃에게는 선을 행하고 나눠주어 칭송을 받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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