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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시리즈 5 )
작가/ 낭독: 김인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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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경기도를 벗어난 자동차는 어느 사이 영종대교를 건너가고 있었다. 집에서 멀어질수록 미자는 마음이 이상하게 편안해졌다. 남의 시선에서 벗어난 기분이었다.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자 어떤 용기가 생겼다. 하지만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음식점에서 커피숍에서 아니면 공공장소에서 느닷없이 아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다.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전남편과 관련된 사람들과의 느닷없는 조우였다. 혼자라면 상관없었다. 옆에는 이현수라는 남자가 있었다.
그들은 쑥덕거릴 것이다. 혼자 고상한 척은 다 하더니 결국 그랬어? 혹시 이혼의 이유가 저 여자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야? 다 늙어서 뻔뻔하게 대낮에 남자와 해안을 돌아다닌다는 소문이라도 낸다면, 남편의 귀에까지 이 소문이 들어간다면, 이일을 아들이 알게 된다면, 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화가 되는 사람을 만났어.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의논할 수 있어서 좋아.’ 라고 아들에게는 자신 있게 말할 것이다. 아들의 반응은 어떨까? 이혼을 존중한다는 아들은 과연 이현수를 받아들일까. 미자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도 미자를 응원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친한 친구 인숙까지도.
일몰이 아름다운 장소로 가보자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함께 낙조를 보고 오자고 이현수가 말했다. 소나무 숲을 끼고 해안도로를 끝없이 달렸다. 기암들 사이로 선녀바위가 보였다. 공용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돗자리를 들고 모래사장으로 갔다. 이현수가 운동화를 벗고 양말을 벗어서 운동화 속에 넣었다. 미자는 샌들을 그 옆에 놓았다. 게들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둘은 파도가 밀려오는 모래사장을 걸었다. 미자는 원피스 자락을 붙잡고 걸었다. 발가락을 간질이는 모래와 파도의 어루만짐을 느끼며 해안 끝까지 맨발로 갔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갑자기 이현수가 해자를 끌고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서서히 밀물이 몰려오고 있었다. 바닷물은 배꼽까지 차올랐다. 넘실대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해자는 부르르 떨었다. 간신히 물 밖으로 나온 해자는 젖은 원피스가 몸에 달라붙어 몸의 곡선이 드러났다. 이현수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상대의 젖은 몸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낙조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하나, 둘 해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바다가 탁 트인 한적한 곳에 돗자리를 깔았다. 몸에서는 물비린내가 났다. 갈매기들이 아주 가까이 날아와 주변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이현수가 새우깡을 던져주었다. 이현수 어깨 주변으로 갈매기들이 자꾸 날아왔다. 갈매기 눈과 마주칠 때 미자는 정체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조류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친 적은 처음이었다.
“저 화장실 가고 싶어요. 어디로 가지요?”
이현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둘은 해안가를 나와 1차선 좁은 도로를 끼고 음식점과 편의점이 있는 곳까지 걸었다.
“어떡하죠? 이 꼴을 하고 어디로 가죠?”
“따라오세요.”
이현수가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의 엉덩이 쪽은 모래 알갱이들이 묻어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편의점은 이쪽이에요?”
이현수가 미자를 돌아보며 웃었다.
“나만 따라오세요.”
“거긴 호텔이잖아요?”
“호텔은 여행객을 위한 장소요. 깨끗한 화장실을 사용합시다.”
“뭐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아무도 상관 안 해요. 그냥 투숙객으로 알 거예요.”
“겁이 나는데요.”
“겁이 왜 납니까? 당당하게 걸어서 들어갔다가 볼일 보고 당당하게 걸어 나오세요. 혹 뭐라고 하면 투숙할 거라고 말하면 됩니다.”
미자는 이현수가 시키는 대로 호텔로 들어갔다. 프런트에 직원 몇몇이 있었으나 그들은 미자를 한 번 쳐다볼 뿐이었다. 미자는 로비를 지나 커피숍 옆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볼일을 보고 손을 씻고 옷매무새를 만졌다. 화장실을 나오니 이현수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호텔 커피숍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옷을 말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커피를 다 마셨을 때는 옷이 다 말라 있었다. 둘은 호텔을 나와 해안가로 돌아왔다.
이현수 등 뒤로 갈매기 떼들이 한 무리 날아갔다. 일몰이 시작되고 있었다.
“재미나요.”
“뭐가 말입니까?”
“다요. 바닷물에 풍덩 빠진 것, 호텔 화장실 사용한 것, 커피숍에서 젖은 옷을 말린 것 다요.”
“앞으로는 그렇게 살아요.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아도 법에 저촉될 일은 없을 거요.”
“저도 오늘 알았어요. 본능이 나를 이끄는 거 같아요.”
“이제 본능에 몸과 정신을 맡겨봐요.”
“잘 될지 모르지만 그러죠.”
해변으로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을 샀다. 이현수가 지갑을 꺼내려고 손을 엉덩이 주머니로 갈 때, 미자는 카드를 꺼내 결제했다. 해안은 만조가 되어 돗자리를 깐 자리까지 물이 차올랐다. 돗자리를 끌어다가 바위 옆에 깔고 둘은 누워서 일몰을 바라보았다. 지는 해가 타면서 저녁 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캔맥주를 다 마셨을 때 이현수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눈빛이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일몰의 슬픈 그림자가 이현수의 얼굴을 덮쳤다. 슬픈 얼굴이라고 미자는 생각했다. 미자는 불현듯 울고 싶어졌다.
‘분명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남자야. 만약 그 비밀을 털어놓는다면 난 절대로 도망갈 수 없게 될 거야. 그 비밀이 무엇이든 난 받아들여야 할 테니까.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남자는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몰라. 그건 안 돼. 제발 나에게 비밀을 고백하지 마세요.’
“갑시다.”
“어딜요?”
“저녁 먹으러 갑시다.”
“좋아요”
배가 고프지 않았으나 미자는 선뜻 돗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이현수의 뒤를 따라 걸었다. 들고 있던 쓰레기를 버리고 자동차로 돌아오면서 미자는 이 시간부터 이현수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집에 돌아가지 말자고 하면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일탈의 욕구가 남자와 밤을 보내는 설렘을 앞질렀다. 자동차에 올랐을 때 반대편 숲 언저리에 보름달이 떠 있었다. 해가 지면 바로 떠오를 하얀 달이었다. 미자는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일몰 전에 해안 반대쪽 숲 언저리에 하얀 낮달이 대기하고 있는 것은 신비하기 짝이 없었다.
사람은 늙어 죽고, 다시 아이가 태어나고, 이별 뒤에 만남도 찾아왔다. 일몰의 이글거리는 태양을 보며 남편을 떠올렸다. 말갛게 숲 언저리에 둥실 떠오른 하얀 보름달을 고개가 아플 때까지 뒤돌아보았다.
“뭘 그렇게 집중해서 보는 거요?”
이현수가 운전하며 물었다.
“낮달요. 하얀 보름달에게 납치되어 가는 것 같아요.”
“낮달? 일몰 전에 낮달이 그새 떴단 말이오?”
“예, 저어기.”
이현수가 갓길에 차를 멈추었다.
“말간 보름달이군. 미자씨는 내가 납치해 가는 중이요.”
“좋아요, 납치되어 간다는 건 행복한 일이에요.”
자동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비치 호텔에 멈췄다.
“아까 그 호텔로 가는 거 아니었어요?”
“여기 라운지에서 저녁을 먹읍시다.”
미자는 말없이 이현수를 따라갔다. 프런트에서 객실 키를 받아 든 이현수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미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닷바람에 몸은 끈적끈적했고 숲속을 헤맨 탓으로 몹시 고단했다. 배도 고파왔다.
19층에 다다랐을 때 미자가 물었다.
“예약했어요?”
“물론.”
객실 복도는 조용했다. 이현수가 객실 카드키를 꽂자, 불이 켜지고 에어컨이 돌아갔다. 미자가 커튼을 젖혔다. 멀리 인천 앞바다의 불빛이 한눈에 들어왔다. 낮보다 밤에 야경이 아름답다는 말을 블로그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더블 침대가 은은한 무드 등 조명 아래 나란히 있었다. 꽤나 외설적으로 보였다. 미자는 고개를 돌렸다.
“저녁을 먹읍시다. 라운지에 올라가면 야경이 더 근사해요. 야경을 보면서 바에서 와인을 마십시다.”
라운지에 올라가니 아늑한 조명 아래 재즈가 흐르고 있었다. 바다를 향한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젊은 남녀들이 쌍쌍이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라운지 코스메뉴가 나왔다. 바닷가재 샐러드와 양파 수프, 나폴리탄 스파게티와 와인을 마셨다. 애플망고 빙수를 천천히 함께 나눠 먹었다. 빙수를 먹는 이현수를 보면서 이 남자와 과연 키스할 수 있을까, 상상해 보았다.
이현수가 미자 잔에 와인을 따랐다. 미자가 입에 살짝 대었다가 놓았다. 이현수가 미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치 할 이야기가 있다는 눈빛이었다. 미자는 두려워졌다. 아직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였다.
“사실, 오늘은 약속만 하지 않았다면 집을 보러 다니려고 했어요. 시간 날 때마다 다녀봤는데 마땅한 집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이사 가려고요?”
“집을 팔았으니 이사 가야지요?”
“꼭 그래야 할까요? 그냥 거기 살면 안 됩니까?”
“어머, 현수씨 집인데 제가 왜 살아요?”
“사실 전 집이 꼭 필요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냥 방 하나의 공간만 더 있었으면 했어요. 혹시 집을 판 거 후회하십니까? 집값이 더 올랐던데요.”
미자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더 붉어졌다. 계속 내렸던 집값은 요즘 반등하고 있었다. 이현수에게 판 시세보다 몇천만 원이 올라 있었다. 빚을 다 갚고 나면 남은 돈으로 집을 구할 자신이 없어졌다. 조금 참았다가 팔았으면 좋을 뻔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사람이 있었다. 미자가 그랬다. 이현수는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샀는데도 결국 시세보다 싸게 집을 산 거와 마찬가지였다.
“내 짐작이 맞았군요.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난 집이 굳이 필요한 게 아니니 미자 씨 집 방 한 칸만 전세를 주시죠. 필요한 짐을 보관할 수 있는 방 한 칸 말이요.”
“그럼 같이 사는 거잖아요?”
“주민등록등본상 동거인이 되겠네요. 그 집에 자주 들락거릴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미자는 아들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지 걱정되었다. 낯선 남자에게 방을 내준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웃 사람들 시선도 걱정되었다. 하지만 용기가 생겼다. 다 늙어서 내 인생 내가 산다는데 아들이 무슨 상관이며 이웃 사람들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좋아요.”
이현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자의 거침없는 승낙에 당황한 눈치였다.
“전세금은 얼마로 하면 되겠소?”
미자는 계약금으로 받은 칠천만 원을 떠올렸다. 그 정도면 집 담보대출은 남겨두고 남은 자잘한 빚은 다 갚을 수 있었다. 계산해 보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저, 계약금 칠천만 원으로 할까요?”
“그래도 되겠소?”
“방 한 칸인데요. 전세금 높여봤자 빚이에요.”
“그럼 그렇게 합시다. 집 비밀번호도 공유해 주시죠.”
“당연하죠, 세입자로서의 규칙은 까다롭지 않아요. 제가 낮에는 집에 거의 없어요. 낮에는 마음대로 드나드셔도 되고요. 밤에는 안 돼요.”
“밤에는 왜 안 된다는 거죠?”
“그건, 남들 보기에도 좀.”
“그냥 결혼하는 건 어떻소? 연인으로 지내다 보면 미자씨가 아플 때 내가 보호자가 될 수 없으니 나이 들어 서로에게 보호자가 될 수 없다면 그건 좀.”
“뭐예요? 작업을 거는 거예요? 유영재가 선우은숙에게 프러포즈한 것과 똑같은 멘트군요. 아주 노골적인 프러포즈 아니에요?”
“유영재 얘기는 우리와 안 맞소. 그럼, 밤에는 안 갈 테니 그렇게 합시다.”
“좋아요.”
미자는 이현수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고 건배를 청했다.
“동거인과의 계약을 위하여!”
“우리의 동거를 위하여!”
“제일 큰 방은 제가 쓸 거예요. 화장실이 붙어있으니까요. 대신 작은 방과 큰 화장실은 현수씨가 써요. 주방은 언제나 사용해도 좋아요. 청소는 힘들어서 잘 못해요. 청소는 도와주실 수 있죠?”
“우린 손발이 척척 맞는군요. 난 청소 하나는 끝내 주죠.”
“좋아요.”
이현수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저, 미자씨.”
갑자기 이현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미자를 쳐다보았다.
“꼭 할 말이 있소.”
“동거는 아주 중요한 계약이니 말씀하세요.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럼 미자씨 먼저 말해 보세요.”
“불꽃처럼 살았던 나혜석, 아시지요. 그녀의 결혼 조건이 무엇이었는지 혹시 아세요?”
“글쎄요, 행려병자로 비참하게 죽은 천재 화가 말이오?”
“맞아요. 10살 많은 상처한 외교관 김우영과 결혼할 때 4가지 조건을 내걸었다고 해요. 첫째, 일생을 두고 지금처럼 나를 사랑해 줄 것, 둘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셋째,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함께 살지 않도록 해줄 것, 넷째,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이었죠. 이현수씨라면 어땠을까요?”
“저라도 다 따랐을 것이오.”
“사랑은 변한다고 하더니, 전 일생을 두고 사랑해 줄 것, 이라는 올가미는 걸지 않을 거예요. 셋째도 전 걸 수 없었을 거예요.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 살고 싶은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비난의 화살을 맞을 자신이 없지만 나쁜 사람이 될 것 같아서요. 하지만 둘째와 넷째는 공감해요.”
“둘째라면,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 넷째는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울 것 아니오?”
“맞아요. 나혜석은 결혼에 앞서 죽은 애인에게 예의를 지키고 싶었던 거죠.”
“미자씨도 동거 전에 예의를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소? 혹시 전남편이오?”
“맞아요, 제가 동거를 시작하지만 전남편도 제게 이현수씨 만큼이나 중요한 사람이에요.”
“미워하지 않아요?”
“미워하지 않아요. 아들의 아버지인걸요. 그 한 가지로 남편은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에요. 그 얘기를 오늘 꼭 하고 싶었어요.”
“좋습니다. 질투가 나는군요. 대체 어떤 남자였길래 그분은 미자씨의 존중을 받는지 부럽습니다.”
“이제 현수씨 얘길 해주세요.”
미자가 이현수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둘은 살짝 건배를 했다. 잔에서는 땡그랑, 하는 투명한 소리가 났다.
“난 호적상 미혼이지만 약혼자가 있소.”
미자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군 제대 후 첫 부임지는 여자고등학교였소. 나에겐 곧 결혼할 약혼자가 있었소. 시골 여자고등학교 부임지에서 하숙을 했소. 집이 서울이었기 때문이오. 이상한 일들이 자꾸 일어났소. 하숙집에 여학생들이 늘 찾아왔소. 내 하숙집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기에 막을 수는 없었소. 다른 교사들 하숙집에도 여학생들이 무리 지어 찾아다녔으니까. 전교 일등이었던 주희는 우리 반 반장이었소. 난 사회와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소. 학급 일을 주희가 맡아서 비서처럼 척척 해주었소. 학생 성적표 등급 나누는 것부터 시간표 짜는 것까지도 주희가 다 해주었소. 그런데 어느 날 밤, 주희는 집에 가지 않았소. 전 선생님과 일생을 같이할 거예요. 절 거부하지 말아 주세요. 난 약혼자가 있다고 했소. 하지만 둘 다 절제가 안 되었소. 주희는 정말 똑똑하고 예뻤소. 주희는 임신을 했고 결국 학교를 중퇴하고 말았소. 난 파혼하고 주희를 책임져야 한다고 결심했소. 왜냐하면 약혼자는 성인이고 주희는 아직 고1이니 말이오. 하숙을 찾아온 약혼자에게 이별을 통보했소. 약혼자는 서울로 돌아가 약을 먹고 정신병원에 입원했소. 태어난 아이는 지금 살아있다면 서른 살이 넘었는데.. ..”
이현수가 말을 잇지 못하고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죽었나요?”
“약혼자가 아들을 목 졸라 죽였소.”
“약혼자는 어디에 있나요?”
“아직도 정신병원에 갇혀 있소. 난 죄 많은 인간이오. 여자를 사랑할 자격이 없는 남자요.”
“그렇지 않아요. 누구나 죄를 짓죠. 그게 인간이에요.”
“난 미자씨를 점 찍었소. 미자씨는 나를 배반하지 않을 사람으로요.”
“그럼, 나에게 접근한 것이 다 계획에 있었다는 말이에요?”
“말하자면 그런 셈이오. 난 미자씨를 사랑할 자격은 없으니까. 만약 내가 세상에 없다면 약혼자는 누가 보호하죠? 난 나 이외의 보호자를 찾고 있었소. 드디어 찾았소.”
“만약을 위해 약혼자를 책임질 보호자를 찾았다는 거예요?”
“맞소,”
“현수씨는 죽어요?”
“아마도.”
“나쁜 병에 걸린 거예요?”
“대장암 1기요.”
“걱정 마요. 요즘 암은 고칠 수 있어요. 신약은 계속 나오고 있어요. 돈만 있으면 가능해요.”
미자가 이현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우리 함께 이겨내요.”
이현수가 미자를 쳐다보았다. 금방 울 것 같았다. 우는 남자는 질색이었다. 이만한 것 가지고 감격해서 운다면 그건 미자가 생각하는 멋진 남자가 아니었다.
“울지 마요. 난 뭐 대단한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고 겁을 잔뜩 먹었잖아요. 인심 쓴 김에 통 크게 양보할게요. 사람은 잠이 편안해야 해요. 매장에서 자는 건 건강에 좋지 않아요.”
“그럼 완전한 동거를 허락한다는 말이오?”
“예. 살면 얼마나 산다고, 반쪽 동거를 하겠어요.”
“야호, 드뎌 해냈다. 이제보니 미자씨도 화끈하군요?”
“저 달라지기로 했어요. 저 겁 안 나요. 남들 시선 따위는 겁 안 난다고요. 제가 법을 어긴 것도 아니고, 도덕과 양심을 판 것도 아닌 이상 당당하게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 거예요. 자유롭게. 내 주인은 나예요. 제 인생을 움직이는 핸들은 제가 운전한다고요. 전 집을 팔지 않는 이상 전세금을 돌려줄 수 없으니 2년 계약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거예요. 현수씨도 동거가 불편해지면 계약 만료 3개월 전에 미리 말씀해주세요. 전세금은 돌려줄 수 없어요. 집이 팔려야만 돌려드릴 수 있어요. 그건 각오하셔야 해요.”
“겨우 2년입니까? 우리에게 2년이 화살보다 빠르다는 걸 모르십니까?”
“알아요. 우린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특히 전 현수씨에 대하여 아는 게 거의 없어요. 재계약은 언제든지 가능해요. 일어나요. 너무 고단하네요. 객실로 가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항구의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깜빡깜빡 빛나는 항구를 뒤로하고 객실 복도를 걸었다.
“참, 어쩌죠? 옷이 바닷물에 젖어서 말랐어도 짠 내가 나는데요?”
“먼저 들어가 씻어요. 무슨 방법이 있을 거요.”
객실 앞까지 미자를 데려다준 이현수는 뒤돌아서 갔다. 미자는 욕실로 가서 입은 옷을 벗었다. 만약을 위해 속옷을 빨아서 말릴 생각이었다. 송풍으로 24시간 돌아가는 공기는 속옷을 가실가실하게 말려줄 것이다.
양치질하면서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 낯선 여자가 보였다. 스무 살의 주희가 되었다가 이현수의 약혼자가 되었다가 60대의 미자로 돌아오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미자였다. 괜찮아, 다 잘될 거야. 컵에 물을 받아 입안을 가시면서 미자는 되뇌었다. 이현수가 객실로 들어오기 전에 미자는 팬티와 브레지어를 빨아서 옷걸이에 걸어 작은 침대 모서리에 걸고 타월로 뵈지 않게 감쌌다.
머리를 감고 벗은 몸을 둘러보았다. 아직 사그러들지 않은 몸이었다. 적당한 근육과 늘어지지 않은 뽀얀 유방이, 분홍색 젖꼭지가 보였다. 아직 괜찮아, 미자는 되뇌었다. 샤워를 마치고 가운을 입고 나왔다. 어느결에 왔는지 이현수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흰 가운을 입고 젖은 머리로 나온 미자를 보고 당황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속옷을 입지 않은 미자는 몹시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현수가 쇼핑백을 내밀었다. 속옷이었다.
이현수가 욕실로 들어갔다. 미자는 쇼핑백을 열어보았다. 핑크색 팬티 3장이 들어있었다. 미자는 포장을 뜯고 서둘러 팬티를 입었다. 이현수는 무서운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다. 어디서 속옷을 사 왔을까. 보통 용의주도한 게 아니었다. 절대 미자가 따라갈 수 없는 영역이었다.
바로 그때 소파 위에서 이현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폰을 놓고 욕실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함께 있는 동안 여러 번 폰이 울렸지만 이현수는 받지 않았다. 미자는 휴대폰을 들고 욕실로 가져가다가 폰을 보았다. 정인숙이라고 떴다. 정인숙, 미자는 인숙을 떠올렸다. 동명이인은 얼마든지 많았다. 정인숙은 누굴까? 약혼자인가? 미자는 손이 덜덜 떨렸다. 폰을 소파 위에 다시 놓았다.
인숙을 만난 지 제법 오래되었다. 곧 재혼한다고 증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해 놓고 아직 연락이 없었다. 미자가 전화를 하면 늘 바쁘다고 했다. 하긴 재혼을 코 앞에 두었으니 바쁠만 했다. 미자는 내일은 인숙에게 이현수와 동거하기로 한 일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욕실에서는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인숙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그만두었다. 곧 욕실에서 이현수가 나올 것이다. 친구와 전화한다면 이현수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이현수가 나왔다. 같은 가운을 입고 같은 슬리퍼를 신고 마주 앉으니 신혼부부 같았다. 미자는 오늘은 분위기를 망치지 말자고 생각했다. 정인숙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전화가 왔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폰을 연 이현수는 얼핏 미자를 쳐다보았다. 난처한 표정이 역력했다. 눈은 묻고 있었다. 전화 온 것을 알고 있냐고.
미자는 약혼자의 이름이 정인숙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녀의 보호자가 될 것을 이미 약속했는데 이름이 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중요한 것은 이현수의 암 치료였다. 스트레스받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미자는 이현수의 누나가 된 것처럼, 엄마가 된 것처럼 자비심이 흘러나오는 것을 절제하지 않기로 했다. 욕실에 가보니 이현수의 속옷이 옷걸이에 얌전하게 걸려있었다. 미자는 이현수의 속옷을 들고 나와 침대 모서리에 걸었다.
“저, 너무 피곤해서 잘게요.”
미자는 더블베드 중 가장자리에 있는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덮었다. 꿈속처럼 졸음이 참을 수 없이 밀려왔다. 이현수가 불을 껐다. 어둠이 방안에 안개처럼 퍼졌다. 미자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모든 긴장감은 사라지고 걱정도 사라졌다. 엄마, 승규, 아들에 대한 생각도, 일도, 집도, 동거에 대한 생각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있던 이현수의 어슴푸레한 프로필이 보였다. 가엾은 늙은 사람이 가까이에 있었다.
꿈속에서 미자는 나혜석을 만났다. 결혼을 결정한 남편과 옛 애인의 묘비를 찾아가 비석을 세워준 나혜석, 미자도 이현수도 결국 나혜석의 후예가 아닌가. 정신병원에 감금된 약혼자에 대하여 책임지려는 마음을 미자는 이해했다. 미자 또한 전 남편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눈을 떴을 때 옆 침대에 웅크리고 자고 있는 이현수를 보았다. 몸피가 저렇게 작다니, 안쓰러웠다. 걸어 다닐 때는 당당했던 남자였다. 무슨 문제든 척척 해결해 내는 남자였다. 하지만 잠들어 있는 이현수는 아기 같았다. 화장실을 다녀온 미자는 자기 침대를 놔두고 이현수가 누워있는 침대로 들어갔다. 이불을 걷어 올리고 새우처럼 말고 자는 이현수의 품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현수가 미자를 꼬옥 안아주었다. 둘은 한 몸처럼 붙어서 아침 늦게까지 잤다.
빳빳하게 부풀어 오른 이현수의 그것이 미자의 깊은 곳으로 용트림하며 찾아 들어갔다. 미자는 몸이 노을처럼 붉게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첫댓글
나를 밝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
나를 따뜻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것,
그것은 사랑입니다.
@박현환 작가
저도
힘 찬
박수로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