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선생유고란 문간공 할아버지의 시문집詩文集이다. 모두 23권으로 되어 있는데 규장각한국본도서해제奎章閣韓國本圖書解題 를 통하여 23권의 시문집의 내용을 살펴본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한문으로 된 시문집이 아직 한글로 번역이 안 되어 있다는 점이다. 재력있는 종인이나 인사 또는 연구기관의 기금 등으로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를 소개한다.
용주선생유고龍洲先生遺稿
용주龍洲 조경趙絅(1586-1669)의 시문집. 1703년(숙종 29) 초간初刊되었으나 본집이 초간본인지의 여부는 미상未祥이다. 조경은 윤근수尹根壽의 문인門人으로 자字는 일장日章, 호號는 용주龍洲 또는 주봉柱峯이라 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북인北人의 횡포가 날로 심하여 가자 문과를 단념하고 거창居昌에 은거하였다. 그러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형조좌랑刑曹佐郞, 목천현감木川縣監을 지냈다. 1626년(인조 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壯元하여 정언正言, 교리校理, 헌납獻納 등 중직重職을 지내고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특혜를 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사간司諫으로 척화斥和를 주장하였으며 이듬해 집의執義로서 일본에 청병請兵하여 청淸을 칠 것을 상소한 바 있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응교應校, 집의執義등을 지내고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다녀와서 기행문을 저술하였다. 이어 대제학大提學, 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거쳐 우참찬右參贊을 지내고 1650년(효종 원元) 청나라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斥和臣 처벌요구로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의주義州 백마성白馬城에 안치安置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1653년 회양부사淮陽府使가 되었으나 포천抱川에 은퇴하고 말았다. 그 후 노인직으로 행부호군行副護軍에 등용, 165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숙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글씨에 능하였다. 포천의 용연서원, 흥해의 곡강서원, 춘천의 문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 서발序跋이 없고 권두卷頭에는 목록이 있다. 23권의 각권에 수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 1 : 5언절구五言絶句 14수首, 7언절구七言絶句 52수首 권 2 : 7언율시七言律詩 139수 권 3 : 7언율시 136수 권 4 : 7언율시 147수 권 5 : 5언고시五言古詩 43수(만시挽詩 포함), 7언고시七言古詩 17수 권 6 : 소疎 12편. 지평시소持平時疏(척화문제), 사서당소辭書堂疏(사가독서에 감사하는 소), 신미오월소辛未五月疏(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납간納諫에 관해서 상소한 것), 옥당차자玉堂箚子(경연經筵에 열심히 나오도록 왕에게 올린 상소), 옥당차자(모문룡毛文龍과 함세하여 청淸을 치자는 상소), 사간응지소司諫應旨疎疏(흉년에 응지시폐소應旨時弊疏), 사직소辭職疏(겸헌영사시兼獻詠史詩), 사사간소辭司諫疏(부시폐소附時弊疏) 등의 차자箚子가 수록되어 있다. 사직소가 대부분이다. 권 7 : 소 20편 통신사시청성근소通信使時請省覲疏, 청이어차請移御箚, 사내국제조비국당상소辭內局提調備局堂上疏 등 권 8 : 소 24편. 포충절소褒忠節疏, 헌부수성차憲府修省箚, 청책봉원손차請冊封元孫箚, 간무사차諫巫事箚, 장릉지문찬진차長陵誌文撰進箚, 위치묘석사직소爲治墓石辭職疏, 환조후소還朝後疏, 사월봉소辭月俸疏 등. 권 9 : 소 20편. 應旨疏(군역폐軍役弊, 서리작폐胥吏作弊), 응지소(내수사전內需司田 등), 재이소災異疏, 구김상육소救金相堉疏, 사소명소辭召命疏, 이지문대죄소以誌文待罪疏, 청서심대부소請敍沈大孚疏, 진구기민소賑救饑民疏, 응지소, 헌잠소獻箴疏 등. 권10 : 계사啓辭 14편. 합계合啓(김자점공화金自點攻畵),지평시피혐계사持平時避嫌啓辭, 피혐계사避嫌啓辭 등. 권11 : 서 19편. 제정사직증하주부환향서후題鄭司直贈河主簿還鄕序後, 송사은홍해봉조경서送謝恩洪海峯朝京序, 송동지사남참정시북공서送冬至使南參政市北公序, 학봉선생집서鶴峯先生集序, 농암선생집서聾岩先生集序, 한음선생문집서漢陰先生文集序, 육신유고서六臣遺稿序 등 기記 5편, 회양향교수폐기淮陽鄕校修廢記, 연송재기鍊松齋記, 낙전재기樂全齋記 등. 서序에 학봉鶴峯, 농암聾岩, 한음漢陰, 소재蘇齋, 구암龜岩, 현곡玄谷, 초암初菴, 동계桐溪 등 명사들의 문집서文集序가 있는 것으로 보아 용주의 학문적 지위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권12 : 발跋 8편. 관악사고동노발冠岳寺古銅爐跋, 동호수계도후발東湖脩契圖後跋, 강정대왕어필첩후康靖大王御筆帖後, 서회재선생대학보유후書晦齋先生大學補遺後, 제급난도후題急難圖後 등 판辦 1편, 북창선생양광판北窓先生佯狂辦. 설說 등 4편,예학저설0鶴著說, 통천해척표풍설通川海尺飄風設 등, 잡저雜著 11편. 고공청도감병사서告公淸道監兵使書, 이유도대장서移留都大將書, 졸소온우군소문답기拙疏溫于群小問答記, 책문策問, 서천부원군시장후西川府院君諡狀後, 청난비음소서淸難碑陰小敍, 절효선생효문명후설節效先生孝門銘後說 등, 상량문上樑文 2편. 과천신거무명재상량문果川新居無名齋上樑文, 역양신원상량문0陽新院上樑文, 그 외 효종대왕시책문孝宗大王諡冊文, 왕세손책봉죽책문王世孫冊封竹冊文, 교중외대소신료기로군민한량인등서敎中外大小臣僚耆老軍民閑良人等書, 불윤비답不允批答 등. 권13 : 제문祭文 28편, 인열왕후종친부진향제문仁烈王后宗親府進香祭文, 제부인문祭夫人文, 제망매허함창실내문祭亡妹許咸昌室內文 등, 기우제문祈雨祭文 9편, 뢰김대사간응조문0金大司諫應祖文 등, 권14 : 묘지명墓誌銘 6편, 인조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장릉지仁祖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長陵誌, 영의정잠곡김공육묘지명領議政潛谷金公堉墓誌銘 등. 권15 : 묘문墓文 12편. 통정대부안변부사봉래양공사언묘갈通政大夫安邊府使蓬萊楊公士彦墓碣, 고칠원처사윤공희원묘갈명병서故漆原處士尹公喜元墓碣銘幷序 등. 권16 : 묘문 8편. 소옹공근묘비명梳翁公謹墓碑銘, 고판탁지증좌참찬성산이공묘갈명병서故判度支贈左參贊星山李公墓碣銘幷序 등. 이 묘갈명들은 인조반정과 관련된 인물들이 많은 것 같다. 권17 : 묘문 9편. 고감사심공갈명병서故監司沈公碣銘幷序. 고사인유공묘갈명병서故舍人柳公墓喝銘幷序 등. 권18 : 신도비神道碑 4편. 영의정한음이공덕형신도비명병서領議政漢陰李公德馨神道碑銘幷序 등. 권19 : 신도비 6편. 동계정선생온신도비명병서桐溪鄭先生蘊神道碑銘幷序, 증영의정김장군응하신도비명병서贈領議政金將軍應河神道碑銘幷序 등 권20 : 신도비 6편. 전지사사서전공식신도비명병서全知事沙西全公湜神道碑銘幷序, 고판중추부사하담김공시양신도비명병서故判中樞府事荷潭金公時讓神道碑銘幷序 등. 권21 : 신도비 5편. 우의정나암정공언신신도비명병서右議政懦庵鄭公彦信神道碑銘幷序, 좌의정춘성부원군시북남공이웅신도비명병서左議政春城府院君市北南公以雄神道碑銘幷序 등 권22 : 시장 2편. 영의정완평부원군이공원익시장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元翼諡狀,증이조판서동계정공온시장 贈吏曹判書桐溪鄭公蘊諡狀. 이들 신도비명, 시장은 임진란壬辰亂 또는 병자란丙子亂을 전후하여 살던 인물들에 관한 기록이므로 이 시대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는 자료라고 생가된다. 특히 정온鄭蘊, 김응하金應河와 같은 사람의 의사義死는 높이 평가되어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권23 : 동사록東사錄. 동사록은1643년 그가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갔을 때의 기록이다. 그는 병자란으로 청병淸兵의 침입을 받은 원수를 일본세력을 끌어들어 설욕雪辱하자고 주장한 바도 있다. 여기에는 화루선설畵樓船說, 답도춘서答道春書, 일본국임도춘원서日本國林道春原書, 중답임도춘서重答林道春書,임도춘원서林道春原書, 관백설關白說, 제일본성씨록題日本姓氏錄, 왜국삼도설倭國三都說 및 시詩 55수首가 있다. 이것은 17세기초의 조선왕조인朝鮮王朝人이 일본을 이해한 단편적인 예라 하겠다. 본집의 글들은 소차疏箚나 개인의 전기傳記를 막론하고 당시의 정세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다. 이 시기는 임진란,병자란이 있었던 수난기受難期였으므로 이들 기록은 특히 진지하다. 그 중에도 동사록은 다른 문집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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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1992년 7월 찬성공파종회(당시에는 문간공파종회가 구성되어 있지 아니할 때였음. 문간공파종회는1996년에 구성되었음.)에서 산일散逸된 23권의 용주선생유고를 모아 부록을 포함한 4권의 "용주선생문집龍洲先生文集"으로 간행했을 때의 건행健行 찬성공파종회장의 간행사, 일본인 학자 미야케 히데토시三宅英利 박사의 축사, 11세손世孫 학윤學允씨의 "부록증보에 즈음하여" 를 옮긴 것이다. 부록을 포함한 4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는 현대문으로의 번역은 안 되었지만 유고遺稿가 더 이상 흩어지고 분실되는 불행을 막고 후손들의 관심을 촉구하면서 하나의 문집으로 전수傳授하였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용주선생문집 1 : 용주선생유고 권 1- 8 (583쪽) 용주선생문집 2 : 용주선생유고 권 9-15 (553쪽) 용주선생문집 3 : 용주선생유고 권16-23(613쪽) 용주선생문집 부록 : 참고문헌으로 문간공 신도비명, 국사대사전 중 문간공 부분, 쇄국직후의 조선통신사, 근세 일한日韓관계사의 연구, 학생백과대사전 중 문간공 부분, 강호江戶시대의 조선통신사, 일광日光과 조선통신사,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 연구, 용연서원지龍淵書院誌, 조선왕조실록 중 문간공 부분, 양주동 박사의 번역문 동사록 등이 수록됨. (580쪽)
간행사刊行辭
우리 포천은 북위 38도선 접경으로 6.25동란에는 남북간의 전황에 따라 조홍석청朝紅夕靑을 되풀이함이 누차에 걸쳐 조상의 유물보존에 유념할 겨를이 있을 리 없었다. 불행중 다행으로 용주龍洲 선조의 영정과 부조위 신주는 완전히 봉안보존되었으나 문집 23권이 산일散逸되어 버렸다. 소직이 그 중 19권을 종가댁宗家宅의 묵은 상자속에서 발견하여 우선 복간하여 종중에 배포한 바 있으나 송구함을 금치 못하였다. 서기 1986년은 용주공의 탄신 4백주년인 바, 그 해의 종친회 총회에서 기념사업으로 문집의 발간을 결의하였고 그 동안 이룩한 사안은 다음과 같다. 1. 문집중 산일되었던 4권이 고려대학교에 보존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을 보완하여 완질完帙이 이뤄졌다. 2. 1984년 6월 조선통신사에 관한 연구를 필생의 사업으로 하는 일본의 여류학자 대롱청자大瀧晴子씨를 초청하여 대한부인회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대롱씨는 용주공 묘에 참배하여 엄숙하게 치제致祭를 거행하였으니 지하의 할아버님께서도 흔쾌히 생각하셨을 것이다. 3.10세손 학윤學允이 비장秘藏하고 있던 임인조애장壬寅照厓粧 문간공유묵文簡公遺墨을 공개하여 복제배포하였는데 정묘중춘丁卯仲春에 김용채金鎔采 국회의원께서 5백부를 인쇄하여 경향의 유지에게 배부하여 용주공의 웅혼雄渾한 필치筆致를 많은 사람들이 상미賞味하게 되었다. 4.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일본 천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에서 용주공의 유묵遺墨이 발견되었다. 이상의 사업과 문집 발간의 발의, 기획, 자료의 수집과 번역 등은 족장族丈 학윤學允씨의 끈질긴 노고로 이루어진 것임을 밝혀둔다. 끝으로 1. 이 문집의 해제는 서울대학교 도서관발행 규장각도서해제에 따르기로 하였다. 2. 참고문헌으로 국내와 일본의 학자에 의한 용주공에 관한 서술을 게재한다. 3. 동사록은 양주동 박사의 현대문으로서의 명역名譯을 대조게재함으로써 독자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4. 공公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을 초존하여 연구에 보탬이 되게 하였다. 문집복간에 즈음하여 근세사 연구의 태두泰斗이신 일본국 北九州大學 명예교수 삼택영리三宅英利박사께서 축사를 보내주신데 대하여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 문집의 인쇄는 사계斯界의 중진인 경인문화사景仁文化社 한상하韓相夏 사장께서 맡아주셔서 내용이 정세精細하고 문집의 체제 장정등에 최선을 다하여 주신데 대하여 심사深謝하는 바이다. 이 문집의 간행으로 용주공의 높고 넓으신 문장학덕文章學德이 세간에 광포廣布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우리 종친만의 성사盛事이겠는가. 불비不備한 점은 후일에 보補하도록 하면서 간행사에 갈음한다. 단기 4324년 신미辛未 6월 일 한양조씨찬성공파종회장 건행健行 용주공 12세 종손 남웅南雄 謹識
복간復刊을 축하하여 일본국 북구주대학北九州大學 명예교수 문학박사 미야케 히데토시三宅英利 <조학윤趙學允 번역>
조선통신사연구의 과정에 있어서 제일 경앙敬仰의 념念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은 용주龍洲 주봉노인柱峯老人 조경趙絅이었다. 용주공께서는 많은 탁월한 특질이 있었다. 제1은 관인官人으로서의 합리성이다. 신흥청조新興淸朝의 강압强壓이 인조조仁祖朝에 가加하여져 왕조가 위난危難의 와중渦中에 있었을 때 공公은 인조 8년 5월 상소를 올려 청조淸朝의 일본에 대한 관심을 이용하여 일본과의 연대를 청조에 시사함으로써 청조를 견제하여 그로서 왕조의 안전을 보지保持한다는 소위 대외세력균형(The Balance of Power)의 외교책을 헌언獻言하였다. 문반체제에 알맞게 평화협조를 기본으로 하고 있어서 명확한 국제감각은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또 21년 2월부터의 통신사행부사通信使行副使로서의 방일訪日에 있어서는 일본천황과 덕천장군德川將軍의 법제적 층서層序에 관하여 " 관백비국왕關白非國王 "이라고 명확하게 인식하였으며 또 덕천정권의 언무偃武의 설명에 대하여도 소년까지도 대검帶劍을 하는 습성으로 보아 정권의 본질을 무위武威로 하고 있다는 수발秀拔한 판단력을 나타냈다. 제2는 학식인으로서의 심오성이다. 동사록 화방누선설畵舫樓船說에서 선비船備를 설명하면서 인생론에 언급한 바 있다. 타지정자0之正者 남북순기주南北順其宙 심지정자心之正者 좌우봉기원左右逢其原 반시칙주불안의反是則舟不安矣 신불수의身不修矣. 즉 학리學理와 처생관處生觀의 통일이다. 또 일본에서의 최고 유자儒者 임라산林羅山과의 학술, 시문의 응수應酬는 저명한 바 있지만 임라산 문집에 의하면 공으로부터의 교시와 격려에 라산은 감격하였다고 하였다. 또 동사록에서 볼 수 있는 일본 행려중行旅中의 풍물을 읊은 시문에는 도처에 유연한 감각과 풍부한 문학적 교양이 넘쳐 있어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학식인으로서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제3은 인간으로서의 지순성至純性이다. 판서判書, 중추中樞에 영진榮進하면서도 전지田地, 저택邸宅의 증식을 도탐圖貪하지 않았던 청렴결백한 태도는 발군拔群이다. 또 방일에 있어서도 여정旅程의 각역참各驛站에서 공찬供饌을 끝내 거절하여 일본인들을 두렵게 하였다. 특히 감명이 깊은 것은 병모病母의 개호介護를 위하여 인조仁祖의 소환까지도 사퇴하고 그 침두枕頭에서 국정에 관한 십조十條의 상소를 올린 효도의 실천이다. 인간으로서의 공의 자질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상과 같은 제상諸象에서 귀납歸納한다면 공은 조선왕조 후기에서의 희유한 존재이었다고 말하더라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위대한 선인의 저술이 한양조씨찬성공파종회의 진력으로 한국동란에서 산일散逸되었던 것을 수집하여 간행된다는 것은 비단 조선영성祖先英聖의 현창顯彰의 의의意義를 앙양할 뿐만 아니라 역사학계는 물론이고 복잡화하는 국제정세와 붕괴되어 가고 있는 도덕사회의 현상에 대하여 비익裨益하는 바가 다대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공에게서 배운 바 있는 일개학도一個學徒로서 충심으로 간행을 축하하는 바이다. 일본국의 초로草盧에서 1991년 5월 30일
부록증보附錄增補에 즈음하여
한국동란으로 산일散逸되었던 용주공 할아버님의 유고遺稿중 행방불명이 된 4권의 행방을 쫓던중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한적정리실漢籍整理室에서 발견되어 완질完帙로 복간復刊하게 된 것을 매우 기뿌게 생각합니다. 이 문집에서 23권을 3권으로 묶어서 미려美麗한 양장洋裝으로 정리하여 보관상 열람상 편리하게 꾸몄는데 부록으로 용주공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을 초존抄存하고 사전事典, 한韓,일日의 학자들의 논고論考를 약술略述하도록 하였습니다. 또 동사록은 양주동梁柱東 박사의 명역名譯을 대조게재對照揭載함으로써 이해를 돕도록 하였습니다. 회고컨대 이 문집의 발간은 불초가 보관하고 있던 문간공 유묵遺墨을 공개발간함으로서 발아發芽되었습니다. 이 유묵은 글씨 쓰는 법이 왕희지王犧之와 안진경顔眞卿의 체體를 닮아서 그 웅혼雄渾함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한 폭의 묵화墨畵를 관상觀賞하는 것 같은 황홀한 예술적 경지에 도취하게 합니다. 화보에 실린 유묵은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所藏되어 있고 또 일엽一葉의 유묵은 일본국 천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에서 보존하고 있는데 비귀秘貴한 일품逸品이 외국에 보존되어 있다는 것에 대하여 착잡한 심회心懷가 감돕니다. 그 유묵은 일본의 주부主婦 독학자인 대롱청자大瀧晴子 여사의 귀뜀으로 찾아낼 수가 있었는데 일인日人 동창생의 주선으로 알게 된 동 여사는 조선통신사의 연구에 반생을 바친 분으로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불초가 선조의 사적을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용주공을 추모하여 1986년에 내한來韓하여 신도비, 별묘, 회관, 용연서원을 참관하였고 묘소에 이르러 주과酒果를 배설하여 제사를 올린 바 있는데 모름지기 일찌기 없었던 초유初有의 일본 학자에 의한 치제致祭는 지하에 계신 용주공께서도 흔쾌한 미소를 지으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동 여사의 통신사 연구의 의도는 덕천막부德川幕府 260년동안의 12회에 걸친 사행使行에서 한일양국의 평화 우호적인 교린交隣을 부각시키면서 명치유신明治維新 이래 허트러진 양국의 현상을 바로잡아 보려고 하는 데 있었다고 보입니다. 끝으로 부록을 편집하는데 있어서 불초가 천학비재淺學菲才하여 제대로 자료를 수집하지 못하였음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불비不備한대로 이 문집을 복간하오니 유의有意하신 여러 학자님께서 나름대로 참고로 하셔서 용주공의 진면목眞面目을 발휘하는데 일조一助가 되시기를 빕니다. 유묵일엽遺墨一葉을 피로披露하여 주시고 문집 부록 등에 관하여 많은 협조를 하여주신 고대高大 한적정리실의 박성학朴性學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문집의 현대문으로의 번역이 없음을 탄嘆하면서 - 1991년 초하初夏 11세손世孫 학윤學允 근서謹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