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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의 기술
아무리 짧은 시 한 편을 쓰더라도 단편소설 한 편을 쓰는 것에 버금가는 시간을 투자하고, 자료를 취재하고, 공력을 집중시켜라. 감성이 무뎌졌다 싶으면 나이를 원망하지 말고, 부단히 감성을 훈련하지 않는 자신의 나태를 탓하라. 청년에게는 청년의 감성이 있고, 노년에게는 노년의 감성이 있는 법이다. 감성이란 또 여성의 전유물도 아니어서 남성적인 감성도 얼마든지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부디 열정을 품고 감성을 연습하고, 훈련하라.
생명이 요동치는 계절이면
넌
하나씩 육신의 향기를 벗는다.
온갖 색깔을
고이 펼쳐둔 뒤란으로
물빛 숨소리 한 자락 떨어져 내릴 때
물관부에서 차오르는 긴 몸살의 숨결
저리도 견딜 수 없이 안타까운 떨림이여.
허덕이는 목숨의 한 끝에서
이웃의 웃음을 불러일으켜
줄지어 우리의 사랑이 흐르는
오선五線의 개울.
그곳을 건너는 화음和音을 뿜으며
꽃잎 빗장이 하나둘
풀리는 소리들.
햇볕은 일제히
꽃술을 밝게 흔들고,
별무늬같이 어지러운 꽃이여.
꽃대궁 앓는 목숨의 꽃이여.
이웃들의 더운 영혼 위에
목청을 가꾸어
내일을 노래하는 맘을 가지렴.
내일을 노래하는 맘을 가지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등학교 때 쓴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제목은 「개화」다. 십대 후반의 감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하기엔 시어에 좀 징글맞은 구석이 없지 않고, 완벽한 시도 아니다. 꽃잎이 막 열리는 순간을 그리기 위해 그 당시에는 말의 선택에 꽤 고심을 했던 것 같다. '육신 · 색깔 · 물 · 빛 · 숨소리 · 물관부 · 몸살 · 숨결 · 떨림 · 빗장 · 목청'과 같은 명사들,
'요동치는 · 벗는다 · 차오르는 · 허덕이는 · 불러일으켜 · 뿜으며 · 풀리며 · 흔들고' 와 같은 용언들의 매혹에 빠져 미궁을 헤매듯 어지럽던 기억이 난다.
하나의 제재를 택한 뒤에 그것을 집중적으로 궁리하는 동안 감성은 자연스럽게 훈련이 된다. 시어와 제목의 유기적 관계를 따져보고, 시어와 시어 사이의 충돌을 살피는 일, 시적인 대상과 자아와의 거리를 조정하는 일들이 모두 감성의 훈련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뛰어난 요리사는 음식의 재료와 재료의 어울림에 예민하게 주목하는 자임을 잊지 말자.
특정한 제재에 맞닥뜨렸을 때, 그것을 어떻게 장악할 것인가? 중국의 시인 아이칭이 그의 『시론』에서 한 말은 음미할 만하다. “제재를 완전히 장악해야 비로소 예술세계의 통치영역을 확대하게 된다. 무릇 당신이 눈동자로 본 것, 귀로 들은 모든 것을 빠짐없이 당신의 사상체계 속에 잘 짜 두어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명령에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당신의 감각과 사유가 한 제재로부터 습격을 당할 때, 한바탕의 격투를 치르게 하라. 그 제재가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게 하라.”⁶
이 싸움의 과정은 몰입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몰입은 글쓰기의 중요한 바탕이면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온전하게 몰입할 때 온다. 시에 투자하는 물리적인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몰입하는 시간의 깊이가 중요하다. 단 한 시간이라도 시에 집중적으로 몰입해보라. 당신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열정적인 인간으로 성장해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몰입을 열정의 이음동의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몰입과 집중 끝에 얻는 도道를 「장자』에서도 가르치고 있다. 포정이 소를 잡는 유명한 고사다.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았다. 그 손을 놀리고, 어깨를 받치
고, 발로 딛고, 무릎을 굽히는 모양이나 또 쪼록쪼록 싹싹하는 칼 쓰
는 소리라든지가 모두 음률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 몸놀림은
상림의 춤과 어울리고, 그 칼 쓰는 소리는 경수의 장단과도 맞았다.
문혜군이 이를 보고 감탄했다.
"아 참으로 훌륭하구나. 기술이 대체 이렇게까지 미칠 수 있는 것
인가?"
포정은 칼을 놓고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도로서, 그것은 기술에 앞섭니다. 옛날 내가
처음으로 소를 잡기 시작할 때엔 눈에 보이는 것이 소밖에 없었습니
다. 그러다가 삼 년이 지난 뒤에는 소를 본 적이 통 없었고, 지금에는
오직 마음으로 일할 뿐 눈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곧 손발이나 눈 따
위의 기관은 멈춰버리고 마음만이 작용합니다. 소 몸뚱이 속의 자연
스런 본래의 이치를 따릅니다. 뼈와 살이 붙어 있는 큰 틈바귀를 젖
힐 때나, 뼈마디가 이어져 있는 큰 구멍에 칼을 넣는 일들은 모두 소
가 생긴 그대로를 좇아 하기 때문에 내 기술은 아직 한 번도 뼈와 살
이 맺힌 곳에서도 칼이 다치지 않도록 합니다. 하물며 큰 뼈다귀이겠
습니까? 솜씨 있는 백정은 일 년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살을
베기 때문이요, 보통 백정은 한 달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뼈
다귀에 부딪히 칼을 부러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칼은 이제 십
구 년이나 지났고 잡은 소가 수천 마리에 이르는데도 그 칼날이 막
숫돌에 간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은 두께
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집어넣기 때문에 넓
고넓어 칼날을 놀리는 데에 충분한 여유가 있습니다."
도가 기술에 앞선다는 말은 기술의 숙련과 연마가 도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이다. '소가 생긴 그대로' 를 따라 칼을 움직이기 때문에 두께가 없는 칼은 뼈마디와 살 사이의 틈을 여지없이 찾아낸다. 이것은 잡다한 사념을 벗어던지고 육체와 정신을 오로지 한곳으로 집중할 때 이르게 되는 경지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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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이칭은 중국의 현대 시인이다. 1936년에 첫 시집 『따옌히나의 유모』를 발표하면서 중국 민중의 열광적인 주목을 받았다. 1996년 작고한 후에도 그는 '중국 현대 시정시의 거장'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에 인용하는 아이의 시론은 「들판에 불을 놓아 』(유성준 옮김, 한울, 1986)를 따랐다.
7장자, 장자 (김달진 전집 4), 김달진 옮김, 문학동네, 1999, 45~46쪽.
안도현의 시작법 [가슴으로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중에서
2024. 9. 19.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