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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천사 역할은...
장 기로가 호숫가 '둔터니'로 이사온지 한 달이 돼가고 있었다.
그래설까? 이제는 어느 정도 호숫가의 특성도 몸으로 알아가고 있었는데,
아직도 마무리 되지 않은 집 주변 정리를 하다 보면, 그러니까 오후 네 시경이 되면... 호수에서 이상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었다.
물론 아직은 완연한 봄이 아니라 추운 건 사실이었지만, 왜 그런지 그 호수를 피해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어지는... 결코 긍정적이랄 수 없는 기분까지 나쁘게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도 그런 걸까? 아니면 나만 그런 걸까?' 하면서, 어쩐지 혼자 살아가는 자신이 애처롭게 느껴지기도 해서,
얼른 군불을 지피거나, 어떤 때는 아예 방으로 몸을 숨겨 일부러 홈페이지에 들락거리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하루 종일, 옆집에서는 기척조차 없었다.
'그 할머니가 왜 아무 기척이 없으실까? 혹시 무슨 일이?' 하는 생각에, 기로는 불안해서... 가 보기로 했다.
할머니가 기거하는 낡은 집 토방엔 파란 플라스틱 슬리퍼 한 켤레가 가즈런히 놓여 있었지만, 방문 바깥 고리가 끈으로 묶여있었다.
"할머니! 할머니, 안 계세요?" 큰 소리로(할머니가 못 들으시니까) 불렀는데,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 보다는 기로의 소리를 들은 그 위 산장 할머니 집의 개들이 더 요란하게 짖기 시작했다.
'어디 가신 게로구나.' 하면서 생각해 보니,
어제는 일요일이어서 오전에 교회에 가셨겠고, 그 뒤로... 안 돌아오신 모양이었다.
오히려 그게 더 안심이 되었다.
기로의 손에는 전 날 상범의 친구 부부가 사온 카스테라가 들려있었지만, 다시 들고 그 집에서 나와 돌 축대를 듬성듬성 걸어 ‘夢想?’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이었다.
아침에 기로는 안방에 보일러를 키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는데, 업로드 작업을 하는데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나기에 문을 열어보니 비가 살짝 뿌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날씨는 다시 을씨년스러워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전엔 마당을 고르다가,
'비가 조금 더 와주면 좋을 텐데, 어차피 상추씨를 뿌리는 것도 비가 조금 더 와야 좋을 텐데......' 하면서,
뒷밭으로 올라가 보았다.
그런데 작년에 났던 잡초가 누렇게 밭을 덮고 있었다.
우선 그 잡초를 걷어내야 할 것 같아서 천천히 그 덤불을 걷어내고 있는데,
그 때,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서 고개를 돌려 보니... 마을 입구 산장 쪽에서 택시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 마을의 개들은 그런 것마저도 알아채고 짖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택시지?'
기로는 일을 하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어쨌거나 건초 걷어내는 일을 계속 했다. 그런데 그 일도 힘에 부쳤다. 이미 마당을 고르느라 힘을 많이 쏟은 뒤여서 더 그럴 것이었다.
'아니, 그 택시는 옆집 할머니가 타고 오신 건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왜냐면 할머니 집 앞에 택시가 멈춘 것 같았고, 무슨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곧 택시는 다시 마을길을 빠져 나갔는데,
기로는 부랴부랴 축대 돌로 뛰어 내려가 보았다.
그런데, 안방의 토방엔 어제와 똑 같이 파란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문도 끈으로 매 있었다.
그 때 무슨 소린가 들렸다. 사랑채에서 나는 소리였는데, 부엌인가는 문이 열려있었다.
"할머니!"
기로가 큰 소리로 불렀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사랑채 방안에선 무슨 소린가가 계속 들려왔다. 그러더니, 결국 방문이 열렸다.
그런데 할머니는 한 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었다.
# 또 다른 인연...
어제 하루 종일 옆집 할머니가 보이지 않기에 궁금했는데, 오늘은 돌아오신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가 보니, 할머니는 아이들 장난하는 것 같은 안대를 한 쪽 눈에 하고 계시드라구요. 그래서,
"어디, 갔다 오셨어요, 할머니?" 하고 내가 묻자,
"어. 눈 수술하고 지금 왔어. 전주에서 잘 디가 없어서, 시방 택시 타고 왔어."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알기론, 아들이 전주에 산다는 것 같았는데......) "어떻게 왔어?" 하고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 할머니 안녕하신가 해서요......"
"그려? 고마워."
"아닙니다. 아침은 드셨어요?"
"응. 근디, 내가 며칠 없어서 한 번 와본 거여?"
"예."
"고마워..."
"아닙니다. 할머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고 나는 바로 통나무집으로 가서, 냉장고에 보관 중이던 그 카스테라를 꺼내 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가서 할머니를 부르니, 여전히 알아듣지는 못하시드라구요.
그래서 잘 열리지도 않는 미닫이문을 잡아당겨 열었는데, 한 쪽에서 뭔가를 하고 계시드라구요.
"할머니!"
"어?"
"이 거 잡수세요."
"뭐여?"
"부드러운 빵이예요."
"뭐 이런 걸 갖고 와. 갖고 가서 집(나)이나 심심할 때 먹어."
"저는 많이 먹었습니다. 근데, 방이... 춥지 않으세요?"
"시방은 안 춰."
"잠은 여기서 주무세요?"
"아니, 저기..." 하면서 위에 있는 다른 스레트 집(안채)의 안방을 가리키셨다.
"방은 따뜻한가요?"
"응, 전기장판을 깔고 자면 따숴. 가끔 나무도 때는디...... 누가 저기 농(장롱)을 갖다 놓았는디, 내가 땔 수가 있어야지......" 하시기에, 보니,
그도 그럴 터였다.
'아니, 할머니가 무슨 힘이 있어서 저런 장롱을 땔 수 있을 것인가? 갖다 주기만 하면 뭘 해. 때도록 만들어 줘야지.' 나는 괜히, 그 장롱을 실어다 주고 가 버린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괘씸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석유 보일러를 때믄 따순디, 다 떨어졌어." 하시는 거 아닌가.
그 순간 내 가슴이 쿵! 아려왔다.
"근데, 어저께랑 그저께랑은 어디서 주무셨어요?"
"공일(일요일) 날은 교회서 잤는디, 어저께 병원에 데려다 주고 점심도 사주드라고... 그리고 어저께는 병원에 입원혀서 거기서 잤어. 낼 모레 또 오라는디, 내가 저 고개 넘어가기가 너무 힘들어......" 하면서 마을길 초엽의 경사진 언덕을 가리키시는데, 할머니의 손가락이 떨리는 게 보였습니다.
아, 그럴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 순간적으로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모셔다 드려야겠다......' 하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러면서,
"할머니, 걱정마세요. 제가 할머니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하자,
"그려? 아이고, 고마워서 어떡혀!" 하고 화들짝 고개를 돌리시면서, "근디, 어떻게... 이렇게 좋게 생긴 사람이 와서 나를 이렇게 생각혀 주는지... 아이고, 하나님..." 하고, 이제는 하나님까지 부르시더니, "천사 아녀?"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할머니. 저는 천사가 될 사람이 못 돼요......" 하고 손사래까지를 쳤는데,
내가 머쓱해지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답니다.
'무슨, 천사?' 하고, 고개를 저으면서까지 나에겐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말씀이긴 했지만, 그런데,
"근디.. 나도 저런 막둥이가 있었어."
"?......"
"서른세 살 먹었는디, 작년에 죽었어." 하는 할머니의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맺히드라구요.
순간 나도 서글픈 느낌이 들어,
'안돼!'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답니다.
"왜 그렸는지 모르게, 죽어 버렸어. 그려서 내가 화병이 들어... 이렇게 눈이 안 보인다는 거여. 그려서 수술을 혔는디, 이쪽도 또 허라고 허대......" 하시는데,
그 얘기까지를 들으니, 나는 왈칵 울어버리고 싶기까지 하드라구요.
그렇지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한 말이 겨우,
"그렇지만, 할머니! 그런 생각은 마시고 마음 편하게 사셔야 합니다. 그래야 눈이 빨리 나아요......" 하고 말았는데,
"내가 어떻게 편허게 살어? 자식 앞세운 에미가, 어떻게 편혀?" 하고 물으시는데, 나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내 딴에는 위로해드린답시고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오히려 그 분의 마음을 더 슬프게 한지도 모릅니다.
그 '에미의 마음'을, 내가 어찌 알겠습니까?
3 . 25
그렇게 '夢想?'으로 돌아오면서도 기로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내가 저 할머니께 뭘 해드릴 수 있을까? 석유를 사다 보일러를 때시게 하면 좋을 텐데... 석유를 1,2 만원에 배달해주는 것도 아닌, 최소한 15만 원어치는 주문해야 한다던데(지난번 '夢想?'의 보일러를 놓으면서 알아보았던 일이었다.)...... 나 사는 것도 이렇고, 내가 지금 빚이 얼마로, 코가 석자로 빠져 있는데......' 하다가 순간,
'아, 저 집 앞에 있는 나무라도 잘라 드리자. 전기톱을 이용하여 적당한 크기로 잘라 드리기만 해도 좋아하실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로는 오후 일정을 그 집 앞에 널려있는 나무를 자르기로 변경했다. 원래는 근방에 다니면서 뭔가 스케치를 하려고 했었는데......
아무튼 돌아오자마자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아,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편지글'로 써놓기는 했다.
기로는 점심을 먹고 전선 콘센트를 '夢想?'에 연결시킨 뒤, 상범의 전기톱을 들고 다시 할머니 집으로 갔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할머니!" 큰 소리로 불러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사랑채의 문을 여니 텅 비어 있었고, 안방으로 올라가 문을 여니 두툼한 이불 속에 할머니는 꼼짝하지 않고 누워 계셨다. 그 것도 두툼하게 깔아놓은 이불에 조금 굴곡이 있는 곳이 할머니였다.
기로는 깜짝 놀랐다.
'이 대낮에도 저렇게 누워 계시는구나! 누구 말할 사람이 있나, 뭐 재미있는 일이 있나...... 할머니한테는 밤이나 낮이나 별 다를 게 없을 것이로구나. 전기장판을 까셨는지 그 위에다 이불을 두껍게 펴 놓으셨으니, 그 안에 계시면 그리 춥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위풍은 셀 텐데......'
기로가 문을 여는 것을, 방의 밝기로 알아 차렸는지, 그제야 할머니가 일어났다.
"할머니, 저기 집 앞에 있는 나무를 잘라 드릴께요."
"뭐?"
"나무를 전기톱으로 잘라 드린다구요."
"힘들어서 안 돼."
"괜찮아요. 제가 해드릴 께요." 하면서 기로는 밖으로 나갔고, 할머니는 천천히 뒤따라 나왔다.
일단 기로는 집 앞에 있는 나무 몇 개를 골라 적당한 크기로 잘랐다.
전기톱 소리가 요란했지만, 할머니는 그 소리마저 잘 못 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기로가 잘라 놓은 통나무를 할머니는 마당에 옮기는 것이었다.
"할머니 그만 두세요. 힘들어서 안돼요."
"아니, 이건 내가 할게..."
"아닙니다. 할머니가 하시기엔 너무 무거워서 안 됩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삐쭉삐쭉 통나무 하나를 끌고 가려는데, 기로가 보기엔 곧 쓰러질 것 같았다.
그래서 기로는 뛰어가서 할머니를 말렸다. 그리고 자신이 마당에 갖다 놓았다.
나무를 자르면서 생각해 보니, 도끼로 나무를 패야 했는데, 기로 자신이 그럴만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닌데다 게다가 나무를 자르는 것만도 힘이 제법 들어, 걱정이었다.
'어떡한다지?' 하면서 기로는,
'할머니, 이 나무를 일단 잘라만 드리고... 나중에 제가 아는 사람들이 오면, 도끼로 패드리기로 할께요." 하자,
"응. 그려... 근디, 쉬었다 혀!"
"예, 괜찮습니다."
"힘든게, 쉬었다 혀."
"조금만 더 하고나서요."
할머니는 기로가 일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한 쪽 눈에는 수술한 뒤 둥근 안대 같은 것을 두르고.
이따금 기로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할라치면 희미한 웃음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때, 핸드폰이 울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운명이었을까?
"안녕하슈? 노인네..." 하는 건, '서 창모'였다. ('서 창모'는 '구 병태'와 대학 같은 과 2년 후배로, 공교롭게도 서울의 같은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사이이자 기로의 대학시절 한 동아리 멤버였다.)
"누구야? 서 선생이야?"
"예. 히 히 히..."
"이 건, 무슨 일이지? 내가 방금 전 그를 겨냥해서 할머니께 얘기를 했었는데(서 창모는 시간이 나면 여기로 놀러 와서, 내 방에 지필 장작 나무를 도끼로 패준다고 했었다. 본인 스스로 ‘마당쇠’라고 하면서.),
무슨 운명도 아니고, 그의 전화가 오다니!' 기로는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무신 소리래요?" 서 창모가 장난기어린 어조로 물었다.
"정말, 묘하군......"
"뭐라는 거예요?"
"글쎄, 아... 그렇잖아도 방금 서 선생 생각을 하면서, 그런 얘길 했었는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네!" 하자,
"헤 헤 헤... 내가 텔레파시를 던졌다니까. 근데, 지금 뭐 허슈?"
"응, 여기 내가 사는 집 옆에, 아무도 돌보아주는 사람 없이 혼자 사시는 할머니가 계신데, 찬 방에서 전기장판만 깔아놓고 주무시기에, 내가 해드릴 게... 나무라도 잘라 드릴 것뿐이라서, 그러고 있는 중이야."
(기로는, 어차피 할머니가 이런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거라는 계산으로 서 창모에게 자연스럽게 얘기를 했던 것이다.)
하면서, "이 나무를 도끼로 패야 되는데, 지난번에 니가 나에게 그랬잖아? 여기 와서 도끼로 땔 나무를 패주겠다고, 마당쇠라나 뭐라나 하면서...... 그래서, 서 선생이 와서 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거야." 하자,
늘 그렇듯 기로와는 장난처럼 얘기하던 그가 갑자기 아무 말도 잇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 아이고! 형, 그 집엔 보일러도 없대요?" 하고 툭 한 마디를 던졌다.
"아니, 보일러가 있긴 한데, 석유가 떨어져서 전기장판에서 주무신다는 거야...... 게다가 오늘은 눈 수술까지 받고 오셨다는데... 조금 전에 와 봤더니, 찬 방에서 꼼짝 않고 누워 계시더라고...... 연세가 여든 다섯이라는데, 그리고 자식은 많은가 본데, 다들 살기가 힘들어 할머니 돌보아 드리는 사람도 없다고 해......" 하자,
"아이고, 이걸 어떡하나? 형! 내가 당장 석유 값 보내드릴 테니, 형이 기름 사다 넣어드려요. 요즘도 날씨가 얼마나 추운데, 노인네가......" 하는 것이었다.
"글쎄, 나도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그래, 형. 힘들게 일하지 말고 내 말대로 해요. 석유를 넣어드리세요. 내가 돈 보낼 게......"
"너, 갑부냐?" 기로는 일단 그런 식으로 말은 했다.
"갑부라야 그런 일 한대유?" 여전히 서 창모는 충청도 출신 답게 평소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기로는 그러지 말라는 얘기는 하지 못했다.
어쩌면 서 창모의 말을 당연시여기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들 사이는 그럴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서로에게 믿음이 있었다. 옛날 대학 시절에도 그들은 곧잘 남을 돕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는데, 그게 아직도 이런 식으로 이어질 줄이야......
어디 그뿐이랴? 본인이 안타까워하고 있던 상황에서 한 줄기 해결책이 나타난 것 같아, 기로는 갑자기 마음이 뿌듯해지는 기분으로 돌아서고 있었던 것이다.
'아, 착한 서 창모... 그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이런 착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니......'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기로는,
''천사' 역할은 니가 해라. 나는 천사도 아니고, 될 수도 없는 그냥 한 '속물'이니까.' 하면서도,
그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서 창모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이 이렇게 잘 통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살 맛나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던 순간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런 감동으로 기로가 잠시 말을 잇지 못하자,
"형, 일 생겼네?" 하는 것이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 하자,
"형, 성질에... 그런 것 보고 못 참잖아!" 하는 그의 말에, 기로는 또 다시 가슴이 뭉클해졌고,
"글쎄, 아무래도... 내가 그냥 말 수가 없을 것 같아......" 하자,
"그러자구요, 형은 옆에서 조금씩만 돌봐드려. 그럼, 석유 값 정도는 내가 알아서 보낼 테니까......"
일은 그렇게 이어졌다.
마치, 무슨 각본에 미리 짜여있던 것처럼......
할머니는 기로가 전화 받는 걸 보더니, 어차피 알아듣지는 못했을 터라...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손에 뭘 들고 나왔다. 그러면서,
"더운 게, 마시고 혀." 하고, 누군가 할머니 마시라고 사다드렸을 두유 두 개를 기로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로는 하나를 마시면서 이제 서 창모로부터 힘을 얻은 나머지,
"할머니, 전기장판이 몸에 안 좋아요." 하는 식으로 얘길 풀어갔다.
"그래도 어떡혀?"
"그래서... 제가 석유 넣어드릴까 하니... 앞으론 보일러 키고 사세요."
"안 돼. 그게 무슨 소리여? 그리고, 돈이 어딨어?"
"그런 걱정은 마시고, 내일부터 보일러 키고 사세요."
"안- 돼. 근디, 4 월부터 정부에서 기름 넣어준다고 혔어."
"아, 그래요? 그러면 오늘부터는 전기장판 사용하지 마세요. 오늘은 나무를 때고, 내일 부터는 보일러를 때고 사시면 되겠네요."
"아녀, 정부에서 넣어준다고 혔어. 그러지 마. 월급도 안 받는 사람이 돈이 어딨어서 기름을 넣어줘."
(할머니는 처음에 기로가 이사떡을 돌리며 인사를 드릴 때도, '월급은 어디서 받으려고 이런 촌구석에 와서 살려고 하느냐'고 물어, 기로는 '월급을 안 받는다'고 했었다.)
"그런 걱정 마시고, 제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기로는 큰 나무 자른 것은 마당에 차곡차곡 쌓아 놓았고, 오늘 땔감으로 자른 얇은 것은 부엌으로 옮겼는데, 오히려 부엌 안엔 나무가 하나 가득 쌓여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놀라지 않을 수 없어서,
"어? 할머니! 나무 많은데요?" 하자,
"응. 전기장판 깔고 살어서, 안 때서 그려."
"그럼, 불 많이 때고 따뜻하게 사시지, 그렇게 춥게 사셨어요? 오늘부턴 따뜻하게 사세요. 오늘은 제가 불을 때 드릴께요."
"아녀. 불은 내가 때도 돼."
"괜찮습니다."
"아녀. 이리 나와. 불은 내가 땔 거여. 모레 병원에 갔다 와서 땔 거여."
"모레요? 나무가 이렇게 많은데, 왜 안 때려고 하시는 건데요?"
"응, 내년 시안(겨울)에 땔라고......"
"예에?..."
기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머뭇머뭇 부엌에서 나왔다.
'할머니는 멀리 보시는 것이다. 나무를 아끼고 아껴서, 내년 겨울에 때리라고...... 그러니까, 나무라도 그렇게 저장해 놓아야 마음이 놓이신다는 뜻이리라. 비록 지금 당장은 춥게 지내더라도, 부엌에 하나 가득 저장해 놓은 나무를 보면 마음이라도 든든하실 것이다...... 그런데 내가 뭔데 할머니께 이래라저래라 하겠는가. 다만, 나는 이웃으로서 할머니를 조금 도와드리고 싶은 것뿐이다. 할머니의 마음까지 내가 조정할 수는 없다. 할머니도 본인의 삶이 있는 것이고, 나름대로의 계획도 있으실 테니까......'
# '요로법'
'요로법'.
엊그제 김 선생님께서 전화로,
'혼자 살면서 자신의 건강은 자신이 챙겨야한다'면서 권했던, 본인의 오줌을 마시는 건강법입니다.
그런데 사실 나에겐 이 요로법이 낯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바르셀로나에 살 때, 고질병이었던 속 병 때문에 시달리던 모습을 본 스페인 사람 하나가, 신중한 태도로 권해서 이미 해보았던 경험이 있던 사람이니까요.
한 6 개월 정도 내 오줌을 마시며 건강의 회복을 빌었었지요.
그런데, 뭐 별 신통한 효과가 있는 것 같지가 않아... 하다가 때려 쳐버렸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김 선생님이 권하셔서 수긍을 한데다가(고려해 보려고 마음먹었던), 요즘 읽고 있는 ‘야생초 편지’에서도 저자가 ‘요로법’에 대해 피력한 것을 읽었기에, 이래저래... 혼자 사는 내 자신의 건강을 위해 심사숙고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런데, 오줌을 마신 뒤 입가심할 뭔가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찾아본다는 것이, 피일차일 미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딱히 뭔가 그런 약초를 다린 물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준비할 처지가 못 되어 미루고 있었던 거지요......
그러다가 오늘 아침 갑자기,
'에이! 오늘부터 시작해버려야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여기 이사 온지도 벌써 한 달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뭔가 내 스스로 틀을 잡아야할 것 같았습니다.
산책을 한다던지, 건강을 위한 식이요법이라도 뭔가 하나를 택해서 한다던지, 그리고 규칙적인 시간 활용을 위해 작업 시간도 가능하면 정해놓고 맞춰서 해야될 거라는... 생각은 이미 해두었던 것이어서,
실행하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각과 함께 오늘 아침에 요로법을 시작했답니다. 입가심할 아무 것도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허긴, 마음먹기가 힘들지, 한 번 마음먹으면 실행하는 것은 곧잘 하는 나거든요.
그래서 담배도 남들보다 훨씬 독하고 쉽게 끊었던 전력도 있는 사람이니까요.
내 오줌을 마셨는데,
찝찝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차라리 아무 맛이라도 없다면 모를까......
몸에서 방금 나온 것이라 미적지근함까지......
마음먹은 것이라, 두 눈 딱 감고 망설임도 없이 꿀꺽꿀꺽 들이키긴 했는데,
그 뒷맛이 영 찝찝하기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게 처음 일은 아닌데다가... 그 걸 참지 못한다면, 뭐 힘들게 실행에 옮겼겠습니까?
그냥 밀고 나갈 겁니다.
몸이라도 건강해야지요.(비록 지금은 그렇지 못하지만......)
혼자 살면서, 주위 사람을(가족이 없으니, 최소한 형제라든지?) 괴롭히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3 . 25
그렇잖아도 썩 건강 체질이 아닌 기로는, 시골 생활을 하기 위해 내려온 이유와 목적 중에는 건강의 회복이란 요소(명제?)도 하나 포함돼 있었다.
뭔가 절제 있는 생활을 해서라도 본인이 가지고 있는 고질병인 ‘십이지장 궤양’을 좀 호전시키고 싶다는 의욕이 있었던 것이다.
몇 년 전 송 선희의 불륜을 알게 된 이래, 이혼을 하면서까지 술독에 빠져 지냈던 기로는, 결국은 그런 일로 인해 장 출혈로 몇 차례 병원에 실려 간 전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심기일전해서 정했던 일이 스페인 바르셀로나로의 도피생활이었다.
마침 지인 중의 하나가 이미 스페인에 가서 지낸지 1년 정도 되었는데, 기로의 상황을 알고는 바람도 쐴 겸해서 놀러오라고 했던 일로부터... 세상을 포기할 정도로 지쳐있던 중에 현지에 바람 쐬러 갔다가, 마음을 정한 뒤 바로 스페인 유학을('비자 문제'로 '유학'이란 핑계를 댔을 뿐, '피난'이 더 맞는 말이다.) 결정했던 기로였다.
거기서 그 지인이 막 시작했던 식당 일을 도우면서 근근이 2년을 지낸 뒤, 다소 몸이 회복되어 돌아왔던(거기서 금연도 성공을 했다.) 기로는 한국에서의 적응 기간이 꽤나 힘들기도 했었다.
그런데 바르셀로나에서 지내면서 불가리아 여인을 만난 뒤, 최근에는 불가리아를 두어 차례 오가면서 그 여인과 지내게 되었는데, 아무튼... 그렇게 몇 년 동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던 지병이 있어서, 주변에서도 걱정을 많이 해주는 처지였던 것이다.
다음 날 오전에도 마당에 나간 김에 기로는 다시 마당 고르기에 들어갔다.
아직 안개에 덮여서 호수마저 안 보였지만, 문제 될 리는 없었다.
그렇게 일을 조금 하고, 음악을 틀어 놓았다.
그리고 마루에 서서 멍청히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나무 사이로 언뜻 옆 집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바로 내려가 그 집으로 가자, 할머니가 막 부엌으로 들어갔는지 문 닫히는 게 보였다.
기로는 닫힌 문을 바로 열어보았다. 그러자 할머니는 깜짝 놀랐다.
"웬일로 이렇게 또 왔어?"
"안녕히 주무셨는가 해서요......"
"그려? 아이고, 고마워..."
"춥지는 않으셨어요?"
"응."
"그래도 나무를 때셔야지요."
"괜찮어."
"할머니 내일 병원에 갔다 오시면, 제가 4 월에 정부에서 기름 넣어줄 때까지 때시게 기름 넣어드릴 께요."
"아녀, 괜찮어. 돈이 어딨어서? 돈도 못 벌잖어?"
"저, 그림 그려서 돈 벌어요."(이 건 거짓말이다.)
"많이?"
"많이는 아니고... 조금요."
"그려도 먹고는 살어야지."
"그런 걱정 마시구요... 먹고 살 정도는 버니까요......"
"아침은 먹었어?"
"아직요."
"그럼, 여기서 먹고 가."
"아닙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뭘 먹고 사세요?"
"응, 교회에서 반찬 해 와. 그려서 국이나 조금 끓여서 먹어. 근디, 집이는 뭘 먹고 살어? 반찬이랑 혀 먹어? 혼자서?"
"예, 제 형수님이 해 가지고 와요."
"성수가?"
"예."
"어머니는 어딨어?"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아버지도요."
"그럼, 아무도 없는 혼자네?"
"형이랑 누나가 있잖아요."
"그려? 몇이나?"
할머니는 기로가 혼자 사는 걸 알아선지, '결혼'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그건 기로에게도 잘된 일이었는데,
가족문제로 말이 길어지기에 기로는 얼른 병원 문제 쪽으로 말을 바꿨다.
"근데, 할머니는... 병원 문제가 급한데...... 언제지요?"
"내일 7 시에 가야 혀."
"그렇게나 일찍요?"
"저기 학교버스가 있는디, 그거 타야 혀. 8 시 10 분 찬디, 일찍 나가야 혀..."
"너무 이르지 않나요?"
"내가 저 고개를 올라가려면 힘이 들어서... 그리고 마암리에 내려서 챙피스럽드러도, 또 전주가는 시내버스 타야 혀."
할머니 얘기를 듣고 보니, 그럴 것이었다.
그러니 할머니 혼자 여기서 전주까지, 그리고 병원까지 가려면 얼마나 먼 길이 될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노인이라 무료로 시내버스를 타게 될 텐데, 요즘 불손한 운전기사가 어디 한 둘이던가. 그들이, 시간도 잡아먹고, 누군가 부축이라도 해 드려야하는 할머니가 버스에 오르내리는 걸 좋아할 리가 없다.
그들의 짜증내는 모습이 눈에 선했던 기로는,
'그 와중에 할머니는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실까?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라도 병원에 가셔야 하신다니......' 하면서,
"할머니, 그런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모셔다 드릴께요."
"안 돼. 미안혀서..."
"아니예요. 할머니..."
"차도 없잖여?"
"그런 걱정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해 드릴께요."
그렇게 실랑이를 하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주제를 바꿨다.
"근디, 여기서 얼마나 살거여?"
"1 년요."
"1 년?"
"예. 근데, 할머니, 빨래는 어떻게 해 입으세요?"
"응, 저기 수도에서..."
"손으로 빨래해 입으세요? 힘드신데......"
"아녀, 옛날처럼 일을 많이 혀야 옷이 드러워 지는디, 요새는 일 허지 않은 게, 옷이 배랑(별로) 드러워지지 않어."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기로는 생각했다.
'잘 됐다. 오늘 친구가 와서 수도를 통나무집에서 연결시켜 주면, 세탁기를 '夢想?'에다 옮겨놓고(지금은 통나무집 화장실에서 무용지물로 공간만 차지하고 있음), 할머니 빨래도 내 세탁기를 이용해서 하시게 해 드려야지.' 하면서,
"그래도, 힘드시니까... 할머니, 저한테 세탁기가 있거든요. 그러니, 거기다 빨래해서 입으세요. 같이 쓰면 돼요."
"아녀, 얼마 되지 않은 빨래니 내가 혀도 돼."
"괜찮아요."
"고마워."
그러다가 다시,
"근디, 나 같은 사람헌티 왜 자꾸 이려?"
"예?"
"너무 잘혀준게, 내가 어떡혀야 헐지 몰라서 그려..." 하시는 것이었다.
'글쎄, 할머니 입장에서도 조금은 당황스러우시리라. 어느 날 갑자기 이웃에 이사와 사는 사람(나)이 이런 저런 관심에다 친절을 베푸니... 싫지는 않으시겠지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으실 지도 모른다. 글쎄, 나도 왜 그런지 잘 모르지만, 그렇게 해 드리고 싶다. 어차피 지금 이 할머니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바로 나니까. 최소한 거리상으로라도...... 이 할머니 집과 내 '夢想?'과는 나란히 붙어 있으니까. 애당초 몰랐으면 모를까, 이제 이것저것 다 알게 된 상황에서, 내가 안 본 척 모른 체할 수는 없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아니면, 날더러 이 할머니를 보살피라고, 누군가가(?) 여기에 살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나는 내 마음 가는대로 하면 된다. 다만, 할머니가 가능하면 덜 부담스러워 하시도록......' 하고 있는데,
할머니는 한 가지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저... 돈 없응게, 나 헌티 기름 넣어주지 말고... 차라리 불이나 좀 때 줘..."
"예? 그런 걱정 하지 마시라니까요!"
"그냥, 불만 조금 때 줘..."
'아마, 할머니는 어제 밤 내내 그 생각을 해 놓으셨는지 모를 일이다. 어차피 정부에서 기름은 넣어준다고 했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될 텐데, 나 같은 사람이 돈 들여서 기름을 넣어준다는 것이 고맙기도 하겠지만, 한 편으론 부담스러워서 자꾸만 사양하실 게다......'
그래서 기로는, 생각 끝에 할머니 말씀대로 따라주기로 했다.
오늘 저녁 무렵에 불을 때 드리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내일 병원에 가시는 일은 어떻게든 책임져 드리려고, 할머니의 진료서 용지를 보고 전주의 안과에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의 스케줄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할머니 말씀처럼 다른 쪽 눈을 수술하는 것이 아니고, 치료차 병원에 와서 하룻밤을 자고 가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하룻밤을 잔다는 사실로, 할머니는 또 다른 눈도 수술을 받는 걸로 잘못 알고 계셨다는 간호사의 말이었다.
그래서 기로가 그 걸 알려드리자,
'수술하지 않을 바에야, 귀찮게 자꾸 전주까지 왔다갔다 하기 싫다'면서,
아예 안 가겠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로가 펄쩍 뛰며, 그러지 말고 가야 한다고 하자,
조금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할머니 생각은,
아예 눈 수술을 해 버리면 힘들고 번거로운 바깥나들이를 자주 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치료를 받으러 왔다갔다하는 게, 할머니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힘들다는 것이었다.
할머니의 생각도 일리는 있었다. 그 어려운 전주까지의 나들이를 몇 번 반복하기가 돈도 너무 많이 들고 잦은 외출은 죽어도 하기 싫으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알고 보니,
어제 밤에, 방에 불을 때지 않은 것도, 내일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면 거기서 자야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방이 식을 게 아까워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래서 기로는,
"할머니, 어차피 내일은 전주 안과에 가셔서 치료를 받고 하룻밤을 주무신 뒤 돌아오실 테니, 오늘밤이라도 여기서 주무셔야하기 때문에 방에 불을 때야 합니다."고 하자,
그제야 수긍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기로가 병원에 모시고 간다고 하니,
"그럼 돌아올 때는 어떻게 할라고?" 물으셨다.
그러니까 택시를 타고 가겠다는 기로의, 돌아올 때의 차비까지 걱정을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 어차피 저도 전주에 일이 있어서 가는 거니(거짓말이었다.), 할머니 치료가 끝나면, 저는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 됩니다."고 했더니,
할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뒤, 겨우,
"고마워..." 말끝을 흐리셨다.
저녁에 자신의 '夢想?' 아궁이에 불을 먼저 지핀 다음, 기로는 옆 할머니 집으로 갔다.
여전히 '관두라'는 할머니의 성화가 있었지만, 그 건 미안해서 하는 말이란 걸 기로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불을 때다 보니,
'할머니 혼자 이 불을 때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장작이 충분하다고는 하나, 쭈그리고 앉은 상태에서 나무 장작을 일일이 내려서(어떤 것은 꽤나 무거운데) 불을 붙이는 일이 쉽지 않았던 데다, 할머니는 더군다나 눈 수술까지 받은 상태라... 그래서도 안 될 것이 분명해 보였던 것이다.
그 집 부엌엔 녹이 새빨갛게 슨 가마 솥 두 개가 걸려있었는데, 말이 부엌이지... 한심할 정도로 누추했다.
게다가 두 솥 다 구멍이 나서, 그 안에 물을 부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기로가,
"할머니, 이 솥을 빼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고 물었더니,
"그러믄... 연기가 너무 많이 나서 그려...... 그려서 그냥 쓰고 있는 거여......" 하고 힘없이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기로 생각엔,
'솥이 벌겋게 달궈지지나 않을까?' 우려했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다만, 한 아궁이에 불을 지피니, 연기가 다른 아궁이로 나와서 매운 게 힘들었지만.
그런 상황에서 눈 수술까지 하신 할머니가 불을 땐다는 건, 말도 안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이제 됐응게... 그만 가 봐." 하고 몇 번을 참견을 했다.
"근디, 왜 이렇게 힘든 일을 해주는 거여?" 하고 갑자기 할머니가 물었다.
"제가... 할머니를 조금이라도 도와드리는 것이... 기뻐서요." 하자, 할머니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는,
"내 아들보다 낫네..." 하더니, "나는... 아들 전화 번호도 없어서, 전화도 못 걸어......" 하는 것 아닌가.
그 말씀 역시 기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아마, 내일 병원에 가면... 전주에 가서 하룻밤을 자게 될 텐데,
'아들에게 전화라도 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실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그런 생각을 하시면, 마음만 아프실 테니까요......" 하고 기로가 위로를 하자,
할머니는 시선을 땅으로 주더니,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기로는 할머니의 자식에 대한 얘기도 묻지 않기로 했고,
'글쎄, 모르긴 해도... 그 자식들도, 나름대로는 사정이 있으리라...... 그나마, 내가 그들에 대해 조금 아는 건, 다 이웃에게서 흘려들은 게 전부니까, 그리고 그 자식들 문제와 나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그저, 이 옆집에 사는 이웃일 뿐이고, 내 옆집에 홀로 사시는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조금 도와드리려는 것 뿐이니까.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다......' 하면서,
앞으로도 할머니의 자식들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을 생각까지 해두었다.
그리곤 다시 '夢想?'으로 돌아왔는데,
'그나저나, 내일 할머니를 어떻게 병원까지 모셔다 드린다지? 콜택시라도 불러야 하나? 그러자. 그게 나을 것 같다. 할머니 말씀대로 석유를 넣어드리는 건 당분간 보류하기로 하자. 그리고 그 돈으로 차라리 할머니를 편하게 병원에 모시고 가자. 현 시점에서는 그게 더 긴박하고 중요하다. 할머니를 모시고 마을길을 걸어나가 스쿨버스를 얻어 탄 뒤, 또 '막은댐'에서 내려, 또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전주에 가서, 거기서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는 여정이... 너무 힘들 것 같다.(원래는 그렇게 갈 예정이었는데......) 그러다 보면, 버스 기사들의 투정을 듣는 것만으로도 병원 찾아가는 사이에 지치고 말 것 같으니, 어차피... 혼자 가나 둘이 가나 택시비는 마찬가질 테니, 내가 할머니를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의사를 만나 구체적인 얘기까지를 듣고난 뒤, 거기에 따라 대처하기로 하자.' 하는 생각으로,
어쨌든 돈이 있어야할 것 같아 인터넷 뱅킹에 들어갔는데,
"어?" 하면서 기로는 절로 튀어나온 말과 함께,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