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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강해(18)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본문 : 살전 4:9-10
바울 사도의 관심사는 하나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지침입니다.
먼저 바울은 ‘거룩한 삶’을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살전 4:3-8).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뜻이기 때문입니다.
3절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7절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리고 그 거룩한 삶의 첫걸음이 바로
‘음란’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3절, 5절).
<형제 사랑>.....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두 번째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곧,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도끼리의 사랑입니다.
9절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바울은 자신이 전도한 사람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부를 때에 “형제들아”라고 불렀습니다.
4장도 “그러므로 형제들아”(1절)라고 부르면서 시작하였습니다.
아들뻘인 디모데를 소개할 때도
‘우리 형제’라고 부르면서 소개하였습니다.
3:2a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나이가 많고 적건 간에,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다 형제로 여겼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는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4:1)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로마교회에 편지를 쓰면서도
“형제들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사실 유대인인 바울의 입장에서
이방인들을 향해서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
아마 천지가 개벽을 하는 정도의 충격적인 일입니다.
유대인에게 다른 민족은 사람도 아닐 뿐입니다.
특히 로마 사람들을 이렇게 존대를 해서
부른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겁니다.
유대인인 바울의 입장에서는
아주 치욕적인 표현일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정복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로마는 원수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은 원수인 그들을 형제라고 기꺼이 부른다는 겁니다.
더욱 극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쓴 편지입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AD62년 경)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을 나온
노예 오네시모를 만났습니다.
그 주인은 빌레몬으로 바울의 전도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된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에게 복음을 증거하였고
그는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10절)로
표현할 만큼 그를 사랑하였습니다.
그 후 오네시모는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고...
바울 사도는 그를 곁에 두고
복음사역의 동역자로 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이 원했던 것은 주인 빌레몬의 용서였고, 허락이었습니다.
오네시모가 아무리 바울을 만나서
예수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았다
할지라도, 빌레몬 입장에서는 여전히
절도범이요, 도망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 종이 주의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주인으로부터 용서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허락을 받고 와서
자신을 도와주기를 원했습니다(14절).
그래서 그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한 마디로 오네시모가 지은 손해는
자신이 갚을 테니 그를 용서해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바울과 빌레몬은 보통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을 동역자요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레몬에게까지 그의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16절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성도님들 !
바울이 오네시모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빌레몬에게 형제로 여기라는 것은
무리한 부탁처럼 보입니다.
오네시모는 돈을 훔쳐 도망간 나쁜 종이었습니다.
언제 잡히기만 하면 죽여 버릴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종을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성도님들이라면, 내 밑에서 일하던
종업원이 어느 날 거액의 돈을 훔쳐서
도망갔다면, 그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설령 용서까지야 할 수 있다 해도, 그를 진정
내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이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 바울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이
노예 해방이라는 역사적인 과업을 시행하면서...
영감을 얻은 것이 바로 신약성경의 빌레몬서라고 합니다.
물론 링컨의 노예해방의 배경에는
정치적인 계산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그는
빌레몬서를 읽으면서 자신의 집에서
종살이하는 노예들을 생각했었고...
그것이 곧 세계역사에 길이 남을
노예해방이라는 과업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남녀노소, 신분을 뛰어넘어
주안에서 모든 사람을 ‘형제’로 여겼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성도를 향해 형제라고 불렀을까요?
거기에는 매우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① 형제는 한 부모한테서 태어납니다.
그 뿌리가 같습니다. 한 부모로부터
같은 사랑을 받았기에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해 볼 때,
영적으로 소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고,
예수님의 피로 속량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전부 형제입니다.
부부간에도 이 문제에 관한 한 형제요,
아버지와 아들도 형제요,
할아버지 손자도 형제입니다.
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는 모두 한 형제라는 말씀입니다.
② 형제 관계는 절대적 관계입니다.
친구란 한번 사귀었다가도 얼마든지
헤어질 수 있는 관계입니다.
심지어 부부도 만났다가 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는 피를 나눈 사이이기에
헤어지 수 없는 인연입니다.
상대적 관계가 아니라 절대적 사랑의 관계입니다.
③ 형제 관계는 차별이 없는 평등하고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세상에서는 신분 차별이 있고....
여러 가지 불평등한 요소가 있지만 교회에서는
모두가 한 형제이기 때문에 평등합니다.
예> 김제 금산교회 - 마부 이자익이
지주 조덕삼보다 먼저 장로가 되었던 이야기
④ 형제는 같은 기업(基業)을 가지고 있는 관계입니다.
형제는 한 아버지의 유산을 함께
나누어야하기에 형제는 한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소망을 가졌습니다.
같이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한 기업을
함께 누려야 될 사람들입니다. 고난도 같이하고
신앙생활도 같이 해야 합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도 함께 건너야 되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가서 영원한 기업을
누리는 것도 함께이어야 합니다.
'주 안에서의 형제'라는 것이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는 모두 주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성도는 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주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
형제’인 것입니다. 사실 교회 형제는 실제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자주 만나는 사이고,
천국에서 영원히 같이 살 사이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신앙공동체를 이루는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갈6:9-10>
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절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빌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춰 있으면 안 됩니다.
다른 형제들의 일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삶이 어떤지...., 그들의 믿음 형편이 어떤지,
가정적, 물질적인 형편이 어떤지
관심을 갖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미 서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
바울 사도도 더 이상 권면할 것이 없었습니다.
9절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얼마나 감동스러운 장면입니까?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자화상 –
주 안에서 하나 되지 못하고 수많은 분열과
갈등을 반복함(이권에 따라).
저도 우리 금산교회가
이런 칭찬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서로 사랑하기에..
‘형제 사랑’에 대해서는 더 이상
권면할 것이 없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표현 하나가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은
신약 성경에서 여기 단 한 번 나타납니다.
이것은 그들이 말씀을 대하는
특별한 자세를 강조한 표현입니다.
앞서 고백했듯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받았습니다.
살전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이것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좋은 교회로
행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였던 것입니다.
형제 사랑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도끼리의 사랑입니다.
둘째, 다른 교회와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입니다.
형제 사랑의 범위가 교회의 울타리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10절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교회 울타리를 넘어 다른 교회,
나아가 세상으로 확대되어야 합니다.
개교회주의를 극복하고 주위에 어려움에 처한 교회나
성도들을 돌보는 일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2장37-38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다름 아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계명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게 한국교회의 성도들을 보면,
첫째 계명은 참 잘 지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횟수나, 드려지는
헌금의 액수나기타 다른 모든 면에서 볼 때,
그 열심을 따라갈 나라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두 번째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이웃을 사랑하는 것,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소극적입니다.
하나님은 참 사랑하는데,
내 형제를 사랑하는 데는 매우 인색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님들 ! 이것이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하나님은 사랑하는데, 형제는 별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요일4:20에 보면 사도 요한 이렇게 증거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한
그는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나는 다른 사람들은 사랑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만은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순전히 착각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하나님의 궁극적 관심은 세상에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기 바라십니다.
세상이 교회를 보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소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요13:34-35>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새계명을 주신 목적은 세상으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산상수훈 가운데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마5:44). 이유는 단순합니다.
감동받아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이것에서도 모범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여기 ‘과연(καί γάρ)’이란 말이 나오는데 그
동안 말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10절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함으로 이미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서
그 동안 수고했으니 이제 좀 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그렇게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는 않습니다.
<맺는 말씀 – 빚진 자 의식>....
그러면
어떻게 서로(모든 사람, 원수까지) 사랑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에게 큰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빚진 사람은 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진 사랑의 빚을
어떻게 갚을 수 있습니까?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 사랑의 빚을 진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에게 진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빚을 진 사람은 빚을 갚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롬1:14)라고
했습니다. 그는 복음의 빚을 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평생을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에게 빚진 자입니다.
사랑의 빚은 사랑으로 갚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형제들에게 베푸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성도님들이 !
우리 금산교회가 이 시대에 이 지역에 사랑을 본을 보이는
‘오늘날의 데살로니가 교회’로
좋은 소문이 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