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절)
K교수는 한국인으로 미국의 풀러 신학교 교수로 지냈습니다.
그는 칭의는 최후 심판 때에 완성이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대속의 은총에 무지한
겁니다. 그 학교가 바로 신사도운동을 일으킨 피터와그너가 재직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거룩도 없고, 거룩함이 없으면 영광에 나아가지 못하죠.
진리가 없으니 육신의 행위의 의를 주장하고 기독교의 생존몸부림으로 표적
수준의 신사도운동을 일으키는 겁니다. 이 운동으로 유명한 아프리카 목사까지
일부 한국교회가 초청을 해서 집회를 가지기도 합니다. 이는 참 회개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없으니 육신에 속한 신앙으로 율법의
의를 좇는 자들이므로 성령이 밖에 나타나시는 표적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칭의가 죽음 이후에 완성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제대로 된 복음이 아닌 겁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롬1:17)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1:16) 의가 없는 곳에 성령이 임하실까요? 성령이 안 계시는데 주와
한 영이 되어 한 떡 한 몸이 되어 아바 아버지를 담대하게 부를 수 있을까요?
그 K교수는 앞으로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겠지만 지금 스코어는 불 못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행3:6-8)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이 심히 놀랐습니다(행3:10)
나은 그 사람의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크게 놀라워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야 나 하지 않고 의미심장한 세 마디의 말을 했습니다. 그 하나는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엔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2)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하나님께서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다(행3:13)고 합니다.
너희들이 생명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그 예수를 3일만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셨고 약속하신 대로 그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그 성령 안에서 주께서 함께 하시므로 우리가 그 이름으로 명하므로 주께서 이 병자를
일으켜 세웠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권능이나 경건이라고 보지 말라는 겁니다.
실제로 주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사실을 알고 그가 보내신 성령 안에서 복음을
전파하면 주께서 함께 역사하셔서 표적이 따르므로 말씀을 확실하게 증언합니다(막16:20)
표적을 위한 표적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주의 종들에게 그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 표적이 따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도 놀랍게 여길 수가 없는 일입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지금 말씀을 나누고 있는 분들 중에서 여기저기서 표적이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저 또한 하나도 놀라운 것으로 보지 않고 그분들도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을 교회에서 많이 듣습니다. 아니 지긋지긋하게 듣습니다. 그러나 회개를
제대로 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건 칭의가 최후에 심판 때나 이루어진다거나 영화는
죽음 이후에 얻는다고 말하는 얼뜨기 교수들로 인해 일어나는 불행한 일입니다.
선과 악 사이는 인간의 의지로 하루에 수천 번이라도 돌이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좌와 사망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와 생명으로 돌이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연합이 되지 않고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의 선을 다
끌어 모아도 참깨 씨 하나의 생명체를 만들지 못합니다. 지금의 회개는 유대인의
‘자신을 저울에 달아본다’는 의미의 힛트 파렛에서 배운 탓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회개를 성찰이라고 말하는 목사가 있을 정도입니다. 천만번 성찰을 해도 진리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얻지 못할 겁니다.
만약 성찰이 회개와 같다면 소크라테스가 인간의 문제를 다 해결하고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을 하나님께 돌이켜 구원의 길로 안내하는 대단한 선지자였겠지요?
단언하건대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시고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신 다음에 일어나는 겁니다. 그 이전의 율법의 회개는 절도나 강도입니다.
양의 문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하나님께 가는 길도 오직 그분뿐입니다.
그래서 세례가 하나뿐입니다(엡4:5) 당연히 회개도 단 하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듣고 믿어 세례(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나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습니다(막16:16) 왜냐하면 구원을 얻는 믿음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엡4:5) 세례는
회개를 동반합니다. 그래서 회개와 세례(침례)와 죄 사함은 직선으로 연결이 됩니다(행2:38)
회개 없는 세례가 없고, 세례 없으면 죄 사함도 없습니다. 죄 사함이 없으면 다시 말하면
칭의가 없으면 성령이 임재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라 그리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 이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새롭게 된다는 말씀의 옛날 성경의 번역은
유쾌하게 였습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refreshing은 상쾌함이 가장 적절할 겁니다.
답답한 골방에 있다가 사방이 확 트인 들판에서 숨 쉴 때의 상쾌함 같은 겁니다.
왜 회개를 해야 하느냐 하면 성령이 임하시는 자리로 옮겨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악은 만 번을 반복해도 의를 얻지 못하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부르지
못하는 겁니다. 왜 우리가 성령이 역사하는 자리로 옮겨가야 하느냐 하면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고전12:3) 그리스도께서 개인의 구주가
되지 못하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잡지 못하기 때문에 만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만유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공급하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아는
것이 힘일 것이며 정신일도하사불성의 정신력이거나 먹는 음식의 기쁨이나 기운뿐입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폼생폼사로 치장하느라고 뇌가 썩어 누렇게 되거나 파리한
얼굴로 돌아다니는지 민망할 정도입니다. 베드로가 회개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자신처럼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 영화롭게 되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주께서 그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을 받아 그 안에서 머리이신 주와 하나가 되는 몸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만유의 주재이신 그 머리의 충만하심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므로 그 생명의 기운으로
새롭게, 상쾌하게, 유쾌하게 되는 겁니다. 그건 각자의 느낌이므로 맘대로 표현하세요.
참 회개의 길에 들어서면 주의 의와 거룩과 영광과 빛과 생명과 사랑 등의 주의 이름이
총동원이 되는 겁니다. 육체의 기운의 기쁨이나 정신건강으로 오는 안정감이나 만족감이
아닌 하늘로부터 공급이 되는 생명(조에)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럽고 상쾌한 기쁨을 얻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