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수필 <기적이라는 이름의 광란(?)>
이원우(84년 ,한국 수필> 추천/ 97년 <한글 문학> 소설 신인상/ 전 초등학교장/ 가요 연구가/ 지은 책 16권/ KNN 부산 방송 문화 대상>
나는 ‘기적’을 체험했다, 분명히!
정말 버텨내기 힘든 일과 싸우기 열흘 간, 그 종착점에 닿는 날이 오늘이다.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10시 30분까지 시각 장애 복지관에 도착해야 하니, 집에서는 9시 정각 출발. 복지관 창립 26주년이 되는 날이라, 가족들의 노래 자랑 사회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거듭 말하지만 앞을 못 보는 그들의 기분을 맞추는 게 결코 녹록치 않다. 게다가 그들의 노래 실력 하나만큼은 내로라하는 어떤 프로 가수라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래 지하철 안에서 고민께나 할 수밖에.
헐레벌떡 사무실에 뛰어 들어서자말자 내 눈을 의심하게 하는 일이 기다리는 게 아닌가. 김제영 복지사가 책 한 권을 내밀며, 나더러 사인을 좀 해 달라는데, 아 근래 몇 년 동안 내가 찾아 헤매던 내 졸저 <개가 들어도 웃을 일>(서울 산성 미디어 출판)이다. 어리둥절해 있는 내게 김 복지사가 아버지 책꽂이에서 찾아온 것이란다.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은 1998년도에 재판까지 찍어냈었다. 그 뒤로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책이다. ‘영광 도서’며 시내 여러 서점을 샅샅이 뒤졌으나, 그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는데 세상에, 엉뚱한 곳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다니----.
누가 상을 준다고 해서 마지막 남은 몇 권을 공적 자료로 첨부했다가 그만 둘 다 잃고 말았다. 그러고 무심한 세월만 탓하고 있던 참에 오늘 2010년 10월 24일 마침내 ‘기적’을 봤다! 하기야 이상하다는 표현으론 부족한 조짐이 있긴 있었다. 바로 사나흘 전, 사범학교 두 해 선배들의 졸업 50주년 기념 축하장에서 <개가 들어도--->에 삽화 석 장을 그려 주었었던 ‘고인돌’의 박수동 화백을 만난 것이다.
날이 날이니 만큼 오늘 성전 안은 많은 가족들로 가득 찼다. 서울을 비롯한 타지에서 온 장애 형제자매들도 더러 있었다. 경건한 미사를 마치고 식당으로 자릴 옮겼다. 수육까지 식탁에 올라 성찬(盛饌)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인 점심 식단이었다.
이윽고 4층 휴게실. 평소 내가 한 달에 한 번 들를 때에야 많아 봤자 20명? 그 정도만으로도 열광의 도가니로 변하는데, 오늘은 그 세 배는 되는 것 같다. 두 시간 반 동안 그들을 이끌어 나갈 총책임자(?)로서 나는 되레 긴장이 되었다.
나는 갖고 간 책 <한국 가요>를 무대 옆 테이블 위에 놓고 그 위에다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을 포개 얹었다. 사정이 여차하면, <개가 들어도 웃을 일>에서 배꼽 잡는 이야기를 끌어다 터뜨리기 위해서다. 나는 일단 214쪽의 ‘구구셈과 개장수’를 점찍었다. 구구셈을 못 외어 남아서 특별 지도를 받는 어느 녀석에게, 담임이 장차 뭐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을 던진다. 녀석의 대답인즉슨 ‘개장수’다. 녀석은 영양탕 집 하면 돈 엄청나게 번다는 상식(?)까지 덧붙인다. 15만 원짜리 개 세 마리 팔았다, 얼만지 아느냐고 재차 물었더니 묵묵부답. 이 정도 '뼈‘에 살을 붙이면 능히 20분은 벌 수 있다.
그런데 너무나 ‘특별한’ 손님이 있었다.
먼저, 길거리에 나가면 아마도 남들에게 무서움부터 던질 정도의 얼굴을 한 형제가 들어서는 게 아닌가! 코는 내려앉았고, 양쪽 눈은 함몰된 탓으로 아주 진한 색안경을 끼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팔꿈치 아래가 양쪽 다 없었다. 게다가 얼마나 장신(長身)인지 내가 한참이나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그 자체만으로도 것도 남에게 주눅이 들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누가 넌지시 일러 주는 바에 의하면 그는 전상(戰傷)으로 그 많은 걸 잃은 용사란다. 그러나 그 옆에서 따라 들어온 자매는 아담한 키에 아리따운 모습이었다. 머리도 알맞게 센 초로의 그 자매만은 눈이 밝았다.
그리고 중키에 인물이 너무나 좋은 시각 장애 복지관 초대 회장 박정권 형제와 그의 부인을 비롯한 일행들도 얼굴을 보였다. 현 회장인 이승영 형제도, 복지 부장인 예비역 대위인 최영일 형제도.
나는 첫 거짓말로 첫 마디를 뗐다. 70여명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다고. 실제 인원보다 10명을 보태어 허풍을 떪으로써 열기를 보태고 싶은 어찌 보면 순진한 발상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윽고 이승영 회장이 나를 부르더니 에어컨 좀 켜라는 부탁을 하는 게 아닌가?
그로부터 분침이 두 바퀴 반 넘게 도는 동안의 일들을 여기에 다 적는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아니 나 자신의 광란에 가까운 짓거리가 남의 입줄에 오르내리는 것도 약간은 겁나지만, 그보다 아서라 현장 밖의 일반인들이 상상조차 못할 그 분위기를 전하기에 내 문재가 또 턱없이 부족함을 탓하자.
그래도 어쩌겠는가? 기적과 같은 광란은 여전히 보이는 내 눈 앞에는 전개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동(東)여자 중학교 3학년 전민경 학생이 계속 노래 제목을 받아 적고 입력시키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자기 차례를 확인하는 소리가 드높다. 이영자 자매는 그 육중한 몸으로 좌충우돌이고, 여기저기서 앞 못 보는 자매들의 막춤 파티가 벌어진다. 글쎄 그런 걸 ‘흐느적흐느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들 중에서 압권은 용사(勇士) 커플(?)의 현란한 춤 솜씨였다. 짧은 팔을 여자의 어깨에 얹고 둘이 한 몸이 되어 미끄러져가는 동작을 나는 넋을 잃은 채 보고 있었다. 부드러웠다. 여자는 시인(詩人)이라 누가 귀띔했다. 확인 가능!
나는 그들 모두가 차라리 피안(彼岸)을 향해 무리지어 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연이어 마이크를 바꿔 잡는 형제자매 중 어느 누구가 어떤 노래를 부르던 박자 음정 하나 틀리는 데가 없었다. 에둘러 말할 필요 없이 특유의 청음 능력과 라디오를 끼고 사는 그들의 일상, 그로 인해 신이 준 한계를 거부하고 있다. 모두가 가수고 모두가 댄서인 그들을 바라보는 나는 나그네이면서도 왜 그렇게 행복한지----.
나는 길길이 뛰었다. 고래고래 고함으로 추임새을 대신하고, 연거푸 손뼉을 쳐댔다. 그들은 나를 보지 못해도, 내 거친 숨소리는 들었을 것이다. 웃통을 벗어 던졌지만 내 이마에도 어느새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전날 밤에 혼자서 춘, 다이어트를 위한 막춤 때보다 격렬한 광란을 나에게서 스스로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다른 날과 딴판으로 나는 도중에 내 노래를 신청하지 않았다. 끼어든다는 건 예의의 차원을 벗어나 불길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다름없다는 판단이 서는 게 아닌가?
잠시 동안의 틈이 생겨 나는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을 펼쳤다. 206쪽에 ‘장애는 불편할 따름!’이라는 게 눈에 뜨인다. 인도의 깊은 산 속에서 한 관리가 버림 받은 절름발이 샤만을 포함한 사냥개 몇 마리를 데리고 산으로 들어갔는데, 호랑이가 나타났다. 다른 성한 개들은 혼비백산 그대로 도망갔지만, 오직 샤만은 호랑이를 향해 공격 자세를 취하는 게 아닌가? 도망갈 수 없는 샤만, 녀석이 벌어 준 시간에 관리는 총을 쏘아 호랑이를 잡았다는 얘기. 그걸 잠시 했다. 그리곤 내 체험을 덧붙인 것이다. 나는 그걸 재구성해서, 안 보인다고 기죽지 말자고 부추겼다. 동시에 터지는 결코 조용하지 않은 화답!
그쯤에서 ‘기적’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을 때, 김제영 복지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건네었다. 목 안 쉬겠느냐고. 나는 옆구리에 끼고 있는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두 시간 넘었는데도 건재한 나에게 그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가벼운 탄성이 그의 입에서 흐른다.
마침내 3시 반, 뿔뿔이 헤어질 무렵에야 나도 내 정신으로 돌아왔다. 난간을 붙잡고 계단을 내려서는 연로 자매들의 뒷모습에서 잠시 ‘엄마’를 발견했다. 역시 시각 장애인인 박성태 그레그리오 신부님께 인사를 드리고 역으로 총총걸음을 떼어 놓았다. 나는 중얼거렸다. 기적이라는 이름의 광란(?).
(2010년 10월 25일) 21장
<창작 후기>
기적과 같은 일이 세상에 존재한다. 아니 기적 바로 그 자체다. 어제 시각 장애 복지관에 두 달 만에 들렀다가 나는 그걸 똑똑히 보았다. 서울 산성 미디어에서 재판까지 찍어낸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 내 수중에 한 권도 없어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찾고 있었는데, 복지관 김제영 복지사가 내민 것이다.
그게 엄청난 힘을 내게 주었을까? 솔직히 말해 열흘 이상 벅찬 일에 시달리다가 마지막 마무리해야 할 부담이 어제 복지관 행사였다. 그런데 두 시간 반의 임무를 너끈하게 해 치웠으니---.
시각 장애인들과의 광란! 결코 너스레를 떠는 게 아니다. 68세 인생을 그 언저리에서 머문 과정이 다져져서 탄생된 결과다. 84년도 <한국 수필> 천료를 할 때 조경희 회장이 지적했다. 영탄(詠嘆/ 詠歎)이 왜 그리 많으냐고. 어디 영탄뿐이랴. 가끔은 말줄임표가 행간에서 너무나 자주 튀어나오는 바람에 나 자신도 놀란다. 졸고에도 다섯이었으나, 둘을 과감하게 뺐다.
아 첨, 91년도에 노인들 87명을 혼자서 인솔, 대만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 곳 교민 학교 정기화 교장을 만나 아동도서 170여 부를 전달한 바 있는데, 떠나기 전 아동 문학가들에게서 자기 저서를 지원받았다. 서하원 작가가 수십 부를 안겨 주는 바람에 한시름 놓았던 기억이 새롭다.
대신 누구에게 부탁했더니 냉랭했다. 자기 책은 영광도서에 있다는 것이다. 원망을 바가지로 퍼부었는데 지금 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개가 들어도 웃을 일>! 내게 딱 한 권뿐이니까 하는 말이다. 다시 한번 덧붙인다. 동여자 중학교(교장 백인희)에서 봉사하러 온 전민경 학생! 시작 무렵부터 마칠 때까지 그 긴 시간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고 장애인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참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께 이 사회를 대표하여 감사드린다.
21장이라니 양이라는 개념에서 보면 궤도를 이탈했다. 나는 소인배라 남이 내게 재갈을 먹일까 봐 어찌 걱정이 아니 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