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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날의 동화
강 신 재
1
명순은 누워서 수녀(修女)들의 합창을 듣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 오페라의 한 장면이어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조그만 라디오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계의 종말이 다가왔도다…… 소리는 무겁고 어둡고 운명적인 비애에 싸여 거의 신음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나 이상스러운 단순함이 선율을 처리하여 그것은 어쨌거나 앞을 향하여 나가고 있는 인간의 무리를 연상케 하였다. 그들은 가고 있었다. 자꾸만 나가고 있었다. 세계의 끝이 거기 있는가?
거기에 천당이 열리는가?
수도원의 정경 속에 갑자기 이질적인 것이 튀어 들었다. 길게 떨리는 테너의 솔로였다. 그것은 현세적 인 환비를 호소하는 너무나 육감적인 음성이었다.
명순은 라디오를 끄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재깍하고 다이얼이 먼저 비틀어지며 아리아는 가느다란 여운을 남기고 중단되었다. 한수가 그렇게 한 것이다.
명순은 반 일어난 자세대로 책상 모서리에 걸쳐져 있는 한수의 손을 보았다. 길고 모양 좋게 생겨 있는 손이었다. 그는 깊은 잠에 빠진 사람처럼 방바닥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은 것이다.
그렇게 죽은 듯이 늘어져 있으면서 그래도 음악을 듣고 있었다고 명순은 생각했다. 책상 모서리에 걸렸던 그의 팔이 시체의 그것처럼 털썩! 떨어졌다.
명순은 일어나 앉아 한수의 전신을 내려다보았다.
코코아색 반소매 셔츠를 ˙입은 어깨는 벌어지고 넓적한 등은 젊은 남성다운 선을 부각하고 있었다. 좁은 양복바지에 싸인 작은 엉덩이와 긴 다리도 모양은 좋았다.
그러나 거기서는 기운이라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짧은 소매에서 내민 팔뚝은 갈색을 하고 있었으나 마른 나무의 표면을 생각게 하는 건조한 빛이었다. 있는 것은 형태뿐이었다. 명순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앉아 있었다. 자기가 태어난 이 우주 속의 일 점을 최초로 인식한 인간의 눈과 같이 그것은 매우 크게 벌어진 동공이었다.
한수의 등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그와 함께 명순의 눈 속에도 동요가 있고, 이번에는 조심스러운 빛을 담으며 그 꿈틀거린 부분에 고정되었다. 등이 그렇게 움직거린 의미를 헤아리기라도 하려는 듯 주의 깊은 태도였다.
그러나 한수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호흡을 따라 너부죽한¹ 등판이 보일 듯 말 듯 오르내릴 뿐이었다.
명순은 무릎을 안고 벽에 기대었다.
옹색한 맞은편의 바람벽 위에 ‘미로’ 의 복제가 붙어 있다.
여자의 동체(胴體)²에서 밤〔夜〕 이 뿜어져 나왔는가. 달과 별 같은 것이 빙 돌고 있다. 문어 대가리 같은 또 우주인 같아 뵈는 기분 상한 붉은 덩어리. 해와 바닷말……
수치와 회한과 혼란과. 모든 종류의 고뇌가 한꺼번에 폭발을 한 것 같은 색채와 모양이 거기 있었다.
그녀는 다시 수녀의 합창을 생각하였다. 검은 옷을 입고 들판을 그렇게 걸어가면 속이 후련해지는가?
모든 것을 버리고 가는 것이다. 들판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과연 무언가가 있는 건가?
한수가 무어라고 웅얼거렸다. 입술이 방바닥에 너무 가까이 대어져 있어 언뜻 알아듣기 어려운 말소리였다. 명순은 되묻지도 않고 기다렸다.
“여보세요. 약 주세요. 안 계신가요?”
약간 짜증을 낸 것 같은 여자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바깥쪽에서 울렸다. 아까 한수는 누가 왔으니 나가보라고 하였던 모양이다.
명순은 가게로 나갔다.
잿빛 하늘 밑을 무리 져 가는 여자들의 환상은 아직도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한수의 귀가 또 예민해졌다는 생각도 한편으로 하고 있었다. 오관³이 모두 둔해졌으면서 귀만은 어느 시기 날카롭게 살아나곤 하는 것이었다.
“APC 오 원어치만요.”
“네.”
“미제루다요. 수효가 적어도 괜찮으니까 미제를 줘요.”
“……”
“들으라구 먹는 약인데. 그렇잖어요?”
“네.”
명순은 스커트에서 열쇠를 내어 유리장을 열고 정제를 세었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여자와 엇갈리며 파리장 문을 밀치고 비대한 노녀(老女)가 들어섰다. 호르몬제를 사러 오는 노파였다. 노파가 질문을 할라치면 명순은 그렇게 강한 주사약을 자주 쓰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는 의견을 말할밖에 없으나 노파는 그런 설명을 듣기 싫어했고, 그래 요즘은 그저 화난 듯한 음성으로 불쑥 약명을 가리킬 뿐이었다.
명순은 약장 아래쪽 서랍을 열었다. 가게는 좁고 세모가 져 있어 돌아앉아 느런 동작을 하자면 편안찮았다. 그녀는 서랍에서 서너 권의 장부를 들어내고 그 밑에 숨겨둔 약상자를 꺼냈다. 수입 금지품이어서 감춰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비대한 부인은 호르몬제 외에 영양제 두 가지와 플라스마⁴를 샀다. 자식도 영감도 없고, 오직 자기 몸을 보하기 위하여 살아 있는 부인이었다.
“많이 파슈.”
“안녕히 가세요.”
방긋거리면서 순자가 와서 서 있었다.
“잘 있었니? 서방님두 안녕하시구. 테라마이싱을 몇 알하구 찜질약을 줘. 큰것이 또 헌데⁵가 났지 뭐니. 그리고 알코파를 두 봉. 애들은 반 봉지씩 먹인다지? 그러니까 두 애한테 나눠 먹이고 하나는 애들 아버지 드리지. 세 봉지 살까? 모두들 먹는 김에 나두 해치우게. 근데 요샌 온 집안 식구가 식욕이 없어서…… 요리를 만들어도 헛수고지. 여름철일수록 축이 안 가두룩⁶ 영양을 취해야만 하는 건데…….”
순자는 더도 없이 열심한 생활인이었고 너무나 여자였고 거기다가 매우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기까지 하였다. 명순은 참으며 듣고 있었다.
순자의 요설(饒舌)⁷은 명순에게는 통틀어 그저 무의미했던 것이다.
겨우 순자가 가버리자 명순은 얼른 방으로 가보았다.
방바닥에 길게 누웠던 한수는 거기에 없었다. 날쌔게 몸을 놀려 또 무엇인가를 저질렀을지 몰랐다.
명순은 주방 문을 열고 선반 위, 찬장 앞, 마루 구석 하고, 순차례로 눈길을 달렸다. 한수는 물건을 잘 떨구었다. 요즘으로 아주 바보가 된 것처럼 조그만 속임수도 감쪽같이 해내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탈지면이나 작은 주사기 앰풀⁸의 껍데기 등을 명순의 눈에서 감춘다는 것이 전 신경을 집중하는 유일의 일이면서 줄곧 실수하여 꼬리를 잡히는 것이었다.
주방에는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것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명순은 방에 돌아와 ‘미로’ 의 콤포지션 뒤에 손을 넣었다.
모르핀을 감출 장소 때문에 한수는 있는 지혜를 다 짜내었다. 그래서 명순은 경대 서랍에까지 쇠를 채워두는 것이다.
세면실에서 물소리가 나고 변소에 갔던 한수가 돌아왔다. 무언가 매우 명랑한 낯빛을 하고 있다. 요 며칠간 주사를 끊는다는 서약을 지키느라 그는 몹시 침울하고 기운이 없었던 것이다.
“오늘 저녁은 거리에나 나가볼까? 당신 언젠가 영화 보았으면 했었지?”
그는 곧추세운 두 무릎에서 손목을 늘여 건들건들 흔들면서 말하였다. 발등에 부챗살 같은 가는 뼈가 드러나 보였다.
“복자·수자의 쇼가 아주 인기라던데.”
그런 소리를 한다. 명순은 움직이지 않는 눈동자를 그의 이마에 대었다.
‘복자 수자와 그 일행의 쇼’인가 하는 흥행은 몇 달이나 전의 것이었다. 그 광고가 난 신문지를 무엇엔가 사용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랬다. 변소에 가는 좁은 복도의 벽이 떨어져 내린 곳을 그것으로 발라두었었다. 신문지는 지금도 그 자리에 붙어 있을 것이다. 앞을 지나칠 적마다 여자들의 사진과 광고문이 눈에 띄었다.
‘오늘 저녁 그걸 보러 가잔다.’
한수는 그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있는 데에 불과하였다.
명순은 복도로 나갔다. 한수는 구석에 있는 고장 난 선풍기를 만자작거리기 시작했다. 가끔 그 손이 멈추어지고 불안스러운 눈이 명순의 사라진 쪽에 쏠려진다.
명순은 엷은 갈색의 앰풀 꼭지를 들고 돌아왔다.
한수 앞에 내던지고
“또 시작을 했어,”
비굴한 눈초리를 지으며 고개를 비꼬는 양을 지켜보았다. 선풍기가 덜덜거리고 돌기 시작하여 좁은 방 안의 더운 공기를 휘저어대었다.
“아니야!”
한수가 갑자기 지껄거렸다.
“공연한 지레짐작을 말어. 절대로 또 시작한 건 아니야. 내 몸을 뒤져보아. 맹세하지!”
두 팔을 들어 보이며 어리석은 얼굴을 한다.
“내가 또 그 짓을 했다면…… 그렇다면 사람이 아니게? 그렇다면 약을 또 숨겨 가졌을 것 아냐?”
명순은 아무 말도 안 하였다. 한수가 대학에서 늘 최고 득점을 하고 우수한 학생이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또 한수는 플루트를 불었었다·……
선풍기가 멎었다. 소리도 죽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은 저물려 하고 있었다. 불붙는 듯한 하늘의 빛이 작은 창틀을 꽉 메우고 있었다.
2
금단증상(禁斷症狀)의 고비를 넘기고 나면 한수는 매우 잔인하였다.
심부름하는 계집아이를 회초리로 때렸다. 명순은 계집아이를 보내주었던 고모의 집에 사과하러 갔다.
“그거야 괜찮지만. ……네가 고생이겠다. 식모라고 붙어나질 않을 테니까.”
명순은 채송화가 흩어져 핀 화단으로 가까이 갔다.
“색색가지로 섞여 펴서 참 이뻐요. 우리 집에 가져간 건 왜 피질 않을까.”
“글쎄…….”
고모는 잠깐 침묵하였다가
“너 그런 모양으루…… 살 수 있겠니? 어떻게 여기쯤에서 결단을 내리면 어떻겠느냐?”
명순은 그저 조금 웃어 보였다.
흰 나비가 화변⁹ 위에서 나래를 접었다 폈다 하고 커다란 모기가 날아갔다. 날개와 긴 다리가 금빛으로 반짝였다. 명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날아가는 벌레를 보고 있었다.
고모는 또 입을 열었다. 옥색 물을 들인 모시 치마를 입고 옥비녀를 찌른 그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입에 담았다.
“네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기분을 나도 짐작은 한다. 남녀간의 사랑이란 이치루다 따질 게 아니니까 옆에서 이러구저러구 할 수는 없다만…….”
명순은 놀란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사랑요? 사랑하고 있지 않아요.”
“그럼 무엇 때문에 그리구 있니?”
“무엇 때문인지…… 난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누구든지 다 그런 것 아네요? 고모도 왜 살고 있는지 모르시는 거예요.”
“얘는. 그건…… 그거야…… 나야 애들 기르고 너의 고모부도 도와드리고…….”
“그래서는요?”
“그래서라니…… 그러는 게 좋으니까…… 그러는 거지.”
“좋아도 그러고 안 좋아도 그러는 거예요.”
명순은 무표정하게 단언하였다. 그리고 또 채송화를 내려다보았다.
“겹이 돼서 이렇게 보기 좋아요.”
“들어가자. 들어가 저녁이나 먹자. 너의 남편 그새 약이나 또 집어 낼는지 모르지만.”
“집어내도 그만이에요. 옆에 있을 때엔 나도 쇠를 채우고 경계하지만 소용없는 일인 것은 알고 있어요. 소용도 없는 걸 왜 그러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제 일을 제가 모르면 누가 아니.”
명순은 고모의 방에 들어갔다.
맛난 음식을 조금 먹고 몸을 편히 하고 누워 있었다.
‘돌아갈 때까지 조금만 편히 하구 있자.’
생각은 단순하였다. 한수로 인한 분노라든가 짜증 같은 것은 언제나 오래가지 않았다. 그것은 관용의 정신에서가 아니라 마땅한 감정으로 여겨지지 않는 때문이었다.
드리운 발 밑으로 고모의 치맛자락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고모는 명순에게 얼마간 친절하고 얼마간 무심하였다. 정상적인 보통의 상태였다. 명순도 그녀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사람을 좋아진다는 것은,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명순은 한때 몹시 그래본 적이 있었다.
그녀와 한수는 약학대학의 교실에서 만났다. 한수는 중도에서 학업을 포기하였기 때문에 약제사 면허증을 갖고 있는 것은 명순의 편이었다.
모르핀을 그가 시작한 것이 퇴학을 해버린 훨씬 뒤였는지 어떤지 명순은 지금도 알지 못했다. 둘의 사이가 친숙해진 것은 퇴학을 전후한 무렵이었다.
명순 편에서 꽤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갔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고민에 싸인 사나이의 어두운 매력에 이끌려갔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명순은 지금 한마디로 규정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섹스가 일으키는 트러블이고, 일종의 하찮은 시정 (詩情)이었다. 모든 시(詩)가 그러하듯이 그것은 과장을 일삼고, 우상을 만들기에 옆눈도 안 판다.
‘완전한 인생’을 꿈꾸는 것이다.
한수는 명순의 마음을 끄는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그러한 생김새는 아주 대수루운 것으로 그때 명순에게는 생각되었다.
그것은 명순의 정감을 자극하였고,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는 일반적인 교양으로도 명순을 만족시킬 만하였으나 가장 매혹적이던 것은 실의(失意)의 구덩이에 빠져 있는 일이었다.
민감한 청년이 감정의 부당한 학대를 감수하고 있는 광경은 얼마나 가슴 저린 것이었을까.
그러한 학대는 한수의 깨끗함에는 비길 수도 없는 야비한 여자로부터 왔다.
자기의 가치를 액면대로 주장하지 않는 겸허함은 명순을 감상적이게 만들었다. 한수의 시정은 말하자면 특별히 정열적인 연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수의 양친은 한수들을 결혼시키고 나서 곧 별세하였다. 큰길 옆에 조그만 약방을 남겨주고 갔다. 그리고 한수는 아편 중독자였다.
“고모, 이젠 가겠어요.”
명순은 고모의 집을 나와 어둑어둑한 거리를 걸어갔다. 바다 쪽에서 눅진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는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맞은편 언덕 위에 거대한 플라타너스가 여러 그루 몰려 선 것이 눈에 뜨인다.
나무는 미풍을 따라 천천히 술렁였다. 잎새가 팔랑대고, 검고 굵은 줄기는 미미하게 그러나 뱀처럼 연하게 굼틀거리며¹⁰ 움직였다.
나무는 꼭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살아서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며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바라다보는 명순은 저도 모르게 평화로운 얼굴을 지었다.
……오늘 밤도 또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다. 한수는 자기가 잠을 자지 못하니까 남이 자는 것을 시기하였다. 갖가지 술책을 써서 깨워 일으키고야 말았다. 딱…… 하고 날카롭게, 파리채로 방바닥을 내려치는 일. 어떤 때는 명순의 귓밥을 때려놓고 모른 체하고 있기도 하였다.
모른 체하고 있더라도 바늘같이 뾰족한 그의 눈찌¹¹가 잔인한 노여움을 말해주었다.
“불을 끄면 파리가 안 붙지요.”
그런 당연한 말을 그러나 명순은 하지 않았다. 방 안에 파리라고는 처음부터 있지도 않은 것이다.
그런 때 명순은 잠자코 앉아 있다. 그가 잠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사람과 다른 생물이 세상에 있다는 일. 플라타너스를 보며 일어나는 그런 느낌 속에서 그녀는 평화로운 얼굴을 지을 수 있었는지 몰랐다. 잠깐 동안.
3
노란 물이 한 줄기 천천히 인중을 따라 굴러 윗입술에 멈추었다. 비공(鼻孔) 에서는 그러나 또 노란 물이 나와 서서히 굴러내려 입술 위의 방울을 크게 하였다.
팥알만큼. 콩알만큼. 또 좀 커졌다고 보는 순간 콧물은 주룩 흘러 일직선으로 무릎에 떨어졌다. 그러자 한수는 팔굽을 쳐들었다. 얼굴로 가져가다 중도에서 집어치운다. 대신에 눈꺼풀을 반쯤 들고 게슴츠레한 동자를 이편에 던졌다.
명순은 그의 앞에 다가앉았다.
“무엇이 보여? 응, 어떤 것들이 눈앞에 있어?”
“으.”
한수는 도로 눈꺼풀을 내리고 모로 누워버렸다.
“알구 싶어. 뭐가 보이는지. 누가 있어? 여기 사람들하구 다른 사람들이겠지?”
대꾸는 없었다.
“그럼 말해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둥실 구름읔 탄 것 같은 감각 속에서, 어떤 색다른 사색을 이들은 더듬고 있는 걸까. 명순은 궁금하고, 이 이상상황(異常狀況)에 놓인 인간의 머리 속을 세밀히 살펴보고 싶다고 느낀다.
한수는 등을 꼬부리고 팔다리를 오그려 붙이며 눈을 감았다. 입이 맥없이 벌려 있고 침이 흘렀다.
그는 또 잠을 잔다. 깨면 거짓말을 늘어놓을 뿐이다. 아편 속에는 결국 아무것도 없는 듯하였다. 인간 이상의 것도, 인간 이하의 것도, 아무것도 없다고 볼밖에 없을 듯하였다.
숨소리가 편안하게 들린다. 그는 요즘은 몹쓸게 표독을 부리지도 않았다.
한동안 내려다보다가 명순은 상을 찌푸렸다. 한수의 뒤범벅이 된 침과 코는 그 유달리 수려한 용모 위에 매우 추한 부조화를 이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환한 등불에 비친 너무 잔혹한 그림이었다.
그녀는 일어나서 다락 옆의 층층다리를 올라 지붕 위로 나갔다. 빨래를 널어 말리기 위해 마련된 네모나고 좁은 옥상이었다. 한길 쪽은 커다란 간판의 뒷면이 가려주고 있었다.
나무 걸상에 앉아 명순은 먼 곳을 바라보았다.
항구의 등불들이 차갑고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몇 개씩이나 옆으로 잇닿아져 나가며, 불규칙한 단층(斷層)을 이루고, 군데군데에 유난히 밝고 흰 빛이며 빨간 등이며 네모진 파란 일루미네이션 등을 섞어 가지고 있다.
검은 하늘과 한빛이 된 바닷자락은 보이지 않았으나 물 위에 떠 있어 불은 더 영롱해 보이는 것일 게다.
명순은 언제까지나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물건은 아름다웠다.
아무 의미도 없고 곱게 생겨 있는 물건에는 위안이 있었다.
별이 없는 하늘로 부드러운 진동음을 울리며 순찰기가 선회하고 있다. 날개 끝에서 진초록과 빨강의 구슬 같은 등불이 명멸하였다. 크리스마스의 납종이처럼 반짝이는 빛깔이다. 그 위로 어두운 하늘이 막막하게―영원의 침묵을 지키며 펼쳐져 있었다.
걸상에 기대어서 명순은 잠깐 졸았다.
그리고 싸늘해진 야기(夜氣)¹³에 둘러싸여 곧 눈을 떴다.
그녀는 날이 샐 때까지 그렇게 앉아 있었다.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니까 등불들은 색이 바래고, 그리고 꺼졌다.
4
길 건너 시장에 가서 무와 파, 생선 같은 것을 사서 바구니에 넣어 들고 명순은 약방으로 돌아왔다.
한수는 유리장 앞 좁은 공간에 비스듬히 옆으로 서 있었다. 몸을 일직선으로 하여 십오 도쯤 앞으로 기울이고 있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자세였다.
명순은 옆눈으로 바라보며 그 곁을 지나갔다.
그러자 한수는 별안간 입을 열었다.
“도둑을 맞았어.”
꼿꼿이 한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얼굴만 이편을 향하였다. 표정이 없어 오히려 섬뜩한 그런 얼굴이었다.
“잠깐 옆집에 갔었어. 당신이 잘못이야. 왜 그렇게 오래 시장에 있었냔 말야. 그새에 유리창을 깨뜨리고 약을 훔쳐냈지. 잠깐 옆집에 갔드랬어. 당신이 모두 쇠를 채워놨기 때문에 유리를, 저것 봐, 저 렇게 깨뜨리고…….”
그는 진열장 뒤에까지 걸어 들어가 깨어진 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봐, 내 말이 거짓인가.”
그의 오른편 주먹에는 옥도정기가 칠해져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은 말끔히 비로 쓸려 있었다.
명순은 화가 나서 장바구니를 방에다 내던졌다. 그리고 수영복을 꺼내 들고 밖으로 나왔다.
한수가 모르핀을 했다가, 죽을 고생을 하며 끊었다가 또 져서 다시 시작했다가 하는 되풀이가 그녀에게는 번거롭다. 그녀는 한수가 소위 성실한 남편이 되어, 팸플릿을 읽고 외국에 약을 주문해준다거나 일요일이면 함께 거리에 나간다거나 하게 되는 일을 그다지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게 되어 있었으므로 변동은 그저 뒤숭숭하기 만한 것이었다.
그녀는 바다로 갔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모래사장을 피해 외딴 바닷가에서 버스를 내렸다.
울퉁불퉁하여 발바닥이 아픈 바위 그늘에서 옷을 바꾸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차가운 물은 육감적이고, 넘실대는 압력은 징그럽지 않을 정도로 욕정적이기까지 했다. 명순은 바다에다 몸을 맡겼다.
한수는 중독 상태에 들어가면 한 달이고 반년이고 그 이상이고, 명순의 육체를 잊고 말았다. 그녀는 바닷물에서 오는 전신적인 압박에서 흘깃 남편의 애무를 감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윽고 모든 사념은 그녀의 머리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다만 운동의 쾌감을 느끼며 깊은 곳으로 헤엄쳐나갔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멀리멀리까지 갔다. 온몸에 힘이 넘쳐흐르는 것을 느꼈다.
물의 차기가 두세 번 달라졌다. 그녀는 나가기를 멈추고 몸을 뒤쳐 등으로 둥실 떴다. 구름이 눈부시다. 갈매기가 날아간다.
인간이 인간임을 완전히 망각할 수 있는 순간이란 얼마나 좋은 것일까. 고독을 죄처럼, 무슨 잘못처럼 버젓잖이 느끼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란…… 그녀가 옷을 벗어논 물가로 돌아왔을 때 어떤 남자가 가까운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보릿짚모자 밑에서 줄기찬 시선을 명순에게 보내고 있다.
명순은 지나갔다. 그러자 젊은 남자는 따라서 일어났다.
“명순이지, 역시 그랬었군. 그새 잘 있었어?”
명순은 사나이를 쳐다보고 퍼레진 입술로 웃어 보였다.
“난 누구라구.”
그러고는 바위 그늘로 가 타월을 어깨에 걸쳤다.
“아까 버스에서 내릴 때부터 보고 있었어. 아무래도 명순이 같다고 생각했었지.”
세연은 조금 더 가까운 바위로 옮아와 걸터앉았다.
“옷 벗는 것도 봤어.”
“바보 같은 소리.”
“한수는 잘 있어?”
이것은 좀 특이하게 들리는 어조였다. 그는―아니 그들 동창생은 아마 누구나 다―한수의 상태를 알고 있을 것이다. 명순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문질렀다.
“얼마 잘 있지도 않아.”
“그래? 그거 야단이로군.”
세연은 따뜻한 눈초리로 명순을 지켜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단조로운 파도 소리만 되풀이하였다.
“결혼했느냐는 인사쯤 있을 법도 한데?”
“그런 것 물어서 뭘 하려구.”
“여전히 냉담한데?”
옛 클래스메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외국에나 갈까 하구 있어. 여기 있어보아야 별 재미두 없구…….”
명순은 햇볕을 흡수하여 따가워진 바위에 가슴을 대고 엎드렸다.
“명순인 지금 행복할까? 정직히 말해서…….”
명순은 머리만 조금 들고 간단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한수를 사랑하구 있군?”
갑자기 명순은 소리를 내고 웃었다.
세연은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고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바위에서 일어나며 말하였다.
“약방에 한번 놀러 가도 괜찮을까?”
“앉을 데도 없는걸. 한수는 그 모양이고.”
“그 병은…… 좋지 못해.”
세연은 어두운 소리로 낮게 뇌었다.
“그 병은 아주 좋지 못해. 명순에게도.”
“알고 있어.”
명순은 끄덕였다.
“그렇지만 난 아무 일도 또 새로 시작하지는 않을 테야.”
그리고 그녀는 약간 확신이 없는 얼굴이었으나 덧붙였다.
“다 알아버렸으니까.”
이번에는 세연이 웃을 차례였다. 그리고 그는 푸르게 반짝이는 바다로 고개를 돌려 먼 시선을 지었다.
“물에 또 들어가나?”
“조금 있다가…….”
“난 그럼 갈 테야. 안녕.”
“안녕.”
세연은 느릿느릿 사라졌다. 조금 슬픈 것 같아 보였다.
명순은 잠시 그의 뒷모습을 지키다가 돌의 따뜻한 부분으로 돌아누웠다.
저녁 때 명순은 싱싱한 낯빛이 되어 드라이브 웨이로 올라왔다. 시내를 향한 차가 달려오기를 기다리며 가볍게 걸어갔다.
한편에는 바다는 진줏빛 섞인 옥색으로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기운찬 바람이 그녀의 깡똥한¹⁴ 옷자락과 머리칼을 날렸다.
‘기운이 돌아왔다.’
‘나는 언제나 즐겁지는 않지만 그러나 기운은 돌아왔다.’
걸으며 명순은 문득 어떤 공상을 하고, 미소하였다.
공상은 때때로 조금은 즐거울 수 있었고, 그 대신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기는 하였다.
한수가 죽어버린다는 일.
한수가 죽어버리고 그의 옆에 노트가 펼쳐져 있다면…… 노트에는 흘림글씨로 몇 자 적혀 있을 것이다.
‘정신이 맑은 새에 결행하겠다. 당신을 사랑한 증거라고 알아준다면 다행이다…….’
사랑?
그것은 얼마간 우스운 말이기는 하였지만 나쁜 말은 아니었다. 동화를 읽고 난 어른처럼 그녀는 미소했다.
세연 같은 청년은 그런 것을 소중히 알고, 언제까지나 밥 굶은 소년처럼 가엾은 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젖은 물옷을 무릎에 놓고 차에 흔들려 명순은 집에 돌아왔다.
약방의 유리문은 잠겨 있었다. 그녀는 뒷문으로 돌기 위하여 옆 건물과의 새의 좁고 습기 찬 틈으로 들어섰다.
부엌문은 열려 있었다.
모든 것을 팽개쳐두고 한수는 나가버린 모양이었다.
정말 도둑이 들었었을지 모르지만 명순은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일들은 차라리 필요한 조목들일지 몰랐다.
방으로 올라갔다.
한수는 외출하지 않고 거기 누워 있었다.
베개도 없이 턱을 높이 쳐들고―마치 턱으로 솟구쳐 오르려는 듯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크게 벌어진 입은 바싹 말라 침도 안 흐르고, 석고같이 새하얀 살갖을 하고 있었다. 그는 호흡을 안 하였다. 그는 죽어 있었다.
명순의 동공은 크게 벌어져갔다. 점점 더 크게 벌어져갔다. 자기가 태어난 이 우주 속의 일 점을 다시 놓친 사람의 그것같이 그것은 매우 크게 뜨인 눈이었다.
-끝-
2016년 6월 11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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