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종속화폐에서 에너지생산화폐로
ㅡ대한민국 금융의 대전환을 상상한다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최근 주택 공시가격 상승을 둘러싼 언론 보도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니 전형적인 착시 현상을 이용한 공포 마케팅이었다. 서울 일부 지역의 상승률 18.6%는 전체의 단 3%에 불과한 12억 원 초과 고가 아파트들이 주도한 결과다. 전국 중위가격이 1억 7,500만 원, 서울조차 4억 원 수준이라는 실체는 ‘보유세 폭탄’이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 뒤로 숨겨졌다.
상위 3%를 위한 공포 마케팅의 본질은 무엇인가 – 금융의 신용이 부동산에 종속된 메커니즘
이 구조의 수혜자들은 자신들의 자산 가치를 지키기 위해 보유세 강화를 전 국민의 위기로 둔갑시킨다. 그 결과 90% 서민의 주거 현실은 소외되고, ‘강남 아파트’만이 국가 경제의 척도가 된 기형적인 자화상이 고착되었다. 이는 개인의 탐욕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다.
왜 한국 사회는 부동산 가격 하락에 이토록 발작적인 반응을 보이는가? 그 근저에는 현대 자본주의의 신용창출 원리가 숨어 있다. 현대 경제에서 화폐는 중앙은행이 찍어내는 지폐보다, 민간은행이 대출을 실행할 때 훨씬 더 많이 창출된다. 대출이 곧 화폐인 신용창출 시스템이다.
문제는 이 신용의 담보가 고가 아파트에 집중된다는 점이다. 은행 입장에서 환금성이 높은 부동산은 화폐를 생성(발권)하기 위한 가장 우량한 담보물이 된다. 결국 부동산 가격이 유지되거나 올라야 시중에 통화량이 유지되고 경제가 돌아가는 구조, 즉 ‘부동산종속화폐 시스템’이 구축된 것이다.
2025년 말 기준, 가계대출 내 주택담보대출 (주담대) 비중은 63.2%까지 상승했다 (2021년 56.0% → 2025년 63.2%). 5년간 주담대 잔액만 188조 원 증가하며 전체 가계대출 순증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89%대까지 낮아졌으나 부동산 중심 구조는 오히려 심화되었다. 이는 은행 신용창출의 63%가 여전히 ‘강남 아파트’가 상징하는 과거 지대에 묶여 있다는 증거다.
신용의 담보를 바꾼 나라들
우리보다 앞서 부동산 담보 신용의 폐단을 인식하고, 자본의 흐름을 생산적인 방향으로 바꾼 나라들의 사례는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이들의 공통점은 통화 시스템을 전면 교체한 것이 아니라, 기존 금융 시스템 안에서 신용의 첫 번째 목적지를 바꾸었다는 점이다.
독일 슈파르카세: 지역 생산성을 담보로 삼다
독일 금융의 중추는 거대 투자은행이 아닌 지역공공은행 ‘슈파르카세’다. 이들은 지역 주민의 예금을 받아 해당 지역의 중소기업과 재생에너지 사업에 우선적으로 대출한다. 자산의 시세 차익이 아니라 지역의 생산성을 신용의 근거로 삼는 구조다. 그 결과 독일은 부동산 거품을 억제하면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경쟁력과 에너지 전환 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 투기적 신용 수요를 원천 차단하다
싱가포르는 국토의 90% 이상을 국가가 소유하며 주택의 80% 이상을 공공주택으로 공급한다. 지가 상승에 따른 이익이 사유화되지 않으므로 금융 자본이 부동산 투기로 쏠릴 유인이 원천 차단된다. 이렇게 해방된 신용은 국가 전략 산업과 기술 금융으로 집중되어 아시아 금융 허브의 지위를 뒷받침하고 있다.
덴마크: 에너지 생산을 신용의 근거로 실험하다
덴마크는 풍력 발전기의 상당수를 지역 주민 협동조합이 소유하도록 법제화하여 생산 수익을 지역 사회로 환원한다. 최근에는 재생에너지 생산량을 디지털 토큰과 연동하여 지역 내 화폐처럼 사용하는 실험이 진행 중이다. 이는 신용의 근거가 부동산이라는 과거의 지대가 아닌, 에너지라는 현재의 생산물에 놓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선제적 모델이다.
미국 노스다코타 주: 주 소유 공공은행이 에너지 생산을 신용의 중심에 두다
미국에서 유일하게 주 정부가 직접 소유·운영하는 노스다코타 주립은행(Bank of North Dakota, BND)은 부동산이 아닌 지역 에너지 생산 프로젝트를 주요 담보로 삼아 대출한다. 특히 Clean Sustainable Energy Authority(CSEA) Loan Fund를 통해 재생에너지(풍력·태양광·수소), 탄소포집, 클린 제조 프로젝트에 저금리 대출과 그랜트를 제공하며, 주 전체 에너지 생산량 증가를 신용 창출의 근거로 삼는다. 석유 의존 주임에도 불구하고 BND는 지역 생산성을 최우선 담보로 인식함으로써 부동산 거품을 억제하면서도 에너지 전환을 가속화한 성공 사례다.
일본: 중앙은행의 녹색 금융정책으로 신용의 물길을 바꾸다
일본은 ‘그린 트랜스포메이션(GX)’ 전략을 통해 10년간 150조 엔 규모의 민관 투자를 유치하며, 일본은행(BOJ)이 ‘기후변화 대응 자금공급운영’을 통해 재생에너지·에너지 효율 프로젝트에 사실상 녹색 양적완화를 실시하고 있다. 정부는 전환채권(GX Economy Transition Bond)을 발행하고, 은행 대출의 첫 목적지를 부동산에서 에너지 생산 인프라로 전환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이는 통화 시스템을 전복하지 않고도 신용의 흐름을 생산적·생태적 방향으로 재설계한 아시아 선진국 모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들 국가가 통화 시스템을 전복한 것이 아니라 신용이 흘러가는 첫 목적지를 바꾸는 방식으로 경제 구조를 전환했다는 것이다. 한국 역시 같은 방식의 점진적 전환이 가능하다.
에너지생산신용 체계로의 전환을 제안한다
대한민국의 부동산 문제는 단순한 수급의 문제가 아니라 신용의 담보 구조 문제다. 해법 역시 같은 차원에서 찾아야 한다. 본지는 신용의 첫 번째 목적지를 부동산에서 에너지 생산력으로 옮기는 ‘에너지생산신용 체계’로의 전환을 정책 대안으로 제안한다. 이는 통화 시스템의 전면 교체가 아니라, 신용이 흘러가는 물길을 바꾸는 제도적 재설계다.
다행히 한국은 이미 출발선에 서 있다. 금융위원회는 2026년 2월 「기후금융 활성화 방안」에서 10년간 790조 원 규모의 녹색·전환금융 공급 계획을 발표했다(기존 420조 → 2배 확대). 필자는 이 790조를 담보 구조 자체를 바꾸는 데 쓰는 것을 상상한다.
세 가지 정책 경로
1) 지역공공은행과 녹색은행 설립: 신용의 경로를 지역으로
독일 슈파르카세 모델을 벤치마킹하여 각 지자체가 지역공공은행을 설립하고, 지역의 재생에너지 협동조합에 우선 신용을 공급하는 구조를 만든다. 햇빛과 바람이 풍부한 전남 신안, 경북 영덕 같은 지역이 신용 창출의 중심이 될 수 있다. 다만 지역공공은행이 성공하려면 정치적 개입을 차단하고, 지역 주민이 대출 기준을 직접 설계·감시하는 자치적 거버넌스가 실질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2) 녹색 양적완화의 제도화: 화폐 발행의 첫 목적지를 바꾸다
한국은행이 화폐를 공급할 때 그 우선 경로를 재생에너지 인프라 채권으로 한정하는 녹색 양적완화를 상시 정책 수단으로 도입한다. 중앙은행이 시중에 푸는 화폐의 첫 번째 목적지가 부동산이 아닌 지역의 태양광·풍력 단지가 되도록 제도화하는 것이다.
3) 담보 인정 비율의 구조적 재설계: 에너지 자산을 우량 담보로
부동산 대출의 담보 인정 비율(LTV)은 점진적으로 낮추고, 재생에너지 설비와 에너지 효율 건축물에 대한 대출 한도는 파격적으로 높인다. 은행이 에너지 생산 자산을 우량 담보로 인식하도록 감독 기준과 자본 건전성 규제를 재설계하면, 별도의 ‘본위제’ 선언 없이도 신용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바뀐다.
에너지 자산을 ‘우량 담보’로 만드는 3가지 리스크 헤지 메커니즘
재생에너지 자산은 기상 조건, SMP 가격 변동, REC 시장 구조 등 외생 변수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다음 개념의 정교한 리스크 관리가 필수다.
1. 장기 PPA(전력구매계약) 연계 담보: 20년 이상 SMP+REC 고정가격 계약을 담보로 인정한다. 적정수준의 생산량 변동성을 감안한다.
2. 정부 보증 보험 + REC 선물시장 연동: 생산량 부족 시 국가가 90%까지 보전하는 ‘에너지 생산 보증보험’을 신설한다.
3. 디지털 토큰화: 생산량을 실시간 측정하여 Energy-CBDC로 자동 토큰을 발행한다.
부동산 거품을 막연히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 자산의 수익 변동성을 제도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이런 식으로 마련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신용 구조가 완성될 것이다.
부동산종속신용 vs 에너지생산신용: 무엇이 다른가
연착륙을 위한 전략: 제도적 다양성의 진화
갑작스러운 구조 전환은 금융 혼란을 초래한다. 필요한 것은 각 지역이 자신의 맥락에 맞는 규칙을 만들어가는 제도적 다양성의 진화다.
단계별 전환 경로를 생각해본다
1) 보유세와 에너지 펀드의 결합: 고가 주택 보유세를 재생에너지 전환 펀드의 재원으로 활용하고, 주택 소유자가 에너지 자산으로 전환할 때 세제 혜택을 제공한다.
2) 지역 단위 실험 우선: 전국 일괄 시행 전에 햇빛·바람이 풍부한 2~3개 지역에서 지역공공은행과 에너지 협동조합의 결합 모델을 시범 운영한다.
3) 주민 자치 거버넌스 법제화: 지역 공동체가 대출 기준을 직접 설계하고 감시하는 구조를 법으로 보장한다.
4) 에너지 디지털 화폐(Energy-CBDC) 단계적 도입: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에 에너지 생산량 연동 기능을 시범적으로 부여하여 화폐가 실물 생산에 의해 가치를 보증받는 구조를 실험한다.
에너지 디지털 화폐(Energy-CBDC)의 의미
CBDC는 어렵게 들리지만, 본질은 매우 단순하다.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현금’, 즉 지갑 속 지폐를 디지털 형태로 만든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디지털 화폐의 가장 큰 특징은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진 가치인지’를 기술적으로 기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태양광 패널이 하루 동안 생산한 전력량이 자동으로 측정되고, 그만큼의 디지털 화폐가 지역공공은행 계좌로 들어오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햇빛과 바람이라는 실물 생산물이 화폐의 신뢰를 떠받치는 새로운 구조가 열린다.
맺음말 ㅡ신용의 담보를 바꾸는 것이 대전환의 출발점이다
부동산종속화폐에서 에너지생산화폐로의 이행은 혁명적 선언이 아니라, 신용이 태어나는 곳을 바꾸는 조용하고 근본적인 변화다. 미국이 휘두르는 페트로달러도 일종의 에너지생산화폐다. 돈이 만들어지는 첫 번째 목적지를 강남 아파트에서 지역의 태양광 단지로 옮기는 것, 그것이 이 제안의 핵심이다.
독일·싱가포르·덴마크·노스다코타·일본의 사례가 보여주듯, 이 길을 먼저 걸은 나라들은 통화 시스템을 전복시킨 것이 아니라 신용의 경로를 점진적으로 재설계했다. 한국도 마찬가지 경로가 가능하다. 지역공공은행과 녹색은행이 그 제도적 실험의 장이 될 수 있고, 그 안에서 살아남는 모델이 진짜 대안이 된다.
기술적 개혁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2026년 현재 한국은행 CBDC 실증과 790조 녹색금융이 그것이다. 남은 것은 '고가 주택 보유층의 저항을 연착륙시키는 정치적 설득'이다. 고가 주택 보유세 수익을 에너지 전환 펀드로 전환하고, 기존 주담대는 10년간 그랜드파더링(기존 조건 유지)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부동산이라는 허상에 저당 잡힌 화폐를 해방하는 길은, 에너지라는 실체 위에 신용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햇빛과 바람이 돈이 되고, 그 돈이 다시 우리의 생존을 담보하는 생태적 금융 체계로의 이행. 이것이 대한민국이 마주한 유력한 활로이며, 경제 민주화를 열어갈 첫걸음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