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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더운 여름이 가고, 가을을 지나 겨울이 오고 다시 봄이 왔다. 올해는 백호수문금군의 백호둔전(白虎屯田)에 첫 파종이 있는 해였다. 라혼은 거대한 덩어리의 땅을 군인전으로 일괄 구입해 하나의 거대한 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라혼의 농법대로 땅은 갈지 않은 채 신성력(神聖力)으로 생명력을 돋운 볍씨를 파종하고 보릿대를 부숴 파종한 볍씨 위를 덮었다. 그리고 때마침 내린 비로 땅이 촉촉해지자 그것으로 파종을 끝마쳤다. 너무 간단한 농법에 모석은 불안해했지만 라혼이 소작하면서 거둔 소출을 잘 알고 있기에 그저 입맛을 다실 뿐이었다.
“진짜 이게 답니까?”
“이게 다야!”
“땅도 갈지 않았는데?”
“안 갈아도 돼!”
“이거야! 농사를 짓느라 고생한 걸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군요!”
“이건 볍씨가 특별해서 그러네.”
라혼은 그렇게 간단히 설명하고는 땅을 둘러보는 일을 마치고 모석과 헤어져 백호나한부로 돌아왔다.
“서방님!”
“설화야.”
어느새 훌쩍 커버린 설화였다. 이제 열두 살이 되는 설화는 그동안 연마한 옥녀심공의 영향으로 더욱 아름답고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라혼은 설화가 그저 귀엽기만 했다.
“서방님, 우리 천호에 놀러 가요!”
“연공은?”
“항아도 같이 가면 되잖아요.”
단 1년 만에 옥녀심공을 대성한 설화는 최근 세 명의 장로의 손을 떠나 무선자 초항아와 문선자 오단예에게 사사하기 시작했다. 물론 검선자도 가끔 설화의 무공 수련을 도왔다. 그러나 옥녀심공이나 옥녀심결은 빠르게 터득한 설화지만 초식의 운용은 서툴렀다. 옥녀검법(玉女劍法), 옥녀섬수(玉女纖手), 빙옥장(氷玉掌), 섬섬옥지(纖纖玉指) 등 여인천궁의 무공 초식을 익히는 데 진도가 무척 더뎠다. 그러나 급할 것은 없었다. 이미 기본이 되는 옥녀심공을 익혔으니 무공 초식이야 찬찬히 하면 되었다. 그래서 의외로 시간이 많이 생긴 설화는 사부들인 무선자와 문선자를 꼬드겨 놀러 다니기에 바빴다. 그녀들 또한 되지도 않는 무공 수련을 억지로 시킬 생각이 없는지 거의대부분 설화 소궁주의 뜻을 따랐고, 세 장로 또한 그동안 너무 몰아친 것이 미안한지 그냥 눈감아주었다. 설화는 아직 십이세의 어린 ‘아해(兒孩)’였기 때문이었다.
“좋다! 가자. 이왕이면 천호 맑은 물에 배를 띄우고 놀자꾸나!”
“끼야아~! 서방님, 최고!”
서방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무선자 초항아에게 달려간 설화는 그녀를 감언이설로 꼬셔서(꾀어??)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붉은 화의를 차려입은 설화는 라혼의 손을 이끌고 뛰었고, 음식 바구니를 든 무표정한 무선자 초항아가 그 뒤를 따랐다. 지난 1년 간 같은 집에 있었어도 라혼은 초항아와 말 한마디 나눈 적이 없었다. 그녀가 워낙 과묵한 탓도 있었지만, 라혼도 딱히 그녀에게 말을 걸 이유가 없었기에 더욱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오늘도 그저 서로 눈인사만 나누었을 뿐이었다. 라혼은 설화의 손에 이끌려 상경의 시장을 돌아다녔다. 라혼도 황진성 시내를 구경하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서방님! 이거 봐요.”
“아유~! 깜찍하게 생긴 아가씨 보는 눈이 있네요!”
라혼은 설화가 옥노리개를 들고 갖고 싶다는 눈빛 공격에 주머니를 열었다.
“거기 빨간 옷 입은 아가씨 이리 와요! 이 엿 하나 사면 하나는 덤으로 드릴게요!”
“홍의낭자! 이 국수 좀 먹어봐요!”
“빨간 옷 입은 아가씨, 여기 붉은 비단 많아요!”
….
눈에 잘 띄는 홍의를 입고 또 깜찍하기 그지없는 설화였기에 여기저기서 호객하던 상인들이 한 번씩은 모두 불러보는 듯했다. 그러나 설화의 호기심을 끄는 데 성공한 곳은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공(畵工)의 노점이었다. 화공은 나른한 봄볕을 쬐며 졸다가 눈앞에 빨간 것이 아른거리자 퍼뜩 잠에서 깼다. 그는 바로 코앞에서 까르르르 웃는 과연 사람인지 천상의 선녀지 모를 여아(女兒)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백의 사내, 그리고 쪽빛 경장을 입은 절세미인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구, 봄 나들이 나온 가족이신가 보군요! 그림을 사시려오? 아니면 초상화를 그리시려오?”
“그려주세요!”
그러면서 설화는 서방님의 손을 잡았다. 화공은 쪽빛 경장의 여인이 뒤로 빠지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몇 년 후가 자못 기대되는 여아(女兒)와 기이하게 상이 잡히지 않는 백의 사내를 그렸다. 일필휘지(一筆揮之). 화공은 물 위를 노니는 산들바람같이 붓을 놀려 순식간에 홍의 소녀와 백의 사내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세필을 쓰지 않고 굵은 붓으로 사람의 특징만을 잡아낸 그림은 금세 완성되었다.
“다 됐습니다.”
“이야.”
좋아서 뛰어간 설화는 그림을 보더니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화공이 눈에 확 띄는 홍의 소녀의 표정 변화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가?”
“….”
“허!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 다시 그려주지. 어서 아버지 곁에 서거라!”
“아빠 아니에요! 저분은 제 서방님이라고요!”
설화는 화공이 그린 그림을 내던지고 어디론가 뛰어가버렸다. 라혼은 어디론가 뛰어가는 설화와 그녀를 쫓아가는 무선자 초항아를 한번 보고는 설화가 내던진 그림을 펼쳐서 보았다. 상당히 잘 그려진 그림이었으나 아직 말리지 않은 상태에서 함부로 다루는 바람에 먹물이 번져 흉하게 되었지만 라혼은 설화가 짜증을 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림은 부부도(夫婦圖)가 아니라 부녀도(父女圖)였다. 훤칠한 키의 라혼과 작고 앙증맞은 설화의 모습에서 어느 누구도 이 그림이 부부도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라혼은 이제 설화가 자신을 남자로 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라혼은 설화의 성장(成長)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섭섭하면서도 왠지 모를 설렘을 동시에 느꼈다.
“아주 잘 그린 그림이오. 그러나 미안하지만 여기서 내 모습을 지우고 이 아이만 따로 다시 그려주시겠소?”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쫓아가지 않으셔도 되겠소? 세월이 하수상한데?”
“안 그래도 쫓아가봐야겠소. 아직 나이 어린 마누라지만 삐치면 대책이 없으니, 여기 그림값이오. 그림을 망쳐서 미안하오!”
“별말씀을. 그럼 내일 다시 오시오.”
라혼은 화공의 노점을 떠나 설화의 기운을 좇아 발걸음을 옮겼다.
***
“아가씨, 성주님이 아시면 큰일난다구요!”
“괜찮아! 아버님은 성에 계시지 않는다고….”
“성주님은 안 계시지만대부인 마님은 계시잖아요!”
“어머니는 내 편이야!”
황의를 곱게 차려입은 소녀가 시녀인 듯한 녹의 소녀와 투닥거리며 상경 황인성 현무문 밖 양항(良港)의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중경까지면 됐지 상경까지 올 필요는 없었잖아요.”
“시끄러, 청인성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아. 거긴 성의 호위 무사들이 달려나올 텐데 그럼 도망 나온 의미가 없잖아.”
황의 소녀 사청하(獅淸河)는 시녀 하연(夏燕)의 잔소리에 일일이 대꾸하며 오늘의 목적지인 천하에 이름 높은 황학루(黃鶴樓)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인적이 드문 호숫가를 걷던 시녀 하연이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아유~! 귀여워라! 어쩜 저렇게 깜찍하게 생겼다지?”
“뭔데?”
“아가씨, 저길 봐요! 저기 빨간 옷을 입은 여자 애 말예요.”
“어머, 진짜 예쁘게 생겼다. 우리 한번 가보자.”
“그런데 표정이 꽤 시무룩한데요?”
“글쎄?”
사청하는 가만히 그 꼬마에게 접근하려 했다. 그때 꼬마에게 먼저 접근하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리를 홍의 소녀 옆에 서 있던 남의경장 여인이 막아섰다.
―촤르르르….
남의 경장의 여인이 허리춤에서 연검(軟劍)을 빼어들자 빨간 옷을 입은 소녀에게 접근하던 무리들이 흠칫하는 기색을 띠며 주춤했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던 사청하와 그녀의 시녀 하연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말했다.
“어쩌죠?”
“글쎄? 일단 지켜보자. 위급해지면 그때 가서 돕지 뭐!”
그러나 상황은 위급했다. 무리가 연검을 빼든 여인에게 몇 마디 말을 던지며 은연중 포위하더니 일제히 소녀와 여인을 덮친 것이다. 여인의 무공이 녹록지 않았지만 한 손이 두 손을 막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무리의 무공도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안 되겠다. 돕자!”
“예, 아가씨!”
사청하는 품에서 비수를 꺼내들고 홍의 소녀와 연람의 경장의 여인을 핍박하는 흉험한 무리들을 공격했다.
―창~!
―촤르르르….
“웬 년들이냐?”
“아녀자를 겁박하는 흉적들은 알 것 없다!”
흥분한 사청하의 둔갑이 풀려 둥근 사자의 귀가 머리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것을 본 사내들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짐승들이로군.”
“오늘 사냥은 암고양이에 암사자까지 잡게 생겼구나!”
“감히, 이야압!”
세 여인의 무공은 출중했으나 6인의 흉적들의 무공도 만만치 않았다. 연검을 휘두르는 연람의 여인이 셋, 사청하가 둘, 하연이가 하나를 맡았지만 무공이 달리는 하연과 두 사람을 상대하기에 벅찬 사청하는 손이 어지러웠다. 다만 간간이 연검을 휘두르는 여인이 견제해주어 근근이 버틸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연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균형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계집치고 실력이 뛰어나다마는 안됐군.”
“이놈들이?”
“하연아~!”
―쩌렁~!
―퍽!
―크억~!
그때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이제 십이~13세 정도나 되었을 계집아이가 난데없이 시퍼런 강기(罡氣)를 뿌려댄 것이다. 불의 일격을 받은 흉적은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옥녀심강(玉女心罡)에 맞은 흉적이 토한 피는 붉은 보석처럼 얼어붙었고, 그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며 애처로울 정도로 떨었다.
“지, 지독한 음강(陰罡)….”
―쩌렁~!
다시 한 번 몰아쳐오는 강기에 흉적들은 대경실색하며 분분히 물러섰고, 사청하는 하연을 부둥켜안은 채 놀란 눈으로 홍의 소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연검을 휘두르는 여인은 홍의 소녀가 뿌리는 강기에 혼비백산 몸을 피하는 흉적들을 핍박했다.
―퍽~! 빠각, 쿵!
바로 그때 흉적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았는지 갑자기 나타난 백의사내가 지금껏 그들을 막느라 고생한 것이 허탈할 정도로 간단히 제압해버렸다.
“상공!”
무선자 초항아는 반가운 마음에 그를 소리내어 불렀다. 라혼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듯 쓰러지는 설화를 안아들었다. 잠시 놀잇배를 구하기 위해 양항에 갔던 라혼은 어디선가 강기(罡氣)까지 난사하며 싸우는 기척에 살펴보니 당사자가 설화인 것을 확인하고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해 그들을 제압한 것이다.
“설화야!”
“서방님, 무서워요.”
“괜찮다. 내가 여기 있잖니.”
설화는 파르르 떠는 것이 옆에서 보는 사청하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라혼은 설화를 품에 안은 체 설화가 뿌린 옥녀심강에 당한 흉적을 그대로 차올려 허공에서 다지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바바바팍!
그리고 마지막에는 장(掌)으로 그를 날려버렸다. 땅바닥에 처박힌 그의 안색은 화기가 감돌아 사청하와 초항아는 그가 흉적을 치료해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흉적인데 치료는 뭐 하러 해주는 거예요?”
“….”
라혼은 황의 소녀의 투덜거림을 귓가로 흘리고 아직 정신이 있는 다른 놈을 장난감 다루듯 차올려 한 손으로 목줄을 쥐며 물었다.
“인세냐?”
“….”
“맞군.”
“…!?”
인세(人世)의 고수인 육평달(肉平達)은 대경실색(大驚失色)했다. 자기는 아무 말도―목줄이 잡혀 허공에 띄워졌으니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안했는데 그가 그렇게 말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내가 아내의 눈앞에서 피를 보기 싫어한다는 것에 감사해라! 하지만 내 곧 널 찾아가겠다. 각오하도록!”
“….”
육평달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왠지 잠자는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렸다는 생각이 뇌리를 지배했다. 라혼은 멍한 표정의 그를 밀어 던져버리고는 황의 소녀 사청하에게 다가갔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일행이 다치신 것 같은데, 제가 보아드리지요!”
“….”
사청하는 백호나한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아서 고운 아미를 살짝 찡그렸다. 그러나 하연의 기식이 엄엄해 여전히 한 팔로 황의 소녀를 안은 채 하연의 상세를 살피는 그를 막지는 않았다.
―화~!
“으으음, 아가씨…?”
“하연아!”
뭔지 모를 포근한 기운의 빛이 ‘확!’ 하는 느낌과 함께 하연이 깨어나 자신을 부르자 반가운 마음에 하연의 맥을 살폈다. 맥이 안정적이고 숨이 고른 것을 보고 그제야 안심이 되는 사청하였다.
“다행히 그리 큰 상처가 아니었소. 그러나 많이 놀란 것 같으니 안정을 취해야 할 거요.”
“고맙군요!”
라혼은 황의 소녀 사청하의 차가운 어투에 조용히 물었다.
“사 낭자! 낭자의 오라버니와는 이미 벗으로 지낸 지 오랜데, 어찌하여 계속 날 경원시하는 것이오?”
“날 알아요?”
사청하는 그가 자신을 알아보자 가슴이 두근거리며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그의 대답에 붉게 달아오르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제가 사 낭자와 같은 미인을 못 알아볼 리 없지 않소.”
“역시 그렇겠죠!”
잠깐 그가 호색한이란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현장을 벗어나 양항으로 들어서자 라혼은 여전히 싸늘한 표정의 사청하에게 작별의 말을 했다.
“도와주신 은혜 감사하오. 그럼….”
“이봐요!”
“….”
“목숨 걸고 도와줬는데 그게 다예요?”
“미안하오. 나는 낭자가 날 불편하게 여기는 것 같아 그랬을 뿐이오. 나는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이니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
사청하는 그대로 돌아서려는 그를 잡아 세웠는데 딱히 그에게 요구할 만한 것이 없었다. 아이가 저렇게 식은땀을 흘리며 경기(驚氣)가 들렸는데 놀러 가자고 할 수도 없고, 보나마나 집으로 돌아갈 모양이니….
‘집! 백호나한의 집이 있었잖아!’
사청하는 호색한 백호나한의 집을 구경하고 싶었다. 오라버니 말대로라면 그가 집 구경을 끝까지 시켜주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번 기회에 백호나한부를 구경하고 오라버니에게 자랑할 생각을 하자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 하연이도 다쳤다고요. 그리고 익숙지 않은 이곳에 안전하게 쉴 곳도 없고…. 댁의 집으로 가서 쉬고 싶은데…?”
“제 집에요?”
라혼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초항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무표정한 그녀였다. 사청하가 그의 입에서 거절의 말이 흘러나오기 전에 냉큼 말했다.
“안정을 취하라고 한 사람은 당신이에요. 습격한 무리들은 인세의 흉적 무리 같은데, 우리는 그들과 적대 관계에 있다고요!”
“그럼, 누추하지만 따라오세요!”
이제껏 침묵을 지키던 무선자 초항아가 라혼을 대신해서 대답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더 사청하의 신경을 긁었다.
“흥!”
“….”
사청하는 겉모습은 냉정하게 그러나 속마음은 호기심을 가득 품으며 백호나한의 뒤를 따랐다. 약 반 시진 정도 걸었을까?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백호나한부에 도착했다.
―똑, 똑똑똑, 똑!
무선자 초항아가 어떤 박자로 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렸다. 그러자 보기 드문 절세가인이 문을 열었다.
“어? 상공, 벌써 돌아오시는 거예요?”
“낙아, 오늘은 손님이 계시다!”
사청하는 자기를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모습에 울컥했다.
‘왜? 새로운 경쟁자일까 봐?’
사청하는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마당도 없이 바로 대청이 보이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공, 돌아오셨습니까?”
“빨리 돌아오셨네요.”
그리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하나같이 보기 드문 절세가인들이 나타나 반갑게 백호나한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고 사청하는 입을 삐죽 내밀며 내심 중얼거렸다.
‘호색한 같으니라고….’
하지만 라혼도 여인천궁의 여인들이 새삼스럽게 환대하자 얼떨떨했다. 대청까지 이렇게 우르르 몰려나온 경우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외인(外人)을 끌고 온 입장이라 그녀들 때문이려니 짐작할 뿐이었다. 라혼은 그녀들의 호들갑스런 태도를 그러려니 받아넘기고 자신의 품에 안겨 잠든 설화를 침상에 눕히기 위해 후원 2층의 침실로 향했다. 잠이 들었음에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설화를 떼어내 침상에 눕힌 라혼은 밖으로 나왔다. 계속 설화 곁에 있고 싶었지만 손님이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후원 거처에서 나온 라혼이 백호나한부의 작은 정원을 지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궁주 상유란이 말을 걸어왔다.
“인세의 무리들이 설화를 노렸다고 들었습니다.”
“심려를 끼쳐 미안하오, 궁주!”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상공?”
“금위들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지요!”
“예?”
라혼은 의문성을 토하는 궁주 상유란을 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
“설화를 노렸던 놈들에게 천리미향을 뿌려놓았소. 인세라면 이를 가는 금위위에 그 사실을 알리고 미향을 추적할 수 있는 시약을 같이 넘길 거요. 그렇게 되면 독 오른 금위위가 내 복수를 대신해줄 것이고 금위들을 피하기 바쁜 그들이 다시 설화를 노리지는 못할 것이오.”
“호호호, 차도살인(借刀殺人)이군요. 그럼 저기 철사성의 금지옥엽은 어찌하실 건가요?”
“….”
라혼은 궁주의 질문에 어떠한 답도 할 수가 없었다. 속마음과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다른 여인이니 라혼도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그저 알아서 물러가주길 바랄 뿐이었다.
***
궁주로부터 백호나한이 세상에 호색한(好色漢)이라 알려졌으니 알아서 처신하라는 언질을 받은 여인천궁의 여인들은 평소의 경장을 벗고 각자 화사한 화의(花衣)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상공에게 거의 들러붙다시피 하며 코맹맹이 소리를 연발했다.
“아잉~! 상공, 이것도 드시어요!”
“어머나~! 이 땀 좀 봐! 몸이 허하신 것 같은데 몸을 아끼셔야죠! 우리는 상공이 없으면 안 된다구용~!”
라혼은 여인들이 화의를 입고 애교를 부리자 어리둥절하며 포란이 집어주는 꿩고기를 받아먹고 고운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아주는 초련에게 몸을 맡겼다. 그러나 이들이 왜 이렇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앞자리에서 식사하는 사청하 때문에 이런다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왜 애교에 코맹맹이 소릴 내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라혼은 아직도 자신이 호색한으로 유명하다는 것을 몰랐다. 일터인 백호문과 집인 백호나한부 사이만 왕복하던 라혼에게 ‘당신은 호색한입니다’라고 말할 배짱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인천궁의 여인들이야 라혼이 호색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자신들 때문에 호색한이란 소문이 퍼졌기에 그것에 대해서는 피해가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여인들도 라혼이 자신이 호색한이라 소문났다는 사실을 모른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더욱 헷갈리는 것은 여인들의 애교가 어느 정도 진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녀들의 기분을 읽는 라혼으로서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다만 객으로 와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묵묵히 식사를 하는 사청하만 괜히 왔다는 생각을 하며 코로 들어가는지 눈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음식을 먹을 뿐이었다.
‘흥! 천한 것들! 손님이 있건 없건 상관하지 않는군?’
사청하는 눈꼴시게 아양을 떠는 여인도 그렇지만 헬렐레한―절대 그렇지 않다― 백호나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반응을 그녀들이 즐긴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는 사청하였다.
―탁!
거칠게 수저를 내려놓은 사청하는 싸늘하기 그지없는 어투로 말했다.
“요리가 아주우~! 맛있군요! 쉬고 싶은데 방이라도 내주면 고맙겠군요.”
그러나 여전히 백호나한부를 떠날 생각이 없는 사청하였다.
“따라오시지요.”
“그럼 쉬시오!”
“흥!”
라혼은 자신이 건넨 인사에 냉랭한 코웃음으로 대신하는 사청하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객으로 초대해놓고 신경써주지 않았으니 기분이 나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청하가 자리를 뜨자 여인들은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호호호호….
“아유~! 귀여워라!”
“정말, 고양이 같은 아가씨야!”
“나도 들어가겠소.”
“예에, 상공!”
라혼은 합창하듯 하는 애교 섞인 인사를 뒤로 하고 설화가 누워 있는 거처로 돌아왔다. 설화는 그때까지 깨지 않고 잠이 들어 있었다. 라혼은 설화의 상태를 확인하고 서재에서 가져다 놓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가롭고 고요한 밤을 즐기던 라혼은 설화가 누워 있는 침상 쪽에서 나는 기괴한 소리에 보던 책을 덮고 설화에게 다가갔다.
―뿌득~!
―우두둑~!
“설화야?”
기괴하게 뼈 부러지는 듯한 소리는 다름 아닌 바로 설화에게서 나는 것이었다. 라혼은 정신없이 문선자 오단예가 머무는 방으로 달려갔다. 문선자는 의술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오 낭자!”
“어멋!”
하늘하늘한 침의(寢衣) 차림 오단예는 갑작스럽게 상공이 방으로 뛰어들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 무슨…?”
“설화가 이상하오. 어서어서….”
라혼은 침의 차림의 그녀를 끌어안다시피 하여 설화에게 데려갔다.
“끼야아~!”
고요한 한밤중에 일어난 소요에 사청하는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곧 거칠게 문을 닫았다.
―탁!
“칫! 손님이 있을 땐 좀 참아(?)주면 안 되나…. 호색한!”
침의만 입은 미녀를 납치하듯 자기 방으로 데려가는 백호나한을 본 사청하는 연방 투덜거렸다.
“아가씨?”
“몰라. 별일 아니야! 내일 성으로 돌아가자.”
“예, 아가씨.”
설화의 침상 앞에 궁주와 세 명의 장로 그리고 무선자 초항아와 검선자 주묘연이 문선자 오단예가 진맥하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우둑~!
“…!”
“….”
이윽고 오단예는 진맥을 마치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휴우~! 미안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짐작되는 바도 없느냐?”
“증상으로 봐선 환골탈태 현상인데….”
오단예는 미안한 표정으로 경험 많은 장로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가장 연장자인 교운파파 치호연이 나서며 말했다.
“궁주, 이 늙은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소.”
“하지만 소궁주는 아직 몸이 제대로 자라지 않은 어린아이입니다. 저는 어린아이가 환골탈태한다는 것은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라…!”
라혼은 여인천궁의 궁주와 장로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서야 설화의 증상이 무엇인지 알았다.
‘드라시안 하트구나!’
문제는 설화 몸속의 드라시안 하트였다. 드래곤 하트를 가진 드래곤들은 세월이 가면서 계속 그 힘이 커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육신(肉身)이 그 힘의 크기를 견디지 못하는 시기가 오는데, 드래곤들은 그때 긴 잠에 빠진다. 그리고 그 수면기에 몸체가 보유한 힘에 맞게 커지는데 그 때문에 드래곤은 나이가 먹을수록 몸집이 컸다. 그것이 인조 드래곤 하트인 드라시안 하트에 적용하면 그것을 가진 인간은 짧은 수면기에 빠지고 그때를 이용해 신체가 아예 재구성되는 것이다. 즉 거인화가 된다는 말이었다. 순수하게 힘만 추구한다면 몸집이 커지는 것은 별문제 없겠으나 인간은 힘만 가지고 살아갈 수 없다.
‘설화는 몸에 무리한 공력을 운용했다. 그러니 드라시안 하트가 때가 되었다고 착각했겠군. 바보같이! 드라시안 하트의 그런 결점이 이제야 생각나다니….’
라혼 또한 처음 스승 에인션트 드래곤 최고룡(最古龍) 지슈인드에게 드라시안 하트를 받고 몸집이 커지는 바람에 그 저주 아닌 저주를 풀기 위해 고생한 것을 생각하며 고개를 설래, 설래 저었다. 사실 설화에게 드라시안 하트를 심은 것은 잔병치레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중에 마법이나 또는 무공을 가르치려는 생각으로 그랬는데, 본래 단단한 완성된 몸이었던 자신과 건강하지만 자신에 비하면 턱없이 연약한 설화의 몸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모두 나가주시겠소.”
“상공?”
“부탁이오. 아무 말 말고 자리를 피해주시오.”
“알겠습니다.”
여인들은 소궁주의 일공(一公)인 백호나한에게 소궁주를 맡기고 방 밖으로 나갔다. 라혼은 조용히 설화를 덮고 있는 이불을 젖히고 설화의 옷을 벗겼다. 라혼은 이제 막 여성의 상징인 가는 허리와 봉곳한 가슴이 생기기 시작하는 설화의 심장 부위에 손을 얻고 흡성대법(吸性大法)을 펼쳤다. 라혼의 생각이 옳다면, 지금 드라시안 하트는 힘이 폭주하는 상태에 있었다. 일단 그 모든 힘을 빨아내고 드라시안 하트에 약간의 금제를 펼칠 생각이었다.
―쿵!
작은 설화가 가지고 있는 공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방 안이 설화의 공력이 만들어낸 와류(渦流)로 인해 온갖 집기들이 날아올라 마치 폭풍 같았다. 하지만 라혼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설화가 가지고 있던 옥녀진기(玉女眞氣)가 고갈되고 선천진기(先天眞氣)로 바뀔 무렵, 라혼은 마법 주문을 시전했다.
“서프레션(Suppression)! 심벌(Symbol)!”
누군가 마법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자가 있었다면 놀라움을 금치 못할 일을 라혼은 해내고 있었다. 흡성대법(吸性大法)이라는 전혀 다른 이론 구조의 대법(大法)과 듀얼 캐스팅으로 [서프레션Suppression : 금제], [심벌Symbol : 상징]의 두 가지 8서클(Cycl)의 주문을 동시에 시전한 것이다.
―쾅~!
―큭!
라혼은 설화의 몸에서 반탄(反彈)하는 선천지기(先天之氣)의 힘을 그대로 몸에 받으면서 방 밖으로 튕겨나갔다.
“상공!”
“사, 상공!”
어느새 날이 밝아 아침이었다. 라혼은 엄청난 충격에 정신이 아찔했지만 이내 몸을 일으켜 방 안으로 들어가 설화의 상태를 확인했다.
“성공했다!”
라혼은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금제가 성공했음을 알 수 있었다. 결과는 앞으로 더 지내봐야 알 수 있겠지만 현재로선 성공이었다.
“뭘 말씀이십니까, 상공?”
“주화입마였소.”
“예!?”
궁주 상유란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화입마(走火入魔)는 무인에게 있어 사형 선고와도 같은, 바로 무공을 잃는다는 뜻이었다. 무림의 신비일세(神秘一勢)인 여인천궁주가 되어야 하는 소궁주 설화에게 절대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다.
“하, 하지만 주화입마의 징후를 찾을 수 없었거늘….”
“궁주, 아마도 설화 소궁주의 선천지기가 그것을 막고 있어, 우리가 징후를 찾을 수 없었을 테지요!”
라혼은 드라시안 하트에 대해 설명하기가 난감해 주화입마를 말했지만 힘의 폭주라는 점은 비슷해도 그 결과가 다르니 주화입마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알아서 해석해주니 그렇게 알도록 내버려두었다.
“쯧쯧쯧, 1년 공부가 허사로구나….”
“거 뭐랬어, 급하게 먹으면 체할 거라고 했잖아!”
“시끄러워, 이 할망구들아! 천고의 기재라며 쥐 잡듯이 몰아붙인 것이 누군데 그래!”
설화의 맥을 짚어보던 교운파파 치호연이 혀를 차자, 호파와 모낭이 끼어들면서 아옹다옹 싸우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궁주 상유란이 막고 나섰다.
“고정들 하세요. 그보다 방을 치워야겠군요. 설화는 제가 돌보겠으니 상공도 쉬세요!”
라혼은 설화의 공력에 초토화된 방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방이 이렇게 되었으니 라혼이 집에서 편히 쉴 곳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여인들만 있는 이곳에서 라혼이 마음 편히 쉴 곳은 이 침방이 유일했다.
“아니요. 궁주께서 설화를 돌보시겠다니, 저는 백호문으로 가겠습니다.”
“아니, 설화를 치료하느라 과도하게 심력을 소모했을 텐데….”
“괜찮소.”
라혼은 그들을 내보낸 뒤 부서진 방 안 집기들 사이에서 관복을 찾아 갈아입고 세수라도 하기 위해 밑으로 내려왔다.
“어, 상공?”
“난아구나!”
라혼은 새삼스럽게 자기를 보고 놀라는 난아를 지나쳐 우물가로 갔다. 우물가에서도 여인천궁의 여인들이 자기를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어제 저녁부터 모두 이상하게 행동했으니 라혼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러려니 넘어갔다. 그리고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들어서자 사청하의 모습이 보였다.
“누구… 백호나한?”
“밤새 안녕하시었소?”
라혼은 사청하의 반응에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원래 그런 여인이니 일일이 반응하다가는 끝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인천궁 여인들의 반응은 신경쓰였다. 어제 하던 행동과 지금의 행동이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제 그녀들이 보였던 행동도 이해 못하는 라혼이었으니 그저 알아서 하는 것이려니 했다. 그리고 어제와 다른 조용한 아침 식사를 마친 라혼은 홍조가 가득한 사청하에게 인사하고 백호나한부를 나섰다.
“수문대장님, 안녕하십니까?”
“음.”
출근길에 이제 서로 안면이 있어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된 백호대로의 상인들과 수인사를 나누는 라혼은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새삼스런 그들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왜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거야? 얼굴에 뭐라도 났나?’
그리고 마침 아침 교대 병력이 모여 있다가 교대 시간이 되어 정렬하기 시작한 금군들이 보였다. 라혼은 일단 인수인계를 위해 백호문 성문 위에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나오셨습니까! 수문대장님?”
“수고가 많군.”
라혼이 성문 위로 오르자 그곳을 지키던 상포(商鋪)가 장보(壯普)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야, 분명히 우리 주군 맞지?”
“맞아! 우리 주군이야?”
“우리 주군이 저런 절세 미남자였냐?”
“글쎄? 거참, 귀신에 홀린 기분일세.”
“분명 주군이 맞는데?”
무사 출신 금군들은 백호나한 라혼을 주군(主君)이라 불렀다. 그것이 일반 금군들에게도 전파되어 백호수문금군 내부에서는 백호수문대장 라혼을 주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오늘에야 새삼스레 그들의 주군이 고금에 드문 미남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춘앵이가 그러는데,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이 세상에 둘도 없는 미인으로 보인다고 하던데?”
“내가 주군을 존경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랑까지는 아니야!”
“그런데 왜 갑자기 미남자로 보이냐고….”
“위험해…. 천하미인을 독차지한 천하의 호색한 백호나한이 이젠 남자에게까지 마수를….”
라혼은 오늘따라 유난히 간지러운 귀를 파며 집무실로 들어섰다. 집무실에는 밤새 숙직을 서던 참령(參領) 고우(膏雨)가 있었다.
“수문대장님, 나오셨습니까?”
“수고했네, 별일은 없었겠지?”
“별일은 없었지만… 수문대장님 맞습니까?”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 것인가? 내 얼굴에 뭐라도 났는가?”
“아, 아닙니다. 교대 시간이 되었으니….”
라혼은 밤사이 있었던 일을 적어놓은 장부에 수결(手決)하는 것으로 인수인계를 하고 교대 병력을 훈시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라혼은 오와 열을 맞춰 도열한 금군들 앞에 마련된 연단에 올라 간단한 훈시를 하고, 교대 병력을 각 문과 성벽으로 보냈다. 그리고 밤새 번을 선 병력이 모이자 역시 간단한 훈시를 하고 해산시키는 것으로 아침 일과를 끝낸 라혼은 평소와 같이 백호영으로 향했다. 백호수문금군의 병영인 백호영은 지난 1년 새 무림의 문파처럼 되어 있었다. 백호나한 라혼이 약간의 무공을 전수하자 그 소문이 퍼지면서 백호나한과 비무한 경험이 있는 무사들이 하나 둘 찾아와 이제 백호수문금군은 사문수비금군 안에서 현무문을 제외하곤 가장 큰 부대가 되었다. 병력이 넉넉해지자 다른 주작문(朱雀門)과 청룡문(靑龍門)에서 자기들이 내주었던 병력과 자기들이 모자란 병력을 빼가 백호문에 원래 속해 있던 금군은 이제 수십 명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총 병력 십이08명인 백호수문금군은 태반이 백호나한을 개인적으로 따르는 무사들로 채워진 것이었다. 덕분에 백호문은 금위위에 요주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백호수문대장인 라혼이 그들에게 한 짓 때문이기도 했지만 라혼 자신이 생각해도 그 점은 이해할 만했다. 그만큼 백호영(白虎營)에서 머무는 무사들의 실력은 뛰어났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무슨 일이든 도(道)에 들어서면 길을 이끌어줄 스승이 필요했다. 스승이 존재하면 많은 시행착오를 피해 빠르게 일정한 경지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도(武道)의 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점에 있어 백호영의 무사들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는 바로 스승이었다. 특히 조산투귀 만력과 같이 문파의 전인(傳人)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려는 자에게 있어 백호나한은 최고의 스승이었다. 라혼의 무공 자체가 형과 식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이끄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따르는 자가 생기는 법. 원하지 않게 조정의 금군이 된 그들이었지만 백호나한이 제시하는 길은 그들이 꿈에도 그리던 고수의 길이었기에 진심으로 백호나한을 따랐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실력은 2류, 3류의 그것이 아니었다. 처음 금군이 된 6백여 무사들 중 만력과 같이 나름대로 고수 소리를 듣는 자가 있어, 라혼이 강제로 한데 묶어놓자 그들은 형제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무공을 형제가 되어버린 자들에게 전수하기 시작했다. 처음 9일 동안 보여주었던 백호나한의 교육(?)은 그들을 형제로 만들기에 충분한 시련이었다. 게다가 기본 군사 훈련이 끝나고 주군 백호나한이 자신들에게 무예를 전수하자 백호영은 이제 그들의 문파가 되어버렸다.
백호나한 라혼의 무공 전수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전과 같이 비무를 하며 이끌어주기 형식으로 각자의 독특하기 이를 데 없는 무공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일을 도운 것이었다. 지금 백호영은 각자의 무공을 경연하며 백호나한이 비무를 받아주고, 비무가 끝나면 모여 의논하는 형식으로 스스로의 무공 진보를 꾀했다. 그전과 다른 점이라면 그때는 견제해야 하는 상대였지만 지금은 형제라는 것이 달랐다. 그래서 스스로 숨겨두었던 비기를 주저 없이 보여주며 무공 연마를 했고, 백호영은 그들로 인해 기초 무공을 잡아가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잡다하기 그지없는 그들의 비기는 하나하나 절초로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백호영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아직 몸이 완성되지 않은 무사들이 고련하는 모습이 보였다. 상관인 라혼이 들어섰음에도 그들은 자기 수련에 열중했다. 이것은 라혼이 그들에게 바라는 모습이었다. 수련 중엔 누가 와도 집중력을 흩뜨리지 말라는 자신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그들을 보고 연무장을 지나 본영 안으로 들어섰다.
“주군이십니까?”
“만 참위, 그렇게 부르지 말라 했거늘.”
“죄송합니다, 수문대장님!”
참위(參尉) 만력은 백호영의 대형(大兄) 같은 존재였다. 백호나한 라혼을 제외하고 백호영 최고수(最高手)이기도 하지만 최초로 백호나한에게 도전하고 자신들이 백호나한 곁에 모이게 한 존재였기에 암묵적으로 백호영을 이끄는 사람으로 대하고 있었다.
“한데… 그동안 저는 수문대장님이 이렇게 미남자인 줄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대장님의 모습에 여러 계집 죽어나갔겠군요!”
“뭐?”
라혼은 그제야 아침에 여인천궁 여인들과 백호대로의 사람들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컨트롤 챰Control Charm : 매력 조절] 주문이 깨져 있어 라혼의 진면목이 드러난 것이다. [컨트롤 챰Control Charm]은 얼굴이나 몸은 변하지 않고 매력을 조절함으로써 미남자이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잘생겼다고 느끼지 못하게 하는 마법 주문이다. 라혼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컨트롤 챰Control Charm] 주문을 시전하려 했지만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그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바로 설화에게서 흡인한 옥녀진기가 체내에 남아 마법 운용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동안 여인천궁주와 장로들과 같이 지내며 옥녀심공이 심후한 사람에게는 [컨트롤 챰Control Charm] 주문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가끔 찾아오는 철혈사자성의 대공자 홍안잠사(紅眼潛獅) 사낙연(獅洛演)도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즉, 심후한 현공을 익힌 자에겐 현혹하는 주문이 잘 먹히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 경지의 인물이 외모 같은 것에 동요할 리 없기에 그저 그대로 넘겼다. 물론 라혼은 체내의 옥녀진기를 강제로 한곳에 몰아넣고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겠으나 이미 팔릴 대로 팔린 얼굴이었다. 그러나 옥녀진기의 영향으로 자신에게 묘한 색기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라혼이었다.
***
백호영에서 만들어진 초식들은 많은 실전을 거쳐 완성되었기에 대체적으로 훌륭했다. 그리고 백호나한이라는 초극고수(超克高手)의 존재는 그 초식들을 하나하나 절학의 경지에 올려놓기 충분했다. 그러나 백호영의 무예에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다. 바로 내공심법의 부재였다. 몇몇 1류 고수들이 가진 심법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완전한 것들이 아니었다. 잡다한 초식들이야 어차피 몸놀림에 불과한 것. 물론 그 체술(體術)만으로 고수라는 소리를 듣는 만력(蠻力)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내공심법 또한 익혀야 완전한 고수가 되는 것이다. 박투술(搏鬪術)만으로는 평생 가야 절름발이 고수일 뿐이었다. 급한 대로 백호영의 무인들은 가장 기초적인 삼재기공(三才氣功)을 백호영의 기본 내공심법으로 삼았다. 삼재기공은 흡(吸) 들이마시고, 지(止) 멈추고, 호(呼) 내쉬는 기본 기공이다. 그러나 삼재기공은 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문파(門派)에서 기본으로 삼는 것으로, 숨을 들이마시는 시간이나 방법, 멈추는 시간과 기법, 내쉬는 숨의 양과 또 시간 등이 무한할 정도로 다양했다. 그러나 잡다한 기문심공(奇門心功)을 가진 백호영의 무인들에게 그것이 가장 안전한 기공(氣功)이었다. 방문좌공(傍門左功)이든 정문현공(正門玄功)이든 모두 흡(吸), 지(止), 호(呼)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않기에 잡다한 심법을 익히고 있는 백호영에서 선택할 수 있는 내공심법은 삼재기공뿐이었다.
라혼은 오늘도 오전에는 백호영에서 시간을 보냈다. 때론 비무를 통해 금군들의 무예 수련을 돕기도 하고 수문대장으로서 처리해야 할 서류도 훑어봐야 했다. 비록 백호수문금군이 1200여명을 헤아리고 있지만 조정에서 거기에 맞는 운용 자금이 내려오지 않았기에대부분 백호나한 라혼의 이름으로 자금을 빌려 그것으로 각종 장비나 관복, 무복, 군량, 무기, 그리고 백호둔을 경작할 농기구에 금군들의 봉록까지 지급하고 있었다. 지금 조정은 앙신성(央信省)에서 반란을 일으킨 만인왕(萬人王) 거정(巨政)의 보(保)나라와 벌이는 3년간의 전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기에 모든 자원은 그곳에 집중되어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자기 멋대로 금군의 숫자를 늘린 라혼에게 지급되는 자금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라혼이 전에 흑막(黑幕) 제평(齊平)에 차를 팔아남은 이문과 10년 간 농사를 지어 거둔 쌀과 보리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빌리는 형식을 취한 것은 바로 백호수문금군을 감시하는 금위위 때문이었다.
“이거 참 귀찮군, 회계를 볼 관리를 파견해달라고 할 수도 없으니….”
라혼은 언제나처럼 투덜거렸다. 식구가 늘어 매달 비교적 규모가 있는 자금이 움직이니 그것을 처리할 문관(文官)이 필요했지만 문관을 파견해달라 요청하면 그것은 백호문을 감시하는 금위위에 전모를 공개하는 셈이고, 그렇다고 백호문에서 문관을 따로 뽑을 수도 없었다. 결국 홀로 모든 문건을 처리하면서 투덜거리는 라혼이었다.
“이것이 마지막인가?”
라혼은 계속 투덜대면서 마지막까지 남은 서류를 정리하고 장부를 덮었다. 시간은 벌써 정오 가까이 되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단 한 시진 만에 서류 작업을 끝낸 라혼이었다. 한가로운 정오, 곧 점심이 시작되어 반시진의 여유를 라혼은 언제나처럼 즐겼다. 시간을 흘려보내는 행복감에 취해있던 라혼 급한 발짝 소리에 입맛을 다셨다.
―덜컹!
“크, 큰일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웅 참위가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크앙~!
때마침 들려온 울부짖는 소리에 라혼은 소리가 난 곳으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했다. 사고가 났음을 보고하러 온 오차(烏此)는 눈앞에서 주군이 사라져버리자 놀랐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참위(參尉) 웅장모(熊掌模)가 미쳐 날뛰는 곳으로 뛰어갔다.
―크와왕~!
―와장창~! 퍽!
수인(獸人)인 곰 인간 웅장모는 무조건 앞으로 돌진하며 앞을 막아서는 모든 것을 부쉈다. 하얀 거품을 물고 기물을 부수는 곰 인간을 백호영 형제들이 막아섰지만 무지막지한 웅장(熊掌)에 상처를 입고 분분히 물러설 뿐이었다. 만약 저 상태로 백호영을 벗어나면 국법에 따라 즉결 참형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수인이 천하를 도모하고 난 후 가끔 미쳐 날뛰는 수인들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많은 인명 피해를 동반했으므로, 얼마 후에 미쳐 날뛰는 수인은 신분이 어떻든 관계없이 무조건 참(斬)하라는 용황의 황명(皇命)이 떨어졌다. 그리고 호제(虎帝)가 직접 미쳐 날뛰는 자신의 아들을 벰으로써 그 법은 이제껏 철저하게 지켜져왔다. 그러므로 백호영 내에서는 어떻게 무마할 수 있다지만 밖으로 나가면 어쩔 수 없이 형제인 그를 베어야만 했다.
“웅 형, 정신 차리시오!”
―크왕~!
―퍽!
―크윽!
반인반수 상태에 있는 수인의 힘은 참으로 대단했다. 평상시 평수(平手)였던 만력이 한 방에 나가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웅장모는 연무장을 가로질러 백호영 밖으로 나서려 했다.
―퍽!
―쿠웨억~!
다행히 바로 그때 백호나한 라혼이 가로막고 그대로 철산고로 미쳐 날뛰는 곰 인간 웅장모를 날려버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쫓아온 백호영의 군사들이 창대로 웅장모를 내리눌렀다. 수십 명의 금군이 힘을 합치자 기세 좋게 날뛰던 곰 인간도 꼼짝달싹하지 못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것이… 식사 시간이 되어 그를 부르러 갔는데 갑자기 미쳐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라혼은 어느새 헐레벌떡 뛰어온 오차(烏此)의 설명을 듣고 생각나는 바가 있어 그를 누르고 있는 창대를 치우라 명했다.
“그를 풀어줘라!”
“예,”
―크왕! 크르르르르….
전신을 내리누르던 창대가 사라지자 곰 인간 웅장모는 벌떡 일어나 울부짖었다. 그리고 라혼을 보고는 애처로운 눈빛을 흘리며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에게 아직 약간의 이성이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라혼은 칠종금나수(七宗擒拿手)로 그의 완맥을 틀어쥐며 맥을 살폈다. 수인의 맥이 인간의 맥과 같을 리 없었지만 맥을 살피려는 것이 아니므로 상관없었다.
“주화입마다! 금군은 나와 웅 참위를 호위하라!”
“존명!”
주군의 명이 떨어지자 백호영의 금군들은 넓게 포진하며 주군과 웅장모를 중심으로 인(人)의 장막을 쌌다. 라혼은 명을 내림과 동시에 웅장모의 명문(命門)에 손을 얹고 흡성대법을 시전했다. 생각한 대로 그의 체내에는 여러 가지 잡다한 기운들이 혼재하며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라혼은 그 모든 힘을 흡인결(吸引訣)에 따라 유도해 모두 빨아냈다. 이미 지난밤 설화를 통해서 경험한 일이었기에 두 번째는 더 쉬웠다. 그러나 설화의 경우 정순하기 그지없는 순수한 옥녀진기였지만, 웅장모의 내공은 잡다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힘을 억누르는 흡진결(吸鎭訣)을 동시에 사용했다. 이 일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만약 무턱대고 흡성대법을 전개하면 웅장모는 생기까지 모조리 갈취당해 죽거나 폐인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따라서 흡인결에 따라 충돌하는 기운만 잡아내는 일은 무척 힘든 일을 해야 했지만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도망치는 기운을 잡기 위해 라혼은 웅장모의 막힌 기혈을 뚫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고, 웅장모는 막혀 있던 기혈이 모두 타통되어 어찌 보면 전화위복을 넘어 천고기연을 얻은 셈이 되었다. 물론 그동안 고련한 공력을 모두 잃기는 했지만 말이다.
약 한 시진이 흐르고 나서야 라혼의 치료는 끝났다. 치료가 마무리되자 웅장모는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고맙습니다, 주군.”
“주군이라고 하지 말라고 했잖아!”
하지만 라혼은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그 말만 하고는 그대로 혼절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웅 참위를 내실로 옮겨 쉬게 하고, 금군들은 어서 식사를 끝내고 근무 교대해라!”
“예, 수문대장님!”
꿀 같은 휴식 시간을 날린 라혼은 뒷수습하는 금군들을 뒤로 하고 백호영의 연무장을 나왔다. 백호영은 아직 라혼이 펼쳐놓은 소리와 시야를 속이는 마법진이 남아 있었지만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는 금위위들이 뭔가 낌새를 차리면 골치 아파지기에 그들의 입을 막아놓을 필요가 있었다. 광분하는 수인을 감싸는 것은 중죄였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라혼에게는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라혼은 백호영이 한눈에 보이는 다관(茶館)의 2층으로 올라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차를 마시는 사내들 앞에 자리를 잡았다.
“견 위장, 서로 안면이 없는 사이도 아닌데 이젠 모르는 척하는 것인가?”
“아아,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에 열중하다 보니 미처 뵙질 못했습니다. 참장님!”
그는 위장(衛長) 견사찬이었다. 백호수문대장에게 휘말려 금위위의 위세에 흠집(?)을 낸 죄로 그는 백호영을 감시하는 좌천 아닌 좌천을 당했다. 사실 금위위의 최대 관심은 금위위의 몰락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 인세(人世)의 무리를 색출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과 아무 관련이 없는 백호수문대장의 백호영을 감시하는 것은 공을 세울 기회를 박탈하는 좌천인 셈이었다. 견사찬 입장에서 백호수문대장 라혼 참장은 악연이었다.
“그런가? 그런데 금위위는 무척 한가한가 보군. 어째 매일 이곳에서 죽치고 앉아 있으니 말이야. 그래도 봉록은 제대로 나오겠지?”
“크흠~!”
견사찬의 얼굴이 똥빛이 되었다. 그 말은 자신을 놀리는 말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되묻는 말투가 퉁명스러웠다.
“크흠, 그나저나 제게 볼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섭섭한 말은 하지 말게. 나는 자네가 공을 세울 기회를 주기 위해 왔으니까!”
“공이라니요?”
견사찬은 공을 세울 기회라는 말에 약간의 관심을 보였고, 그런 그에게 라혼은 자신이 어제 겪었던 이야기를 몇 가지 사실만 빼고는대부분 말해주었다. 라혼은 시약이 든 약봉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그 미향을 감지할 수 있는 시약이네.”
“그, 그게 사실입니까?”
“그래, 어차피 조사하면 다 나올 일, 내가 숨겨서 뭘 하나. 비록 여섯 놈뿐이지만 그들의 무공은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야. 그러니 최소 중간 간부쯤 될 거야. 알겠지?”
“하지만 왜 제게 공을 넘기시려는 겁니까? 사문수비금군도 인세를 노리고 있는데?”
“글쎄? 뒤를 봐주는 뒷배도 없이 내가 일을 벌이면 당장은 공 때문에 출세할 수 있겠지만 그 후에는….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빚이 많은 내가 위에 찔러줄 금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만히 두자니 계속 나를 노릴 것 같고…. 그러니 어쩌겠는가?”
견사찬은 그의 말이 일리 있다고 느꼈다. 백호수문대장 라혼 참장은 무(武)의 능력을 인정받아 비교적 청렴한 청류파(淸流派) 인사인 사문수비대장(四門守備隊將) 낭차랑(狼次郞)과 황진성부윤(黃辰城府尹) 사관산(獅官山)의 주청으로 백호수문대장이 된 자였다. 그리고 용궁(龍宮)에서 용황에게 신년하례(新年賀禮)를 위한 것 외에는 입조(立朝)조차 하지 않았다. 게다가 스스로 금군을 모집하느라 빚이 많은 그였기에 자신이 아는 바에 의하면, 그가 하는 이야기는대부분 사실이었다.
“어차피 조정의 일, 금위가 하면 어떻고 금군이 하면 또 어떠한가? 그리고 인세는 고수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니 정예라 하나 일반 병졸인 금군보다 고수를 많이 보유한 금위가 더 낫지 않겠나?”
“라 참장님의 조정에 대한 충심에 견모가 감읍합니다.”
“라 참장이 아니라 라혼 참장이네,”
“예?”
“나는 성이 없어. 그러니 라혼이란 내 이름이 성이자 곧 이름이야! 그리 알게.”
“알겠습니다, 라혼 참장님!”
라혼은 그렇게 인세에 대한 복수를 금위위에 넘기고 백호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멀지 않은 길을 걷는데도 여기저기에서 보내오는 따끔따끔한 시선에 강제로라도 마법 주문을 시전할까 고민했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감출 이유가 없지.”
백호문에 들러 특별한 사항이 없는지 확인하고 백호수문금군이 수비하는 세 개의 소문과 성벽을 순찰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친 라혼은 어제 화공에게 맡겼던 그림을 찾아왔다. 그곳에서도 라혼의 외모 때문에 작은 소란이 일었지만 라혼은 남의 일인 양 그대로 넘어갔다. 화공에게 그림을 찾은 라혼은 노을이 질 무렵에야 백호나한부로 돌아왔다.
“돌아오셨습니까? 상공!”
문을 열어주는 국진(菊珍)이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자 라혼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왠지 조심스러워진 여인천궁 여인들의 태도에 절로 고개를 내저었다.
“돌아오셨습니까, 상공?”
“주 낭자! 설화는 어찌하고 있소?”
“저어 그게….”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오?”
“본신으로 화하셔서….”
설화가 수인(獸人)이라는 것은 여인천궁의 여인들도 아는 일이었다. 십삼인가의 문파라 할 수 있는 여인천궁이 수인인 설화를 받아들인 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여인천궁에도 수인 제자가 있었다. 그리고 수인 후계자를 삼은 이유는 인세(人世)에서 여인천궁에 자신들에게 동참하자며 압력을 행사한 일이 주효했다. 인세는 수인 제자를 참살하고 자신들의 뜻에 동참할 것을 강요했다. 궁주인 상유란은 그것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수인인 설화를 후계자로 삼아 내부적으로 인세와 같이할 뜻이 없음을 천명했다. 거기에 설화 소궁주의 일공 백호나한의 존재가 크게 작용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라혼은 검선자 주묘연의 말에 오늘은 왠지 일진이 사납다고 생각하며 설화를 찾았다.
―캬오~!
라혼은 은백색과 검은 줄이 선명한 백호(白虎)로 화(化)한 설화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허허허, 이거야. 나는 하얀색과 인연이 많군. 시드그람에서는 하얀 늑대에게 자손을 보았는데, 이곳에서는 백호라~!”
라혼은 반인반수 형태에서 자꾸 구석으로 피하려 드는 커다랗게 변한 설화를 번쩍 안아들었다. 그리고 설화의 털을 쓸어내리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설화에겐 이 모습이 본모습이었다. 그래서 드라시안 하트가 몸을 재구성하니 호랑이 인간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설화는 이렇게 본신으로 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설화야! 이것은 네가 크느라고 그러는 것이다. 무서워 말고 마음을 가라앉히면 훌쩍 자라나 있을 거야. 그러니 무서워 말아.”
라혼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설화의 몸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귀와 꼬리만 남고 귀여운 설화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서방님! 설화는….”
라혼은 뭔가 말하려는 설화에게 긴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가만히 설화와 눈을 맞추고 부드럽게 웃었다.
“설화가 다 커서 이제 맞는 옷이 없겠는걸? 오늘은 쉬고 내일 옷을 새로 맞추자!”
“서방님!”
라혼은 귀가 쫑긋쫑긋 움직이고 꼬리를 살레살레 흔드는 설화가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역시 드라시안 하트의 영향으로 설화의 몸집은 훌쩍 커버렸다. 밋밋하던 가슴도 봉곳이 솟아오르고, 허리선도 가늘어졌다. 어찌 보면 나이를 서너 살 더 먹은 모습이었다.
“자아~ 옷 입고 밥 먹자!”
―꼬로록!
“…!”
“….”
밥 먹자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꼬로록! 소리를 낸 설화는 얼굴을 빨갛게 붉혔고, 라혼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설화를 놀렸다.
“하하하하하, 이거 잘못하면 설화가 서방님 잡아먹겠구나!”
“서방님!”
“호랑이 마누라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빨리 밥을 대령해야겠는걸.”
“….”
라혼은 울먹이려 하는 설화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부끄러워하지 마라! 여인천궁주도 네가 수인이란 것을 잘 안다. 그리고 매도 한 번에 맞는 것이 낫지.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네 부모의 이름을 알려주마!”
“….”
설화는 라혼이 계속되는 놀림에 울상이 되었다가 부모님 이야기를 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혼의 말을 기다렸다.
“너의 부친은 호사천(虎獅天), 모친은 강무혜(姜武惠)다.”
“호사천, 강무혜…?”
라혼은 조용히 부모의 이름을 되뇌는 설화를 보고 말을 이었다.
“너의 부친은 호제가(虎帝家)의 손이다. 그리고 모친은 후려(後慮) 강무세가의 여식이다.”
라혼은 자신이 겪은 바를 간단히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너희 부모가 어찌하여 연(緣)이 이어졌고, 어찌하여 서제가(鼠帝家)에서 네 어미를 쫓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일은 단순히 서제가에서 네 어미를 추적하다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고 원수가 서제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현 호제가(虎帝家)에서 네 아비인 호사천의 이름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네 모친도 너를 친가인 강무세가나 네 부친인 호사천에게 보내지 말라 하면서 내게 너를 맡겼다.”
라혼은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 멍하니 있는 설화를 침상에 뉘었다. 그리고 가만히 설화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네가 복수를 꿈꾼다면 내 막지 않으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네게 힘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제나 나는 네 곁에 있겠다.”
그러나 라혼은 설화가 지금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혼은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설화의 존재 자체가 커다란 폭발력을 가지고 있을지 몰랐다. 호제가의 일을 서제가가 나서서 처리했고, 사실상 후려를 지배하는 강무세가까지 얽혀 있었다. 게다가 호사천이라는 호가의 인물이 호제가의 가보(家譜)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말은 누군가 설화의 부친인 호사천을 의도적으로 지웠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면 설화의 원수는 호가의 당주라 할 수 있는 현 호제(虎帝)가 그 당사자일 수 있단 말이 된다. 또, 서제가가 일을 맡아 처리하였으니 서제가 또한 적이었다. 아니, 십이진가 전부가 적일 수도 있었다. 설화가 과연 호제니, 서제가니 하는 그런 일들을 얼마나 아는지 모른다. 라혼은 설화가 복수를 원한다면 그녀에게 힘을 줄 생각이다. 복수를 원하지 않아도 힘을 줄 생각이다. 그러나 복수를 도울 생각은 없다. 다만 그녀의 선택을 지켜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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