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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2. 청동기 시대
임광자 추천 0 조회 24 08.04.28 19: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 청동기 시대                                                                  (樵霞 李佶相)

 

역사시대의 길목인 청동기시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고고학상의 3시기법, 즉 석기, 청동기, 철기의 단계에 따라 그 2단계인 청동기 시대는 신석기에서부터 철기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입니다.

 

이 시기 역시 지역에 따라 현저한 시간적 편차가 너무 심해서 학자들간에 논란이 대단히 많습니다. 이것은 지역에 따라 청동기의 원료가 되는 구리와 주석의 생산여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청동기는 없다고 하더라도 문자와 도시가 생겨났고 농업 기술도 상당히 진보되어 생산력이 현저히 향상되어 거대한 정치세력이 큰 집단을 형성한 곳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청동기는 제작하고 사용하였지만 문화적으로는 훨씬 뒤진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명 발생의 필수요건, 즉 도시의 형성, 문자의 사용, 그리고 청동기의 제작 등식을 가지고 이른바 4대 고대 문명의 발상지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 에 맞추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나일강유역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황하유역의 중국과 인더스 강 유역의 인도(오늘날은 파키스탄이 옳은 해석임)에서는 B C 3000~1500년경에 이 세가지를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이들 지역을 고대 문명의 발상지라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문자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미 선사시대(문자에 의한 기록이전의 시대)가 아닌 역사시대(문자에 의한 기록을 남긴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선사와 역사, 그리고 문자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하겠습니다.

 

● 청동기란?

구리(90%정도)에 주석(10%정도)을 섞어서 합금한 금속으로 원래는 두 가지 금속 모두가 연한 것이나 합금을 하고 나면 굉장히 단단한 금속이 된다고 합니다.

 

또한 이 두 물질은 낮은 온도에서도 잘 녹기 때문에 제련이나 도구제작이 비교적 용이하고 겉을 잘 닦으면 광택이 뛰어나 햇빛에 비추면 번쩍거림이 금보다도 더 멀리까지 비추어 지기도 합니다.

 

철이 쉽게 부식되어 오늘날 그 형체의 구분이 어려운 반면 청동은 표면에 나타난 푸른 색의 녹이 생겨 산화를 방지함으로 섞지 않아서 오늘날까지도 형태를 보존하여 원형을 그대로 볼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리나 주석을 구하기가 어렵고(특히 주석은 산지가 한정되어 있다고 함) 주석의 함량여부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며, 귀한 금속이기 때문에 지배계층의 권위적인 장식에 사용되었을 뿐 대중화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회경제적인 기여가 약했다는 약점이 있습니다.그래서 청동기를 한단계 낮추어서 구리+다른 금속=청동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와 우리나라에 전파된 과정

청동에 대한 야금술은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떤 연유로 개발하게 되었는지 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나 시리아 지방에서 B C 31세기경에 시작되어 인근 지방으로 퍼졌는데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에 사용되었고, 중국에서도 B C 1500년경에 사용되어 많은 유물을 남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B C 10세기 경에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 전래는 고고학적인 발굴을 토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 요녕식청동검이라 해서 비파 혹은 장고처럼 생긴모양에 칼날(刃>과 칼끝이 무디고 예리하지 못해서 칼이라고는 하나 무기라고 는 볼 수 없습니다. 의식용이거나 제사장(무당)들이 주술적 행사 때 사용 한 기물이라고 보여집니다. 이 청동기는 만주의 요녕지방에서 출토된 이래 만주와 한반도 북부지방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청동을 도가니에 넣어 녹인 주물로 형태를 만들기 위한 거푸집(鎔范)과 세형동검(細型銅劍)이 우리나라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칼은 날과 끝이 날카롭게 되어 있어서 무기로서의 구실도 했다고 보여집니다.

 

세 번째 이야기: 여러 동물문양(Animal style)으로 된 대구(帶鉤: 양 끝을 잇기 위한 도구,오늘날 허리 띠의 바클 같은 것)가 출토되고 있습니다. 동물문양의  청동기는  B C 7세기~B C 3세기 동안 시베리아 지방에서 유목민족으로 활동했던 스키타이 족들이 서 아시아로부터 청동의 제조기 술을 배워서 매우 우수한 동물문양의 청동기를 제작하였으나 문자에 의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 들이 만든 청동기가 최근 고고학의 발달로 발굴되고 그 가치가 인정됨에 따라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이야기: 청동 검과 함께 청동 방울과 거울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 제작 기법이 위의 시기와 그의 일치한 세련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칼, 방울, 거울 이것은 농경에 사용된 도구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 귀한 청동의 용도는 무엇일까요? 오늘날 무당(무당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해석하면 안됩니다)들이 사용하는 기물과 비슷하거나 일치하지 않습니까? 주술적인 의식용에서 권위적인 위세를 나타내는 것으로 바뀌어 갔다고 보면 됩니다.

 

다섯 번째 이야기:  우리나라의 청동기 전래 과정은 시베리아에서 만주를 거쳐 들어왔고, 농기구를 비롯한 일반적인 실생활에는 이용되지 못했으며, 제사장이나 족장들의 의식용이거나 권위적인 상징 물로 사용되었다고 보여지며, 주석의 대용품으로 다른 금속(아연 등)을 구리에 합금 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중국의 청동기와는 그 계통을 달리 합니다. 그러나 청동기의 출현은 사회를 구조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이제 그 변화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사회적인 변화

지배계급의 등장

신석기 시대의 씨족공동체가 무너지고 청동기를 독점 소유한 소수집단이 다수를 지배하는 계급이 발생합니다.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지요. 이들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을 보다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스스로 조상을 높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따라서 조상의 각가지 신화적인 탄생 설화를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과 아무런 신체적인 특징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흔한 것이 자기들의 조상은 하늘에서 왔다는 것인데, 하늘의 자손이라면 하다 못해 머리에 뿔이라도 나던지, 아니면 다리가 하나거나 셋이라 던지, 눈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 던지 등등의 일반사람들과는 다른 조건을 갖추어야 하지만 그것이 될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겉 모습을 다르게 하는 방법과 제도였습니다. 자기들만이 특이한 모자를 만들어 쓴다 던지, 옷에 색다른 장식을 한다 던지 하면서 다른 사람이 그렇게 못하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 경제적인 변화

 지구과학에서 이야기하는 후빙기에 접어 들면서 점진적으로 기온이 따뜻해 지고, 빙산이 녹으면서 해수면이 높아져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황해바다가 생기고 일본과는 대한해협을 두고 갈라졌으며, 강수량이 많아지면서 여러 가지 식물이 풍요롭게 등장하고 식물이 많아지면서 이것을 먹이로 하는 동물의 세계에도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초식동물의 개체 수가 많아지면 이를 먹이로 하는 육식동물의 개체수도증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자연 현상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일 년 내내 식물이 성장할 수 있는 기온과 강수량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여름이 가면 다시 겨울이 오고 우기가 지나면 다시 건기가 시작합니다. 겨울은 추위 못지 않게 초식동물에게는 먹이를 걱정해야 하고 기온이 일 년 내내 높다는 열대지대에서도 건기가 닥치면 대지는 메마르고 식물은 생기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식물은 겨울이나 건기에 대비해서 씨앗을 만들어 이를 저장했다가 생육조건이 맞으면 싹을 틔워 종을 보존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잡식성인 인류는 이 식물의 씨앗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식물들의 씨앗, 곧 이것이 인류에게는 식량되었겠지요.

 

저장기술이 없었던 아득한 옛날에 식물의 씨앗을 거두어 두었다가 식량으로 사용한 인간의 지혜를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요? 이 씨앗에는 자신의 후손들이 태어나서 스스로를 지탱하기 까지 필요한 영양을 함께 보관하고 있었는데 인간은 이것을 도둑질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도 그렇게 염치없는 존재는 아니기에 종자라는 이름으로 일부를 보관했다가 생육조건이 맞을 때 땅에 뿌렸는데 이것을 농업이라고 합니다. 식물의 종을 보존해 주고 자신들의 먹이도 얻었으니 신이 식물에게 준 위대한 선물을 인간도 동참했다는 놀라운 사실, 농업의 등장은 식물과의 공생관계를 떠나서 인류 발전에 크다란 계기가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식량의 생산, 이것은 곧 적자생존의 자연적인 순환법칙에서 인간은 보다 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인구가 늘어나면 분업이 발생하게 되고, 사회가 분화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요. 농업은 메소포타미아에서 B C 7000년경에 처음 시작되어 다른 곳으로 전파되었다고 하니 신석기 시대에 해당합니다.

 

농업의 형태도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농업은 종자를 땅에 심는 파종, 이를 가꾸는 재배, 그리고 거두어 들이는 수확의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인간의 첫 관문은 파종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씨앗을 묻기 위해서는 땅을 파야 하는데 그 단단한 땅을 무엇으로 팔 것인가? 애써 땅에 곡식을 심었다 해도 한 자리에 많은 식물이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영양을 공급해야 되는데 무엇으로 해야 하는가?

 

 많은 양의 곡식을 자라게는 했어도 이것을 거두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또 곡식을 거두었지만 그대로 먹으면 소화가 되지 않고 배설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껍질을 벗겨야 되는데 어떻게 벗길지? 여기에 필요한 새로운 도구나 물질들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그것이 갖추어 졌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불청객으로 끊임없이 찾아드는 가뭄과 홍수를 비롯한 재해는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자연의 재앙에 대해서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고, 초자연적인 절대적인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자신을 맡기거나, 보다 강한 강자에게 의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방을 쌓아야 되고 물길을 열어야 하며 힘든 노동을 협동으로 풀어가기 위해서는 이를 지도 내지는 감독해야 될 조직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신의 힘을 빌리는 신관(?)이나, 감독자 내지는 지도자에게 생산량의 일부를 할애하는 행위 즉 공납이 시작됩니다.

 

생산기술이 한편에서 보면 인류에게 풍요를 주기도 했지만 소수를 제외한 다수에게는 공납을 비롯한 많은 멍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시기에 농업이 더욱 발달하여 일부 지방에서는 벼농사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농업에 관해서는 다음에 한 장을 만들어 이야기하겠습니다.

 

● 청동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들

청동기와 간석기-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유럽을 비롯해서 중국 등 세계 각처에서 발굴되고 있는데 모양과 용도가 각양 각색입니다. 중국에서는 동물을 형상화한 매우 우수한 청동기를 제작하였으나 인도에서는 재료의 한계 때문인지 엄격한 의미의 청동기는 없고 동기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시기적으로 이 보다 뒤진 우리나라에서는 도구의 발전단계에서 청동기란 일부 지배층의 소유물에 불과할 뿐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습니다. 청동기로서는 청동거울(거친무늬거울과 잔무늬거울 등), 청동검(비파형 세형 등), 청동방울, 마구, 대구 등이 있고,농업에 필요한 도구로는 곡식의 이삭을 자르는 반달모양의 돌칼(半月形石刀)를 비롯해서 돌가래, 자루달린돌도끼(有溝石斧), 돌보습, 맷돌 등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무덤-고대 이집트에서는 이 시기에 거대한 피라미드가 세워졌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신전이라고 여겨지는 거대한 지구라트가 만들어 지기도 했습니다.

 

중국에서도 은허 유적의 왕 묘라고 추정되는 곳에서 많은 껴묻거리(部葬品)와 함께 수 백 명을 순장한 인골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인돌(支石墓)과 돌널무덤(石槨墳)등이 있는데 고인돌이 대표적입니다. 이것은 돌로 다리를 만들고 그 밑에 시체나 껴묻거리를 묻은 후 위에 넓은 판으로 된 돌을 얹어서 덮었는데 바치고 있는 다리가 긴 것을 북방식(혹은 탁상식:탁자모양), 짧은 것을 남방식(혹은 기반식:바둑판모양)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무덤의 형태는 중국의 산뚱반도와 요서, 요동지방을 비롯한 만주,그리고 우리나라 전역을 비롯해서 필리핀까지 이어지고 있어서 민족의 생성과 이동경로는 찾는 연구과제가 되기도 합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 거대한 무덤을 만들어 준다는 것, 보통 사람이 죽었을 때도 그렇게 해 주겠습니까? 이것은 이 시기에 이미 거대한 정치세력이 존재했음을 의미합니다.

 

고인돌의 덮개 돌만 하여도 큰 것은 무게가 10톤이 넘습니다. 그렇게 큰 판석을 어디에서 어떻게 구하였으며, 어떻게 운반하여 덮게 되었는지? 다음 기회에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집터-신석기인들이 강 기슭이나 해안에서 거주했던 것과는 달리 점차 높은 구릉지에서 취락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모양이 둥글거나 사각형인 움집도 깊이가 얕아져서 거의 지상과 가깝게 기둥을 세웠습니다. 물론 이것은 일반이 거주하는 곳이고 신전이나 왕궁의 모습은 다릅니다.

 

토기-형태나 명칭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에 등장한 무늬없는토기(無紋土器)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하겠습니다. 빗살무늬토기에 비해서 재료, 형태, 색깔, 용도 등이 다르기 때문에 이 토기를 만들어 사용한 일련의 집단이 그 전에 있었던 빗살무늬토기인들과 구분하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외부에서 전이된 것이 아니고 어떤 집단이 이동해 오면서 가지고 와서 정착했다는 이야기죠. 그렇다면 우리들의 조상은 누구라고 해야 될까요? 빗살무늬토기인들? 아니면 무늬없는토기인들?  아직은 누구도 정확하게 대답할 수 가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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