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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정말 전쟁은 귀환했는가?
⚫ 과거 식민지 전쟁도 천연자원을 장악하고, 원주민을 악랄하게 착취하는 행위를 버젓이
‘문명 전파의 임무’로 둔갑하지 않았던가.
⚫ 전쟁의 3요소, “전쟁이란 무력을 사용하는, 공적이고, 정당한 분쟁”
⚫ 가장 고전적인 전쟁관, “전쟁 : 정의를 통해 종결할 수 없고, 힘이나 무기를 사용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주권을 지난 국가 혹은 군주 사이의 다툼이나 분쟁.”
⚫ 전쟁은 히로시마에서 죽었다.
⚫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휩쓴 저항운동과 민족해방전쟁
⚫ 50년 전쟁이라고 불리는 냉전
⚫ 대개 이념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났다. 이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소련 진영이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훨씬 유리한 이점을 제공했다. 소련 진영은 자연스럽게
‘반제국주의’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다.
⚫ 기존의 전쟁은 평화 지대와 구분된 곳에 분쟁 지대가 형성되었다. 불가역적 타격을 가할
목적으로 제한된 시공간 안에서 일시적으로 모든 폭력을 집중해 최종 승자와 패자를
갈랐다. 반면 테러는 달랐다. 테러는 행위 그 자체가 승리를 의미했다.
⚫ ‘다른 수단을 통한 정치의 지속’이라는 기존의 전쟁 개념을 대체할, 구조적으로 가장
적절한 개념은 (냉전 시대의) 억제가 아니라, 바로 ‘개입’이다. 철저히 군사적으로 볼 때
개입(아프카니스탄, 이라크에 대한 개입)은 성공적이었다. 개입=invention.
⚫ ‘혼돈 유발 전쟁“은 수많은 생존이 복잡하게 뒤얽힌, 지속적인 붕괴의 시공간을 창조한다.
시민사회에 대항해 권력을 구축하기 바쁜 궁지에 몰린 소수 지배계급의 생존, 매일 같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민중의 생존,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
속에서 가장 강렬한 생의 정점을 찾으려는 광신도들의 ’초월적 삶‘까지 수많은 생존이
뒤얽힌 시공간을 말이다.
2장. 영웅정신과 야만성.
⚫ 역설, 양면성, 모순. 이처럼 전쟁은 도덕성을 고취하는 동시에 도덕성이 무너지는
순간, 윤리성을 발현하는 순간이자 동시에 윤리성이 붕괴되는 순간이다.
⚫ 전쟁에서의 죽음은 규범화된 교환, 심지어 ’의례화된‘교환이라고 부를 수 았는..
전쟁의 두 주체는 특수한 교전규칙에 따라 정해진 공간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서로 충돌한다... 그런 만큼, 무고한 시민이나 무장하지 않은 군인을 겨냥한
모든 종류의 ’살상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이자, 심지어 ’전쟁 범죄‘로까지
간주되는 것이다.
⚫ 기사들의 대결을 다룬... 순수한 힘의 충돌에 대한 묘사... 모든 일은 언제나 밝은
대낮에 주인공들이 선택한 사방이 탁 트인 공터에서 공명정대하게 이뤄진다....
결투 중에는 모두가 상대를 존중한다. 중요한 것은 상대를 궤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이기는 것, 적을 절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적을 능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경멸하는 마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의 가치가 곧 나의 가치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 전투는 무시무시한 에너지, 끓어오르는 열정, 활력, 그리고 진정한 마음을 전제한다.
⚫ 하지만 바로 그러한 점에서 전쟁은, 항상 비난에 시달리듯, 혼돈스러운 폭주의 위험을
내포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힘의 소용돌이에 스스로 빨려 들어갈 위험이 존재한다.
살상을 향한 광기는 언제든 솟아오를 수 있다.
⚫ 어쩌면 그의 유일한 승리로 간주될 수도 있는 ’아름다운 죽음‘의 모습이 근사한
조각상으로 빚어지기를 열망하며 폭주의 위험을 억제했다.
⚫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말하는 용기란 열의보다는 잘 버티는 능력을 의미한다.
혈기나 광란이 아닌, 끈기와 인내심을 뜻한다.
⚫ 팔랑크스 전법이 완벽한 연대 의식을 구현하고, 각자가 타인의 용기에 의지한다.
그 전법에서 배우는 윤리사상은 바로 꿋꿋이 버티기.
⚫ 꿋꿋이 버티기는 사실상 군인이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
⚫ 성 토마스는 저항을 의미하는 수스티네레와 공격을 의미하는 아그레데레를 서로
대비시키며, 상대를 공격할 때는 영혼이 오로지 육체의 광란에 이끌리지만
’꿋꿋이 버티기‘위해서는 정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수스티네레가 지닌
도덕적 우월성은 매우 중요한 정신적 능력을 키워준다. 그것이 바로 자기통제력이다.
⚫ 전쟁은 인간에 내재한 저주받은 측면(살기 넘치는 야수성, 극악부도한 잔혹성)과 더불어,
신성한 측면(희생과 헌신)을 동시에 드러낸다.
⚫ 페르시아인은 분명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돈을 받고 싸우는 데 불과했던 반면,
그리스인은 자유와 역사와 가족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결국 투지가 다른 모든 것을
이겨낸 것이다.
⚫ 보브나르그의 ’성찰과 잠언‘에서 ”전쟁은 선동하는 것이 악<종종 전쟁은 전쟁터에서
직접 싸울 일이 없는 지도자들의 파렴치한 정치적 속셈 때문에 일어난다.>이라면,
전쟁에서 싸우는 것은 덕’
⚫ 전쟁터에서 정신적 가치(용기, 헌신, 희생)를 발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양측 모두 똑같이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 한다는
동등한 죽음의 교환이 전제되어야 한다. 또한 전투의 규칙을 철저히 준수해야 하고,
사기나 기만은 배제해야 하며, 무고한 민간인은 전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3장. 정의로운 전쟁이란 무엇인가?.
⚫ 전쟁이, 특히 전쟁에 임하는 군인의 정신적 자질이 ‘도덕적’일 수는 있어도, 전쟁이
‘정의롭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을까? 항상 전쟁을 선포하고, 결정하고, 기대는 방법도
그 자체로 불법이 아니던가? 덕망 있는 기자나 정의로운 칼럼니스트는 틈만 나면 이렇게
분개한다. “어떤 형태의 폭력도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모든 폭력은 반드시 단죄해야
마땅하다.” 특히 이런 주장은 과격 시위가 벌어질 때마다 우리 사회에 단골손님처럼
등장한다.
⚫ (폭력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과 강요 속에서) 폭력 행위의 ‘근원을 규명’하거나, ‘이유를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다. 혹여 그랬다가는 순식간에 폭력 행위를 변호한다거나
정당화한다는 의심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정의로운’ 전쟁은 개념 자체부터 매우 부적합하고, 거슬리고, 끔찍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 (인류의 깊은 성찰 가운데) 정의로운 전쟁은 최소 두 가지 사상적 토대를 잉태하게 된다.
첫째, 동기가 정의롭다면 전쟁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간주되는 ‘정의로운 명분’을 강조한
개념이다.
둘째, 교전국이 교전수칙만 잘 지키면 전쟁의 정당성이 성립될 수 있다고 보는 체계적이고
관례화된 전쟁의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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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됵교 교회의 정의로운 전쟁 관점)
⚫ 기독교 교회는 일찌감치 전쟁을 허용했다. 단 몇 가지 엄격한 조건을 내걸었다.
먼저 기독교도는 전쟁을 벌일 수 있지만, 전쟁을 찬양하거나 시를 써서 예찬할 수는
없었다. 전쟁에 관한 세속적인 영광, 전쟁 영웅에 대한 숭배는 철저히 비판받았다.
여기서 우리는 전쟁을 벌일 수 잇는 극히 제한된 조건 중 첫 번째 조건을 확인할 수 있다.
전쟁은 오로지 강제적인 이유에 의해서만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전쟁을 벌어야지, 결코 기꺼운 마음으로 전쟁을 벌이거나
사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두 번째 조건은 사적인 복수와 공적인 전쟁을 서로 구분하기 위해서 나온 조건으로,
전쟁은 오로지 주권을 지닌 권력주체의 결정에 의해서만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형식적이기는 해도 분명 필수적인 조건이다. 국가나 공적 권위기구 혹은 군주가
결정하고 수행할 때에만 전쟁이 정당화된다.
세 번째는 오로지 불의를 당한 경우에만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조건이다.
⚫ 자위적인 전쟁은 언제나 본질적으로 정당하다. 무력은 무력으로만 물리칠 수 있다.
⚫ 인류의 전쟁사에서 ‘불의’가 전쟁을 개시하는 계기나 원동력, 심지어 핑겟거리가 된 사례를
수도 없이 확인할 수 있다.
⚫ 정의로운 전쟁을 연구한 이론가들은 여기에 미묘하지만 핵심적인 조건을 한 가지
덧붙였다. 그것이 바로 ‘올바른 의도’였다. 구체적으로 말해, 전쟁의 합당한 ‘명분’과
단순한 핑계를 구분하자는 것이었다. 만일 군주가 상대의 잘못을 애써 유도할 필요도
없이 순전히 자신이 입은 손해를 핑계로 전쟁을 게시해 실제 입은 손해와 무관하게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려 한다면, 그것은 결코 정의로운 전쟁이라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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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를 위한 안전을 추구하려 할 때.... 실제 입은 손해에 상응하는 대응이어야 한다는
관념을 소홀히 대할 수 있다. 심지어 이런 논리를 따르는 경우, 사전에 미래에 피해를
마음대로 예견하려 들 우려도 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선제’공격(2003년 미군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 개념이다. 흔히 선제공격은 분명하게 확인된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아무리 확실시되는 위협도 실제로는 과정되거나
혹은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가령 이라크 침공의 명분을 제공했던 대량살상무기의
존재가 대표적이다. 당시 전쟁은 절대적으로 눈앞에 임박했다고 확실시되던 공격에
미리 대응하기 위해 수행됐다. 하지만 ‘임박성’에 대한 판단은 언제나 철저히 주관적일
뿐이다.
⚫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오히려 양 국가가 규범만 잘 지키면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관념을 강화시킨 측면이 있음. 이전에는 무질서해도 도덕적인 면에서의 정당성을 많이
고민했지만 이후에는 전쟁 개시에 대한 사전 공포, 외교적 절차 등만 준수하면 되는.
⚫ 그런데 규정을 잘 지키기만 한다면(교전규칙 등), ‘격식을 갖춘 전쟁’이라는 용어로
불리기도 함. 오히려 도덕적 구분으로 전쟁을 하던 시절보다 잔인하지 않은 전쟁을
할 수도 있다. 도덕적인 구분(선한 자, 악한 자 등)을 하는 순간, 항복이면 끝나는 전쟁이
아니라 총력적, 멸절의 개념이 개입된다.
⚫ 칸트가 지적한 징벌적 전쟁의 폐해처럼, 정당한 명분의 전쟁으로 전투 중에 적을
악마시하는 행위는 결국 교전법을 약화시킨다. 악과의 타협은 없지 않은가?
⚫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국제전시법이 추구하는 방향처럼 두 가지 모델(‘정당한 명분’과
정당한 수단‘)을 서로 결합하는 것이리라. ’정당한 명분‘에 의거해 전쟁을 개시하고,
전투 중에 지켜야 할 제약조건도 함께 강제하는 것이다.
(정당한 명분에 의한 전쟁은 전쟁의 동기면에서 정당성이 있을 수 있지만 전쟁
수행 측면에서는 잔혹하고, 규범만을 강조하는 정당한 수단에 의한 전쟁은
전쟁 동기는 약하지만 전투 수행 면에서의 제약이 가능한 장점이 있음.)
⚫ 1. 정당한 명분 전쟁, 2. 규범 준수하는 정당한 수단 중심의 전쟁.... 여기에 한 가지 더
3. 전쟁이 곧 사법 심판같은 기능이 있다는 인식의 전쟁...과 관련하여. 전쟁은 일종의
법정과 비슷하다. 재판이 전쟁의 소관에 속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쟁이 재판을 닮은
것일까? 집중, 판결, 이분법적 구분, 불가역성, 이처럼 전쟁의 각 단계는 재판의 이미지에
의해 완성되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낡고 끔찍한 관점에 의거해, 전쟁은 정의로운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단지 승리하기 때문에 승리가 정의로울 수 있다는
끔찍한 동어반복도 가능해진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와 같구먼.)
전쟁이 최고의 심판자 같은, 불행은 패자에게 오롯이.
⚫ 따라서 정의는 도덕적, 형식적, 종말론적 성격의 세 요소로 규정된다.
4장. 국가는 전쟁을 만들고 전쟁은 국가를 만든다.
⚫ 사실상 국가가 일정한 일관성을 유지하며 존속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구적인
’전쟁상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라는 루소의 통찰(전쟁의 가능성 때문에 국가가
필요하다는 의미)
⚫ 국가의 개념. 첫째, 흔히 살아 있는 유기체로 표현되듯 국가는 공동체라는 사실.
둘째, ’사회계약‘으로 맺어진 개인들 간의 취약한 결속으로 표현되듯 국가는 인위적인
사회적 결속에 해당. 셋째, 각색된 서사나 전설 등을 통해 확인되듯 국가는 권력이
투사된 ’이미지‘를 갖게 된다.
⚫ 전쟁, 적이라는 것이 내가 진짜 누군인지를 보여주고, 나를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카를 슈미치는 ’적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상징하는 얼굴이다.‘라는 독일
시인의 글을 이용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 피력. “적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제거해야
할 대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말살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적은 나와 동등한 수준에
있는 자다. 그런 의미에서, 나 자신의 크기, 나 자신의 한계, 나 자신의 얼굴을 얻기 위해
적과 싸워야 한다.”
⚫ 홉스, 국가는 인간이 스스로 자연적 권리를 포기하기로 만장일치로 합의함으로써 인간의
의지에 의해 출현한 인위적인 유기체이자,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일정하게
공인된 특수한 권력 주체에 다 같이 복종을 약속한 협정의 결과였다.
⚫ 사실상 외부의 전쟁은 내부의 복종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다. 전쟁은 국가 간에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사람들의 눈앞에 똑똑히 보여줌으로써, 개인들 간의
원시적 내전이라는 환상에 타당성을 부여하고,<국가 권력이 사라지면 개인들끼리도 서로
죽이고 약탈하는 혼란 상태가 된다라는 의미> 더욱 극대화한다. “그대들이 만일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대들 사이에도 똑같이 참혹한 일이 벌어지리라.”
⚫ 타자와의 전쟁이 결속을 강화. 적의 존재가 국민을 단합. 다른 공동의 혐오 대상을
지목함으로써 기존의 갈등을 잊게 한다. 마키아벨리도 내부의 평화는 외부와의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다며, 전쟁이 정치 공동체를 단단히 결속한다고 주장.
⚫ 에라스무스 지지가 약해진 국가리더의 전쟁 공모, 오랜 평화로 백성 단합이 약화되었을
때 군주간 전쟁 사주 사례.
⚫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인해, 전쟁은 초월적 소명(복잡한 왕권체계 속에서 유럽의
여러 나라가 제국의 꿈을 꾸어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보다는 눈앞의 국익을 우선시하는
세속적 성격이 강화됐다.
⚫ 국가는 무형적인 권력 이미지, 일종의 명성으로 볼 수 있다. 아테네와 멜로스(중립 국가를
지향했던)와의 대화는 그것을 반영. 어떤 나라가 어느 정도의 권력 행사는 해야한다는
관념들. 그러므로 국가는 공상의 존재,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꾸며낸 우화, 오로지 전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존재일 수도 있다.
⚫ 국가는 전쟁을 하고, 개전선언을 하고, 평화조약을 맺고, 휴전협정을 체결한다. 그런
식으로 전쟁은 국가의 존재감을 확인해준다. 사실상 국가는 느긋하고 단조로운 일상적인
행정업무 속에서는, 모호한 법률 속에서는 절대 온전한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다
⚫ 하지만 정당한 명분의 전쟁론 이면에 감춰진 가장 은밀하고도 가장 결정적인 전쟁의
이유는 바로 권력의 우발성이리라.(이것으로 맺음말을 했음에 주의)
5장. 총력전의 개념.
⚫ 총력전 개념의 태동에 대해서 연구. 일단 세계 1차대전으로 봄. 전쟁 목적이 단순히
상대에 대한 우위를 확인하는 수준이 아니라 적을 철저히 궤멸시키는 것으로 바뀜.
1차 세계 대전 이전에도, 1792년 이후 새로운 정치적 이상의 실현을 목표로
유럽을 휩쓴 각종 혁명전쟁, 제국의 재전을 목표로 신속성과 잔혹성을 보인 나폴레옹
원정, 더욱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로마의 카르타고 섬멸, 칭기즈칸의 몽골제국.
⚫ 가령 성전이라는 총력전의 경우, 성전은 신의 이름을 내걸어, 때로는 사안의 경중에
따라 극단적인 방법마저 불사하며, 무신론자나 완고한 불신자들과 맞서 싸운다.
광신도들의 눈에 이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참된 종교에 대한 모욕이다. 실제로는
’외부의‘ 적을 철저히 파괴하는 것에 불과한 행위가 신의 영광을 드높이는 행위로
추앙받는다. 그런가 하면 식민지 전쟁이라는 총력전은, 식민지 전쟁은 짐승 취급을
받는 열등한 인류를 상대로 싸우는 전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성전이든 식민지
해방전쟁이든, 어쨌거나 무자비한 학살이 벌어진다는 점에서는 두 가지 모두
동일하다. (상대방을 어떤 존재인가로 규정함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지는 전쟁 양상)
⚫ 적의 성격(불신자, 야만인, 범죄자)은 그 자체로 전쟁의 목적을 바꿔놓는다. 전쟁의
목적은 더 이상 한정적이지 않고, 좁은 의미(영토 확장, 상징적인 점령 행위, 왕조의
설욕 등)에서의 ’정치적‘인 성격을 띠지도 않는다. (정치적 목적보다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더욱 극악무도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무시무시한 것이구나.)
⚫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가장 참혹한 전쟁은 단연 이념전쟁이다. 두 개의 상반된 세계관이
대립하는 경우 그 어떤 협상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역설적이게도, 전쟁의 목적이 도덕적일수록 도덕적이지 않은 전쟁이 정당화된다.
조금 더 깊이 살펴보면, 가장 규범과는 거리가 먼, 가장 참혹한 전쟁은 최종적이면서도
영구적인 평화를 목표로 하는 전쟁이다. 평화가 두 무력분쟁 중간에 존재하는
휴지기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일종의 사법적 상태에 해당한다면, 전쟁은 ’합리적인‘
중간상태를 형성하며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이미 평화를 준비하는 과정을
동반할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도덕적인 절대성을 지닌다면, 지복천년의 미래를
약속한다면, 결국 전쟁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내부의 한계의 원칙을
무너뜨리려 할 것이다. (☆)
⚫ 정의로운(도덕적이거나 규범을 준수한) 전쟁의 두 가지 의미를 살펴보면서
이미 비슷한 종류의 논리적 난점을 마주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평화를
절대시하면, 전쟁의 규제는 약화될 위험이 있다.(모든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극단적 수단이 허용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전쟁을 일상화한다면, 평화의 가치는
훼손될 우려가 있다.(국익을 위해 행사된 폭력으로 인해 희생자가 발생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은 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 하이데거는 ’닦달(gestell)’이라는 개념을 거론해, 비슷한 용어로 기술의 본질을
폭로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자연을 상대로 벌이느 총력전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자연을 동원한다. 전체주의 정권이든, 자본주의 산업이든,
모두가 역점을 두는 것은 생산의 극대화 그리고 정신과 사물의 적극적인 투입니다.
⚫ 가증스럽게 전쟁이 표방하는 목적(상대 전선을 단 몇 킬로미터라도 물러나게 만드는 것)은
사실상 죽음의 기계를 돌리기 위한 한낱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은 더 이상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표현한 ‘다른 수단을 통한 정치의 지속’이 아니다. 오로지
전쟁을 확산하고 증대하기 위한, 전쟁에 의한 정치의 이용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은
오로지 살상이라는 목적이 다른 모든 것을 빨아드리는 기계로 전락했다.
6장. 왜 전쟁을 벌이는가? (전문 수록)
인간은 왜 서로 전쟁을 벌이는가? 그토록 오랜 옛날부터 서로 죽자고 싸워온 이유가 무엇일까? 이 아찔한 난제에 대해 역사적으로 수많은 학문이 나름의 해답을 제시해 왔다. 저마다 격식을 갖추어 나름의 서사와 궁극의 이유를 내놓았다. 인류학, 경제학, 심리학, 역사학, 정신분석학, 정치학, 철학 등 각각의 이론은 바로 ‘그’ 근본적인 원인을 해명했다며 자찬했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하고 심오한 해답도 결코 완벽하게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마치 무엇인가가 끝까지 항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상 전쟁론에서 폭력에 관한 부분은 아무리 부딪혀도 깨어지지 않는 견고한 바윗덩어리에 해당한다.
앞으로 이 책에서 전쟁의 3대 원인을 개괄해 보려 한다. 사실 전쟁의 3대 원인은 수 세기에 걸쳐 전쟁에 대해 사유한 수많은 위대한 사상가들의 연구 속에서도 놀랄 정도로 꾸준히 발견된다. 가령 투키디데스, 토마스 홉스, 레이몽 아롱 등의 저술에서도 똑같은 전쟁의 3대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각각의 저술에서 사용된 구체적인 용어는 각기 다르지만, 중심 의미는 언제나 동일하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전쟁의 원인은 모두 세 가지, 바로 탐욕, 공포, 명예욕이다. 요컨대, 홉스가 ‘자연적’이라고 간주한 이 세 가지 기본적인 정념,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가장 기초적인 이 세 가지 영혼의 운동이 전쟁의 뿌리를 형성하는 셈이다.
본격적으로 전쟁의 3대 원인을 개괄하기에 앞서, 세 가지 기본적인 정념에 입각한 우리의 설명보다 훨씬 더 타당하다고 간주되는, 그동안 수없이 되풀이 되어 온 기존의 설명 방식을 잠시 짚고 넘어가야겠다. 우리는 앞서 인간이 상대를 물어뜯으려는 깊은 야수성, 즉 짐승의 본능을 내재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호전적인 경향을 띤다는 주장을 살펴봤다. 그런 의미에서 ‘왜 전쟁을 벌이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다수는 다음과 같이 세련되게 답변하곤 한다.
인간을 문명화하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내면에는 여전히 짐승 같은 공격성이 너무 많이 남아 있고, 반면 야생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막아줄 문명의 장벽은 너무 부실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야수성’을 전쟁의 원인으로 설명하는 방식은 전쟁의 원인을 철저히 해명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비록 러우 전쟁의 경우, 흔히 잔인한 용병, 야만인, 피에 굶주린 야생의 늑대 등에 비견되는 러시아군의 만행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그것이 충분히 타당한 해석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첫째, 야수성에 대한 설명은 진부한 동어반복에 해당한다. 가령 인간이 호전적인 이유는 공격적인 본능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모두 엇비슷한 얘기처럼 들린다.
둘째, 이런 종류의 설명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인간이 드러내는 살인적 광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설명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정작 전쟁이나 전투를 개시하기로 한 결정이 파렴치하지만 전문적인 계산에 의해, 철저히 문명화된 정치인이나 군 수뇌부의 회의를 통해 내려진 결과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명도 해주지 못한다. 더욱이 야수성에 근거한 해석은 아무도 미처 묻지 못한 문제점을 제기한다. 동물 세계는 진정으로 인간의 전쟁만큼이나 폭력적일까?
물론 동물 세계에도 종간 폭력이란 것이 존재한다. 또한 사나운 고양이나 동물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사냥 행태는 공격적인 본능에 의거한다. 그럼에도 양을 상대하는 늑대나 영양을 상대하는 암사자에 대해 우리는 과연 ‘전쟁’이란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 치면, 최상위 육식동물인 인간은 다른 동물들을 자신의 위장의 법칙에 순응하도록 만들기 위해 동물 세계 전체와 선전 포고라도 내렸단 말인가!
동물 사이의 폭력에 비추어 인간이 서로 벌이는 전쟁을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종간 폭력에 관심을 갖고, 가령 사자나 늑대가 벌이는 맹렬한 전투를 탐구해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동물행동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물론 동물행동학자들은 동물에 내재한 공격성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두 가지 사실을 잊지 않고 지적한다.
먼저, 동물은 오로지 목적 수행을 위해서만 공격성을 드러내며, 목적에 따라 공격성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가령 동물은 자기 영역을 표시하거나 수호하려 할 때, 무리의 우두머리를 결정해야 할 때, 암컷을 차지해야 할 때 제한적으로 공격성을 발휘한다. 동물이 폭력을 행사하는 목표는 ‘보호’에 있다. 가령 집단의 결속이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반면 동물은 결코 아무런 이유 없이 공격하는 일이 없다. 게다가 무조건 상대를 죽이지도 않는다.
고양이과 맹수는 무리의 서열을 정하기 위해 서로 으르렁대다가도, 그중 한 마리가 싸움을 멈추고 싶다는 의미로 자신의 가장 취약한 부위인 목을 상대에게 내밀면 싸움이 종료된다. 목은 단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급소에 해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목을 내미는 자세만으로도 상대는 공격성을 누그러뜨리는 것이다.
이처럼 동물들의 싸움에서는, 결코 사생결단식의 잔혹성이나 아무런 이유 없는 공격을 찾아볼 수 없다. 사실상 진실로 짐승 같은 것은 오로지 인간뿐, 동물은 결코 그렇지 않다. 단, 인간이 키우는 반려동물만은 예외다. 사실상 가학적인 잔혹성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특성에 해당한다.
공격성을 타고난 본성으로 간주하는 개념은 집단 폭력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에 비하면 오히려 ‘죽음의 충동’ 개념이 더 나은 설명을 제시할 수도 있다. 가령 세계대전을 겪은 프로이트는 가늠할 수 없는 것을 가늠하고, 폭력의 깊은 신비 속을 탐험하기 위해 ‘죽음의 충동’이란 개념을 창안해 냈다.
사실상 폭력이 지닌 도구적 성격을 언급하는 경우, 우리는 폭력을 설명하기가 훨씬 더 수월해진다. 인간은 종종 지배·충격·포획의 효과를 노리고 과도한 무력을 사용한다. 하지만 어떤 합리적인 목적, 어떤 데카르트적 목표도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서 살펴볼 수 있었던 광적이고 비이성적인 폭력의 존재는 설명해 주지 못했다. 우리는 유럽 사회를 뒤흔든 대재앙에 큰 충격을 받은 프로이트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그는 오로지 자아의 소멸을 초래하는 비합리적인 충동을 언급하는 방법 말고는, 도저히 부분적으로나마 전쟁의 광기, 상호 살육의 광풍을 설명할 길을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럼 각설하고 본격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이제부터는 전쟁론의 교본으로 통하는 홉스의 《리바이어던》 13장을 길잡이 삼아, ‘전쟁의 전통적인 주요 원인’ 세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인간이 전쟁을 벌이는 첫 번째 이유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지만, 바로 물질적 이득을 얻기 위해서다. 가령 인간은 타인의 재산을 빼앗거나, 영토를 정복하거나, 귀중한 광맥을 손에 넣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 이윤 추구, 다시 말해 탐욕은 전쟁의 가장 궁극적 이유에 해당한다. 가령 걸프전이나 그 이후 이라크에서도, 비록 모든 언론은 주권을 유린당하고 억압받는 민족을 해방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는 고귀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공론장에서는 여기저기 의심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사실 진짜 목적은 석유가 아니었을까?
이런 사실을 단순하게 확인(다소 냉소적이지만 대개 통찰력을 겸비한 판단)하는 수준을 넘어, 우리는 전쟁의 ‘경제적 이유’를 조금 더 심층적으로 파헤쳐 볼 필요가 있다. 대개 약탈의 필요성은 희소성에서 비롯된다. 광물자원이 부족한 나라는 인접국의 자원을 빼앗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사르트르도 《변증법적 이성 비판》에서 인간들 사이의 폭력의 가장 큰 책임은 희소성에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동일한 대상을 향유할 수 없기 때문에 싸움을 통해 대상의 소유자를 결정하는 것이다.
물론 희소성도 타당한 설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는 반면,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는 그 차이, 바로 그 격차가 더욱 더 인간을 전쟁으로 몰아넣는 것은 아닐까. 한편 ‘편의의 경제’에 대한 논의도 빼놓을 수 없다. 폭력을 이용하면, 다른 사람이 장시간 노동으로 얻은 재산을 빠르게 소유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절도는 언제나 게으른 자들이 쉽게 빠지는 유혹으로 간주되어 왔다. 폭력을 통하면 순식간에 소유자가 될 수 있다. 비록 위험 부담과 시간 절약의 정도를 서로 저울질해야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겠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약탈 전쟁은 질투심과 시기심을 자양분으로 삼는다. 여기서 잠시 르네 지라르의 유명한 모방적 욕망에 대한 이론을 떠올려 보자. 이 이론에 따르면, 전쟁은 인간의 욕망 때문에 숙명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사실상 대상에 대한 욕망은 자연적으로 순수하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객관적인 특성이 욕망을 자극한다고 피상적으로 생각한다. 가령 대상과의 대면, 즉 나와 사랑받는 대상 사이의 관계에서 욕망이 생겨난다고 말이다. 하지만 르네 지라르는 욕망이란 ‘삼각관계’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며 기존의 환상에 반기를 들었다. 그에 따르면, 타자의 욕망이 바로 사랑받는 존재에게 돌연 눈부신 광채를 부여하며, 미친 듯이 매혹적이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보이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세상에 질투심이 자극제로 작용하지 않은, 위대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질투심은 경쟁의식을 자극하고, 끝내 분쟁을 부채질한다. 욕망이란 결코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스러운 대상 사이의 단순한 관계가 아니다. 흡사 자연이 여러 존재 간에 은밀한 조화를 미리 점지해 놓아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 부합하는 짝, 장소, 관심사를 찾기 위해 인생의 모험을 거치게 마련이라는 주장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타인이 일정 대상을 향유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 비로소 그 대상을 향한 욕망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순식간에 전쟁이 벌어지기까지 한다. 이런 모든 양상에서 소위 ‘경제적인’ 이유도 꼭 살펴봐야 할 요소에 해당한다. 심지어 전쟁의 경제적 원인을 설명해 주는 역사적 증거도 여기저기 수두룩하다. 가령 인류 역사 속에 전쟁이 처음 등장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였다는 고생물학자들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사실상 약탈·강탈·점령 등 공격적 활동의 형태를 띤 전쟁이 처음 시작된 것은, 오랜 수렵·채집의 시대가 끝나고, 최초로 (산업·목축업 등의 발과 함께, 체계적인 국가의 등장으로) 정착사회가 출현함과 동시에 식품 저장고와 연장 및 가축 창고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사실 신석기시대는 전통적으로 외부와 내부의 일을 구분하고, 남녀 간 역할 분담과 사회적 위계질서를 제도적으로 확립한 시기이기도 했다. 전쟁은 남녀 간 역할 분담이 매우 긴급하고 불가피한 사안이라는 인식과 함께 역할 분담의 필요성을 더욱 공고히 했다. 말하자면 남녀 간 차이는 폭력적인 방식에 의해 강제된 것이 아니었다. 전쟁이 남녀 차이의 필요성과 긴급성을 강화하는 데 일조한 것이다. 말하자면 전쟁의 ‘남성적 일상성normalité*’이라고 해야 할까.
‘일상성normalité’과 ‘남성male’의 합성어.
사실상 전쟁은 매번 남성의 구분, 남성의 우월성을 반복적으로 제기하고, 제도화하고, 재확인하는 역할을 했다.
지금까지 전쟁이 무력을 통한 전유appropriation 전략의 일종으로, 남성성을 제도화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주장을 살펴봤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전유’란 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배타적 전유란 이런저런 대상에 대해 그것을 독점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얼핏 전쟁과 사유재산은 철저히 대립하는 관계로 보인다. 어쨌거나 전쟁은 국가의 안위보다는 더 상위의 원칙을 위해, 모든 사유재산의 징발·강탈·탈취·몰수 등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사유재산은 국가이성**에 의해 제한되며, 전쟁 상황은 사유재산의 침해를 정당화한다. 하지만 전쟁과 사유재산의 대립은 그저 피상적인 차원에 불과하다. 영토와 자원을 강탈하는 수단으로써 그것들을 박살내고, 불태우고, 파괴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는 전쟁은 사유재산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남용이다.
반면 사유재산의 밝은 면은, 우리도 잘 알다시피, 우리가 소유한 것들을 책임지고 보호해 주고, 그것들을 잘 유지해 주며, 발전시켜 준다는 측면에 있다. 그와 반대되는 사유재산의 어두운 측면이 바로 남용인 것이다. 예로부터 라틴 민족은 ‘사용하고 남용할 권리Jus utendi et abutendi’에 대해 말했다. 재산은 우리에게 획득한 대상을 남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어쨌거나 마르크스도 산업 경영자가 계약을 통해 노동자의 노동 시간을 전유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경영자는 노동자의 노동 시간을 남용한다. 노동자의 육신이 지쳐 떨어져 나갈 때까지 노동 시간을 높이고, 과중한 임무를 부과한다.
대지주는 자기 땅을 남용한다. 돈을 벌기 위해 쉼 새 없이 땅을 경작하고, 토양이 황폐해질 때까지 수확량을 늘린다. 전쟁은 인간과 자원을 남용한다. 수많은 인간을 사지로 내몰고, 다량의 자원을 살상에 투입한다. 왜냐하면 칸트가 일찍이 지적한 대로, 국가수반이나 군주는 스스로를 인민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5
자본주의 전유와 전쟁이 맺고 있는 조금 더 특수한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일찌감치 다룬 바 있다. 가령 마르크스 이론은 국가 사이의 전쟁을 제국주의 경쟁관계의 논리적 귀결로 간주했다. 세계열강이 식민지 건설(자국의 남아도는 상품을 수출할 새로운 판로 개척, 공장 가동에 필요한 새로운 에너지 수급)을 둘러싼 열띤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편, 1895년 3월 7일 연설에서 조레스Jaurès는 국가 간 전쟁이 무엇보다 ‘자유의 진보’라는 미명 하에 난폭한 경쟁과 적대 논리를 장려하는 사회 시스템의 표현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그런 이유에서 조레스는 1914년 7월 25일 “폭우를 머금은 먹구름처럼 자본주의는 전쟁을 품고 있다”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한편 그보다 훨씬 더 은밀하고, 조금 더 음모론에 가까운, 세 번째 이론도 있다(여기서 우리는 앞서 언급한 에라스무스의 도발적 발언과 다시 대면하게 된다). 바로 국가 간 전쟁이 소수의 자본가 계급을 전복시키고, 생산 수단·공공 서비스·기본재 등에 ‘공공’의 개념을 재도입하기를 염원하는 혁명 운동으로부터, 민중의 관심을 멀리 돌려놓기 위한 수단이라는 견해다.
과거 우리는 대규모 전쟁이 터질 때면 종종 이런 말을 되풀이해서 듣곤 했다. “공장노동자여, 농민이여, 사무직 노동자여, 그대들이 치러야 할 전투가 무엇인지 착각하지 말라….” 그런 의미에서, 전쟁은 마치 사유재산에 대한 신성한 권리를 보장해 주고, 소유자들을 보호해 주며, 그들이 세계를 남용할 수 있는 권리를 영속시켜 주는 아주 은밀하고도 중대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홉스는 《리바이어던》 13장에서 전쟁의 두 번째 원인으로 공포를 꼽았다. 이러한 견해는 어렵지 않게 바로 확인된다. 가령 인접국이 자국의 군사력과 타격 능력을 증강하며 점점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온다면, 당연히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도발에 대해 대응에 나서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선제적 차원의 정당방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가령 각종 위협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예방전쟁을 펼치거나, 임박한 공격에 대해 선제전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심지어 푸틴도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위협 카드를 내밀었다. 가령 우크라이나 내 신나치 세력의 창궐이나 나토군의 포위를 대표적인 위협으로 지적했다.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공포는 줄기차게 전쟁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공포는 용납할 수 없는 침략을 정당방위로 둔갑시켜 주는 훌륭한 동기이자, 그럴듯한 이유에 해당한다. 동시에 공포는 그것이 타당한 공포인지 가장된 공포인지를 판단하는 양자선택의 문제에만 그치지 않는다. 두려움에 입각한 예견은 우리를 끝내 악순환의 소용돌이로 몰고 간다. 상상력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놀라운 마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확고한 사실에 근거해 우리는 특정 인접국이나 강대국이 우리를 침략하고, 우리의 자원을 약탈하려던 계획을 완전히 포기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물론, 우호관계를 선언하거나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나라의 역사가 배신과 변절로 점철되어 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위정자는 군사 이동이나 군사력 증강 등과 같은 각종 신호를 통해 위협을 판별한다.
하지만 공포로 인해 증폭된 상상력은 더 이상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의 숨통을 조이기 위해 강대국들이 서로 어떤 비밀 조약을 맺거나, 은밀히 무기를 구입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순식간에 꼬리에 꼬리를 문 상상력은 결국 상대를 완전히 불신하게 만든다. 한편 우리의 불안을 지켜보던 다른 쪽도 그저 두 손 놓고 방관할 리 없다. 상대 역시 우리의 불신을 명백한 위협으로 간주하며, 그 역시 관찰된 위협에 대응해 재무장을 시도한다. 그러면 우리는 상대가 전투에 대비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의 예견이 정확히 들어맞았다고 판단하리라.
이것이 바로 개인 사이의 적대관계, 국가 사이의 전쟁이 선언되는 과정이다. 즉 전쟁은 서로 상대의 악의를 예단한 데서 비롯된다. 상상이 만들어 낸 양측의 공포는 결국 현실을 만들어 낸다. 서로의 적개심을 의심하는 순간, 결국 적개심이 죽음의 길 끝으로 내달린다. 위협과 공포가 서로의 편집증을 살찌운다. 에라스무스는 상상이 빚어낸 공포라는 유령이 전쟁을 잉태하는 현상을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구절로 표현했다. “전쟁은 가장된 전쟁으로부터 탄생한다.”6
전쟁의 마지막 고원은 두려움과 기의 반대되는 감정, 바로 ‘허영심vanité’이다. 홉스는 우월감의 과시, 교만한 자아를 현시하는 행위와 관련된 모든 것을 허영심이라고 봤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전쟁을 벌이는 것도 허영심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적으로도 상징적 승리를 목적으로 한 전쟁의 예는 수두룩했던 것이다. 수많은 전쟁이 역사적인 장소를 점령함으로써, 자신의 적법성을 증명하거나 자국의 군사력이나 우월한 지휘 능력을 과시하거나 최고사령관을 영화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허영심이 진정한 원인이 되는 과정을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고 싶다면, 단순한 허세(역사책에 길이 남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일) 이상의 차원을 탐구해야 한다. 사실상 우리는 그동안 허영심이라는 전쟁의 원인을 도외시하거나, 최소 평가해 오는 경향이 강했다. 이제 책임감 있는 정치인들의 공범을 언짢다는 핑계로, 전쟁이라는 끔찍한 현상에 관한 파괴적인 행위를 범인 수 있었느냐란 말이다.
여기서 잠시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보여진 흥미력 있는 주장을 함께 살펴보자. 그에 따르면 모든 인정 투쟁은 생사를 건 투쟁이다. 인정을 추구하거나 자신이 타인을 능가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는 수준까지 스스로 올라서야 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마치 내재적인immanent 삶을 잠시 내려놓고, 위대한 업적이나 역사적 복수 등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능력이 순식간에 자신을 고결한 존재로 높여주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사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청소년들에게서도 이런 종류의 치기 어린 경쟁적 도전 성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강대국의 지도자들은 이미 질풍노도의 시기를 다 지난 어른이 아니던가.
물론 역사적으로 전쟁을 선동하거나 개전을 선포한 장본인이 직접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일은 드물다. 그럼에도 오로지 명예만을 목적으로 한 전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우리는 러우 전쟁의 사례를 통해, 앞서 말한 전쟁의 3대 원인이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탐욕부터 살펴보자. 러시아는 유럽의 곡창지대를 장악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 다음은 공포다.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희망을 견딜 수 없는 위협으로 간주한다. 마지막은 명예다. 미 외교계의 거물 즈비그니예프 브레진스키가 지적한 것처럼,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제국의 위상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최후의 보루다.7
잠시 전쟁과 역사의 관계를 천착한 헤겔의 이론으로 돌아가보자. 물론 목적은 어디까지나 그의 사상을 극복하기 위해서지만 말이다. 사실상 헤겔은 전쟁에 대해 매우 총체적인 분석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전쟁은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인류는 전쟁을 통해 앞으로 전진하고, 진보하고, 자기실현에 이른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전쟁이 근본적으로 긍정성을 지닌다고 본다는 점에서 상당히 역설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가령 로마의 정복 전쟁은 서구 세계의 변방으로 로마의 각종 우수한 기술(법, 행정, 거리예술 등)을 전수하며 문명 전파의 역할을 했다. 그런가 하면 나폴레옹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도 혁명의 이상을 유럽 전역에 퍼뜨렸다.
하지만 20세기에 이르면서 이러한 진보주의적 이상향, 달콤한 꿈(죽음이 무엇인가를 이루는 데 기여한다)은 구시대의 유물로 바뀌었다. 사실상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은 어떤 대대적인 문명 전파의 효과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물론 한편으로는 몇 가지 변화(노동 세계에서 여성의 역할, 일부 의학적 진보 등)를 시기적으로 앞당기는 역할을 하기는 했다. 그럼에도 매번 한층 더 치명적인 살상 무기를 개발하거나 생산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우리는 역사와 전쟁이 어느 정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관계는 진보적 비전과는 거리가 멀지만 말이다. 가령 멀리서 예를 찾을 것도 없이 바로 러우 전쟁이 그러한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 과거 제국의 지위를 상실한 데 대한 굴욕감을 보상받고 싶어 한다. 우리는 여기서 전쟁이 자기 역사에 대한 설욕의 기회, ‘억압된 것이 회귀’하는 순간이 되어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홉스는 전쟁을 자극하는 3대 감정(탐욕, 허영심, 두려움)을 제시하면서, 정작 가장 결정적인 감정을 빠뜨렸다. 바로 분노다. 물론 여기서 ‘분노’란 울분의 폭발, 억압된 충동의 분출, 극도의 스트레스에 대응하는 강력한 반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분노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훌륭하게 지적한 바 있듯이, 무엇보다 설욕의 의지, 다시 말해 굴욕적인 과거를 되갚아주고 싶은 욕망, 잃어버린 위상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굴욕적인 과거를 향해 느끼는 격분의 감정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호전적 분노는 정확히 말해 역사를 새롭게 다시 쓰려는 절박한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지도자에게는 자기 민족의 역사를, 병사에게는 자기 자신의 역사를 다시 쓰려는 시도인 것은 아닐까? 미처 소화하지 못한 원한과 해묵은 모욕감이 전쟁의 폭력을 통해 비극적으로 해소되는 현상을 이처럼 우리는 ‘억압된 것의 회귀’에 입각해 설명해볼 수 있다.
최근 10여 년 간 일부 중동 국가를 휩쓴 내전(이라크, 시리아, 예멘 등 갑작스런 정권 붕괴 이전에 소수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여러 공동체를 억압하며 미래 내전의 씨를 뿌린 바 있다)의 사례에서도, 굴욕적인 과거를 설욕하려는 시도가 빚어낸 참혹한 결과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쓰라린 고통은 엄청난 파괴 에너지를 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수많은 전쟁이 역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에 역행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기 위해서라도 이제 그만 헤겔의 사상을 뛰어넘어야 할 때다.
(나가며) 그렇다면 무슨 평화를 위한 전쟁인가?
어느 날 전쟁이 끝나면, 다른 날 또다시 전쟁이 시작된다. 모든 운동은 정지 상태로 멈추게 되어 있듯, 전쟁도 언젠가는 끝날 운명일 테지만, 그럼에도 기어코 다시 반복된다. 참으로 기이한 관계다. 한편으로, 우리는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이지 결코 전쟁 자체를 위해 전쟁을 하지는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 누구도 전쟁을 위해 전쟁을 벌이거나, 일부러 전쟁을 준비하지는 않는다”고.
레몽 아롱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에게 주는 권위에 헤로도토스가 남긴 비슷한 문구를 새겨 넣었다. “평화보다 전쟁을 더 좋아할 분별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전쟁을 하는 이유는 언제나 폭력을 대가로 조금 더 확실하고 항구적인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마치 평화가 전쟁의 유일한 목적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평화는 앞으로 다가올 전쟁을 준비하는 기간,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하고, 살상력이 강화된 막강한 군대를 재편성하는 병운의 시기, 두 학살 사이의 막간, 휴지기, 숨고르기에 불과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일반적인 진술로 받아들여지려면, 평화가 오로지 한 가지 의미만 지녀야 한다. 하지만 평화의 의미는 전쟁의 의미만큼이나 모호하고 다채롭다. 역사적으로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무수히 많은 평화가 존재했고, 저마다 특수한 양태를 띠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해 보자.
먼저 가장 냉소적(만일 우리가 블랙 유머를 좋아한다면)이면서도 가장 비관적인 형태의 평화는 라이프니츠와 칸트가 말한 ‘공동묘지의 평화’다. 전쟁은 인류와 지극히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에 오로지 타나토스의 깊은 심연에서만 각자가 완전한 평온에 이를 수 있다는 견해다. 죽은 자들은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은 시민들을 서둘러 죽음으로 이끄는 위대한 평화의 생산자다.
한편 그보다 덜 급진적인 평화는 이른바 ‘군사력으로 무장한 평화’, 소위 ‘무장 평화’라 최소 세 가지 의미로 해석해볼 수 있다.
첫째, 평화가 전쟁에서 ‘자양분’을 제공받는다는 의미를 지니는 경우다. 전쟁은 새로운 양식이나 물적 생산 혹은 사회조직의 모태를 이루는 일종의 실험소 역할을 한다. 전시에 발명된 수많은 것들은 평화 시에 비로소 더 널리 발전해, 꽃을 피우고, 가지를 뻗어나간다. 마르크스도 이러한 생각에 깊은 영향을 받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물적 생산의 새로운 양식은 전시에 개발되어, 평화 시에 널리 발전한다.” 특히 《자본》의 저자가 주목했던 부분은 위급한 전시 상황이 계기가 되어 발전한 각종 산업생산 방식과 과학적 혁신(산업현장의 노동 속도, 약물 치료 등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견해를 조금 더 확장해 볼 수 있다.
전쟁은 단순히 전시에 군사적 긴급성에 의해 신속한 실험과 테스트를 거친 수많은 기술적 혁신만이 아니라, 사회 조직·대인 감시·정신 교육 등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사실상 ‘대규모’ 작전 차원에서 선전술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17년 미국이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로 결정하면서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세일즈’해야 했을 때가 아니었던가?
다음으로 첫 번째 장에서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은, 두 번째 의미에서의 ‘무장 평화’도 있다. 과거 냉전(1947~1989)에 이은 ‘글로벌 전쟁’(2001~2021)의 일환으로 ‘안정화’ 작전, 다시 말해 여러 서구 강대국들이 지도자(테러조직을 지원했다고 의심받는 억압적이고 부패한 독재자)를 축출할 목적으로 ‘개입’했던 영토들에 대한 안정화가 수행되면서,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취약한 평화가 가까스로 지속됐다.
이러한 평화는 사실상 전쟁 그 자체(테러, 매복, 급습)보다 훨씬 더 많은 살상을 초래했다. 결국 이러한 평화는 끝없는 협박과 무력에 의해 유지되는 평화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조금 더 광범위한 의미에서 모든 평화가 언제나 무력 평화에 해당한다고도 말할 수도 있다. 가령 클라우제비츠의 말을 뒤집어보면, 정치란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의 지속인 셈이다. 내부의 평화, 공공질서는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헛된 신기루, 외부와의 전쟁은 끔찍한 교란작전에 불과하다.
사실상 각국의 내부에서 은밀하고도 교활하게 벌어지고 있는 진정한 전쟁은 바로 내부의 평화 속에서 소수가 자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다. 노골적인 독재국가, 무늬뿐인 민주주의 국가가 추구하는 무장 평화는 경찰력, 조세제도, 노동, 사유재산에 관한 법률 등을 동원해 소수가 다수에게 강요하는 평화를 의미한다.
앞서 이븐 할둔이 《이바르의 책》에서, 그리고 훗날 루소도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후반부에서 폭로한 바와 같이, 국가조직의 이면에 감춰진 끔찍한 비밀은 호전적이다. 다시 말해 금융, 사법, 산업, 공권력 등의 무기로 단단히 무장한 소수가 자신의 민중을 상대로 은밀하고도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외부와의 전쟁은 국가가 소수의 이익을 위해 조직된 무장 평화를 한층 더 강화하거나, 혹은 무장 평화의 이면에 감춰진 근본적인 갈등, 이른바 마르크스가 ‘계급투쟁’이라고 부른 것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기대해야 할 평화란, 다시 말해 합리적인 철학이 토대로 삼아야 할 평화란, 무장 평화나 공동묘지의 평화보다는 훨씬 더 희망에 찬, 조금 더 진실 어린 평화여야 하지 않을까. 물론 역사의 종말을 의미하는 기복천년의 평화, 불순분자들을 정화할 참혹한 ‘최후의’ 대전쟁을 통해 실현될 그런 평화도 결코 우리가 추구해야 할 평화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보다 신비주의적인 성격이 적은 두 가지 종류의 평화를 제안해 볼 수 있다. 그러려면 먼저 전쟁이 언제나 칸트가 말한 의미에서 반공화주의적이고, 스피노자가 말한 의미에서 반민주주의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먼저 칸트는 《영구평화론》 제1확정조항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강력히 옹호했다. 요컨대, 군주, 위정자, 국가는 스스로를 민중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가 앞서 지적한 논리대로 결국 민중을 착취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가령 개인적인 야망을 충족하기 위해 민중을 희생하거나, 변화하는 정세에 맞춰 제멋대로 민중을 이용하는 식으로 말이다.
만일 민중이 직접 제 손에 결정권을 쥐고 있었다면 그토록 쉽게 ‘스스로 막대한 피해를 자초할 수 있는 참혹한 전쟁을 선포’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안위가 걸린 문제만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의 논리는 간단하다. 공화국은 오로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만 전쟁을 한다. 따라서 모든 국가가 공화국이라면,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의 침략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국가의 내부 체계가 점진적으로 진정한 공화주의 체제로 변모해 나간다면, 결국 우리는 언젠가 평화의 길에 이를 수 있다.
평화는 공화주의 체제에 의해 조직되지만, 그럼에도 인류에 지극히 ‘적합한’ 상태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상 평화는, 이번에는 스피노자가 말한 의미에서, 철저히 ‘자연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평화는 자연적인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모든 것은 자연의 결핍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려면, 국가 간 전쟁이 안타깝게도 철저히 본능적인 것이어서 항구적인 평화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문화의 힘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기존의 시각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물론 호전적인 자연 대 평화적인 문화라는 대립 구도는 수많은 교육적인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다. 그럼에도 평화란 개념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스피노자의 통찰력을 빌리자면, 그것은 너무나도 빈약한 개념에 불과하다.
오히려 우리는 일정한 사물(말하자면 모든 문화적·도시적 영향을 탈피한, 즉 본래 주어진 생적 성격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한다. 조금 더 거칠게 말하면 시골, 야생이라도 볼 수 있다)이 현존하는 방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자연을 이해해야 한다. 사실상 자연은 최종적으로는 일종의 조합능력 그리고 완성원리를 의미한다.
가령 피아니스트의 자연스러운 연주는 피아노의 완벽한 선율을 빚어내는 능숙한 손가락의 움직임을 뜻한다. 그리고 각자의 가장 자연적인 특징은, 자신의 고유한 역량이 최고점에 도달한 분야를 가리킨다. 눈치챘겠지만 자연은 결코 학습, 교육, 규율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자연을 완성하기 위한 수많은 도구에 해당한다.
자연이란 근본적으로 모든 역량이 올바른 소리를 내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완벽한 조합을 형성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훌륭한 법과 엄격한 교육, 공정한 사법정의를 통해 국가가 충분히 인간들 사이에 ‘자연적인 성질’을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인간들 사이에 우호와 상호협력의 양식을 불어넣고, 사회적 화합에 이르도록 만들 수 있다고 여겼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민주주의는 가장 자연적인 정치체제이며, 전쟁은 반민주주의적이라는 견해를 도출할 수 있다. 사실상 전쟁은 자연의 완성을 증언해 줄, 여러 역량의 조화로운 조합을 저해하고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연대적 조합을 국가 사이에 구축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국가 차원에서 자연의 기적을 실현하기란 매우 어렵기만 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연은 결코 한 존재의 완결 원리가 아니다. 자연은 자신의 완성에서 결여된 부분을 내포한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가 서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국가들 사이에 자연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련한 인간들의 이해타산, 치졸한 야망, 빈약한 상상력이 빚어낸 오판 등이 지나치게 많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를 평화의 길에 이르지 못하게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증오심, 잘못된 복수심, 두려움, 심술궂은 교만함이라는 인류의 문화다. 왜냐하면 평화란 언제나 부정적 감정들을 이겨낸 환희의 승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