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성의 철학' 시간에,
공창제에 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저 또한 공창제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어제의 토론은 제 찬성하는 입장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공창제는
창녀 혹은 (이 '창녀'라는 말 또한 수많은 역사적인 문맥에서
이야기 할 수 있기에, 자본주의 상에서) 몸을 직접적으로 화폐로
대상화하는 여성들의 권리를 전적으로 '국가'에 위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국가가 그렇게 '믿음직'스러운가요?
분단의 위협때문에 국방비를 줄이는 것조차 조마조만하는 나라에서,
창녀(다만, 편의를 위해 앞으로 자신의 성을 화폐화는 여성을 '창녀'라
칭함)를 위해 세금을 내야한다는 것은,
여성들에게 얼마나 큰 '위기'를 포함하는 것인가요?
어떤 위협적인 상황이 생긴다면,
기꺼이 가장 먼저 없어지게 될 것은 소외된 사람들을 몫일 겁니다.
그게 '관리'고 그것이 '행정'이니까. 이른바 '대의'를 위해서.
물론, 창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생활하는 것보다는, 국가의 관리 하에 생활하는 것이
더 나은 생활이지 않겠어? 포주에게 착취당하는 것 보다는
네 몸을 팔아, 국가에 세금으로 내는 것이 더 좋지 않겠어? 왜냐면,
국가가 네 몸을 지켜주니까, 네 몸을 팔아 먹으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너를 지켜주는 것이 국가니까 당연한 것 아니야? 나, 국가가 네 포주가
되여줄께. 인원도 투입하고, 더 몸을 잘 팔 수 있는 환경도 제공해
준다니까....어차피 창녀는 역사를 통해 있어왔으니까, 자책감 혹은
자괴감을 느끼지 말고 넌 네 할 일만 하면돼'
하,
공창제가 공식적이되면, 당연히 그것에 대한 법률이 만들어지고,
법률은 당연시 '기록'을 의미하고(마치 전과자처럼) 창녀는 역시
창녀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달라진 것은 더 좋은 환경에서
몸을 판다는 것이겠지요.
오늘 토론을 들으면서,
합리적인 것과 정치적인 수준에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이렇게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얼마나 좋아요, 창녀의 인권을
위한다는 것이. 그것에 합리적이 대한은 공창제, 국가의 관리라는
것이. 그러나, 이른바 '국가의 관리'라는 것에, 공창제를 찬성하는
사람이 자신의 관점을 평생 지속할 수 있을까요? 의견을 낼 수는
있지만, 지속적으로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는 있을까요?
편하게 '합리적으로 생각해봐'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죠.
의견을 내는 사람과, 진심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토론에서, 이른바 '켜뮤티케이션 상황'에서 결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믿음직한' 국가의 관리에서,
가슴을 칠 비리가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공창제'라니요. 이제 민주주의 맛을 (월드컵 때을 돌이켜 보면 아직도
파쇼적이지만) 아주 조금 본 나라에서, 세계화 혹은 유연성을 최상의
가치로하는 신자유주의 추종자들에게, 소외자들의 인권(결코 양으로
환원되지 않는 가치로서)들 지랄같은 국가에 맡긴다니요.
저는 오늘 공창제에 분노를 표현했던 학생에 대해 그렇게
느꼈어요. 저 사람이 진정으로 '내기'를 하는 사람이라고.
들뢰즈의 '시네마 1권'이라 기억하는데,
파스칼이 이야기하고, 들뢰즈가 풀이한 어떤 부분에서,
신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리고, 진정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 '내기'를 거는 사람은
'유신론자' 일 수밖에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의 원인인 신은 내가 신이 없다고 주장하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기 때문에, 내가 신이 없다고 주장한 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
신의 책임입니다. 반면 신이 있다는 사람은, 만약 신이 없다면,
신이 있다고 믿은 온전한 책임을 혼자서 감당해 내야 합니다.
'신이 있냐 없냐'의 내기에서
진정으로 게임에 임하는 사람은 언제나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수정: 들뢰즈가, 선택에대해서 이야기하는 그 부분은,
선택의 내용, 그러니까, '어떤' 선택을 해야하느냐...의 문제 이전에,
선택을 선택해야하는 상황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신에 대해서 내기를 거는
사람은 이 내기가 자신에게 의미하는 것을 자신의 선택과 연관지어서 생각할 수
있지만, 무신론자나, 중립적인 입장에 선 사람은 선택 자체를 자신의 문제와
연관시켜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 그들은 선택을 하나의 유희로서 생각할 뿐이라는
것. 그래서 선택한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 사람은, 선택의 내용과 상관없이
어떤 선택 자체게 대한 어떤 실존적인 상황에 직면한다는 것.(마치, 소문 혹은
말로 던져진 화두에 대한, 이미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들에 대한 우리의 가책과
같은 선택에 직면하는 것과 같이) 앞의 저의 설명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
라고 생각하지만, 분명 들뢰즈가 의도하는 바와는 차이가 있기에 수정합니다.
어제 공창제 논의에서 그 지점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진정으로 게임에 임하는 사람,
공창제의 논의가 피부로 와닿는 사람,
이것이 부인된다면, 자신의 논리와 삶의 자리를 잃는 절실한 사람과
편하게 공창제가 현실화되든 그렇지 않든 '합리적'으로 혹은 (간사한)
객관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든 아닙니다.
공창제의 논의가 폐기되더라도 아무상관없는 사람과
공창제의 논의가 합법화된다면 다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할 사람들의
차이는 오직 그 '절실함'이라는 감정적인 차이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절실함이 논의에서 효과를 얻을 수는 없으나,
더 참을성을 가진다면, 현실에는 기필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감정(더욱 정확히는 정서)는 객관적입니다.
왜냐하면, 정서는 세계로부터 밀려들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계기가 없는 사랑, 증오를 보셨나요?
분명, 저 곳, 저기에 대한 어떤 느낌이 사랑 혹은 증오를 만듭니다.
창녀들의 생활을 보고, 분석하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모든 '합리적인' 논의는 위선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생활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기본적인 수준에서,
창녀들의 고통을 (실천적으로) 공유하는 사람에게
누가 대화를 청할 수 있겠어요?
오직, 그 고통의 경험을 배울 뿐입니다.
그리고 논의는 그 다음입니다. '정서'의 공유하는 토론의 필요조건이
획든횐 후.
다수적인 토론은 결코 그 부분(창녀의 문제에서, 창녀 그 자체의 부분)
을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결코.
첫댓글 글이 마음을 때렸습니다~ 지금도 심하게 울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