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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동물의 비극
글/ 해남 민다선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였다. 혹자에 따라서는 그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한 것을 로마 시대의 철학자인 세네카가 사회적 동물로 번역 하였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찌되었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생활 속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어로 사회는 ‘society’인데 이는 프랑스어의 ‘société’를 영어식으로 표시한 것이고 원래 어원은 라틴어의 ‘societas’이다. 라틴어의 societas는 동료나 동업자 등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친근한 사람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동료나 동업자는 연합하거나 동맹의 관계를 갖는 즉, 결합의 의미가 큰 관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회(社會)라는 단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한 원래의 개념과는 약간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한자어인 社會라는 말은 송(宋)나라의 유학자 정이천(程伊川:1033~1107)이 죽은 후 그의 글들을 모아 발간한 이정회서(二程會書)에 수록된 '鄕民爲社會'라는 말이 어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어에서 '社'는 '토지의 신을 제사한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會'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중국어의 사회라는 말은 '사람들이 모여 토지의 신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뜻을 가지게 되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의미와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면서 사회라는 말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의미가 부여되면서 사회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대중 속으로 파고들게 되었다.
원시적 사회체제는 단순 사회로서 사회의 기능 분화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태로 사회가 주로 친족제도의 원리에 의해 통합되고 조정되는 특성이 있으며 생산수단의 공유 경향을 보이고 실질적인 생산주체는 주로 집단 내부에서 동원되었다. 그러나 봉건 사회에 접어들면서 정치, 경제, 종교, 가족제도 등이 어느 정도 세분화되면서 지배관계가 주로 토지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지주와 평민이 중요한 사회계급이며 이들 사이에는 특수한 상하관계와 상호의무 및 권리가 부여되었다. 그러다가 공업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부를 축적한 시민계급이 출현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 되었다. 근대 자본주의에서는 새로운 생산력을 획득한 이들이 경제와 정치를 좌우하게 되었다. 그리고 소위 자본가 계급과 임금노동자의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 질서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임금노동자와 자본가 계급 사이에 긴장관계를 형성하게 되었고 그 결과 자본가 계급은 경제인연합회 등을 그리고 임금노동자 계급은 노동조합 등을 만들어 서로에게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 변화의 과정을 살펴보면 사실 가장 안정되고 인간적인 사회는 원시사회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원시사회에서는 인간의 삶이 생존 지향적이고 조화를 중시하는데 반해 사회가 발달하면 할수록 정복과 대립을 지향하고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이익 추구를 위해 경쟁적 관계로 변모해 가기 때문이다.
현대적 의미에서 사회는 문화 혹은 제도적으로 독창성을 지닌 공통의 관심과 이해관계에 기반한 개인들의 모임 또는 결합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사회는 한국사회, 미국사회 또는 상류사회, 하류사회 등과 같이 국가, 민족, 문화 등에 따라 구분하기도 하지만 사회적 동물로써의 관점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사회란 공통의 관심과 이해관계에 기초한 사람들의 집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 속에는 인간은 자신의 이익이나 종교, 취미 등에 따라 집합을 이루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회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개인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는 인류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데 이러한 견해 차이로 인해 발생한 것이 기능론적 사회관과 갈등론적 사회관이다.
기능론적 사회관에서는 사회의 기능을 통합과 안정 그리고 균형의 유지로 본다. 디렌도르프는 사회를 지속적이고 안정된 부분 요소라고 하였으며 사회의 모든 부분 요소는 기능을 수행하며 이러한 기능적 사회구조는 구성원들 사이의 가치관의 동의에 바탕을 둔다고 하였다. 따라서 생물을 구성하고 있는 유기체가 개별 유기체의 모임에 의해 지탱되어 가듯이 사회도 작은 사회들이 모여 큰 사회를 지탱해 간다는 것이다. 즉, 작은 사회를 구성하는 부분 요소들은 서로 상호의존적이며 큰 사회 전체의 존속에 기여한다.
이에 비해 갈등론적 사회관에서는 사회의 속성을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 간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투쟁으로 본다. 이러한 대립과 갈등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데 사회의 재화는 일정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특히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과의 사이에서 갈등은 더욱 심각하다. 피지배집단은 지배집단에서 보았을 때는 언제나 위협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지배집단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자신들이 속한 사회에 유리하도록 사회질서를 창출해 나간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여 피지배집단은 지배집단에 대항할 수 있도록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유리한 사회적 질서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결국 사회는 긴장과 갈등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 갈등론적 사회관이다.
기능론적 사회관이 되었든 갈등론적 사회관이 되었든 사회는 어느 정도 집단적 행동을 통해 개인적 이익이 분배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느 집단인가에는 속하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어지는 이익이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승진의 기회를 얻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의 개인적인 힘으로는 제압할 수 없는 상대를 제압하는 반사적 이익일 수도 있고, 어떤 집단엔가 자신이 속해 있다는 편안함 혹은 소속감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능하면 다양한 집단에 얼굴을 내밀고 싶어 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심리가 지나치면 자신을 오히려 파멸로 몰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직장인이 자신의 행보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못 마시는 술을 밤새 동료들과 함께 어울려 마신다든지 주말이면 가족들은 뒤로한 채 골프장으로, 테니스장으로 동분서주하는 일들이 작은 예라면 예라고 할수 있다. 그래도 이런 일들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하지않으면 안되는 일들이라 하다하더라도 이러한 단계를 넘어 자신이 속한 사회와 반대되는 집단에 속한 사람을 모함하고 음모를 꾸며가면서 까지라도 상대방을 파멸로 몰아가는 일에 동참하는 수준이 된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은 인간이 안고 있는 최대의 비극인지도 모른다. 손자병법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 인간이 안고 있는 최대 약점 중의 하나인 사회적 동물에 대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동물에 대한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한다. 즉, 사회의 특성을 이해하고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이 속할 사회를 결정해 나간다면 우리는 능히 이러한 약점을 극복할 수 있다.
나는 어떤 집단에 속할 때 그 집단의 성격을 면밀히 관찰하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만일 표면적으로는 비록 드러나 있지 않더라도 어떤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일 경우에는 가능하면 그러한 모임에는 함께 하려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반사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은 주어질 수 있는 반사적 이익이 사라지면 깨지거나, 반사적 이익이 주어졌을 때 그 분배를 놓고 자신들끼리 조금이라도 더 많이 차지하려고 암투를 벌이는 모습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비록 내게 주어지는 이익이 없다하더라도, 아니 오히려 나를 희생해 가면서까지라도 지켜 나가고 싶은 모임이 있다면 그 모임은 아마도 평생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회는 개인의 이익이 아닌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2010.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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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말씀감사드립니다. 다선님 말씀처럼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사회,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모임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사람에 대한 배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느 사회나 모임에 지속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선님의 가르침 잊지않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바쁘신 가운데 또 좋은 글 주셨네요. 앞으로도 건강한 글 부탁드려요.
"비록 내게 주어지는 이익이 없다하더라도, 아니 오히려 나를 희생해 가면서까지라도 지켜 나가고 싶은 모임이 있다면 그 모임은 아마도 평생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회는 개인의 이익이 아닌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깊이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