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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마이산(馬耳山.685m).
마이산 개념도.
일시 : 2008. 11. 8(토).
산행기는 잔뜩 밀려 있는데 가을이 다 가기전에 어디가서 바람좀 쐬고 오잔다.
흑산도,홍도를 갈까 생각해보니 바닷바람이 가을엔 좀 그럴것같아서 함양가서 상림, 정자,사원,정여창고택을 들려보고
담양으로가서 떡갈비도 맛보고 소쇄원,식영정,죽녹원,메타세쿼이아 거리도 가보고
가는길엔 진안에 들려서 마이산을 둘러보고 말로만 듣던 애저를 먹어보기로 하고 길을 떠났다.
천안-논산고속도로로 익산가서 익산에서 장수가는 새로뚫린 고속도로를 타는데 GPS가 읽지를 못해서
자꾸만 엉뚱한 소리만 해댄다.
익산-장수고속도로는 아직 차들이없어 한가하고 진안까진 시간도 얼마 안걸린다.
오늘은 마이산 남쪽으로 들어가 전에는 휙하고 자나갔던 입구의 이산묘부터 차근차근 둘러보기로 하고,
진안 톨게이트를 나와 진안읍과 반대쪽인 좌측의 임실 마령쪽 30번국도를 따라간다.
금남호남정맥을 종주할 때 지나던 고개를 넘어 내려가서 우측으로 조금 들어가니 매표소(주차권)옆에 이산묘가 나온다.
이산묘부터 금당사-탑영제-부부시비-탑사-은수사-화엄굴앞까지 다녀오는데 대략 2시간30분~3시간이면 충분하다.
마이산은 속금산(束金山)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진안군지등 이 지방의 문헌에 조선의 이태조가 명명 했다는 기록이 전해 내려온다.
즉, 태조가 등극하기전 꿈에 한 신인으로부터 장차 삼한 강토를 재라는 금척을 받았는데 나중에 운봉지방에 침범한 왜구를 물리치고 개선하는 길에
이산에 들러보니 경치가 꿈속에서 금척을 받았던 자리와 흡사하여 신기하게 여기고 속금산이라고 명명 하였다는 것이고
이 사실은 왕조의 악장에 '몽금척' 이라는 가사로 실려있다 한다.
이 일은 이 지방에 파다하게 전해 내려와 마이산이 이태조의 주필지(머물은 곳)라는 사실에 이 지방 사민(士民)들의 자긍심이 서려 있었다.
여기에 한말의 거유 연재 송병선이 마이산에 놀면서 고을의 여러 선비들과 용암에 이름을 새기기도 하고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이 마이산에 올라 쌍계수석(雙溪水石)이라는 표제를 남기기도 하였다.
또 마이산은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의 존망이 위급할 때인 한말에 호남지방의 최초 '의병창의동맹지'로서 성화를 치켜드는 진원이 된다.
즉 1909년 정제 이석용, 오병선, 허윤조 등이 '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여 마이산 용암에 제단을 차려놓고 소를 잡아 산신에게 제사 지내고
조국광복의 대업을 스스로 맡아 꼭 완수 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맹세한 것이니 이로써 호남최초의 조직적인 항일운동이 시작된 것이었다.
연재와 면암 두분선생을 흠앙하는 이 고을 선비들은 1924년 여름에 모여 선왕의 주필지요, 항일독립운동의 진원지요,
연재와 면암 두분 선생의 자취가 서린 이곳을 경건히 모시고, 존현의 의의를 살린다는 뜻으로 석벽에 주피대라는 세글자를 크게 새기고
경향의 여러 고을에 통문을 보냈는데 동년 12월18일 공주의 숙모전에서 열린 경향의 유림회의 때에
이 고을 오채열의 발의로써 마이산에 사당을 짓고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리겠다는 뜻으로 유림들의 결의가 있었고,
모성공회에서 전국의 향교, 서원에 통고 하였으므로 1925년 주필대의 서쪽에 이산정사와 이태조를 제향하는 회덕전을 지어
제향을 지내게 되었으나 당시 일제의 탄압과 박해가 심하여 제향을 받드는 선비들의 고통과 희생이 막심하였다.
다행히 1945년 조국 광복이되자 1946년 9월에 이산사 중건임원이 조직되어
이산묘의 중심건물인 회덕전을 완공하고 국내 여러고을의 동의를 얻어 회덕전에는 단군 성조와 세종대왕을 추가로 모시고,
회덕전 아래에 동서의 두 사우를 지어 동쪽은 영모사라하여 조선개국 이래의 명유 40위를 모시고 서쪽은 영광사라하여
고종 을사년이후 연재, 면암 및 순국하신 선열 34위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처소로 삼았다.<진안군청홈피에서>
주필대(駐蹕臺).
주필은 임금이 거동길에 잠시 머무르거나 묵고 간 것을 뜻한다.
주필대는 조선의 창업자인 태조 이성계가 남원의 운봉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개선하던 중
마이산에 올라 금척(金尺)과 관련된 시를 읆은 것을 기리기위하여
1924년에 이고을 선비들이 뜻을 모아 새긴 글이다.
주필대(駐蹕臺)옆 벽면.
주필대(駐蹕臺)옆 용암의 능소화.
용암위로 타고 오르는 능소화.바위에 붙어서는 뭘먹고 저렇게 클가?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의 존망이 위급할 때인 한말에 호남지방의 최초 '의병창의동맹지'로서 성화를 치켜드는 진원이 된다.
즉 1909년 정제 이석용, 오병선, 허윤조 등이 '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여
마이산 용암에 제단을 차려놓고 소를 잡아 산신에게 제사 지내고
조국광복의 대업을 스스로 맡아 꼭 완수 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맹세한 것이니
이로써 호남최초의 조직적인 항일운동이 시작된 것이었다.
금당사와 일주문.
마이산 남부 주차장에서 탑사쪽으로 약 300m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금당사는 현재 조계종단 소속인데
고구려 보장왕 때의 열반종의 종조 보덕화상의 제자인 무상화상과 김취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 중기의 지리서에는 금당사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확실하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마이산에는 상원사, 혈암사, 쇄암사만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바
이 중 어느 것이 금당사의 전신인지 또 언제 현재의 자리에 건립되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가 없다.
아무튼 금당사는 매우 퇴락하여 1978년에 지장전을 중건하였고 뒤 이어 대웅전과 삼성각을 중건하였다.
대웅전은 전면 5칸, 측면 3칸이고 팔작 기와지붕이며, 지장전은 전면 3칸, 측면 2칸이고 맞배기와지붕이며,
삼성각은 전면 3칸, 측면 2칸이고 맞배지붕으로 건립되었다.
금당사에는 '괘불탱화' '목불좌상' '삼층석탑' 등 문화재 3점이 소장되어 있다.
깃발꼿힌곳이 큰 행사나 법회할 때 괘불을 내다거는 곳인데
전라북도지방유형문화제제74호로 지정되어 있다가 1997. 8. 8.보물로 지정된 금당사 괘불은
숙종12(1686)년에 황화원(畵員)인 명원(明遠),조지연(趙志淵),비구(比丘) 3인이 마포(麻布)위에 진당채(眞唐彩)로 그렸다 한다.
괘불의 크기는 가로 5m, 새로 9m나 되는 거대한 의식용 불화로 단독의 관음보살 입상이 그려져 있다.
화면을 가득 메운 이 관음보살상은 약간 비튼 정면상인데 둥근 얼굴, 근엄한 표정, 당당한자세, 화려한 꽃무늬가 그려진 보관과 천의,
갖가지 무늬들로 수놓여진 광배, 질서있게 배치된 화루과 색색의 불꽃무늬등의 표현으로 보아 17세기 후반기의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는 걸작이다.
현란무비한 색채의 아름다움과 정교 치밀한 형태미의 표현으로 더욱 돋보이고있어서
통도사의 관음보살 괘불탱화나 무량사의 미륵보살 괘불탱화 등과 함께 보살괘불 탱화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금당사.
바위면이 코끼리 등가죽 같다.
금당영지위에 올라있는 호랑이가 특이하다.
금당사에서 뒤로 보이는 고금당 나옹암.
탑영제에서 본 마이산.여기서보니 말이 아니라 개구리 같기도하고 돼지얼굴 같기도 하고 강아지 얼굴 같기도 하다.
명려각과 부부시비.
1769년(영조45) 남원 서봉방에서 같은 달같은 날에 태어난 담락당 하림과 삼의당 김씨부인은 혼인후 마령면 방화리에 이주하여 살았다.
두분은 드물게도 부부간에 시인이었다.
특히 김삼의당은 규중의 여류 문인으로 신사임당과 함께 문명이 널리 알려진 분이다.
이 비는 1983년에 담락당.삼의당 부부시비 건립위원회에 의하여 세워졌으며 이후 매년 10월 진안군내 초. 중. 고 백일장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명려각 안에있는 담락당하림과 삼의당 김씨 영정이다.
같은해 같은달 한날에 한동네에서 태어나서 부부인연을 맺었다니 정말로 천생연분이네...
마이산은 진안군 진안읍 남쪽 약 3km 지점에 있는 두 암봉으로 된 산오로, 높이는 동봉(東峰 : 수마이산) 678m, 서봉(西峰 : 암마이산)685m,
산체는 모두 백악기의 역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쪽 사면에서는 섬진강 수계가, 북쪽 사면에서는 금강(錦江)수계가 각각 발원한다.
신라때는 서다산(西多山), 고려 시대에는 용출산(龍出山), 조선시대부터 마이산 이라고불렀다.
마이산은 전주에서 동쪽으로 약 30km지점의 진안읍을 지나 다시 남쪽으로 약 3km 거리에 있다. 산 모양이 마치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봉은 수마이산, 서봉은 암마이산 이라고도 부르는데, 오행의 금행(金行)을 묶은듯 하다고 하여 속금산(束金山)이라고도 부른다.
동봉과 서봉사이의 협곡같은 고개를 지나면 은수사(銀水祠)가 있다.
은수사는 조선시대 태조(太祖)가 임실군의 성수산(聖壽山)에서 돌아오다가 백일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지며, 부근에 마이산 탑사가 있다.
탑사에는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탑이 80여기가 있다. 동쪽 수봉우리의 암벽에는 화암굴(華岩窟)이 있으며 암굴 안에는 물이 솟아나는데
예로부터 이 물을 마시고 산신에게 빌면 득남을 한다고 전해진다. 은수사에서 서쪽으로 2km 가량 나가면 금당사(今塘祠)가 있고, 그중간에 이산묘가 있다.
탑사.
마이산 탑사는 태고종단에 소속된 사찰로 마이산 속에 쌓여진 신비한 돌 탑무리에 자리잡아 세워진 사찰이다.
이 사찰은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마이산 석탑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이 탑들은 이갑룡(1860~1967) 처사에 의하여 쌓여졌다고 알려져 왔으나
그간 여러 가지 전문(傳聞)과 정황 등으로 미루어 천지탑은 이갑룡처사 이전에 쌓여졌다는 강력한 주장이 제기되었고,
1998년 말 현재 이 문제는 진안군과 탑사측 사이에 소송쟁점이 되어 있다.
1928년의 기록에 의하면 그때까지도 이처사는 불교를 표방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 마이산을 찾는 치성인들의 수가 불어나자 이처사의 기도처이자 치성처인 토막은 어느 때인가 함석지붕으로 새로 지어지고
자연스럽게 삼신상과 불상이 안치되어 사찰화 되어갔다.
1980년 이전까지는 법당에 부처를 모시고 생활관을 겸하는 인법당(因法棠) 처지를 면하지 못하다가 1
980년 태고종단으로 등록하고 1986년 전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인 대웅전을 완공하고
뒤이어 나한전과 동양 최대의 '법고'라는 북을 소장한 종각과 관리사를 건립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다.
중앙탑.
탑사에는 천지탑, 오방탑을 비롯하여 80여 기의 자연석 돌탑들이 쌓여져있다.
뒤로 섬진강발원지 용궁이라 써있는데 강의 발원지는 하구에서 제일 먼곳을 얘기하는데
현재 섬진강 발원지는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의 천산데미아래 데미샘으로 보고있다.
설사 마이산을 발원지로 우긴다쳐도 바로위에있는 은수사의 청실배나무옆에 큰샘이있으니 이곳아라야한다.
아마도 불교종파가 탑사는 태고종이고 은수사는 조계종으로 종파가 달라서 그랬나싶다.
탑사에서 내려다 본 모습.
자연이 만든 최고의 걸작이 마이산이라 한다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은 역시 마이산의 탑군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이산 탑군은 전라북도 지방기념물 제 35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자연석을 차곡차곡 쌓아 마치 송곳처럼 정교하게 만든 탑들은 태산처럼 위엄을 느끼게 한다.
주탑인 천지탑은 부부탑으로 2기로 되어 있으며 높이는 13.5m이고 남.북으로 축조되어있다.
주탑인 천지탑을 정점으로 조화의 극치를 이루며 줄줄이 세워저 있고 팔진법의 배열에 의하여 쌓았다고 전해지며,
당초에는 120기 정도가 있었으나 현재는 80여기가 남아있다.
맨 앞 양쪽에 있는 탑을 일광탑.월광탑이라 하며 마이산 탑군은 태풍에 흔들리기는 하나 무너지지 않는 신비를 간직하고 있으며
탑들을 보면 양쪽으로 약간 기울게 쌓여저 있는것을 볼수 있는데 이는 조탑자가 바람의 방향등을 고려하여 축조한것으로 보인다..
주탑인 천지탑.
천지탑은 기단부에서는 한 몸통으로 축조되어 올라가다가 탑의 1/2쯤 되는 곳에서 남북으로 나뉘어 두 개의 탑으로 쌓여졌으며
탑의 상륜부는 편편한 돌을 뾰쪽하게 쌓아 올린 첨두원추형 석탑으로 높이가 13.5m에 이른다.
이 탑은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여 막돌 허튼 층 쌓기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설계가 정확하고 결구가 치밀하여 보기에도 튼튼하고 우람하게 하늘 높이 솟구쳐 있다.
이 탑의 초기 조탑자가 누구인가?
그 동안 탑사 측에서는 이 탑이 이갑룡처사의 소작(所作)이라고 주장해왔으나 진안군 측에서는 여러 가지 논거를 들어
이갑룡처사가 이 탑을 보수하고 관리는 해왔을 망정 초기 조탑자는 아니라는 주장으로 반론을 제기 하였고,
일각에서는 이 탑은 조선 이태조의 명에 의하여 풍수 비보적 목적으로 조탑된 탑이라는 흥미 있는 주장을 펼쳐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천지탑 설명문.
이갑룡처사상.
이갑룡처사의 생애.
은수사로 오르다 본 갑사전경.
전에 다니던 천지탑 뒷길은 돌담을 쌓아 폐쇄시켜서 갑사 아래로 다시 내려와서 큰길로 돌아 올라야한다.
은수사 입구.
앞에 보이는봉은 숫마이봉.
은수사.
우측이 숫마이봉,좌측이 암마이봉.나무뒤 골짜기위가 천황문이고 넘어쪽에 북문 주차장이 있다.
은수사는 현재 조계종단 소속인데 조선 초기에는 상원사(上院寺)라 했고, 숙종 무렵에는 상원사는 없어지고 사지만 남아 있었는데
그 뒤 누군가 암자를 지어 정명암(正明庵)이라 했다. 은수사 황혜수(黃惠修) 주지스님에 의하면
'正' 은 5획으로 오행, '明'은 일월이므로 정명암 이란 이름은 음양오행의 순환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무튼 정명암도 퇴락하여 없어졌다가 1920년에 이주부(李主簿)라는 분에 의해 중창되었고, 이 때 은수사(銀水寺)로 개칭되었다.
'은수사'란 이름은 한글학회의<지명총람>에 의하면, 태조가 이 곳의 물을 마시고 물이 은같이 맑다고 하였으므로 지어진 것이라 한다.
은수사는 본시 불당 겸 요사채로 쓰인 건물과 그 위 산신도각(山紳度閣)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근래 극락전, 태극전, 대웅전과 요사채를 건립하여 바야흐로 대 가람으로 도약을 기약하고 있다.
이 은수사에는 국내 최대 크기였던 법고(1982년 제작)가 소장되어 있다.
한편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상, 삼신할머니상이 상원사지에서 출토되었다.
또한 은수사 경내에는 천연기념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이산 줄사철 군락이고(천연기념물 380호),
또 하나는 은수사 청실배나무(천연 기념물 386호) 이다.
천연 기념물 386호인 은수사 청실배나무와 약수.
스님이 서있는 이 청실배나무앞길이 금남호남정맥으로 오르는길인데 역시 출입을 막는 금줄이 쳐있다.
이청실배나무는 이성계가 기도하면서 그 증표로 심은 씨앗이 자란 것이란다.
은수사는 겨울철에 고드름이 하늘로 솟는 역고드름 현상으로 유명하다.
은수사 태극전.
지붕이 예사롭지 않아서 들여다 보니 단군영정이 모셔져 있다.
숫마이봉과 암마이봉사이의 천황문 오름길.
천황문.숫마이봉의 화엄굴앞
고개위 천황문 암마이봉앞에 있는 등산안내도.
정맥길인 암마이봉도 2014년까지 출입금지구역이다.
마이산 안내판.
화엄굴 가는길은 폐쇄됐다.
화엄굴 안내판.
천황문에서 본 나도산(530m).
나도 530m나되니 딴곳같으면 형님대접을 받을텐데,
암마이봉(685m)과 숫마이봉(678m) 그늘에 가려 산 취급을 안해준다고 나도산이란다.
마이산은 산 전체가 이런 수성암으로 돼있어 마치 누군가가 세멘트 콘크리트를 부어 놓은 것 같은 모양새다.
은수암을 나오며 뒤 돌아 보니 숫마이봉이 마치 사람얼굴 같기도 하고 코끼리 같기도 하다.
암마이봉 절벽에 쌓은탑들.
금당사 아래의 흑돼지 식당가.
요게 진안의 별미인 깜도야라는 검은토종돼지인 흑돼지 갈비다.
진안은 일교차가 심하고 물맛이 좋아 다른지역보다 육질이 뛰어난 돼지가 많이 생산된단다.
진안은 애저찜이 유명하다는데 그중의 한집으로 버스터미널 근처에 있다.
애저(哀猪.)
원래는 兒猪인데 새끼돼지가 너무 불쌍하다고 애저(哀猪.)라고 표기한단다.
애저요리는 규합총서나 시의전서등 옛문헌에도 나와있는 우리고유의 음식으로
원래는 새끼밴 어미돼지를 잡아 그 새끼집을 통째로 찐 음식으로 돼지새끼집의 고기는 부드럽고 연하여서
노인들을 위한 효도음식으로 활용됐다.
특히 고원지대인 진안의 돼지들은 일교차가 크고 물맛이 좋은곳이라 다른지역보다 육질이 좋아 미식가들의 사랑을 받는단다.
육질은 연한데 값이 좀 비싸다.
요게 2인분인데 4만원하고 공기밥값은 따로다.
양은 1인분 혼자먹기 넉넉치도 않고 보통 돼지고기도 푹 삶으면 연한것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