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0회 대현 율곡 이이선생제 서제
2011.11.24.
2011년 10월 26일 강릉에서 50주년 기념 대현 율곡 이이 先生祭선생제 본제가 거행되었고 전날 오후 6시에 序祭서제가 봉행되었습니다. 필자는 처음으로 종중 수사공을 통하여 대종회에 참가 신청을 하고 다녀왔습니다. 우리 일행을 안내한 분은 대종회 총무를 대신해 다른 분이 인솔하였습니다. 대종회 총무는 다음날 27일 아산에서 있는 행사로 바쁘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개인적인 사정으로 자료를 정리하여 올리는 것이 늦어졌습니다. 나름대로 정리하여 올렸는데 조금 벅차서 부족한 듯합니다. 수정사항 있으면 말씀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이곳의 자료는 오죽헌에 있는 자료입니다. 충무공 이순신, 율곡 이이 상세 자료는 덕수 이씨 대종회 홈페이지(http://www.deoksoolee.or.kr/)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음 요약하여 간단히 올립니다.
오죽헌 입구
주소: 강원 강릉시 죽헌동 201, TEL: 033-640-4457
율곡 이이 동상
오죽헌 가는 길 단풍이 곱게 물들었고 율곡 이이 동상이 있다.
<율곡 이이 할아버지 동상 앞에서 잠시 참배하다.>
신사임당 초충도
신사임당께서 초충도(풀과 벌레를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를
즐겨 그리셨음을 알 수 있다
오죽헌烏竹軒
강릉 오죽헌 보물 제165호 / 소재지: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
오죽헌烏竹軒은 우리나라 어머니의 師表사표가 되는 申師任堂신사임당이 태어나고 또한 위대한 경세가요 철인이며 정치가로서 구국애족救國愛族의 大先覺者대선각자인 栗谷율곡 李珥이이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1504~1551)는 성품이 어질고 착하며 효성이 지극하고 志操지조가 높았다. 어려서부터 경문經文을 익히고 文章문장, 針工침공, 刺繡자수 뿐만 아니라 詩文시문, 그림에도 뛰어나 우리나라 제일의 女流여류 藝術家예술가라 할 수 있으며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賢母良妻현모양처의 구감이 되고 있다.
율곡 이이(1536~1584) 선생은 어려서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워 13세에 進士初試진사초시에 합격하고 明宗명종 19년(1564) 生員試생원시, 式年文科식년문과에 모두 壯元及第장원급제한 후 黃海道황해도 觀察使관찰사, 大司憲대사헌 등과 吏曹이조·刑曹형조·兵曹병조의 判書판서를 역임하였다.
朝鮮조선 儒學界유학계에 退溪퇴계 李滉이황 선생과 쌍벽을 이루는 大學者대학자로서 畿湖學派기호학파를 형성했고 黨爭당쟁의 調停조정, 十萬軍隊10만군대의 養兵양병을 주장하였으며 大同法대동법, 社倉사창의 실시에 노력하였다. 글씨,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文廟문묘에 從祀종사 되었고 宣祖선조의 廟庭묘정에 配享배향되었으며 坡州파주의 紫雲書院자운서원, 江陵강릉의 松潭書院송담서원 등 20여개 서원에 祭享제향되고 있다.
오죽헌은 강릉 儒賢유현인 崔致雲최치운(1390~1440)의 創建창건으로 아들 應賢응현은 사위 李思溫이사온에게 물려주고 이사온은 다시 그의 사위 申命和신명화(사임당의 부친)에게, 신명화는 또 그의 사위 權和권화에게 물려주면서 그 後孫후손들이 관리하여 오던 중 1975년 오죽헌 淨化事業정화사업으로 文成祠문성사, 기념관 등이 건립되어 현재와 같은 면모를 갖추고 선새으이 위업과 교훈을 길이 追仰추앙하게 된 것이다.
自警門자경문
栗谷先生 行狀記율곡선생 행장기
栗谷율곡 李珥이이 선생은 1536년 음역 12월 26일 이곳 烏竹軒오죽헌 夢龍室몽룡실에서 李元秀이원수공과 申師任堂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탄생하였다. 세 살에 말과 글을 익혀 열 살에 「鏡浦臺賦경포대부」를 지었으며, 열여섯 살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삼 년간 시묘한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스무 살에 오죽헌에 들어와 「自警文자경문」을 지어 立身行道입신행도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스물두 살에 성주목사 盧慶麟노경린의 딸과 혼인하였다.
열세 살 진사초시에 장원한 것을 시작으로 스물한 살 漢城試한성시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스물세 살 겨울 별시에서 「天道策천도책」을 지어 그 이름을 외국까지 떨쳤다. 스물아홉에 문과 전시에 장원급제하여 戶曹佐郞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아홉 번의 크고 작은 과거에 모두 장원 급제하여 九度壯元公구도장원공으로 불리기도 했다. 司諫院正言사간원정언·司憲府持平사헌부지평·吏曹佐郞이조좌랑·弘文館校理홍문관교리·右副承旨우부승지·司憲府大司憲사헌부대사헌·藝文館提學예문관제학·四曹사조(호조·형조·병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서른세 살(1568년)에는 千秋使천추사의 書狀官서장관으로 북경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교육자·철학자이자 경세가인 선생은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萬言封事만언봉사』를 지어 정치·경제·사회 개혁을, 『東湖問答동호문답』과 『聖學輯要성학집요』를 지어 군왕의 도를 개진하였다. 또한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군사 십만 명을 양성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鄕約향약을 제정하여 지방자치제를 장려하고, 社倉制度사창제도를 시행하여 빈민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정계를 떠난 후에는 고산구곡에 隱屛精舍은병정사를 세우고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는데, 이때 『擊蒙要訣격몽요결』과 『學校模範학교모범』을 저술하였다. 1584년 마흔 아홉에 세상을 떠났으며, 40년 뒤인 1624년 인조대왕이 '문성'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바깥채와 안채로 들어가는 문
안채·바깥채
조선초기에 지어진 오죽헌 내의 건물들은 1505년 兵曹參判병조참판을 지낸 崔應賢최응현에 의해 전승되어 오다가,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오죽헌(별당)과 바깥채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1996년 정부의 문화재 복원 계획에 따라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던 곳이고 바깥채는 바깥주인이 거처하던 곳이다. 바깥채의 툇마루 기둥에 걸려 있는 柱聯주련은 秋史추사 金正喜김정희의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이다.
바깥채
바깥채 앞마당
안채
덕수 이가 집안의 여인들
덕수 이가 부녀회 회원들로 행사 준비로 바쁘다.
文成祠문성사
烏竹軒오죽헌
夢龍室몽룡실
<신사임당 할머니께 참배하였다>
오죽헌 내부
교훈되는 글들이 보인다.
서제 봉행 모습
오후 6시가 되자 序祭서제가 봉행되었다.
각 언론사와 단체에서 나와서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