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물(物)의 이(理)’와 ‘심(心)의 이(理)’와의 통일적인 파악에는 아직 불충분한 점이 있었다. 육상산(陸象山)이나 명(明)의 왕양명(王陽明)이 그 정곡을 찔러 비판했다.
후대에 미친 영향
주자사상(朱子思想)이 송대 이후 끼친 영향은 지극히 크다.
주자학은 주자의 생전에 있어
지방관적, 재야적(在野的) 입장에서의 사상을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원(元)·명(明)을 거쳐 청조에 이르기까지 관학적(官學的)인 아카데미즘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자학은 조선이나 일본(日本)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주자의 사상이 봉건사회에 있어서 지배계급의 상하적 신분의 확립을 지향하는
논리라고도 하지만,
그 학식·논리 구성·학문적 태도는 의연히 중국사상 내지 동양사상의 해명에 있어
중요한 지위를 점거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기도 하다.
한국의 성리학 수용
한국에서는 고려시대에 안향(安向)이《주자전서》를 들여와 연구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언적·이황·이이·기대승·김장생 등 뛰어난 학자들이 배출되면서,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여 정신적인 면과 도덕적인 면을 중시하는 주리설과 인간의 감성을 중시하고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주기설 등이 나오게 되었다. 주리설은 영남지방에서 발전하여 '영남학파'라고 하는데, 이언적·이황·유성룡·김성일로 이어졌으며, 주기설은 기호지방에서 발전하여 '기호학파'라고 하는데 서경덕·기대승·성혼·이이에 이르러 완성되었고, 김장생 등에게 이어졌다.
자는 무숙(茂叔). 시호는 원공(元公). 주염계(周濂溪)라고도 한다. 중국의 사상 가운데 거의 1,000년 동안 국가의 이념으로 자리잡았던 이학(理學)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또한 부분적으로 신도가(新道家)를 기초로 하여 유교를 다시 체계화했다.
그는 고관의 집안에서 태어나 거의 평생을 고위관직에 몸담았다. 장시[江西]의 남강군 지사(知事) 등을 지내다가 만년에는 루산 산[盧山] 롄화 봉[蓮花峯] 밑에서 은거했다. 관직에 있으면서도 늘 철학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유교사상을 재구성하면서 도가의 교의와 〈주역 周易〉에 바탕을 두었다. 2권의 주요저서 가운데 하나인 〈태극도설 太極圖說〉은 전체 250여 자로 된 짧은 책인데, 여기에서 "만물의 근원은 태극이며, 태극이 실제로 만물을 형성한다"는 사상에 근거한 일종의 형이상학을 제시했다. 우주에 대한 도교의 설명을 창조물의 진화적 과정을 설명한 〈주역〉의 개념과 결합시켰다. 즉 태극(이것은 동시에 無極임)으로부터 음(陰)과 양(陽)이 생겨나고, 음양의 상호작용으로 5행(五行:金·木·水·火·土)이 일어난다. 음양과 5행이 합하여 하나가 됨으로써 건(乾)과 곤(坤), 즉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이 생겨나고, 바로 여기에서 차례로 만물이 발생·진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음양5행의 과정에서 사람만이 '가장 빼어남'(秀靈)을 얻는다. 그리고 사람이 외부의 대상에 반응할 때 사람의 생각과 행위에서 선악의 구분이 생겨난다.
총 40장으로 이루어진 〈통서 通書〉는 유교 교의를 다시 해석하여 성리학의 중심사상인 이학의 바탕을 마련했다. 그에 의하면 성인(聖人)은 외부의 대상에 반응할 때 5상(五常:仁·義·禮·智·信)과 주정(主靜)에 따라서 행한다. 사람의 도덕성의 기초는 신중함(愼)에 있고, 신중함을 통해 사람은 선악을 구분하며 자신을 완전하게 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
간단명료하고 체계적인 형이상학을 통해 유교 이학의 기초를 세웠는데, 이는 이후 성리학을 소생시키고 체계화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사상은 이후 주희(朱熹:1130~1200)가 보다 체계적으로 성리학을 전개하는 데 바탕이 되었다. 그의 영향으로 〈주역〉은 이후 주희와 그밖의 남송(南宋) 성리학자들에 의해 위대한 유교 경전으로 존중받게 되었다.
정호·정이 형제의 철학은 일반적으로 함께 묶여 생각되지만, 그들의 사상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정호는 이학의 이상주의학파에 영향을 미친 반면, 정이는 합리주의학파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이 서양에서 잘 알려진 것처럼 중국에서는 "원칙은 하나이지만 그 원칙의 발현은 많다"는 정이의 말이 유명하다. 정호는 젊었을 때 불교와 도교에 관심을 가졌다. 이후 유교를 공부하여 문관시험에 합격했으며 고위직에 올랐다. 그러나 왕안석(王安石 : 1021~86)의 급진적인 개혁에 반대하여 관직에서 파면되었다. 허난에서 동생 정이와 합류했으며, 그들 주위에 문하생이 몰려들었다. 정이는 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잠시 숭정전설서(崇政殿說書)를 지냈으나 엄격한 도덕관념으로 인해 곧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멀어져서 자리를 물러났다. 그는 거의 평생 동안 관직에 나가는 것을 거부했으며,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계속 비판했다. 그결과 1097년 토지를 몰수당하고 강의를 금지당했으며, 중국의 남서쪽에 위치한 푸저우[福州]로 귀양갔다. 3년 뒤에 사면받았으나 1103년 다시 견책을 받았다. 1106년 2번째 사면을 받았으나 얼마 후 죽었다.
이 두 형제는 주로 자신들이 불교나 도교 저작으로부터 성리학에 차용한 사상인 이(理)의 개념에 관한 철학을 확립했다. '이'는 기본 동력, 보편적 법칙, 모든 존재의 기초가 되면서 통제하는 진리 등으로 정의된다. 그들 모두 '이'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정신적인 교화를 위한 최상의 방법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정호는 차분한 내성(內省)을 강조하여, 원초적 상태에서 인간은 우주와 일체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그는 사색을 강조하여, 육구연(陸九淵 : 1139~93)과 왕양명(王陽明 : 1472~1529)이 창시한 후기 이학의 이상주의파에 영향을 미쳤다. 정이의 철학은 원래 도학(道學)으로 불렸다가 후에 이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형과는 달리 이를 발견하는 길은 이가 존재하는 우주의 무수한 사물을 탐구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정이는 연역법, 귀납법, 역사와 다른 원칙에 대한 연구, 인간사의 참여 등 많은 탐구방법을 신봉했다. 정이가 죽은 뒤 10년 후 주희(朱熹 : 1130~1200)는 정이의 사상을 확대시켜 정주학파 (程朱學派)로 발전시켰다( 정주학파). 이 사상은 1911년 신해혁명 이전까지 학계에서 그 권위를 유지했다. 정호·정이 형제의 저술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그들이 쓴 단편들이 〈유서 遺書〉·〈외서 外書〉·〈취언 聚言〉 등에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명도문집 明道文集〉에는 정호의 저작이 한결 완벽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정이의 저작은 〈이천문집 伊川文集〉·〈경설 經說〉·〈이천〉에 수록되어 있다. 현존하는 그들의 저술은 1606년에 출판된 〈이정전서 二程全書〉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주희는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유교 교육을 받았다. 18세 때 대과(大科)에 급제했는데, 당시 그 시험에 급제한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35세였다. 그가 맡은 첫번째 관직(1151~58)은 푸젠 성 동안(同安)의 주부(主簿)였다. 이곳에서 조세·감찰 업무를 개혁하고 지방에 있는 서원의 서고(書庫)와 학칙을 개선했다. 또한 그때까지 없었던 엄격한 의례와 관혼상제의 규율을 제정하는 등 여러 개혁에 착수했다. 동안으로 부임하기 전에 이동(李侗)을 찾아갔는데, 그는 송 유학의 전통을 지킨 사상가로서 주희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1158년 주희는 그를 다시 방문했고, 1160년에는 수개월 동안 그와 함께 지내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11세기에 성리학자들은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 대항하여 새로운 형이상학을 제창하면서 거의 1,000년간에 걸쳐 실추되었던 유학의 학문적·사상적인 우위성을 회복하게 되었는데, 이동은 그 가운데 가장 유능한 후계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영향을 받아 주희는 유교에 전념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동안에서 주부를 역임한 뒤 주희는 1179년까지 다른 관직을 맡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에게 보낸 상소문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꾸준히 발표했다. 공적인 일에 관여하기는 했지만 조정의 공직을 맡는 일은 계속 거부했다. 그 이유는 당시의 권력자와 그들의 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파당정치에 대해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정의 한직을 계속 맡음으로써 교사와 학자로서의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가 이 시기에 보낸 공식 서한과 당시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던 친구·학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에 그의 사상과 학문은 점점 깊어졌다. 예를 들면 1175년에 그는 철학자인 육구연(陸九淵)과 유명한 철학논쟁을 벌였으나 서로 상대방을 설복시킬 수는 없었다. 육구연은 내재성(內在性)의 절대가치를 강조한 반면, 주희는 책을 통해 배우는 것과 함께 연구·조사의 가치를 강조했다. 이같은 견해를 충실히 이행하여 그는 많은 저작을 남겼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주돈이(周敦頤 : 1017~73), 장재(張載:1020~77) 등의 논문들을 편찬하면서 이 철학자들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고 이들의 철학을 집대성하여 자신의 철학을 완성시켰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4명의 사상가들은 맹자가 죽은 후에 없어진 '도'(道)의 전통을 회복시켰다고 한다. 1175년 그와 친구 여조겸(呂祖謙:1137~81)은 이 4명의 사상가들의 저작에서 뽑은 문장들을 집대성한 〈근사록 近思錄〉을 편찬했다. 이 시기에 주희는 〈논어〉와 〈맹자〉에 관한 집주(集注)를 저술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나타냈는데, 이 집주는 모두 1177년에 완성되었고 그후 중국·한국·일본 등의 지식인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주희는 역사에도 깊은 흥미를 보여 사마광(司馬光)의 역사서인 〈자치통감 資治通鑑〉의 축약과 재편집을 지휘했다(→ 색인 : 역사편찬). 그 노력의 결과로 1172년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이 완성되어 동아시아 전역에서 널리 읽혔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최초로 간행된 중국역사서로서 J.-A.-M. 무아리아크 드 마야가 쓴 〈중국통사 Histoire générale de la Chine〉(1777~85)의 토대가 되었다. 이 책은 나중에 정부에서 실행하는 도덕적 원칙의 귀감이 되었다. 1179~81년 장시 성[江西省] 난캉[南康]의 지사(知事)로 근무하면서 주희는 그 기회를 이용, 9세기에 건립되어 10세기에 번성했다가 그뒤 폐허가 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재건했다. 주희에 의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된 이 서원은 그후 8세기에 걸쳐 그 명성을 유지했다. 서원들은 성리학이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1188년 주희는 황제의 인품이 국가 안녕의 기반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한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도덕적인 정부를 강조한 책인 〈대학 大學〉에서는 황제가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면 뒤이어 전세계가 도덕적으로 변모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1189년 이 책에 대하여 중요한 주석을 달았고 평생 동안 이 주석작업을 계속했다. 마찬가지로 1189년에는 〈중용 中庸〉에 대한 주석서도 써냈다. 〈대학〉·〈중용〉이 〈논어〉·〈맹자〉와 함께 유교 교과과정의 기본서인 4서(四書)에 편입된 것은 대체로 주자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주희는 만년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고위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과감한 직언, 소신 있는 의견, 부패와 사리사욕이 판치는 정치에 대한 비타협적인 공격 등으로 인해 파면되거나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 관직으로 쫓겨났다. 만년에 이르러서도 정적(政敵)인 한탁주(韓胄侂)가 그의 학설과 행동에 대해 중상모략을 하여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도 정치적인 명예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나 그가 죽은 뒤에 곧 회복되었다. 1209, 1230년에는 그에게 시호가 내려졌고 1241년에는 그의 위패가 정식으로 공자사당에 모셔졌다. 후대에는 주희가 비판했던 것보다 더 전제주의적인 통치자들도 조정에 대한 주희의 정치적 비판과 이성적인 자세에는 귀기울이지 않으면서도 그의 철학체계 만큼은 유일한 관학(官學)으로 삼았는데, 이같은 풍조는 19세기말까지 지속되었다.
충렬왕 때 원나라를 왕래하며 직접 주자서(朱子書)를 베껴오고,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는 등 성리학의 도입과 보급에 힘썼다. 본관은 순흥(順興). 초명은 유(裕). '향'(珦)자가 조선 왕조 문종의 이름자와 같았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모두 초명으로 불렀다.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관직생활
아버지는 밀직부사 부(孚)이며, 어머니는 강주우씨(剛州禹氏)이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을 거쳐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여 1272년 감찰어사가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이 되었으며, 그후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郞)·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이 되었다. 1288년 우사의(右司議)·좌승지를 지내고, 1289년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이 되었다. 11월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다. 1294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가 되어 합포진(合浦鎭)에 부임했고, 이어 밀직사사를 거쳐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1298년 충선왕이 왕위에 올라 관제를 개혁할 때 집현전태학사 겸 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集賢殿太學士兼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었다. 그해 8월 왕을 따라 다시 원나라에 다녀왔다. 충렬왕이 복위된 후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올랐다. 1303년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관직생활을 마쳤다.
성리학의 도입과 문교진흥
고려는 고종말에 원과 화친을 맺은 이래 대대로 몽고의 간섭을 받아 독립국가로서의 체면이 손상되었다. 그러나 종전(終戰)에 따른 평화의 회복은 학문과 문교(文敎)의 재건을 가능하게 했다. 충렬왕 때는 이러한 문교부흥의 기운이 소생하기 시작한 시기인데, 특히 원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 원나라는 이미 남송(南宋)을 멸하고 명유(名儒)를 초치하여 유학을 장려하던 시기로서 정주학(程朱學)이 북방에서도 행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안향은 이러한 시기에 원나라를 왕래하며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이를 국내에 들여온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였다. 그는 1289년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를 직접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眞像)을 그려 가지고 돌아왔으며, 1297년에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을 모셨다. 또한 1303년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에 보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제자(諸子)·사서(史書)·주자신서(朱子新書) 등을 구해오게 했다. 아울러 문교진흥을 위해 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를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켜 그 이자로 인재양성에 충당하도록 했다. 1304년에는 섬학전을 설치하여 박사(博士)를 두고 그 출납을 관장하게 했다. 섬학전은 일종의 육영재단으로 당시 국자감 운영의 재정기반이 되었다.
학풍
안향이 전한 성리학은 당시 원나라의 학풍을 주도한 허형(許衡)의 학풍으로 우주론적인 이기(理氣)보다는 심성수양을 중요시하는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는 성인의 도는 일용륜상(日用倫常) 속에서의 충(忠)·효(孝)·신(信)·경(敬)·성(誠)이라는 실천덕목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점에서 불교는 부모를 버리고 집을 떠나 윤리를 경시하고 의리에서 벗어났다고 배척했다. 〈회헌실기 晦軒實記〉의 "내 일찍 중국에서 주회암(朱晦菴:주자)의 저술을 얻어보니 성인의 도를 발명하고 선불(禪佛)의 학을 물리친 것으로, 그 공이 족히 중니(仲尼:공자)에 비할 수 있다. 중니를 배우려면 먼저 주회암을 배우는 것이 제일이다"라고 한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주자가 저술을 통해 불교를 배척한 공이 높으며 공자의 학문은 주자의 학문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주자를 경모하여 주자의 화상을 벽에 걸어두었으며, 자신의 호도 주자의 호인 회암(晦菴)의 '회'자를 따서 회헌이라 했다. 안향으로부터 시작된 성리학은 한국 유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고려의 불교세력과 대항하고 나아가 그것을 압도하면서 조선시대의 건국이념으로까지 성장했다.
그가 죽자 충렬왕은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1318년(충숙왕 5) 왕명으로 초상화가 그려졌는데, 그 모사본이 현재 전하고 있다. 1319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영주 순흥에 그의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는데,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그밖에 장단 임강서원(臨江書院), 곡성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아버지는 찬성사 곡(穀)이다. 15세에 부음(父陰)으로 별장(別將)의 직을 얻고,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가 되었다. 1348년(충목왕 4) 아버지가 원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가 되자 조관(朝官)의 아들로 원나라 국자감의 생원이 되었다. 이색은 이제현(李齊賢)을 좌주(座主)로 하여 주자성리학을 익혔고, 이 시기 원의 국립학교인 국자감에서 수학하여 주자성리학의 요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1352년(공민왕 1) 아버지가 죽자 귀국해 토지문제·왜구대책·학교교육론·이단배척 등의 상소를 올렸다. 1353년 고려의 과거에 합격했으며, 이듬해 정동행성(征東行省) 향시(鄕試)에 1등으로 합격하고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에 가 회시(會試)·전시(殿試)에 합격하여 응봉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應奉翰林文字承事郞同知制誥) 겸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이어 고려에 돌아와 전리정랑(典理正郞)·내서사인(內書舍人)을 지냈다. 1355년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본격화되자 왕의 측근세력으로 활약하면서 〈시정8사 時政八事〉를 올렸는데 그중 하나가 정방(政房)의 혁파였다. 이 일로 이부시랑 겸 병부시랑에 임명되어 문무(文武)의 전선(銓選)을 장악하게 되었다.
신흥유신으로서 현실개혁의 뜻을 가진 이색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반영시키는 가운데 순조롭게 출세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색의 이러한 정치적 성장은 오히려 현실개혁의지를 약화시키고, 자신과 관계를 맺은 부류와 타협하게 되었다. 1357년 전녹생(田祿生)·정추(鄭樞) 등과 더불어 염철별감(鹽鐵別監)의 폐지를 논했다. 새로이 별감을 파견하면 이배(吏輩)들이 농간을 부릴 것이며 별감은 세포(稅布)를 많이 거두어서 왕의 총애를 받으려 하기 때문에, 일반 민은 소금을 받지도 못하고 포만 납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색은 왕이 재추(宰樞)와 대성관리(臺省官吏)를 모은 가운데 별감 파견의 가부를 물으려 하자 병을 칭하여 피했다. 이는 염제신과 같은 권세가가 별감 파견을 주장한 것에 대한 이색의 타협으로서, 다른 간관(諫官)이 이 일로 좌천된 것과 달리 이색은 중임되었다. 또한 1362년 성균시의 합격자를 뽑던 중 왕이 환관(宦官)을 보내어 벽승(嬖僧)의 사패(賜牌)에 어보(御寶)를 찍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색은 처음에 신하들과 의논할 일이라 하여 반대했지만 이내 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찍었다. 사패는 국왕이 충성의 대가로 공신이나 기타 사원에게 설정해주는 토지의 증빙문서였는데, 당시에는 권세가의 토지확대방법으로 이용되어 토지겸병과 수취체계 중첩화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이색은 국왕의 힘에 의해서 자신의 뜻을 계속 관철시키지 못하고 이를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1359, 1361년 홍건족이 침입했을 때 왕을 시종하여 호종공신 1등에 책봉되어 전(田) 100결(結), 노비 20구(口)를 받았다. 또한 아버지에게서 받은 토지·노비와 관직을 통해 얻은 수조지, 그리고 공신전으로 중앙정계에 정치적 지위에 상응하는 경제적 기반도 마련하고 있었다.
1365년 신돈이 등장하고 개혁정치가 본격화되면서 그는 교육·과거 제도 개혁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367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될 때 이색은 대사성이 되어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과 더불어 정주성리(程朱性理)의 학문을 부흥시키고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유신들을 길러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되고 이어 공민왕이 죽자 그의 정치활동은 침체기를 맞았다. 그후 1375년(우왕 1)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판삼사사를 역임했다. 1386년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해에 판문하부사 조민수(曺敏修)의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는데 동지공거 염흥방(廉興邦)이 그를 합격시킬 것을 청했으나 거절했다. 그는 1377년 장경(藏經)을 인성(印成)하고, 1387년 서보통탑(西普通塔)의 탑기(塔記)를 짓는 등 주자성리학자이면서도 불교를 선호하며 긍정하고 있었다.
1388년 위화도회군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고려왕조의 존립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 개혁정치를 희구한 이색은 1389년(공양왕 1) 도평의사사에서의 사전혁파(私田革罷) 논의 때 이숭인·변안렬(邊安烈) 등과 같이 옛 법은 경솔히 고칠 수 없다고 반대했다. 불법적인 대토지소유에 반대하고 있었지만 사전개혁과 같은 급격한 전제개혁에도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위화도회군을 군령을 위반하고 왕의 명령을 거역한 행위로 이해했으므로 그 주체세력이나 동조세력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위화도회군의 중심인물과 동조세력은 당대의 대유(大儒)인 이색과 같은 반대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오사충(吳思忠)·조박(趙璞)·정도전(鄭道傳)의 상소로 인하여 그는 장단으로, 아들 종학(種學)은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후 김저(金佇)의 옥(獄)과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 노선을 같이하는 이숭인·변안렬·우현보(禹玄寶) 등과 더불어 투옥되거나, 금주·여흥 등지로 유배당하는 등 고려 말기의 정치권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색은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고려말에 결당모란(結黨謀亂)한 자로 지목되어 우현보 등 56명과 더불어 논죄되어, 직첩을 빼앗기고 서인(庶人)이 되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장흥에서 석방된 그는 3년간 한산에서 지내고 1394년(태조 3) 오대산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서울로 돌아왔다. 1396년 여주 신륵사(神勒寺)에 가는 도중에 죽었다. 이색은 원나라에서의 유학과 이제현을 통하여 이 시기 선진적인 외래사상인 주자 성리학을 수용했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 말기의 사회혼란에 대처하면서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그는 원의 주자학을 받아들였으므로 그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이(理)·기(氣)·태극(太極)과 같은 주자학의 핵심개념을 사용하여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했고, 주자학의 수양론인 성학론(聖學論)을 전개했다. 그러나 주자학에서 말하는 수양론과 달리 죽음과 인간적 고뇌와 같은 초인간적·종교적 문제는 여전히 불교에 의존했다. 또한 송대의 혈연·의리·도덕·윤리 등을 말하는 도통론(道通論)을 전개한 것이 아니고 원의 형세론적 도통론을 전개했다. 즉 그의 주자성리학의 발원지인 원의 영향과 불교의 영향 속에서 송대의 주자학과 구분되는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저서로 〈목은유고〉·〈목은시고〉 등이 있다. 장단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조선 개국의 핵심 주역으로서 고려 말기의 사회모순을 해결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다. 각종 제도의 개혁과 정비를 통해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다.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고려말의 활동
향리집안 출신으로 고조할아버지는 봉화호장 공미(公美)이고, 아버지는 중앙에서 벼슬하여 형부상서를 지낸 운경(云敬)이다. 어머니는 우연(禹延)의 딸로서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어려서 경상북도 영주에서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개경에 와서 아버지의 친구인 이곡(李穀)의 아들 색(穡)의 문하에서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박의중(朴宜中)·윤소종(尹紹宗) 등과 함께 유학을 배웠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成均試), 1362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충주사록·전교주부·통례문지후 등을 지냈다. 1366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이어 죽자, 영주에 내려가 3년간 여묘(廬墓)하면서 지방 자제들과 동생들을 가르쳤다. 1370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되고 이색이 대사성이 되자, 성균박사가 되었다. 이듬해 태상박사가 되고, 이어 예의정랑이 되었다. 1374년 공민왕이 암살당하자 이 사실을 명나라에 고할 것을 주장하여 이인임(李仁任)의 미움을 받았다. 1375년(우왕 1) 성균사예·지제교가 되었으나, 이인임·경복흥(慶復興) 등이 친원정책(親元政策)으로 돌아가려 하고 원나라 사신이 명나라를 치기 위한 합동작전을 위해 오자, 이를 반대하고 관련되는 업무를 거부하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귀양갔다. 1377년 고향으로 옮겨져 4년간 머물다가 유배가 완화되자 삼각산(三角山) 밑에 초려(草廬:三峰齋)를 지어 제자들에게 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곳 출신 재상(宰相)이 삼봉재를 헐어버려 제자들을 이끌고 부평부 남촌(南村)에 거주했으나 이곳에서도 재상 왕모(王某)가 별업(別業)을 만들기 위하여 헐어버려 다시 김포로 이사했다. 유배·유랑 기간에 그는 초라한 모옥(茅屋)에 살면서 향민(鄕民)과 사우(士友)에게 걸식하기도 하고 스스로 밭갈이도 했다.
1383년 함주(咸州) 막사로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가 세상사를 논하고 그와 인연을 맺었다. 1384년 전교부령으로 있을 때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승습(承襲)과 시호(諡號)를 청했다. 이듬해 성균좨주(成均祭主)·지제교를 지내고, 1387년 남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이듬해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자,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워 밀직부사가 되었다. 조준(趙浚)·윤소종 등과 함께 전제개혁을 추진했는데, 전국의 토지를 공가(公家)에 귀속시켜 민구(民口)수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려는 철저한 개혁을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스승인 이색과 친구인 정몽주와 의견이 달라 멀리하게 되었다. 1389년 11월 이성계·조준 등과 협의하여 우왕과 창왕 부자가 왕씨가 아니라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즉위시켰다. 이 공으로 봉화현 충의군(忠義君)과 윤충논도좌명공신(輪忠論道佐命功臣)에 봉해지고,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으며 공신전 100결과 노비 10명을 받았다. 1390년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윤이(尹彛)·이초(李初)가 이성계가 명을 치려한다고 모함한 것을 변명하고 돌아와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391년 삼군도총제부가 설치되자 우군총제사가 되어 이성계·조준과 함께 병권을 장악했다. 이어 개혁반대세력을 제거하려는 일환으로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척불(斥佛) 상소를 올려 불교 배척의 기치를 들고, 이색과 우현보(禹玄寶) 등을 신우(辛禑)·신창(辛昌) 옹립의 죄를 물어 처형할 것을 상소했다. 그해 9월 평양윤에 임명되었으나 반대세력들이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라고 탄핵하여 봉화로 유배당하고, 이어 나주로 옮겨졌으며 두 아들은 서인(庶人)이 되었다. 이듬해 봄 귀양에서 풀려나 영주로 돌아왔다.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낙마(落馬)하여 부상을 입자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몽주 등에 의해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하여 당사(堂司)의 자리를 도둑질했고, 천근(賤根)을 감추기 위해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모함했다"라는 탄핵을 받고 보주(甫州)의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곧 풀려나 개경으로 소환되어 충의군에 봉해졌다.
조선개국과 개혁정치
1392년 4월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에게 살해되고 반대세력이 제거되자, 7월 조준·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왕조를 개창했다. 개국직후 17조목의 편민사목(便民事目)에 관한 태조의 교지(敎旨)를 지어 새 왕조의 국정방향을 제시했다. 이어 개국공신 1등으로 문하시랑찬성사·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겸판상서사사·보문각대학사·지경연예문춘추관사·겸의흥친군위절제사를 겸직하여 정권과 병권을 장악했다. 같은 해 10월 사은사 겸 계품사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알렸다. 1393년(태조 2) 7월 문하시랑찬성사로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여진족을 회유했으며, 〈문덕곡 文德曲〉·〈몽금척 夢金尺〉·〈수보록 受寶〉 등의 악사(樂詞) 3편을 지어 왕에게 창업의 쉽지 않음과 수성(守成)의 어려움을 반성하게 하는 자료로 삼게 했다. 1394년 1월 판의흥삼군부사로 병권을 장악하여 병제개혁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3월 경상·전라·양광 삼도도총제사가 되었다. 조선왕조의 제도와 예악(禮樂)의 기본구조를 세운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부병제(府兵制)의 폐단을 논한 〈역대부병시위지제 歷代府兵侍衛之制〉를 찬진했다. 한편 태조가 세자로 책봉한 강비(康妃) 소생 방석(芳碩)의 세자이사(世子貳師)로 교육을 담당했다. 1394년 8월부터는 고려의 구신과 세족이 도사리고 있는 개경을 피해 새로운 도읍 건설을 추진하여, 서울의 궁궐과 문의 이름을 짓고 수도의 행정분할도 결정했다. 그해 〈심기리편 心氣理篇〉을 지어 불교·도교를 비판하고 유교가 실천 덕목을 중심으로 인간문제에 가장 충실하다는 점을 체계화했다. 1395년 1월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 高麗國史〉를, 6월에는 정치제도·재상·대관(臺官)·간관(諫官)·부병제도·감사(監司) 등의 임무와 실례를 논하고 방침을 제시한 〈경제문감 經濟文鑑〉을 찬진했다. 1396년 명나라에서 그가 추진하던 공료(攻遼)운동에 불안을 느껴 표전문(表箋文)을 트집 잡아 명나라에 입조(入朝)하라는 압력을 가했으나, 병을 이유로 거부했다. 1397년 사은사가 가지고 온 자문(咨文)에서 명나라는 그를 '화(禍)의 근원'이라고 했다. 그해 6월 요동정벌을 목적으로 진도(陣圖) 훈련을 하면서 왕에게 출병을 요청했으나 조준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그해 12월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주군(州郡)의 구획을 확정하고 성보(城堡)를 수리했으며 호구와 군관(軍官)을 점검했다. 또한 〈경제문감별집 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하여 군주의 도리를 제시했으며, 〈불씨잡변 佛氏雜辨〉을 저술하여 불교의 여러 이론을 비판했다. 1398년 진법 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정벌을 추진하고, 태조로 하여금 절제사를 혁파하여 관군(官軍)으로 합치고 왕자와 공신들이 나누어 맡고 있던 군사지휘권을 박탈하게 하고, 이방원을 전라도로, 이방번(李芳蕃)을 동북면으로 보내려 했으나, 8월 이방원 세력의 기습을 받아 방번·방석·남은·심효생(沈孝生)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방원의 난). 이때 네 아들 가운데 유(游)가 살해되고, 담(湛)은 집에서 자살했다. 종친을 모해(謀害)했다는 죄명이 씌워졌다.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이다.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 〈조의제문〉이 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출신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季昷)·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아버지는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낸 숙자(叔滋)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사재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이다. 김종직의 가문은 고려말 선산의 토성이족(土姓吏族)에서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 대에 이르러 박홍신 가문과 혼인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숙자는 고려말·조선초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던 길재(吉再)의 제자로,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운 종직은 길재와 정몽주(鄭夢周)의 학통을 계승한 셈이다. 1446년(세종 28) 과거에 응시, 〈백룡부 白龍賦〉를 지어 김수온(金守溫)의 주목을 받았으나 낙방했다. 그뒤 형 종석(宗碩) 등과 함께 황악산(黃嶽山) 능여사(能如寺)에 가서 독서에 힘써 학문을 크게 성취했다. 1451년(문종 1) 울진현령 조계문(曺繼文)의 딸이며 종직의 문인인 조위(曺偉)의 누나와 결혼했다.
관직생활
1453년(단종 1) 태학에 들어가 〈주역 周易〉을 읽으며 주자학의 원류를 탐구하여 동료들의 경복(敬服)을 받았다. 이해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서 저작·박사·교검·감찰 등을 두루 지내면서, 왕명에 따라 〈세자빈한씨애책문 世子嬪韓氏哀冊文〉·〈인수왕후봉숭왕책문 仁壽王后封崇王冊文〉 등을 지었다. 1464년 세조가 천문·지리·음양·율려(律呂)·의약·복서(卜筮) 등 잡학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을 비판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로 기용되면서 관인(官人)으로서 본격적인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1467년 수찬(修撰), 이듬해 이조좌랑, 1469년(예종 1) 전교서교리로 벼슬이 올라갔다. 1470년(성종 1) 예문관수찬지제교(藝文館修撰知製敎)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늙은 어머니를 모신다고 하여 외직으로 나가 함양군수가 되었다. 1471년 봉열대부(奉列大夫)·봉정대부(奉正大夫), 1473년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올랐으며, 1475년에는 중직대부(中直大夫)를 거쳐 함양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했다. 이듬해 잠시 지승문원사를 맡았으나 다시 선산부사로 자청해 나갔다. 함양과 선산 두 임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관혼상제를 시행하도록 하고, 봄·가을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양노례(養老禮)를 실시하는 등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수립하는 데 주력했다.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승언(李承彦)·홍유손(洪裕孫)·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제자들을 기른 것도 이때의 일이다. 1482년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응교지제교(弘文館應敎知製敎) 겸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에 임명되었으며, 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 등 승정원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이어서 이조참판·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과 경기도관찰사 겸 개성유수,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 병조참판 등을 두루 지냈다. 이 무렵부터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면서 사림파(士林派)를 형성,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제자들과 함께 유향소(留鄕所)의 복립운동(復立運動)을 전개하여 1488년 그 복립절목(復立節目)이 마련되었는데, 이는 향촌사회에서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정치적 진출을 노리는 것이기도 했다. 1485년 사복첨정(司僕僉正) 문극정(文克貞)의 딸인 남평문씨(南平文氏)와 재혼했다. 1489년에는 공조참판·형조판서에 이어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고 고향 밀양에 돌아가 후학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1492년 사망하여 부남(府南)의 무량원(無量院) 서산(西山)에 묻혔다.
조의제문
6년 뒤인 1498년(연산군 4)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수록한 〈조의제문 弔義帝文〉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술도 불살라졌다. 항우가 초(楚)나라 회왕(懷王:義帝)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였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래의 집권세력인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자신들의 정치행태를 비판해왔던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내세운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이어져 김일손·권오복(權五福) 등이 죽음을 당하고 정여창·김굉필·이종준(李宗準) 등이 유배되는 등 일단 사림파의 후퇴를 가져왔다. 중종이 즉위한 뒤 죄가 풀리고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689년(숙종 15)에는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의 건의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한국 유학사상 본격적인 철학문제를 제기하고, 독자적인 기철학(氣哲學)의 체계를 완성했다. 당시 유명한 기생 황진이와의 일화가 전하며, 박연폭포·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화담(花潭).
가계 및 생애
할아버지는 순경(順卿), 아버지는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낸 호번(好蕃)이다. 송도(松都:지금의 개성) 화정리(禾井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양반에 속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무반 계통의 하급관리를 지냈을 뿐, 남의 땅을 부쳐먹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18세에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 장에 이르러 "학문을 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지 않는다면 글을 읽어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여, 독서보다 격물이 우선임을 깨달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그 이치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이때문에 건강을 해쳐 1509년(중종 4) 요양을 위해 경기·영남·호남 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1519년 조광조에 의해 실시된 현량과에 으뜸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화담에 서재를 지어 연구를 계속했다. 1522년 다시 속리산·지리산 등 명승지를 구경하고, 기행시 몇 편을 남겼다. 그는 당시 많은 선비들이 사화로 참화를 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1531년 어머니의 명으로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1540년 김안국(金安國) 등에 의해 조정에 추천되고, 1544년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면서 성리학 연구에 전력했다. 이해에 병이 깊어지자 "성현들의 말에 대하여 이미 선배들의 주석이 있는 것을 다시 거듭 말할 필요가 없고 아직 해명되지 못한 것은 글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제 병이 이처럼 중해졌으니 나의 말을 남기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고 하면서 〈원이기 原理氣〉·〈이기설 理氣說〉·〈태허설 太虛說〉·〈귀신사생론 鬼神死生論〉 등을 저술했다. 이듬해 중종이 죽자 대상복제(大喪服制)에 대한 상소를 하여,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3년상을 3개월로 고칠 것을 주장했다.
기일원(氣一元)의 철학
서경덕의 철학은 만물의 근원과 운동변화를 기(氣)로써 설명하고, 그 기를 능동적이고 불멸하는 실체로 본 데 특징이 있다. 격물을 중시했던 그의 학문방법은 독창적인 기철학의 체계를 세우는 바탕이 되었다. 그는 세계의 시원을 허(虛) 또는 태허(太虛)라고 보았으며, 이를 선천설(先天說)로 설명했다. "태허는 말끔하여 형체가 없다. 이를 선천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는 끝이 없고 과거에 시초가 없었으며 앞으로도 한끝을 모른다. 말끔하게 허하고 고요한 것이 기의 시원이다. 끝없이 넓은 우주에 꽉 들어차서 빈틈이 없고 털끝 하나도 드나들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끌어당기려면 허하고 잡으려면 잡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사실은 차 있으니 없다고 할 수 없다. 한계가 없는 것을 태허라 하고 시초가 없는 것을 기라고 하니 허가 바로 기이다. 허가 본래 무궁하고 기 역시 무궁하니 기의 근원은 처음부터 하나이다." 여기에서 그가 말한 태허는 곧 물질적인 기이며 기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만물의 근원을 기로 설명했을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정신, 지각까지도 포함한 천지만물은 기의 취산(聚散)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담연청허하면서 보편타당한 선천의 기는 본래 하나이지만 그 하나는 둘을 함유하여 낳고 둘은 그 자체의 능력으로 변화의 작용을 한다. 둘은 곧 음양·동정(動靜)·감리(坎離) 등을 가리킨다. 둘을 낳는 하나는 곧 그 음양이나 감리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담연주일(淡然周一)한 기이다. 하나의 기가 나뉘어 음양이 될 때 양이 변화를 극한 것이 하늘이 되고 음이 모이고 응결한 것의 극이 땅이 된다. 또 양의 정수가 맺혀 해가 되고 음의 정수가 맺혀 달이 된다. 나머지 기운들이 하늘에서는 별이 되고 땅에서는 물과 불이 된다. 그는 이런 과정을 선천에 대해서 후천(後天)이라고 했다. 선천에서 후천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기의 운동이다. 그런데 그는 이 기의 운동이 다른 무엇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기 스스로 능히 하는 동시에 스스로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이를 '기자이'(機自爾)라고 표현했다.
한편 그는 기의 취산에 따라 무형의 기와 유형의 기로 구별하여 보았다. 시원적인 기로서의 태허는 감각할 수 없는 무형의 기이며 천지만물을 형성하는 기는 유형의 기라고 했다. 즉 기가 쌓이면 유형의 기가 되고 흩어지면 무형의 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을 전개했다. 물질적인 기는 시작도 종말도 없으며, 따라서 창조도 소멸도 없다는 전제로부터 구체적인 사물은 소멸되어도 그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기는 흩어질 뿐 소멸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이를 기에 선행하는 1차적 존재라고 주장한 주희의 견해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는 더 나아가 사생귀신은 오직 기의 취산에 불과하며, 그 취산은 결코 유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순환의 과정임을 설명했다. 한편 인성론에서는 전통적인 성선설을 주장하고,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수양의 방법으로 주정(主靜)을 제시했다. 또한 현실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대상복제에 대해 올린 상소에서 왕릉이나 기타 묘지가 무분별하게 지정되고 확장되는 데 따른 폐단과 왕릉의 축조를 위한 채석의 노역동원에 따른 백성들의 피해가 극심함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그의 학설은 당시 주조를 이루었던 정주학의 이론과는 다른 독창적인 부분이 많았으므로, 이황·이이의 비판을 받았다. 이황은 정주의 학설을 유일한 표준으로 삼았으므로, 서경덕의 기론에 대해 그가 이를 잘못 풀이했다고 비판했다. 이황은 "그의 견해는 별달리 정밀하지 못하다. 그의 학설을 보면 1편도 병통이 없는 것이 없다"고까지 비판했다. 이이도 "퇴계는 모방을 주로 하여 매끄럽게 꿰뚫는 맛이 없는 반면, 화담은 총명이 지나쳐서 스스로 얻은 견해가 많지만, 그 자득의 견은 더 향상이 되지 못하고 그 위에 이통기국(理通氣局)의 일절(一節)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 깨달은 것은 방만하기 쉬워 잃는 바가 있으므로 차라리 이황의 모방을 본받는 편이 낫다고 했다. 그러나 이이는 서경덕의 깨달음이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묘(妙)를 분명하게 터득한 것으로 이황과 같이 독서에 의존하는 학자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칭송했다. 더욱이 이이는 서경덕의 기자이설을 취하여 이를 형식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의 이러한 경향은 그 학파에 이어져 주기적(主氣的) 경향을 대표하게 되었다. 서경덕의 학설은 우리나라 성리학에서 최초로 기일원론의 체계적인 전개를 시도한 것이었으며, 이이 등 주기론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문하에서 박주(朴洲)·박순(朴淳)·허엽(許曄)·남언경(南彦經)·민순(閔純)·이지함(李之菡)·이구(李球)·박민헌(朴民獻)·홍인우(洪仁祐)·장가순(張可順)·이중호(李仲虎) 등 많은 학자·관인들이 배출되었다. 1567년(명종 22) 호조좌랑에, 1575년(선조 8)에는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화담집〉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이황과 더불어 영남 사림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생원 안습(安習)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승문원 판교 언형(彦亨), 어머니는 인주이씨이다. 김우옹·곽재우는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사위이다.
조식은 외가에서 태어나 살다가 아버지의 벼슬살이에 따라 5세 무렵 서울로 이사했다. 2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의 임지인 의흥(義興)·단천(端川) 등 외지에 살기도 했으나 대개 서울에 살았다. 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25세 때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2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에 돌아와 지내다가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했다. 1538년 유일(遺逸)로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1543년에는 경상감사 이언적이 만나기를 청해도 응하지 않았다. 4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 후 계속 고향 토동에 머물며 계복당(鷄伏堂)과 뇌용정(雷龍亭)을 지어 거하며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제자들 교육에 힘썼다. 1548년 전생서 주부(典牲暑主簿), 1551년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1553년 사도시 주부(司導寺主簿), 1555년 단성현감(丹城縣監), 1559년 조지서 사지(造紙暑司紙)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했다. 단성현감 사직시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551년 오건(吳健)이 문하에 입문한 이래 정인홍(鄭仁弘)·하항(河沆)·김우옹(金宇)·최영경(崔永慶)·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61세 되던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지금의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1566년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을 제수받고 명종의 부름에 응해 왕을 독대(獨對)하여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돌아왔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한 뒤 여러 차례 그를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568년 선조가 다시 불렀으나 역시 사양하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대사 戊辰對事〉를 올렸다. 여기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1569년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사퇴했고, 1570년 선조의 소명(召命)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571년에는 선조가 식물(食物)을 하사하자 이를 받고 사은소(謝恩疏)를 올렸다. 1572년 72세로 죽자 조정에서는 대사간에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했다. 1576년 조식의 문도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덕산서원(德山書院)을 세운 뒤 그의 고향인 삼가에도 회현서원(晦峴書院)을 세웠고 1578년에는 김해의 탄동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웠다. 광해군 때 대북세력이 집권하자 조식의 문인들은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세 서원 모두 사액되었다. 또한 조식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조식이 생존했던 시기는 사화기(士禍期)로 일컬어질 정도로 사화가 자주 일어난 때로 훈척정치(勳戚政治)의 폐해가 가장 극심했다. 그는 성년기에 2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훈척정치의 폐해를 직접 보았다. 기묘사화 때는 숙부 언경(彦卿)이 죽고 아버지는 좌천되었으며, 을사사화 때는 성우(成遇)·송인수(宋麟壽) 등 많은 친구들이 희생을 당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그는 1, 2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곧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자처하면서 오로지 학문과 제자들 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사상은 노장적인 요소도 다분히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강조했으며,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敬)과 '의'(義)를 강조했다(→ 색인 : 남명학). 그가 늘 지니고 있던 검명(劍銘)에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外斷者義)라고 새겨놓았듯이 그의 철학은 바로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부 사물을 처리해나간다는 '경의협지'(敬義夾持)를 표방한 것이었다. '경'은 내적 수양을 통한 본심(本心)의 함양에 주력하게 되는 반면 '의'는 외적 행위의 단재(斷裁)를 통한 사욕(私欲)의 제거에 강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일상생활에서는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일체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 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했다. 학문방법론에 있어서도 그는 초학자에게 〈심경 心經〉·〈태극도설 太極圖說〉·〈서명 西銘〉 등 성리학의 본원과 심성에 관한 내용을 먼저 가르치는 이황의 교육 방법을 비판하고, 〈소학〉·〈대학〉 등 성리학적 수양에 있어서 기초적인 내용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당시 이황과 기대승 등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기심성(理氣心性) 논쟁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이를 '하학인사'(下學人事)를 거치지 않은 '상달천리'(上達天理)로 규정하고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단계적·실천적인 학문방법을 주장했다(→ 색인 : 사단칠정논쟁). 그는 출사를 거부하고 평생을 처사로 지냈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가 남긴 기록 곳곳에 당시 폐정에 시달리는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으며, 현실정치의 폐단에 대해서도 준엄한 비판과 적절한 대응책을 제시하는 등 민생의 곤궁과 폐정개혁에 대해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난세(亂世)에는 출사하지 않고 처사로 일관하여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고, 반궁체험(反窮體驗)을 중시하여 실천 없는 공허한 지식을 배격하고, 의리정신을 투철히 하여 비리를 용납하지 않으며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던 조식의 사상은 그의 문인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합천 등지에 우거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국가의 위기 앞에 투철한 선비의식을 보여주었다. 조식과 그의 문인들은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황의 '경상좌도' 학맥과 더불어 영남유학의 두 거대한 봉우리를 이루었으나, 선조대에 양쪽 문인들이 정치적으로 북인과 남인의 정파로 대립되고 정인흥 등 조식의 문인들이 광해군 때 대북정권의 핵심세력으로 참여한 탓에 인조반정 후 정치적으로 몰락한 뒤 조식에 대한 폄하는 물론 그 문인들도 크게 위축되어 남명학은 그후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 저서로는 문집인 〈남명집〉과 독서를 하다가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학기유편 學記類編〉이 있다.
경학에서부터 경세론에 이르기까지 반주자학적인 유학사상을 전개하여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체계화하는 데기여했다.
출신 및 관직생활
본관은 반남. 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潛叟)·서계초수(西溪樵叟)·서계(西溪). 할어버지는 좌참찬 동선(東善)이며, 아버지는 이조참판 정(炡)이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양반가문 출신이나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매우 곤궁한 환경에서 자랐다. 홀어머미 밑에서 원주·안동·천안 등지로 떠돌아다니다가 10세 때 비로소 글을 배웠는데도 재주가 뛰어나 주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17세 때 남구만(南九萬)의 누이와 결혼하여 처가를 왕래하며 처남 남구만, 처숙부 남인성(南仁星)등과 함께 학업을 계속했다.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장원을 하고 성균관전적이 됨으로써 벼슬길에 올랐다. 그뒤 예조좌랑·병조좌랑·춘추관기사관을 거쳐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병조정랑, 홍문관교리 겸경연시강관, 함경북도평마평사를 두루 지냈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베이징[北京]에 다녀오고, 1670년에는 잠시 통진현감을 지냈다.
만년
그는 소론계열로서 노론계의 송시열과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었다. 특히 당시 정치상의 주요사안이었던 대청(對淸) 문제에서 온건론자로 간주되어 송시열을 비롯한 강경론자들로부터 '오사'(五邪) 가운데 하나라고 지탄을 받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당대의 대학자·대정치가이자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과 대립하게 되자 정치인으로서 그 뜻을 펴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경기도 양주 석천동에 퇴거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강학과 연구에 몰두했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 서인이 다시 득세를 하자, 사실상 야인이었던 그에게 호조참판·공조판서·대사헌·예조판서·이조판서·지중추부사 등 요직이 제수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1702년(숙종 28) 이경석(李景奭)의 비문을 지은 것이 계기가 되어 정치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 비문에는 송시열의 인품이 이경석의 인품보다 못하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노론계를 자극하여 거센 반발을 일으켜 결국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 형제를 위시한 김진옥(金鎭玉)·정호(鄭澔) 등과 성균관 유생 홍계적(洪啓迪) 등 180여 명의상소로 삭탈관직당하고 옥과(玉果)로 유배되었다. 이탄(李坦)·이익명(李翼明)·이인엽(李寅燁) 등 박세당의 문인들의 소청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석천동으로 돌아왔으나 귀환한 지 3개월 만에 죽었다.
반주자학적 경학사상
박세당은 당시 통치이념으로서 확고한 권위를 확보하고 있던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독창적인 학문세계를전개했다. 그의 반주자학적인 경학사상은 만년에 14년에 걸쳐 저술한 〈사서사변록 四書思辨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대학〉·〈중용〉·〈논어〉·〈맹자〉에 대한 주자의 주해에 반기를 들고, 주자의 견해와는 상반되는 자기 나름의 주해를 붙인 것이다.
반주자학적 경전 해석의 주요한 내용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주자가 '인물일체관'(人物一體觀)을 기초로 '천인상감'(天人相感)을 믿었던 데 반하여, 그는 '물아이분관'(物我二分觀)을 기초로 의인화된 하늘과의 상감(相感)을 부인했다. 인간과 분별되고 오직 인간의 역량으로만 영향을 줄 수 있는 자연을 말함으로써, 일종의 '물리학적인 자연관'을 공고히 했다. ② 본성(本性=天理)의 선험적 본구(本具=天命)를 믿음으로써 윤리 도덕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주자와는 달리 본성의 본구를 부인하여 윤리 도덕의 가변성·선택성에 대한 각성의 길을 열어놓았다. ③주자의 현실재론적(現實在論的) 시각을 배격하고 '주기적(主氣的) 경험주의' 철학을 견지했다. ④ 도심(道心) 못지 않게 인욕의 충족도 중요시했다. 이는 백성들의 안정을 위하여 명분론보다 의식주와 직결되는 실질적인 학문이 필요하다는 그의 실학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사서주해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반주자학적 경전이었으므로 그의 학문은 당시 노론계열로부터 "위로는 주자를 모멸하고 아래로는 송시열을 욕되게 했다"는 강한 비판을 받고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반주자학적인 경학사상은 정약용(丁若鏞)에게 이어져 다산경학(茶山經學)의 연원적인 역할을 했다.
노장사상
그의 반주자학적인 사상은 노장사상(老莊思想)에 대한 관심으로도 나타났다. 그는 노장이 말한 '수신'과 '치인'이 유학에서의 의미와 같은것으로 보고, 그 내용을 설명하는 언설의 간결함과 의미의 심오함이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유학의 입장에서 노장을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사상을 끌어내고자 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노장의 용어를 유학의 용어로 대치하여 설명하는가 하면 사상의 내용까지 유학의 의미로 해석했다. 예컨대 노자의 '도'를 '무'로 이해하면서 그것을 또 '이'(理) 즉 '태극'(太極)으로 설명하는 해석이라든지, '자연'이 '본성(천성)대로 하되 지나침이 없는 의미'라는 〈중용〉식의 해석 등이 그것이다. 그는 노장사상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해 문(文)보다 질(質)을 중요시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이러한 노장사상의 성격에 호감을 갖고 그것을 유학이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특히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해석에 집약되어 있는데, 〈도덕경〉의 근본정신이 치자의 지배욕구 포기에 있다고 보고, '무위' 또는 장자의 '무위자연'이란 치자가 사사로운 지배욕구에 얽매이지 않고 무욕의 정치, 곧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데 힘쓸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개혁사상
이러한 실제성 추구의 경학사상은 경세론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일종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문제의식은 정치·경제·국방의 문제에 걸쳐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핵심은 무위도식하면서 당쟁에만 매달려 있는 지배세력인 양반들에게 일반 백성이 수탈당하며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왕이나 대신들이 먼저 성실하고 근검해야 백성들이 살기 좋다는 전제하에서 횡렴(橫斂)의 방지와 조세의 균등화, 병제의 일원화 등을 주장했다. 그리고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정책들이 항시 '허문'(虛文)에 그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실효를 거두는 '무실'(務實)의 정책으로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실사구시의 현실 개혁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 농서 편찬이었다. 그는 조선 전기와는 다른 새로운 농서의 편찬이 요구되던 17세기의 상황에서 한전농업(旱田農業) 중심의 농서 〈색경 穡經〉을 편찬했다. 이 책은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은 경험과 여타의 농서를 토대로 저술한 것인데,구체적인 작물의 재배기술 면에서뿐만 아니라 농업·농학을 보는 안목에 관해서 새로운 문제제기를 했다는 점에서 18세기 농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농학은 〈농가집성 農家集成〉으로 대표되는 주자학적인 사유체계와 지주제 중심의 농업·농학을 벗어나 소농층이 위주가 되는 농업·농학을 수렴하고자 했다.
한편 대외정책에서도 당시 주자학자들이 주장하던 숭명배청론(崇明排淸論)과 대립하는 입장에서 중국대륙의 세력변동에 주체적으로 적응하는 실리주의 정책을 주장했다. 그는 역사 속의 예로서 현실주의적인 외교 정책으로 고대 삼국 가운데 국력이 가장 미약했던 신라가 당나라에 망하지 않은 것과, 고려말 원·명 교체기에 신흥 명나라를 섬기고 원을 배척한 것을 들어 이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하여 당시 숭명배청론자들이 명나라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연호란 왕조가 바뀌면 으레 변하게 마련이므로 청나라의 연호인 '강희'(康熙)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학통의 계승과 저서
박세당은 노론에 사문난적으로 낙인 찍히면서 비참한 최후를 마쳤으나,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사고를 지녔던 윤증(尹拯)·박세채(朴世采)·남인성·남구만·최석정(崔錫鼎) 등 소론계열의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쌓아올린 그의 학문적 업적은 조선 후기의 혁신적인 사상으로 계승되었다. 제자들로는 이익명·이인엽·이탄·이덕수(李德壽)·조태억(趙泰億) 등이 있으며, 소론의 거두인 박태보(朴泰輔)가 그의 아들이다. 저서로는 〈서계선생집〉·〈사변록〉·〈신주도덕경 新註道德經〉·〈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색경〉 등이 전한다. 1722년(경종 2)에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소론의 영수로 당쟁의 근절을 위해 노력했고, 당대의 유종(儒宗)으로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다.
본관은 반남.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의(漪)이며, 어머니는 신흠(申欽)의 딸이다. 1649년(인조27)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1650년(효종 1) 성균관 유생들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했을 때, 영남의 유생유직(柳稷)이 반대 상소를 올리자 여러 유생들과 함께 유직의 상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효종이 비답(批答)에서 박세채를 꾸짖자, 이것을 계기로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은거하여 경학에만 전념할 뜻을 세웠다. 1651년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주로 성리학을 연구했고 송시열과도 교류했다. 1659년 천거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다. 그해 5월 효종이 죽고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자의대비가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남인에 반대하고 송시열·송준길 등과 함께 1년간만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예경기년설(禮經朞年說)을 지지했다(→ 색인 : 기해예송). 1674년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이 집권하여 기년설을 주장한 서인들이 축출당할 때 삭탈관직당하고 양근·지평·원주·금곡 등지에서 6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자다시 기용되어 집의·이조참의·대사헌·이조판서·우참찬 등을 지냈다.
이무렵 서인들 가운데에는 훈척파(勳戚派)와 청의파(淸議派)라는 두 갈래의 흐름이 생겨 서로 반목했다. 이른바 노론·소론의 분쟁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는데, 훈척파는 김수항·민정중·김석주·민유중 등 남인을 내쫓는 데 공이 많고 나이가 많은 고관들이었고, 청의파는 조지겸·오도일·박태보·박태유·한태동 등 연소한 관료들로 남인들의 완전 제거와 훈척파의 전권(專權)을 반대한 사람들이었다(→ 색인 : 붕당정치). 1682년 김익훈·김석주가 남인을 밀고하여 옥사가 발생하자, 청의파에서는 이를 무고라 하여 탄핵했다. 이때 송시열이 훈척파를 옹호하여 청의파와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는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려는 입장에 있었으나, 1683년 송시열이 태조의 위화도회군을 존주대의(尊周大義)라 하여 시호를 높일 것을 주청한 것을 계기로 송시열과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이때 송시열·김석주·김익훈 등을 추종하는 사람은 노론으로, 박세채·조지겸·한태동 등을 따르는 사람은 소론으로 나누어졌다. 그는 윤증 등 소론계 학자들과 함께 학문교류 및 정치활동을 했다. 1689년 소의장씨(昭儀張氏)의 희빈 책봉문제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야인생활을 했으나,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우의정·좌의정 등을 두루 거치면서 명실상부한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화서학파(華西學派)를 형성하여 한말 위정척사론과 의병항쟁의 사상적 기초를 다져놓았다. 본관은 벽진(碧珍). 초명은 광로(光老).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아버지는 회장(晦章)이다. 3세 때 〈천자문〉을 떼고, 6세 때 〈십구사략 十九史略〉을 읽고 〈천황지황변 天皇地皇辨〉을 지었으며, 12세에는 신기령(辛耆寧)에게 〈서전 書傳〉을 배웠다. 부친의 뜻을 받들어 과거준비에 몰두하여 1808년(순조 8) 한성초시에 합격했으나 과거급제를 구실로 한 권력층 고관자제와의 친교를 종용받고 환멸을 느껴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그후 서울의 임로(任魯)와 지평의 이우신(李友信) 등 당시 이름 있는 학자들을 찾아가 그들과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경학상의 제문제에 관한 토론을 벌였다. 25~26세에 연이어 양친을 여읜 뒤 더욱 학문에 몰두하여 4서(四書)에 관한 주자(朱子)의 집주(集註)나 장구(章句)를 반복연구하면서 주자의 학문에 심취했다. 그는 〈주자대전 朱子大全〉의 미언대의(微言大義)를 궁구하면서 점차 〈송자대전 宋子大全〉으로 나아가 송시열(宋時烈)이 주자 이후의 정종(正宗)을 이룬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840년(헌종 6) 학행으로 천거되어 휘경원참봉(徽慶園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그뒤에도 조인영(趙寅永)을 비롯한 실력자들로부터 지방수령 등의 교섭을 받았지만 고사하고 향리에 머물며 강학에 전념했다. 한말 위정척사론자들로 의병항쟁을 주도하기도 했던 최익현(崔益鉉)·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 등이 이무렵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1862년(철종 13) 이하전(李夏銓)의 옥사 때 김순성(金順性)의 무고로 체포되었다가 무죄임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1864년(고종 1) 조두순(趙斗淳) 등의 천거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에 제수되고,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지평·장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1866년 프랑스 군함이 침입하여 강화도를 약탈한 병인양요가 일어나 이에 대한 대책을 놓고 조정에 의견이 분분할 때 노성한 사람의 의견을 듣자는 김병학(金炳學)의 제청에 따라 동부승지로 부름을 받자 입궐하여 흥선대원군에게 척화론(斥和論)을 건의, 이를 국론으로 채택하게 했다. 며칠 후 공조참판으로 승진발령되고,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의 중지와 과중한 세금부과의 시정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만동묘(萬東廟)의 재건을 상소하는 등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대해 정면공격을 가한 것이 문제가 되어 삭탈관직을 당하고 낙향하여 말년을 보냈다.
이학(理學) 6대가의 한 사람이며, 위정척사파의 정신적 지주였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증참판 재우(在祐)의 아들이다.
7세에 이미 맷돌을 보고 시를 지었고, 9세에 경사(經史)에 통했다. 1831년(순조 31)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강릉(康陵)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봉직하지 않았다. 이후 40세 때도 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6일 만에 사직했다. 그뒤에도 평안도도사·무장현감·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862년(철종 13) 삼남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철종은 3정(三政)의 개선책을 듣기 위해 언책(言策)을 모집했다. 이때 〈임술의책 壬戌擬策〉을 작성하여 사대부 풍속의 폐단, 조정의 공경(公卿)·방백·수령·이속의 탐오함, 과거·사관(仕官)의 폐단, 부호들의 토지겸병의 폐단 등을 지적했다. 그리고 군포의 혁파, 환곡의 면제, 민전 제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기했으나 제출하지는 않았다.
1866년(고종 4)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육조소 六條疏〉라 불리는 첫번째 〈병인소 丙寅疏〉를 올려 외적을 방비하는 대책을 건의했다. 그해 7월 동부승지·호조참의, 10월에는 동지돈녕부사·호조참판·공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이때 국가적 폐습을 비판하고 사대부에게 삼무사(三無私)를 권장하는 2번째〈병인소〉를 올렸다. 1877년 장성 월송(月松:지금의 고산리)으로 거처를 옮겨 담대헌(澹對軒)에서 문인들과 지내다 죽었다.
대윤(大尹)의 한 사람으로 영의정에 올랐으나,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황·기대승 등과 주자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본관은 광주.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를 지낸 홍(鴻)이다. 장인인 이연경(李延慶)에게 배웠으며, 휴정(休靜) 등과 사귀면서 불교의 영향도 받았다.
1543년(중종 38)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전적·수찬을 지냈다. 1544년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대윤(大尹)에 속하여 인종 즉위초에는 정언을 지내면서 소윤(小尹) 이기(李芑)를 탄핵하여 파직시키기도 했다. 1545년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수렴청정을 하자 대비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을 비롯한 소윤이 정권을 잡은 뒤, 윤임(尹任) 등의 대윤을 제거하기 위하여 1547년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그는 소윤계열인 윤춘년(尹春年)과의 친분으로 죽음은 면했으나, 이조좌랑에서 파직되고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1547년(명종 2) 정황(丁熿)과 함께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고 진도로 옮겨 19년간 귀양을 살았다. 1565년 괴산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567년(선조 즉위년)에 풀려나 교리·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내고, 1573년 우의정, 1578년 좌의정, 1585년 영의정이 되었다. 1588년 영의정을 사직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한 일이 문제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했다.
임윤지당은 1721년 함흥 판관을 지낸 임적(1685년-1727년)의 딸로 태어났다. 동생인 임정주(任靖周)가 쓴 전기 《임윤지당유고》의 유사에 의하면 임윤지당은 학문에 재능이 있어서, 형제들과 경전, 역사, 인물, 정치에 대해 토론을 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여성들의 재능이 활용되지 못했으므로, 학문적 재능을 발휘하기보다는 어른을 공경하고 정숙하게 행동하는 유교적 윤리를 실천하였다.하지만 송시열의 친구 임의백(任義伯)이 고조할아버지인 임윤지당의 재능은 숨겨질 수 없었다. 그 근거로 동생 임정주(任靖周)에 의하면 여동생의 재능을 알아본 둘째오빠 임성주(任聖周,1711년-1788년)는 효경, 열녀전, 소학, 사서등을 가르쳤는데, 임윤지당은 낮에는 일상생활을 하고, 밤마다 공부하였다.임윤지당은 큰 오빠 임명주(任命周)가 세상을 떠나자 한문으로 제문을 지음으로써 여성은 학문을 할 수 없다는 남성들의 편견을 깨부수었다. 또한 시부모가 세상을 떠나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조선시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성리학을 여성의 시각으로 연구하여 성리학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임윤지당을 가리켜 우주, 사람, 사람과 사물의 이치등의 넓은 주제를 연구하는 학자요, 고요하고 한가로워 조금도 얽매임이 없는 자유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저서로 《윤지당유고 (允摯堂遺稿)》가 전해지고 있다.
임윤지당은 성리학자였다. 그는 학문에 대해 나름대로 말하였으며, 학문적 내공이 얼마나 뛰어난가를 말해주는 이야기도 있다. 발췌한 출처는 역사학자 이덕일박사의《여인열전》(이덕일 지음, 김영사 p.334,33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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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적부터 성리학이란 학문이 있음을 알았다. 조금 자라서는 고기 맛이 입을 즐겁게 하듯이 학문을 좋아하여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이에 감히 아녀자의 분수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경전에 기록된 것과 성현의 교훈을 마음을 다해 탐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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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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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형님께서 양근 군수로 계실적에 협과 홉 형제가 별당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때 누님께서 원주에서 오셔서 관사에 머물고 계셨는데, 조카들이 매일 아침 저녁으로 문안인사를 드렸다. 하루는 누님께서 "오늘 공부는 어떠하냐?"라고 물으시니 조카는 "날이 더워 고통을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부채질을 하느냐?"고 묻자,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누님께서 "정신을 집중해서 책을 읽으면 가슴에서 자연히 서늘한 기운이 생기는데, 부채질할 이유가 있겠는가? 너희들이 아직도 헛된 독서를 면치 못했구나."라고 하셨다. 이 한 마디 말씀으로 미루어보면 누님의 존심양성(存心養性)하신 수양의 경지를 가히 알 수 있다./동생 임정주의 임윤지당유고
본명은 수인(守仁). 자는 백안(伯安), 호는 양명. 시호는 문성(文成). 심성론(心性論)으로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철학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관리로서 굴곡이 많은 세월을 보내기는 했지만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워, 그가 다스리던 지역은 100여 년에 걸쳐 평화를 누렸다. 양지(良知 : 선악을 구분할 줄 아는 마음)가 바로 천리(天理 : 세상의 올바른 이치)라는 그의 주장은 12세기에 활약한 성리학자 주희(朱熹)의 "각각의 사물에 그 이치가 있다"라는 주장과는 정면으로 대립한다(→ 색인 : 성리학). 왕양명의 주장은 전통 유교사상과 어긋난다는 인식 때문에 한동안 사학(邪學)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색인 : 중국철학).
초기생애와 지적 편력
그는 정부 고관의 아들로 태어나 15세에 변방의 진(鎭)인 용삼관(庸三關)으로 가서 궁술(弓術)을 익혔다. 결혼식날 불로장생의 술법인 양생술(養生術)에 대해 도사와 토론하는 데 열중하여 결혼 초야를 도교사원에서 보내고 말았다. 1492년 성시(省試)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다. 베이징[北京]에 있던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위대한 성리학자 주희의 가르침대로 대나무 앞에 조용히 앉아서 그 이치를 찾아내려 했으나 1주일의 명상 끝에 병에 걸렸을 뿐 별 소득이 없었다. 1493, 1495년의 전시(殿試)에 떨어진 그는 병법 연구와 도가의 양생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1499년 마침내 전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공부주사(工部主事)에 임명되었다. 황제에게 국경의 수비·전략·행정 등에 관한 8개 조항의 정책을 상소하여 일찍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1500년 형부주사(刑部主事)에 임명되었고, 1501년 난징[南京] 부근에 있는 감옥의 죄수기록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많은 부조리를 시정했다.
1502년 그는 건강이 나빠져서 양명(陽明) 계곡에서 정양했는데 이때 도가의 도인술(導引術)을 수련한 듯하다. 산둥[山東] 지방의 과거시험을 감독했고 이어 병부주사(兵部主事)가 되었으며, 1505년경부터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 몰려들었다. 유교의 성인(聖人)이 되는 데에는 성인이 되고자 하는 결심이 중요하다고 가르쳤고, 경전을 암송하고 화려한 문장을 써내는 일 등을 비난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그가 인기전술을 쓴다고 매도했으나, 존경받는 학자·관리였던 잠약수(湛若水) 같은 사람은 그의 학설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친구가 되었다. 1506년 그의 신상에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큰 권력을 쥐고 있던 부패한 환관(宦官) 유근(劉瑾)을 탄핵하다가 투옥된 한 검열관을 옹호하여, 그 자신도 40대의 곤장을 맞고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혔다. 그후 구이저우 성[貴州省] 룽창[龍場]의 역승(驛丞)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 토착민들과 함께 살았는데 자주 병에 걸렸다. 이같은 질병과 고독 속에서 36세가 되던 해의 어느날 밤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이를 룽창의 大悟라고 함). 즉 천리를 탐구해나가는 데 있어 주자의 이론에 따라 실재하는 사물에서 이(理)를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良知) 속에서 그 이치를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이렇게 하여 왕양명은 12세기의 철학자 육구연(陸九淵)이 처음 주장하기 시작했던 심성론(心性論)을 완성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색인 : 육왕학파).
정치적·군사적 경력
1509년 왕양명은 또다시 획기적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제창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은 효도를 실제로 행하고 있을 때에만 비로소 효도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바른 앎이 있어야만 바른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색인 : 인식론). 1510년 장시[江西]의 지방관이 되어, 10가구씩을 묶어 서로의 행위에 대해 연대책임을 지게 하는 '10가패법'(十家牌法)을 실시하는 등 많은 개혁안을 시행했다. 그뒤 형부와 도찰원(都察院) 등에서 근무한 후 1516년 장시의 지사(知事)가 되었다. 장시 지방에는 수십 년 동안 비적(匪賊)과 반도(叛徒) 들이 들끓고 있었다. 왕양명은 1517~18년 4차례에 걸친 토벌전을 벌여 이들을 소탕했다. 그는 복구사업, 세제 개혁, 서원 설립 등을 추진했고, 부락민들의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향당의 규약인 남공향약을 만들었다.
1519년 푸젠[福建]의 반란을 진압하러 가던 도중에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고 그의 근거지인 난창[南昌]을 포위했다. 4일 뒤에 신호와 교전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왕양명은 신호와 전부터 교유가 있었기 때문에, 베이징의 시기심 많은 관리들은 왕양명이 모반을 꾀하고 있으며 관군이 진격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신호를 공격했다고 모함했다. 그러나 협상을 위해 찾아간 왕양명의 문하생을 신호가 투옥하는 일이 벌어지자 모함이 사라지고, 왕양명은 다시 장시 지사에 임명되었다. 1521년 새로 등극한 황제 가정제(嘉靖帝 : 世宗)는 그를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임명하고 신건백(新建伯)에 봉했다. 1522년 그는 아버지의 상(喪)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가 3년 동안 상중에 있었으며, 5년 이상을 고향에 머물면서 중국 각지에서 찾아온 수백 명의 문하생들과 함께 도에 대해 토론했다. 이때에 나눈 대화와 그 이전의 대화들을 하나로 엮은 것이 〈전습록 傳習錄〉이다. 1521년 그는 치양지(致良知 : 마음 속에 있는 양지를 다 발휘함)에 대해 처음으로 가르쳤다.
사후의 명성
1527년 6월 광시[廣西]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6개월 만에 그 반란을 평정했으나, 수년 동안 고통을 받아온 천식이 도져 중태에 빠졌다. 그는 1529년 개선하여 돌아오던 중 장시의 난안에서 죽었다. 세력 있는 대신이 그를 미워했기 때문에 그의 작위와 세습봉록이 박탈되어 그의 두 아들은 전혀 혜택을 받지 못했다. 이 조치에 항의한 사람들은 파면되거나 유배당했으며, 또한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도 철저히 금지되었다. 그가 죽은 지 38년 후에 새로 등극한 목종(穆宗)이 그에게 신건후(新建侯)의 작위와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584년초에는 공자묘에 배향되는 최고의 영예를 얻었다. 왕양명의 철학은 150여 년 동안 중국 전역에 널리 퍼졌으며, 그는 2,000여 년에 걸친 중국 철학사에서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호는 탁오(卓吾)·굉보(宏甫). 천주(泉州) 진장[晉江:지금의 푸젠 성(福建省)에 속함] 사람이다.
윈난 성[雲南省] 야오안[姚安]의 지부(知府)를 지냈으나 54세에 관직을 떠났으며, 중년 이후에 양명학(陽明學)과 선학(禪學)의 영향을 받았다. 만년의 저서와 가르침에서 당시의 도학(道學)을 비판했기 때문에 여러 차례 박해를 받았다. 결국 장문달(張問達)의 탄핵으로 옥중에서 자살했다. 그는 왕간(王艮) 이래의 태주학파(泰州學派) 등을 숭배했는데, 그의 동심설(童心說)은 어린 아이의 마음 그대로를 존중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스스로 이단으로 자처하면서 유가의 예교를 비판하고, 공자가 세워놓은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에 반대했다. 당시의 도학자들을 "겉으로는 도를 말하나 속으로는 부귀를 바라며, 유학자의 고상한 옷을 걸쳤으나 행동은 개·돼지나 다를 바 없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또한 〈논어 論語〉·〈맹자 孟子〉 등의 유교경전들도 진정한 도학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저서로는 〈분서 焚書〉·〈속분서 續焚書〉·〈장서 藏書〉·〈속장서 續藏書〉 등이 있으나, 이들 모두 명대에 금서가 되었다. 그는 저자의 가치관이 들어 있어야 진정한 문학작품이라고 생각했으며 소설과 희곡을 중시했다. 이런 관점에서 〈수호전 水滸傳〉에 대한 평론을 쓰기도 했다.
왕간1483년~1541년): 명나라의 양명학 좌파의 사상가이다. 자는 여지(汝止), 호는 심재(心齋)이다. 태주(泰州) 안풍장(安豊場) 출신이며, 태주학파(太州學派)의 지도자이다.
소년 시절에 집이 가난하여 학업을 마칠 수가 없었으나 25세 때 공자묘(孔子廟)에 참예(參詣) 후로는 《효경(孝經)》, 《논어(論語)》, 《대학(大學)》 등을 열심히 읽었다. 38세 때 처음으로 왕양명이 강서 지방에서 양지(良知)의 학(學)을 강론한다는 말을 듣고서 찾아가 그 학문에 크게 감복하여 그 후 제자의 예절을 취하였다. 양명의 사후에 그는 문호를 개방하여 일반 서민을 강학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있는 곳에는 소농·도장·어부·염정·초부(樵夫) 계층의 사람들까지 몰려와서 그 학문을 경청하였다. 그는 실천을 중시하여 학문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양명학 좌파의 왕용계가, 양지는 사람의 마음에 그대로 현성(現成)하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그도 또한 양지는 자연의 천측(天則)이어서 인력으로 안배할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 학문은 반드시 먼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을 설명하였다. 자기를 바르게 하고 그 다음에 물(物)이 바르게 되고 자기 자신이 바르게 된 후에 비로소 천하가 거기에 귀일한다고 하며 특색있는 〈격물설(格物說)〉을 전개하였다.
조선에 전래된 양명학의 사상체계를 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세론을 전개했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유성(維城)이고, 아버지는 진사 상징(尙徵)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로 호조판서 기조(基祚)의 딸이다. 어려서 이상익(李商翼)에게 배웠고, 20여 세 때부터 박세채(朴世采)를 스승으로 섬겼다. 윤증(尹拯)에게도 배웠으며, 최규서(崔奎瑞)·최석정(崔錫鼎) 등과 사귀었다. 1668년(현종 9) 초시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연구에만 힘썼다. 이무렵부터 공소(空疎)에 빠진 주자학에 반대하고 양명학에 심취하여 상당한 이해가 있었다. 1680년(숙종 6) 김수항(金壽恒)의 추천으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나가지 않았다. 1684년 공조정랑을 잠시 지냈다.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나자 중신들이 다투어 천거하여 1688년 평택현감에 임명되고, 서연관(書筵官)을 비롯하여 30여 회나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거절했다. 1689년 안산(安山)에 옮겨 살았는데, 이때 양명학에 더욱 몰두했다. 이 시기에 저술된 〈학변 學辨〉·〈존언 存言〉에는 양명설을 바탕으로 한 그의 심성학(心性學)이 심화되어 표현되고 있다. 1709년 강화도 하곡으로 옮겨 살았으며, 숙종 때 호조참의·한성부윤, 경종 때 대사헌·성균좨주에 임명되었다. 1726년 이정박(李廷撲)이 그가 양명학을 한다고 배척했으나 영조의 보호를 받았다. 1728년 우참찬, 1736년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임명되었다.
본관은 전주.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수북(壽北). 소론이 영조 때 세력을 잃어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고, 1755년 나주괘서사건으로 큰아버지 진유(眞儒)가 처벌받을 때 연좌되어 부령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학문이 이름나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유배지를 완도군 신지도(新智島)로 옮겨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정제두(鄭齊斗)에게 양명학을 배워 아들에게 전수했으며 윤순(尹淳)에게서 글씨를 배웠다. 진서·초서·전서·예서에 두루 뛰어났고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필체를 이룩했다. 그림에도 뛰어나 산수·인물·초충(草蟲)을 잘 그렸고 소박한 문인 취향의 화풍을 이루었다. 문학작품으로는 단군 이래의 역사를 읊은 〈동국악부 東國樂府〉 30수와 귀양지 신지도의 풍속과 생활을 그린 〈기속 記俗〉 등이 전하며, 서화작품으로는 〈행서사언시 行書四言詩〉·〈고승간화도 高僧看畵圖〉·〈산수도 山水圖〉 등이 전한다. 저서로 서예 이론서인 〈원교서결 圓嶠書訣〉·〈원교집선 圓嶠集選〉 등이 있다.
이름은 겐[原]. 호는 못켄[軒]. 중국 철학자 왕양명의 이상주의 사상을 일본에 확립한 일본 양명학의 시조이다. 나카에는 원래 주자학에 정통했는데, 당시 주자학은 일본 정부의 통치이념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다이슈 한[大洲藩]의 영주를 보필하고 있던 그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1634년 관직을 버린 뒤 고향으로 돌아가 홀어머니를 봉양하는 한편 학문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에 몰두했다. 이때 주자학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왕양명의 철학을 옹호하게 되었으며 그의 명성은 온 나라에 퍼졌다. 그리하여 뛰어난 제자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며 그는 '오미의 성인'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왕양명과 나카에는 우주의 근본원리는 바깥 세상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책을 읽어 학식을 쌓아야만 인간의 도(道)를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자의 사상을 거부하는 대신에 진정한 인간의 도는 직관과 자기성찰을 통해 찾아낼 수 있다고 가르쳤다. 나카에는 어떤 개념에 대한 이해는 그것의 실천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확신에 따라 추상적인 학식보다 실천을 강조했다. 이처럼 개인의 행동에 중점을 두는 지행합일을 주장했기 때문에 나카에 철학은 19세기와 20세기에 일본의 열성적인 개혁론자와 국수주의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그의 철학이론을 집대성한 〈도주 선생 전집 藤樹先生全集〉 전5권이 1940년에 출판되었다.
왕양명의 사상을 자신의 실생활에서 실천하려고 힘쓴 최초의 일본인이다. 로닌[浪人:주군이 없는 사무라이]으로 태어났으며, 매우 총명하여 15세 때 오카야마[岡山]의 봉건영주 이케다 미쓰마사[池田光政]에게 발탁되었다. 독학으로 공부하다가 반사변적(反思辨的)이고 직접적인 행동에 중점을 두는 왕양명의 사상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문제를 상식적으로 해결해서 크게 존경받았으며, 1647년에는 로닌 가문으로서는 유례없는 영광인 오카야마의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농업장려책 중에서 과거 일본이 실시했던 물물교환 경제체제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이 반대에 부딪히자 결국 1656년 은퇴한 뒤 여생을 학문연구와 저술활동으로 보냈다. 그는 철학 저술에 널리 사용되어왔던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 구어체의 일본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자주성을 보여주었고 당시의 정부를 비판했다. 즉 관리의 승진은 세습이 아닌 개인의 능력에 따라야 하며 경제발전에 대한 정부의 책임이 더 커져야 하고 봉건영주에 대한 정부의 중앙집권적 통제를 약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은 정부를 격노하게 하여 그는 여생을 정부의 감시 아래 또는 감금상태에서 보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