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상고대
밤새 겨울 안개가 씨를 뿌려서 피어난 차디찬 꽃이라네.
차디차게는 생겼지만 마음만은 푸근하다오.
세상 온갖 꽃들 햇빛 받고 만개한다지만 햇빛 속에 죽어야하는 비련의 꽃이라네.
이내 몸 곧 죽을 것을 알았기에 소복 입고 피었다오.
낙화되는 꽃잎대신 한 방울의 눈물로 생을 마감하면서, 죽이려 쏘아대는 햇빛에 반짝 미소 한번 보내주는 거룩한 죽음이라네.
<산문>
명함
여름가을에는 바빠서 못했다지만 한가한 때에 방 정리 좀 하라는 아내의 말에 쫓기어 책상 정리를 하였다. 몇 권되지도 않는 책이 이리저리 쓰러진 것을 정리하고 서랍속의 명함정리 하는데 새벽에 들에 나가 밤에나 들어오는 사람이 언제 이렇게나 사람을 만나고 명함을 받았는지 일일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명함을 건넸다면 상호교류나 연락을 하기 위함이었을 터인데 벌판한가운데서 고행하는 구도자처럼 일을 하다 보니 하루 종일 전화벨소리 한번 들어보지를 못했고 입에서는 군내가 나다 시피 했다.
일상이 그러했으니 명함한번 제대로 활용 못해보고 정리를 하는데, 명함을 정리 할수록 이름 석자 앞에 붙는 직위와 그 밑에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이 적힌 이력의 과시형 명함과 이름자 밑으로 점포상호하나 달랑 적힌 생계형 명함 두 부류로 갈렸다.
과시형 명함이라지만 내 사회적 지위나 사람 됨됨이가 작아서인지 정승 판서정도의 명함은 고사하고 거상정도의 명함 한 장 끼어있지 않았다.
트럭한대가 전 재산이라며 계분 운반으로 생계를 잇는 김 사장 명함으로 해서, 몇 달간 아파트 전세계약 하나 맺은 것이 전부였다는 부동산 사장님 명함이 생계를 호소했다. 농기계 수리센터 기사명함. 들판까지 배달된다며 건네받았던 짜장면 집과 다방 명함, 인력시장, 옷 수선 집, 분식집, 기쁨과 슬픔을 함께 공유하자는 꽃집의 명함이 산동네 갑남을녀처럼 모여 있다.
지금은 어느 곳에 사는지도 모르는 후배가 건네줬던 명함과, 인력시장 나가는 친구가 한때 옷 가게 개업을 알리며 전해준 명함이 추운 날 명치끝을 울린다. 사계절 걸치는 옷 중에 한 벌만 팔아줬었어도 이렇게도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중 명함 속에 꽃 한포기 피어있는 것이 보였다. '꽃씨 맘씨'.라는 참으로 앙증맞기 그지없는 것이 그림으로 액자에 넣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예쁜 명함이다.
명함에는 활짝 꽃이 피어있었지만 꽃 가게는 일 년 겨우 넘기고 만개도 못하고서 접어야 했다. 같이 활동하는 문우가 '꽃씨'를 뿌렸지만 나의 '맘씨'가 부족하여 꽃 한 다발 팔아주지 못하여 가게가 번창하지 못하고 닫은 것만 같아, 지금 성경책이 아닌 그림 같은 명함을 내려다보며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는 통회의 기도만 뒤늦게 드렸다.
<산문>
문신
통진 문학 모임에 참석코자, 밭에서 일하다가 통진 읍내 시장 통에 있는 목욕탕의 탕 속에 들어앉아 눈 지그시 감고 있었다. 물이 일렁이는 것이 누군가 입수하는가 보다.
눈을 슬며시 뜨다가 "앗" 소리도 못 지르고 마음으로 (!)소리만 지르고서는 얼른 눈을 감았다. 용 한 마리가 탕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것이다. 덩치는 현순길 원사 정도나 될 만한 덩치에 문신을 새긴 것이 발뒤꿈치쯤에 꼬리를 내리고 온몸을 휘감아 돌아 오른쪽 어깨에서 입을 벌린 흑룡이었다. 참! 살다보니 용하고도 한 못 속에 들어앉을 줄이야 어이 알았겠는가?
시간이 없는 탓도 있었지만 다른 뜻도 있어서, 때도 못 밀고 얼굴에 찍어 바르는 것은 고사하고 머리빗질도 못하고서 목욕탕을 뛰쳐나왔다. 지금쯤이면 뇌성벽력을 치면서 목욕탕 지붕이 날아가고 용이 승천할 것이라며 뒤를 돌아보아도 조용하기만 했다. 아마도 목욕탕 못에서 승천도 못하고 이무기가 된 것만 같았다.
어떤 사람이 폭력 행위 등 법률에 관한 위반혐의로 감옥소에 들어갔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사람을 때려서 감방에 갇힌 것이다. 죄목이 그렇다 보니 갇힌 사람 면면이 폭행, 살인 같은 죄목으로 복역 중이었다. 좀 더 무섭고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흉악범들 이라하는데, 몸에는 저마다 용(龍)문신과 호랑이 문신이라 감방 안에서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그야말로 중국영화 '용쟁호투'였다.
용과 호랑이가 엉키는 그 살벌한 판에서 그나마도 착한 사람이 있었다. 등짝에는 징그러운 용이나 무서운 호랑이 문신도 없을 정도로 착한데 그 착한 마음이 어느 정도냐 하면, 상처 꿰맨 흔적과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 있는 팔뚝에 '차카게 살자'라는 문신을 새길 정도로 착한 마음을 간절히 간구하는 사람이었다.
그 감방에 입실하면 문신은 의무라 하여 단순폭행인 초범에게도 문신은 어김없이 새겨야했다. '차카게 살자'라는 문신이 근 한 달이나 걸려가면서 초범의 등짝에다 문신을 새겼는데, 하느님 말씀 잘 듣고 두 번 다시 이곳에 들르지 말라는 염원을 담고서 이례적으로 '주기도문'을 새긴 것이다. 그것도 한글이 아닌 영어인쇄체 소문자로 새겼다.
등짝에 새긴 기도문 덕분이었는지 일찍 출소하여 목욕탕에 들어가 때를 밀고 있었다. 문신 하면 얼추 용, 호랑이, 독수리, 차카게살자, 인데, 등짝 한바닥 가득 영어로 새긴 문신을 의아하게 보던 사람이 문신 새긴 당사자에게 등의 문신글자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 보았다. 이를 들은 문신이 대답하기를. "한번도 읽어보지 못한 글씬데, 무슨 수로 그 내용을 안단 말이요? 당신 같으면 보이지도 않는 등짝의 글씨를 볼 재간이라도 있수?"
<산문>
장릉연못
김포 북성산 양지바른 곳에 용상에 앉아보시지도 못하신 원종 왕께서 잠드시어 계시다.
백성위에 군림한번 못 하셨지만 사후에라도 뭇 백성 사랑하는 마음 변치 않아 차 한 잔 하사하시었네.
봄이면 벚꽃 잎 띄운 화채 한잔 내려 주시고
여름이면 녹차 마셔보라 권하기도 하시며
가을되니 홍차 한잔 마시라 하는데.
백성들 하는 일 마뜩찮으면 동안거에도 들지 못하고 냉수 먹고 속 좀 차리라며 냉차 한잔 안겨 주신다.
이 뭇 백성 차 한잔 받아놓고 머리 조아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산문>
흔들린다는 것
박상우 시인은 그의 시 '사랑은 불협화음'에 이렇게 썼다.
'남자는 윗도리에 흔들릴 게 없어서 윗도리가 흔들리지 않고
여자는 아랫도리에 흔들릴게 없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남자는 흔들리는 여자의 윗도리가 신기(?)하고
여자는 흔들리는 남자의 아랫도리가 신기(?)합니다' 라고.
남녀 간에 서로 다른 위치에서 흔들리는 것에 호기심을 갖고 신기함을 느끼나 보다.
내가 아는 분 중에 남자들이 호기심을 갖고 신기함을 느끼게 하는 신체부위를 흔들어 댔다가 매를 뒈지게 맞은 사람이 있다.
아침저녁으로 햇 바람이 불어 쌀쌀해서 방에 불 좀 넣게 연탄 백장만 갖다 달라는 읍내에 사는 일명 동네 형수님의 전화를 받고 배달을 가서보니, 형수님 왼쪽 눈이 밤텡이가 됐고 입술이 부어올라 쳐다보기가 민망했다.
형수님은 전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동생 힘들 텐데 술로 한잔 줄까. 커피로 한잔 돌릴까?" 하는 소리에 맥주 컵에 소주 채워 입에 털어 넣고, 형수님 얼굴 보기가 자꾸 민망해 얼른 자리뜨기 위해서 부지런히 연탄을 날랐다.
연탄집게로 연탄재를 탁탁 깨트리던 형수님은 연탄 나르는 내 등 뒤에다 대고 밑도 끝도 없이 묻지도 않는 말을 해댔다.
"그 새끼가 이렇게 때렸잖아."
그렇게 말하고는 내 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아.
"누가 그렇게 때렸대요?"
"우리 애 아범이 때리는데 아주 뒈지는 줄 알았어. 그저께가 초등학교 운동회였잖아, 늦둥이 딸 하나 있어서 점심 꾸려 올라갔지. 학부형 달리기가 있어서 내가 달려서 일등을 했는데, 그날 저녁에 술이 취해서 들어오더니, 기집년이 사람 많은데서 젖텡이 털렁거리고 뛰냐며 창피해서 혼났다며 눈이 뒤집어져서 때리는데, 아주 골로 가는 줄 알았어. 기집이 뛰면 자연지사 젖텡이 털렁거리는 것 아니겠어. 그러면 사내새끼들이 좆텡이 털렁거리며 뛰는 건 괜찮고.
첫댓글 바쁘신데 원고 올리시느라 애쓰셨습니다.
즐겁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