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500명의 주부들이 집을 나온 까닭
가을바람치고 참 스산하게도 불어댄다. 금방 매만진 머리가 미친년처럼 헝클어지는 심란함 속에서도 한 가지 가슴 설레는 기다림과 희망에 부풀어 마음은 여전히 기쁘고 신난다. 어쩌면 이것이 올가을 마지막 나들이일 것 같아서.
지난주 토요일 오후 3시경이 되어서야 경기도 용인에 있는 삼성 에버랜드 '힐 사이드 호스텔'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아마도 일행 중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한 듯싶어서 방 배정받은 호실 열쇠를 받아 짐 풀고 밀려오는 피곤함에 한숨 푹 잤다. MBC 방송사에서 주최한 '2002 여성시대 가을 주부나들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전국 각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원봉사자 중 350명을 선발하고 동서커피문학상에 공모한 주부 150명을 포함 500명이 동시에 공식적인 남편의 허락을 받고 1박 2일의 일정으로 집을 나오게 된 것이다.
어떤 주부는 결혼한 지 30년만의 외출이라며 들떠 있는 모습이었고, 최고령의 73세부터 최연소 22세의 주부들까지 다양한 연령분포로 개중에는 시원찮은 반승낙을 얻은 주부들도 있어 여러 생각을 하게 하였다. 하기야 어떤 집안은 남편이 직접 전화를 걸어 와 '우리 마누라는 못가!' 하고는 끊었단다. 이런저런 사연을 가득 안고 나들이를 온 주부들. 조금은 특별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기에 자신에 대해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했다.
자기주장이 분명하였고, 자원봉사에 대한 필요성 및 문제점들을 진지하게 토론하는 모습들은 누가 봐도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사회이슈가 되었던 거다. 실제로 여성이 사회에 참여하는 비율은 남성에 비교해 턱없는 수준이며 분야별로 살펴보아도 전문성이나 성취감을 느끼기엔 아직도 아쉬운 점이 많다. 여성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면서 자기계발을 위한 직업을 찾는다는 것이 대부분 보험업이나 화장품판매, 각종 다단계업종에서 활약을 하는 것이 다반사다.
이에 비해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은 수입과는 별개의 투철한 봉사 정신이 필요한데 재가 노인들 목욕시켜주기, 장애인 도와주기, 소년소녀가장 돌보기 등 직접 몸으로 부딪쳐서 봉사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금전적인 도움 또는 통역이나 안내 등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는 봉사도 있다.
이번 주부 나들이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얼마 전 치러졌던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에서 다양한 봉사를 한 경험자가 꽤 되었다. 그 현장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대략 세 가지 부류로 분류되는데 각종 게임을 공짜로 보려는 속셈의 사람, 승진 및 명예의 발판으로 이용하려는 사람, 진정 헌신적인 봉사를 하려는 사람 등등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행태를 저지르는 사람도 많단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사회 공익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마음과 몸소 남들보다 많이 앞장서서 실천으로 보여주는 봉사를 한다는 점에서는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명분이 서는 것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나마 관심이나 애정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 수고하고 애쓰시는 자원봉사자 중 특별히 주부들을 대상으로 위로와 격려를 하는 차원에서 치러진 주부 나들이 첫째 날은 에버랜드 그랜드 무대에서 가수들과 함께 하는 공개방송을 마치고 숙소 앞에 마련된 무대에서 장기자랑과 불꽃놀이가 이어지는 뒤풀이를 가졌다.
둘째 날엔 아침 운동과 백련사 산책을 마친 후 가을 운동회, 밤 줍기에 이어 숙소 대강당에 마련된 '여성시대와의 대화'를 가졌고 에버랜드 영화관에서 아직 국내에 개봉되지 않은 '8명의 여자들'을 관람하였는데 이 얼마만의 영화감상이던가! 하면서 새로운 감회에 젖은 주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번쩍이는 레이저 불빛에 웅장한 음악 소리에 환호와 함성이 끊이지 않았는데 모처럼 단 혼자만이 갖는 '화려한 외출'을 얼마나 고대하고 기다려 왔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서로가 전혀 모르지만 또렷한 목표 하나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주부라는 동질성, 유명 연예인과 함께 즐기는 이벤트가 얼마나 황홀했겠는가.
방 배정을 받아 모인 우리 조는 나주, 울산, 부산, 서울, 나 서산까지 모두가 다른 지역 출신들이 하나를 이뤄 공동생활에 들어갔는데 뒤풀이가 끝나고 잠을 청할 때까지 서로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진정 우리가 해야 할 일들과 나아갈 방향 등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어떤 주부는 시력을 잃었음에도 뭔가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찾았는데 의외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깨닫고 매주 일정한 시간을 할애하여 노인들의 어깨도 주물러 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워주기도 하는데 너무도 행복해하는 모습들이란다.
자원봉사란 거창하지도 않으며,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외로운 사람들의 말벗이 되어 주는 것도 봉사요, 길가의 쓰레기를 줍는 것도 봉사다. 어느 단체에 속해서 거창한 행사를 통한 봉사도 좋지만 길 가는 노인의 봇짐을 거들어 주는 소박한 마음씨 자체가 봉사가 되는 것이다. 내가 남에게 도움을 받으려면 자녀 앞에서 남에게 베푸는 모습을 보여줘라. 그러면 저절로 그 아이는 자신의 부모를 생각해서 밖으로 봉사를 하러 갈 것이다. 우선 나 먼저 솔선수범하는 모습으로 자그마한 일부터 시작을 한다 해도 아직 늦지 않았음을, 봉사에는 나이와 기간이 따로 없음을 하루빨리 인지해야겠다.
주부로서 정녕 가족을 벗어 난 화려한 외출이 얼마 만이던가! 많은 사람의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 사회참여에 대한 기회를 재확인하며 아직도 가냘픈 손길이나마 애타게 기다리는 이웃들이 많음을 깨달아 주변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 귀 기울여 언제라도 손 내밀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할 일이다.
자원봉사는 무작정 기다림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서 뭔가 성취의 기쁨을 맛보고 더불어 베푸는 정을 통하여 자아를 성취할 수 있는 확실한 지름길이라는 것을 느꼈다. 부족함에 체념하기보다는 그 부족함마저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아서 함께 나누고 어우러져 같이 잘 사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 많은 사람이, 좀 여유로운 사람들이, 뭔가 뜻 있는 일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 먼저 발 벗고 나서 준다면 분명히 이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는 멀리 사라지게 될 것이라 믿는다. 남들의 눈치를 보기 이전에 내가 먼저 나서서 실천함으로 그곳에서 보람을 느끼고 주변의 지인들께 참 행복의 길을 인도했으면 좋겠다.
2002년도 가을은 나에게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막연한 봉사 정신에 대한 정의를 구현하여 마음이 살찌울 기회를 주었다. 올가을 마지막 나들이가 우리나라의 모든 주부에게까지 멀리멀리 퍼져 새로운 희망과 멋진 삶을 영위하는데 한 부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작성일: 2002/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