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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IDA 원문보기 글쓴이: 김정화
패션fashion과 패션passion
김 정 화
단풍은 가을 나무의 패션이다. 가을 나무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앞선 계절을 지나온 옷 위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도 단풍잎만큼이나 첫인상이 중요하다. 찰나에 보여주는 얼굴과 몸짓, 표정과 말투조차 첫 느낌을 결정짓는다. 그중에서 옷차림이 주는 인상은 더더욱 중요하다. 패션은 자신을 드러내는 기운이며 상대의 감성을 자극하는 몸말이다. 때로는 몸이 보여주는 것이 입말보다 더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옷은 아담과 이브의 무화과 나뭇잎에서 출발한다. 그들의 몸에 걸친 단 하나의 나뭇잎은 가리고자 했던 부분을 오히려 더 강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몸에 입히는 패션의 역사도 달라졌다. 금동제 떨잠으로 머리꽂이를 했던 고려 여인, 허리띠 장식에 정성을 기울였던 신라인, 가채머리로 멋을 부린 조선의 기생과 뾰족 굽 구두를 신은 모던걸에서 명품을 부추기는 현대까지 유행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과거 여성 패션이 남성을 위한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패션은 여성 권력과 관계가 있다. 현대 파워우먼들은 패션으로 꿈과 열정을 표현한다. ‘옷차림도 전략이다’라는 광고 카피처럼 여성들은 자신의 태도와 신념을 스타일로 완성시킨다. 남성들이야 기껏 시계나 넥타이 색상에 변화를 주지만 여성들은 표현할 수단이 갈수록 많아져서 온몸이 패션 소재가 된다. 초기에는 옷으로만 자신을 나타냈으나 구두와 가방, 모자와 스카프 등 액세서리가 더해졌고, 지금은 향수나 페디큐어까지 몸을 감싸는 모든 것으로 이미지메이킹을 하려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패션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간혹 여성들은 지인을 초대하여 자신의 옷장을 과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도 몇 번 남의 옷장 구경을 한 적이 있다. 가장 놀랐던 것은 이십 년 전 여성 사업가였던 동창생의 옷장을 들여다본 일이다. 그녀는 옷장이 아니라 옷방을 따로 가지고 있었는데 많은 옷 가짓수는 물론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디자인에 경탄했다.
당시 내 옷장에는 퀴퀴한 검정 춘추 정장 한 벌과 양장점에서 큰맘 먹고 맞춘 쥐색 겨울 코트가 최고로 값나가는 옷이었다. 나는 그 검정 정장과 쥐색 코트를 입고 방문 수업을 하며 수백 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그 옷은 힘든 시절, 나를 성장시켰고 내 꿈을 이루게 했다. 그 옷만큼 내 삶의 열정을 보여주는 패션이 없었다. 올가을 나는 다시 그 검은색 정장 윗도리를 입는다. 이십 년 나의 역사가 그대로 밴 것 같아서 무늬와 색깔조차 귀하게 여겨진다. 반면, 사업을 그만 둔 친구는 이제 평범한 주부가 되었고, 그때의 화려한 옷은 모두 정리하고 말았다.
중세의 귀부인이나 왕족 여성들이 풍성한 드레스로 그들의 권력을 나타낸 것처럼 현대 여성 지도자들도 패션으로 국민들에게 말 걸기를 하고 있다. 영국의 대처는 애용하던 모자를 벗어 던지고 웨이브 머리의 부드러운 이미지로 마음을 열었다. 대처가 좋아하던 진주 귀걸이와 로열블루 색깔은 영국 보수당의 심벌이 됐고, 각료 회의 때 테이블에 올린 각진 블랙백은 위엄의 상징으로 굳어졌다. 미국의 전 국무장관 매들린은 브로치로 속내를 드러내 보였다. 독수리 브로치로는 자국의 힘을, 독침을 가진 벌 모양 브로치로 하드파워를 보여주며 멋진 브로치 외교를 이끌었다.
내게도 옷차림에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 내 옷은 대부분 유행을 따르지 않고, 간혹 단골 수선점에서 고쳐 입는 편이다. 구두나 핸드백도 내세울 것이 없다. 하지만 유독 남보다 많은 것이 있다면 머플러다. 그것들은 대부분 선물 받은 것으로 모두 귀하고 멋스럽다. 어디 온몸에 옷을 감싸야 패션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나름의 감각이 있다면 머리핀 하나, 코르사주 하나로도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 여대생의 머리에 묶은 붉은 고무줄에서 청춘이 느껴지고, 젊은 부인의 핑크빛 리본에서 따뜻한 모성이 읽힌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머플러는 열정의 상징이다. 그래서 나들이를 할 때면 머플러 색을 정성껏 고르게 된다.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에게도 관심 갖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면 그것 역시 패션이다. 지도자의 패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징성을 갖는다. 나 또한 그러한 옷차림을 흥미 있게 바라본다. 프랑스 방문 때 입은 올리브그린 한복과 감귤색 재킷의 상표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그 색상이 전하는 인간애를 찾고, 회색빛 정장이 뜻하는 의미를 해석하려 한다.
대통령이 입은 옷은 격조나 품격을 살리고 때로는 유행의 트렌드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옷차림만으로 메시지를 미루어 짐작하는 것도 난감한 일이다. 패션이란 몸에 걸치는 모든 것이지만 이미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헝겊 한 조각에 불과하다. 진정한 여성 지도자는 패션fashion에도 열정passion이 묻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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