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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전쟁 시대 종교항쟁의 종합적 평가
-만주지역 종교항일전쟁과 일제의 종교탄압정책-
안 천(서울교육대학교)
1. 대종교,천도교와 청산리 전투
1) 대종교(大倧敎)
대종교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길, 창시자 나철에 의해서 만들어진 종교라고 한다. 그러나 대종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다. 우리 민족사에 길이길이 빛날 큰(大) 종교로서의 대종교가 분명하다. 그간 역사에서 대종교가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숨겨져 있어서 그렇지, 우리 민족사 전체를 꿰뚫어서 아무리 살펴 보아도 대종교 만큼 숭고한 애국의 종교는 없었다.
대종교는 출발부터 순수한 민족종교를 기치로 내걸고서 출발된 종교이다. 그리하여 대종교는 단군교(檀君敎)라고 불리울 정도로 단군숭배 사상을 기본이념으로 내세우는 종교이다. 따라서 대종교는 그냥 대종교라고 부르기 보다는 단군대종교라고 불러야 하는 종교이다.
그렇다면 왜 대종교가 이 시기에 탄생되었고, 왜 단군을 숭배함을 기본적 종교 이념으로 하였는가? 그것은 먼 옛날부터 내려오던 단군숭배 이념이 고려말에 몽골족이 침입해 옴에 따라 부각되었고, 국난을 맞아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해서 나라를 지켰던 점을 되돌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단군 역사는 먼 옛날부터의 문헌에 존재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모든 역사서가 없어져 버리고 고려말에 삼국사기, 삼국유사 정도가 가장 오래 된 수준의 역사서로 남아 있는데, 바로 삼국유사에 단군역사가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옛부터의 단군사상이 국난기에 더욱 부각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찬가지로 대종교는 조선시대 말기 대한제국의 국난시기에 강력하게 다시 등장한다. 단군은 먼 옛날부터 우리 민족의 가슴에 계속하여 살아 있다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 민족을 이끄는 샛별이 되고 태양이 되며 뚜렷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단군대종교는 역사에 부각되는 수준이 아니라, 철저한 신앙체계로서의 민족종교가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대종교는 그렇기에 꼭 종교단체라고 간단히 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대종교는 당시 국난을 맞아서 애국심에 불타는 지성인들이 구국의 비밀결사 단체로 만들되, 그것을 일종의 종교형태로 바꾼 것이라고 하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종교는 흡사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 하마스, 체첸반군과 같은 항일구국 결사대였다.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을 보면, 그것이 쉽게 이해된다. 그는 당시 빼어난 젊은 유학자였으니, 29세 때에 문과에 장원급제 하여 부정자(副正字)로서 종구품관(從九品官)의 벼슬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33세 때에 징세서장의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구국의 길로 나서게 된다. 그리하여 8년후 41세 때에는 애국운동을 위해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고, 동양평화를 위해 협조하라는 의견서를 일본정계에 전달하고 일본 궁성 앞에서 3일간의 금식항쟁을 결행하였다.
그러던 중 을사늑약이 맺어지는 비통한 상황을 목격하고 동지들과 을사오적을 직접 저격하였으며, 전라남도 무안군의 지도(智島)에 유배까지 되었으나 광무황제의 특사로 곧 풀려 났다. 돌아와서 융희3년(1909년) 음력 1월 15일에 서울에서 대종교를 처음으로 포교하니 그 날이 중광절(重光節)이다. 그는 교세확장에 주력하여 융희4년 6월에는 서울에 2748명, 지방에 1만8791명의 교인을 확보할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그는 종교를 통한 항일의 토대를 쌓다가 7년후(1916년)에 구월산 삼성사에서 일본의 폭정에 통분하는 비장한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였다.
나철이 대종교를 세운 뒤에 나라가 일제침략자에게 강점을 당하자 제 2대 교주 때에는 대종교의 본사(本司)를 아예 만주땅의 간도지방에 있는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대종교의 모든 힘을 쏟아서 항일독립 전쟁을 수행하였다. 대종교는 그렇기에 종교의 형태를 띤 결사체였으나, 사실상 조국애로 뭉치고 단군숭배로 똘똘 뭉친 항일전쟁의 비밀사령부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후 만주땅에서 전개되는 항일전쟁의 엄청난 자금이 바로 대종교에서 조달되었고, 독립군들이 가진 최신무기인 기관총, 장총의 많은 숫자가 대종교의 지원에 의해 구입이 되었다. 오죽하면 일제는 대종교 금지령을 내리고 철저히 토벌작전을 전개했겠는가?
대종교는 지도인물의 대다수가 대한제국의 유생 혹은 유생의 후예, 그리고 의병들이었다. 그러니 만주땅을 넘나든 애국자의 대다수는 바로 단군대종교의 신도였으며, 기라성같은 애국인맥이 모두 하나로 뭉쳐 있었다. 생각하면 단군대종교는 유교를 믿는 유학자 가운데서도 애국정신에 투철한 정통 유림의 결사체였고, 조선시대 양반 지도층 지성인의 명예를 상징하는 단체였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받아서 교세가 끊어질 정도의 피해를 입었고, 요즘에는 유림에서도 대종교는 다른 교파인 줄로 착각하는 흐름까지 있는데 사실은 같은 종교이다. 앞으로 단군대종교와 유교가 합해져 단군유교 정도로 통일된 길을 걸어야 옳지 않을까 한다. 유교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이 단군대종교이고, 단군대종교의 뿌리가 유교임이 언제라도 강조되어야만 우리의 항일전쟁사가 제대로 보이게 될 것이다.
단군대종교의 2대교주 김교헌은 정3품의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으니, 성균관의 최고관으로서 유학을 가르치는 일을 맡았던 당대 최고의 학문 수준을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요즘에는 성균관이 사립대학이 되었으나 고려말에서부터 시작하여 조선시대로 이어온 정통 국립대학이요 민족지성의 상징이었던 성균관에서도 제일로 치는 학자(교수)였던 그가 쓴 역사책인 신단민사(神檀民史), 신단실기(神檀實記), 단기사고(檀記事故)는 그의 높은 학문을 뜻하는 저서로서 만주 독립군과 그 자제들의 기본 교과서였다.
2대교주 김교헌은 나철보다 5세 아래이다. 그러나 김교헌도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옥당, 병조참의, 예조참의,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한 거물이다. 더구나 독립협회 대표위원으로 만민공동회를 열 정도의 인물이다. 나철이 5세 연상이지만, 또 장원급제한 뛰어난 인물이지만 하급관직에서 일찍이 물러난 인물의 뒤를 이어 대종교의 기본교리를 만들고, 폭넓은 독립운동에 나선 것을 보면 두 인물의 관계나 그릇이 짐작되고도 남을 일이다.
만주에 옮겨간 대종교는 김교헌의 이끌음에 따라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였다. 대종교에서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 해(1918년)에 이미 39인이 서명한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를 작성 발표하여 3.1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비밀결사 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북로군정서로 발전시켰으니, 서일 장군의 지휘 아래 김좌진, 나중소, 이범석이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여 큰 전과를 올리게 된다. 서일 장군은 대종교의 최고 지도자인 백포종사(白圃宗師)로서 역사상으로 유명한 장군들인 김좌진, 나중소, 이범석이 그의 지휘를 받았다면 그가 어느 위상을 갖는가를 웅변하는 것이다.
서일은 김교헌의 뒤를 이어 3대 교주가 될 인물이지만 항일전쟁의 진두지휘에만 전념하다가, 청산리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이 경신대토벌 작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동포를 살해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이 세상을 떴다. 서일은 청산리 전투에 직접 참여함은 물론이고 그 많은 무기와 군수물자를 댄 엄청난 공로가 있으니, 모두 대종교의 뒷받침을 뜻하는 것이다.
3대교주 윤세복은, 김교헌이 8년만에 수많은 동포들이 일제의 총칼에 희생됨에 통분하다 별세하자 단군대종교의 대통을 잇는데, 3대교주를 맡은 만큼 위대한 애국자였다. 그는 안희제, 서상일 등과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했고, 만주로 건너가 포수단을 조직하여 홍범도, 조맹선 등과 왜적에 정면으로 맞선 인물이다. 이 무렵에 있어서 만주 독립군의 대다수는 대종교의 신도가 되었으니 윤세복 같은 인물이 3대 교주가 됨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2) 신흥무관학교와 청산리전투
신흥무관학교는 만주땅 항일전쟁사의 금자탑이다. 단군대종교가 정통 유학자 지식인의 결사체로서 항일전쟁의 정신적, 물질적 토대가 되었다면, 신흥무관학교는 정면으로 독립군을 양성한 자랑스런 역사이다. 당시 만주땅에는 여러 갈래의 독립군 양성의 흐름이 있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 가장 확실하게 대량으로 독립군을 양성한 경우가 신흥무관학교이다.
신흥무관학교는 항일 전쟁 시대의 대부(大夫)이며 사실상의 영의정이라고 불리우는 이회영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회영 가문은 조선시대 재상으로 유명한 이항복의 직계손으로서, 그 유명한 가문답게 후손들도 모든 것을 항일전쟁에 바치고 명예를 지켰다. 이회영은 6형제 전원이 전재산을 갖고 남녀노소 전가족을 합해서 만주땅 통화에 망명하여 독립군을 양성함에 아낀 바가 없었다. 엄청난 재산을 갖고 망명하여 10년에 걸쳐 약 3500명의 독립군을 양성한 뒤에, 본인들은 굶어 죽고, 일제와 싸우다 죽고, 다치며, 약간의 가족만이 만신창이 상태로 귀국하였다.
이회영 가문은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가로서 나라와 나랏님께 모든 것을 바치고 애국을 한 전형적 가문이라고 해서 틀릴 것이 없다. 특히 이회영은 당대 제1수준의 지식인이요 빼어난 유학자인 이상룡을 교장으로 초치하고 유명한 장군들을 교관으로 모셔와, 만주 독립군의 위상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러움이 없게 만들었다.
이회영, 이상룡이 앞장서고 이청천, 김광서, 신팔균등의 명장들이 길러낸 독립군이, 서일, 김좌진, 홍범도, 안무, 최진동 장군의 부대와 합해져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통쾌하게 격퇴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당연히 이기게 되어 있을 정도였다. 당시 우리 민족을 대변하는 지성인으로서, 유림 최고의 지식인들이 이론과 사상을 심고, 당대의 최고 명장들이 군사훈련을 시킨 데다가, 대종교의 자금이 대폭 투입되었으니 대승을 거두는 것은 분명한 것이었다.
청산리 대첩은 구국의 결의를 다지며 모든 것을 희생한 당대의 애국자들의 뜻을 받든 것으로서, 당시의 지도층 양반 사회를 반영하는 유림의 핵심들의 정성과 피눈물로 범벅된 애국의 씨가 뿌려지고 자라서 맺은 보람찬 열매가 분명하다.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적 위상은 어떤 것인가?
첫째로 신흥무관학교는 나라가 무너지고 침략자가 국토를 강점할 경우에 애국을 한다는 것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를 보여준 상징물이다. 뜻있는 애국인사들이 스스로 모든 재산을 바치고 목숨을 내 놓고서 구국의 군인을 길러낸 신흥무관학교, 언제라도 숙연한 자세로 옷깃을 여미고 고마운 마음을 갖게 후손들의 심금을 울려주는 항일전쟁 시대의 제 1 상징물이다. 요즘 우리 주변에 값싼 애국을 하고서 천박한 행태를 보이는 사람이 적지 않다. 고통받는 이웃을 돕는다고 계산된 자선행위를 하고는 신문에 이름내기에 급급한 사람도 흔하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로 달려간 모든 사람들은 그런 치기어린 사람들이 아니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완벽한 절대애국(絶對愛國)의 표본 그대로이다. 전재산을 팔아서 눈덮인 청천강, 압록강을 건너 혹한의 황야에 가서 옥수수밥에 좁쌀죽을 먹으며 목숨을 내놓고 구국의 군인을 기르는 일은 언제라도 후손에게 들려 줄 거룩한 전설 그대로이다.
둘째로 이석영, 이회영, 이시영 등의 존경스런 6형제나 이상룡, 이동녕 같은 망명 지도자는 모두가 정통 유학자들이었다. 공부를 했다는 사람들이 국난시에 해야할 일을 행동으로 보여준 인물들인 그들은 유림의 핵심이고, 양반 지도층의 핵심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배운 사람들인 지식층에 지탄받을 인물이 적지 않다. IMF국치를 맞아서 지도급 인사들이 보여준 행태는 부끄럽기 짝이 없다. 국가파탄, 지불유예 직전의 경제난국을 만들어 놓아 국고가 바닥이 나고, 수많은 기업이 쓰러지고, 길거리에 실업자가 넘쳐 나는 비극을 만들어 놓고서 그 누가 겸허하게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는가? 일제침략시 같으면 매국노가 되고도 남을 인간들이 국정의 요직을 차지하고 나라를 망치고 있는 것이다.
IMF국치 상황을 보건대, 현대 학문에는 혼(魂)이 없고 뼈대가 없다. 단순히 숙달된 지식 기능공을 만드는 것이 현대 학문이기에, 그것은 진실로 학문을 한 것이 아니요 그렇기에 IMF국치를 맞은 것이 분명하다. 조선시대의 정통 유학자요 지도층인 양반은 IMF국난과 같은 일을 저지르고서 하늘을 보고 가슴을 펴고 살 사람은 없었다. 그런 올바른 지도자들이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혹한의 만주땅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로 국방철학의 참모습을 보여준 것이 신흥무관학교였다. 나라를 수호하려는 국방철학은, 근본이 철저한 정신무장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당시의 유학은 바로 국가를 위한 정신무장의 모든 것을 갖춘 것이었다. 전후기 의병에서 부터 독립군으로의 흐름은 모든 것을 유림층이 주도했었다. 생각하면 일제침략의 국난을 맞으며 제대로된 우리 민족의 정예는 차례차례 조국에 목숨을 바치고 죽어 갔다고 하겠는데, 쓸만한 애국인사의 절대숫자가 죽고 난 뒤에 경술국치가 왔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나 일제강점의 비극의 시대에 있어서도 만주땅에는 신흥무관학교의 올곧은 정신을 이은 정통 애국혼이 넘치고 있었다.
그 드높은 정신이 침략자에게서 조국을 탈환할 때까지 독립군 정신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만주의 조선족은 6.25전쟁을 겪으며 직간접적으로 국내와 교류가 많았다. 6.25전쟁에 참전한 팔로군은 거의 모두가 정통 독립군이었고 중국 내전에서도 수많은 독립군이 죽었다. 그리고 문화혁명 때에 핵심 지도자는 모두가 죽임을 당했을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만주의 조선족은 사실상 정예 지도층이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이다. 그러나 옛 소련지역의 고려인들은 우리 민족의 우수한 흐름을 잇는 정통 애국혼을 간직한 인맥이 사실상 그대로 남았다.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에를 가보면 고려인들에게서 진짜 우리 민족의 우수한 옛모습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독립군들의 애국혼이 남아 있는 동포들이란 생각이 뿌듯하게 드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넷째로 군인이 무엇인가 하는 바른 대답을 해주는 곳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군인을 보는 야릇한 흐름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일제침략 교육의 상처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일제는 당시 우리 민족이 독립군이 되지 않게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제의 강제징병은 그들이 패전하기 직전 한 두 해에 불과 했었다. 전쟁 말기에 가서 수없이 많은 군인들이 죽게 되자, 우리 민족도 강제징병한 것이지 그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일제는 독립군이 범죄자들이고 흉악범이라고 선전했고, 군인이 되어 애국을 하는 것을 바보같이 몰아 가다가 패전을 했었다. 그들은 골수 친일파만을 일본군에 넣었고 군인에 대한 야릇한 입장을 일반인에게 전파했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서 군부통치의 시대가 있었고 군부정치를 비판하는 흐름이 강조된 때가 있었다. 그리하여 군인을 야릇하게 보는 흐름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군인은 성스러운 직업이다. 군인이 없기에 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재산을 징발당하고 노예같이 하급 밑바닥 삶을 살며 징용, 징병, 정신대로 끌려 갔었던 것이다. 요즘도 정신대 할머니의 한(恨)을 말하는 소리가 높은데 그 모든 것은 군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흥무관학교는 군인의 소중함을 웅변하는 거대한 상징물이다.
3) 천도교와 3.1만세항쟁
동학천도교는 동학에서 비롯된 종교로서 3.1만세항쟁의 주도 세력이다. 3.1만세항쟁에는 독립선언서에 천도교, 불교, 개신교가 공동으로 선언하였으나 당시의 국민들이 널리 참여한 것이었고, 유림측에서도 대거 광무황제의 국상에 참여하여 대대적으로 만세항쟁에 나섰기 때문에 유림도 공동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특히 3.1만세항쟁에 맞춰 파리장서에 137명이 서명하고 항거한 것은 독립선언 33인 보다도 파급효과가 적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천도교와 3.1만세항쟁의 관계는 매우 강력한 위상을 갖는다. 그 까닭은 3.1만세항쟁의 씨앗을 뿌리며 기획을 하고 전개시킨 중심적 일은 거의 모두 동학천도교에서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1만세항쟁의 최대 공로는 천도교에 있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천도교는 어떤 성향을 갖는 종교인가? 그것은 일단 창시자 최제우를 분석함에서 나타날 것이다. 최제우는 몰락 양반가문의 후예로서 어려서 유학을 배운 인물이다. 그는 서학(西學)인 기독교에 대항하여 동학(東學)을 만들고 민족고유의 새로운 종교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그는 동학의 기본 뿌리를 유교,불교,선교(仙敎)에 두고 유불선(儒佛仙) 3교에서 좋은 점을 뽑아 민족종교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유불선 3교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조선시대의 토착 사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조선시대는 옛부터의 불교나 선교를 밑바탕 정서로 깔고서 유교의 정신이 중심적으로 이끄는 시대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동학천도교는 차라리 유교의 민족적 토착화 종교라고 함이 보다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또한 당시의 시대구조로 보아서 조선시대의 상층부는 보다 유교성향이 뚜렷하고, 농민층이나 피지배층은 유교성향이 상대적으로 약해지면서 토착적 불교나 선교의 흐름이 강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3.1만세항쟁은 이와 같은 당시의 사회성향을 토대로 하여 전개된 것이라고 하겠다.
일제침략이란 처참한 국난을 맞아서 전후기 의병을 거쳐서 만주땅의 독립군을 이끄는 데에 양반 지도세력이 살신성인하며 차례차례 죽어가고 난 뒤에, 국내에 남아 있던 피지배층 유교세력들이 동학천도교의 기치 아래 한덩이로 뭉쳐서 총궐기한 3.1만세항쟁의 의미는, 그 시대의 사상적 흐름을 분석하면 그 저변을 흐르는 성향이 명쾌해지는 것이다. 사실상 평범한 사람들의 유림층이 일으킨 것이 3.1만세항쟁이고, 거대한 민족혼 분출의 드라마를 연출한 힘은 예전의 의병봉기부터 꾸준히 유림층이었음을 재차 증명하는 것이다. 3.1만세항쟁의 정치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로 3.1만세항쟁은 평범한 다수가 항일의 활화산에 불같이 동참하면서 일어난 항쟁이다. 그것은 우리 민족은 하나같이 뭉쳐서 일제침략에 항거를 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일제침략의 잔혹한 흐름에 정면으로 항거한 유림 양반 지도층이 차례대로 죽음을 맞고 만주땅으로 밀려나면서 국내가 일제에 강점 당하며 국내는 죽은 듯이 조용한 땅이 된 듯 했다. 그러나 3.1만세항쟁에 의해서 전체 민중이 다 함께 궐기함에 의해 항일전쟁은 지도층만이 나선 것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둘째로 3.1만세항쟁은 광무황제의 급격한 시해에 의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나랏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 그것이 표출된 것이 3.1만세항쟁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민족의 구심점으로서의 임금님에 대한 끝없는 사랑의 심정이란 특수감정의 존재를 망각한 연구가 그간 주종을 이뤄 왔는데, 그것이 없이는 결코 민족적 분노가 하나같이 폭발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국내에 잔류해 있던 다수의 국민들은 만주땅에 망명한 사람들에 비해서는 행동력이나 결심이 뒤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내면에는 침략자에 대한 분노와 갈등이 잠재되어 있었고, 그것이 일시에 분출된 계기가 바로 광무제 시해였던 것이다.
셋째로 3.1만세항쟁에 참여한 천도교를 중심으로한 민초들의 성향이 논의되어야 하겠는데, 그것은 당시의 사회에 널리 퍼진 유교의 영향에 의해 애국의 봇물이 터졌다고 생각된다는 점이다. 물론 불교나 개신교도 어느 정도의 참여는 있었으나 천도교가 주축을 이뤘고, 3.1만세항쟁에 참여한 민초들은 나름대로 유학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기초적 토대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특히 천도교가 내면에 분명히 유교의 토대를 가진 민중유교의 성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겠다. 애국성향이 높은 유학의 세례를 받은 민중들이었기에 나랏님의 비극에 총궐기를 할 수가 있었지, 그 토대가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생각된다.
4) 후기 항일전쟁의 전개
만주땅의 청산리 대첩과 국내외에서 벌어진 3.1만세항쟁의 거대한 승리는 역사에서 언제나 칭찬받을 일이다. 일본은 우리 민족이 만 35년 동안에 걸쳐 망했었다고 항상 강조했었다. 그러나 항일애국자들은 결코 망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망국을 인정한 상해임시정부는 그런 측면에서도 정당성이 없는 조직이다. 광무황제의 국상 중에 역적행위를 한 것도 문제지만, 일제의 침략을 사실상 추인한 행위를 한 것이 임시정부 수립이다.)
망국을 인정하지 않는 오기의 민족혼에 의해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애국자들은, 그러나 엄청난 대군을 동원해서 쳐들어오는 일본침략군에 밀리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독립군들은 곳곳에서 밀려나고 곤혹스런 상황이 됨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끊임없이 항쟁을 계속했다. 흑룡강 연변을 따른 시베리아 벌판은 곳곳이 독립군들의 기지였다. 그리고 다수가 중공군의 팔로군이 되어 항일전을 폈고 장개석 군대와 공동전선을 펴기도 했다. 그리하여 조국을 다시 탈환한 영광의 날(1945년 8월 15일)을 맞고 개선한 것이다.
조국탈환의 영광의 날에 귀환한 세력은 대다수가 유림층이다. 그러니 유교, 대종교, 천도교로 대변되는 민족종교 세력이다. 여기에 3.1만세항쟁을 전후하여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망명했던 개신교 세력이 함께 항일운동을 하다가 귀국했다. 개신교 세력들은 신민회의 주축이 되기도 하고 만주땅 항일인맥에서도 중요한 일을 많이 했었다.
2. 일제의 종교탄압 정책
지금까지의 논술 전개를 통해 국난을 맞은 비극의 순간에 나라를 지키고 나랏님을 수호한 종교는, 가장 중심된 것으로서 유교였음이 명쾌하게 드러났다. 단군대종교는 유교와 똑같은 것으로서 유림층에서도 애국심이 가장 뛰어난 지도세력이 만든 비밀 결사체로서 최고 정통 유림의 종교라고 하겠다. 그에 비해 동학천도교는 몰락양반이나 중인, 피지배층의 종교로서 대중적인 유림세력이 표출된 바라고 하겠다.
따라서 국난을 맞은 위기의 순간에 나라를 지키려고 나선 애국적인 세력은 근본적으로 대다수가 유림세력이었고, 적절한 숫자의 개신교 세력이 합류했었다. 불교는 그 교리대로 중립적으로 산 속에서 수양에 힘썼으니 논외로 쳐야겠다. 그러나 친일의 선봉에 섰던 부끄러운 해외유입 종교가 하나 있었음을 역사는 결코 잊지 않고 있다. 이와같은 종교행태에 대해 일제침략자들은 어떤 종교정책을 택했는가?
1) 단군대종교-철저탄압, 박멸정책
단군대종교는 그 종교 자체가 항일 독립군단의 성격을 갖는 애국종교의 대표적 위상을 갖는 만큼 일제침략의 철저한 피해를 보았다. 일제의 대종교 탄압은 심리적․이론적 탄압의 수준을 넘어 서서, 실체적으로 대종교 집단을 범죄집단으로 몰아 살륙극을 서슴치 않았다. 대종교는 그리하여 항일전쟁 시대에는 일본군에 의해 철저히 색출되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겪으며 조국탈환을 위한 성스럽고 성스러운 순교의 길을 갔다. 만주땅의 독립군은 거의 모두 대종교 신도라고 할 정도였는데, 그 다수가 존경스럽게 조국을 향해 아낌없이 스스로를 바친 순교의 길을 갔다. 그리고 철저히 이론적,심리적 공격을 받아서 자유당 시대 이후에는, ‘단군과 같은 허황한 존재를 믿는 바보들’로 조롱을 받고 외면되며 고통을 겪고서 교세가 철저히 줄어 들었다.
일제침략은 요컨대 첫째로 단군대종교에서 가장 숭배하는 단군을 극단적으로 공격하며 신화로 몰아 나갔다. 우리의 역사를 날조하여 고대사는 허황된 것이며 단군은 존재하지도 않는 가공의 신화라고 매도하여 나갔다. 그리하여 요즘에는 단군을 거론하거나 단군의 존재를 말하는 사람이 매우 이상한 사람인 듯한 기묘한 사회분위기가 만들어져 있을 정도이다.
둘째로 단군대종교는 반국가 단체요 폭도라고 하며 범죄단체로 규정하고 박멸정책을 펴나갔다. 일제의 만주땅 학살은 역사에 알려진 바도 있으나, 역사에 기록도 되지 않은 잔인무도한 학살극이 끊임없이 이어졌는데, 그들의 학살극은 만주땅에 있는 우리 민족의 씨를 말리는 작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만주땅에 있는 우리 동포는 무조건 독립군이요 단군대종교 신도라고 보아서 박멸정책을 폈으니, 그것은 세계사에서 언제라도 규명되고 징벌되어야 마땅한 일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단군대종교는 가혹한 탄압을 받을대로 받고서 오늘날에는 거의 흔적을 찾기 어렵도록 교세가 기울었다. 생각컨대 단군대종교는 일제강점 시대의 침략자들의 눈에 가시와 같은 범죄단체 가운데에서도 최악의 범죄집단이었다.
단군에 대한 역사는 요즘에 들어서 고대사 연구가 활발히 진행됨에 따라 단군실사(檀君實史)로 분명히 정리되는 단계에 다다랐으나, 그간 현대시대에 들어서도 일각의 종교에서 단군을 우상이요 미신이라고 매도했는데 그것은 일제침략의 종교정책에 2차로 감염된 우매한 일이 분명하다.
단군대종교는 오늘날 교세가 매우 미미하며 거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일제침략의 상처가 너무나 깊어 단군대종교를 믿는 사람이 있다면 흡사 이상한 사람으로 받아 들여지기도 하고, 단군대종교를 사이비 종교 정도로 생각하는 기막힌 흐름도 있을 정도이다. 일제침략에 있어 종교침략이 가장 집중되었던 단군대종교를 보면 일제침략이 얼마나 간악하고 잔혹한 것이었는가를 뚜렷이 볼 수 있다.
2) 유교-극단적 비방, 철저탄압
유교에 대한 공격은 단군대종교에 맞먹을 만큼 가혹한 것이었다. 먼저 유교에 의해서 조선시대가 퇴보하고 썩었다는 논리를 강하게 퍼뜨렸다. 조선시대 역사를 당파싸움 등으로 어둡게만 부각시키면서 그 모든 책임을 유교에다 뒤집어 씌웠다. 세계 곳곳을 보아도 종교는 종교로서의 장단점이 존재함이 널리 증명된다. 세계의 선진국이 많이 믿는 기독교에 있어서도 중세 천년의 기나긴 암흑의 시대가 있었고 수많은 사람이 기독교로 인해서 죽고 다치고 고통을 겪었다. 유교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고 하는데, 기독교를 믿는데도 불구하고 망한 나라나 왕조도 많고, 부패하고 못사는 곳도 많다. 그런데도 유독 유교 때문에 조선이 썩었다는 논리는 유교를 공격하는 침략자들의 견강부회적 과잉논리가 분명하다.
그리고 고려 시대에 있어서는 불교의 흐름에 과잉으로 몰입되면서 고려시대가 망하게 되었으나, 삼국시대에는 불교가 국가발전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강한 국력을 갖도록 도왔던 것이 사실이다. 불교가 좋은 영향을 준 때도 있으나 고려시대에는 엄청난 해악을 끼쳤다. 유교 자체를 공격하면서 여러 종교 사이의 균형감있는 비판은 항상 강조되어야 하겠다. 오로지 침략자를 막은 애국종교인 유교만 편파적으로 비방한 일제의 침략논리는 대단히 문제가 큰 것이다.
그들은 또한 유교의 문제점을 공격하면서 당연히 공자의 가르침은 고루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옛 성현의 가르침은 항상 그 시대에 맞게 유연한 해석을 해야지 그 가르침에 찌든 해석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 마호멧, 석가의 가르침도 모두가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문제점이 노출되는 곳이 적지 않다. 고루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점은 어느 성인의 가르침에도 있다. 머나먼 옛날의 가르침이 오늘날에 틀리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것을 오늘에 맞게 유연하게 해석하고 실천함이 중요한 것이다. 예컨대 기독교의 성경책도 엄밀히 분석하면 얼마나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가? 그리고 수많은 사람을 죽인 기독교의 마녀사냥이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천동설을 주장하는 비과학적 종교교리로 짓밟은 과거의 역사를 두고서 유독 유교만 욕할 수가 있을까? 이런 예를 든다면 수도 없이 많다. 또 이러한 사례는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로 들 수 있다.
침략일본은 우리나라 유교의 교조에 해당하는 안향(安珦)에 대해서도 유교를 들여와 나라를 망쳤다고 끊임없이 공격했다. 침략일본은 불교를 들여온 이차돈, 개신교 1호 목사 서경조, 천주교 1호 신부 김대건을 안향에 대한 비방과 같이 하지를 않았다. 아니 김대건 신부는 비방은 커녕 최대한 부각시켰다. 생각컨대 중국에서 외국학자에게 자(子)로 높혀서 성인 취급을 하는 사례가 거의 없고, 우리 민족에서는 유일하게 높혀 불러서 안자(安子)로 추앙받는 거대한 유학자 안향을 일제침략자들은 끝없이 모함하고 헐뜯었으니 그것의 진짜 이유는 유교가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유교를 공격한 핵심적 이유는 유림 세력이 너무도 애국적이고 너무도 훌륭하여 유림이 있으면 그들의 침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는데, 거꾸로 유교를 욕하는 논리만이 오늘날에는 이 땅에 남아있다. 침략일본에 세뇌된 종교침략 논리를 말하는 간교한 흐름은 주로 친일파들이 퍼뜨렸는데, 그것이 오늘날에도 남았으니 기막힌 일이다. 이 나라의 오늘이 친일파들이 주도권을 쥐고서 강한 친일유습에 찌들어 있는 기막힌 사회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요컨대 유교를 욕하는 것은 우리의 독립의지를 꺾고 우리를 무력화시키려는 것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서 역사를 보아야 역사가 제대로 보일 것이다. 일제의 유교 공격은 침략적 종교공격의 전형적인 것이었다.
특히 일제침략자들이 안향을 공격한 핵심적 이유는 첫째로 안향이 양현고(養賢庫)나 섬학전(贍學錢)을 만들어 인재양성의 기금을 만들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고려말 이후 조선시대 인재양성의 기틀을 만든 인물이 안향이기에, 요즘으로 말하면 국립 장학재단 혹은 학술진흥재단을 만들어 학문을 크게 발전시킨 토대를 놓았다는 점에 유의한 것이었다. 이것은 인재를 양성하고 국립대학인 국자감의 재정적 뒷받침을 확실하게 한 것이니 고려말 이후 조선시대에 걸쳐 우수한 인맥이 나오는 토대를 만든 것이다.
둘째로 안향이 정립한 유교의 학풍은 바로 민족주의 내지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의한 정의론(正義論)이 주축이었다고 하겠는데, 일제침략자들은 그것을 예리하게 본 것이다. 안향이 살았던 때의 남송(南宋)의 학풍은 몽골족의 침입에 따른 애국적 정의론의 성향이 높았고, 안향이 살았던 때의 고려말도 몽골족의 침입에 따른 민족주의적 흐름이 강했다. 일제침략자들은 왜 조선 유학자들이 일제에 철저히 항거했는가의 이유를 안향의 유교학풍에서 찾은 것이다.
셋째로 안향의 학문적 수준이 너무 높아서 조선 유학자들의 정신적 기둥이 됨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안향을 공격하면 조선 유학자들의 구심점 공황이 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주세붕의 백운동 서원이 왜 안향의 고향에 세워졌는가? 최초의 서원이 조선시대의 정신적 스승의 고향에 세워 졌음을 뜻한다. 다시 이황의 요청에 의해 그곳에 임금님 친필의 소수서원(紹修書院)이 만들어 졌음도 중요한 것인데, ‘소수’란 전통을 잇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안향의 드높은 정신을 잇는다는 것이니 ‘소수’정신이 바로 조선 유학자들의 저항의 원천임을 깨닫고 안향을 끝없이 모함하고 헐뜯었던 것이다. 그래야 그들의 침략에 저항하는 핵심세력을 와해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3) 동학천도교-탄압 및 회유, 이이제이(이간) 정책
일제는 동학천도교를 일으킨 최제우나 최시형을 철저히 매도함은 물론이고 철저히 탄압하는 정책을 썼다. 그러나 동학천도교에 대해서는 단군대종교나 유교 보다는 탄압의 정도를 강하게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동학천도교는 우리 사회의 최고 지도층이 이끄는 조직이 아니라 민중들의 종교였고, 만주땅에 망명하여 결사항전을 하는 바도 비교적 적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동학천도교는 3.1만세항쟁 때에 극도로 탄압을 받았고 신도들이 무수한 고초를 겪었다. 그런데 동학천도교도들은 단군대종교나 유교와 같이 무장투쟁을 한 흐름이 적다 보니, 점차 회유하고 변절시키는 등의 교활한 종교정책을 썼었다. 또한 동학천도교도들이 주로 국내에 많이 잔류해 있었기에 회유하고 변절시킨 친일세력을 통해 애국세력을 꺾고 내분이 일어나게 하면서 자멸되게 하는 전략도 강하게 썼었다.
4) 개신교-탄압 및 무시, 이이제이(이간) 정책
개신교는 일제침략자들에게 묘한 정책이 나오게 만들었다. 개신교의 일부는 확실히 항일을 했는데, 또 그렇지 않은 숫자도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교나 단군대종교 신도들 같이 결사항전을 하는 성향도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적절히 달래고 탄압하며 무시하는 복합적 정책을 썼다.
그리하여 나타난 기묘한 사례의 하나가 개신교 1호 목사인 서경조인데, 항일애국에 전가족이 나선 훌륭한 가문이고 존경받을 뛰어난 목사인 서경조의 이름을 아는 우리 민족이 거의 없다. 천주교 1호 신부인 김대건이 사뭇 위대한 영웅인 듯 억지로 높히고 신격화시킨 듯이 받들어지는 사회에서, 정말로 훌륭한 목사님인 서경조는 완전 묵살되고 말았으니 침략자들의 역사서술이 어떠했나를 말하는 기막힌 사례가 되겠다.
그러나 일제는 한편으로 동학천도교같이 일제에 협조하는 변절세력을 만들려는 노력도 집요하게 경주하였다. 그리하여 개신교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변절자가 나오게 만들었다. 또한 변절세력과 애국세력을 교묘히 조종하여 내분과 알력이 유발되게 하는 흐름도 강하게 조장하였다.
3. 맺는 글
①
항일전쟁 시대의 역사는 많은 것이 거꾸로 되어 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것의 가치판단은 거꾸로 해석해야 옳은 것이 많다. 우리는 흘러간 옛 얘기만 그런 줄로 알고서 식민사관에 의한 오도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고쳐야 할 것은 결코 흘러간 역사만이 아니다. 오늘의 삶이 곧 바로 잡혀야 할 핵심인 것이 널려 있다.
예컨대 그간 깡패학교라고 했던 학교는 예전에 항일애국의 학교였고 모범학교는 친일파의 학교였었다. 요즘 소위 일류학교라고 하는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빼어난 애국자가 누가 배출이 되었나를 살펴보면 이해가 간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부끄럽고 치욕적인 전통의 학교를 다니며 일류학교를 다닌다고 믿는 기막힌 나라가 바로 오늘의 우리나라이다. 가치관 전도현상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하겠다.
그리고 일제가 우리에게 제일 먼저 세워준 대학이 의과대학이었고 다음이 법과대학이었다. 면밀히 계산하여 학과를 만들어 주고는, 그것도 신원조회를 철저히 거쳐서 입학을 시켰다. 그것은 우리의 젊은이들이 친일파가 되게 만드는 흐름과 함께 독립군이 되거나 첨단과학이 발전되거나 하는 것을 막으려는 저의가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도 요즘의 젊은이들도 공부를 잘하면 무조건 의사가 되거나 고등고시를 보아야 하는 줄로 알고 있으니, 이 나라의 인재배분 왜곡현상은 그 병리적 뿌리가 깊고도 깊다. 이 나라의 발전을 막으려는 침략적 교육정책의 폐해는 지금도 우리 사회의 고질병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현재의 우리 사회에 있어서도, 우수한 젊은이들을 국가와 민족은 없이 사리사욕적 출세주의에 빠져 개인영달이나 꾀하고 돈벌어 개인만 편히 사는 인간이 되게 만든, 그들의 오도된 교육정책이 강력하게 남아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소위 일류대학을 나온 우수한 인물 가운데 대부분이 그런 길을 갔고, 인생을 헛된 가치추구로 초개같이 살고서 늙어서는 후회하며 눈을 감게 만드는 기막힌 흐름인 것이다. 또 일본경찰에 철저히 항거한 안강최 3개 씨족을 얼마나 헐뜯었는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들이 독하고 못되었다며 몰아치는 것은 거꾸로 해석해야만 된다. 그것은 안강최 3개 씨족이 애국에 철저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②
항일전쟁 시대의 역사는 정말로 다시 써야 한다. 생각컨대 항일전쟁 시대의 의열단이나 다물단은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케 할 정도로 격렬한 전투를 했었다. 특히 김원봉이 지휘한 의열단은 신채호가 지은 조선혁명선언을 기치로 내걸고서 3.1운동이 일어난 해(1919년)의 11월 10일에 만주 길림에서 창단되어 문자 그대로 항일혈전을 벌였었다. 제1차 밀양 폭탄 공격, 부산경찰서 폭탄 공격, 그리고 제2차 밀양경찰서 폭탄 공격, 조선총독부 폭탄 공격, 상해 황포탄 의거, 김상옥 열사 의거, 동경 이중교 폭탄 공격, 식산은행 및 동양척식회사 기습공격 등의 치열한 항일전쟁을 연이어 벌였다. 이봉창, 윤봉길 의거는 의열단 공격이 계속되는 후기에 나오는 만큼, 의열단의 찬란한 항일위업은 일제강점 시기의 대표적인 특공작전이 분명했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의 한인애국단은 끝없이 칭송되고, 그토록 큰 업적을 쌓은 의열단은 일반인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다시 예를 들어 본 논문에서 다룬 단군대종교와 상해임시정부를 일대일로 비교해 보자. 우리의 역사가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분명히 깨달을 것이다. 학생들의 성적표를 매기듯 한다면, 단군대종교는 최고점으로서 A학점이라면 상해임시정부는 비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서 아무리 잘 주어도 C학점에나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가치가 몇 배나 될 단군대종교는 역사에서 거의 잊혀져 있고, 상해임시정부는 과잉으로 부각되어 있다. 우리의 항일전쟁사는 사실상 거꾸로 쓰여있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첫째로 단군대종교는 최고의 지성인들이, 그 시대를 이끄는 최고의 지도급 위상을 갖고서 애국을 위한 결사대로서 뭉쳐진 것이다. 유학을 배운 최고 지식인들의 유교 민족주의 단체라고 할까?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종교단체가 아니라 종교단체로 위장된 항일단체로서 요즘의 체첸반군이나 PLO, 하마스 같은 정예 조직이었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는 단군대종교에 비하면 온갖 잡동사니 인물이 뭉쳐서, 많은 시간을 말로만 애국을 한 집단이다. 겉으로 이름만 멋있는 조직에 가깝다.
둘째로 단군대종교는 민족 최고의 어른인 단군을 내세운, 사상적으로 최고 수준의 격조 높은 단체로서 민족애에 불타는 고매한 집단이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는 그 국난의 시기에 새 집을 짓고서, 서로 집주인이 되겠다고 내부 분란만 계속한 것이다. 또 새 집으로서의 임시정부는 대한황실이 망했음을 인정한 것이니, 사실상 일제 침략을 추인한 것이고 정당성을 평가 받기도 어렵다고 생각된다.
셋째로 과거 시험에 장원급제한 나철, 성균관 최고의 학자인 대사성 김교헌, 청산리의 최고 지도자 서일, 만주 항일 운동의 추진자 윤세복을 비롯한 기라성같은 최고 수준의 인물이 이끌고 있는 단군대종교는 유교를 믿는 당시 최고의 애국 유학자 조직이다. 그러나 과거 시험에 7번 떨어지고 미국에서 말로만 애국을 하고 다닌 이승만, 윤봉길이나 이봉창을 죽음으로 내보내고 끊임없이 세월만 보낸 김구가 모두 보통사람 혹은 하층민 출신이다. 당시의 사회로서는 이승만, 김구는 그 위상을 제대로 내세우기도 어려운 사람들이다.
넷째로 단군대종교의 지도자 나철, 김교헌, 서일을 비롯한 수많은 애국자가 철저 항일, 철저 애국의 길을 티없이 걷고 숭고하게 순국했다. 거룩한 순교자들이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의 지도자에 있어서는 단군대종교에 비하면 사실상 부끄러운 일이다. 도대체 무엇을 내세울 것인가?
다섯째로 단군대종교는 만주항쟁의 커다란 밑돌을 놓고, 청산리대첩의 자금, 군대 등의 전반적 뒷받침을 하여 빛나는 승리를 거두게 만든 혁혁한 실적이 있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가 한 일이 무엇인가? 무료하게 시간만 보내다가 제 발로 찾아와 살신성인한 이봉창, 윤봉길이 있을 뿐이니 본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여섯째로 단군대종교는 일제침략자들이 본 최고의 항일단체였기에 대종교 포교 금지령에 의해 법으로까지 금지된 단체였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는 윤봉길 의거가 있기까지, 긴 기간을 그대로 존치되어 있을 수 있었다는 것부터가 단군대종교와는 현저히 다른 것이다. 요컨대 상해임시정부도 훌륭한 애국단체가 분명하나, 단군대종교를 어찌 감히 쫓아갈 것이며, 감히 비교하겠다는 말이 성립되기도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애국에 철저히 헌신하고서 만신창이가 된 단군대종교는 거의 숨도 못쉬게 죽어가는 수준으로 귀국한데 반해, 상해임시정부는 모든 일을 자기들이 한 듯이 귀국했다. 그 이후로 엄밀히 말해서 상해임시정부는 역사를 오도한 것이며, 단군대종교를 생각한다면 겸손해야 할 것이다. 역사의 균형감이 되찾아지며 단군대종교가 제대로 평가되는 때가 꼭 올 것이다.
전성기에는 30만명의 막강한 신도를 갖고서, 만주 항일애국 활동의 전반적 흐름을 이끌었고, 대다수의 정통 항일 애국자가 모두 가입해 있었던 눈부신 실적의 단군대종교를 보는 눈은 분명히 바로 잡혀야 한다. 3.1만세항쟁 때에 많아야 일천명 내지 이천명 정도의 사람들이 산발적으로 모여 들어서 분열과 파쟁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한 두해 만에 뿔뿔이 흩어져, 단지 몇 사람이 이끌던 이름만의 상해임시정부가 항일애국의 모든 것을 말하는 것같이 된 허망한 역사는 꼭 바로 잡혀야 한다.
③
일제침략자들은 유교와 단군대종교가 씨도 없이 사라져 없어지기를 끝없이 추구했고 온갖 교활한 정책을 개발했다. 특히 단군대종교는 완전히 박멸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나온 처절한 후유증은 오늘날에도 고질병같이 계속되고 있다.
첫째로 이 나라의 지도층 양반은 모두 썩은 줄 안다. 그리고 옛날에 양반은 모두 몹쓸 인간들만 있었는 줄 안다.
그리하여 요즘에도 무조건 공무원을 부패의 대상이라고 보아 정권을 쥐면 무자비하게 개혁할 대상으로 본다. 그러나 소수의 부패 공직자는 언제나 있는 것이었고 대다수의 건실한 공직자가 나라를 이끄는 것이다. 정치가들은 정권을 쥐고서 차라리 공직자 보호책을 세워야지, 개혁대상으로 모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지도층을 모두 썩은 것으로 보는 공직자관은 일제침략의 상처임을 유의해야 한다. 현재도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핵심중추가 누구인가를 면밀히 생각해 보면 당연히 공직자들이다. 건실한 공무원, 군인, 경찰, 교육자 등이 국가의 기둥인데 조선시대에 그 구실을 한 집단이 양반층이었으니, 일제침략은 양반층을 집중적으로 공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떤 사회나 그 사회를 이끌어 가는 건실한 중추집단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양반층이 바로 그러한 집단이었고, 일본의 침략을 막는 가장 큰 장애집단이었기에 일본은 끝없이 양반을 헐뜯는 이론을 산출해 냈다. 조선시대 역사를 쓴 일본학자들이 어떤 시각으로 역사를 썼는가를 예리하게 분석해보면 명쾌하게 드러나는 일인데, 도대체 조선시대 역사에서 양반층을 칭찬하는 사례를 발견하기가 거의 어렵다. 철저히 헐뜯고 철저히 어둠의 비리, 부패집단으로 만든 것이 양반층이다. 그것은 양반층이 침략일본의 침략을 막는 가공할 힘을 가진 집단이고, 항일전쟁의 핵심세력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짓밟은 것이다. 침략일본은 침략을 하고서 이 나라 양반층의 깊고도 건실함에 너무나 놀랐기에 양반층을 공격한 것이지, 모두 친일 매국노 양반이었다면 공격을 했겠는가?
둘째로 이 나라를 이끄는 경국의 이념으로서의 유교가 무너지지 않고서 침략완성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세력이나 유림층을 무너뜨리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피해를 입은 대표적 존재가 공자, 안향이었고 유교 자체도 가혹한 공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우매한 일반인들은 공자와 안향이 나라를 망친 인물같이 생각하게 되었고, 유교를 멀리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일본의 침략정책이 왜 공자, 안향, 유교에 집중이 되었는가는 생각함이 없이 오늘날에도 그것을 앵무새같이 외우는 흐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일제침략의 최면술에 걸린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공자의 가르침은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져야 한다. 유교의 옛 논리에만 경직되게 따르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고 유교의 현대화는 항상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공자, 예수, 마호멧, 석가의 가르침을 보는 균형잡힌 눈은 언제라도 긴요한 것이다. 모든 종교가 그 종교논리에만 기계적으로 묶여서 찌든 상태가 되면 인간의 창의성을 말살하고 그 사회를 고루하게 만드는 점을 균형감있게 유의해야 한다. 그간 막연하게 종교관을 갖고 침략일본 논리에 사상적 꼭두각시가 되었던 것을 과감히 고쳐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종교적 주체성이 선다.
왜 우리나라에는 유독 공자를 비방하고 욕되게 하는 흐름이 그토록 강한가? (그것은 기독교 국가에 가면 마호멧을 어떻게 말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회교 국가에 가면 예수를 어떻게 평하는가를 보면 쉽게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나 마호멧이나 똑같은 성자인데 서로 앙숙관계인 회교와 기독교에서는 상대방을 비하하고, 자기측 성인은 극대적으로 추앙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자, 예수, 마호멧, 석가가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좋게 보일 수가 있을 수도 있으나, 국가적 차원의 종교가 없는 형편에서 누가 더 위대한 성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꼭 같을 뿐이다. 그러나 저변을 흐르는 강한 흐름이 있으니 공자를 비방하는 그 흐름은 침략일본의 산물이다.
그것은 우리나라에 종교를 시작한 시조에 있어서도 꼭 같아서 천도교의 최제우는 범죄자, 대종교의 나철도 범죄자인데, 유교의 안향은 자타가 공인하는 훌륭한 인격에 조선 유학자들의 최고의 스승이라 차마 공격을 할 수는 없고 ‘유교를 들여온 바보’라고만 몰아간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의 서경조는 묵살하고 천주교의 김대건은 최고의 영웅인 듯 역사를 썼다. 침략일본의 교활한 종교정책이 눈에 선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모든 종교를 객관적으로 보면서 역사를 알고 일제침략자들의 간교한 종교정책을 예리하게 살펴야 할 것이니, 침략일본의 거짓논리가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살아서 우리를 옥죄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요컨대 일제가 유교의 항일애국을 막으려고 얼마나 절치부심했는가를 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유교가 없어져야 이 나라가 망하겠기에 침략자들이 그렇게 했던 것인데, 이 나라의 현실은 거의 침략자들 뜻대로 되어 있다.
셋째로 단군을 짓밟고 우리의 고대사를 헐뜯으며 역사왜곡을 함에 총력을 기울였다.
단군의 존재를 온전히 둔다면 언제라도 우리 민족의 민족혼이 다시 살아남을 일제는 철저히 유념하였다. 그들은 단군대종교에 대한 연구를 세밀히 진행하며 정통유학자들이 왜 하나로 뭉쳐서 만주로 망명을 떠나 목숨과 재산을 다 바쳐 애국자가 되는가를 분석하였다. 그 결과로 단군을 주목하게 되었고 단군이 있는 한 우리 민족의 완전한 침략은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나타난 후유증으로 우리 민족의 많은 숫자는 아직도 단군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신화니 우상이니 떠들고 있다.
요즘 우리의 국력이 향상되면서 고대사 연구가 꾸준히 최촉되고 있다. 그리하여 단군연구는 나날이 진전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웃 중국의 요동지역인 요녕성의 심양 근처에서는 매우 찬란한 고대 유적이 발굴되었다. 우하량(牛河梁) 유적이 바로 그 곳인데 약 5500년 된 실물대 크기의 여성상이 발굴되어 학계를 흥분시키고 있는데, 중국에서는 그것을 동양 최고 최대의 여신상이라고 하나 우리측의 입장으로 볼 때에는 고조선의 지도자가 분명하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가 황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갠지스 지방이라고 하는 이론도 침략일본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황하문명과 같은 시대에 같은 수준의 고조선 요동문명이 만주땅에 있었음을 유의한 고대사 이론침략의 전형적인 것이다.)
그리고 여성지도자와 함께 많은 고고학 유물이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그런데도 요즘의 우리들은 단군의 존재를 못믿는 사람들이 널려 있다. 일본의 침략 후유증이 너무도 심각한 것이다. (몇 년전에 이북에서 단군릉을 발견한 것을 보고 무조건 빨갱이의 이론 날조라고 비방한 일각의 흐름도 침략일본의 후유증이다. 이북의 단군릉은 앞으로 더 연구가 되어야 할 것이나, 옳은 발견이고 옳은 연구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학계의 여러 의견이다.) 단군연구는 침략일본의 상처를 고치는 시급한 일이나 그 장애물은 너무도 많다. 침략정책의 후유증은 오늘날에도 생생히 우리들의 삶에 살아있다. 일제침략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우리 민족의 종교사회가 건강성을 찾는 길은 아직도 우리의 많은 노력과 시간을 요구하고 있다.
넷째로 종교적 가치전도 현상이 극도로 심화되고 있다.
그리하여 가장 애국적이고 민족사에 길이 남을 뜻깊은 종교인 단군대종교, 동학천도교, 유교는 너무도 교세가 약화되어 심지어 존재 여부를 모르는 수준이 된 것도 있다. 사실상 자유당 시대 이후의 이 나라는 친일본당이 살아서 그들이 주도권을 쥐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니 애국종교들이 살아 남을 까닭이 없다. 친일본당이나 친일영합 세력들이 단군대종교나 동학천도교를 범죄집단 같이 보고, 유교는 철저히 헐뜯고 비방하던 침략일본의 뜻대로 이어서 생각해 주는 기막힌 사회가 되었으니 종교정의(宗敎正義)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산 속에 은거하며 조용히 수양을 한 불교만 해도 거의 침략을 받지 않고 방치해 둔 상태라 요즘 교세가 크다. 그리고 적절히 처세한 일부 세력에다가 미국 등의 지원이 있는 개신교도 교세가 크다. 그러나 비극의 시대에 민족을 배반한 어떤 종교는 요즘 가장 성스러운 종교인 듯이 민족을 기만하고 역사를 우롱하며 교세가 실로 대단하다. 친일본당의 나라가 되었으니 종교상황이 그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막힌 종교상황이 되고 말았다.
앞으로 우리 민족에게 다시금 국난이 닥쳐온다고 할 경우에 조국을 지키겠다고 나설 종교는 어디 있겠는가? 친일매국 성향의 종교를 믿는 부끄러운 다수가 어찌 조국을 지키고 애국을 한다며 목숨을 내놓을 것인가? 이 나라의 종교정의를 바로 잡는 일은 너무도 시급하고 중대한 일이라 하겠다. 현재의 이 나라는 자유당 이래로 종교정책 부재의 나라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사실상 침략일본의 종교정책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부끄러운 나라의 모습 그대로이다.
다섯째로 우리 민족의 뿌리를 부끄럽게 아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요즘 새롭게 민족사 교육을 강화하고 역사의 참된 모습을 찾고자 국가적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들이 많은 성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정곡을 벗어나 겉도는 느낌이 적지 않다. 예컨대 서울의 종로에 있는 종묘를 보면 우리의 자화상을 충분히 알수 있다. 전래의 국립묘지요 최고의 국가사당으로서, 현재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까지 된 곳인 종묘 앞을 가보면 우리 민족의 뿌리가 기막힌 상태에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그것은 침략일본에 영합했던 부끄러운 종교에서, 요즘 전국 곳곳에 순교성지를 세워서 억지로 성지를 만드는 것과 대비하면 민족의 치부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 종교를 비롯한 외세와 일제침략으로 대한황실은 거대한 실체 자체가 죽고 사라져 순교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나라와 나랏님을 지키기 위해서 단군대종교, 동학천도교, 유교, 개신교 신자가 수없이 죽었으나 순교성지가 어디 있는가?
진실로 순교한 측은 숨을 죽이고 있고, 침략에 동조한 부끄러운 측은 순교를 했다는 이 나라는 사실상 오늘도 정신적으로는 침략자가 다스리고 있는 치욕적인 나라가 분명하다. 그리고 순교의 참뜻도 엉망인 나라가 되었으니, 조국도 민족도 역사도 배반하고 종교이기주의에 따라 무조건 죽으면 순교라는 개념도 너무나 낮은 차원의 것이고, 그것은 사실상 순교가 아닌 위선이다. 진짜 순교를 한 위대한 애국자들의 뜻을 살리고, 역사의 뿌리인 대한황실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은 조속히 찾아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 후손들에게 당당한 이 나라가 될 것이다. 현재는 후손들에게 조국을 등지고 이민을 떠나라는 나라와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종교 상황이 분명하다.
여섯째로 조선 정신사의 맥이 끊어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혼(魂), 아니 단군이래 민족정신의 맥이 끊어진 것이니 학맥(學脈) 단절의 기막힌 현상을 만들게 되었다. 조선시대 학문의 비조(鼻祖)인 안향을 원나라 사람들이 안자(安子)로 높혀 불렀다는 것은 안향이 스스로의 창조적 학문세계를 갖춘 대학자였다는 뜻이다. 스스로의 학문세계를 갖춘 학자에게 자(子)를 붙여서 높혀 불렀던 것인데, 안향은 우리나라 학문사에 있어서 유일한 인물이라고 하겠다. 그렇기에 주세붕이 안향을 기리는 백운동서원을 세우고, 이황이 안향의 뜻을 잇자는 ‘소수(紹修)정신’을 학문활동의 기치로 내세웠던 것이다.
일제침략자들이 안향과 유교를 집중 공격함에 의해서 우리는 옛부터의 정신사가 단절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요즘의 젊은 학자들에게는 두 가지의 병이 나타났다. 그 하나는 정신사의 맥이 끊겨 지식 수입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외국의 발달된 지식을 받아 들이되 적극적으로 소화시켜서 우리의 학문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맹목적이라고 할 정도로 수입만 하고 소화과정이 없다. 수입된 지식이 어떤 것인가 실체규명도 없이 무조건 수입을 하고 배탈이 나는 경우도 흔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스스로의 학문세계를 구축하려는 학자가 나타나질 않는다. 말하자면 학문의 벤처기업이 만들어지거나 고도의 창조력을 가진 첨단 기업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외국이론을 앵무새같이 외우는 학자들이 양산되고 있다. 일제침략이 안향, 유교, 공자에 집중되었던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우리 학계에 있어서 그 아픔의 진실을 아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될까 의아스럽다. 민족정신사의 맥을 잇고 민족학문의 주체성을 찾는 노력이 미완성 항일운동을 완성시키는 차원에서 끈질기게 강조되어야 하겠다.
일곱째로 민족적 법도(法度)와 예절이 무너졌다.
사실상 부끄러운 상놈나라가 되었다고 비판을 들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나라가 되었다. 전통적 품위와 격조의 상징인 양반층을 몹쓸 집단이라고 몰고, 뜻깊은 삶을 뜻하는 유교를 짓밟은 후유증이 바로 상놈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부락(部落)이란 단어를 생각해 보자. 요즘 전국의 농촌이나 어촌을 가서 얘기를 들어 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이 사는 곳을 부락이라고 한다. 그런데 부락이란 말은 너무도 경악할 창피한 말이다. 심지어 교육을 받은 점잖은 분들도 생각없이 그대로 쓰는 단어가 그것이다. 그러나 부락이란 단어는 일제침략 이전에는 없던 것이다. 일제침략자들이 우리땅을 침략하여 강제점령한 뒤부터 쓰인 것인데, 부락이란 일본의 천민촌을 뜻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침략하여 우리를 천민들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침략정책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양반을 썩었다고 끝없이 헐뜯고, 유학이 잘못되었다고 계속 짓밟았으니, 우리 사회가 밑바닥 상놈사회가 될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를 우민화 시키는 정책을 철저히 전개시켰다. 우리 사회의 모든 법도와 질서를 짓밟고서 예절 공황사회, 밑바닥 천민사회를 만들고는 모든 곳을 부락이라고 불렀으니 침략자들의 침략상처는 현재도 깊고 깊다.
법도도 모르고 예절도 없이 부락에 사는 천민의 모습을 생생히 갖고 있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적지 않다. 일제침략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노력은 언제라도 계속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후손들에게 정신적 뼈대를 심고, 자긍심을 주며, 뿌듯한 민족애를 되살려 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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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한국북방학회
첫댓글 최근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유교(유림)의 긍정적 재평가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위에서 대종교의 지도인물의 대다수가 대한제국의 유생 혹은 유생의 후예였다는 것도 그렇고, 웬지 조선을 망하게 하는데 앞장 섰을 것같은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일 것 같은 퇴계 학통을 계승한 영남 유생들이 오히려 가장 열심히 무장 투쟁에 앞장서고 또한 혁신적인 유림으로 거듭나 근대 학교를 세우고 걸출한 사회주의 이론가들을 배출했다는 기록들을 보았을 때는 놀라움마저 일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단군에 대한 폄하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의 근간이 되었던 유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 또한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이라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