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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완역이 안된 일부 번역본입니다.
로얄 레이먼드 라이프의 일생과 라이프 주파수 기기
1888.05.16 - 1971.08.05
이것은 로얄 레이몬드 라이프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그의 초창기 삶은 바로 1888년 5월 16일 네브라스카 엘콘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로얄 레이몬드 라이프와 아이다 메이 라이프의 둘째 아들이었다는 것이 많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의 아버지는 기계 기술자였다.
로얄 라이프의 강한 독일식 억양은 그들 가족언어로서 집에서 독일어로 의사소통했던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엘콘의 웹사이트는 그들의 지역조상의 47%가 독일인인 것으로 나타나있다). 라이프는 4-5년 뉴욕에서 일한 후(칼 지이스 의료팀을 위해서) 1912년 샌디애고에 첫 연구실을 차려 연구를 시작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지이스 광학회사(주요현미경 제조와 다른 광학기구)인 칼 지스(독일 하이덴베르크 소재)에서 일했던 독일에 가버린 것처럼 보였다.
훗날 경력으로 그는 미해군 사령관이었고 은퇴한 것처럼 보였다. 유럽에 있는 동안 미 정부에 연구과제를 제안하기도 했다. 1912년 그는 샌디애고 지역에 있는 메이미 퀸과 결혼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1910년 말 또는 20세기에 1차세계대전이 일어날 즈음 유럽을 광범위하게 여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라이프는 뛰어난 음악가였고 프랑스식 호른과 기타를 연주했다. 한 개의 기록은 그가 100줄 기타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는 고출력 라이플 총을 수집하면서 뛰어난 스포츠맨이였고 1971년 그가 죽을때까지 고출력 모터보트 스피드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악기(모터보트중 하나와 함께) 사진은 어떤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1954년 존 크래인이 쓴 라이프 자서전에서 라이프는 1914년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부터 명예 기생충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돼 있다.
크래인은 라이프가 30년대에 기록상으로는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으로부터 학위를 받았다고 돼 있지 않더라도 1936년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으로부터 명예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했다. 라이프는 1921년 그의 첫 현미경을 만들었고 이후 많은 조사와 함께 광학과 광선을 이용한 현미경을 제작했다.
그는 1929년 (특허번호 1727618) 현미경 이용을 위한 고해상도 조명장치 특허를 냈다. B. 콜리(바실루스 콜리)가 이용한 테스트에서 라이프는 확실한 주파수에 오디오 주파수가 노출된다면 박테리아가 ‘비활성화’되거나 죽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후 테스트에서 같은 주파수에서 B. 콜리의 다른 샘플들도 같은 결과를 보였다. 라이프는 가능하다면 바이러스 크기가 더 작은 병원균에서도 보이는 수단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광학현미경과 1000배율에서 1500배율의 규정 광학현미경이 한계를 가지는 요인(프론호퍼 회절한계)과 광학현미경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라이프는 자신의 현미경 몸통에서 특별한 영역의 석영프리즘이 매우 긴 광선을 가진 현미경을 만들기 위한 수단을 찾아냈다.
아울러, 그는 여러 가지 빛의 파장을 포함한 하얀선이 고배율 광학에서 맞지 않는다는 것을 결론지었다. 그리고 그의 광선과 샘플 사이에 ‘리즐리’프리즘을 이용했다. 그로 인해 (레이저를 사용한 오늘날의 고해상도 연구현미경과 매우 유사한) 하나의 단색성 빛의 고유주파수를 가진 샘플을 볼 수 있었다. 라이프는 1920년에 선반용 침대와 유사한 광학받침대를 가진 현미경 ‘제1호’를 만들었다.
2호 현미경도 제조과정이 비슷했다. 그러나 규격 현미경과 비슷한 수직 포맷으로 1923년에 만들었다. 1932배율 프레임까지 볼수 있는 2호 현미경은 아더 켄달 박사가 사용하도록 북서부 대학에 보내졌다. 1933년에 만들어졌고 오른쪽 위에 보이는 그림인 3호 현미경은‘세계적인 현미경’이다. 이 현미경은 편광, 밝은 영역, 어두운 영역, 적외선과 자외선 이미지를 보여주는 기능을 가졌다. 이 현미경은 라이프가 살아있는 바이러스 샘플을 측정하는데 이용한 기구로 알려진 이래 여러 분야에 이용된 기구다.
1935년에 만든 4호 현미경은 편광단계가 없지만 1만5천배이상 배율을 제공한다. 그리고 라이프가 생산자를 찾으려 했던 간단하고도 일반적인 현미경의 초기 버전으로 보인다. 라이프는 4호 현미경이 생산자의 요구로 만들었지만 그가 누구였는지를 말하지 않았다고 그의 편지중 하나가 전하고 있다.
1938년 영국 신문은 4호 현미경이 영국에 보내졌다고 전했다. 그리고 라이프를 위해 일하는 기술자들이 그것을 설치하는 걸 돕기 위해 갔다고 보도됐다. 이후 1939년 4호 현미경은 라이프에게 돌아왔고 같은 곳으로 새로워진 5호 현미경이 보내졌다.
1938년 즈음 만들어진 5호 현미경은 영국런던 과학박물관에 있다. 일반인 관람이 허용된 것은 아니지만 연구자 그룹은 그것을 정밀하게 관찰할 수 있고 1999년에 비디오테이프로 만들어졌다. 샌디애고 전기협회는 1930년 2월에 그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기타 기록들의 편지
라이프는 인기가 있었고 매력적이며 유쾌한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1930년 초쯤 라이프는 마릴랜드 밀뱅크 존슨과 교유하기 시작했다. 밀뱅크 존슨은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생리학과 임상병리학의 교수로 있다. 그리고 특별의료연구위원회의 의장이었다.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은 그런 조직의 기록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존슨과 위원회가 언급된 다른 기록들은 수없이 많다. 위원회는 존슨 박사와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의 학장인 루퍼스 본 클라인스미드박사가 신사협정을 맺어 가능했다. 게다가 남부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연구원의 상당수에 의해 몇 년이상 불리워졌으며 이 그룹이 어떤 형식으로든 존재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존슨 박사는 알람브라 병원에서 일하기 위해 1893년 캘리포니아에 왔다. 그는 LA에 있는 미국 의료협회의 회원이었고 남부 캘리포니아 의료협회 회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설립자였으며 1903년부터 1905년까지 남부 캘리포니아 자동차클럽의 2대 대표였다. 그는 1906년부터 1933년까지 태평양상호보험회사의 대표이기도 했다.
존슨 박사는 라이프 기기의 개발에 있어서 숨은 공로자였다. 그와 그분야에서 널리 이름이 알려진 많은 사람들은 라이프 기기의 연구에 참여했다. 그리고 현미경과 ‘광선 기기’를 사실상 만들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러 가지 의료 연구자들과 유기체 연구를 포함한 이시기 박사들은 그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들이었다.
마요네즈 클리닉에서 실험적인 세균학의 으뜸;
북서부대학 의료연구자의 대표이자 다른 것들.
1931년 존슨박사는 연락해 시카코 인근 북서부 대학의 의료 연구 대표인 캔달 박사(나중에 의료학교의 사제)를 격려했다.그리고 캘리포니아에 돌아와 로얄라이프를 만났다. 두명은 잘 어울렸다. 켄달의 ‘K ’배양액(돼지피부를 발전시킨)을 이용해 라이프 기기또는 주파수 기기를 가지고 실험을 위해 인간 암세포를 배양했다.
1932년 존슨 박사는 켄달에게 편지를 썼다(파나마 운하건설계획에 포함된 위생시험소- 나중에 국가 위생시험소는 국립건강원이 됐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켄달은 1932년 남부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켄달은 65세가 되던 1942년 북서부 대학을 은퇴했다. 그리고 그가 멕시코에서 활동적으로 의지하고 있던 건축개발업으로 옮겼다. 그리고 1959년 후반 샌디애고에서 죽었다. 이후 개발 계획은 실패했다.)
1930년대 중반에 라이프는 성공적으로 오늘날 주요한 질병을 일으키는 주파수를 찾아냈고 기록했다. 그리고 매우 정확한 오디오 주파수에 의해 자극되는 헬륨 플라즈마 램프를 이용한‘광선기기’만들었다. 3일마다 한번의 짧은 노출은 최적의 효과를 내는 것처럼 보이는 치료수단이다. 그리고 의사들과 라이프의 ‘광선기기’를 이용했던 환자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았다. 그의 광선기기를 이용한 미국내 일부 의사들이 많은 다른 질병들에 대해 성공적으로 있었을지라도 의학적인 확립은 관심을 끌지 못했다. 아마 4호내지 6호은 실재로 매우 많은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리고 새로운 기술이었고 비싸고 만드는게 어려웠다.
라이프의 초점은 다양한 병원균을 죽이는 정확한 주파수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생각처럼 정확함을 추구하는 기계기술자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1933년 즈음으로 추정하건데 존슨 박사는 캘리포니아 알타데나에 사는 필립 호일랜드라는 오디오 기술자에게 라이프와 광선 원통기구를 만들거나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일하도록 제안했다. 이 때 성공한 오디오기술자로 알려진 필립 호일랜드는 그의 알타데나집과 차고에서 라이프의 기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트럭으로 라이프 실험실로 기계를 배달했다. 로라 마지와 결혼한 호일랜드는 1927년 파사데나로 이사했고 캘리포니아 프리미어 라디오회사의 회장이자 대표가 됐다.
1928년 로우리 전기회사의 영업사원에게 알려졌고 1929년과 1930년 파사데나에서 오디오 덕 회사의 서비스사원으로 알려졌다. 그는 알타데나 스톤허스트 584번지에서 살았다. 호일랜드는 라이프 광선기기를 최고로 만들었고 법원 기록에 따르면 라이프와 함께 라이프 광선기기의 소유자로 알려지기를 바랬다. 하지만 호일랜드는 라이프 기기의 대부분을 만들었지만 많은 명예를 얻지 못했다.
1934년 ‘암 클리닉’
1934년 봄, 캘리포니아 파사데나의 밀뱅크 존슨은 6월 중순에 시작되는 캘리포니아 라졸라에서 제안된 클리닉에 대해 아더 캔달에게 편지를 썼다. 3달동안 집을 빌릴 것이라고 했다. 6월부터 8월 또는 9월까지 스크립스목장 “별장”에서 열리는 클리닉을 폐쇄하기 위해
그는 이어서 “우리가 지속적으로 일할 인연이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암환자를 포함해 클리닉에 많은 환자가 있었다. 존슨은 후에 “도와줄 간호사도 보조자도 전무했다”고 기록했다.
1935년에 쓰여진 또다른 편지는 그가 “확신할 수 없다”라는 결과를 말했다.-어떤환자가 라이프 광선기기의 치료에 잘 반응할 것이라는 생각. 하지만 존슨은 그런 빠른 회복은 반드시 “치료”와 같은 어떤 일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다. -후에 로얄 라이프가 그들을 치료했다는 걸 확신시켰을 지라도 존슨 박사는 또한 편지를 썼다. 그가 혼자 클리닉을 운영하면서 몸- 임상대상에서 라이프 광선기기를 이용한 것을 증명했다고. 라이프씨는 이 클리닉의 대부분을 거의 확실하게 출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와서 관찰하거나 도와줬다. -그는 후에 그가 결코 인간 환자를 치료한 적이 없다는 것을 법정에서 증명했을까? 이 클리닉에서 한 환자는 1935년 초에 존슨박사를 접촉했던 환자인데 그의 뺨에 눈에 띄는 암세포를 가진 몇 명의 환자가운데 하나다. 그는 다른 의학박사들로부터 한쪽눈이 실명했다고 보내졌다.- 그는 여전히 실명되거나 회복하지 않았다는 눈암을 가진 증거였다.
존슨은 그가 눈의 제거를 위해 보내졌다고 확신했다. 조지 독 박사는 파사데나에서 라스 엔시나스 요양원의 대표다. 그는 로스앤젤렌스 지방의 의료협회 대표이다. “돌보거나”또는 보다 친절하게 충고하는 의사중의 한사람으로써 이 기간동안 여러 편지에서 밝혔다.
이 클리닉에서 많은 의사들이 능동적으로 분업한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한가지 경우. 앨빈 푸우드 박사는 후에 존슨 박사가 그에게 보낸 샘풀로 실험을 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존슨은 탐이 나는 글쟁이였다. 아직도 이 클리닉 기간과 1935년 에 쓰여진 몇편의 편지가 있다. 나는 라 졸라 클리닉의 결과를 만족하고 있고 그가 그 결과에 대해 많은 그의 친구들이 기록을 남겼다고 믿는다.- 클리닉의 결과에 중대한 의심을 가졌다면 이 편지는 결코 찾을 수 없었다. 1935년 5월 15일 존슨박사는 라이프에게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이 라이프에게 의학박사학위를 줄것이라는 통지를 보냈다고 썼다. 하지만 라이프는 남부 캘리포니아대학에 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신 존슨은 라이프에게 편지를 써 “유쾌하지 않은 통지”라고 한 라이프를 꾸짖었다. 또한 1935년 라이프는 “초고감도 청진기 중 하나”를 주문 받아 의사(덧말:義士)들과 연구자들을 위한 다른 기구를 대신 만들었다.
1939년 편지에서 그는 영국시장에 내놓아 치료하려고“청진기”와 다른 발명품을 가져오도록 요청을 받았다. (빔 광선 테스트를 하기 위해 호출받아야할 그 여행은 결코 이뤄지지 않았다) 존슨 박사는 1935년 가을, 로스 앤젤레스 산타페 병원에 기기를 설치해 라 졸라 연말 클리닉에서 광선 기기중 하나(아마 5호아니면 6호 현미경)중 하나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치료는 정확히 개인 질병에 초점을 맞춰 일주일에 두 번 매 5분씩 실시했다. 1936년 밀뱅크 존슨은 필(호일랜드)은 라이프 광선기기 중 하나라고 전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썼다. 그리고 그것을 고정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이 기간 중 다른 기록은 라이프가 필 호일랜드가 만든 기기중 하나를 최소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때로 두사람은 하나가 작업중이면 기기를 교환하기도 했다. 그해 4월, 굿맨 박사는 존슨에게 치료의 진척이 개선되는 것을 보여준 환자에 대해 편지를 썼다. 존슨이 라이프에게 쓴 훗날의 편지는 이 환자가 광선기기로 7분의 3분 치료를 받은 것으로 쓰고 있다. 라이프는 그의 작업에 있어서 더 나은 시설이 필요로 했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그리고 밀뱅크 존슨은 새로운 실험실의 기금을 모으기 위해 헨리 팀킨에게 달려갔다. -존슨의 편지는 팀킨이 추가기금을 보내는 것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쓰고 있다. 하지만 존슨은 브리지 여사의 도움으로 팀킨과의 관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라이프의 새로운 실험실은 1936년 4월 공사를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36년 8월 실험실을 옮겼다.- 비디오 필름에 나오는 존 크래인의 육성을 보면 확실히 실험실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의 특별함을 더해줄 존슨의 제안에 따라 지어진 새로운 실험실에 대만족했다. (손님이 시설을 이용할 때 연구실을 지나지 않도록 입구 옆에 휴식공간이 위치하도록 하는 제안 중 하나), 그리고 무거운 장비와 함께 지하에 동물실을 위치하도록 하는 것이다.
1936년 10월과 11월 존슨 박사는 파사데나 집에서 클리닉에 광선기기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일주일에 세 번 사용해 놀라운 결과를 가졌다는 보고를 했다. 그 보고에서 그는 수정된 기기를 사용하는 동안 새로운 주파수 밴드를 찾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밴드는 그의 실험실에 있는 모든 유리를 깨뜨릴 뿐만 아니라 실험실에 있는 모든 곰팡이와 배양샘플도 죽였다고 말했다. 존슨은 라이프의 편지를 읽고 매우 흥분했다. 이후 편지는 파사데나의 그의 클리닉에서 한 세션당 22명중 20명이 치료됐다고 말했고 놀라운 결과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존슨이 이 클리닉을 방문했을 때 라이프는 발표 결과를 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어떤 기록은 백내장을 앓고 있는 한 환자가 시력을 회복했다는 것을 말해준다-하지만 그 발표는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1936년 역사적인 기록은 라이프가 “지도자로서 라이프”였던 점을 보여준다.-광선 튜브에 노출시켜 회복한 암환자와 여러 형태의 백내장환자가 있다. 더불어 이 시기 라이프는 그의 시력을 잃어가고 있어서 유니버셜 현미경에 하루에 2시간 이상을 보내지 않도록 했다.
쉬지 않고 현미경 작업을 하는 긴 시간(여러날을 활동적으로)은 그의 희생을 가져오고 있었다. 램프 라이프 중 하나는 많은 자외선을 생산하는 작은 수은등이었다. 라이프가 석영광을 이용한 이래 자외선은 그의 잃어가는 시력에 도움이 됐을 것이다. 빔 레이 회사는 라이프와 호일랜드의 합작으로 1936년 9월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빔레이와 함께 라이프의 기기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만족할만 테스트를 거쳤고 그들의‘제대로 박멸하는 힘’으로써 증명해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것은 매우 명확하다는 것이다.
1937년 6월 1일 회사는 회원 수를 3인에서 9인까지 정관을 늘렸다. 빔 레이의 법인 구성; 벤자민 쿨렌(대표), 레이 윌리암스(부 대표), 베쓰 윌맨(간사), 필립 호일랜드, 찰스 윈터, J.W.키친, A.B.윅스, 조지 에드워드, 레이 레이놀드, 그리고 존 언스팅(9명 이상)(지금 운영되는 빔 레이 법인과는 무관하다고 기록돼 있다)
1938년 초, 벤자민 쿨렌은 빔 레이 주식 450주를 로얄 라이프에게, 140주는 필립 호일랜드에게, 480주는 에디스 헨더슨, 380주는 W.H 반 워트에게 전환하고 600주만 남겼다. A. W. 옴스테드는 53주를 찰스 윈터에게, 447주를 베쓰 윌맨에게 전환하고 100주만 남겼다. C. R. 허친슨은 250주를 C.W.언스팅에게, 50주를 조지 에드워드에게, 50주를 레이 레이놀드에게, 200주를 로얄라이프에게, 610주를 필립 호일랜드에게, 100주를 R.O. 버씬에게, 300주를 베쓰 윌맨에게 , 300주를 W.V. 블레??에게, 20주를 W.H.반 워트에게 20주를 에디스 헨더슨에게 그리고 447주를 찰스 윈터에게 전환하고 700주만 남겼다.
1937년 존슨 박사는 라이프가 헬륨과 아르곤 광선 튜브를 갖고 작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초기 버전은 헬륨이 있었고 그것은 유리관 안에 있던 작은 분자들과는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몇몇 기록들은 튜브들이 재 구성된 빔레이회사나 라이프에게 되돌려 져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 -또다른 기록은 라이프가 그의 초기 관에 헬륨을 사용했다는 걸 보여주며 플라즈마 램프에서 사용된 엄선된 순수한 가스같은 아르곤을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기록은 재구성돼 호일랜드에게 되돌려보내지거나 또는 사용된 순수한 가스와 함께 재충전된 튜브들에 대해 적고 있다.
-문서들에서 헬름과 아르콘 가스 모두 보여지고 있다.
1937년 6월, 존슨은 그의 파다디나 클리닉을 닫고 8개월 연구기간동안 뒤늦게 앞서 백내장에 대해 작업했다고 돼 있다.
안과의사와 함께 한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경우에 대해 환자의 백내장은 깨끗하게 치유되거나 남자 또는 여자의 시력을 더 이상 향상시킬 필요가 없을 정도라고 결론짓고 있다.
1937년, 필립 호일랜드는 샌디애고 지역에 살고 있었고 광선 기기를 로얄 라이프와 함께 작업하고 있었다고 돼 있다. 1937년 후반 존슨이 라이프에게 보낸 편지는 두 사람과 사이에 오해했던 상황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존슨이 라이프에게 보낸 편지는 줄었다.
1938년 서부 전기 협회 기록은 라이프가 평판 렌즈 망원경을 제작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작업은 아마 50년대까지 계속됐을 것이다. 왕립 현미경협회(외관상으로 영국 의과학 단체)의 1939년 문서는 라이프를 이 협회 회원으로 적었다.
이 이야기는 라이프로부터 그리고 기사에서 호일랜드를 일부분 의미한다. 1938년 버트람 고닌 박사는 그가 받았던 두 기계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표현으로 영국에 편지를 썼다. 그리고 몇 년후 존 크래인은 그가 빔 레이 종업원들중 한명이 영국에 완성되지 않은 기계를 보냈다고 생각했고 기계를 수선해달라고 보냈다고 적고 있다. 보다 새로운 것은 영국 사람들 중 한 명이 기계를 서투르게 수선했고 라이프의 종업원 중 한사람인 헨리 시너가 현미경을 바로 잡고 보냈던 기계를 가동시키기 위해 1939년에 영국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암시한다. 시너는 후예 레이 기계가 바르게 작동했다고 적었다. 그는 1939년 미국에 돌아왔다.( 4호 현미경을 들고)
라이프는 갈 계획이었지만 소송이 뒤따라 그 여행을 가로 막았다. 유니버셜 3호 현미경의 가장 간편한 버전인 5호 현미경은 후에 영국에 보내졌다. 그리고 현재 영국 런던의 과학박물관에 있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전시하지는 않는다.
1938년 4월 24일 로얄 라이프와 필립 호일랜드는 적절하고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라이프 레이 기계의 판촉을 위한 취지로 기계에 대해 C.R. 허친슨에게 3분의 1의 권리를 양도했다. 1939년 법원 기록을 보면 문서에서는 라이프 레이 발명품은 로얄 레이몬드 라이프, 필립 호일랜드, C.R.허친슨이 가진다고 돼 있다. 라이프 레이 기계가 필립 호일랜드가 만들었다는 주장은 정확하다는 것처럼 보인다.
- 대신 라이프 연구실의 (원래 필름)비디오 테잎에서는 많은 다름 실험실들의 방에 전시됐던 것일지라도 그곳에서는 전기적인 숍을 볼수 없다. 기계는 호일랜드에 의해 파다디나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라이프의 실험실에 옮겨졌다.
1938년 8월 빔 레이의 대표자는 벤자민 쿨렌, W.H 반 워트, 베트 윌맨, A.W. 옴스태드와 레이 윌리암스였다. 1938년과 1939년 호일랜드는 스톤허스트 드라이브 주소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샌디애고에 일시적으로 이사해 빔 레이 회사와 가까이 있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1938년 11월 뉴욕시에서 열린 미팅에서 빔레이 회사는 라이프 레이 기계의 유통과 관련이 있는 영국 버트람 고닌, 윌리암 블리??과 호워드 파슨과 계약했다. 1939년 5월에 호일랜드는 빔레이 회사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이 회사가 영국에서 기계의 제조와 개발에 판촉을 해왔고 이로 인해 기계 소유자중 하나인 호일랜드에게 로열티 지급을 줄이거나 지급하지 않았다고 청구했다. 또 앞서 언급한 양도주식은 불법이라고 고발했다. 호일랜드 대리인 중 한사람인 아론 사피로는 1920년대 미국과 캐나다에서 농촌 조합운동의 설립을 조직하고 있었다.
호일랜드가 데려온 사피로는 아직은 대리인이지만‘회사의 친구 ’로서 빔 레이 대표자 회의에 출석했고 호일랜드가 회사를 고소하는데 이용했던 엘리 레밴슨도 함께했다는 것은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다. 대리인 레밴슨의 이름은 법원 기록에서 자주 등장한다. -사피로는 오히려 드물게 적혀있다. 소송기록은 피고를 위해 찾아내면서, 1939년 12월 6일 샌디애고 고등법원 판사 에드워드 켈 리가 판결했다. 피고측이 사실을 인정하면서 호일랜드는 소송 비용지급을 명령받았다.
어떤 비용이 되돌려졌는지 찾아낸 기록이 없다. - 이때 회사가 파산한 것으로 보여진다. 호일랜드는 소송에서 피고가 대리인 비용을 지급됐는지를 그 소송에서 물었고 그의 고소건이 결정됐을때 파산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1940년 그는 다시 스톤허스트 드라이브 주소지에서 보였다. 1943년 호일랜드는 다른 주소에서 보였다. 19944년 파사디나로 옮겼다.
기록에서는 전기 분야에서 다시 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1940년 말 라이프는 애리조나 피닉스에있는 과학 연구협회 안데스 인류학 탐험대의 특별회원(또는 아마 로얄 펠로우)으로 명명됐다.
협회의 자문은 1940년대 남서부 미국의 의료와 경제계의 누군가였을 것으로 보인다. 레이몬드 시델 박사는 1942년 6월 라이프에게 기사를 위해 유니버셜 현미경에 대한 질문을 편지를 썼다. 시델은 프랭클린 협회(후에 스미스소니안)를 준비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들 기사중 하나는 http://www.rife.org에서 볼 수 있다. 심장병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밀뱅크 존슨 박사는 9월 30일 토요일 아팠고 1944년 10월 3일 월요일 밤이나 화요일 아침에 헌팅턴 메모리얼 병원(전 파사디나 병원)에서 죽었다. 존슨은 라이프 기기의 완성에 대한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 나는 예전부터 어떤 경우든 모험심에서 나중에 몇 년 동안 포함해온 존슨 스타일이 아니라고 확신했고 그런 상황의 암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는 지역 신문이 그것을 보도한 이래 그런 보도가 존재하거나 또는 계획돼되는 것이 정말로 좋지 않았음을 알았다.
1940년과 50년대 초를 거쳐 로얄 라이프나 빔 레이 회사 모두에 대해 부정적이었더라도 아마 1939년 소송이 있었던 것에 대한 행동으로 발생했을 것이다. 1950년 라이프는 존크레인을 기계기술자로 고용했다. 그리고 크래인은 후에 생산증대의 대표자가 됐다. 또한 1950년 얼라이드 회사로 사업을 출발했다.
1953년 라이프가 쓴 보고서는 BX바이러스는 그것이 성장하는 세포막에서 생명사이클의 다른 형태로 변할 수 있다. 그 기록은 조직의 다형태성을 의미한다.(다른 형태로 변화하는 조직) 아마 조직의 발전에 의존하는 다른 질병에 기인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 시기 의료학설의 성취에 직접적으로 반대돼 왔다.
라이프는 의학계 주류들이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주목할 만한 사실에도 수년간 연구에 투자했다. 라이프는 의학 잡지를 만들고 가능한 치료와 투자를 조절할 수 있는 의학계 주류에서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는 의사였다. 건강관리는 치료에 대한 것이 아니다. 제도상에서의 치료는, 즉 환자의 건강은, 불행하게도 중요하지 않은 관계다.
1954년 9월, 라이프는 1953년 이래 대리인으로 일해온 로우 항공사에 ‘측정용 망원경’에 대한 권리를 넘겼다. 1950년대 후반 솔트레이크 시의 몰몬교회와 존 크레인, 크레인과 함께 일했던 존 마쉬 등 여러사람들로부터 많은 기록이 있다. 확실한 것은 솔트레이크 시티 지역에서 라이프 기계가 하나 이상은 실험적으로 사용돼왔다. 라이프의 이름은 컨설턴트로 조언자로 알려져 왔던 것중 하나로 부상했다. 그래서 명백히 이시기 라이프는 레이 튜브 기술이나 그가 설립해 권한을 가진 회사에서 부분적으로 일했다.
또한 1954년 샌디애고 연합회사가 신청한 연구보조금에는 라이프가 주임연구원으로 돼 있고 조사의 책임자임을 보여준다.
존크레인은 관리자, 디자인 엔지이너로서 기록됐다. 베른 톰슨은 전기엔지니어의 대표로, 존 툴리는 개발 동료로, 카메룬 블랜드는 전기 엔지니어로. 제임스 B. 카우치 의학박사는 컨설턴트로서 보여졌다. 카우치 박사는 몇 년 동안 라이프와 관련이 돼 있었다.
1956년 존크레인이 보낸 편지는 라이프 실험회사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라이프 바이러스 현미경 협회 또한) 이 기간동안 기술을 침묵시키는 의학적 성과를 지속하기 위해(성공하기 위해) 회사를 보호하는 시도로써 명백하다. 1958년 존크레인은 플라즈마 튜브를 이용하지 않는 기계로 진보시켰다. 그리고 유타주에서 “자가 치료”해 결과적으로 전립선암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을 보고했다.
1950년대 말에 크레인은 수많은 녹음 테이프를 만들었다. 그 테이프는 로얄 라이프와 그 기계들 그리고 라이프의 경험들을 포함한 것이다. 그리고 라이프 기계의 크래인 버전을 만들기 시작하기 위해 동부로 돌아간 사람과 함께 사업을 시작한 가능성이 들어있다.
이 시기 레이 튜브 기기는 일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중서부지역에서 하나를 가진 의학박사가 있었고 놀랄만한 성과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라이프는 일반인의 장 내에 존재하는 일반적인 상태와 산성도에서 암조직을 변화시켜 대장균을 처치했다는 테이프중 하나라고 진술했다.
“1967년 라이프는 닌쓰 항소심 법원에 편지를 썼다.(사건번호 21542 존크래인의 항소를 지지하며). 그는 도움과 설득하는데 한계를 가졌던 해리브리지와 H.H.팀킨과 밀뱅크 존슨의 지지를 받았다.” 이는 그의 지지자들이 만들어낸 얼마 안되는 추천서 중 하나다.
이것은 유행하는 거의 모든 참조 중에 하나 그의 후원자에 전에 만들다인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의 건강에서 끔찍한 텃세로 인한 의료계의 마녀사냥과 다양한 시도를 제외하고는 1971년 8월 5일 그가 죽을 때까지 50년대 중반부터 이 기간동안 라이프의 알려진 이력은 없었다.
그는 1939년 소송을 피하기 위해 멕시코로 갔다. 그리고 존 크래인과 존 마쉬가 피고가 된 1950년 추가 소송이 있었고 그들은 감옥에 갔다. 나는 소송 기록이 없다. 어느날 라이프는 샌디애고 지역에서 바히 서약에 참여했고 그의 두 번째 아내와 결혼했다. 그것뒤에 언젠가, 유행하는 샌디에고 지역에서 Bahi 신념(안)에서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결혼된 그의 두번째의 아내.
라이프는 의심할여지없이 천재였고 전처럼 극빈자로 죽었다. 그는 샌디애고 중국인 이주역사에서 두드러진 그의 아내 마미 퀸을 따라서 샌디애고 마운트 호프 기념공원에 묻혔다. 라이프의 묘비는 여기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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