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죽의 300자 칼럼 (2009년 7월)
강남국
▢ 7월 1일 :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이라는 이육사의 싯구가 맨 먼저 떠오르는 칠월입니다. 성하(盛夏)의 계절이지요. 태양의 계절이고, 밝고 뜨겁고 건강한 계절이기도 합니다. 이어령은 『茶 한 잔의 思想』에서 “칠월은 태양의 달이다. 폭풍이 치고 괴로운 일이 있어도 젊음과 열정과 건강한 모험을 저버리지 않는 칠월은 태양의 달이다. 우리는 이 칠월 속에서 맹세한다. 생명을 부정하는 자들과 태양의 의지를 꺾으려는 그 모든 밤의 사상을 향해 활시위를 당길 것을…….”라고 했네요. 아무튼 뜨겁게 사는 것! 삶의 열정을 한껏 피우는 칠월이고 싶습니다. 비취빛 바다가 성큼 다가온 듯한 착각마저 드네요. 그리운 고향 앞장벌!
▢ 7월 2일 : 해마다 여름이 되면 생각나는 시집이 한권 있습니다. 『그리운 바다 城山浦』라는 이생진 시인의 시집이지요. 꼭 21년 전인 지난 88년 6월 우연히 라디오를 듣다가 윤설희라는 낯선 가수가 낭독하는 『그리운 바다 城山浦』를 듣고 홀딱 반했지요. “이 시집을 바다에 묻힌 가난한 사람들에게 바친다”라는 서문과 함께 시작하는 이 시집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제가 거의 다 암기할 정도지요.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 ‘無名島’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섬에서 태어났으나 섬이 왜 이다지도 그리운지 모르겠습니다. 여름이어 설까요?
▢ 7월 3일 : 게시판이 텅 비인 것 같습니다. 늘 새벽녘에 글을 올려주셔서 청죽이 들어가면 먼저 쓴 글이 올라왔던 김정윤(고전기타아)님의 부재가 이렇게 크네요. 수술은 잘 하셨고 지금은 회복 중에 계시 답니다. 텅 빔의 부재가 얼마나 큰가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연세도 있으셔서 걱정이지만 건강하신 모습으로 오시리라 믿습니다. 선생님은 평생 클래식기타를 지도하시면서『클래식기타 교본』이라는 책을 내시기도 하셨던 분이고 지금도 틈나시는 대로 강사로 활동하시고 계신 분이랍니다. 중앙일보사에서 발행한 ‘한국을 움직인 인물’에 실리기도 하셨지요. 빠른 쾌유를 빌며 하루빨리 다시 선생님의 글을 읽을 그 날을 고대합니다.
▢ 7월 3일 : 세상엔 수많은 악기가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사물 중에 악기 아닌 것이 없지요. 신이 났을 때 뭣인들 악기가 아닌 것이 있던가요. 인종에 따라 악기도 다르고 소리 또한 다르지만 신명에 벗하는 모든 것은 악기가 된다는 것을 압니다. 악기를 잘 다루고 못다루고를 떠나 악기를 잡는 마음이 중요하단 생각도 해보네요. 지친 영육의 긴장을 풀 때 좋은 음악을 듣는 것도 좋지만 악기만한 것이 있던가 싶기도 해요. 음악은 고운 손으로 연주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무디고 거친 손끝으로 연주하는 모습 또한 아름답습니다. 일상의 긴장을 풀면서 한곡 연주할 수 있는 여유를 오늘도 갖고 싶습니다. 악기의 먼지를 닦아내고 이 여름 신록의 향연에 흠뻑 취하고 싶습니다.
▢ 7월 4일 : 며칠 전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세계 100대 도서(The Top 100 Books of All Time)'을 선정해 공개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세계 최고의 도서(1위)라는 명예를 얻었네요. 목록을 쭉 훑어보니 조지 오웰의 『1984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등을 필두로 『롤리타』『음향과 분노』『투명인간』『등대로』『일리아드·오디세이』『오만과 편견』『신곡』등이 1~10까지를 차지했더군요. 우리나라의 작품이 단 한권도 들지 못한 것은 서운했지만, 낯선 이름은 몇 권 없었고 그래도 제가 그중에서 상당부분 읽었다는 것에 위안을 삼았습니다. 세월을 타지 않는 작품과 함께 살 수 있음이 행복합니다.
▢ 7월 5일 : 이제 휴가를 생각할 때군요. 생각만으로도 영혼이 뿌듯한 희열을 느낍니다. 일상의 잡다한 오늘을 벗어나 훌쩍 떠난다는 것 하나가 곧 신명이지요. 저는 가끔씩 목적지 없이 떠나는 것도 좋겠다 싶을 때가 있어요. 바다면 바다, 산이면 산, 그리고 계곡이면 계곡을 찾아 지친 심신을 풀어 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모든 것이 풍요로워졌으나 몸과 마음은 왜 이리 피곤한지 모르겠습니다. 옛날 사람들에 비하면 소유한 것도 많고 머리에 든 것도 많은 현대를 살지만 오늘을 산다는 것은 참으로 고독하고 외로운지 모르겠습니다. 훌쩍 떠나는 가방 속에 한권의 책을 챙겨 넣고 그동안 소홀히 했던 자신(眞我)과의 만남을 준비해야겠습니다.
▢ 7월 6일 : 홀가분한 아침이네요. 어제 기말시험을 치렀거든요. 여섯 과목 중에 ‘영국문학사1’이란 과목은 힘들었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은 탓이지요. 공부를 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단순한 진리가 가슴을 쳤습니다. 세상에 그것을 모르는 바보는 없는데 공부도 하지 않고 시험이 쉽길 바라고 아는 문제가 나왔으면 좋겠단 마음을 갖습니다. 도둑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요. 제가 그 도둑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시험을 잘보고 못 보고를 떠나 늦은 나이에도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국문학을 전공하는 사촌과 뒤풀이 소주를 마셨는데 행복했습니다. 학문에 대한 도전이 삶을 싱싱하게 한다는 것을 다시금 배웠습니다.
▢ 7월 7일 : DNA 이중나선구조를 밝힌 공로로 1962년 노벨상을 수상했던 제임스 듀이 왓슨은 ‘제발 머리카락 염색을 하거나 콜라겐 주사를 맞지 마라. 쉰 살이 된 사람의 흰머리와 주름살은 신뢰의 증거다.’라고 했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꾸 흰머리가 느네요. 장가도 못가 봤는데 흰머리가 그리 많아 허쩌냐고 이웃들은 걱정을 하십니다. 염색을 하라고 권하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저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내일 당장 백발이 된 다 해도 염색을 할 마음은 없네요. 그냥 사는 것도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이지요. 얼마 전 만났던 정현종시인도, 평론을 하시는 유종호교수도, 가수 패티 김도 그리고 안면도 고남에 사시는 우리 둘째외숙모도. 백발은 아름다워요.
▢ 7월 8일 : 어제는 지난 10개월 동안 영어교실의 강의를 해주신 이벤(Iben)선생의 송별회로 수강생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멀리 덴마크에서 오셔서 낯선 한국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언어의 벽과 싸우며 그동안 고생을 하셨지요. 통역과 해설을 맡았던 저 또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여전히 높은 언어의 장벽을 실감하며 더 열심히 벽을 깨야겠다는 생각을 내내 했었네요. 오후엔 뜻밖의 방문에 행복해 했습니다. 우리 독서회의 회원 한 분이 처음으로 한 아름 꽃을 사들고 찾아오셨어요. 책을 사랑하고 생을 사랑하는 분이기에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버무린 문학과 예술을 안주삼아 소주를 한 잔 하고 싶었습니다.
▢ 7월 9일 : 정이현의『낭만적 사랑과 사회』『달콤한 나의 도시』백영옥의 「다이어트의 여왕」고예나의 『마이 짝퉁 라이프』서유미의 「판타스틱 개미지옥」이홍의「50번 도로의 룸미러」등 이른바 칙릿(chick-lit)이라고 불리는 20~30대 여성들의 일과 사랑, 소비와 취향을 다룬 소설들이 잔잔하게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런 작품들은 젊은 여성들의 고민을 다룬다는 공통점을 다루고 있지요. 여성들의 정체성을 찾는데 초점이 모아진 소설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단에서는 여전히 “젊은 여성들의 정체성·고민 담겨”와 “출판 자본 전략”이라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네요. 개인적으로는 정이현의 작품을 읽어봤는데 괜찮게 봤습니다.
▢ 7월 10일 : 어제는 난생처음 ‘근전도’라는 검사를 받았습니다. 힘들었어요. 거의 90분 동안 계속 침을 찌른 후에 여기저기 쑤시면서 하는 검사였는데 여간 아프지 않았습니다. 왼쪽 어깨와 팔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아프고 저린지 이제 40여일이 지났는데, 아직도 원인을 모르네요. 류마티스과에선 해당이 안 된다고 해서 신경외과에 특진으로 갔는데 아직 잡아내질 못하고 있습니다. 찜질과 물리치료도 많이 받고 약도 그동안 계속 먹었는데도 아프고 저린 증상이 가시길 않습니다. CT결과엔 5~6번에 디스크 증상이 있긴 하지만 수술할 정돈 아니라고 하고요. 인생사 어떻게 아프지 않고 살수야 있겠습니까만, 아프다는 것은 참 어렵고 힘든 일이네요.
▢ 7월 11일 : ‘샘터’라는 잡지를 알게 된 것은 제가 십대 중반이었던 때였습니다. 값이 100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참 많이도 봤지요. 작가 최인호는 1975년 9월부터 『가족』이라는 연작소설을 그 잡지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저도 늘 빠짐없이 읽었지요. 그 『가족』이 2009년 8월호로 국내 잡지 역사상 처음으로 400회를 맞는다고 하네요. 작가가 스물아홉에 시작했는데 어느새 35년의 세월이 흘렀답니다. 『가족』속에 등장하는 자잘한 얘기들은 그분만의 가족사는 아니라고 생각되네요. 평범한 우리 모두의 얘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활짝웃는 독서회 회지도 이번 달로 47호를 발간하는데 저는 몇 호까지 글을 쓸 수 있을까 싶네요.
▢ 7월 12일 : 지난 1953년 4월 1일 창간되어 1970년 5월 1일 통권 205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던《사상계》는 월간 종합교양잡지 그 이상이었습니다. 민족지였다고 할 수 있지요. 한때 10만까지 발행했던 《사상계》는 그 당시 정권의 치밀한 고사작전에 의해 문을 닫게 됩니다. 초대 발행인 겸 편집인은 장준하(張俊河)였지요.《사상계》가 한국의 지식인계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했다 할 것입니다. 장준하를 비롯한 함석헌, 계훈제, 백기완 등 쟁쟁한 인사들의 숨결이 담긴 《사상계》가 복간된다고 합니다. ‘실족사를 가장한 모살(謀殺)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장준하(張俊河)의 평전까지 며칠 전 나왔지요. 민족지의 역할을 기대합니다.
▢ 7월 13일 : “술 마시는 사람을 부르는 말은 주량에 따라 다양하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주객(酒客)’, 술을 많이 마셔도 몸가짐이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은 ‘주호(酒豪)’, 광적으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주광(酒狂)’, 이태백처럼 술을 잘 마시고 좋아하는 사람을 ‘주태백(酒太白)’, 술 없이는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된 사람은 ‘주당(酒黨)’, 세상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술로써 낙을 삼는 사람을 ‘주선(酒仙)’, 이라고 불렀다.”〈이상희 지음 『술-한국의 술 문화 1,2』〉에서 술에 대한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반주로 마시는 몇 잔의 술을 참 좋아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건강 할 때 얘기더군요. 술을 못 마신지 몇 개월이 지났는데 아련합니다.
▢ 7월 14일 : 기호로 읽는 한국문화』『한국인의 화』등을 쓰신 국문학·민속학자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가 『노년의 즐거움』이란 책을 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행복한 노년을 보내기 위한 ‘5금(禁), 5권(勸)’을 제시하고 있네요. 노년에 멀리해야 할 다섯 가지는 ‘잔소리와 군소리를 삼가라’‘노하지 말라’‘기죽는 소리는 하지 마라’‘노탐을 부리지 마라’‘어제를 돌아보지 마라’ 또한 다섯 가지 노년 행동지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큰 강물이 흐르듯 차분하라’‘두루두루 관대하라’‘소탈한 식사가 천하의 맛이다’‘머리와 가슴으로 세상의 이치를 헤아려라’‘자주 움직여라’ 그러면서 그는 “죽음이 삶을 온전케 한다 여기면 노년은 푸르러진다”라고 했습니다.
▢ 7월 15일 : 수년전 어느 문예지로부터 글을 실어 줄 테니 기부를 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등단의 대가로 얼마를 내야하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저는 그것이 여간 슬프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종교에도 공공연히 그런 것 같습니다. 권사나 장로가 되려 해도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지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함에도 이 밝은 대낮에 버젓이 행해지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지요. 문화도 권력이란 생각을 많이 합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픈 얘기지요. 인맥을 펼칠만한 학벌이 없고 가난하면 재능이 있지만 문단이라는 수면위로 떠오르긴 그렇게도 어려운 현실이니까요. 작품만이 유일한 잣대가 되고 제대로 평가 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훨씬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요?
▢ 7월 16일 : 시인 고은(76)이『만인보』를 23년 만에 탈고를 끝냈습니다. 86년 첫 권을 출간한『만인보』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우리 민족의 여러 인간상을 시를 통해 형상화하려는 뜻으로 계획된 이 작품들은 30권 분량에 3800여 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한국현대문학사 최대의 연작시”라는 찬사를 받았지요. 영어는 물론 스페인어 등 7개 국에 번역되기도 한 『만인보』는 스웨덴에서 ‘고금의 고전’으로 평가 받기도 했습니다.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하는 시인의 노익장이 정말 대단해요. 지난 80년 남한산성 교도소에서 착상했다는 이 작품은 시로 쓴 인물사전인데 한국문단의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 7월 17일 : “한 학기에 과목당 20권 이상의 책을 숙독하도록 요구한다.” 첼리스트 장한나가 겪은 미국 대학의 풍경입니다. 미국 대학의 인문학 전공자는 하루 최소 5시간 이상 독서를 해야 한다고 해요. 장한나는 철학을 전공했지요. 유명한 지휘자 칼 뵘은 법학 박사였고 활달한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철학전공자이며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공대출신이기도 합니다. 시인이며 작가인 브레히트가 의대생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요. ‘철학하는 첼리스트.’ 멋있지 않습니까? 장한나는 곡을 연습할 때 항상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읽는다고 합니다.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적 사고는 인간을 참사람(眞人)되게 하는 초석이란 생각을 합니다.
▢ 7월 18일 : 우리나라 만화의 역사가 100년 됐다고 하네요. 하지만 만화책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편견은 솔직히 저만은 아닐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특히 심해서 아예 만화책을 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불량의 첨단을 걷는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얼마나 편협한 것이었던가를 새롭게 깨닫고 있네요. 요즘에 나오는 만화들은 학습 만점인 것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교과서와 나란히 할 수 있는 것들이란 뜻이지요. 원작이 있는 책을 만화로 옮긴 것은 물론이려니와 원작 읽기가 만만치 않을 때 그것을 새로이 재해석한 책들이 수두룩합니다. 『문사철 자료함』에 좋은 만화책을 올리며 반성합니다.
▢ 7월 19일 : 최명희(1947~98)의 대하소설 『혼불』이 새로 나왔습니다. 절판된 지 4년 만이지요. 작가에 대해서는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1930~40년대 전북 남원을 배경으로 몰락하는 종가를 지키려는 종부 3대의 이야기를 작가는 필생의 역작으로 피를 묻혀 썼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140만부가 팔렸던 그 책이 절판이라 구할 수가 없었는데 다시 만날 수 있다 생각하니 가슴이 떨립니다. 『혼불』은 90년대를 대표하는 대하소설입니다. 만년필로 꾹꾹 눌러 쓴 후 그녀는 너무도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쓰러지는 빛'이 당선돼 문단에 나왔던 작가의 혼이 되살아나는 듯!!!
▢ 7월 20일 : 박완서의『호미』라는 책을 읽다 보니 이런 구절이 있네요. “젊었을 적의 내 몸은 나하고 가장 친하고 만만한 벗이더니 나이 들면서 차차 내 몸은 나에게 삐치기 시작했고, 늘그막의 내 몸은 내가 한평생 모시고 길들여온, 나의 가장 무서운 상전이 되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게 팔팔하던 육신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약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엄습하는 육신의 삐침을 달랠 수 없을 때입니다. 이약 저 약을 써보고 덕지덕지 파스도 붙여보지만 뭐가 그리 서운한지 좀처럼 맘을 풀지 않으니까요. 이제야 가만 생각해 보니 삐칠 만도 하단 생각이 듭니다. 더 사랑해줘 야겠어요.
▢ 7월 21일 : 시를 읽으면서 숨이 멎었던 때가 있으신지요? “이 한 구절에 숨이 멎었다”우리나라 시인들은 김수영 시인의 작품을 최고의 시구로 꼽았다고 합니다. 나희덕 시인은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에서 장석주 시인은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김수영 ‘비’) 이근배 시인은 “나는 지낸 밤 꿈속의 네 눈썹이 무거워 그걸로 여기 한 채의 절간을 지어두고 가려 하느냐(서정주 ‘기인여행가’) 김광규 시인은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김소월 ‘가는 길)『벼락 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가 나왔습니다.
▢ 7월 22일 : '기독교 문학의 고전'하면 역시 존 번연(John Bunyan, 1628년 ~ 1688년)
의 소설 천로역정(天路歷程-The Pilgrim's Progress)이 생각납니다. 1678년 무거운 짐과 성서를 들고 하늘의 도시로 향하는 주인공의 노정을 그린 소설이지요. 1682년 네덜란드어로 번역을 시작한 이후 120여국에 번역됐다 합니다. 우리나라엔 1895년 캐나다 선교사 게일 부부에 의해 목판본으로 번역됐다고 전해집니다. 서양 문화, 그 중에서도 특히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독일 괴테(1749~1832)의 파우스트(Faust)와 함께 꼭 읽어야 하는 작품이란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번역이 잘 돼있어 믿을 만하지요. 민음사~범우사 판이 믿을 만 합니다.
▢ 7월 23일 : 지난 80년대 초 혜성같이 등장한 소설가 이외수의『들개』『장수하늘소』『꿈꾸는 식물』『겨울나기』등의 작품을 잊지 못합니다. 지금도 제 서가 한 칸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소설들이지요. 특히 『들개』라는 작품을 제일 좋아했습니다. 가히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빠른 전개의 구성이 가히 독보적이었다고 생각되는군요. 그 이후 그의 작품이 나올 때마다 거의 읽었었는데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하여튼 대단한 분이란 생각을 늘 갖고 있습니다. 어제 신문에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로 뽑혔군요. 끊임없이 누구와도 소통하려는 그의 철학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생각도 듭니다. 나이가 들어도 젊게 사는 생이 아름답습니다.
▢ 7월 24일 : 나의 가장 큰 소망이 뭘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도, 명예가 높아지는 것도, 건강한 육신을 소유하는 것도 솔직히 지금은 아니네요. 평수가 큰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것요. 40대 때만 해도 그런 것들이 중요했고, 인생을 걸만한 것들이라는 품목 속에 들어 있기도 했었습니다. 허나 지금은 그 모든 것을 버려갑니다. 소유가 전부인 시대를 살지만, 그것들이 진정 목숨을 걸만한 일인가 싶습니다. 지금은 참 사람(眞人)을 만나는 것으로 가장 큰 소망을 삼고 있습니다. 평생 즐겨 섬기고 배울 수 있는 스승의 부재가 오늘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지요. 그렇지만 주위에 좋은 분들이 계시다는 것이 여간 행복하지 않습니다.
▢ 7월 25일 : 삶의 고민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사람이 하루를 산다는 것은 그만큼 쌓이는 것들 또한 많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억압된 감정은 풀어야 하는데 오늘은 사는 현대인들은 그 마땅한 장소와 방법을 찾지 못해 힘들어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털어놓으면 풀린 텐데 털어놓지를 못하니 쌓이게 되고 쌓이다 보니 그것이 곧바로 병이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기도 하지요. 억압된 감정이 쌓이면 주변의 작은 소리들이 들리지 않게 됩니다. 맑은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는 물론 심지어는 내가 돌보고 사랑해야 할 것까지 망각하게 되는 경우도 많지요. 잔잔한 행복과 평화의 소린 다 듣지 못해도 영혼이 맑아지는 소리만은 듣고 싶습니다.
▢ 7월 26일 : 지루했던 장마가 끝나가는 것 같습니다. 중복도 지났으니 이제부터 본격적인 폭염이 시작되겠지요. 여름이 여름다울 수 있는 것은 덥기 때문이겠지요. 긴장된 심신을 잠시 동안이라도 자연에 맡길 여유를 찾아봅니다. 어제는 지인들과 점심을 같이 했습니다. 그들의 존재가 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네요. ‘존재의 아름다움’보다 더 큰 기쁨과 행복이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케이크를 자르며 그들이 전해주는 생의 아름다운 기원이 또 일 년을 버틸 수 있는 생의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닌가 했습니다. 병석에 계신 어머니와의 마지막 생일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 속에 7남매가 모인아침입니다.
▢ 7월 27일 : 메리올리버의 <블랙워터 숲에서>라는 시에 보면 인간의 세 가지 진실, 곧 모든 존재는 소멸한다는 점, 이 지상에는 인간만이 사는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언젠가 인간도 떠나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지요. “이 세상에 살려면 세 가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죽게 마련인 모든 것을 사랑하기, 그대의 생이 거기에 기대고 있음을 깨닫고 이들을 가슴깊이 끌어안기, 그리고 놓아줄 때가 됐을 때 이들을 놓아주기.” 이 시를 읽다 보면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흙·물·불·공기의 4원소를 모두 신성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이 창조한 인간의 섭리와 자연의 아름다움에 순응하며 한껏 묻히고픈 월요일 아침입니다.
▢ 7월 28일 : 국내 대표 장수프로그램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얼마 전 7000회를 넘었습니다. 1990년 3월에 시작했는데, 쉽지 않은 일이고 참 대단합니다. 배철수씨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 없는 참 멋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관리가 그만큼 철저하다는 뜻이기도 할 텐데 그 비결이 뭘까 궁금해지기도 하네요. 그는 초대 손님을 ‘예술가’로 대우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무릎을 쳤습니다. 그는 또 ‘내 주장만 내세우면 아무것도 안 된다’라고도 했고, ‘나이 먹은 사람이 다가가야지 젊은 사람이 다가오겠느냐고 반문하고 있군요. 오늘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술가’로 대할 순 없다손 치더라도 삶은 그렇게 살아야겠지요.
▢ 7월 29일 : 벌써 오래전부터 상담코너인 “DEAR ABBY”를 읽고 있습니다. 외국의 경우이긴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의 일이란 국경을 초월해서 너무나 똑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지요. 세상 어딘들 사회와 문화의 차이가 없겠습니까만, 큰 범주 안에 든 인간사의 문제는 거의 동일한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뭔가와 부딪치고 거기에 복잡다난한 일들이 얽히고설키게 되는 것 말입니다. 온 우주를 다 준다고 해도 온전히 채울 수 없는 욕심을 안고 사는 인간의 한계성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멋있는 상담코너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대를 대표할 스승의 부재가 안타깝습니다.
▢ 7월 30일 : 어제는 한강의 방화대교 아래서 47회 독서회를 했습니다. 바리바리 싸온 먹거리를 앞에 놓고 참석자들의 소개로 시작했지요. 두 고문님의 글을 우선 한편씩 읽고 회지에 실린 글을 써주신 분들에 대한 소개를 했습니다. 그 중에 또 몇 편을 읽고 ‘함께 낭송할 詩’를 번갈아 가며 읽고 제일 맘에 드는 연을 골라보라 했지요. 어젠 인도 고대 경전인 숫타니파아타 중에서 「그런 사람」이란 시를 읽었는데 몇 분이 “고요한 마음을 즐기고 생각이 깊고 언제 어디서나 깨어 있는 사람”이란 구절을 가장 좋아하셨습니다. “맑게 살아가는 사람”과 “자기를 다스를 줄 아는 사람”도 뽑혔네요. 신명나는 여름노래 몇 곡을 한강에 띄워 보냈습니다.
▢ 7월 31일 : 바다와 산 그리고 계곡이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불어오는 바람을 가슴으로 안으며 책을 펼치고픈 마음이네요. 바닥에 누어 하늘을 봐도 좋겠지요. 그러다 풍덩하고 물속에 뛰어들면 작은 포말이 하얗게 번뇌를 씻으며 환희를 전해줄 듯합니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소리가 귓가에 맴돌며 빨리 오라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세상사 잠시 내려놓고 사람의 말보다 더 많은 언어를 갖고 있는 자연의 너른 품에 푹 안기고 싶은 마음뿐이네요. 참 열심히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이제 청포도를 익혔던 7월을 보내며 고운 기타선율에 여름노래 한곡 신명나게 부르고 싶어지네요. "조개껍질 묵어 그녀의 목에 걸고 물가에 마주앉아 밤새 속삭이네 ♬ ♪"
|
첫댓글 보석 같은 글들을 마주하고 있으면 영혼의 때가 맑게 씻어지는 듯 합니다. 느슨한 배움을 한껏 움켜쥐게 하는 큰 힘이 들어 있네요. 그 어느 유명 작가의 글 보다 제가 청죽님의 글을 더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