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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18) 2024. 11. 10
성령을 속이는 죄
사도행전 5:1-11
<발 앞에 두매>
지난 시간 우리는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서 있었던 ‘유무상통의 공동체 생활’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이웃(성도)을 제 몸같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제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여기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역사’ 외에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임박한 재림론(종말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자 점차로 초대교회 안에서도 ‘유무상통의 생활’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대와 상황은 변해도 변하지 않는 분명한 사실은 성도들을 단순한 이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듯 이웃(형제)도 제 몸처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소유를 팔아 어려운 성도들을 도왔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가난한 이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34~35절 말씀에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34~35절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사도들의 발 앞에”(35절) 두었습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구제를 하도록 한 것입니다. 개인의 이름으로 구제할 경우 자칫하면 ‘공로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즉 “내가 이렇게 선한 일을 했다”라고 생각하기 쉽고, 도움받은 사람에게 자세하기 쉽습니다(마6:1~2).
또, “사도들의 발 앞에”(35절) 두었다는 말씀에서,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물질이 있어야 할 장소를 알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믿음 생활에서 성공하려면, 세 가지 관계를 잘 설정해야 합니다. 인간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물질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과 질 그리고 결과가 달라집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머리 위에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머리로 삼아 하나님의 인격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 머리 위, 사람과의 관계 – 내 옆, 물질과의 관계 – 발 아래).
그런데 많은 사람이 물질의 위치를 머리 위에 두고 살아갑니다. 물질이 사람의 머리 위에 자리하게 될 때, 사람은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물질은 인격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비인격적인 인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자에게 물질이란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머리로 모실 때, 물질의 위치는 비로소 ‘사람의 발 아래’ 제 위치를 찾게 됩니다.
자신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바나바’(‘위로의 아들’)였습니다.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행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의 행동은 초대교회 사도들(성도들)에게 칭찬과 사랑, 그리고 존경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서게 되었습니다.
<불순한 동기>
그런데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시기심과 경쟁심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그들의 헌신에는 불순한 동기가 숨어있었습니다.
1~2절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바나바가 그랬던 것처럼 소유를 팔아 헌금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소유를 팔았습니다. 그런데 팔아놓고 보니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돈을 보는 순간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누가 얼마를 헌금하든 그것은 자유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헌금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헌신이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사도들이 헌금할 것을 강요한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성도들의 어려움을 도우려는 순수한 마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들이 드릴만큼만 드리면 됩니다(은혜받은 만큼). 그들에게 판 값을 모두 드리라고 강요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그냥 ‘판 값에서 일부를 드립니다’하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나바가 모든 것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일부를 드려서는 바나바를 이길 수 없습니다. 바나바가 현재 교회 안에서 받는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바나바가 드린 것보다 조금만 더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판 값이 훨씬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를 숨기고, 남은 것을 드려도 바나바보다는 더 많이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했습니다. 마치 판 값을 모두 드린 것처럼 속이려 들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속이려고 작정하고, 판 값의 일부를 전부인 것처럼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베드로의 책망>
성령이 충만했던 베드로는 그의 잘못된 동기를 알아차렸습니다.
3~4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베드로는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책망합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말씀합니다.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아나니아는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종노릇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동했었습니다.
많은 표적과 기적이 일어나는 교회였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연합된 교회였습니다.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담대히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사랑이 넘쳐, 이웃을 필요를 알고,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기꺼이 나누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대교회만큼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교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가운데, 사탄의 역사도 함께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에덴 동산에서도 뱀이 활동,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감격의 순간에도 사탄은 아간의 마음에 탐욕을 집어넣음).
아나니아와 삽비라 역시 그 은혜로운 예루살렘 교회의 신실한 성도였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자신의 재산을 팔아 성도들을 도울 생각조차 안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시기하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물질을 다스리지 못하고,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 것입니다.
전에 베드로도 예수님과 함께 있을 동안에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긴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는 정색을 하고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8:33)라며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 순간에도, 사탄은 우리의 생각을 교묘히 공격해 옵니다. 명분이 어떠하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사탄의 조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로운 순간에도 항상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성도 간에도 피차 권면하여야 합니다.
히3:12~13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또, 주목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을 속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네가 성령을 속이고’ 3절).
얼마나 많이 헌금을 했는지, 또는 뒤에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의 행동은 ‘성령을 속이려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자신의 연기력으로 ‘성령을 능히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은 하와도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성령을 속이는 것’은 곧 ‘성령을 거스르는 모독죄’와 같고 그것은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영원한 죄’가 됩니다(막3:29).
<아나니아의 죽음>
그 결과가 참혹합니다.
5~6절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혼이 떠났다’는 말은 죽었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굉장히 당황스러웠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시지요? 하나님이 해도 너무 하시는 것 아닌가?’하고 생각하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아니, 한 푼도 헌금하지 않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래도 헌신하겠다고 땅까지 팔아서 헌금한 사람을 처음 마음먹었던 것보다 적게 바쳤다는 이유로 그렇게 무자비하게 심판하시는 것은 너무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냥 야단을 치거나 경고만 해도 충분할 것을 굳이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갈 정도로 그렇게 심각하게 다루셔야만 했을까요. 이 이야기만 읽으면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이 자꾸 아나니아가 자신의 소유를 팔았다는 것에 집중되어 있기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아나니아가 자신의 소유를 팔았다는 헌신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계획적으로 ‘성령을 속이려 들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4)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실 사람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할 만큼 아주 심각한 문제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일은 그냥 보통 거짓말 정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탄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대적’하는 그런 심각한 죄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는 반드시 그의 생명으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는 우리의 생명이 달린 그런 심각한 죄인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성령을 소홀히 취급했습니까? 그러고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아나니아보다 더 위선적인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관대한 사람으로 보이면서, 하나님에게는 위선자인 사람들을 똑같이 벌하셨다면, 아마도 매일 교회에서는 초상 치르느라고 바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같은 일들이 오늘날에는 벌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지금 교회가 막 탄생하고 있던 초창기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합니다(교회사적 해석이 필요).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우기 위해 어떤 본이 필요했을 것입니다[11절에서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 교회는 성령님께서 다스리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 얼마나 큰 죄 인지를 각성시키기 위해 한 번의 엄한 가르침을 주시려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교회는 세상적인 욕심과 육신적인 정욕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더러운 욕심으로 채워져 있으면서 어떻게 세상을 향해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그 일을 심각하게 처리하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생명을 거두어가신 것입니다. 그 일이 두고두고 교회에 분명한 기억으로 남아, 같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각성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 고전5: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오늘날에도 신앙공동체 안에서 위선을 떨며,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위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로 인해서 여전히 교회는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즉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기준을 분명히 세우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기준에 합당하게 되기까지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은 생명이 왔다 갔다 할 만큼 큰 죄이고, 때가 되면 성령님께서 반듯이 치리하실 것입니다.
<삽비라의 죽음>
아나니아가 죽은 지 세 시간이 지난 후에 ‘삽비라’가 들어왔습니다.
7절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죽은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부인 몰래 남편의 장례를 치를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은 시신은 정식 장례를 치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예루살렘 성 밖 기드론 공짜기에 신속하게 매장되었을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처음부터 같이 사도들 앞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아나니아는 사도들에게 헌금을 바치는 사이에, 삽비라는 숨겨둔 돈을 어떤 다른 일에 투자하기 위해서 비밀리에 행동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2절을 보면 얼마만큼의 돈을 감춘 사실을 ‘그 아내도 알고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알고도 모른 척 묵인한 정도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그 돈을 감추는 역할을 맡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지는 대목입니다.
남편에게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는 삽비라는 잔뜩 기대를 품고(칭송받을 것을 기대하며) 사도들 앞에 나왔습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물었던 질문을 똑같이 하였습니다.
8절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그녀가 남편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았더라면 그렇게 대답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남편과 똑같이 ‘성령을 속이려’ 들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책망합니다.
9~10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그 남편에 그 아내라고, 삽비라 또한 아나니아처럼 베드로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나니아와 똑같이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마침 아나니아를 장사하고 돌아온 젊은 사람들이 이번에는 삽비라를 메어다가 남편 곁에 장사지냈습니다. 하루에 남편과 아내가 모두 죽임을 당하는 이런 비극적인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아나니아는 ‘성령을 속이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었고(3절), 삽비라는 ‘성령을 시험하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었습니다(9절). 표현은 다르지만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의미에서 같은 죄입니다.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이 오늘 이 충격적인 사건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11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온전히 경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교회는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박해와 핍박이 심하면 심할수록 오히려 교회는 더욱 부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기 시작하면 교회는 너무나 쉽게 무너집니다.
(외부의 핍박이 오면 지하에라도 살아남음, 그러나 내부의 타락이 생기면 핍박이 없어도 스스로 망함)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교회의 주류를 이루면 큰일 납니다. 성령을 속이려는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올라서면 그 순간 교회는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떠나고 껍데기인 건물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사탄의 영’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항상 깨어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마귀의 생각을 대적하십니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탐심이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물리치십시오.
‘성령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속히 벗어나십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참으로 정직한 교회로 서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신앙 생활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과연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지를 돌이켜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을 속이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성령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며 신앙생활 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