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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은총
차동엽 신부 강의
밑을 클릭하면 동영상 강의를 들을수 있습니다.
http://dae-an.or.kr/technote7/board.php?board=kkkmedia2&command=body&no=7
304년 2월 12일 카르타고 광장에서 사투르니누스(Saturninus)신부(?-304)와 48명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재판이 있었습니다. 31명의 남자와 18명의 여자에게 태형(笞刑)과 아사형(餓死刑)이 선고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황제 디오클레시안(Diokletian, 284-305)의 금령을 어기고 주일 성찬례, 곧 미사를 위해
집회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위대한 신학자 성 토마스 데 아퀴노(1225-1274)는 1273년 성 니콜라우스 축일에
미사(=성체성사)를 집전하던 중 깊은 경이감에 사로잡히는 신비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 해 겨울 내내
그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이 지난 7년간 써왔던 대작(大作) ‘신학대전’을
미완성의 상태로 방치해 두고 있었습니다. 그의 친구이기도 했던 제자 하나가 까닭을 집요하게 묻자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습니다. “그 때 내가 보았고 나에게 계시되었던 것들에 비하면 그동안 내가 썼던
모든 것들은 덤불에 지나지 않는다네.” 성체성사를 거행하던 중 그에게 하느님의 신비 깊은 곳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은총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서양의 저 위대한 학자는 성체 안에 감춰진 그 깊은 비밀을
엿보는 순간 돌연 벙어리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1910-1997)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북예멘의 대통령이 나에게 나환우들을 돌볼 수녀들을
보내달라는 서한을 보내왔습니다. 이슬람 국가에서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한 것은 지난 800년간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나는 사제 한 명이 함께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면 수녀님들을 기꺼이 보내겠노라고
답신을 보냈습니다. 왜냐하면 성체(聖體)없이는 우리가 살아 갈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힘 있는 웅변입니까! 도대체 성찬례(=미사)가 무엇이기에 저들은 목숨을 내어놓으면서까지
그것을 행해야 했을까요? 대체 성체의 신비가 얼마나 오묘하기에 그 비밀을 맛본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자신의 노작(勞作)을 덤불로 여기게 되었을까요? 정녕 성체가 무엇을 공급해 주기에 마더 데레사는
그것 없이는 자신의 수녀들이 살아갈 수가 없다고 말하였을까요?
성체에는 육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미사집전을 거행했던 것입니다. 성체에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원리, 창조(創造)의 비밀,
구원섭리(救援攝理)등이 고스란히 감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이 성체의 신비 안에서
신, 우주, 인간에 대한 자신의 사변(思辨)이 무가치한 것으로 용해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또한 성체는 불가능한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무한한 사랑의 샘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을 위해 헌신하기 위해서는 성체라는 특별한 양식(糧食)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 미사
믿기지 않는 이야기
성체의 은총을 감동적으로 증거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란치아노에서 발생했던 성체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약 700년 경 이탈리아 란치아노 지방 바실리오 수도회 소속의 한 수사 신부가 성체(聖體) 안에 그리스도가
실재(實在)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큰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제가 미사 중에 빵과 포도주 위에
손을 얹어 기도하면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성변화(聖變化)의 교리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성사를 집전하면서 하느님께 그 의심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가 성변화를 위한 감사기도를 바친 후 성체를 나누어주려 하는데, 그의 눈앞에서 정말로 빵은 살로,
포도주는 피로 변했습니다. 그 경이로움에 얼마동안 말문을 잃고 있던 그는 평정을 되찾은 후 그 자리에 있던
신자들을 제대 앞으로 나오게 하여 주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보게 하였습니다.
수도회에서는 그것들을 값비싼 상아 그릇에 보관해 오다가, 1713년부터 다시 정교한 은제 그릇 안에 보존해 왔습니다.
오늘날에도 란치아노의 성 프란치스 성당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 교회는 그것들의 진짜 성분검사를 과학자에게 의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70년 11월,
의학전문가 팀이 조사에 착수하기 위하여 소집되었습니다. 오도아르도 리놀리 교수가 그 팀의 리더가 되었는데,
그는 그 조사를 시작할 무렵 이 일에 대단히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12월 중순 경에 이르러 그는 수도원장에게
첫 번째 공한을 보냈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짧았으나 아주 극적인 전보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은 살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1971년 3월 4일, 완전한 보고서가 마련되었습니다. 그 분석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였습니다.
“이 살은 진짜 살이며, 이 피는 진짜 피이다. 이 살은 심장부위의 근육조직으로 되어 있다. 이 살과 피는
사람의 것이다. 이 살과 피는 다섯 조각 모두 동일한 혈액형(AB)을 가졌다. 이 피에서 신선한, 정상의
피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들과 똑같은 정상 비율의 단백질이 발견되었다. 이 피에는 다음과 같은 성분들이
발견되었다. 염화물, 인, 마그네슘, 포타슘, 나트륨, 칼슘. 이 살과 피는 어떠한 화학적 방부처리 없이
1200년간 자연 상태로 대기 중에 노출되어 있었으나, 특이현상으로 남아 있다. 검증에 응한 현대과학은
란치아노의 성체 기적의 확실성에 대해 분명하고도 일관되게 응답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이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안에
실제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약속
그렇다면 ‘성체’라는 이 신비로운 실재(實在)의 근거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 답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안에서 발견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영원히 죽지 않게 하는 ‘영적인 빵’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청했습니다. “선생님,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마지막 작별의 때가 오자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을 생명의 빵으로 내어놓으셨습니다.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마태 26,26).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 즉, ‘밥’으로 내어주셨습니다. 이로써 낳으시고 먹이시고
기르시는 하느님 사랑이 예수님의 희생적인 ‘내어줌’을 통하여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창조(創造)·
생육(生育)의 섭리가 예수님의 몰아적 나눔을 통하여 그 절정에 달하게 된 것입니다.
이윽고 예수님은 당신 피를, 죄의 용서를 위한 계약의 증표로 내어 주셨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태 26,28).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이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이로써 양의 피흘림을 통한
구약의 파스카(희생) 제사가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통하여 추월 불가능하게 완성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救援)섭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완수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셔서 […]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이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 받을 길을 마련해주셨습니다”(히브 9,11-12).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 기묘한 사랑의 업적이 모든 세대에 대물림하며 생생하게 재현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명하셨습니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루가22,19).
이는 당신이 시키는 대로 행하면 당신께서 늘 새롭게 현존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나 다름없는 말씀입니다.
개신교에서도 부활절과 같은 특정한 날에 성찬례를 거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빵’과 ‘포도주’는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할 뿐이지 결코 실제적으로 몸과 피가 되지는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성사가 단지 상징적인
의미만 지닌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사의 제정자(制定者)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과소평가한 데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성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며 명령입니다. 시대를 초월해서 나약한 인간에게 다가오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제도적 보장책이 바로 성사인 것입니다.
자주일수록
우리는 성체의 능력으로 ‘거룩한 사람’(히브 10,10 참조)이 되어 감지덕지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일상생활 안에서 수많은 일들에 치이고 어려움 때문에 활력을 잃을 때마다 미사를 통하여 기력을 회복하여 생활을
해나갈 수 있게 됩니다 (교황교서〈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17항 참조).
모든 희망을 잃고 슬픔에 잠겨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말씀과 빵나눔을 통하여 그분이
예수님임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루가 24,32)
이 함성은 오늘 우리가 미사를 드리고 나서 그 벅찬 은총에 감동하여 지르는 환호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직 먼발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미사는 화끈한 열정이나 재미가 느껴지지 않는 맹숭맹숭한 형식적 전례로만
비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그윽함에 맛들인 사람들은 미사에서 가장 큰 내면의 정화, 가장 큰 평화·용서·축복,
영원한 생명, 가장 감동적인 사랑, 가장 힘 있는 기도, 가장 친밀한 친교, 가장 큰 치유라는 엄청난 은총을 실제로
체험하게 됩니다.
같은 신자라도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신자에게서 더 진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배어나오고 성체를 자주 영하는
사람은 그만큼 성체체질이 형성되어 인격과 신앙이 남달라지는 것을 흔히 확인하게 됩니다.
성체성사가 이렇게 엄청난 은총의 성사라면 우리는 더욱 자주 성체를 영해야 할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1567-1622)는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별로 할일이 많지 않은 사람들은 영성체를
자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매우 할 일이 많은 사람들도
영성체를 자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많이 영성체를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미사를 통해 실제적으로 누리고 있는 은총에 대하여 확인해 보겠습니다.
말씀을 통해 누리는 은총
미사 전반부에서 우리는 먼저 말씀의 양식을 받아먹습니다. 선포되는 말씀은 “살아 있어서”(히브 4,12 참조)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성령께서는 이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움직이도록 해주십니다.
미사 때 봉독되는 성서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보내신 연애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
식지 않는 사랑의 밀어들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렇게 사랑이 듬뿍 담긴 양식인 말씀의 식탁은 구약과 신약을 대표하는 은총의 메시지들로 짜여져 있습니다.
- 구약(제1독서)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구원의 잔치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없이 술과 젖을 사서 마셔라”(이사 55,1).
- 신약(제2독서)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사도들이 증언하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만납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사도 2,36).
- 복음과 강론을 통하여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우리는 미사 때마다 이처럼 다양한 말씀의 차림으로 그때그때 살아갈 영적 양식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영적
허기와 갈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주 야훼의 말씀이시다. 양식이 없어
배고픈 것이 아니요,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야훼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굶주린 것이다”(아모 8,11).
그런데 말씀의 은총은 빵의 은총에로 인도해 줍니다. 말씀 전례는 성찬 전례를 보완해주고, 성찬 전례는 말씀 전례를
완성해 주는 것입니다. 말씀의 은총은 우리를 빵의 은총에로 인도해 줍니다. 말씀 전례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주님과 함께 하고자하는 열망을 지니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성찬 전례를
통하여 빵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더욱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교황교서〈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12항 참조).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5)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많은 제자들이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요한 5,68)라고 고백했습니다. 제자들은 이처럼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았기에 ‘살’과 ‘피’로 이루어진 성체의 은총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누리는 은총
말씀 전례에 이어 우리는 성찬 전례 곧 성체성사에 초대됩니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성체 안에 “실제로”
계시는 예수님을 받아 모시게 됩니다. 그러니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가 받는 은총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는 성체의 은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그대들이 구하는 모든 것은
(은총, 도움, 위로) 성체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듣고자 하는 따뜻한 말들, 또 필요로 하는
지식과 기적들 […]. 예, 그렇습니다. 성체 안에는 기적들까지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성체(성사)는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 어떤 은총을 가져다줄까요? 함께 대표적인 것들만 확인해 보겠습니다.
첫째, 성찬 전례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명을 따라 그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성찬 전례가 거행될 때에
예수님은 그의 대리자인 사제의 인격 안에 현존하시면서 몸소 이 예(禮)를 거행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미사의 희생 제사 안에 현존하신다. ‘당신 친히 그때에 십자가에 바치셨던 희생 제사를 지금 사제들의 집전으로
봉헌하고 계시는 바로 그분께서 집전자의 인격 안에 현존하시고, 또한 특히 성체의 형상들 안에 현존하신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088항).
곧 성찬 전례의 전 과정에서 예수님 자신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가 그 순간 가장 필요한 것들
, 예컨대 위로, 치유, 평화 등을 안겨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믿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성찬 전례를 통하여 우리는 이중적(二重的)으로 친교(communio)를 누리게 됩니다.
- 먼저,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영적 친교를 이루게 됩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1515-1582)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영성체를 하지 않고, 미사에 참례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영적 친교를 이루지 못합니다. 지극히 유익한 관행인
이 영적 친교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깊이 새겨질 것입니다.” 영성체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은 사람”(2베드 1,4)이 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참된 친교를 나누게 됩니다.
- 또한 우리는 성체성사에 참례한 다른 신자들과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일치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확실히 신자들과의 일치를 가져다 줍니다. 서로 한 몸, 한 마음, 한 영혼이 되게 해줍니다.
이에 관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407)의 말씀은 심오합니다. “빵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면 이 빵을 받아먹는 사람들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여러 개의 몸이 아니라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빵은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존재하는 수많은 밀알들로 이루어진 완전한 하나이고,
그 각각의 밀알이 완벽한 전체를 이루고 있어 서로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 결합되어
있고 그리스도와 하나로 일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성체를 하고 나면 참으로 감동적인 분위기가 온 성당을
가득 메우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성찬 전례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성인들의 통공(communio sanctorum)’을 누립니다. 사도신경에서
공로를 나눈다는 의미를 지니는 통공(通功)으로 번역된 communio는 나눔뿐 아니라 친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인들로 번역된 sanctorum은 성도들 곧 지상 교회, 연옥 교회, 천국 교회의 모든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성인들의 통공’은 모든 성도들의 나눔과 친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눈다는 것은 서로 공로를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정성껏 드리는 이 미사의 공로가
실제로 그 미사의 지향자 안에서 기적적인 은총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 미사의 공로를 누군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서 나누려는 지향을 둘 때 그것을 우리는‘생(生)미사’라고 합니다.
이 미사는 곤경에 처한 이나 중대사를 앞둔 이들에게 실제로 필요한 은총을 누리게 하는 가장 탁월한 공로가 됩니다
. 이에 대하여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이 세상의 선한 모든 일을 합하여도 미사의 가치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행은 사람의 업적이지만, 미사는 하느님의 업적이기 때문입니다.”
- 내가 참례하는 미사의 공로를 연옥에 있는 영혼을 위해 나누려는 지향을 둘 때 그것을 우리는 ‘연(煉)미사’라고 합니다.
연미사의 효력에 대하여 성 요한 보스코(1815-1888)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사의 거룩한 희생 제사는 연옥의 불쌍한
영혼들을 도와줍니다. 사실 미사는 그 영혼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그들이 고통 받는 기간을 단축시켜 주며,
그들을 속히 천당으로 데려다 주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저 세상에 있게 될 때에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바치는 미사성제보다 더 간절하게 기다려지는 것은 없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시는 예수님의 희생적 나눔은 우리로 하여금 동료 신자들 및 ‘천상 교회와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을 하나로 ‘결합’시켜 줍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19항).
그러기에 다음과 같은 성녀 베르나데트(1844-1879)의 말은 바로 우리를 위한 권고입니다. “매 시간 세계의
다른 곳에서 미사가 바쳐지고 있습니다. 나는 자신을 그 미사와 일치시키며, 특히 밤에 잠을 잘 수 없을 때
그렇게 합니다.”
넷째,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삶을 위한 양식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받아 모시는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것이며, 우리가 마시는 피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요한 6,56-57).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시키는 동시에, 우리가 전에 지은 죄를 정화하고 앞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줍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393항 참조).
이렇듯이 성체는 그리스도의 현존이요, 영적 친교의 원천이며, 성인들의 통공을 위한 탁월한 구원공로요,
거룩한 삶의 양식이 됩니다. 요컨대, “지극히 거룩한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전례헌장〉 10항).
아름다운 증언들
성체에 대해서 많은 성인들 및 교회는 아름다운 증언들을 남겨 놓았습니다. 대표적인 것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성체는 그 대상에 있어 모든 기적들을 능가하며, 그 지속성에 있어 그 어느 것보다 으뜸갑니다. 성체는 영속적인
강생이며, 예수의 끝없는 희생이며, 제대 위에 항상 이는 불꽃(출애 3,2 참조)입니다. 그것은 만나이며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참된 생명의 빵입니다”(성 베드로 율리아노 에이말).
- “하느님의 모든 진노와 분노가 미사의 봉헌 앞에서 풀어진다”(성 알베르토).
- “미사성제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상의 모든 것이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오직 미사성제만이
하느님의 (진노의) 팔을 붙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 “미사성제에 열심히 참례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임종 때에 그들이 열심히 참례한 미사의 횟수만큼 많은 성인들을
보내어 그들을 위로하고 보호해 줄 것임을 분명히 말해둔다”(성녀 제르트루다).
- 성체(성사)를 통하여 “영생을 위한 약이요 죽지 않게 하는 해독제이며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는
빵을 나누어 먹는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05항).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1786-1859)는 이처럼 은혜로운 미사를 ‘천상 보물함’에 비유하면서 그 ‘열쇠’를 지닌 사제의
소중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쳐줍니다. “내가 사제와 천사를 만난다면, 사제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고, 그 다음에
천사에게 인사를 드릴 것입니다. […] 사제가 없다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 보물함에 금이 가득 들어 있다고 하여도, 아무도 이를 열어 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사제는 천상 보물함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
가톨릭교회의 세계적인 성령운동가 아일린 죠지 여사는 미사의 은총을 환시로 볼 수 있는 특별한 체험을 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녀는 미사가 집전되는 중에, 제대 위에서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운데
신자들 머리 위로 은빛 눈 같은 은총이 내리는 장면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는 결코 거짓이나 과장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이 보다 더한 기적이 매일의 미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흘러드는 거룩함의 강(江)
미사에는 거룩한 시간, 거룩한 장소, 거룩한 행위가 집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어 인간들과 함께 생활하게 하심으로써 시간을 거룩하게 해주셨습니다.
바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거룩한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이 되면 경건하게 미사에 참례합니다
. 물론 주일이 아닌 경우에도 미사를 봉헌하지만, 주일은 일주일 가운데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성당의 제단에서는 매일 주님의 성찬례가 봉헌됩니다. 그때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성찬례 가운데
우리와 실제적으로 함께 해주심으로써 제단을 거룩하게 해주시고, 제단이 있는 성당을 거룩한 장소가 되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시간과 장소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할 때, 거룩한 시간, 거룩한 장소가 될 수 있다면 미사 시간에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모든 행동은 거룩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루가 22,19)라고 말씀하셨고, 지금 성찬례 안에서 사제들은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예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이 행위가 바로 거룩한 행위이고, 그 거룩한 행위는
지금 우리들의 미사 안에서 다시금 행하여지고, 우리들은 그 행위에 초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시간과 장소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거룩한 행위를 하는 미사는 그 자체로 거
룩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곧 미사의 은총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삶 전체에 확산된다는 사실입니다.
미사의 은총이 은혜로운 것은 미사를 통해 누리는 그 거룩한 시간이 우리의 전체 시간을 거룩하게 해주며,
미사를 통해 누리는 그 거룩한 공간이 우리가 사는 세속의 공간을 거룩하게 해 주며, 미사를 통해 누리는
그 거룩한 행위가 우리의 일상생활 전체를 거룩하게 해 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일찍이 예언자 에제키엘은
이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습니다.
“이 강이 흘러 들어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온갖 생물들이 번창하며 살 수 있다. 어디로 흘러 들어가든지
모든 물은 단물이 되기 때문에 고기가 득실거리게 된다. 이 강이 흘러 들어가는 곳은 어디에서나 생명이 넘친다
”(에제 4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