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밖에서 보자고 했어, 안 했어? 몇 번이나 불렀는데 무시했어 안 했어?"
.
"남의 물건을 함부로 했으면 사과를 해야지, 왜 무시를 하냐고!!"
110kg이 넘는 거구의 아이는, 내 눈 앞에서, 한 눈에 봐도 '왕따'인 아이를 윽박지르더니 순식간에 한 손으로 상대의 목덜미를 움켜죄었다. 머리칼을 잡아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리고 얼굴에 주먹을 날리자, 맞던 아이는 천천히 일어나 교실 뒤로 가서는 한 손에 커터칼을 쥐었다.
"쟤 칼 들었어. 말려야 돼" 둘러싼 여자아이 중 하나의 목소리가 들리고, 교무실에 남교사를 부르러 간 아이로부터는 '아무도 안 계신다'는 대답만 들려왔다. 결국 교감선생님이 오시고, 이윽고 담임이 와서야 한 명씩 불려갔다. 눈 앞의 사태는 일단락되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이런 상황에 별다른 도리가 없으리라는 무력감은 내게 깊은 상처로 남았다.
*
며칠을 사이에 두고, 손에 집어든 국내작가 소설 두 권이 공교롭게도 모두 "싸이코패스-연쇄살인"을 소재로 하고 있었다. 하나는 장르소설과 순수문학(-이 애매한 범주란..)의 문턱을 희미하게 만들고 있었고, 한 권은 이미 접해 본 전작에 비해 가독성이나 구성력이 높아진데다, '악'을 반야심경의 '공(空)과 잇고 있는 대목이 흥미로웠다. 한 권은 묘사가 집요하였고, 다른 한 권은 문장의 박진감이 대단하였다. "웃을 수 없는 농담, 사드-붓다의 악몽"이란 제목을 단 문학평론가 권희철의 해설도 좋았다.
".....여기 남은 것은 무아의 상태가 아니라, 대혼란이다. 무너져내리는 세계 속에서 너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고, 그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바다 위에서 영원히 허우적거려야 하는 고통과 공포가 너의 몫이다. 무너져내리는 세계의 벽은 점점 더 조여들고, 그것은 작아지는 감옥이 되며, 서서히 어둠의 점으로 농축되다가 무한히 조여들며 무(無)로 수렴된다. 그러한 사라짐은 해탈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것은 무(無)라기보다 차라리 고통과 공포의 무한한 응축이다"(160쪽, <살인자의 기억법>)
고통의 응축을 해탈의 길로 착각하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이 착각과 저 오해 사이에, 그 골과 마루의 틈새에 악이 서식한다. <진실-기억-말>의 얼개에 기울기를 줌으로써 인간의 삶 속에 깃든 비극적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작품으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가 있었다. 폭력과 속죄와 애도와 구원의 메타포가 가득했던 그 영화와 달리, 두 권의 소설은 끝까지 읽은 것을 후회하는 중이다. 아무리 '악에 대한 탐구'를 표방하고, '선악을 넘어선 인간존재의 아이러니'를 주제로 한다지만, 내게는 읽지 않는 편이 나았던 독서였다. 폭력에 서서히 길들여지게 하는 행위, 급기야 폭력을 일상화하는 데 이르는 개입. 오늘 미술실 사건과 이 두 소설은 그런 점에서 닮았다. 스트레스 해소를 한답시고 돈받고 물건을 부수게 하는 행위가 갖는 모순성도 다르지 않겠다.
"이해와 관계맺음에 관한 한 완전히 무능력한 겁쟁이가 자신의 무능력을 능력으로 전도시킬 때,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관계맺지 못하는 대상들을 부정되고 파괴되어야 할 대상으로 바꿔놓을 때 악이 등장한다."(같은 책, 163쪽)
요즘 내 처지에 가장 공감이 되는 문장이었다. 상대를 악이라 할 때, 나는 이미 내 안의 악에 편들고 있는 것이다.
이 꽉 낀 윤리의 감옥, 윤리의 거미줄 속에서, 출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