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한양대 국문학과 정민 교수가 지은 책이다. 김영사, 2022년 7월에 처음 출판되었다. 겨울비가 온 땅을 적시고 있다. 정민 교수는 한시 그리고 정약용에 대한 책으로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글은 모두 마음에 든다. 그런데 이번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이 책을 보고 선택했는데 역시 문체나 글의 흐름이나 주장 등이 깔끔하다. 참조를 포함해 거의 900페이지가 되는 매우 두꺼운 책이다. 주말과 밤 시간을 이용해 약 2주에 걸쳐 다 읽었다. 분량이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만큼은 안되지만 꽤 두껍다. 그럼에도 책을 놓을 수 없었다. 그만큼 흥미롭고 놀라운 책이다. 조선의 후기 쯤, 천주교가 어떻게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들어오고 이것이 마침내 그 시대를 뒤흔들만큼의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그로 인해 박해를 받을 수 밖에 없었으며, 그런 박해에도 순교를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마치 소설처럼 긴박하게 서술해 낸 책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나의 현재가 어디인지 조금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사건이 없을 수 가 없다. 어떤 사건은 하루동안 생각을 하게 하고 어떤 사건은 일년 혹은 오년, 십년의 역사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서학이라는 이 사건은 한국의 그 다음 역사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역사의 지축을 뒤흔든 사건임에 분명하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적 이념이 사회질서의 근간을 떠받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신분사회, 불평등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피해와 고난은 고스란히 하층민들이 질 수 밖에 없다. 왕족들과 양반들을 제외한 백성들은 어쩌면 삶이 아닌 삶을 살다 죽었을 것이다. 물론 양반들이라고 다 출세하고 높은 지위를 누리며 행복하게 산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경쟁구도 속에서 힘들게 살다가 힘들게 죽었다. 그것이 조선의 역사가 아니겠는가. 민초들의 고난과 불평등과 불공정과 끝없는 희생으르요구한 사회가 아니었던가! 그렇지 않은 세상이 어디에 있었을까마는, 그것이 우리의 것이기에 더욱 마음이 아프다.
그런 숨쉴수 없는 시대에 선진국이었던 청나라로 사신으로 갔던 사람들이 청의 즐비한 서점과 상가에서 놀라운 책들과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읽었는데 이것은 정말 조선의 지식인들과 청년들에게 딴 세상이야기요, 유토피아적 세상 이야기로 들렸다. 천주실의, 칠극 등 천주교 관련 책들이 그들의 가치관을 송두리채 흔들었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 천주요,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며 서로 사랑함이 마땅한 이야기는 막히고 탁탁한 세상에 신선하고 상쾌한 봄바람 같은 것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조선의 지식인과 청년들은 스스로 그것을 공부하고 모여서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들 가운데 심지어 노비문서가 불태워졌고, 조선의 기초나 다름없는 제사제도의 허구성이 드러났고, 아예 제사를 지내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남녀유별도 없어졌다. 모든 가짜가 불태워지는 순간이었다.
어찌 조선의 사대부들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그토록 지켜왔던 제사제도가 아무것도 아님이 드러났고, 그들의 기득권을 누릴수 있었던 근거인 노비제도에 금이 가고 있는데 어찌 조정과 양반이라던 자들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당파를 좋아하던 조선의 양반들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나. 남인들을 때려잡을 수 있는 절호가 찬스가 왔다. 결국 박해가 이어지고 세상은 온통 피로 물들게 되었다. 순교자들의 고통과 죽음과 희생을 어찌 말할 수 있으리요. 훌륭한 왕이라고 좋아했던 정조도 이 부분에서는 로마의 황제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박해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죄없는 자들을 국가유지와 사회유지라는 것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귀양보냈느가. 백서때문에 목이 잘려 죽은 황사영은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본인은 목이 잘려 죽고 아내는 제주도 관노로 귀양가고 두 살 밖에 안된 아들은 추자도로 귀양보내졌다. 참으로 무섭고 놀랍다. 정약용, 정약종, 정약현, 이가환, 이벽, 이승훈, 이존창, 윤지충, 강완숙 김범우 등 이루 셀 수 없는 많은 초기 천주교인들이 등장한다. 저자는 아마 주인공은 아니지만 정약용에 대해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하면서 그에 대해 좀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듯하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정말 안타까울 정도다.
글을 읽으며서 오늘 우리는, 특히 기독교는 사회변혁을 꿈꾸고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정말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려하는지 모르겠다. 약자들에 대한 무한 사랑을 펼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강도만난 이웃에 대하여 아가페적 사랑으로 다가가고 있는지 반성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람들로 가득한 오늘날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멀어지는 느낌이다. 책만을 통해 기독교 교리를 전수받은 조선의 청년들이 오늘 많은 신학을 한 박사들보다 훨씬 영적으로 앞선 사람들로 보인다. 나는 순교를 온전히 감당한 조선의 청년들과 여성들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지고 살고 있다. 말씀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는 나는 날마다 회개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영혼이 온전치 못한 사람아, 부디 사랑을 실천하여라. 그것이 너의 소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