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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회 카페 수필문학상 작품공모
「푸른솔문학(계간)」은 우수한 작품을 발굴하며, 지역사회의 문학 발전과
푸른솔문학회 카페의 활성화를 위하여
카페 수필 문학상 작품공모를 하오니 응모 바랍니다.
* 수필작품 공모 제목 : 어머니 (아버지)
* 원고 매수 : A4용지 2매 분량 (* 글자 굴림 11포인트)
(원고지 15매 내외)
* 제출 일시 : 2022년 4월 20일 ( 제10회 카페문학상 게시판)
* ( 오후 4 시 ~ 8시)
* 참가자격 : 2022년 1학기 충북대 평생교육원 수필창작(A. B 반) 수강생.
2022. 3. 17
푸른솔문학 발행인 김홍은
제10회 카페문학상 응모 작품 심사 요망
수필창작 A. B 반 회원님들께 부탁합니다.
수필 공부를 하기위한 방법입니다. 실제로 글을 읽고
우수한 작품을 뽑아보기 바랍니다.
* 선정편수 : 2편 (1등. 2등)
* 뽑은 이유 : 1~2줄 정도. (간단하게 설명)
* 기간 : 4. 27일(수) 오후 8시까지
* 심사 결과 : hekimkk@daum.net 으로 보내주셔요.
* 1차 결과 발표 : 28일(목요일) - 심사평/의견나누기
1. 그리운 나의 어머니
어느새 봄이 왔는지 밭둑이 푸르다. 봄볕에 내 잔 등을 맡기고 봄을 캐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아무런 기척이 없던 땅 위로 새싹들이 얼굴을 내밀 듯 내 가슴속에 숨어있던 기억의 씨앗들이 꿈들꿈틀 새 순을 튀운다.
어머니는 열여덟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왔단다. 아버지는 오빠 둘을 낳고 군에 입대하셨다. 학교에 다니다 군에 간 남편을 기다리며 자식들 먹일 양식이 없어 보리밥 한 그릇으로 세 식구가 하루를 때우기도 했고 남들이 양식이 없어 굶는다고 할 것 같아 빈 솥에 맹물을 끓여 연기를 피워 올리기도 했단다. 모두 궁핍하게 살 때라 보리쌀 한 됫박 꾸어다 먹기도 어려웠단다. 병약한 자식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가슴은 숯처럼 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이다.
토담집에 달랑 숟가락, 젓가락만 있던 궁한 집에서 이대로 굶어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어머니는 닭장도 만들고 돼지우리도 짓고 외양간을 지었단다. 살림에 도움이 되는 거라면 무슨 일이든 하셨다.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자식들 건강도 서서히 나아지고 아버지도 직장을 잡으며 살림살이가 조금씩 여유가 생기더란다. 자식들 밥이라도 배부르게 먹이고 싶은 어머니의 소원은 쌀이 나오는 논을 갖고 싶으셨다. 그동안의 모은 돈과 모자란 돈을 빌려 우리 논이 생겼을 때 어머니는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기쁘셨단다.
세월이 흘러 가을이면 토광에 벼가 가득 쌓이고 너른 마당에 병아리와 암탉이 노닐고 외양간에 튼실한 소 울음소리가 울타리를 넘나드는 넉넉한 살림살이가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건강이 심상치 않아지셨다. 주말도 쉬지 않고 몸을 혹사시킨 탓인지 혼자 객지에서 자취생활을 하시느라 식사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한 탓인지 쉰을 넘으면서 당뇨와 고혈압으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퇴근하고 돌아오신 겨울날이면 뜨끈한 물을 대야에 담아 추위에 얼마나 얼었겠냐며 언 발을 푹 담갔다가 조물조물 주물러주시곤 정성스레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밥상엔 늘 고소한 계란찜이 올려졌고 겨울엔 당뇨에 좋다는 두부를 겨울내내 만들어 내시곤 하셨다. 귀한 육포를 만들어 드리고 인삼을 어슷하게 썰어 재웠다가 일년내내 드시게 하셨다.
몸에 좋고 병에 좋은 음식이 있으면 늘 아버지가 우선이셨다.
아버지는 추운 겨울에도 식사를 하시면 땀을 줄줄 흘리셨다.
체력이 약한 아버지를 어머니는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시곤 했다.
그런 어머니의 정성이 부족했는지 환갑을 한 해 앞두고 떠나셨을 때 엄마는 홀로 죄인이 되셔서 밖에 나가기가 부끄럽다고 하셨다.
아! 어머니는 얼마나 허망하고 막막했을까?
육 남매를 두고 어찌 떠날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의 애끓는 심정을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으랴!
하늘이 무너지듯 땅이 꺼지는 듯 우리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군대에 가 계실 때에도 늘 하얀 고무신을 뽀얗게 닦아 댓돌 위에 올려놓고, 장독위에 정안수를 떠놓고 매일 기도하셨단다. 그 새벽에도 어머니는 두 손을 모으시고 애통한 마음을 내려놓고 있었으리라.
달이 밝았던 어린 날 어머니는 우리에게 안골 밭에 가자고 하셨다. 진종일 일을 했는데도 늦은 밤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는지, 환한 달빛을 등불 삼아 안골 길을 따라갔다. 낮에도 혼자 오면 으슥한 길을 어머니가 앞에 가시니 뒷그림자를 쫓아간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씨를 뿌리고 우리는 이리저리 신나게 놀고..... 이제 생각해보니 오죽이나 바빴으면 밤을 낮 삼아 일을 하셨을까? 세상살이가 얼마나 고단하셨을까? 철없던 우리들을 생각하니 후회가 밀려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 A B C D, 아이 엠어 걸 한글과 영어로 삐뚤빼뚤 연필로 꾹꾹 눌러 쓴 공책을 발견했다. 여든셋의 연세에도 늘 배움에 목말라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니 내 모습이 부끄러워진다. 어머니의 반만이라도 닮은 딸이 되어야겠다.
평생을 우리를 위해 사셨던 어머니, 고된 삶의 짐을 내려놓고 주무시듯 고요히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무렵 수척해진 나를 꼬옥 안아주시며 ‘우리 딸 이젠 아프지 말아라’ 하시며 속울음을 삼키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아직도 내 등을 가만가만 토닥이시던 손길은 남아 있는데......
효도는 못할지언정 늘 걱정만 끼친 불효한 딸이었는데.....
이제 건강해진 내 등에 어머니를 업어드리고 싶다.
그리고 가슴에 꼬옥 안아드리고 싶다.
부모는 효도 할 때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난다.
어머니,어머니 그리운 나의 어머니! 아무리 소리높여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다. 오늘따라 어머니 목소리가 너무너무 듣고 싶다. 어머니 사랑해요.
2. 어머니 보고 싶어요
올해도 어김없이 가정의 달 오월은 다가온다. 벚꽃이 만발하면 가족들과 함께 벚꽃을 보러 진해 군항제를 보러갔던 생각에 더욱 어머니가 보고싶다. 어머니는 큰 형님 집에서 사신다. 백 순을 눈앞에 두시고 아직은 신체적 건강은 대수롭지 않게 사신다. 정신건강 상태는 치매가 있어 자식들은 늘 불안하다. 큰 형님 내외는 집을 비우고 논밭에 나가서 일을 하느라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지 못한다. 이삼년 전 까지만 해도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나들이도 다니고 맛있는 음식을 사드리고 하였다. 그러다 지구 전체를 혼란에 빠트린 코로나 19 때문에 요즈음은 어머니를 만나지를 못한다. 사람과 사람을 접하지 못하게 하는 정책도 있지만 잘못하여 코로나 19에 전염이 될까봐 두려운 거다.
어머니는 매일 주간보호 센터에 가신다. 아니 그곳 직원들이 모셔 가신다. 형님 내외가 농사일로 보살펴 드리지 못하니 방법이 없다. 전에는 어머니가 계시는 주간보호 센터에 일주일에 한 번씩 어머니를 뵈러 갔었다. 2년 전부터는 외부 사람은 접근을 차단을 하여 가지를 못한다. 만약 어머니에게 코로나를 감염 시키면 노환과 치매로 어려운 삶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 큰 형도 누구도 오지 못하게 하였다. 매년 두 번의 큰 명절에도 찾아뵙지를 못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간식거리나 음식을 현관에 놓고 온다. 세상이 어째서 이렇게 변하게 되었나, 어느 누구의 실수로 지구촌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고통을 받게 하는가? 누구를 원망을 할 수도 없다. 우리 스스로 감염 예방 수칙을 잘 지키며 살아갈 수밖에 도리가 없다. 어머니는 주간보호 센터를 가시면서 늘 노인정에 놀러 간다고 말씀을 하셨다. 어떤 이들은 자식들 앞을 떠나 보호센터를 가기를 싫어한다는데 어머니는 보호센터에 가시는 것을 즐거워하신다. 아마도 센터의 요양 보호사님들이 지극 정성으로 노인들을 보살펴 주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잘 세워진 스케줄대로 율동을 곁들인 노래도 함께하며 즐기시는 것 같다. 때로는 노인들끼리 별 내용도 없는 이야기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위로 봉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와서 악기라도 불면 어머니는 다른 몇 분의 어르신들과 무대 쪽으로 나와 몸을 흔들며 즐거워 하셨다.
어머니의 하루 생활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오늘도 요양 보호사들의 재미난 이야기로 치매 노인들의 정신적 치유를 하고 있겠지 생각하며 어머니를 그려본다. 웃음이 나 보다는 많으신 어머니는 다른 노인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계실까? 궁금하다. 자식들에게 커서 무엇이 되어 달라는 부탁도 없었다. 팔남매를 나아 키우시면서 자식 자랑은 잘 하지 않으셨다. 자식이 출세를 해도 그냥 무감각한 표정이셨다. 누구와 다투시는 일을 거의 보지를 못했다. 마음은 늘 천사표 이었다. 자식들에게도 큰 요구도 없었다. 그저 착실하게만 커다오! 하는 바람이 전부였다. 돈 많이 벌어와 호강시켜 달라는 말씀도, 좋은 집에 살게 해달라는 말씀도 없었다. 나 역시 크면서 부모님에 대한 출세의 부담을 가지고 살지를 않았다. 내가 하고 싶어 할 뿐이었다. 자식들에게 어떠한 부담을 주시지 않으셔서 고맙습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속내는 아마도 자식들이 다 잘되기를 바라고 계셨을 것이다.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간절히 바라는 기도문을 읽으셨을지 도 모른다. 어려서 한 두 번 본 기억이 있다. 집 뒤 장독대위에 냉수 한 그릇을 떠 놓고 두 손을 비벼가며 무언가 중얼 거리던 모습이 실루엣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나는 보답이라도 하듯 내 두 손은 맞잡고 기도를 한다. 어머니 치매 끼 더 이상 심해지지 말고 백세까지 건강하게 사세요. 언젠가는 어머니 옛날처럼 뵐 날이 있겠지요. 오늘도 욕심 없이 방긋 웃으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고 싶어요.
3. 촛불을 켜고
어머니를 여의고는 어버이날이 오면 부모님이 계신 이들이 부러웠다. 백합꽃을 좋아하시고, 하얀 옥양목 한복에 미사보를 쓰고 주님께 가고 싶다고 하시던 어머니의 우아하고 고운 모습이 한없이 그립고 보고싶다.
처음으로 내 방이 생긴 날, 새댁 노릇으로 하루를 보내고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은빛 촛대위에 선 진홍빛 촛불이 방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어서 오렴’어머니의 다정한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어머니! 가슴이 뭉클하다.
타오르는 불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잘 살아라”살짝 안아주고 토닥이며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가슴을 파고든다. 혼수를 장만하시며 좋은 촛대를 꼭 사주고 싶다고 하시던 어머니는 집안의 빛이 되라고 딸의 신방을 촛불로 밝혀주고 싶으셨나보다. 모두가 잠든 이 밤, 어머니는 지금 무얼하고 계실까. 등잔불 아래서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실까. 잠 못 이루고 뒤척이고 계실까.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오고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어머니는 내가 시집을 가도 하나도 서운하지도 않지요?”당돌한 내 말에 “너도 마찬가지지 뭐 ”어머니의 섭섭한 대답에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결혼을 앞두고 어머니는 햇병아리 찹쌀 황기 백숙으로 독상을 차려 주시면서 속내를 드러내셨다.‘객지로 내보내고 챙겨주지도 못하고 시집을 보내니 마음이 더 안 좋구나!’목이 메이고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딸 일곱을 낳으시고 아들을 낳으신 어머니는 딸들의 고등학교 진학을 꿈도 못꾸게 하셨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나는 미용사가 되었고 결혼을 했다. 배움과 학력의 갈증은 아들이 고 3인 50에 최고령으로 검정고시에 도전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획득했다. 대학도 가고싶었다. 그러나 아들과 맞물린 대학의 길은 딸들이 막아섰다. 나는 엄마였다.
촛불은 소원을 담고 근심 걱정을 해소하며 축하와 행운의 뜻이 있다고 했다. 부모님을 위한 기도를 할 때마다 하얀 적삼을 입으신 모습으로 바라보시는 아련한 모습이 그리움을 더한다. 어머니는 대종손의 맏며느리로 집안의 대소사를 말없이 받들고 층층시하의 대가족을 위해 효와 덕을 겸비한 집안의 빛이셨다. 긍정적이고 지극한 효심과 다독이는 품성은 모범을 보이셨고 항상 단정한 모습은 흐트러짐이 없으셨다. 그러나 금슬좋은 부부는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자 어머니의 충격은 몸과 마음의 고통으로 10여년을 병고에 시달리셨다. 어머니는 하루라도 속히 아버지 곁으로 가고싶다고 하셨다. 격의없이 편하고 마음을 털어놓고 의지할 수 있는 곳은 부부였다.
어머니의 영정앞에서 쉴새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섰는 나를 향해, 타오르는 불꽃을 뒤로하고 엷은 웃음을 띠고 바라보시던 초연한 모습이 서러움보다 병고의 고통을 벗어난 편안함을 주는건 웬일일까. 죽음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이 가야할 길이다. 한생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하늘로 떠나시는 어머니를 향하여 다소곳이 손을 모으던 그날의 내모습이 떠오른다. ‘한 마당에 10촌 난다’는 옛날과 달리 맞벌이 부부 핵가족시대에 병약한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었다. 위독하시다는 전화에 달려간 병실에서 어머니 얼굴에 얼굴을 맞대고 엄마라고 부르며 가슴이 아프다.‘외롭다. 사람이 그립다. 너의 집에 가고싶다’하시던 말씀이 귓가를 맴돌고 새집으로 이사하고 모시겠다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눈시울이 뜨겁다. 좋아하시던 성가와 기도로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오던 날 발걸음은 천근이었다.
어머니의 촛대를 꺼내어 닦는다. 진홍빛 큰 초를 꽂고 불을 밝히고 하염없이 바라본다. 삼단 스탠촛대에 밝힌 불이 환하게 타오르며 손녀와 꽃맞추기, 말놀이로 환하게 웃으며 즐거워하시던 모습이 어른거린다.
항상 우리를 위해 지켜보시고 기도하시는 어머니,
하느님나라에서 아버지와 함께 영원한 천상 행복을 누리소서.
4. 어머니
쑥국을 드시면서 어머니는 입맛이 쓰다고 하신다.
이제는 봄 입맛도 못 느낀다고 하시기에, 나는 얼른 “엄마 이 쑥은 원래 쑥 향기가 없고 약간은 쓴맛이 나는 쑥이야”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그러냐고 하시고는 맛있게 다 잘 드셨다.
나는 대충은 안다. 어저께가 외할머니의 기일이다. 물론 제사는 충주의 외삼촌이 지낸다.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9살 때인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일찍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살아오면서 항상 그런 외할머니가 불쌍하고 안쓰럽다고 하시며, 가슴으로 어머니를 그리워해 오셨다. 더구나 어머니는 어릴적 계모와의 또 다른 고단한 삶에 지쳐 가끔은 일찍 돌아가신 외할머니에 대한 원망이 그리움보다도 더 많았다고도 한다.
어머니!
누구에게나 어머니의 존재는 세월이나 나이와는 상관없이 그냥 그립고 보고 싶으며, 가슴에 안기고 싶은 어머니일 뿐이다.
올해 89세이신 어머니는 금년 들어 정말 갑자기 많이 수척해지셨다. 어머니는 올해의 봄이 어쩌면 당신에게는 마지막 봄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계절정리를 하신다.
흔히 생활역술(生活曆術)에서 인생의 주기적 고비마다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아홉수에 대한 심리적 압박이 강하다. 그래서 어머니는 봄 입맛도 없다고 하시면서 올 봄을 더 아쉬워한다.
지난해부터 치매초기에다 보행보조기의 도움이 없이는 거동도 불편하다. 어머니는 지금 어머니 인생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추억의 세월흔적을 많이 잊어버렸다.
내 생각에도 이제는 어머니의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을 듯싶다,
어머니는 1954년 21살에 시집을 왔고, 아버지는 결혼 석 달만에 나를 임신한 것도 모른 채 입대를 하셨단다. 그 후 어머니는 아버지의 제대까지 4년을 기다리셨다. 그때의 기다림이 인생에서 가장 길고 힘들며 간절한 기다림 이였다고 회상 하신다.
어머니는 우리 4남매에게 “세상살이는 기다림의 연속이라며 기다림은 살아가는 동안 기대이자 희망이며, 힘이요 용기였음을 그때 깨달았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자식 4남매 결혼과 7명의 손자 그리고 손자와 손녀의 결혼에 증손자도 3명이다. 어머니는 지금이 당신의 인생에서 지금까지의 긴 기다림에 대한 보답이라며 참으로 행복하다고 하신다.
나는 어머니에게 이제 머지않아 증손자들이 초등학교 입학을 하는 것도 보아야한다고 하니, 어이없다는 표정이지만. 말만으로도 흐뭇한 웃음을 지으신다. 그리고는 “애비야 이제 그 기다림은 내 몫이 아닌 애비 너의 시간 이란다”라고 하시며 웃으신다.
하루가 다르게 어머니는 몸이 많이 불편해지고 있음을 어머니 자신이 더 잘 안다. 어머니는“이제는 더 이상 너희들에 대한 기다림은 없지마는 단지, 내가 너희들에게 짐이 될까봐 걱정이다”라고 하시면서 모두를 다 내려놓으신 듯하다.
어머니는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의 기다림만이 남아 있다고 하신다.
먼저 가신 아버님을 만나는 날의 기다림이란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더더욱 내년 봄을 기약하려 하지 않는다.
어제는 태어 난지 10달이 되도록 코로나로 인해 보지 못한 증손자가 보고 싶다고 하여 아들 내외를 오라고 했다.
어머니는 증손자의 살맛이라도 보고 싶어서인지 얼굴을 비비려하니 아이는 낯가림에 울고 불고로 난리이다. 온몸으로 발버둥 치며 버둥대는 증손자를 내려놓으며, 어머니는 말씀 하신다.
“그래 곧 헤어질 인연이거늘, 무슨 정이 필요하겠니?”하시면서도 증손자와의 첫 대면에 흡족하고 대견한 듯 눈을 떼지 못한 채 깊은 주름 웃음을 보이신다.
사월초파일을 앞두고, 집안 화단의 배롱나무에 절에서 가져와 달아 놓은 연등(燃燈)을 바라보시는 어머니는 지금 무엇을 빌며 또 무엇을 기다리시는 걸까? 어머니는 50여년을 절에 다니면서 지금까지 빌고 또 빌면서 오늘에 지금을 기다려 오신 것이 아닌가?
얼마 전 봉사 차 내덕동의 오래 된 단독주택에 사시는 독거노인을 방문한 적이 있다. 몸이 많이 불편한 86세의 할머니이다. 방문 요양보호사의 도움으로 정말 어렵게 사신단다. 나는‘어머니? 어머니?’하며 살갑게 대하니 할머니는 코로나로 인한 고독 탓인지 말동무가 제일 기다려지고 좋단다. 그 할머니 역시 평택에 사는 하나뿐인 딸자식이 많이 기다려진단다. 그리고는 사는 게 너무 힘들고 고통이라며 할머니의 바람과 기다림은 얼른 죽는 거란다. 왠지 장수시대가 모두에게 좋은 것만은 아닌 듯 서글프다. 지금은 장수고독의 시대이다. 그래서 고령의 우리 부모님들의 바람은 자식과 손자들이 자주 와 주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오늘도 정원 앞 파란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초점 잃은 시선으로 화단만 바라보며 따스한 봄 햇살을 마주하고 있는 어머니!
듬성듬성한 백발에 깊고 굵은 주름의 어머니 옆모습은 분명 우리가족의 봄꽃이다.
어머니 꽃이다.
5. 그리운 어머니
날씨가 화창하고 따스한 날, 오랜만에 서울에서 온 작은언니와 형부가 산소에 간다고 하여 목련공원에 함께 가기로 하였다. 삼일절 후에 성묘가려다 차가 밀려 그동안 미루어 왔는데 산소에 같이 가자하니 무척 기뻤다. 부모님을 뵈러 간다는 생각에 설렘으로 가경동 근처에서 큰 형부를 모시고 출발했다.
예쁘고 화사한 꽃이 산소 양쪽에 피어 있다. 어머니는 부지런하시어 이웃집이나 친척들에게 일이 있을 때마다 달려가셨다. 아프실 때도 주변 애경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하셨다. 본인의 건강보다 남들을 위해 애쓰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한번은 초등학교 때 바삐 가느라 도시락을 못 챙겨 간 적이 있었다. 그런 날이면 쉬는 시간에 어김없이 찾아오시어 도시락을 건네주시며, 바빠도 점심은 꼭 챙겨 먹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도시락과 함께 찐빵도 가져오시어 고마움에 눈시울을 적신 적도 있다.
책이 필요하다면 이웃집에서 돈을 빌려서라도 사다 주셨다. 책장을 거실에 두어 집안에 들어서면 책이 바로 눈에 띄어 많이 읽게 되어 공부에 많이 도움이 되었다. 여고시절에도 공부하다 늦게 와도 기다리시다가 좋은 말씀도 해주시며 건강을 위해 쉬면서 공부하라 하셨다.
하교 후에 엄마가 집에 없어 텃밭에 가보면 오이와 고추, 호박과 가지, 토마토 등 채소를 가꾸시느라 쉴 틈도 없이 일하고 계셨다. 거들어 드리려고 하면 다 되었으니 집에 가자고 하신다. 딸이 힘들까 보아 일을 하다말고 집에 가시는 모습을 보고, 어머님의 사랑에 눈시울이 뜨거운 적도 많이 있었다.
대학 졸업 후 단양에 첫 발령을 받으니, 멀지만 잘 되었다며 버스로 그곳까지 함께 동행 하시며 사택에 필요한 물품을 챙겨주신 정겨운 어머님! 1년 후에 제천으로 가서 기차로 주말에 귀가하면 반갑게 맞아주시며, 우리 셋째 딸이 최고라며 아낌없이 보듬어 주시던 그 정성……. 결혼 후에 둘째를 낳았을 때 먼 길을 오시어 돌봐 주시던 어머님의 정겨움과 사랑은 아직도 내 가슴에 묻혀 있다.
큰형부와 함께 언니 오빠 내외와 우리 부부, 7명이 산소에 돗자리를 깔고 가져온 주 과 포 등 음식을 차려놓고 두 분께 절을 올렸다.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며 그동안 못 다한 서로 간에 쌓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상당산성을 한 바퀴 돌자고 했다. 오랜만의 산행이었다. 파란 나무와 함께 봄의 향연을 알리는 꽃들이 서로 시샘하듯 피어 있다.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따뜻한 계절임을 말해 준다.
파란 물가에 명암타워가 높이 솟아있다. 명암지 근처에 있는 식당을 찾았다. 시간이 이른지 식당 안은 한적하다. 야채 꽃 한정식이라 그런지 야채샐러드와 오이 등 채소류와 오징어 전 떡볶이 등이 입맛을 돋운다. 오랜만에 둘째 언니와 올케와 같이 식당 앞에 있는 그네를 탔다.
아! 그리운 어머니. 평소 부지런하시어 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실 줄 알았더니, 남을 위해 헌신하시던 어머니의 옛정을 생각하며 오늘 하루도 따스한 어머니의 품이 그리워진다. 본인이 아프실 때도 조카 돌상을 차리고 행사 준비하다 쓰러지신 어머니! 그날 이후 많이 볼 수 없어 애처롭고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다.
향기 가득한 공간에서 따스한 만남을 가져야 하듯이, 베푸는 즐거움 하면 친정어머님이 떠오른다. 내가 어릴 적부터 시간만 나시면 이웃집 일도 도우시며, 몸이 아프신 데도 이웃 친척 애경사에 빠짐없이 참석하시던 그리운 어머니! 몸살기가 있으신 데도 조카 백일 준비로 시장 갔다 오시다가 집 근처에서 쓰러지신 어머님, 지인의 도움으로 귀가하여 병원으로 갔으나, 낮은 혈압으로 작고하신 어머니! 알아보니 그날 바빠서 혈압약도 못 드시어 귀가 중 쓰러지셨다는 말을 듣고, 허망한 마음으로 오랜 세월 가슴이 저려왔다. 베푸는 즐거움으로 행복감을 두 배로 느끼는 그런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어머님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맺힌다. 자식을 위해 늘 아낌없는 사랑을 베푸시며, 죽어서도 자식을 늘 보고 있을 거라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항상 옆에 계신 느낌으로 살아가니 편안하다. “그리운 어머니, 오늘도 편안히 건강하게 어머니와 함께 있다는 느낌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려 해요. 늘 지켜보아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사랑해요!”
‘사랑한다는 것은 관심을 갖는 것이며, 존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책임감을 느끼며 이해하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주는 것이다.’ 라는 명언처럼 이유나 조건이 따르지 않고 혼자 있을 때 제일 먼저 생각이 나는, 진한 땀 가득히 머금고 그리운 어머님처럼 좋은 사람이 되어 보고 싶다.
6. 사랑의 빚
가녀린 햇살이 창틈으로 들어온다. 유리 벽 사이로 오롯이 내리는 봄 볕은 죽은듯한 수국의 마른 가지에 파릇한 봄을 열고, 소복하게 자라난 어린잎들은 겨울 뜨락에 봄을 수 놓아간다. 어디 그뿐 인가 마가렛 나무에도 생명이 꿈틀거리며 한 송이 두 송이 꽃망울을 터뜨리며 요 며칠 정지된 삶에 은은한 향기로 다가온다. 나는 허리받이가 긴 원목 의자를 거실 끝에 옮겨 놓고 오도카니 햇살과 마주 앉았다.
창궐한 코로나로 인해 가족 모임을 미루던 차에 방역 패스가 해제되고 거리 제한을 완화한다는 소식이다. 지루하고 답답하던 일상에 그나마 최소한의 자유를 허용하다니 마음이 조금 여유로워진다. 긴 기다림 끝에 오랜만에 갖는 가족 식사 자리가 너무 성급했나, 아니면 오미크론 바이러스가 우리를 질투한 걸까, 시차를 두고 한 검사결과는 딸네 가족까지 모두 코로나 확진으로 나왔다. 곧바로 격리 생활이라니 갑자기 수인이 된 듯 창살 없는 감옥에서 두문불출해야만 했다. 누구도 만날 수 없는 격리된 상황에 내 손으로 식사를 해결할 수 없고 몸과 마음이 점점 나락으로 떨어진다.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홀로 고통과 싸워야 하는데 어미를 걱정하는 딸들이 배달음식을 주문하여 삼시 세끼 현관 앞에 공수해주었다. 그나마 식당에서 온 음식들이 효자 노릇을 했지만 소태같이 쓴 입맛에 어떤 진미도 식욕을 돋우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 엉덩이에 생긴 종기로 아주 힘든 시간이 있었다. 대수롭지 않을 거라 방심했던 것이 화근이 되어 조그만 종기 하나가 온몸을 괴롭히며 앉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신세로 만들었다. 쉰둥이 외동딸이었으니 연로하신 부모님께 몸을 보일 수도 없는 처지여서 며칠을 그냥 참으려 했다.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보다 못한 아버지가 나를 업고 병원으로 향했다. 영희야 어서 업혀라, 이러다 큰일 치르겠다... 늙으신 아버지가 등을 내어 주신다. 늘어 야윈 촌로의 등허리에 몸을 맡기고 병원으로 향하는 길은 멀게만 느껴졌다. 어린 시절 이후 처음 등에 업힌 아버지의 마른 몸은 매우 연약한 모습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노구에 사력을 다하시던 아버지, 시내 병원까지 나를 업고 달리신 힘의 원천은 아마도 부자유친이라는 사랑이었을 게다. 마침내 병원에 도착해 수술을 받으니 고름이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듯 흘렀다. 그런 나를 아버지는 가여운 눈빛으로 측은하다 바라보고 나는 아버지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았다. 비록 앙상한 등허리와 가냘프게만 보이던 노인의 작은 체구지만 산처럼 바위처럼 나의 버팀목이 되셨던 고마우신 아버지의 사랑이 불현듯 그리워진다.
베란다 너머로 꽃등을 켜듯 목련꽃이 화사하게 피어난다. 나의 봄날은 어디쯤 오고 있는 걸까 잠시 상념에 잠기는데 낯선 전화가 왔다. 산남동에 있는 치킨집인데 아파트 동호수를 묻는다. 사연인즉 수필을 지도하시는 노 교수님께서 우리 집으로 치킨을 주문하셨다는 이야기이다. 아뿔싸, 문학회 일로 일전에 전화를 드렸다가 코로나 이야기를 비친 것뿐인데, 여든의 어르신이 치킨을 보내시다니, 스승의 어진 마음에 민망하기도 하고 고마운 마음이 교차한다. “수필엔 정이 있어야 한다.”시며 글보다 사람이 먼저 되라고 늘 말씀하시더니 제자에게 몸소 베푸시는 노 교수님의 사랑이야말로 한 편의 수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운 마음에 배달온 치킨을 한 조각 맛을 본다. 스승님의 따뜻한 마음을 녹여낸 듯 매콤하니 달달하다. 덕분에 입맛이 살아나고 예전의 식욕을 되찾으니 코로나도 떠나가기 시작했다. 치킨 한 조각, 나는 또 오늘 아버지에게처럼 사랑의 빚을 진다.
7.지팡이
어머니는 미수(米壽)의 연세에 비하면 건강하시다. 몇 년 전까지 혼자 버스타고 청주를 오가시며, 점심 드시고 식곤증이 몰려오는 시간에도 반듯한 자세로 앉아 몇 시간씩 책을 보셨던 분이다.
지병으로 병원을 주기적으로 다니시며 약을 챙겨 드시고. 당신 건강관리도 철저하게 관리하시는 편이시다. 그래서 같은 연배의 친구 분들에 비하면 어머니는 건강하게 지내셨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무릎이 불편하다 하셨다.
차차 나아지겠지 했는데, 병원에 다니며 약도 드시고 침도 맞고 하셨지만 나아지지 않는다. 앉고 일어서실 때마다 힘들어 하시며 “어구구” 소리를 입에 달고 계신다. 마을 회관에서 하는 한글 배우기, 체조하기도 뜸하셨다.
모든 걸 귀찮아 하셨다. 잠시라도 편히 다니시라고 지팡이를 마련해 드렸다. 그때부터 손에서 지팡이를 놓으시지 못하고 있다. 지팡이가 어머님의 모든 생활을 함께 한다.
어머님의 목적 없는 희생과 삶의 전부이고 희망의 결정체인 나는 불편한 어머님의 다리를 위하여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지팡이처럼 어머님의 몸을 지탱해주는 일도,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도 못한다. 장남이라는 명칭만 달고 다니는 타인 같은 신세다.
자식을 위한 희생은 어머니 삶의 전부였다. 세월이 어머니의 무릎에 있는 부드러운 이음새를 다 갉아 녹슬게 했다. 우리자식들이 다 갉아 먹었다.
그래서 삐거덕 거리며 뼈와 뼈가 맞닿아 어석거리는 통증으로 어머니의 삶을 긁고 있다. 그 소리를 들을 때 마다 자식들 가슴에도 통증이 일어난다.
장남인 나를 누구보다도 어머니는 보배처럼 키웠다. 나는 안다. 어머니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멀리 발소리만 들려도 다 아시는 어머니는 지금도 내 걱정이시다. 그런 나는 기껏해야 병원에 모시고 다니는 것 외에는 어머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청주 병원을 오셔서 진료 받으시고 아들집에서 주무시고 가시라 해도 바로 시골로 가신다. 갑갑하다는 핑계를 대시지만, 자식을 위한 배려로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함이라는 것을 잘 안다. 모든 어머님들이 그렇지만, 자식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것이 때로는 서운하다. 다 큰 아들에게 기댈 수도 있건만, 어머님은 용납 되지 않으신가 보다.
어렸을 적 암탉이 알 낳는 시간을 정확히도 아시고, 그 시간이면 아들 먹이려고 방금 난 알을 가져다주셨다. 따뜻함이 남아 미지근한 비릿한 냄새와 미끈거리는 맛이 비위에 거슬렸지만 억지로 삼켰다. 그래야만 어머님이 좋아하셔서 그랬던 기억이 비릿하게 입안으로 차오른다.
지금도 맛있는 반찬이 있으면 꼭 내 앞으로 밀어 놓으신다. 내가 아무리 하지 마시라고 화까지 내도 매번 똑 같이 행동하신다. 그것이 어머니의 행복으로 알고, 요즘에는 어머님이 밀어주시는 반찬을 맛있다고 하며 먹는다.
그러면서 어머니도 드시라고 하면 흐뭇해하시는 표정으로 보신다.
한여름 밤 대학입시를 앞두고 연일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때였다. 졸음이 밀려들어 하얀 것은 책이고, 검은 것은 글자로 가물가물 눈 따로 머리 따로 멍하니, 검은 글자는 눈가로 밀려 가물거린다. 미분이 뭔지 적분이 뭔지, 씨름하는 수학책위로 툭툭 떨어지며 생을 마감하는 하루살이의 삶을 보면서, 이렇게 공부는 해서 뭘 하자는 것인가? 하는 회의와 불만이 가득했다.
공부에 대한 사춘기 특유의 반감으로 헤매던 때, 삐뚤빼뚤 받침이 틀린 글자로 어머님이 인편에 보내준 편지 한 줄에 모든 생각이 달라졌다.
“아들 바더 보아라 돈 걱정은 하지 말고 니가 필요한 책이던지 가외를 하던지 니가 알아서 잘하그라.”곧 넘어질 듯 꾹꾹 눌러쓴 글자가 뒤뚱거리며, 반 찢겨지고 구겨진 종이위로 엎어졌다. 나는 한동안 그대로 편지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어머님의 마음을 가득 담긴 글귀가, 내 가슴속에 다시 꾹꾹 눌러 새겨지고 있었다. 대학은 꼭 가야 한다. 어머니가 원하는 국립대학에 가야 한다. 나는 어머님의 편지 한 줄에 어른이 된 것처럼 사춘기의 방황을 접고 일어섰다. 어머니는 나를 그렇게 바로 세우시고, 갈지자로 걷지 않도록 이끌어 주셨다.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 한다. 어머님 건강하실 때 가족여행 한다고 제주도, 설악산 등 손자들과 같이 다녔다.
어머니께서 우리들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나는 알 수 있다. 얼마나 흐뭇해하시는지. 그냥 그렇게 바라보신다. 맛난 것도 싫고 편안한 잠자리를 원하시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한번 씩 쓰다듬어 보시고 미소 띤 모습으로 보신다. 그나마 지팡이를 곁에 두신 뒤로는 동행을 거부 하신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그러실 게다. 그래서 어머님 발을 대신할 수 있는 휠체어를 구했다. 여행이나 많이 걸어야 할 때 어머님 발 역할을 했다. 다 큰 손자들은 할머니 휠체어를 밀면서 제법 재롱을 부린다. 그러면 어머니는 환한 얼굴로 흐뭇해 하셨다.
어머님의 젊었을 때 당당했던 모습이 타다 남은 지푸라기 재처럼 점점 사그라지고 있다. 세월은 어머니를 지탱하게 해주는 육신과 어머니의 넉넉했던 마음까지도 하나하나 쪼그라들게 한다. 점점 초라해지는 어머니의 모습에 가슴이 저려 온다. 장 손자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는 어머니. 이렇게라도 어머니를 오래 뵐 수 있다면…….
8. 어머니의 손거울
어젯밤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오늘은 60년만에 어머니를 모시러 가는 길이다. 아침 일찍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많은 기억과 생각들이 머릿속을 머물고 지나간다. 어머니는 10살인 나와 5살인 여동생을 남기고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 후론 나의 어린 가슴 빈 구석엔 늘 어머니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 생각은 끝이 없었다. 꿈 속에서도 늘 그리웠고 학교나 주위에서 친구들이 어머니와 함께 있을때면 너무나 부러웠다. 그렇게 하염없이 생각하던 어머니를 뵈러가는 길이다. 어머니는 햇살이 잘드는 남향의 작은 언덕에 모셔져 있다. 오래전에 가족묘원으로 조성해 놓은 곳인데 이 지역이 산업단지로 개발된다는 소문이 계속 있어오다 이번에 확정되어 아버지의 산소로 합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장을 도와줄 전문가들과 함께 수작업으로 고운 흙을 살살 파내려가자 어머니의 뽀얀 모습이 드러났다.
아! 늘 사무칠 듯 그리웠는데 ... 얼굴도 몸도 보이지는 않지만 골격이 느껴지는 그런 모습이었다. 얼굴을 보고 대면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경건하고 가슴떨리는 순간이었다. 몸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전문가의 하얀 장갑 위로 유골이 한점한점 차근차근 조심스럽게 모셔져 온다. 넓은 판자의 하얀 천위로 누워계신 모습 그대로를 수습한 후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데 가장자리에서 작은 손거울이 보였다.
흙 속에 묻힌 손거울은 손바닥 만한 크기였다. 단면의 거울이었고 깔끔하게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다. 흙이 묻은 채 올려진 거울을 드는 순간 손이 부르르 떨렸고 70년 이상을 어머니와 함께 한 유품이란 생각에 가슴도 먹먹했다. 흙을 닦은 후 거울을 들여다 본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유품이 나온 것에 대한 감사함이랄까 마치 어머니를 보는 듯 하다. 아니 어머니가 거울 옆에 계신 듯 하다는게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문득 거울을 넣어주신 어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어떤 생각으로 넣어 주셨을까. 마음이 어땠을까. 애절한 사랑의 정표일까. 감정과 함께 여러 생각이 떠오른다.
어쩌면 아버지는 어머니가 사용하시던 물건으로 매일 얼굴을 보시고 늘 예쁜 모습을 유지하길 바라는 마음이었을게다. 또 하늘에서 우리집과 아이들을 비추어 보면서 보살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절절한 마음이 담겨있지 않았을까.
두분은 중매로 만나 결혼을 하셨는데 아버지는 33살 이었고 어머니는 어리고 곱고 순수했던 꽃다운 나이 22살 이었다. 아버지는 징용으로 일본에서 많은 고생하다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어머니를 만나게 된 것이다. 당시엔 결혼 정년기가 지난 늦은 나이에 배필을 만났으니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웠을까. 하지만 가진게 없었기에 가정을 꾸렸어도 몸으로 부딪히며 살아야 했고 매일매일을 부부는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았어야 했다.
사는게 힘들고 지칠때도 있지만 집에 오면 늘 아이들과 어머니의 위로가 아버지의 힘이었고 행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꿈이 넘치고 삶의 열정이 가득한 34살의 젊은 나이에 병환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머나먼 곳으로 길을 떠났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사랑하며 열심히 살자고 약속했을 두분의 삶도
어느날 저 세상과 이 세상으로 갈라졌다. 어머니를 잃은 아버지의 심정은 세상 모두를 잃은 것과 같은 아픔이었으리라. 어쩌면 어머니와 같이 떠나고도 싶었을 그 절망적인 슬픔을 간직하고 사셨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마음이 찢어진다. 어린 아이들 때문에 어쩌지도 못하고 그렇게 마지막 길을 보내는 그 심정을어떻게 말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하는 젊은 아내를 지키지 못하고 떠내 보내는 참담하고도 비통한 그 마음을 누가 헤아릴수 있었을까. 사는게 어려워 넉넉히 먹지도 못했을뿐 아니라 당장 필요한 진료도 제대로 받지못해 하늘의 별이 된 아버지의 모두였던 어머니에 대한 애끓는 마음을 무엇으로 어떻게 표현할수 있었을까.
두 분의 애절하고 슬픔이 가득 담긴 사랑의 정표 그 작은 손거울이 가슴 뜨겁게 다가온다. 왜 이리 마음이 아플까. 내가 성인이 되고부터 매년 추석전 금초를 할때면 혼자 다녀온다고 해도 늘 함께 하시며 내가 죽으면 어머니와 합장을 하라고 말씀하시던 아버지가 아니시던가. 어머니와 함께 합장을 하면서 어머니의 손거울도 다시 그 위치에 넣어 드렸다. 70년을 넘게 늘 사용하신 것처럼 비춰보시며 따뜻한 마음으로 영원하시길 간절히 기원드리고 또 두 분의 절절하고도 깊은 사랑을 가슴에 간직하면서 ......
9. 아버지의 향기
어둠이 가득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집안에 은은하고 달달한 향기가 가득 차 있다. 어디서 나는 향기일까, 익숙한 방향제의 향기는 더욱 아니었다. 향기의 근원지를 찾아 거실에서부터 서재까지 집안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마지막 베란다 문을 여니 서늘한 가을바람을 타고 살랑살랑 향기들이 거실 안으로 몰려들어왔다. 구름을 막 벗어난 달빛 속에 연한 연둣빛 작은 꽃송이들이 보였다. 마치 요정들의 나팔처럼 생긴 야래향 꽃이 함빡 핀 것이다. 작은 요정의 나팔에서는 아름다운 소리처럼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저 여리디 여린 꽃송이에서 어떻게 이런 향기를 쏟아낼 수 있을까 향기에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지금 꽃을 피우고 있는 야래향은 몇 년 전 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돌아올 때 큰오빠가 분을 나누어 여섯 동생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꽃향기가 참 감미롭다고 하셨다. 그렇게 받아온 야래향은 매년 아버지 제사를 전후하여 꽃을 피운다. 제사를 모시고 집으로 와 거실에 들어서면 캄캄한 어둠과 찬바람이 가득한 공간은 더 큰 그리움과 슬픔을 느끼게 했다. 언제부턴가 그 어둠을 밀치고 달달한 야래향 꽃의 향기가 순간을 위로 해주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조건 없이 나누어주셨던 크나큰 사랑처럼 그리움에 대한 슬픔을 위로해주는 향기가 되었다.
사실 야래향 꽃에는 부모의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 아닌 애틋한 여성의 사랑이 담긴 전설이 있다. 얼굴이 못생긴 여인이 한 남자를 사랑했는데 그 남자는 여인의 마음을 알아주기는커녕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애가 타던 여인은 남자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밤이 되면 침실 가득 야래향의 향기를 뿌려 남자를 유혹했다. 그 남자는 밤이면 야래향 향기에 취해 여인과 함께 있었지만 해만 뜨면 모르는 사람처럼 다시 여인은 쳐다보지도 않았단다. 결국 여인은 짝사랑하던 남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죽게 되었고 야래향은 밤에만 꽃을 피우며 향기를 내뿜게 되었단다. 향기에 비하면 꽃은 정말 볼품이 없다. 크기도 작으면서 연한 연둣빛 색깔로 화려하지도 않다. 해가 지면 꽃을 피워 밤새 달달한 향기를 내뿜다가 해만 떠오르면 작은 꽃잎마저 닫아버리고 향기도 사라진다. 그래서 꽃말도 ‘위험한 사랑’이란다.
슬픈 사랑을 지닌 야래향 꽃이 아버지 제사 때 피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알 수가 없다. 아버지와는 전혀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천상의 소풍을 떠나시기 열흘 전 쯤 안개가 자욱한 일요일 새벽 우리 집을 찾아오셨다. 늘 오시던 집을 찾지 못해 이른 아침 이 집 저 집 벨을 누르며 다니다가 아파트 경비원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오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6개월 간 곡기를 끊으신 아버지는 평소 좋아하셨던 술과 함께 어머니 영정사진만 보고 지내셨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건강이 걱정되었지만 병원에 가는 것도 거절하시고 술만 잡수시며 이제 때가 되었다고만 하실 뿐이었다. 자식으로서 날로 쇠잔해 지는 아버지가 안타까웠지만 너무나 완강하여 병원에 모시고 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저 보고 있을 수밖에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혼자 계시는 아버지를 우리 집으로 모시고 싶었지만 딸이라고 싫다고 하시더니 갑자기 찾아오셔서 반갑기도 하면서 기분이 오묘했다. 너무도 많이 지친 아버지의 모습은 사그라지는 화로의 장작불처럼 느껴지며 넓고 우람했던 어깨가 한없이 작아보였다.
서둘러 아침 밥상을 차렸다. 아버지와 함께 밥상에 둘러앉았던 것이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처음인가보다. 그렇게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더니 시금치 된장국이 맛있다고 하며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급하게 일어서셨다. 가신단다. 모셔다드린다고 했지만 뿌리치고 가셨다. 그 길이 우리 집에 오셨던 마지막이었다. 아침이면 사라지는 야래향 향기처럼 꿈인 듯 마지막 다녀가신 것이다.
숭고하고 고귀한 아버지의 자식 사랑을 어디 여인의 사랑과 비교할 수 있을까마는 오늘밤 나를 위로하는 야래향 꽃향기만은 여인의 아름다운 사랑의 향기가 아니라 아낌없이 주는 아버지의 넓고 큰 자식 사랑의 향기가 아니었을까. 해마다 아버지의 제사 때면 피는 야래향에서 아버지의 향기를 찾고 있다.
사람들은 어느 장소에서 든 서로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어느 학교 동문, 어느 지역 동향 등을 따지며 친해지려고 한다. 그리고 같은 동문이나 동향이면 금방 형님 아우하면서 오래전 만난 사람처럼 친해진다.
오늘 밤 나도 야래향과 관계를 맺었다. 아버지 제사 즘에 피어나 내 마음을 위로하니 아버지의 향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투박하고 거친 시골농부였던 아버지께 야래향 향기는 과하지만 우리를 사랑해주셨던 자식 사랑의 향기는 야래향보다 더 달달했다. 해질녘 이마의 땀을 훔치며 지게를 내려놓는 땀내 나는 아버지의 체취를 느껴보고 싶은 날이다.
10. 아기가 된 어머니
"얘야! 돋보기가 어디루 갔는지 아무리 찾아도 없다."
"통장이 없어졌다."
"지갑을 어디다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저녁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모르겠다."
어머님방에 도둑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매번 어머님 물건이 없어졌다고 찾아 달라고 하신다. 난 탐정이 되어 집안 여기저기를 뒤져야 한다. 어느 땐 전혀 예상 밖 장소인 장롱에서 돋보기가 나오기도 하고 수건을 차곡 차곡 정리해 놓은 서랍에서 통장을 찾아 드리기도 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어머님의 기억도 함께 어디론가 흘러 가 버렸나 보다. 지난해와 올해가 다르고 지난달과 이번 달이 다르게 변해가는 어머님의 모습에 난 당황스럽기도 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불과 몇 달 전 경증의 치매를 앓고 계시다 뇌출혈이 생겨 병원에서 1년여를 고생하시다 천상으로 떠나신 아버님이 생각나서다.
지금 보여지는 어머님의 모습이 아버님 생전 모습과 너무 닮아 가시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집착을 하시기도 하고 같은 내용의 질문을 반복적으로 하시며, 평소에 손쉽게 하시던 당신의 주변 챙기는 간단한 일들도 단정하게 하지 못하신다.
몸 움직이는 것을 무척 귀찮아 하시며 자꾸 자리에 누우려고만 하신다. 아직 창밖이 어둡지도 않은 초저녁 어머님은 벌써 잠자리에 드신다. TV를 켜 드리고 말을 걸어도 잠이 와서 주무시겠다고 하신다.
어머님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젊으셨을 적엔 남자 못지않은 우직함과 용감한 성격이셨다. 체구가 크신 데다가 목소리도 우렁차고 행동도 거침이 없으셨다. 난 신혼 시절 아무런 일 없이 어머님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이 벌렁거렸다. 무언가 모를 어머님의 기에 눌려 그냥 고양이 앞에 쥐가 된 심정이었다.
당신이 생각하고 계획한 것은 절대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의 생각이 관철될 때까지 상대를 힘들게 할 때가 많았다. 타협을 하려고 무진장 애를 써 봤지만 오히려 가슴에 생채기만 남기고 물러서야 할 때가 부지기수였다. 분명 가슴엔 따스함이 있으신 분이셨는데 겉으로 보여지는 어머님의 모습에선 차갑고 무서운 감정만이 전해질 뿐이었다.
내가 어머님과 함께 생활을 한지 어느덧 20여년이 지났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더니 그토록 무섭고 어렵기만 했던 어머님이 이젠 어린아이의 모습이 되셨다. 모습만 그런 것이 아니고 생각과 행동 모두가 그냥 어린 아이다. 아이가 어릴적 새로운 것을 배울 때 같은 질문을 수도 없이 하고 그 이후에 그것에 대해 인지하고 습득하게 된다고 한다.
지금의 어머님 모습이 그렇다.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하신다. 당신의 기억엔 없으신거다.
"에미야!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 "네에. 어머님. 수요일이예요." 하고 말씀드리면 몇 분이 지나 똑같이 또 물으신다. 요일이나 날짜 정도는 간단해서 얼마든지 여러 번 말씀드릴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 대한 질문은 같은 상황에 대해 여러 번 똑같은 대답을 해 드리다 보면 많이 힘들고 지쳐서 몸에 기운이 쭈욱 빠져 버린다.
어머님의 변해가는 모습에 어머님을 모시고 병원에서 여러가지 검사를 해 보았다. 뇌 사진도 찍고 이비인후과에서 청력 검사도 하고 부수적인 검사를 다 해 보았지만 다행이 큰 이상은 없으셨다. 노화에 따른 현상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시는데 행동하시는 모습이나 인지면에서는 예전과 다른 부분이 많이 보인다.
늙어간다는 것은 다시 태어날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점점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이는 어머님을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고 서글퍼진다. 그렇지만 어머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결코 녹녹치 만은 않다. 인내와 배려 그리고 한없는 이해심을 필요로 하는 순간들이 너무나 많다.
어느 땐 내가 먼저 지치고 힘에 겨워 어려울 때가 자주 있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되어 가시는 어머님을 이젠 내가 엄마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순응하며 가슴을 열어 꼬옥 품어 드려야겠다.
어머님!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멈춰 주세요. 그리고 제가 감당할 수있는 힘과 지혜를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머님 사랑합니다.
11. 어머니와의 이별
화창한 봄날 꽃 구경을 나섰다. 문득 어머니 모습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엄마! 꽃이 너무 예쁘네요.”라며 중얼거렸다. 꽃을 좋아하시던 어머니는 앞마당에 진달래, 백합, 채송화, 봉숭아를 심고, 꽃나무도 심어 우리를 늘 즐겁게 해 주셨다. 봉숭아 꽃이 필 때면 손가락마다 무명실 매어 주며 봉숭아 물 곱게 물 들려주시던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100세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는 말년을 서울 요양원에서 지내셨다. 지방에 사는 나는 한 달에 한두 번 어머니를 뵈러 다녔다. 그럴 때마다 죄책감과 부끄러움의 복잡한 감정으로 항상 마음이 무거웠다. 요양원에는 가기 싫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기에 더욱 죄송했다. 어머니를 만날 때마다 정신적, 육체적 노쇠함과 더불어 심신의 변화가 뚜렷이 보였다. 그것을 느끼는 마음은 마지막을 향해 가물가물 잦아드는 촛불을 보는 듯한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나날이 세상일에 무감각해지고 멀어지는 어머니를 보면서 고달프고 힘겨웠던 일생이지만 그래도 지난날이 얼마나 좋았던가를 새삼 느끼곤 했다.
어머니가 젊고 자녀들이 말썽도 부리며 싱싱하게 자라던 시절, 그 어려움과 고달픔이 모두 희망이었다.
세상에서의 입지가 점점 줄어드는 것처럼 어머니는 몸이 야위시고 풍부하던 말과 기억력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이 세상으로부터,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셨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한때 나에게 절대적 의존처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존재였던 어머니의 변화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여행을 좋아하시던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 자매들은 여행을 준비했다. 수안보 온천으로 가는 승용차에서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하모니카로 불러드렸다. 우리는 모두 숙연해졌고 어머니는 고맙다고 하시면서 내 손을 꼭 잡으셨다. 호텔에 머물면서 옛날이야기를 하다 보면 둘만의 오붓한 추억은 없지만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무더운 여름에 목화밭을 김매던 어머니는 오직 딸에게 목화솜으로 따뜻한 이불을 만들어 시집 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당신 삶의 마음 밭도 함께 매시지 않았나 싶다. 할머니 생신이 칠월칠석 무더운 여름인데 어머니는 그때 학질을 앓으셨다. 나는 십 리나 되는 장터로 약을 사러 가면서 어머니가 맏며느리라 머리띠를 동여매고 생신 준비 하시는 것이 마음 아팠다. 맏이한테는 시집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말에 다 같이 웃었다. 어머니는 잠들기 전 자식들 집을 차례로 돌아다니며, “별일은 없는가, 아프지는 않나”, 아무 일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잠자리에 드셨다고 하셨다. “요즈음은 길을 잃어 잘 못간다”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 어머니는 며느리가 시집살이하던 시절, “할머니가 아버지 몰래 벼 방아를 찧어 돈을 마련해서 어머니의 빈 주머니를 채워 주셨다며” 시어머니 자랑을 하시며 고마워하셨다. 작은 일도 할머니와 의논하시고 어려운 일은 도움을 청하기도 하면서 고부간에 갈등 없이 사이좋게 지내셨던 어머니가 자랑스럽다. 어머니는 살아온 경험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혜안을 지니셨다. 매 순간 사시는 모습은 지혜가 앞섰고 무던한 인내로 사람답게 사는 법과 배려와 베푸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 주셨다. 고등학교 진학할 때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는데 내게 용기를 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시험 보러 가는 날, 치마를 들치고 속바지 주머니에서 구겨진 돈을 손에 들려주시며 눈을 끔벅하시고 “어서 가라” 하시던 생각이 날 때마다 지금도 내 가슴이 뭉클해진다. 어머니는 기억을 더듬으며 때로는 “그랬지” 하시며 눈망울이 또렷해지신다.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시며 행복해하시더니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드셨다. 기쁘거나 슬플 때, 힘들거나 아플 때, 부르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그 이름 한결같이 따뜻하고 미안한 사람이 어머니다.
그 후에도 어머니는 요양병원에서 낯선 사람들의 손에 당신의 삶을 맡기고 계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죄책감과 회한으로 울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고 가라며 간절하게 끌어당기는 눈빛을 모른 체 하면서 금방 “또 올게요”하고 떠나오곤 했었다. 뵈러 갈 때마다 어머니의 모습이 조금씩 낯설어졌다. 여기가 어디냐고 묻기도 하고 너는 누구냐며 낯설어하기도 했다. 꿈과 생시, 남과 나,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허물어가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넘나드는 듯 보였다.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화가 왔다. 언젠가는 닥칠 일이라고 알고는 있었으나 충격적인 소식에 멍해지면서 걸음이 휘청거렸다. 고속버스를 타고 가며 임종을 지킬 수 있기를 소원하며 눈을 감았다. 눈물이 주루 룩 흘러내린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기뻤던 일, 서러웠던 일, 어머니를 화나게 해서 종아리를 맞았던 잊고 있던 옛일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병원에 도착하니 이미 운명 하셨고 염을 해 영안실로 옮기려는 중이었다. 마지막 얼굴이라도 보여달라며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얼굴에 덮은 천을 풀어주었다. 아주 평온한 얼굴에 살짝 미소 띤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이 마지막 모습이 내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어머니 볼에 얼굴을 비비며 귀엣말로 “이렇듯 못난 저를 지극히 사랑해 주신 어머니 감사합니다. 딸 많이 낳아 힘들었지만 모두 잘 키우셨으니 장한 어머니십니다. 어머니가 그리워하던 하늘나라에서 천상의 행복을 누리세요.” 마지막 작별인사를 드렸다.
3일 후 화장장에 가보니 영구차와 버스가 줄을 서서 밀려 있었다. 요즈음은 비명횡사한 경우가 아니면 울지도 않는다고 한다. 시신이 소각되어 냉각이 완료되었다. 흰 가루를 유족이 준비한 유골함에 담아 가슴에 안고 납골당으로 향한다. 뼛가루는 안개 빛깔로 먼지처럼 고왔다. 아무런 질량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뼛가루의 침묵은 범접할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있었다. 금방 있던 사람이 없어졌는데 뼛가루는 남은 사람들의 슬픔이나 애도와는 상관없이 편안해 보였다.
이 세상 정을 나누며 살았던 사랑하는 이들과 영원한 이별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슬프고 서운하다. 무심코 피고 지는 나무와 꽃에도 생과 사의 순환이 있거늘,
나의 종말은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큰 아쉬움 없이 떠날 수 있도록 평소에도 조금씩 떠나는 연습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