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 때문에 가슴이 아파 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부모들은 자녀들을 향하여 이런 경험을 누구나 해 보았을 것이다. 때로는 자녀들이 부모의 마음을 몰라주고 반항할 때, 뻔히 보이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기도 하고, 마음이 곱고 여린 자녀들이 이 험악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불쌍한 마음이 들어 남몰래 눈물을 짓는 때도 있으리라. | |
예수님은 이 시대를 보실 때 어떤 감정을 가지실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며 슬퍼하시고, 병자들을 보며 불쌍히 여기시며 민망히 여기셨다.
죄의 속박으로 인하여 신음하고 마음과 몸의 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이시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3-14). 하나님은 인간의 부패와 연약한 본성을 아시기에 불쌍히 여기시며 오래 참으신다.
이 시대 사람들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고 하지만 주님은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수치를 아노라”고 말씀하신다.
물질적으로는 부자일 수 있지만 영혼이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외적인 환경이나 소유를 보시지 않으시고 속사람인 영혼을 보신다. 자신의 중심이 없이 상황에 따라 처세를 바꾸는 사람들을 오래 참으시며 그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구하기를 간절히 바라시며 중보하시는 주님의 눈물은 우리의 더러워진 영혼과 마음을 정결하게 씻어 주신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죄를 범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모습을 보며 애통해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예레미야는 그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며 전하는 사명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위하여 근심하며 애통한 마음으로 눈물로 편지를 썼다. 교회와 나라를 위해 기도하다보면 마음이 아파 통곡을 할 때가 있다.
이 나라와 교회의 고통이 고스란히 나의 고통으로 와 닿기 때문이다. 하물며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탄식하실 것인가? 사랑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감정뿐 아니라 함께 슬퍼하고 우는 감정도 동반한다.
사랑은 달콤하고 멋진 낭만만이 아니라 수고하는 희생이 따른다.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과 몸이 강건할 때는 기쁘고 즐거워하겠지만 병들고 잘못되어 있다면 탄식하며 슬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하여 기뻐하시며 잠잠히 사랑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죄를 인하여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긍휼히 여기시며 안타깝게 기다리신다.
사랑 때문에 가슴이 아파 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부모들은 자녀들을 향하여 이런 경험을 누구나 해 보았을 것이다. 때로는 자녀들이 부모의 마음을 몰라주고 반항할 때, 뻔히 보이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기도 하고, 마음이 곱고 여린 자녀들이 이 험악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불쌍한 마음이 들어 남몰래 눈물을 짓는 때도 있으리라.
감정이 메말라버린 것 같이 냉랭한 가정과 사회일지라도 순수한 사랑의 눈물이 있는 한 가정과 사회를 온전히 지킬 수 있다. 오늘날 자신에 대한 연민의 눈물이 아니라 서로를 불쌍히 여겨주는 사랑의 눈물이 깨어져 가는 가정과 허물어지는 사회를 살려 줄 것이다.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 시대의 아픔을 껴안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갖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령의 온전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수님의 눈물로서 이 사회의 더러움과 악함을 청결케 하는 사랑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성령의 사람들을 찾으신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례미야와 바울과 같은 눈물의 기도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하나님의 의와 그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성령의 탄식과 기도하시는 음성을 들으며 함께 거룩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 영적인 파수군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한다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