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전설입니다.
......능인한 자, 고타마의 피를 이어받은 33대 자손 고타마 자야세나는 처음으로
사천하를 통일하고 전륜성왕이 되었으며 그 후, 이백삼십일만오십오 대(代)를 대대로 내려가 그의 후손 오카카 Okkaka甘茶王에 이르러 그는
정실에게서 아들 하나를 두었고 다시 첩에게서 네 아들을 두었다.
왕비는 자기가 낳은 외아들을 염려하여 왕과 상의 끝에 네 아들을 성밖으로
내쫓았으나 네 형제는 조금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새로운 목장을 찾아 소 떼를 이끌고 동남쪽으로 내려갔다가 설산 아래 이르러 로히니 강
주변에 마침내 비옥하고 아름다운 초원을 만났다....., 그 땅은 드넓게 펼쳐진 평화로운 곳이었다. 그들은 이곳에 정착하고 새로운 성읍을
세웠는데 그 이름을 까필라 왓투라고 불렀다. .....
그곳에 정착하고 살던 그들의 먼 후손중 용맹스런 사끼안의 왕, 심바하나
Simbahana獅子頰王는 부인 카카나와의 사이에 네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그의 맏아들은 숫도다나요, 둘째는 숫크로다나요, 세째는
도토다나요, 막내는 아무리토다나였다. 큰딸은 아미타요, 둘째 딸은 파미타라였다. 숫도다나의 아들은 싯달타와 난타였고 숫크로다나의 아들은 팃사와
난디카였다. 도토다나의 아들은 아니룻타와 바드리카이고 막내 아무리토다나의 아들은 아난다와 데바닷타였다. 후에 싯달타는 야소다라와의 사이에
라훌라를 낳았다. 이것이 사카무니의 계보이다. .....
앞부분은 장아함과 기세인본경의 기록이고 뒷부분은 B.R.Ambedkar
박사가 쓴 붓다와 다르마와 宮坂宥勝의 불교의 기원을 조금씩 참조한 것입니다. 경전에는 33대 고타마 자야세나의 아버지가 마누바바스바다이고 그의
조祖는 바바스바뚜라고 기록돠어 있지요.
마치 마태복음의 1장 첫 머리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을 열거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예수의
제자 마태는 무려 42 대에 걸친 혈통을 자세히 설명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가 다윗의 자손임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유대인의 예언서에는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이 혈통을 증거하기 위해서 장황하게 열거한 것이지요.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런
예언서도 없거나와 붓다가 사카족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사실외엔 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숫자의 나열은 더욱 하찮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주 이씨의
시조가 누구이고 그 자손들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설명하는 것과 같아요. 자기네 선조라면 모르거니와 이씨가 아닌 남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몇 가지만 간력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33대 자손인 자야세나는 영토를 확장한 부족장으로 사카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되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유대 민족의 영웅이라면 자야세나는 사끼 민족의 다윗인 셈입니다.
전륜성왕轉輪聖王이란 의미는
뒤에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오카카 왕은 사끼족의 시조인 감차왕甘茶王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전주 이씨의 시조가 아무개이듯이 샤끼안의 시조가
오카카인 셈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이쿠수바쿠Ikshvaku라고 부릅니다. 이는 사탕수수란 뜻이고 한역으로 단차, 감차, 감로라고 의역됩니다.
왕의 이름이 오카카라는 점에서-오카카는 사탕수수라는 뜻- 그들의 토템이 사탕수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지금의 인도
북서부 오하五河지역으로 인도 사탕수수의 최대 집산지이며 또 대륙으로 통하는 유일한 교통로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수많은 민족이 스쳐간 길목입니다.
또 중국에서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유명한 실크로드의 중간 경유지이기도 하지요.
이곳에서 오카카의 네 형제가 그들 무리를 이끌고 갠지스강
유역의 넓다란 평원에 정착하고 농사를 짓게 됩니다. 그들이 세운 성읍이 카필라 왓투인데 카필라는 붉은 색이고-일설에는 카필라 선인을 가르킨다고도
함- 왓투는 지방, 지역, 땅을 말하니까, 붉은 색의 땅이란 말이고 이는 그만큼 비옥한 토지라는 뜻이 됩니다. 위로 히말라야산맥이 버티고
있어서 강수량이 풍부하고 아래쪽으로 기름진 평야가 이어지기 때문에 농사짓기에 최적의 장소이지요.
사끼안의 시조 오카카
지난달에 사끼안의 성은 고타마라고 했고 그들은 소를 토템으로 하는 종족이라고 설명드렸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오하지역에 이르면서 그들의 토템은 소에서 사탕수수로 바뀝니다. 토템이란 각 씨족마다 혈연관계를 식별하는 표시이기 때문에 종족의 토템이 바뀌는
경우는 드물지만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토템이 사탕수수로 바꿨다고 해서 상대적으로 소의 가치가 추락한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이 사탕수수라는 뜻이지요.
본디 아리안 민족은 유목민족이기 때문에 소는 최고의 재산이고 인도에 들어와서도 변함없이 신성하고
중요한 재산이 됩니다. 신을 찬미한 리그베다를 보면 끊임없이 소의 소유를 강조하는 노래로 가득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만큼 소가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뜻하지요. 왕을 뜻하는 gopa의 원래 뜻은 '소를 잘 지키고 보호하는 자'란 말이고 전쟁을 의미하는 gavish의 어원
역시‘소를 원하다’gavish= wishing for cows이니 얼마큼 그들이 소를 중시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무튼 그들의 토템이 소에서 사탕수수로 바꿨다는 것은 그들의 생활양식이 반유목생활에서 서경양식鋤耕으로 전환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다 다시 갠지스강 유역에 이르러 농경으로 전환되고 토템 역시 소로 복귀하는데 이때의 소는 목축의 성물聖物이 아니라 농사의 의미가
더 강합니다. 토템은 주로 동믈을 대상으로 하며 때로는 나무나 돌도 토템이 되지요.
그러나 어느 것이건 종족의 보호와 풍요의 기원이 그
본디 목적입니다. 코끼리, 호랑이, 독사, 곰과 석물이나 나무 등도 전부 기원신앙의 일종이지요. 이렇게 볼 때 결국 토템이란 인간이 자연에 대한
존경과 경외감으로 재해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먹거리를 얻기 위한 초기 종교의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사끼안의 계통을
알아보겠습니다.
과연 그들은 어느 계통의 민족일까요? 참 궁금한 내용인데 오늘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사카족은 비아라안 계통이며 지리
문화적 배경으로 보아 몽골계 인종이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전에는 사카족이 사성제를 신봉하고 일부다처제인 부계夫系사회를 따르는 것으로 미루워 베다
문명을 일으킨 인도 아리안 족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그렇치 않다는 게 최근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예를 들어 사끼안은
지모신이나 뱀, 하천, 수목을 조상 대대로 숭배했는데 그것은 아리안족이 유목민족 특유의 의인화된 신을 숭배하는 것과는 달랐던 것입니다.
밝은 민족 아리안?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아리안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리안족은 지금의 코카사스의
북방에 살던 유목민족입니다. 먼 옛날 그들은 따뜻한 남쪽을 찾아 민족 대이동을 시작했는데 일부는 서쪽으로 가서 중동 셈족의 조상이 되고 일부는
동쪽으로 내려와 힌두쿠시산맥을 거쳐 인도 아리안의 조상이 됩니다.
처음 이들이 정주한 곳은 오하(편잡) 지방이고 이때가 서력 기원전
1.500-1300 년경이며, 그들은 철제무기와 말을 앞세워 기존의 인도 선주민족先住民族을 제압합니다. 이같은 아리안의 철제무기와 기동력에
선주민족은 무참히 유린을 당했기 때문에 최근 일부 학자들은 그들이 인더스 고대 문명을 멸망시켰다는 가설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인더스 문명의
하한선이 기원 전 1,600년이고 아리안족이 인도에 들어온 때가 대략 그 시점이니까 그런 설정이 가능해집니다.
이후 기원전 1000
년경에는 이 지역 토착 씨족을 완전히 점령하게 되지요.
이때부터 그들은 토착민을 드라비다, 다사Dasa족이라고 부르면서 검은 색
피부에 코가 낮은 악마의 족속이라고 펌하하여 부릅니다. 아리안의 어원은 밝은 색을 가진 빛의 종족 혹은 고귀한 존재라는 뜻인데 이를 미루워
아리안이란 다사의 우월 개념으로 불려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대승이 소승을 열등하다고 비난하며 존재했듯이 아리안 역시 다사를 열등하다고
비난하며 존재한 것입니다.
아라안족은 기원전 800-700 년 경, 소위 베다 시대에 이르러 더욱 영역을 확장하면서 20 종의
종족들로 나뉘고 노획물의 증강와 힘을 바탕으로 강력한 전제 군주 부족국가를 성립하게 되지요.
인도의 문화 중국이라고 불리는 쿠루-판콜라
지역은 쿠루족과 판콜라족이 이룬 가장 번성했던 토착사회였지만 이러한 아리안에 침탈당하면서 인더스 유역인 오하Panjap의 토착공동체는 거의 다
전멸하고 급속히 아라안화되어 갑니다. 대체로 아리안화Aryanization란 혼혈이나 계급 흡수에 의한 강제 정책을 뜻하는데 이러한 정책으로
인하여 순수한 아라안의 혈통은 사라지고 원주민+아라안이란 새로운 혼혈 족이 탄생됩니다. 이를 아리요-드라비다Aryo-dravida족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백색과 흑색의 중간 잡종이기 때문에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은 얼핏보면 동양 사람의 피부를 연상케 하는 피부이지요.
사람만 혼혈된 것이 아니라 기존의 문화도 함께 혼합하게 됩니다.
새로운 문화가 기존의 문화를 흡수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융화라는 형태로 구축해 가는데 이는 그만큼 기존의 문화 역량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와 맞물려 아리안과 토착민 사이에 철저한
계급적 분화가 확립되고 아리안 내에서도 점차 신분에 따라 계급의 차등이 이뤄집니다.
이때 생긴 사상이 곧 브라흐마니즘입니다.
브라흐마니즘이란 약술하여 신의 힘을 빌어오는 제사 주술 의례주의를 말합니다. 흔히 브라만교, 바라문교라고 번역하는데 그것은 종교 쪽보다는
종교적 관습사회 또는 종교적 제사 관습 주의라고 해야 더 적확한 표현이지요. 이를 바탕으로 몇 백년을 거치며 베다에서 우파니샤드에 이르는 광대한
제사 이데올로기가 탄생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 조상이 인도에 침입할 때의 순수한 아리안족은 멸절되고 인도어 족과 혼혈된 새로운
종족이 탄생하면서 부동의 종교 관습사회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흔히 바라문교를 아리안의 종교라고 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인도 아리안이라는 신생 종족이 만든 새로운 종교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붓다는 몽골계 혈통
다시 사끼안 계통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완벽한 사상적 제도를 확립하고 군주제의 면모를 갖춘 아리안족은 기원전 6-5 세기에 이르러 북인도의 갠지스 강과
야무나강의 중앙부 평원에 진출합니다. 그들은 주위의 크고 작은 토착세력을 모두 점령하고 도시를 차지하는데 마가다, 코살라, 반사, 아반티가 이때
희생된 대표적 정복 부족국가이지요.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인더스 유역에서의 원주민은 대부분 드라비다계, 문다계였지만 이 지역에서는
몽골계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히말리야의 산지종족으로, 본래 유목민족의 피를 이어 받았기 때문에 말을 잘 다루고 전투 능력이 뛰어나
아리안의 공격에 호락호락 당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한 나라들도 많았습니다.
지리적으로 보아 대개 사카족이 위치한 히말리야 산맥 지역과
갠지스강 지류인 간다쿠 강, 그리고 강가라 북쪽에 산재해 있었는데 주요한 종족으로 비데하, 라차비, 코리아, 사카, 앙가, 카시족 ,모리야 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밧지 공동체나 말라족 등은 아리안을 상대하기 위해 특별히 구성된 군사 공동체였는데 이 동맹체는 부처님 입멸 후 까지 끈끈한
혈맹을 유지하면서 종족을 보존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이들의 연합을 칭찬한 기록이 경전 곳곳에 남아있지요.
그들이 동맹체를 유지하며
강력한 아리안을 상대할 수 있었던 이유라면- 유목 민족 특유의 전투적 혈통도 도움이 되었겠지만 -무엇보다 조상이 동일하다는 이유가 가장 큰
힘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끝까지 연합하여 강력한 군주국가에 대항한 것이지요.
사카족과 경계한 콜리아족도, 비데하 국의
라차비족, 밧지족, 말라족, 모리야족도 모두 그 조祖가 사카족과 동일한 오카카 왕입니다.
비데아라는 말은 산지종족山地種族이란 뜻으로
산지는 곧 히말라야 산록을 말하고 이는 곧 몽골계의 종족을 뜻합니다. 따라서 라차비족도 몽골계이고 조가 같은 콜리아족도, 사카족도 다 몽골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민족이 몽골계라고 해서 억지논리로 수용하자는 게 아니라 불교 텍스트 연구가 가장 활발한 일본 학자의 주장이기 때문에
그 진의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또한 지정학적으로도 사카족이 위치한 곳은 지금의 네팔이고 네팔은 몽골계의 민족입니다.
지금도 민족의 약 60%가 순수 몽골계를 유지하고 있지요. 더우기 부처님의 동네와는 지척 거리에 있고 그래서 지금도 룸비니를 순례하려면 네팔에
들어갔다가 다시 인도로 들어오는 이중의 국경 통과절차를 거치게 됩니다.
오늘날 사카족의 후손들은 유피주의 이타와, 상카시아
등지의 한적한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내가 인도에 갔을 때 우리 일행은 룸비니에서 상카시아까지 무려 22시간을 버스로 달려 늦은 밤
도착했습니다. 상카시아는 부처님이 천상의 부모를 위해 설법을 하고 다시 지상에 하강한 곳으로 후대에 아쇼카 왕이 스투파를 건립하였기 때문에 그
역사적 사실이 입증된 곳입니다. 불교 팔대 성지八大聖地가운데 하나이면서 팔대 유적지 중에 가장 신앙적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고요.
그 날 일행은 사카족 사람들의 환대를 받고 성지에 참배한 후, 그들의 민속축제를 관람했습니다. 나는 축제보다 그들의 용모에
더 관심이 많았는데 그들은 여행도중, 인도에서 봤던 여느 인도인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간혹 우리와 흡사한 모습들도 눈에 띄였는데
광대뼈가 넓고 눈이 홑겹에 째진 눈꼬리나 머리가 새까만 모습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몇 일전 마야부인의 친정동네인 마하마야바외니
학교에서 본 사람들과도 흡사했는데 이는 코리아족과 사카족이 혈연관계이니까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이미 수천 년 전 사카족이
멸망했으니까, 지금까지 종족의 본디 용모를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현대의 유전공학에서는 한 사람의 얼굴 유전정보가 25,000 개가
넘기 때문에 아무리 혼혈이 되어도 후대에 조상의 생김새가 돌출되어 나타난다고 합니다.
(사진) 이 사진은 영국 루부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카모니 붓다의 존영입니다. 설법제일인 푸루나 존자가 그렸다고 전해지는데 그가 어느 계통인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지요.
머리만 상투로 틀어 올린다면 고구려 아무개 장수와 비슷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사견私見이지만 경전 곳곳에 붓다의 몸이
황금색이라고 비유하는데 그역시 몸을 신앙적으로 표현한 말이 아니라 실제 붓다의 몸과 피부가 황색이 아니었나 하는 그런 상상도 해 봅니다.
붓다 출세의 이유
그럼 붓다의 탄생의 전후 사정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붓다 탄생시 사카족은 이미
코살라국에 병합되어 정치. 군사. 외교의 모든 권한을 상실하고 사카의 왕은 일개 성지기로 전락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아직 유린당하지 않은 다른
토착세력 역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종족의 흥망때문에 공포와 불안의 나날을 보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막강한 철제 무기와 기마로 무장하고
패권주의적 전제국가의 형틀을 갖춘 그들의 공격은 씨족 공동체에 불과한 토착민들에게는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존재였음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공포와 불안속에서 그들은 방법을 돌려 이상적인 구원상을 갈구했습니다. 우리가 힘센 자에게 맞고 있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듯이 그들을 절망의
나락에서 건져줄 구세주를 간절히 소망했지요. 당연히 전래하여 오는 전설대로 세상을 평화로 다스릴 부처님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민족의
어려운 시기에 부처님이 출현하여 그들을 구원할 것을 학수고대했던 것이지요.
우파니샤드-비밀의 교의-에 의하면 비데아의
자네카Janaka왕은 기원전 650 년경 어느 철인과의 대론서에서 업과 전생을 설명하면서 붓다의 존재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 사실은 그들 문화에
이미 업과 윤회의 근거가 되는 영혼 불멸사상과 붓다의 전설이 전승되어 오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서 말씀드렸듯이
비데아는 사카족과 같은 종족이기 때문에 부처님 사상이란 아리안의 문화가 아니라 기존 원주민 문화의 산물임을 알 수 있고 업과 윤회역시 그들 고유
사상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붓다가 탄생하였을 때 아시타 선인이 숫도다나 왕에게 부처의 탄생을 예언한 점 등을 미루워 부처님은 이미 그들
종족사이에 유포되어 있는 구원불, 메시아-미륵-였음이 더욱 명백해집니다.
따라서 과거 칠불七佛 사상 등도 이 메티아를 성립하기 위한
고도의 유형관례라고 파악됩니다.
따라서 붓다는 이러한 민중의 염원을 바탕으로 출세出世하신 것입니다.
첨가하자면 이때는 종족
공동체에서 찬탈정복의 군주국가로 이행되던 시기였고, 경제는 물물교환에서 화폐경제로, 종교사상은 브라만의 제식에 반대하여 사문집단이 흥기하던
시대였으며 이러한 혼란스러운 악세惡世에 고통받던 민중들은 새로운 메시아를 갈구하던 시기였습니다.
이처럼 붓다 탄생의 배경에는 그 중심에
고통받는 민중의 희원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역사성과 사회성의 근거 역시 이 가운데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무시한 채 문자풀이식 교리와 신앙태만 가지고 불교를 파악하려고 하거나 중국적 토양과 사고 등으로 붓다를 한정시키려 한다면 참다운 붓다의 출세의
의미를 놓칠 우려가 크다고 할 것입니다.
좀 이야기가 다르지만 제가 예전에 동국대학교 도서관에서 붓다의 전기를 다룬 논문을
구하고자 했지만 이미 알려진 몇 가지 외에는 볼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중국불교의 선종 역사와 문화, 또는 한국 고승들의 논문 등은
수도 없이 넘쳐나고 있었지요.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면 당연히 붓다의 전기를 다룬 논문이 대강을 이뤄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지요. 과연 한국불교가 언제까지 중국이라는 문화유형에 맞춘 불교를 답습해야 하는지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중국적 전통이 거의 사라져버렸지만 유독 불교안에만 고전처럼 살아 남아 있습니다. 중국식 불교는 이미
현대의 우리에게 생명력을 상실하였는데 한국불교에서는 사람, 사상, 관습까지 온통 중국식 불교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중국불교를
전공하는 학자라면 모르거니와 붓다를 보다 바르게 이해하고 그에 합당한 인생을 살려는 보통 사람에게는 참으로 난망한 노릇 아니겠습니까?
굳이 말하자면 중국식 불교란 모두 역경 불교라서 불교의 번역 내지 이론적 전개에만 의의를 두었을 뿐 정작 중요한 붓다의 사상적 기반인,
민중의 염원은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반쪽 불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한국 불교가 말로만 ‘중생을 다 건지리이다’
하면서 역사와 사회의 아픔을 선도하는데 인색한 이유는 이러한 반쪽 불교의 맹목적 추종에 기인한 바 크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려나 불자들은
붓다의 출세의 목적은 고통받는 민중의 구원이라는 점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