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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공부하는 가운데 마군중이라는 말도 나오고 지금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있지요? 切須猛烈英雄(절수맹렬영웅)은 이럴 때라도 맹렬한 영웅이 있다면 直要翻身跳出(직요번신도출)이니 바로 몸을 뒤쳐서 뛰쳐 나가야 되리니, 若還一念遲疑(약환일념지의)인댄 만약 도리어 의심하고 한 생각을 머뭇거린다면 그런 얘기예요. 참선을 하면서 이 뭣고 하다가, 이 뭣고 하지 말고 무자 할까, 무자 하다가 전전백수작할가 아니 만법귀일일귀하처가 잘된다던데, 이렇게 자주 화두를 바꾼다거나 아니면 화두를 하면서도 이 화두를 해서 성불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다던가 하는 것이 머뭇거리는 것이 되겠지요. 의심에서 자꾸 지체한다면 佛亦救你不得(불역구니부득)하리라 부처님도 또한 너를 구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대를 구출하지 못하리니라. 此是最上玄門(차시최상현문)이니 이것이 최상의 현묘한 문이 된다. 이러한 간절하고 절수 그야말로 결열지하는 그런 마음으로 공부해야 되는데 그런 생각이 없이 한다면 안되겠지요? 이 세상 모든 공부는 그렇습니다. 비단 참선 뿐만이 아니라, 학문 과학자 그야말로 일체 모든 힘을 빌리고 다 던져서 하는 것이어요. 과학자가 내가 이 과학을 하면 나중에 내 묘비명에 써 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러면 성공 못합니다. 제가 오래전 3-40전쯤 된 것 같습니다. 읽은 책이 있는데 이름도 다 잃어 버렸습니다. 그리스 시인인데 이런 말을 썼습니다. 제자에게, 선생님 돌아가시면 묘비명에 뭐라고 쓸까요?그러니까 야 임마, 묘비명에 쓰긴 뭐라고 써. 내 이름 석자만 써라.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유명한 시인이라던가,그 분이 노벨 문학상 받은 분인데, 노벨 문학상 받은 분으로 알고 있어요. 노벨 문학상 받은 분인데, 노벨 문학상을 받고 이런 너절한 것을 쓰지 말라는 것이어요. 이름 석자만 쓰면 된다 그러면서도 사실은 묘비명까지도 필요 없다. 이름도 필요없다 그랬어요. 이와같이 최상승을 걷는 사람들은 그런데 연연하지 않습니다.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 무서운 사람이예요. 그래서 이것이 차시최상현문이고 普請大家着力(보청대가착력)이어다 널리 청하건대, 그대들은 공부에 힘쓸지어다. 보청 널리 청한다. 대가착력이라. 공부에 힘써라. 그런 얘기지요. 山僧(산승)은 나는 그런 얘기지요. 본인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雖則不關閑非越例(수clr부관한비월례)이나 산승은 비록 법칙을 내 세워서 남의 그릇됨을 뛰어 넘어 막지는 못하나, 그랬어요. 내가 법칙을 뛰어 넘어서 다른 사람 잘못된 것을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어떻게 다 막아요? 남 잘못하고 다니는 것을 어떻게 막습니까? 지금 온 우리나라를 시끄럽게하고 다니는 그 사람을 누가 막을 거예요. 그 사람 뿐만 아니고 남 잘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한국사람 뿐이겠습니까? 다 쫓아 다니며 못 막지요. 그런 얘기입니다. 남의 그릇됨을 뛰어 넘어서 막지는 못하나, 비월례이나, 與諸人(여제인)으로 通箇消息(통계소식)호리라. 이 소식을 통계소식하리라, 전하리라 그런 얘기지요. 이러한 위대한 가르침이 있는 것, 이런 깨달음 있다는 것, 공부를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것을 전한다 그런 얘기지요 示衆 其五 상당법어 다섯번째 皮穿肉爛(피천육난)하고 천자는 뚫을 천자인데, 피자가 가죽피자 잖아요. 가죽을 뚫고 살이 터지고 그런 얘기입니다. 육난입니다. 난은 문드러질난자 인데, 고기가 문드러지는 것이 뭡니까? 힘줄이 터지고 그야말로 살이 터지고 문드러지고 筋斷骨折(근단골절)하며 힘줄이 끊어지고, 골절이니까 뼈가 부러지도록, 그런 얘기입니다. 이렇게 공부할 수 있다면 다 성공합니다. 사실은, 이렇게 뼈가 부러지도록 공부해도 具無礙辯(구무애변)하야 걸림없는 변재를 갖춘 달변가라도, 橫說竪說(횡설수설)이라도 若謂向上一關(약위향상일관)인댄 만약 조사관문의 향상을 일관한다면, 향상이라는 것은 향상일로를 말하는 것이지요. 한단계 위로 올라가는 것을 향상일로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關자는 관문이지요? 만약 조사관문의 향상을 말한다면 그런 소리예요. 敢保老兄未徹(감보노형미철)이라. 감히 내가 말하겠는데,노형들은 깨치지 못했다고 말하리라. 노형이라고 한 것은 아마 법문하고 있는데 여러 선배들, 연세 많은 분들도 있었던가 보지요? 여러분들이 한 소식 못했다는 것을 감히 내가 말할 수 있다.그런 얘기입니다. 直須虛空粉碎(직수허공분쇄)하고 바로 모름지기 허공을 분쇄하고, 허공이 분쇄가 됩니까? 그래도 허공을 분쇄한다고 했어요. 大海(대해) 枯竭(고갈)하며 큰 바다가 마르며, 저는 이런데에서 대해가 고갈이라는 것은 제가 어려서 바다에 안가고 살 때는 무진장 가물면 그랬어요. 논두 마르고 밭도 마르고 샘도 마르고 방죽물도 말랐는데 바닷물도 아마 줄어 들었을거야. 그렇게 생각해 본적이 있어요. 줄어들었는지 안줄어 들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아무리 가물어도 해운대 바다에 가보면 바닷물은 여전하더라구요. 그러면 바닷물을 꼼짝 안는 것입니다. 너무 크기에 물이 느는 것이나 주는 것을 알수 없지요. 여기서는 대해가 고갈하며 透頂透底(투정투저)하야 저 하늘 꼭대기를 뚫고, 저 바다밑까지를 뚫어서 그런 얘기예요. 굉장한거지요. 하늘을 뚫고 바다밑까지 뚫고 그런 얘기입니다. 內外澄澈(내외징철)이리라. 안과밖이 그야말로 맑아야 된다. 깨끗해야 된다 그런 얘기입니다. 正恁麽時(정임하시)라도 이와같은 때라도, 이렇게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猶是眼中着屑(유시안중착설)이니라 오히려 눈 가운데 티끌이니라. 티끌이 된다 그 말이지요. 아무리 금가루가 귀중하다고 하더라도 금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지요? 안되겠지요? 병이 납니다. 그런 얘기입니다. 아무리 이렇게 깨끗하고 증철한다고 하더라도 이럴때 그 모두 자체가 눈 가운데 티끌이다. 大衆(대중)은 且道(차도)하라 여러분들께서는 한번 일러봐라. 如何是(여하시) 到家底句(도가저구)오 어떤 것이 집에 도달한 소식이냐? 깨달은 소식이냐 그것이지요. 泥牛喫鐵棒(니우끽철봉)하니 진흙소가 철방망이를 맞으니 金剛迸出血(금강병출혈)이로다 금강신이 터져서 피를 흘리도다. 그랬어요 맞기는 진흙소가 철방망이르 맞았는데 피는 진흙소가 흘리는 것이 아니라 금강신장이 피를 흘린다. 그랬어요. 여기서 여러분들이 한 소식을 얻어 들어야 되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여러분들이 혹시 절에 가 보셨어요? 절에 다 가 보셨지요? 큰절에 가 보면 대개 입구에 뭐가 있지요? 사천왕이 있지요? 중국에 가 보니까 사천왕도 있고 금강신장이 어찌나 많으지 몰라요. 여기도 만들어 놓고 저기도 만들어 놓고 굉장합니다. 그런데 금강신장을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 뭡니까? 대부분이 보면 흙으로 만들었어요. 여기는 미우니까 소지만, 흙으로 만들었지만 금강신장은 금강신장이다. 그런 얘기지요? 다음 구절을 보겠습니다. 若論此事(약논차사)인댄 만약 이 일을 논할진대는 如(여) 大火聚(대화취) 烈燄亘天(열염긍천)하야 대화취라는 것은 큰 불덩어리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큰 불덩어리가 하늘까지 뻗쳐서, 하늘까지 치솟아서 그런 얘기입니다. 열염긍천이라는 것은 하늘까지 딱 뻗쳐서 曾無少間(증무소간)이라 조금도 간격이 없음과 같음이니라. 이런일을 말한다면 마치 뭐와 같으냐? 큰 불꽃이 솟아 오르는데 불꽃이 하늘까지 닿았어요. 그런데 그 불꽃이 전부다 불꽃으로 꽉 차서 전혀 감각이 없다 그 말이어요. 얼마나 무서운 불꽃일까요? 증무소간이라 所有之物(소유지물)을 온갖 물건을 悉皆投至(실개투지)라도 다 집어 던지더라도 猶如片雪(유여편설)이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같이 點着便消(점착변소)하리니 떨어지는 즉시 사라진다. 불이 활활타는데 눈이 떨어지는 즉시 녹지 그것이 안녹아요? 이와같이 공부가 되어야 되는데 사실은, 이와같은 일념으로, 이와같은 열정으로, 이와같은 참선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깨우침을 얻을 수가 없지요? 부처님도 역시 이와같은 방법으로, 이와 같은 열정으로 생사를 초월하시게 된것이어요. 변소하리니 爭容毫末(쟁용호말)이리요 어찌 터럭끝 만큼이라도 용납함이 있으리요. 용납하리요 그런 얘기지요. 절대 의심해서 참선하고 의심해가고 참선을 닦는데는 조금도 털끝만큼도 용납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말씀이 되겠습니다. 若能恁麽提持(약능임제지)하면 만약 이와같이 화두를 챙기면, 이와같은 화두를 챙겨갖고 있으면 그런 얘기예요. 제지라는 것은 수지한다는 말과 똑 같습니다. 이와같이 능히 다 수지한다면 剋日之功(극일지공)을 지은 공덕이, 그런 얘기예요. 그냥 매일 같이 오늘 하루도 이기고 내일 하루도 이기고 모레 하루도 이기고, 내가 날짜에 되는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이겨서 시간을 모르고 사는 것이 시간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을 닦는다는 얘기지요. 참선공이지요. 萬不失一(만불실일)이어니와 만약 그렇지 않았을 때는 헛되지 않으려니와 儻不然者(당부연자)인댄 만약 그렇지 못할진대는, 당자가 만일당자지요? 만일 그렇지 못할진대는 縱經塵劫(종경진겁)이라도 진겁을 지난다고 하더라도, 그야말로 오랜 세월 동안을 지난다고 하더라도, 그런 얘기지요? 徒受勞矣(도수노의)리라 한갖 이것은 수고로움 뿐이다. 헛됨 뿐이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얘기지요. 공부하는데는 항상 그야말로 고양이가 쥐 잡듯이 힘을 다 경주해서만이 가능한 것이 곧 참선입니다. 나는 지금 참선을 실행에 못 옮기다고 하더라도 참선을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어야 되지요? 알고 있다는 것은 뭡니까? 언제인가는 나는 이렇게 해 볼 수도 있다. 알고 있은 것은 알고 있는대로 해 본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모두 자기가 하는 일에 열정을 다할 수 있다면 이것보다 더 행복한 삶은 없다고 봅니다. 세상에는 두가지 인연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선연과 악연이 있습니다. 항상 선연을 키워서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야 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3] 여러분들 관상을 보신적 있으십니까? 세상을 보는 관점이 있는데 보통 관상 본다고 그러지요? 관상이 좋으면 사람이 벼슬을 한다던가, 돈을 많이 모은다던가, 등등 그러지요? 그런데 상이 세 개가 있습니다. 명상이 있고, 관상이 있고 심상이 있다고 그럽니다. 제일 먼저 명상이라는 것은 이름名자인데 이름을 아무리 잘 지어도 관상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이지요. 관상을 따라갈 수가 없다. 만약 이름을 성인이라고 짓는다고 하더라도 관상이 고약하게 생기면 성인이 안된다는 말이겠지요? 그래서 이름도 좋겠지만 관상이 좋아야 된다. 그런데 관상이라는 것은 선천적인 것이 있고 후천적인 것이 있습니다. 선천적인 것은 골격으로 해서 부모한테 받은 것이고 후천적인 것은 자기가 가꾸어 가는 것이지요. 요즈음은 관상도 바꾸지요? 병원에 가서 다 바꾸는데 아무리 바꿔봐도 그것은 얼굴 모양이 좀 좋게 변화되었다는 것이지 참으로 바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큰 절에 가시면 나한전 보셨을 것입니다. 나한전에 들어가 보면 스님들 얼굴이 다 한결같이 개성이 뚜렷해요. 얼굴들 골격이 괴상하게 생겼는데 가만히 보면 아주 특징도 있고 정감도 있고 좋습니다. 아마 젊어서 어렸을 때 출가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형편없는 관상들이지요. 그래서 관상도 자기가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 간다. 이름도 역시 자기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좋은 노력을 많이 하고 열심히 살면 그 사람이 더 좋아보이지요. 삼성이니, 현대니, 대우니 이런 큰 그룹회사 이름들도 그만큼 성공했으니까 더 멋져 보이지요. 사실은 성공 못했더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락하고 맙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규정 짓고 결정 짓는 것은 심상이라고 그럽니다. 마음상이 모든 것을 결정 짓는다. 그러니까 마음상이 제일 중요한 것이겠지요. 마음상, 심상이라고 하는 것도 어려서부터 선천적으로 좀 착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고 후천적으로 닦아서 착한 사람도 있고 또 후천적으로 나쁜 사람을 만나면 나쁜 사람이 되고,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발심 자경문에도 친근현선(親近賢善)하야, “항상 착한 벗들을 가까이 하라”고 했지요. 나쁜 벗을 가까이 하면 그도 역시 나쁜 벗이 된다 했습니다. 그래서 명상 관상 심상이 있는데 그 가운데 어느 한 상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심상이 참 중요한 것이다. 상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을 볼까요? 示衆 其五 (2) 상단법어지요, 상단법어인데 海底泥牛(해저니우) 啣月走(함월주)어늘, 함자는 다닐행 가운데 세금한자.함자하고도 같이 쓰는데 이것은 머금을함자로 사용됩니다. 달을 머금고 달려간다, 해저니우, 바닷속 진흙소가 달을 물고 달아나고, 그랬어요. 달아나거늘, 그런데 싯적으로 하니까 달아나고, 巖前石虎抱兒眠(암전석호포아면)이로다. 바위 앞에는 돌 호랑이가 아기를 안고 잠을 잠이로다. 이 불교에 선을 모르거나 아니면 좀 난해한 선, 싯구를 모르는 사람은 이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할거예요. 불교는 벌써 천년전부터 이런 선구가 유행한 것을 보면 이런 선시라고 해서, 이런 난해한 시, 현대시라고 해서 나온지가 70년대 지금부터 한 30년 됐네요. 이런 시는 선가에서 이미 천년전에 나왔지요. 바닷속에 사는 진흙소도 없겠지만, 진흙소가 있는데 진흙소가 달을 물고 달아나고 바위앞에 돌호랑이, 돌호랑이도 있을수가 없겠지요. 그런데 돌호랑이가 아기를 앉고 잠을 잠이로다. 鐵蛇鑽入金剛眼(철사찬입금강안)이어늘 쇠로 된 뱀이 금강 신장의 눈을 뚫고 들어가거늘, 그런 얘기지요. 철사찬입금강안이라고 하는 것은 금강이고하는 금강 바로 금강신장입니다. 금강 신장의 눈으로 들어간다 이 말이지요. 崑崙騎象鷺鷥牽(곤륜기상노사견)이로다. 곤륜산에 해오라기가 코끼리를 끌고 가도다. 해오라기는 뭔지 아시지요? 새입니다. 해오라기새는 가냘프고 황새 비슷하게 생겼지요? 해오라기가 코끼리를 끌고 간다고 하니까 말이 안되겠지요? 해오라기가 어떻게 코끼리를 끌고 가겠습니까? 여기보면 한결같이 말이 안되는 것으로만 되어 있어요. 바닷속 진흙소가 달을 물고 달아나고 바위앞엔 돌호랑이가 아기를 앉고 잠을 자고 쇠로 된 뱀이, (쇠로 된 뱀도 없겠지만,) 금강 신장의 눈을 뚫고 들어가고 곤륜산 해오라기가,(해오라기가 산에 사는 새가 아니지요?) 코끼리를 끌고 가도다. 그러면 이런 선시라는 것이 무엇을 얘기하고다 하는 것이냐? 보통 이런 선시들은 해석을 않습니다. 모두 스스로 제각기의 판단에 맡겨 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기서 제가 굳이 해석을 붙인다면 상단법어를 하시면서 이런 세상에 우리가 상상으로 되지 않는 그런 일들, 그런 세계는 모두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질 수도 없는 우리가 모르는 세계를 얘기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가 맞지 않는 것은 우리 3차원 세계에서만 맞지 않는 것이지요. 또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는 한 생각을 다 이루어진다고 보면 무색계의 세계에 들어가면 이미 한생각으로만 모든 것이 다 된다고 그랬지요. 뭐던지. 그러니까 뭐든지 한생각을 이루어진다고 보면 이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하나도 없겠지요? 바로 깨치고 보니까 이 세상은 바로 다 그런 세상이더라. 중생들이 하는 일들이 모두가 다 바닷속 진흙소가 달을 물고 달아나는 일과 같은 것이고, 요즈음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어제도 잠시 말씀드렸습니다만 MBC PD사건만 하더라도, 가만히 있는 평지풍파를 일으킨 것이지요.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파도를 일으킨 것입니다. 바다는 원래 가만있는 것이요. 바람이 불어서 파도를 일으킵니다. 바다는 그대로 언제든지 있지만 파도는 바람이 일으킨 것이지 바다가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자 그 밑에 글을 보겠습니다. 此 四句內(차 사구내)에 여기 네구가 있지요. 有一句(유일구) 네구 중에 한구,를 말하는 것입니다. 能殺能活(능살능활)하며 능히 살리기도 하고, 능히 죽이기도 하며 能縱能奪(능종능탈)하나니 쫒기도 하고 뺏기도 하나니, 그러면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 만유일체 생사를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능종능탈이라고 하는 것도 다 주고 받는 세계입니다. 어떤 세계도 다줄 수만 있는 세계도 아니고, 받을 수만 있는 세계도 아닙니다. 항상 모든 것은 종횡,상하,동서, 모두다 쌍방으로 이루어졌지요. 그래서 능종능탈이라, 若檢點得出(약검점득출)인댄 만약 점검해서 찾아낸다면, 만약 그대들이 이 사구 가운데 일구가 능살능활하는 그런 살리기고 하고 죽이기도 하는 한 구가 있는데 이것을 찾아내라는 것이지요. 許與一生叅學事畢(허여일생참학사필)하리라 점검해 찾아 낸다면 일생동안 참선을 마쳤다고 허락하리라. 마쳤다고 말하리라 그런 얘기지요. 그러면 이 가운데 어느 누구라도 어느 한구가 바로, 예를 들어서 해저니우함월주가 능살능활합니다라고 말해서 30방망이요, 암전석호포아면이라해도 30방이고,철사찬입금강안이라해도 30방이고 곤륜기상노사견이라고 해도 내가 30방을 때리겠습니다. 밑에 구절을 보겠습니다. 若論此事(약론차사)인댄 만약 이일을 논한다면 譬如人家屋簷頭(비여인가옥첨두)에 처마첨자입니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가옥의 처마 끝머리에 一堆榼扌 相似(일퇴합잡상사)하야 (잡자가 찾아보면 나오지 않지요?좀 어려운 글자 입니다. 재방변에 하늘천하고 하늘천 밑에 아닐비자를 쓰고또 아닐비자 밑에 한일자를 그어놓은 글자입니다. 잡자인데 혼잡할 잡자 입니다.) 그러니까 혼잡하다고 하는 것은 뭐가 잔뜩 섞여있다 그런 얘기지요. 그러니까 사람이 사는 지붕 끝머리에 뭐가 어떻게 되냐하면 일퇴, 뭐가 쌓였다, 퇴비라고 할 때 퇴자 입니다.모일퇴, 쌓일퇴 그러는데, 합자는 통합한다는 합자이고, 여러 가지가 통합해서 혼잡하게 쌓인 것과 같아서 그런 얘기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것을 알았어요.우리나라에도 기와 지붕이 있고 중국에도 기와 지붕이 있어요.우리나라는 기와가 큽니다. 암기와, 숫기와 그러지요? 이 기와가 암기와는 좀 넓적하고 숫기와는 위에서 덮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기와가 대개 커요. 중국에 가보니까 중국의 기와는 전부 똑 같아요.암기와 숫기와가 똑 같아 가지고 서로 하나는 업어서 놓고 하나는 자쳐서 놓고 이렇게 지붕을 이었더라구요, 그런데 적어가지고 여기에 온갖 먼지라던가, 산에서 바람불면 낙엽 같은 것이 쌓여서 지붕마다 온갖 풀이 잔뜩 자라고 그래요, 보니까 그것이 퇴적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지붕에 퇴적 된 것을 말하는 것이어요. 그래서 여기서 하는 얘기가, 처마끝이 쌓인 퇴적물과 같아서, 뭐가 그러냐하면 만약 이것을 논한다면, 위에 이런 말씀들을 논하다면 그런 얘기예요. 처마끝에 쌓인 퇴적물, 온갖 것과 같다 그런 말이지요 .퇴적물과 같아서 從朝至暮(장조지모)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지요. 雨打風吹(우타풍취)호대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되 直是無人覰着(직시무인도착)하나니 비바람이 치는 가운데 아무도 눈여기 보지 않아서 殊不知有一所無盡寶藏(수부지유일소무진보장)이 무진보장이 이 가운데 쌓여 있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蘊在其中(온재기중)이로다. 그러나 무진 보장이 쌓여 있는 것은 모르더라. 저런 퇴적물도 한량없는 거름이 되겠지요? 또 이것이 무슨 뜻으로 쓰셨는지는 모르지만 중국 사람들은 보물 같은 것을 이상한 곳에 잘 감추고 숨기고 하는 그런 습성이 있는 것 같아요. 가끔 신문 같은데 보면 방구둘를 파고서 그 밑에 돈을 감춰 놓는다던가 벽에다다 돈을 전부 넣고 벽지로 바른다던가 등등 이런 일들이 있는데 그런 얘기인지, 아니면 땅 속에도 무한한 보물들이 다 감춰져 있지요? 저 거름 속에 무한한 보물들이 뭐겠어요? 어떤 친구가 아들이 참 게을러요. 큰 과수원을 하는데 아들이 게을러서 자기가 죽고나면 좋을 과일을 따기가 힘들겠거든요. 그래서 아들에게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하지요? 아들아! 내가 저 과수원 땅에 금을 독에 가득 담아서 묻어 놓았는데 나 죽고 나면 파서 써라. 그러니까 이 놈이 아들이 돌아가시고 나니까 얼싸 내가 부자 한번 되어야겠다고해서 여기를 파 봐도 안나오고, 저기를 파 봐도 안나오고, 온 과수원을 다 파재켰어요. 그러니까 그 해에 과실, 사과가 잔뜩 열리지요? 그러고 나중에 알았답니다. “아~아버지가 내가 게을러서나를 깨우치게 하시기 위해서 이와같이 하셨구나” 그랬답니다. 그래서 여기에도 그런 보배가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若也拾得(약야습득)하면 만약 이것을 줍는다면, 얻는다면, 百劫千生(백겁천생)에 백천겁 천생에, 한량없는 그런 생 속에, 그런 얘기지요. 取之無盡(취지무진)하며 무진 보장의 취하고 또 취해도 무진장하며, 用之無竭(용지무갈)하리니 쓰고 쓰고 또 써도 마르지 않는다. 須知此藏(수지차장) 모름지기 알라. 이 여기에 감춰진 것은, 여기에 있는 보배는, 그런 얘기지요. 不從外來(부종외래)라 밖으로부터 쫓아온 것이 아니다, 밖에서 온 것이 아니다 이런 말이지요. 皆從你諸人(개종이제인)의 모두다 너희들한테 온 것이다. 一箇信字上發生(일개신자상발생)이니라 모두 이 믿음이라고 하는데서 발생했다. 나왔다는 그런 얘기지요. 어제 믿음이라는 얘기를 했지요?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와같이 아주 중요하고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만이 반드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공부를 하면 학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 열심히 일하면 일한만큼 가치를 얻는다는 믿음, 그런 믿음이 있어야 돼요. 여러분들께서도 하루에 겨우 30분이지만 매일 한번씩 여기 들어오셔서 강의를 듣고 억지로라도 이와같이 한다면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가고 이렇게 10년만 지나가 보세요. 어느날 뒤돌아 자기를 딱 보니까 그야말로 경전의 대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若信得及(약신득급)인댄 만약 믿을信자를 얻을진대는, 얻어간다면, 급제한다면, 決不相誤(결부상오)어니와 결정토 그릇되지 않는다, 잘못되지 않거니와, 若信不及(약신부급)이면 만약 믿을信자를 얻지 못한다면, 너희들이 이 믿을신자를 꼭 믿는 마음이 없다면 그런 얘기입니다. 縱經塵劫(종경진겁)이라도 이 세상이 다하고 또 다하고 하더라도, 몇백억겁을 지난다 하더라도, 亦無是處(역부시처)니라 또한 너희들이 깨달을 곳이 없다. 옳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깨달을 곳이 없다는 얘기지요. 普請諸人(보청제인)하노니 널리 청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이르노니, 그런 얘기지요. 청하노니 便 恁麽信去(변임아신거)하야 바로 이렇게 믿어서 공부해 가면, 신거의 갈去자는 공부해 간다. 그런 뜻이지요. 免敎做箇貧窮乞兒(면교주개빈궁걸아)어다 그렇게 해가면 빈궁한 거지꼴은 면한 것이다. 공자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굶어 죽을 사람이 부지런하면 죽은 먹는다고 했어요. 죽 먹을 사람이 부지런하면 밥은 먹을 수 있다. 밥 먹을 사람이 부지런하면 곡간에 쌀이 쌓이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부지런한 것이 곧 빈궁한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지요. 여기서는 참선하는 사람, 믿을신자가 곧 빈궁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且道(차도)하라 일러봐라. 此藏(차장)은 여기에 있는 보배 무진장은, 보배는 그런 얘기지요. 감출藏자는 보배라는 뜻이예요. 卽今在甚處(즉금재심처)오 어디에 있는가? 지금 어디있는가 이 말이예요. 보배가 어디 있냐 이 말이지요. 良久云(양구운) 한참 계시다가, 不入虎穴(불입호열)어면 爭得虎子(쟁득호자)리요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어찌 호랑이를 잡으리오 하시다. 호랑이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속담이 있지요? 그래서 우리들이 참선해서 깨닫는다는 것은 역시 참선을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참선을 하기 위해서는 이런 법문을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지요? 그런 것도 모두다 이 믿을信자에 달려 있다. 부처님을 믿는 마음, 부처님을 믿으면 반드시 보배를 얻을 수 있다. 부처님 믿으면 부자될 수 있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돼요. 이것도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가 간절하다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들이 그런 기도가 간절하지 않아서 안되는 것이지 간절하고 시키는대로 했는데 안되더라 그런 이치는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자 다음 구절 보겠습니다. 解制示衆 其六 해제법어 그 여섯 번째 해제 법어는 간단히 하셨네요. 九旬(구순)을 把定繩頭(파정승두)하야 구순을 90일을 얘기합니다. 열흘旬자가 9번 있으니 90일이지요. 3개월, 결제철은 원래 3개월이지요. 구슨을 파정승두라는 것은 90일동안 화두를 잡는다 그런 얘기예요. 두는 화두라는 뜻이고, 선방에 가면 입승이라는 자리가 있어요. 죽비를 딱 들고 그 자리 지켜 있습니다. 그런 얘기예요. 딱 참선, 정을 잡고 그와 같이 지킨다. 그런 얘기입니다. 不容絲毫走作(불용사호주작)하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어디로 털끝만큼도 달려나가려 하지 않는다 그런 얘기지요.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90일간 결제 떡 해 놓고서 해인사 같으면 저 신불회에 간다던가? 통사 선방에 있으면 저 선방 마을에 간다던가? 그러면 안된다는 얘기예요. 딱 90일 동안은 절에서 두문불출하고 죽기살기로 결판을 내려는 그런 마음자세로 있어야 참선을 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直得箇箇皮穿骨露(직득개개피천골로)하야 바로 개개인 모두가 피골이 상접해, 그러니까 뼈가 들어날 정도로 하니까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하는 것이겠습니까?이런 고행을 통하지 않고서는 깨침을 얻을 수 없습니다. 七零八落(칠령팔락)이라도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또 넘어지더라도, 일곱 번 넘어졌는데 여덟 번째 또 넘어지는 거예요. 넘어진다하더라도 冷眼看來(냉안간래)인댄 냉철한 눈으로 보다면 正謂掘地討天(정위굴지토천)이라 정이 이르기를 땅을 파서 하늘을 본다 함이라. 하늘을 보는데 땅을 파서 어찌 보겠습니까? 아무리 천날을 땅을 판다해서 하늘을 볼 수 없겠지요? 하늘을 쳐다봐야 하늘을 보는 것이지, 千錯萬錯(천착만착)이로다 천가지 만가지 모두다 틀렸다. 천번만번 그르친다. 그런 얘기입니다. 今日(금일)에 到者裡(도자리)하야는 오늘 여기에 이르러서는 不免放開一線(불면방개일선)하노니 한길을 열어주리니, 여기와서는 내가 한길을 열어보인다 이 말입니다. 彼此無拘無束(피차무구무속)하야 피차간에 서로 구속됨이 없어서. 구속하지 않아서, 東西南北(동서남북)에 任運騰騰(임운등등)하며 동서남북 어디를 가도 자유자재하며, 임운등등이라는 것은 자유자재하다는 것이어요. 자유스럽게 산다. 天上人間(천상인간)에 천상이나 인간 세상이나, 逍遙快樂(소요쾌락)이어다 그야말로 맘대로 다 다닐 수 있어요. 인간 세상이나 천상이나 어디던지. 然雖如是(연수여시)나 그렇긴 그렇다고 하더라도, 且道(차도)하라 한번 일러봐라. 忽遇鑊湯爐炭釰樹刀山(홀우화탕노탄검수도산)하야는 여기는 일수 도산인데 사실은, 일수라고 하나, 검수라고 하나 마찬가지인데, 다른데는 검수도산이라고 되어 있지요? 검수도산이라는 것은 달려있는 말입니다. 여기 일자나 검자나 똑같은 의미를 갖은 말인데, 화탕지옥, 노탄지옥, 검수지옥, 도산지옥 등 여러 가지 지옥들을 열거한거예요. 지옥 얘기입니다. 홀연히 화탕지옥, 노탄지옥, 검수지옥,도산지옥을 만나서 어찌할거냐? 지옥 왜 갑니까? 잘못하면 가겠지요? 만약 그런 지옥에 떨어지면 어떻게 할 것이냐? 未審(미심)커라 알지 못하더라. 모르겠다. 그렇게 해 놓으시고, “미심커라, 모르겠다!” 법문을 죽 그렇게 하시고는 “ 나는 모르겠다!” 하시면서 如何棲泊(여하서박)고 어디에 머물것인가? 한자는 배를 어디에 달 것인가 그런데, 갑자기 왜 배를 댑니까? 그러니까 내가 어디에 머물것이냐? 어디에 살 것이냐 그런 얘기입니다. 어디 머물고? 良久云 惡(량구운) 한참 계시다가. “악~”그렇게 소리를 지르시는 것이어요. 이것이 해제 법어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이 글을 읽으시고 또 읽으시고 잘 읽어 보세요. 그런데 여기 보면 말이지요? 여기 들어와 계신 숫자 이상으로 많은 분들이 여기를 열어봤어야 되는데, 열어보는 숫자가 다 표시되거든요. 그런 숫자가 안나타나요. 그것을 보면 뭘 의미하는가 하면 제가 여기 올려 놓은 시중기어 상단법어를 안보신다는 뜻이어요. 조회를 지금 보니까 겨우 스무번 했는데 오늘 들어오신분만해도 조금전에 나가신분까지 28분이었는데, 그러니까 안보신다는 말이 되지요. 그래서 이것 한번 죽 읽어 보시고 그러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24]
어느날 도둑놈이 도둑질을 하다가 경찰에 들켜 쫓겨서 어디론가 도망갑니다. 쫓겨 도망가다 가다 어느 깊은 산중에 도달했는데 날씨는 깜깜하고 어디가서 잠을 좀 자고 가야 되겠다하고 살펴보니까 산중에 조그마한 불빛이 보입니다. 그래서 어디인가 싶어서 살금 살금 가 보니까 조그마한 암자예요. 아하~ 여기에 암자가 있었구나. 그래 스님한테 여기서 좀 자고 가자고 해야 되겠다해서 노크를 해도 아무 소식이 없어요. 선방인데, 선방인줄 알기나 하나 뭐. 하여간 방문을 살짝 열어보니까 스님이 앉아 계시거든요. 노스님 한 분이 떡 앉아 계신데,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스님! 스님! 불러도 아무 소식이 없어요. 혹시 주무시는가? 그러고 들어가서 스님 앞에 가서 이렇게 보니까 눈을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 알 수가 없거든요. 손을 눈앞에 어른어른해 봐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래서 스님이 지금 앉아서 잠에 떨어졌나 보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뭐 좀 가져갈 것 없는가? 싶어서 방안 이리저리 돌아다녀 보니까 염주하나 있거든요. 가만히 보니까 처음보는 것이지만 이 염주 가지고 가면, 스님들이 가지고 다니니 참 좋을 것 같아요. 나도 언제인가 이런 염주 좀 갖었으면 했는데 잘됐다. 생각하고서 거기서 자고 가야 되는데 도둑놈이니까 뭐 보기만 하면 훔쳐 갈 생각부터 하거든요. 그래서 염주를 싹~ 들고서 방문을 나섰습니다. 방문을 나서서 방문을 닫는다는 것을 안닫고 나가려하니까 스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잠깐 ” 여지껏 아무 말씀 안하시다가 잠깐 하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까 “바람 들어온다 문 닫고 가거라” 그러시거든요 그래서 두손으로 문을 닫고서 얼마만큼 가다 생각을 하니까 도둑놈이 그런 생각을 한거예요.“ 아~ 그렇지. 내가 여기 자고 간다고 들어왔는데” “지금 가 봐야 어디 갈 곳도 없는데” 도둑놈이 그냥 들어가서 도둑질을 했으니, 염주를 훔쳤으니, 그래서 다시 암자로 가서 이 염주는 별로 가치 나가는 것 같지도 않으니까 스님한테 가서 그것 그 자리에 놓고서 방에서 자고 아침에 가야 되겠다.하고 그래서 다시 암자로 갔어요. 암자로 가니까 스님이 여전히 앉아 있거든요. 그래서 도둑놈이 가서 스님한테 그랬습니다. “스님! 난 아까 주무시는 줄 알았더니 주무시지도 않고 뭐하십니까?” 스님 말씀이,“ 지금 도둑놈을 보고 있다” 그러시거든요. 이 사람이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올커니 내가 도둑놈인데 도둑놈을 보고 있다고 하니 “스님! 저 도둑놈 아닌데요“ 하니까 ”알고 있다 하지만 너도 도둑놈이다.“ 그래서 이 친구가 그러는 겁니다. 역시 도인이구나. 눈 뜨고 바로 보지도 않고 나를 도둑놈으로 알고 계시니, 그래서 무릎을 꿇고 스님한테 여쭸습니다. “스님! 도둑질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있겠습니까?” “있지” “어떻게하면 도둑질을 않고 삽니까” “도둑놈을 지켜보면 도둑놈이 어떤 짓을 하는지 잘 알 것이다, 그러면 도둑질을 안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도둑놈이 그 자리에서 스님 밥도 해 드리고, 나무도 해 오고 하면서 참선을 배웠답니다. 물론 나중에 훌륭한 스님이 되어서 그야말로 수행을 잘했지요? 이 얘기는 실제 있었던 얘기입니다. 제가 어느 누구라고 밝히지만 안했지 실제 있었던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 도둑놈도 사실은 상당히 순박한 도둑놈이지요? 오늘 공부 한번 보겠습니다. 示衆 其七(시중 기칠) 상단법어 그 일곱 번째 若要眞正決定明心(약요진정결정명심)이댄 만약 진정코, 결정코, 마음을 밝히고자 한다면, 先將平日胸中(선장평일흉중)에 所受一切善惡之物(소수일절선악지물)하야 평소에,가슴속에 받아들인 일체의 모든 선악을 버리라 그랬어요. 선도 버리고 악도 버려야 돼요. 악만 버리고 선은 남겨 놓으면 선은 괜찮겠지? 선도 역시 좋은일 해야지, 좋은일 해야지, 그런 생각도 역시 번뇌입니다. 번뇌가 일어나면 정에 들 수가 없어요. 정에 들 수 없다는 것은 뭡니까?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근본의 진리 자리를 볼 수 없다. 이런 얘기지요. 盡底屛去(진저병거)하여 毫末不存(호말불존)하고 전부 다 버려서, 진저병거, 일체 하나도 남기지 않아서, 저 먼지까지 깨끗이 다 쓸어서 버려 가지고 터럭만큼도 존재하지 않게 한다. 終朝兀兀如痴(종조올올여체)하야 종조,하루종일 그런 얘기지요.아침에서 저녁까지. 올올여체하야, 올올히 바보같이 돼서,어리석은 듯해서 그런 얘기지요. 바보처럼 그런 얘기지요. 與昔嬰孩(여석여해)로 無異然後(무이연후)에야 마치 어린애들처럼 해서 그렇게해서 연후해사, 전연 다른 생각이 없이 한 다음에야, 그런 얘기예요. 어린애들 보면 생각이 단순하지요? 간난아기 보세요. 배고프면 울고 ,배만 부르면 헤헤하지요? 좋지요?. 일체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그렇게 해야 되지요. 일체 다른 생각이 없는 것이어요. 모든 학자, 과학자,연구자, 큰 기술자, 크게 뭘 이루는 사람들은 어린애와 같습니다. 그러나 요술을 부리고 남을 속이고,사기치고 이렇게 하는 사람은 어린애 같지가 않아요. 온갖 마음이 한 시간에도 수백 수천가지가 오락가락 왔다 갔다 해 가지고 정신이 없다 이 말이지요. 그런 생각 갖으면 안됩니다. 괜히 하루종일 잘 지냈다가도 저녁때 되어서 마음이 홱~ 바뀌어 가지고 이상해지고 그리고 또 다음날 아침에 또 바뀌어지고, 한시간이 멀다하고 마음이 이리저리 요술을 부리면 쓸 곳이 없습니다. 그렇게 한 연후하사 乃可蒲團靜坐(내가포단정좌)하야 조용히 포단에 앉아서, 포단이라는 것은 방석이지요? 방석에 앉아서 正念堅凝(정념견응)하야 바른 생각으로 굳게 지켜서, 精窮向上之玄機(정궁향상지현기)하며 정미롭게 향상의 현묘한 진리를 궁구한다고 했어요 저 깊고 깊은 그윽한 진리를 궁구하는 것이다. 참선은 괜히 앉아있는 것이 참선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깊고 깊은 현묘한 자리를 보기 위해서 참선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硏味西來之密旨(연미서래지밀지)니라. 서래밀지를 맛본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께서 비밀한 뜻을 다 가르쳐 주신 것을 맛보는 것이지요. 이것을 선열이라고 그래요. 우리 경전을 읽으면서도, 참선만 그러냐하면 아니지요. 경전을 읽으면서도 부처님에 깨달으신 그 미묘한 진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법문을 들으면서, 고봉스님의 법문을 배우면서도 고봉 스님이 무슨 마음으로 지금 어떤 자세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런 깊은 의미를 지금 맛보고 있는 거지요. 자! 다음 구절 보겠습니다. 切切拳拳(절절권권)하며 兢兢業業(긍긍업업)하야, 그랬어요 간절하고 간절하고, 지극하고 지극하게, 그런 얘기예요. 절절권권 긍긍업업이라는 것은 간절하고 간절하고, 지극하고 지극하게, 그런 얘기입니다. 直敎絲毫無間(직교사호무간)하며 직교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지요. 바로 터럭만큼도 간격이 없으며, 간극이라고 했지요? 간격이나 간극이나, 무간이라는 것은 간극이 없다. 그 간절한 마음, 부처님의 진리를 깨달으려 하는 마음, 그 그윽한 진리의 밀지를 배우려는 그런 마음이 간극이 없다, 그런 얘기지요. 動靜無虧(동정무휴)하야 움직이나 가만히 있거나 동정에 어지러짐이 없어요. 옆에서 설사 도둑놈이 와서 도둑질을 해 간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대꾸가 없어야 돼요. 도둑놈이 뭘 다 훔쳐가도 훔쳐갈 것이 있겠습니까? 漸至深密幽遠(점지심밀유원)한 그렇게해서 점점 깊고, 그윽하고, 그러한 곳에, 도달하는 곳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룬다 그런 말이지요. 점점 깊고 밀밀하고 그윽한 먼 곳에 이르는 것이다. 微細微細極微細處(미세미세극미세처)하니라. 그렇게해서 아주 미세하고, 극 미세한 곳까지 도달한 것이다. 뭐가 그렇다는 것이지요? 참선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譬如有人(비여유인)이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遠行他方(원행타방)이라가 멀리 갔다가, 그런 얘기지요. 漸漸回途(점점회도)하야 점점 집으로 돌아와서 已至家舍(이지가사)에 이제 집까지 도착한다는 말이예요. 又如鼠入牛角(우여서입우각)에 看看走至尖尖盡底(간간주지첨첨진저)하며 그렇게 돌아오는 것이 뭐와 같으냐 하면 마치 쥐가 소뿔로 돌아갔어요. 소뿔이 우리 나라 소는 뿔이 길지 않지만, 중국소는 뿔이 좀 길어요. 중국소는 뿔이 좀 긴데, 길어봐야 거기서 거기인데, 뿔 속에 들어가면 끝머리는 뾰쪽하지요? 그런 얘기지요. 우각에 막 들어갔는데,첨(尖)자 뽀족한 것이 끝까지 갔다는 얘기예요. 又如捉賊討贓(우여착적토장)에 도적을 딱 잡아가지고, 도둑놈을 잡는다는 말이지요. 도둑놈을 잡아서 栲至情理俱盡(고지정리구진)이니라. 그 도둑놈이 잡고 보니까 도둑놈의 장물이 있지요? 장물을 찾은 측에서 범죄를 낱낱이 캐물어서 추궁하는 거와 같이 하느니라. 마치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이와같이 의심해 가고, 의심해 가고,또 의심해 가고, 아주 밀밀하고 세세하고 극미세한 것까지 비춰봐서 아주 추궁하고, 추궁해서 어떤 것도 더 추궁할 수 없는 것까지 추궁해 가는 것이다. 마치 뭐와 같으냐하면 도둑놈을 잡았는데 그 도둑놈의 장물은 물론이거니와 추궁해서 낱낱이 죄짓은 것을 모두다 추궁해 내는 것과 같다. 자, 다음 구절 보겠습니다. 不動不退(부동불퇴)하고 無去無來(무거무래)하며 부동불퇴, 이 자리에서 물러나가나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이렇게 공부하면서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안되겠지요? 괜히 조금하다가 그만두고, 한 시간하다 그만두고, 두 시간하다 그만두고, 한 달하다 그만두고 그러면 안된다 그 말이지요? 가거나 오는 것도 없으며, 괜히 건방지게 왔다갔다 하지도 않는다.그런 말이지요. 一念不生(일념불생)하고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前後際斷(전후제단)하며 앞뒤가 딱 끊어져야 돼요. 공부하는 사람은 앞뒤가 끊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아주 순진하고 순박해요. 아주 순박한 것입니다. 지금 황우석박사가 마음이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황우석 박사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정말 공부하고 무엇인가 해 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무슨 PD나 뭐 MBC 뭐 그런, 정말 이 세상에 없어도 아무런 필요함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와 가지고 다른 사람, 일 잘하고 있는 것 발목 잡고 하는 사람들이어요. 그런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그래서 이런 과학자나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은 아주 순박해요. 또 빗나갔지요? 그래서 앞뒤가 딱 끊어져야한다. 卓卓巍巍(탁탁외외)하고 그야말로 우뚝우뚝하고 당당하다 그 말입니다. 탁탁외외하다는 것은 물뿌리외자 인데, 탁탁한 것은 뽀족뽀족하다.그런 얘기인데, 뽀족뽀족하고 우뚝우뚝하다. 孤孤逈逈(고고형형)하야 아주 고고하고 당당해, 如坐萬仞崖頭(여자만인애두)하며 만길이나 되는 절벽에 딱 앉아 있는 것과 같이하며, 큰 절벽산, 높이 만길이나 되는 바위 꼭대기에 앉아 있으면 얼마나 조심해야 되겠습니까? 그런 얘기입니다. 又若停百尺竿上(우약정백척간상)이라 또한 뭐와 같이 해야 되느냐? 저 백척이나 되는 나무 꼭대기 앉아 있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랬어요. 여기는 바위 덩어리도 아니어요 백척이나 되는 장대 위에 있다고 하면 어떻겠어요. 얼마만큼 조마조마하겠습니까? 가끔 보면 곡마단이라고 그럽니까? 줄타고 가는 사람 보면 참 신기해요. 줄타고 이쪽에서 저쪽 건너가는 사람이그야말로 일념이라도 다른 생각해 보세요. 떨어지고 말지. 一念纔乖(일념재괴)하면 한 생각이 잠시라도 무너진다면, 喪身失命(상신실명)하리니 몸을 잃고 목숨을 잃을 것이니, 將至功成九仞(장지공성구인)이라도 切須保任全提(절수보임전제)니라. 뭐하냐하면, 장차 공을 이룬다해도 아무쪼록 간절하게, 온전하게, 그렇게 공부를 잘 챙겨야 되느니라. 그런 얘기예요. 그런 성공을 이룬다고 해도, 구인이라는 것은, 아홉자라고 하는 것은, 성공의 구단, 구단이 맞나 모르겠어요. 九자는 숫자로는 가득찬 숫자입니다. 최고의 숫자. 공부해서 최고를 이룬다고 하더라도, 그런 얘기지요. 그렇게 다 해 놓았다고 하더라도 간절히 모름지기, 그런 얘기입니다 아이구 나 성공했어. 더이상 할 것 없어. 이 세상은 더 이상 할것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대각을 이루시고 난 후에 45년간 중생들을 위해서 아주 잠시도 쉬지 않고 정진하시고 늘 그렇게 다니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라는 것이어요. 忽於經行坐臥處(홀어경행좌와처)에 홀연히 경행하고 앉고 서고 눕고 하는 곳에, 경행이라는 것은 다니는 것이지요? 행주좌와어묵동정(行往坐臥語默動靜)에 그런 얘기지요. 不覺口地一聲(불각구지일성)하면 불각중에 불각이라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별안간 그런 소리예요. 불각중에 입에서 한소리가 터져나와, 아~ 한다던가, 악~ 한다던가, 무릎을 탁치고 그거야~ 한다던가 그런 얘기지요. 이런 소리가 왜 나오겠어요. 깨달아야 나오지요? 猶如死在漫天荊棘林中(유여사재만천형극림중)이라가 이렇게 있다가 불각중에 외마디 소리가 터지면 마치 가시가 가득한 큰 숲에서 죽었다가, 그런 얘기예요. 討得一條出身活路相似(토득일조출신활로상사)하리니 豈不快哉(기불쾌재)아 살아 나올 수 있는 한가닥, 죽었다 살아 나올 수 있는 한가닥 희망을 찾아 낸듯하니 이 자리가 어찌 통쾌하지 않겠느냐? 어찌 통쾌하지 않겠느냐 그 말이지요. 아이구 죽었다 살아났는데 그것보다 더 통쾌한 일이 없겠지요? 부모님도 돌아가시다가 딱 깨어나면 기분 좋고, 젊은 청춘이 딱 죽게 됐어요. 그 사람이 오늘 죽게 됐다. 그런데 기가 막힌 약을 써서 살게 됐어요.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본인도 좋지만 다른 사람도 다 좋습니다. 자 다음 구절 한번 보겠습니다. 若是汨沒塵勞(약시골몰진노)하야 만약 진세에, 진세라는 것은 세상을 말하는 것이지요.우리들이 사는 세상이지요? 만약 진세에, 이 세상에, 진노에 빠진다는 것은 세상사는 재미에 빠져서, 그런 얘기입니다. 세상사는 재미에 빠져서, 不求昇進(불구승진)인댄 뛰쳐나오려는 생각이 없을진대는, 참선을 딱~ 해서 깨달으려는 생각이 없다 그 말이지요. 譬如水上之浮木(비여수상지부목)이 其性實下(기성실하)하야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냐? 비유컨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나무다, 그 성품이 실로 온전하지 못한 것처럼. 썩은 나무가 바다에 떠 있다. 호수에 떠 있던 바다에 떠 있던 떠 있습니다. 떠 있는데 그 성품이 온전치 못하다. 실답지 못하다는 것은 언제 썩을지 언제 없어질지, 언제 가라앉을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른다는 소리지요? 늘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暫得身輕(잠득신경)이나 잠시 몸이 가뿐한 것 같으나, 공부하다보면 “아~ 이제 됐어“ 그런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지요. 不堪浸潤(불감침윤)하며 금방 물속에 가라앉는다 그 말이지요. 물속에 떠 있는 나무가 온전치 못한 것이 간단한 것 같으나 감당치 못한다 그 말이지요? 감당치 못하고 빠진다 그 말이예요. 又如庭中之花(우여정중지화) 또한 정원에 있는 꽃이, 雖則色香俱美(수즉색향구미)나 비록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을, 그 아름다움을 다 갖췄으나, 그 색과 향기와 그 아름다움을 다 갖추었으나 一朝(일조)에 色萎香滅(색위향멸)하면 하루아침에 색이나 또는 빛이나, 향기나, 아름다움 전부다 사라진다 그 말이지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하지요?..아무리 좋은 꽃도 열흘을 못간다 그 말이예요. 오늘 좋다가도 하루도 못가서 시들어지는 꽃들이 많지요. 無復可愛(무부가애)하며 다시 무엇을 사랑할 것이며, 사랑할 것이 없다 그 말이어요. 하나도 사랑할 것이 없어요. 좋아할 것도 없습니다. 又如農夫之種田(우여농부지종전)에 또 농부가 씨앗을 뿌린 밭에, 농부가 씨앗을 산에 뿌리는 것 아니겠지요? 밭에 뿌리겠지요. 雖有其苗(수요기묘)나 뿌린 밭에 싹이 남이나, 싹이 트더라도 而工力(이공력)이 不至(부지)하며 공력이 없다면,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리고, 거름도 주고, 김도 매고, 이렇게 키워야 되는데 그런 공력이 없다 이 말이지요? 공력이 없다면 終不成實(종불성실)하며 그렇게 성실치도 않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便如貧窮乞兒(변여빈궁걸아) 得少爲足(득소위족)이라. 그렇게 한다면 뭐와 같이 되냐하면 마침내는 빈궁해서 걸식하는 이가 조금 얻는 것과 같으니라. 걸식하는 사람이 아침내 숟가락으로 양재기 두둘기고 이집 저집 다니면서 “ 밥 한 술 주쇼” 하고 밥을 얻어봐야 얼마나 얻겠느냐 이 말이지요. 조금 얻는 것이다. 久久萌芽 再發(구구맹아 재발)하고 이렇게 해서 오랫동안, 맹아라는 것은 싹이지요. 그런 싹이 재발한다 그 말이지요 오래오래 맹아가 다시 싹이 트고 트고 한다 이 말이지요. 그렇게 오랫동안 지나가면 다시 번뇌의 싹이 튼다는 것이지요. 여기서는, 싹이 튼다는 것은, 재발하고, 荊棘(형극)이 復生(부생)하야 가시가 다시 나와요. 被物之所轉(피물지소전)하야 적에 굴림바가 된다. 저 사바세계에 인연으로 자꾸 굴림바가 되어요 우리들도 이 세상에 가만히 생각하면 화날 때가 많아요. 왜 화 나느냐?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미 2600년 전에 다 해서 마치고, 저 극락 세계, 부처님 세계에 왔다 갔다 하시면서 편안히 계시는데, 장산이 하는 짓이 뭡니까? 지금..아무것도 아니어요. 인터넷에서 공부한다. 이것 아무것도 아닌짓을 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러면 여러분들 그럴 겁니다.우리는 뭐하는 것입니까? 여러분들도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서 내일 공부하러 안오면 안돼. 열심히 해야지. 열심히 해야 돼요. 열심히 하지 않으면 계속 저 굴림에 당한다 그 말이지요. 終歸沈溺(종귀침닉)하면 마침내 그렇게 해 가지고, 그런 곳에, 그런 경지에 푹 빠져버리면, 저 세상에 나쁜 곳에 푹 빠진다 그 말이지요? 푹 빠지면, 無上淸淨涅槃(무상청정열반)을 無由獲覩(무유획도)하리니 위없는 청정 열반으로 절대로 얻어 볼 수 없어, 절대로 무유청정한 세계를 볼 수 없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오늘 여러분들께서 공부 안하면 공부 안한만큼 손해여요. 이 고봉 스님의 법문을 어떻게 듣겠습니까? 豈不枉費前功(기불왕비전공)하고 이미 다 이룬 공부가 헛되지 않게 해서, 이미 내가, 왕비라는 것은 소비했다는 것인데, 허리가 굽도록 소비했다. 허리가 굽도록 허비했다는 것이 뭐예요? 농부가 일하는 것이고, 학자가 공부하는 것이고, 참선하는 사람이 참선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공력을 드렸으니 그것을 헛되지 않게 하고, 虛消信施(허소신시)리요. 헛되지 않게 해서 신심의 단월의 시주를 어찌 헛되게 하리오. 그랬어요. 공부 않고 헛되게 해가지고 신심단월이 갖다 준 밥을 어떻게 먹겠느냐? 그 밥을 먹고서 어떻게 소화시키겠느냐 그런 말이지요. 그래서 스님이 먹는 쌀 한알은 7근이 된다고 그랬어요. 일미칠근(一米七斤)이라, 그러니까 시주들이 갖다 준 쌀 한 톨, 보리 한 톨, 동전 한닢이라도 그것은 정말로 소중하고 소중하게 도업을 이루는데 써야 되고, 불사를 이루는데 써야 되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 쓰면 갈 곳은 딱 한 군데지요? 그래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지옥에는 누가 제일 많이 가 있느냐? 목사하고 스님하고 신부가 제일 많이 가 있답니다. 참 큰일이야 큰일. 장산이도 생각하면 한심스러워요..ㅋㅋ, 지옥가는 일만 하고 있으니까,, 자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25] 사리 얘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오늘은 부산에 부처님 진신사리, 불지사리 라고 그러지요? 부처님 손가락 마디 사리인데 부처님 진신사리가 부산에 오시게 됐습니다. 이 일을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많은 부처님 사리를 모시는 일은 영광스러운 일인데, 중국에 있는 법문사 라는 절에서 모셔온 이 진신사리가 어떤 사리인지 조금 말씀드릴게요. 법문사에 진신사리가 모셔진 것은 약 4세기말에서 5세기초로 알고 있습니다. 이 진신사리를 중국땅에 모시기 위해 인도 스님들이 진신사리를 모시고 중국땅에 들어 갔는데, 그 때만 하더라도 상당히 이교도들이고 스님들을 보면 잡아 죽이고 할 때였습니다. 인도 스님 12명이 중국에 들어갔다가 몇분을 잡히고 몇분은 도망치다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사리를 땅에 묻습니다. 그런 다음 인도로 돌아가지요? 마을에서 구전으로 구전으로 부처님 사리가 저 땅 속에 모셔졌다. 그렇게 되면서 수백년이 지나갔습니다. 200-250년정도 라고도 합니다. 이제는 진나라.. 등등이 서로 다투다가 후한이 없어지고 당나라 라는 나라를 세우게 되지요? 이 당나라가 들어왔을 때 성관리가 그런 말을 듣고서 마을 사람들과 정말 여기에 사리가 묻였느냐 해서 파보자해서 파보니까 정말 사리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 사리를, 장안에, 지금은 수도가 베이징이지만, 시한이라고 하는데 보통 장안이라고 그럽니다. 장안에 황제한테 알리고 황제가 그럼 진신사리를 모셔라. 그래서 진신사리를 모시고 나서 약 400여년간, 서기 874년, 건국5년이라고 했으니 이 해까지 약 7번을 부처님 사리,진신사리를 황제들이 친견을 했어요. 무슨 일이 있을 때, 또 황제들이 꼭 친견하고 싶다고 했을 때 법문사에 있는 진신사리를 지하 궁전에서 모셔다가 친견했다고 그럽니다. 요전에 한국 스님들이 갔다 왔길래 지하궁전에 얼마만큼 크냐고 했더니 지하궁전에 한 5-600평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그럽니다. 그 당시에 지하를 그렇게 넓게 팠다는 것은 굉장한 불사입니다. 당나라가 어려운 지경이 됐을 때 시종이라는 황제가 불지사리를 친견하려고 명을 내립니다. 그래서 당시 3천여명이나 살았던 스님들이 불지사리를 모시고 여러 관리들과 시한까지 한 200여리나 되는 거리를 밤낮없이 포대에 모시고 갔다고 합니다. 그 때 장안에는 황사가 많이 졌다고 기록에 되어 있어요. 그런데 주변을 정리하던 한 군인이 부처님 사리를 모시고 당나라 장안에 들어왔는데 장안의 궁전, 황실까지 가기 위해서 비단천으로 온 장안을 휘장을 했다고 하니까 굉장했지요? 금은 보화로 전부 장식을 하고 그와같이 한 후에 황제가 친견하려고 하니까 군인들이 전부 나서서 정리를 하는데, 한 군인이 자기 신분도 있고 부처님 사리 가까이 와서 칼을 꺼내서 단칼에 자기 왼팔을 쳐서 오른팔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스님들은 그야말로 머리를 땅에 짓고, 머리에 연비를 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팔을 자르고, 손가락을 자르고, 연비를 하고, 손가락을 태우고 한 사람이 수천명이라고 했어요. 이것은 기록에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상황이 어느정도 였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 때 황제가 부처님 사리가 도착했다는 것을 듣고서 그야말로 버선발로 뛰어 내려와서 눈물을 흘리고 부처님께 절을 하면서 이 당나라고 만년을 갈 수 있는 나라로 되게 해 주십시오 하는 그런 기원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후로 정확히 1108년후, 1981년도 8월 24일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어요. 1981년 8월24일인데, 8월 24일부터 며칠간 폭우가 쏟아지고 큰 번개가 쳤습니다. 번개가 쳐서 30m도 넘는 장대한 탑인데, 우리탑처럼 생각하면 안돼요. 미얀마나 중국의 탑들은요 어마어마하게 탑이 큽니다. 거룩하고, 높고, 이런 탑들은 국가에서 귀히 여기는 것들이지요. 이 탑이 번개, 벼락을 맞아서 쪼개졌어요. 그래서 보니까 정확하게 반이 쪼개진 것입니다. 이렇게 쪼개지고 났는데 갑자기 이 탑에서 붉은 불기둥 같은 것이 솟구치면서 크고 예리한 광채가, 요즈음 같으면 써치라이트라고 할까요?, 예리한 광채가 온 사방을 비쳤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너져 내린 그 반쪽에서는 하얀 연기 같은 것이 서리고 일곱가지 광채가 비추었다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렇게 된 후에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 다음에는 인도에서는 무슨 방송이 나왔느냐하면 중화인민공화산 산시성에 있는 법문사 대성진신보탑이 며칠동안의 폭우로 인해서 무너졌다. 붕괴됐다. 법문사 장노에게,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에게 위로와 애절한 마음을 전한다.이렇게 방송이 나오고 또한 일본, 태국, 미얀마,말레시아, 홍콩,미국,소련, 카나다, 독일,아프카니스탄, 이집트 등 30여개 국가에서 종교계 인사들이 이런 위로 전문을 보냈다고 그래요. 기록에 딱 보니까 대한 민국만 없어요. 그 때 누가 대통령했는가 보면 전두환 때이지요? 그래서 법문사가 그런 절입니다. 이렇게 절의 탑이 무너졌는데 중국 정부에서는 탑을 고칠 생각을 안했어요. 고칠 생각을 안하고 있다가 그 산시성에 있는 한 관리가 애절하게 생각하다가 몇 년후에 이 탑을 보수해야 되지 않겠느냐 중앙정부에 알렸는데 마침 중앙 정부에서도 그것을 받아들여가지고 주정부와 중앙 정부에서, 법문사와 그 탑을 다시 보수하기 시작한 것이어요. 보수하는데 놀랍게도 지하 궁전에 들거가 보니까 어마어마한 기록과 거기에 부장되어 있던 그런 보물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어요. 만여점이나. 기록에 보면 그 당시의 당나라 모든 상황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다 나왔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이것을 복원해서 세계 인류 문화재로, 세계 인류 문화재는 세계 9대불가사의로 받아 들이고 세계 인류 문화재로 등록이 되어 있습니다. 유일하게 부처님 사리가 세계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는 사리가 바로 한국의 부산땅에 와 있습니다. 나머지 얘기가 더 많습니다만, 나머지 얘기하자면 오늘 시간 다 가니까 오늘 얘기는 여기서 마치고 여러분들께 시간이 되시면 이 사리를 꼭 친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공부는 示衆 其七 <상단법어 그 7 (2)> 若是有志丈夫(약시유지장부)인댄 만약 대장부의 뜻이 있을진대는, 그런 얘기지요. 正好向者裡(정호향자리)하야 바로 진리의 근본의 향해서는. 정이 진리의 세계를 가기 위해서는, 晦跡韜光(회적도광)하고 근본을 향해서 자취를 숨기고 潛行密用(잠행밀용)호대 잠행이라는 것은 숨는다는 뜻이지요? 숨겨서 다닌다. 숨어 다닌다는 뜻인데, 밀용도 남 모르게 한다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명예를 버린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바라고 하는 짓이 아니지요? 或三十年二十年(혹삼십년이십년)으로 이십년이나 삼십년으로 以至一生(이지일생)히 일생동안이 終無他念(종무타념)하야 죽을 때까지 어떤 생각을 갖지 않아서 踏得實實落落(답득실실낙낙)하며 그야말로 공부를 일생동안해도 실답게 분명히,실실하고 낙낙하게 한다. 穩穩當當(온온당당)하야 은은히 하고 당당하게 한다. 直敎纖塵不立(직교섬진불입)하고 바로 터락만큼의 번뇌도 허용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작은 번뇌도 허용하지 않는다. 寸草不生(촌초불생)하며 촌초라는 것은 작은 풀인데, 이것도 작은 번뇌입니다. 작은 번뇌도 나지 않게 하며, 往來無礙(왕래무애)하고 왕래 자유자재하고, 가고 옴에 걸림이 없으며, 去住自由(거주자유)하면 간다거나, 주한다거나 이것이 자유스러우며, 報緣遷謝之日(보연천사지일)에 인연을 다해서 옮기는 날이 무슨 날이지요?. 천사는 죽는 날이지요? 인연이 다해 죽는 날에, 천사제일은 죽는 날이지요. 管取推門落臼(관취추문락구)어니와 틀림없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것이다. 이 臼자가 절구통구자인데, 落이라는 것은 촌락, 락구는 고향이라는 뜻입니다. 고향에 이룬다는 것은 틀림없는 결과를 얻는 것이다 그런 뜻이예요. 若 只恁麽 紙裹茅纏(약 지임하지과모전)하야 만약 이럭저럭하고, 지임하 라는 것은 이럭저럭 산다는 것이어요. 지과모전이라는 것은 지리멸렬하게, 공부를 하는 것인지, 뭔지, 하다가 그만두고서도 그만 뒀는지 조차도 몰라. 이렇게 사는 것을 지리멸렬해서 龍頭蛇尾(용두사미)인댄 용두사미가 된다면 非 特使 門風有玷(비 특사문풍유점)이라 틀림없이 문풍가문에 허물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불교에 참선하는 가문에 모두가 허물이 된다 그런 말이지요. 허물이 되거니와 亦乃退後學初心(역내퇴후학초심)하리라 후학들의 초심을 후퇴시킬 것이다. 위에서 어른들이 내가 공부를 잘하지 아니하면 후학들이 잘 따라 주겠어요. 그런 얘기입니다. 선배들이 열심히 해야 후학들이 아 우리 선배님들이 열심히 공부했는데 나도 따라해야지 그렇게 하지요? 그래서 앞에 사람은 항상 귀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 다음 구절 볼까요? 如 上所述 管見(여 상소술 관견)은 莫不皆是 藜藿之類(막불개시 여곽지류)라 위에 소술한 것, 위에 말한바, 관견은 대쪽으로 보는 것이니 내 소견입니다. 나의 견해를 관견이라고 그래요. 좁은 소견이다 그런 뜻이지요. 나의 견해는 막불개시, 다 이것은 여곽지류라,감히 이것을 여곽지류같다. 여곽이라는 것은 여자는 본래 흉노족여자인데 곽자는 향초리등곽,흉노족이라는 뜻인데, 흉노족이라. 다 이것은 흉노족이 아님이 아니니라.그러니까 다 흉노족 같다. 그렇게 나쁘게 말할 것이지요. 飽人(포인)은 不堪供養(불감공양)이어니와 배부른 사람은 불감공양이거니와, 배부른 사람에게는 감히 공양을 권하지 못하거니와, 배부른 사람이 공양할 수 없지요? 공양할 수 없거니와 그런 얘기예요. 以俟絶陳之流(이사절진지류)하노니 배부른 사람은 먹지 않거니와, 굶주린 사람만 기다린다 그 말이지요. 終有一指之味(종유일지지미)하리라 마침내 한 경계에 한 맛이다. 이런 사람들, 배가 고파야, 열심히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 공부해야 공부가 잘되는 것이다. 배 부른 사람 밥을 권해도 별로 좋아하지 않지요? 그러나 배 고픈 사람에게 밥을 권하면 얼마나 좋아겠습니까? 往往學道之士(왕왕학도지사) 忘却出家本志(망각출가본지)하고 자주자주 도를 배우는 많은 인사들이 출가의 본뜻을 잊어 버리고, 一向隨邪遂惡(일향수사수악)하야 한결같이 삿되고 악한 것만 쫓아서, 不求正悟(불구정오)하고 바른 정법의 깨달음을 구하지 아니하고, 바른 깨달음을 구하지 아니하고, 妄將佛祖機緣(망장불조기연)과 망녕되이 불조의 기연과, 부처님과 조사님의 기연, 소중한 인연이지요. 소중한 인연과, 古人公案(고인공안)하야 고인의 공안을 구하지 아니해서, 공안이라는 것은 화두지요. 깨달음을 얻기 위한 화두. 구하지 않아서 從頭穿鑿(종두천착)으로 처음부터, 종두라는 것은 처음부터 그런 말이지요? 천착으로, 잘못된 것으로부터 천착해서, 그런 얘기지요. 遞相傳授(최상전수)하며 서로 서로 잘못 전수하며, 그러니까 내가 잘못 배운 것을 잘못 배웠으니까 잘못 배운대로 전수하는 것이어요. 다음 사람 잘못 배웠으니까 또 그렇게 잘못 가르치고 그렇게 하면 그것이 뭐예요. 아무것도 아니지, 그래서 바른 깨달음을 얻은 사람만이 바른 가르침을 줄 수가 있어요. 자기 본지도 아니고, 자기 원래 뜻도 아니고, 자기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체 하고, 그러면 이 사람이야 말로 나쁜 심보지요. 密密珍藏(밀밀진장)하야 귀중하고 귀중한 보배를 잘 삼아서, 진장을 잘 밀밀히 해서 그런 얘기지요. 以爲極則(이위극칙)하고 이것으로서 법칙을 삼고, 여기서 이위극즉이라고 안하고 이위극칙이라고 합니다. (앞에 법법자가 있으면 법칙,즉이 앞에 있으면 즉이라고 읽고, 앞에 법법자가 있으면 칙이라고 읽습니다.) 이위극칙하고, 극즉이라고 해도 되지만 극즉보다는 극칙이 맞습니다. 이위극칙하고 便乃不守毘尼(변내불수비니)하야 이에 문득 계율도 지키지 아니해서, 계율도 안지키는 사람을 자랑으로 삼는 사람도 있지요? 撥無因果(발무인과)하며 인과가 없다고 하며, 人我 愈見崢嶸(아인 유견쟁영)하고 오직 너와 나, 나라던가 너라던가 해서 다투기만 해요. 매일 같이 나와너, 오직 영화를 위해서, 잘 먹기 위해서, 명예를 위해서, 잘살기 위해서, 이런 것으로만 다툰다는 것이지요. 참으로 공부를 위해서 다투는 것이 아니라.그래서 三毒(삼독)이 倍加熾盛(배가치성)하나니 탐진치 삼독이 배가치성해요. 如斯之輩(여사지배)는 이와같은 무리들은, 不免墮於魔外(불면타어마외)하야 마구니 외경에 떨어져서, 마외라는 것은 마구니 외경에, 저 마구니 그런데 다 떨어진다 그 말이지요. 永作他家眷屬(영작타가권속)이니라. 영원히 그들과 권속이 되리라. 타가권속이라는 것은 그들의 권속이 되다. 그들이 누구냐면 마구니지요. 마구니의 권속이 된다. 그런 얘기가 됩니다. 자 다음 구절을 보겠습니다. 若有未遭邪謬(약유미조사류)하야 만약 삿되고 잘못된 일만 만나지 않아서 不負初心(불부초심)인댄 처음 마음을 져버리지 않는다면, 처음에 내가 성불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져버리지 않는다면, 그런 얘기지요. 當念無常(당념무상)이 迅速(신속)하며 마땅히 세월이 빠르고 빠르며, 痛思苦海沈淪(통사고해심륜)하야 빠르고 빨라서 고해 속에 깊이 있음을 뼈 아프게 생각한다. 이 말이지요. 통사라는 것은 아주 통렬하게 생각한다. 그런 말이지요. 뼈 아프게 생각해서, 趁 二時粥飯現成(진이시죽반현성)과 두끼니로 현실을 이어감을, 아침에 죽이고 점심에 밥이지요? 이와같이 현실을 이어감을, 百般受用便當(백반수용변당)하야 이로하야 백가지의 수용을 당하면서도, 便好乘時直入(변호승시직입)이요 바로 이런 좋은 시절을 타고, 직입이라는 것은 이런 좋은 시절을 타고 들어왔다는 말이지요. 직입해야 할지니라. 바로 좋은 시절을 타고 직입해야 하느니라. 공부에 바로 들어가야 된다 그런 뜻이지요. 莫待臨嫁醫癭(막대임가의영)이어다 처녀가 시집갈 때에 당해서, 처녀가 시집갈 때 되어서 혹을 떼려고 의사한테 가지 말지어다. 막대임가의영이라고 하는 것은 처녀가 혹이 달려 있는데 시집 갈 때 다 되어서 혹을 떼러가면 되겠어요? 미리 미리 혹을 떼고 있다가 다 나은 다음에 가야지. 此乃從上佛祖之心印(차내종상불조지심인)이며 無礙解脫之妙門(무애해탈지묘문)이라 이것이 부처님과 조사님의 심인이며 걸림없는 해탈의 오묘한 문이다.그랬어요. 자 다음 구절 보겠습니다. 設使機緣不偶(설사기연불우)하며 工力未充(공력미충)이라도 설사 기특한 연을 만나지 못해서 공부가 충분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切須捨命忘形(절수사명망형)하고 간절히 모름지기, 사명망형하야, 목숨을 던져 돌보지 안하는 것이지요. 간절히 모름지기 돌보지 않고, 勤行苦行(근행고행)하며 부지런히 고행하며, 至死拌生(지사반생)하야도 설사 죽음에 이른다 하더라도, 一心不退(일심불퇴)니라 한결 같은 마음으로 퇴전치 말아야 될 것이니라. 復有葛藤未盡(부유갈등미진)일새 다시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내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갈등이 있다. 이 말이지요. 不免重說偈言(불면중설게언)하노라 그래서 내가 게송으로 거듭 말하고자 하노라. 그랬어요. 此心淸本無瑕(차심청본무하)어늘 이 마음이 청정해서 티하나 없거늘, 只爲貪求被物遮(지위탐구피물차)로다 다만 탐욕으로 번뇌가 가리웠음이라.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원래 티하나 없어요. 깨끗해요. 여러분이나 저나 부처님이나, 보살님이나, 누구라도 강도,도살자,도둑놈이라도 원래 그 마음은 청정합니다. 그런데 왜 청정하지 않느냐? 뭐가 잘못 됐느냐하면 탐욕 때문에 그렇다고했어요. 탐욕은 마치 뭐와 같으냐하면, 보석이 하나 있는데 이 보석을 싸고 있는 것이 흙덩어리예요.그러면 사람들이 보고서 흙덩어리라고 하지 보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겉에 보여지는 것이 전부 흙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에. 突出眼睛全體露(돌출안정전체로)하면 안목이 탁 트여, 돌출이라는 것은, 안목입니다. 안목이 탁 트여가지고 전체가 드러나면 山河大地是空華(산하대지시공화)리라 산하대지가 바로 허공의 꽃인줄 알리라. 그랬어요. 다음 구절 보겠습니다. 東西十萬(동서십만)이요 南北八千(남북팔천)이라 십만팔천리라는 말 들어 봤지요? 누가 엉뚱한 말을 하면 “야임마 십만 팔천리야.” 십만 팔천리야. 纖塵不立(섬진불입)하고 섬진도 세우지 아니하고, 寸草不生(촌초불생)하야 조그마한 풀도 나지 않음이라, 조그만 번뇌도 나지 않는다 그 말이지요. 往來無礙(왕래무애)하며 옹래가 걸림이 없으며, 妙用從橫(묘용종횡)이로다 묘용으로 쓰는 것이 자유자재, 종횡이라는 것도 자유자재함이로다. 直饒親到者裏(직요친도자리)라도 설사 이런 경계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이런 경계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正是棄本逐末(정시기본축말)이며 근본을 버리고 꼬리만 쫓는 꼴이 되며, 引禍招殃(인화초앙)이니라 꼬리만 쫓으니까 어떻게 되느냐? 그것은 재앙을 불러 드립니다. 그렇게 해서 전부다 재앙을 불러 드린다는 말이지요. (여기보니까 한글로 번역한데는 재앙을 불러 드린다는 말이 안되었네요) 인화초앙이라, 모두다 이끌어서 이런 재앙을 불러드린다. 且道(차도)하라 일러봐라. 如何是本(여하시본)고 어떤 것이 근본이냐? (擲主丈云(척주장운) 주장자를 떡 집어 던졌어요. 던지시고 하시는 말씀이 抛出輪王三寸鐵(포출윤왕삼촌철)이라도 전륜성왕이 쇠로 된 세치혀를 날름거려도, 전륜성왕이 잘났다고 세치 혀를 날름거린다 해도, 날름거린다고 하더라도, 分明遍界是乃鎗(분명변계시내쟁)이라도 분명히 말하건데, 세상은 이 소리로 가득함이라. 그랬어요. 변계시내쟁이라는 것은 이런 것들도 가득차다. 그런 얘기입니다. 창살로 가득차다 그런 뜻인데, 低頭覓天(저두멱천)이요 머리를 숙여서 하늘을 찾고, 머리를 들어서 하늘을 찾아야 되는데, 머리를 숙이고 하늘을 어떻게 찾아요. 仰面尋地(앙면심지)라 머리를 들어 땅을 찾은 것과 같으니라. 跛跛挈挈(파파설설)하야 더디고 더디다. 遠之遠矣(원지원의)로다 멀고 멀 뿐이다. 아직 멀었다. 틀렸다, 멀었다 그런 소리입니다. 驀然撞着徐十三朗(맥연당착서십삼랑)하고 맥연은 갑자기라는 말입니다. 별안간 서씨가 13번째 아들을 만나보고,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당착십삼랑이라는 것은 서씨가 아들을 13이나 뒀다고 그래요. 참 많이 났지요? 그런데 이 아들 가운데 전자에 나가서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13을 낳던, 14을 낳던 뭐, 1명을 낳던, 아들은 귀여운 것이 아들이 아니겠습니까? 걱정이 되엇 아들을 찾는다고 전장에 가서 아들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딱 만나는 것이어요.죽었다는 아들을 만나는 것이어요. 얼마나 좋겠습니까? 갑자기 당착서십삼랑하고, 13번째 아들을 만나보고, 嗄 元來只在者裡(하 원래지재자리)로다 아~ 원래 그 자리가 그 자리인 것을 앎이라. 그랬어요. 원래 그 아들이 그 아들이라 그 말이지요. 以手(이수)로 拍膝一下云(박슬이하운) 그렇게 해서 손으로 무릎을 한번 탁~ 치고 하시는 말씀이 在者裏(재자리)라도 여기에 도달한 놈이라도, 臘月三十日到來(납월삼십일도래)하야는 납월 삼십일은 섣달 그믐이지요? 섣달 그믐은 죽은 날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섣달 그믐은 1년이 다 가버린 것이고, 인생이 다 가버린 것을 얘기하는 것이지요. 죽는 날에 와서는, 也是開眼見鬼(야시개안견귀)하리라 너희들이 눈을 뜨고서 귀신을 보게 되리라. 눈 뜨고 귀신을 안보고 부처님을 봐야 되는데 귀신을 본다 그 말이예요. 다 공부를 잘못했기 때문에 귀신을 볼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공부를 안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가면, 참선해서 깨닫지 못하고 가면 누구라도 죽을 때,눈 감을 때 귀신을 본다고 했어요. 귀신을 보게 되면 귀신 쫓아 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공부를 잘하고, 부처님 말씀 잘 듣고, 신심을 내고, 그야말로 내 팔을 잘라서 부처님께 올릴 수 있는 그런 신심이면 곧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 열심히 공부해서 모든 분 다 함께 이고득락하고, 부처님 세계의 부처님땅을 한번 밟아 봅시다. 오늘 여러분들 수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26]
형벌이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시대의 여러 가지 형벌이 있었는데 그 형벌 가운데 팽형이라는 것이 있답니다. 팽형이라는 것은 팽자가 삶을 팽자인데 좀 섬짓하기도 해요. 중세인데 우리민족의 이런 팽형은 일종의 명예형입니다. 주로 매관매직(賣官賣職)하거나 축재, 사리 사욕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다거나, 나라의 명예를 더럽힌 자에게 주는 중벌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저자거리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고 솥 아래에는 장작을 쌓아 놓고 죄수를 데려와서 흰옷을 입히고 가마솥에 물을 붓고 가마솥에 들어가게 한다음 불을 때지는 않고 연기만 피운답니다. 그 동안 죄인의 자제들이 호곡을 하면서 죄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장례 치룰 준비도 해서 정식으로 장례를 치루는 것이어요. 장례를 치루는 것이니까 산소도 마련하는 것이지요. 그런다음 죄인이 솥에서 나오면 이 순간부터는 산 사람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이예요. 자손들이 장례까지 다 치뤘으니까, 족보에도 사망으로 기록하고 집에서 조문도 받고 산발하고 완전히 장례를 치뤘는데, 그런데 완전히 목숨이 죽은 것은 아니니까 그 죄인은 산발한 채로 다녀야 한다고 합니다. 상당히 인권유린(人權蹂躙)에도 비춰지는 것이지만 생명에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는 않고 살인한 것인데 이것은 뭐냐하면 역설적으로 말하면 명예를 완전히 치명적으로 명예를 입히는 것이지요.,명예 훼손을 입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면 이조때 이런 형이 있었느냐? 중국에도 없고 동양 어디에도 없었는데, 이것은 아마 과거 중세의 가치 판단이 충효에 있었는데 여기에 기초하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명예를 지키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현대 사회에서도 명예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고 있지요? 명예를 잃으면 반을 잃은 것이다. 어느 약국에 들어 가면 그런 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건강을 잃으면 전부다 잃는 것이다. 그런 글귀를 읽은 적이 있는데,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명예도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고, 겁내지 않고, 세상에 여러 가지 불명예스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명예도 별로 무서워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 양이 좀 많네요. 立限示衆其八 결제중에 법어 8. 입한 중에 법어인데, 립한이라는 것이 限자가 한정한 한자지요? 결제기간, 90일간을 결제해야 되니까 날짜를 정해 놓고 정진하는 것을 입한이라고 했습니다. 五陰山中(오음산중)에 이 몸을 오음이라고 했어요. 스님들이 제일 많이 쓰는 말입니다. 오음산이라는 것은 이 몸둥아리는 오음산이라고 그랬습니다. 오음산중에 魔强法弱(마강법약)하야 마구니는 강하고, 법은 약해서, 戰之不勝(전지불승)인댄 싸워 이기지 못할 진대는,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休擬議着(휴의의착)하고 주저하지 않고, 휴의, 쉬지 않고,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그런 얘기지요. 寶釗全提(보쇠전제)하야 보검을 온전히 휘둘러서, 莫問生殺(막문생살)하고 생사를 묻지 않는다, 사느냐 죽느냐를 묻지 말고, 奮不顧身(분불고신)하야 몸을 돌아다 보지 말아서, 뒤를 돌아다 보지 말라, 몸을 돌아다 보지 말라. 그런 얘기지요. 星飛火撒(성비화철)이어다 성비, 별이 하늘에 떠 다니고 불이 하늘이 날라다니니까 이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별이 하늘에 떨어지고 불이 날라다니다.한자에는 그렇지요? 성비화철이니까.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치열하게 싸워야 된다. 상사를 물문하고 치열하게 싸워야 된다. 누구하고 싸워야 되지요? 나 자신하고 싸우는 것이지요. 有功者(유공자)는 공이 있는자는, 성공한자는, 賞(상)하고 상을 주고, 無功者(무공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자는, 罰(벌)호리라 내가 벌을 주리라. 賞罰(상벌)이 旣已分明(기이분명)인댄 상벌이 이미 분명한데, 분명할진대는, 且道(차도)하라 일러봐라. 今日喫棒底上座(금일끽봉저상좌)는 오늘 한 방망이를 맞은 상좌는, 이 한 방망이를 맞은 상좌는, 맞다는 말은 없지만 그런 얘기입니다. 是賞耶(시상야)아 是罰耶(시벌야)아 이것은 상인가 벌인가? 선방에서 조사 스님들이 죽비를 들고 참선을 잘하는가 못하는가 다니면서 어깨를 때린다던가, 후려친다던가,이런 경우가 있는데,이런 얘기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상이냐? 벌이냐? 하는거예요. 若向者裏(약향자리)하야 이 자리에 이르러서는, 緇素得出(치소득출)하면 緇는 물드릴緇자니까 검다는 것이고, 素자는 흴 素자지요? 검고 흰 것을 가려낼 줄 안다면, 便見興化(변견흥화) 於(어) 大覺棒下(대각봉화)에 문득 흥화가 대각선사에게 이 한방망이를, 悟喫棒底消息(오끽봉저소식)하리라. 이 한방망이를 맞고 깨달은 소식을 볼 것이다. 흥화 수좌가 몰록 대각선사에게 한방 맞고, 대각선사는 대각스님이 있는 것이 아니고 깨달은 사람의 한 방망이를 맞고 깨달은 소식을 볼 것이다. 그런 얘기지요. 여러분들도 참선을 하시게 되면 선방에서 이런 경험을 한 번 하시는 것도 참 좋습니다. 요즈음은 산사 같은데서 이런 많은 프로그램이 있어서 잠시라도 가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 다음 구절 볼까요? 示衆其九 상당법어 9. 參禪(참선)에 若要剋日成功(약요극일성공)인댄 참선을 정해 놓은 일, 극일은 정해 놓은 일을 극일이라고 했습니다. 기약해 놓은 일, 꼭 이기고 넘어가야 될 날, 그런 얘기지요. 만약 정해 놓은 기일안에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참선하는데 90일 동안 난 절대 밖에 나가지 않고, 이 기간 동안 그야말로 대각을 이루어 봐야 되겠다. 그런 결심을 하고 앉는 것이지요. 그래서 90일 안에 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느냐? 如墮千尺井底相似(여타천척정저상사)하야 마치 천길이나 되는 우물에 빠져서 從朝至暮(종조지모)하며 從暮至朝(종조지조)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러니까 하루종일이지요. 밤낮으로, 뜻이어요 저녁에서 아침까지, 千思想萬思量(천사상만사량)이 여러 생각들이, 이 생각 저 생각, 單單只是箇求出之心(단단지시개구출지심)이라 오직 오직 빠진 이 우물에서 빠져 나올 생각만 하는 것과 같으니라. 究竟決無二念(구경결무이념)이니라. 끝내 다른 마음이 없다. 두 마음이 없다는 얘기지요. 두 생각이 없다는 것은 두 마음이 없다. 그런 얘기입니다. 誠能如是施工(성능여시시공)하야 어떤 때는, 진실로, 능여시시공하야, 다른 말로, 진실로 이와 같이 공부해서, 시공이라는 것은 공부를 베푼다는 것은 이와같이 공부해서 或三日或五日或七日(혹삼일혹 5일 혹 7일)에 3일이나 5일이나 7일 동안에 若不徹去(약불철거)면 만약 철저하게 공부해 가지 아니하면, 철거의 去자는 공부해 간다 그런 뜻입니다. 만약 철저하게 공부해 가지 아니하면, 西峰(서봉)은 고봉 스님이 서봉 스님입니다. 서봉에 살 때는 서봉이라 했고, 고봉에 살 때는 고봉이라고 했으니까, 今日(금일)에 犯大妄語(범대망어)라 대 망어를 범했음이나. 그러니까 오늘 대망어죄를 범했다, 그런 얘기지요. 永墮拔舌犂耕(영타발설이경)하리라. 영원히 발설지옥에 떨어지리라. 그러니까 3일이나 5일이나 7일 동안 공부를 해서 깨닫지 못한다면 내가 망어를 짓는다, 망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분명히 발설지옥에 떨어지리라. 이렇게 스스로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성철스님의 열반송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지요? 生平欺誑男女群(평생기광남녀군), 일 평생동안 남녀들을 모두 속였다. 그래서 내가 아비지옥에 떨어졌다. 그런 성철 스님의 열반송이 있는데 이것을 교인들이 베껴 가지고 다니면서 “이봐라 성철스님이 중으로서 자기 남녀군을 다 속여서 잘못한 것을 알고 나 아비지옥에 떨어졌다고 하지 않았느냐?“하면서 서 먹고 다닌대요. 그러니까 이 얼마만큼 어리석은 것입니까? 성철스님이 하신 선구에 숨어 있는 내용을 볼 줄 모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여기 제가 아는 어느 교수는 한수 더 떠서 뭐라고 하는고하면 이런 말이 들려요. 그래도 성철스님이 종교인으로써 참 솔직했다. 너무 어리석지요? 이렇게 선구를 모르면 안됩니다. 성철스님이 남녀를 다 속였다고 하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 속임의 의미가 다르지요? 모든 법을 설했다고 하는 것은 다 방편설입니다. 방편설을 불교에서는 뭐라고 하냐하면 가설 그럽니다. 빌릴가자를 쓰지요? 거짓가자도 되고. 모두다 빌려다 쓰는 것이다. 이 세상 누구를 가르친다거나, 누구를 인도한다는 자체가 무다다 가설입니다. 제가 설법하고 내용을 해설해 드리는 것도 다 가설이예요. 가설은 뭐냐하면 방편설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철스님이 남녀를 모두 속였다고 하는 것은 그 속임이 진짜 속임이 아니라 일체 중생들을 그야말로 열반의 땅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성철스님이 왜 지옥에 갔느냐? 성철스님이 보는 안목에는 천당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중생들이 말하는 세계의 지옥은 있어도, 그래서 성철 스님의 깨달은 분의 말씀은 곧 지옥이 극락이고, 극락이 곧 지옥이요 둘이 따로 없는 것이지요. 그것이 법의 세계고 진리의 세계입니다. 有時熱鬨鬨(유시열홍홍)하며 어떤 때는, 홍홍이라는 홍자가 무슨 홍자인가하면 싸울 홍자여요. 열열하게 싸우다. 어떤때는 산란한 마음 때문에 사우는 것이어요. 그런 의미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有時冷冰冰(유시냉빙빙)하며 어떤 때는 냉빙빙하며, 냉빙빙은 혼침하다는 뜻입니다. 혼침이라는 것은 자꾸 잠만 오고 뭐가 뭔지 모르고, 어두 컴컴하고 그런 얘기지요. 어떤 때는 냉빙빙하며, 有時(유시) 如(여) 牽驢入井(견려입정)하며 어떤 때는 나귀 타고 우물에 들어가는 듯하며, 나귀 타고 우물에 들어간다는 것이 뭐냐하면, 나귀 타고 우물에 들어갈 수 없겠지요? 너무 정신이, 이것도 다 번뇌입니다. 뭐가 뭔지 되지도 않는 생각을 일으키고 그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어요 有時(유시) 如(여) 順水張帆(순수장범)하나니 어떤 때는 배가 순풍에 돛단 듯이 배가 달리니, 순조롭다는 얘기입니다. 因此四魔(인차사마) 更相殘害(갱상잔해)하야 이와같이 네가지 마구는, 순풍에 돛단배가 잘 달리는 것 같은 것도 역시하지 마라 고 그랬어요. 참선에서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없이 오직 참선에 몰두해서 정에 딱 들어가야지요. 인차사마 갱상잔해하야, 서로 잔혹하게 해서 致使學人(치사학인)으로 忘家失業(망가실업)이라.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부가 안되게 한다. 망가실업, 공부를 잃게 하리라.그런 얘기입니다. 西峰(서봉)은 今日(금일)에 略施一計(약시일계)하야 내가 오늘 간략에 계책을 써서, 일계라는 것은 계책이라는 것이지요. 계책을 써서, 要與諸人(요여제인)으로 모든 분들로 하여금, 여러분들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掃蹤滅跡(소종멸적)호리라 자취를 없애주고자 하니라. 그러니까 위와 같이 일으키는 모든 사마(四魔)를 다 없애 준다 이 말이지요. 그렇게 하시고 良久云(량구운), 한참 계시다가, “捷(첩)” 하시다. 이것은 우리 말로 하면 쩝~ 하는 것이지요. 다음 구절 보겠습니다. 兄弟家(형제가) 成十年 二十年(성십년 이십년)토록 撥草瞻風(발초첨풍)호되 형제들이여! 10년 20년토록 발초첨풍이요, 무명을 풀어 헤치고 시원한 바람을 보는 것을 얘기하는것, 不見佛性(불견불성)하고 불성을 보지 못하고, 往往(왕왕)에 皆謂被昏沈掉擧之所籠罩(개위피혼심도거지소농도)라하니 무명을 풀어 헤치고 자주 자주 왕왕에, 혼침과 도거, 의 방해를 받음이라. 혼침은 아실 것이고, 도거도 혼침과 비슷한 것인데, 괜히 흔들고 돌아다녀요. 여기도 돌아다니고 저기도 돌아다니고, 혼침이나 도거나 비슷하지요. 혼침해서 침침해서 공부 안되는 것이나, 도거해서 맨날 돌아 다니는 것이나, 혼침 도거는 선객들이 제일 경계해야 될 대상이지요. 그래서 혼침과 도거의 방해를 받음이라 그랬어요. 殊不知(수부지) 只者昏沉掉擧四字(지자혼침도거사자) 이 혼침 도거 네자가, 가만히 혼침 도거 네글자가, 當體卽時佛性(당체즉시불성)이로다 불성임을, 수부지(殊不知), 알지 못함이라. 여러분들이 이것을 알지 못한다. 혼침과 도거, 자체가 다 불성이다. 불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말이지요. 堪嗟(감차)라 슬픈일이다. 그랬습니다. 다음 구절을 보겠습니다 迷人(미인)은 不了(부료)하야 미한 사람은 부료하야, 깨닫지 못하고, 妄自執法爲病(망자집법위병)이라 괜시리, 망녕되게, 괜시리 스스로 법에 집착 되어서, 병이 된다 그 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그렇지요? 괜히 내가 법 봤다. 진리 진리하고, 부처님! 부처님! 하는 사람치고 진리를 잘 아는 사람 별로 없지요?. 以病攻病(이병공병)하야 병으로서 병을 다스려서, 이열치열이라는 말이 있지요? 병으로써 병을 다스려서, 致使佛性(치사불성)으로 불성으로 하여금 愈求愈遠(유구유원)하며 더욱더 구하려면 멀어진다. 그런 말입니다. 더욱더 많이 그런 愈자지요? 이오 같이 더욱더 낫게, 구할려고 하면 더욱더 멀어진다 그런 얘기입니다. 轉急轉遲(전급전지)하나니라. 구하려하면 구함이 더 멀어지니까, 서두를수록 더욱더 멀어지게 된다. 서두를수록 더디게 됨이라 設使一箇半箇(설사일개반개)나 하나나 반개나, 조금이라도, 回光返照(회광반조)하야 딱 돌이켜 봐서 , 直下知非(직하지비)하야 바로 잘못 됨을 확연히 봐서, 廓然藥病兩忘(확연약병양망)하고 확연히 약과 병을 모두 잊고, 약도 잊어야 되고 병도 잊어야 되지요. 괜히 약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병을 안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약을 모르는 사람은 병도 모르고 살아요. 그러니까 약 너무 좋아하면 안되지요? 약병양망하고, 眼睛露出(안정노출)하야 안목을 밝게 들어내서, 노출은 들어낸다는 뜻이지요. 洞明達磨單傳(통명달마단전)하며 여기 洞자가 마을 동자지요? 무슨 동 무슨동, 명동,안국동, 하는 동인데 이런데서는 통이라고 읽습니다. 통할 통, 그런 얘기입니다. 통명은 밝게 들어낸다는 뜻이지요, 달마가 가르친 법을 밝게 들어 낸다 그런 뜻이지요. 통명달마단전하며, 徹見本來佛性(철견본래불성)이라도 달마의 불성을 사뭇치게 보았다고 하더라도 若據西峰(약거서봉)의 만약 서봉이 점검 할 것 같으면, 點檢將來(점검장래)인댄 만약 서봉이 이것을 들어서 볼 것 같으면 猶是生死岸頭事(유시생사안두사)라 이것은 모두 생사의 언덕에 있음이라, 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사의 언덕에 있음이라. 若曰 向上一路(약왈 향상일로)인댄 만약 향상일로를 말한다면, 약왈(若曰)은 말하자면, 향상일로 아시지요? 공부가 잘 되어서 한길 더 나가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말할진대는 須知更在靑山外(수지갱재청산외)니라. 모름지기 청산 밖에 있음을 알지니라. 그랬어요. 다음 구절을 보겠습니다. 若論此事(약론차사)인댄 만약 이 일을 논할진대는, 正如逆水撑船(정여역수탱선)하야 이를 말하자면 역으로 흐르는 물을 거슬러, 그런 얘기입니다. 撑자가 버팀목 탱자인데, 이것은 아마 노 젓는 것, 같아요. 노를 저어서 역으로 오른다 이 말이지요. 上得一篙(상득일고)에 물을 거슬러 배를 저어서, 위로 올라간다 이 말이지요. 退去十篙(퇴거십고)하고 한 번 저어서 위로 올라가려면, 한번 저어서 위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말하자면 1m 올라가려고 했은데 10m 뒤로 밀려버리는 것이예요. 上得十篙(상득십고)에 위쪽으로 열 상아대를 올리려면, 상앗대라는 것은 삿대지요? 열 번 삿대질하면 退去百篙(퇴거백고)하야 뒤쪽으로는 100 상앗대가 밀려가, 뒤로 그 만큼 밀려간다는 말입니다. 愈撑愈退(유탱유퇴)라 退之又退(퇴지우퇴)하야 상앗대를 젓고 또 저어도 뒤로 물러날 뿐이라. 밀리고 또 밀려나서, 直饒退到大洋海底(직요퇴도대양해저)라도 밀리고 밀려서 바로 저 뒤에 밀려서 저대양 큰바다 끝까지 밀렸다고 하더라도, 掇轉船頭(철전선두)하야 그렇게 밀려가도 뱃머리는 어떻게 해야 돼요? 다시 위쪽으로 딱 돌려야 된다. 그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가려고 하는 쪽으로 돌려서, 그런 얘기입니다. 決欲又要向彼中撑上(결욕우요향피중탱상)하리라. 그 목적지를 행해서, 내가 향하려는 목적지를 행해서, 결정코 끝까지 저 가운데를 행해서 버티고 오를려고 해야 된다, 그렇게 해야 된다, 이 말이지요. 若具者般操略(약구자반조략)인댄 만약 이런 조략을 갖췄다면, 이런 지조와 지략을 갖췄다면, 이런 용기를 갖췄다면, 그런 애기지요. 卽時到家消息(즉시도가소식)이라. 곧 깨달음에 이르는 소식이다. 공부가 굉장히 쉬운 것은 아니겠지요? 열심히 오를라고 하고 또 오를라고 하고, 그렇게 공부하려고 하는 의지, 저 대양 끝까지 밀려서도 반드시 내가 해 내고 말겠다고 하는 마음이 곧 성공하는 것입니다. 자 다음 구절 보겠습니다. 如人上山(여인상산)에 어떤 사람이 산에 오름에, 各自努力(각자노력)이니라 다 올라가는 사람이 노력하는 것이니라. 다른 사람이 노력해 주는 것 아니지요? 此事(차사)의 的實用工切處(적실용공절처)는 이 일은 확실하게 공부하는 것은, 공부하는 방법은 그런 얘기지요. 正如(정여) 搭對相撲相似(탑대상박상사)하야) 이는 간절한 곳에서 맞붙어서 싸우는 것과 같아서, 상박이라는 것은 용어상박이라는 말이 있지요? 상박이라는 것은 서로 붙어서 씨름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아서, 싸우는 것 같아서, 纔有(재유) 絲毫畏懼心(사호외구심)과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과, 纖塵(섬진) 差別念(차별념)을 터럭끝 만큼의 차별하는 마음, 차별심을, 蘊于胸中(온후흉중)이면 마음 속에 담고 있으면, 가슴에 쌓인다면, 그런 얘기입니다. 마음 속에 담고 있으면, 何止十撲九輸(하지십박구수)리요 어찌 열 번 싸워 아홉 번 지는데만 있으리요. 어떻게 그치겠느냐? 열 번 싸워서 아홉 번만 지겠느냐? 열 번 다 진다 이말이지요. 그렇게 한다면, 그러니까 마음 속에 두려운 마음이나 터럭끝만큼도 차별심을 가지고 공부를 해서 내가 될까 말까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갖는다면 백번 싸워서 아흔아홉번만 지겠느냐? 백번 다 진다 그 말이지요. 未着交時(미착교시)에 아직 씨름도 하기 전에, 性命(성명)이 已屬他人了也(이속타인요야)니라 이미 목숨은 저 사람에 있다. 그 말입니다. 若是鐵眼銅睛(약시철안동정)인댄 만약 쇠눈과 구리 눈동자가 가지고 있을대는, 憤憤悱悱(분분비비)하야 비분관계해서, 비자는 표현 못하고 마음으로만 표현하는 것입니다. 비분관계도, 분분비비라고 했지만 거꾸로 쓰면 비분관계나 같은 소리입니다. 마음 속으로 이를 악물고 비분관계하는 것이어요. 비분관계해서, 直要一拳打碎(직요일권타쇄)하며 바로 한 주먹으로 깨 부수며, 一口呑却(일구탄각)이니 한 입으로 집어 삼킬 것이니, 假使喪身失命(가사상신실명)하야 설사 상신실명하더라도, 목숨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以至千生萬劫(이지천생만겁)이라도 목숨을 잃고 하는 것을 천생만겁 동안 한다고 하더라도, 心亦不忘(심역불망)이니라 마음에서 물러나면 안된다. 마음은 또한 잊으면 안된다는 것은 마음에서 물러나면 안된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윤회하고 뭐 그런 생각하면 안된다 그말이지요. 諸上座(제상좌) 여러 수행자들이여! 果能如是知非(과능여시지비)하며 과히 이와같이 스스로 잘못된 것을 알며, 果能如是着鞭(과능여시착변)하면 과히 이와같이 채칙할 수 있다면, 과히라는 것은 과히 이와같다, 과히 그 사람이 큰 잘못은 없다. 이럴 때 과히라는 말을 쓰지요. 과히 이와같이 채칙을 할 수 있다면, 剋日成功(극일성공)을 斷無疑矣(단무의의)리니 극일, 기한내에 성공을 기약한다면, 성공을 의심하지 않으리니, 단무의, 의심하지 않는다, 의심하지 않으리니, 勉之勉之(면지면지)어다 . 부지런히 하고 부지런히 할지어다, 그러니까 공부라고 하는 것은 말이지요. 조금도 의심하면 안된다. 절대로 의심하지 말고 해야 된다. 그런데 여기서 고봉화상께서 채칙하신 말씀을 보면 정말 가슴에 와 닿습니다. 삿대 한번을 저어서 저 위로 올라가려고 해도 물살이 세어서 한번 저으면 뒤로 열 번 물러나고, 열 번 저어서 백번 밀려서 저 대양끝까지 밀려가더라도, 기억코 올라가려는 그 마음이 있어야 된다. 이 물고기 보면 말이지요? 물 상류로 계속 올라가려하지요? 아무리 물살이 세다고 하더라도 물고기들이 위로 올라가려는 용기가 대단하지요. 그래서 끝내는 그 가운데 올라가는 자가 있어서 산란하고 자식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공부하는 자도 그와 같이 공부를 해야 된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27] 날씨처럼 세상일도 보면 계속 추웠다가 날씨가 풀리고, 추웠다 풀리고, 여름 봄 가을 겨울이 있듯이 인생사도 그렇습니다. 좋을 때도 있고, 나쁜 때도 있고, 추울 때도 있고, 더울 때도 있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을 잘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요즈음은 사람들이 많이 생각하고 그러지요? 중국에 가서 포교활동을 하시던 선사님이 계셨는데 백용성스님이라고 계셨습니다. 백용성스님은 여러분들이 아실 것입니다. 민족대표 33인으로 파고다 공원에서 3.1일절에 만세 불러서 전국으로 만세 운동을 일으킨 그 분들이지요? 스님들이 두 분 동참하셨는데 만해 한용운 스님과 또 백용성 스님입니다. 백용성 스님도 서대문 형무소에서 3년 옥살이 했지요? 만해 한용운 스님과 똑같이, 다른 분들은 다 변절하고 나가고 그래도 스님들은 끝까지 우리 민족들이 살던 우리땅을 우리가 지킨다는데 무슨 소리냐? 이렇게 꼿꼿함을 보여 주시고 그랬지요? 스님이 그 이후로 우리 나라가 살길은 민족 혼을 일깨우는 것이다. 우리가 무지에서 깨어나야 된다. 그때만해도 한국 사람들이 너무 모르고 무식해서 무엇을 가르켜 줄라고 해도 무엇을 가르칠 수가 없어요. 모든 문자들이 거의다 한문으로 되어 있고, 한글로 되어 있다고 해도 한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니까, 그래서 스님이 한글로 모든 경전을 번역해서 화엄경이니, 금강경이니, 법화경이니 전부 거의 모든 경을 번역을 했어요. 그래서 어느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원효 스님 이후에 가장 많은 저술을 한 스님이라고 그럽니다. 스님이 또 중국에 가셔서 화가원, 길림성의 화가원이라는 과수원 농장을 하나 만들었어요. 그 농장에서 나온 식량으로 중국으로 넘어 온 우리 동포들하고 농사를 져서 그들의 식량을 보태주고, 거기서 불교을 펴고, 불교 학교를 세우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한 스님을 만났어요. 스님을 만났는데 중국스님 그러는 것입니다. “스님은 어디서 중이 됐습니까?” 중국 스님이 용성스님한테 물으니까 “아~ 나는 수계를 저 화엄사에서 했다”. “화엄사가 어디냐?” “대한 민국 지리산이 있은데 그곳에 화엄사라는 큰 대찰이 있다” 그러니까 이 중국 스님이 그럽니다. “ 아~ 그런가” “언제 중국에서 계법이 화엄사 갔습니까?“ 그러는 겁니다. 하도 스님이 기가 차서 그럽니다. 그 때 마침 종소리가 들리니까? “저 소리가 그대의 것인가? 나의 것인가?” 그럽니다. 그러니까 중국 선승이 말하기를 “어찌 그 것이 내것이 되고 그대의 것이 될 수 있겠소” 용성 스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 하늘의 해가 중국의 것인가? 조선의 것인가?” 그러니까 이 선승이 말하기를“어찌 해와 달이 중국 것이 있고 조선 것이 있겠는가?” 그때 용성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런데 어찌 불법도 그와같이 보지 못하고, 불법이 어찌 어느 나라에서는 크고, 어느 나라에서는 작은 것인가?“ “어느 나라에는 계법이 있고 어느 나라에는 계법이 없는가?” 그렇게 일갈를 해서 그 스님 그 자리에서 스님에게 삼배를 올리면서 참으로 잘못됐습니다. 큰 스님이 이렇게 사자후를 하실 줄 몰랐습니다. 스님을 뵌 것이 참으로 영광입니다. 그렇게 얘기했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보면 네것도 아니고 내것도 아닌 것, 우리 모두의 것이 참 많습니다. 보면은, 여러분들께서 이런 진리를 아는 것, 무지 속에서 깨어 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으로 봐서 여러분들이 선법을 배우고, 선요를 배우고, 불교를 배우는 것은 그만큼 내가 몰랐던 것을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 좋은 길임을 아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선요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晩 叅(만참) 其 十 늦을만자, 참여할참자인데, 만참(晩參)이라는 것은 祖庭錄(조정록)에서 이르기를 禪家(선가)에서 아침에 법문 하는 것을 上堂(상당)법문 그럽니다.아침에 법문한다는 것은 보통 10시에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여러분들 10시에 공양 올리는 것은 아시겠지요? 사시라고 해서 부처님께서 공양을 드실 시간이지요. 10시에 공양을 올리고 공양을 올리고 난 뒤 바로 법문을 합니다. 이것을 상당 법문,상당 법문이라는 것은 조참(早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조참 아침 일찍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저녁에는 법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念誦(염송)한다 그랬어요. 염송이라는 것은 경전을 염송하지요? 예를 들어서 긴 경전 금강경을 통째로 다 외우고 화엄경을 독송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천수경 한편을 외운다던가 아니면 반야심경 한편을 외워도 이것은 만참(晩參)입니다. 이 만참이던지 조참이던지 이런 시간에는 전대중 모든 스님들이 다 동참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小參(소참)이라 것이 있어요. 소참 법문이라고 그러지요? 소참의 의미는 꼭 만참이니 상당 법문 이런 것이 아니더라도 조실 스님이나 방장 스님이 선방에 잠시 잠시 들려서 몇몇 대중들만 모여 놓고서도 모든 격식을 갖추지 않고, 격식을 갖추지 않는다는 것은 법상을 오를 때 삼귀의를 한다던가, 게송을 읊고 절을 하고 이렇게 격식을 안갖추는 것이지요. 바로 거기에서 내가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스님께 묻고, 그 물음에 답해 주고, 이러는 것을 소참 법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소참 법문이 아주 중요한 것이어요. 그런데 요즈음은 소참 법문이 많이 없어졌다고 해서 좀 그렇습니다. 만참 叅須實叅(참수실참)하며 참구하고 모름지기 진실로 참구하며, 悟須實悟(오수실오)인댄 깨달음이 진실로 깨달음일 진대는, 참 깨달음 일진대는, 그런 말이지요? 動轉施爲(동전시위)에 輝今耀古(휘금요고)어니와 잠자고 밥먹는 삶속에, 고금의 본분사이지요. 휘금요고, 글자 하나씩 붙이면 휘요금고인데, 고금의 본분사인데, 휘요라는 것은 밝힌다는 의미예요. 그러니까 동전시위라는 것은 施자는 베풀시자인데, 보시단월들이 보시한 것을 밥을 먹는다던지, 아니면 동전이라는 것은 그 절에서 생활하는 것이지요. 일상생활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잠자고 밥 먹는 삶 속에 그렇게 제가 번역을 해 놓았어요. 若是操心(약시조심)이 不正(부정)하며 만약 마음 가짐이 바르지 못하며,부정하며, 悟處 不眞(오처불진)하야 깨달은 곳이 참되지 아니해서, 粧粧點點(장장점점))하며 장장점점이라는 것은 겉 모양을 꾸미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옷을 잘 입고, 얼굴에 뭐를 바르고,연지 곤지 찍고 이런 것들이겠지요? 그래서 장장점점하며, 그러니까 항상 겉모양만 꾸미고 鬪鬪飣飣(투투정정)하야 투쟁만 일삼는 것이어요, 투쟁만 한다는 말이지요? 被人輕輕拶着(피인경경찰착)인댄 피인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인가 입다. 경경이라는 것은 가벼움을 입다. 그러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가볍게 보임을 입는다는 것이지요. 업신여김을 당한다는 얘기입니다. 입을 진대는 뭐와 같으냐하면, 未免喚燈籠(미면환등농)하야 作露柱(작노주)하리니 어리석어서 등불을 기둥이라고 하는 것을 면치못할 것이다 그랬어요. 미면환등농하야 작노두하리니 그랬어요. 그러니까 왜 등불을 기둥이라고 우기느냐하면, 옛날이 보면 법당 앞에 기둥이 죽 있지요? 기둥이 있는데 기둥이 등불을 하나씩 전부 달아놔요. 요즈음도 보면 절 기둥에 전기등불 다 달아 놨잖습니까? 그것이 못질하기가 쉽다던가, 튀어 나왔다던가, 문으로 들어간다던가, 아니면 길을 비추기 위해서 좋은 자리지요. 등불을 죽 달아놨으니까 등불 자체가 기둥이라고 우긴다 이 말이예요. 그런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기둥은 기둥이고 등은 등이지. 且道(차도)하라 일러라, 如何是實叅實悟底消息(여하시실참실오저소식)고 어떤 것이 실참실오의 소식이냐? 그러니까 참 깨달음 참 소식이냐 이 말이지요? 어떤 것이 참 깨달음이고 어떤 것이 참 수행이냐? 良久云(양구운) 한참 계시다가, 南山(남산)에 起雲(기운)하고 남쪽 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北山(북산)에 下雨(하우)로다. 북쪽 산에 비가 내리더라. 그런 얘기입니다. 그 다음에 示信翁居士洪上舍(시신옹거사홍상사) 其十一 홍신옹이지요? 상사(上舍)라는 것은 좀 존칭해서 쓴 얘기예요. 어른이 젊은 사람이나, 아이들에게 쓰는 말이 상사입니다. 大抵參禪(대저참선)은 不分緇素(불분치소)하고 대저 참선이라 함은 승속을 가리지 않고, 참선이라는 것은 승속을 가르지 않는 것이지요? 가리지 않고, 但只要一箇決定信字(단지요일개결정신자)니 다만 결정코 믿을신자가 중요한 것이니, 그런 얘기입니다. 단지 하나의 결정코 믿음만이 긴요히 여긴다 그런 얘기입니다. 若能直下信得及(약능직하신득급)하야 만약 당장에 믿어서 급제해서 간다면, 급제간다면, 믿어 간다면, 그런 예기입니다. 把得定 作得主(파득정 작득주)하고 선정의 주인이 되고, 작득주, 선정을 잡아 가지고, 선정의 주인이 된다 그런 말이예요. 不被五欲所撼(불피오욕소감)을 오욕 소감에 있지 않다. 그러니까 오욕이 물들다 그런 얘기지요. 물듦에 인해서 흔들리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如箇鐵橛子相似(여개철궐자상사)하면 흔들림없는 무쇠막대기 같다면 오욕에 물듦이 없어서 무쇠막대기 같다면 管取剋日成功(관취극일성공)호대 정해 놓은 기일 안에 성공하대, 不怕甕中走鼈(불파옹중주별)하리라 불파, 두렵지 않다. 옹기 가운데 있는 자라가 도망갈까 두렵지 않다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참선을 하는데, 참선을 한다는 것은 화두를 잡는 것이지요? 참선이라는 것은, 화두를 잘 잡고 정에 들었는데 이와같이 열심히 한다면 절대 옹기 속의 들어 있는 자라와 같아서 잃어 버릴 일 없다. 도망갈 일 없다.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豈不見(개불견)가 華嚴會上(화엄회상)에 善財童子(선재동자)가 歷 一百一十城(역 일백일십성)하야 , 어찌 보지 못했는가? 화엄회상에서, 화엄경의 선재동자가 53 선지식을 참방하러 나가지요? 그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화엄회상에서 선재동자가 111성을 지나서, 叅 五十三 善知識(참 오십삼 선지식)하야 53선지식을 참방해서, 獲 無上果(획 무상과)도 무상과를 얻은 것도, 亦不出者一箇信字(역불출자일개신자)며 이것도 하나의 믿음을 벗어난 것이 아니며, 모두다 53선지식을 찾아뵙는 것이 그 분들은 정말 훌륭할 것이다. 53선지식 가운데는 비구, 비구니,거사, 청신녀, 또 용녀, 심지어 몸 파는 여자, 그리고 마구니 대왕, 건달, 선비...등 아주 많아요. 죽 나옵니다. 法華會上(법화회상)에 八歲龍女 直往南方無垢世界(팔세용녀 직왕남방무구세계)하야 獻珠成佛(현주성불)도 여덟살된 용녀가 무구세계에 가서 부처님께 구슬을 드리고 성불한 것도, 亦不出者一箇信字(역불출자일개신자)며 또 하나의 신자를 벗어난 것이 아니며, 전부다 믿을신자를 벗어난 것이 아니다. 涅槃會上(열반회상)에 廣額屠兒 放下屠刀(광액도아 방하도도)하고 열반회상에서 이마가 넓은 도아라는 것은, 이마가 아주 넓었던가 봐요. 소 잡고 개 잡고 돼지 잡는 도살자지요? 도살하는 광액도아라는 사람이 도살하는 칼을 집어 던지고 唱言(창언) 소리 높여 말하기를, 我是千佛一數(아시천불일수)도 내가 천불 가운데 하나이다 이 말이지요. 그렇게 외친 것도, 亦不出者一箇信字(역불출자일개신자)며 또한 이것도 믿을신자를 벗어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좀 근거가 있는 얘기지요? 열반회상에서,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는데, 광액도아, 예나 지금이나,지금은 그래도 좀 나아졌지만 옛날에는 모든 나라들이 백정이라고 해서 아주 안좋아했지요? 천한 가운데 아주 천한 직업으로 쳤습니다. 이 사람이 부처님한테서 법문을 듣고자 하는데 너무 천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피합니다. 그리고 그를 멸시하고 그런데 부처님이 그도 나의 제자다 나의 법문을 들게 해라 그랬어요. 부처님 법문을 듣고 나서 외친 소리가 뭐냐하면 “천불 가운데 나도 하나다.” 그렇게 한 것이어요. 그러니까 대단한 지혜를 가진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昔有阿那律陀 因被佛訶(석유아나율타 인피불가)하야 아나율타가 옛날에 부처님의 꾸짖음을 얻어서, 아나율타가 왜 부처님의 꾸짖음을 얻었냐하면 아나율타가 공부를 게을리하고 잘 안하거든요. 놀기만하고, 그래서 꾸짖었어요. “그대는 어떻게 공부도 않고 허송 세월을 하느냐? 언제 성불하겠느냐? 언제 깨닫겠느냐?“라고 꾸짖은 것이어요. 그러니까 아나율타가 나무 아래서 여기서 절대로 잠자지 않고 놀지 않겠다. 깨닫기전에는 절대로 자지 않겠다. 그런데 졸리니까 눈이 자꾸 잠기거든요. 그러니까 보리수 나무 가지를 꺾어서 눈이 안감기도록 눈거풀을 벌려서 받쳤다고 했어요. 여러분들 그런 경험이 있는가 모릅니다. 옛날에 시골에서 자랄 때 삼이파리가 있는데 삼잎이 달리 줄기가 있는데 그것이 좀 호창호창하지요? 그것을 잘라서 눈이 받쳤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그랬던가 봐요. 七日不睡(칠일불수)에 그래서 7일 동안 그러니까 눈에 수분이 공급이 안돼서 실명이 됐다는 얘기예요. 失去雙目(실거쌍목)하고 두눈을 잃고서 大千世界(대천세계)를 如觀掌果(여관장과)도 삼천대천 세계를 손바닥 보듯 과를 얻은 것도, 亦不出者一箇信字(역불출자일개신자)며 이 하나의 믿을신자를 벗어난 것이 아니며, 그래서 아나율을 천안제일이라고 그러지요. 復有一小比丘 戱一老比丘(부유일소비구 희일노비구)하야 또한 젊은 비구가 노비구를 희롱하는데, 희롱하기 위해서 그 앞에 가서 그럽니다. 與證果位(여증과위)라하고 내가 너에게 과위를 하나 주리라, 과위 여러분들이 아시지요? 금강경에 보면 사다함과, 수다함과,아나함과, 아라함과가 있지요. 이것 4과입니다. 이 과를 하나 주리라 그러니까 이 노스님이 그렇습니까? 과 하나 주십시오 그랬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遂以皮毬(수이피구)로 가죽 공으로, 打頭四下(타두사하)에 머리를 4번 탕탕 쳤어요. 머리를 탕탕 맞으면, 노비구를 희롱하고 업신 여기는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아이구 스님이 나한테 과를 주시는구나 하는 그 믿음 하나로 卽獲四果(즉획사과)도 바로 사과를 얻었다 그 말이지요. 亦不出者一箇信字(역불출자일개신자)며, 일개의 믿을신자를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그런 얘기지요. 여러분들도 그런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그런 철저한 그런 믿음이 있어야 되는데, 스님 하신 말씀이 저것은 혹시 거짓말 아닐까? 부처님은 저 말씀 하셨는데 저 말이 참말일까? 내가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내가 깨달을 수 있을까? 이런 의심이 있으면 안되지요.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楊岐 叅 慈明和尙(양기 참 자명화상) 할새 양기 스님은 중국 스님이지요? 양기 스님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자명 스님을 참방할새 令充監事(영충감사)하야 그 절에서 감사라는 일을 봤다는 말이예요. 절에 보면 여러 가지 일이 있습니다. 지금 감사라고 하면 도감이라는 말과 비슷하고 총무라고 하는 말이 더 가까울거예요. 그러네 요즈음은 절에서 총무 재무 세속에서 쓰는 그런 이름을 그대로 쓰지요? 절에 전통적으로 쓰는 것이 또는 감사 또는 감원 또는 원주,이런 것들이 절에서 일보는 사람들의 직책입니다. 以至十載(이지십재)에 그렇게 해서 딱 10년에 이르렀는데, 打失鼻孔(타실비공)하고 식심을 잃어버리고, 그런 얘기예요. 식심을 잃어버리고, 道播天下(도파천하)도 도를 천하에 전파함도, 그러니까 10년 동안 스님을 모시고 살면서 식심을 잃어버리고, 내가 이 스님을 모신지가 10년이 지났는데 내가 공부를 했네 안했네 이런 생각을 하고 좋을까 안좋을까 이 절에서 내가 오래 살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이런 계산을 주판 놓으면 안되지요? 그렇게 살면서 천하에 도를 전파하는 것도 亦不出者一箇信字(역불출자일개신자)라 또한 믿음 하나에 믿음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그랬어요. 포교를 한다는 것, 이런 것들도 모두가 이 믿을신자가 하나 있어야 돼요. 반드시 나는 부처님 말씀 전하는 일을 최선을 다한다. 나는 부처님 말씀을 전하면 최선을 다하겠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포교를 하는 것입니다. 자 다음 구절 볼까요? 暝從上若佛若祖 超登彼岸(명종상약불약조 초등피안)하사 예로부터 조사스님들이 초등피안하사,피안에 올라서 그런 얘기입니다. 轉 大法輪(전 대법륜)하야 대법륜을 빌려서, 대법륜이라는 것은 부처님 법을 전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을 전해서, 接物利生(접물이생)이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는 것이, 莫不皆由此一箇信字中流出(막불개유차일개신자중류출)이니 모두다 하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흘러나옴이 없지 않음이라니 故(고)로 云(운) 그런 까닭으로 이르기를, 信是道元功德母(신시도원공덕모)며 믿을신자이라는 것은 도의 으뜸이 되는 공덕이 된다 그런 말이지요. 信是無上佛菩提(신시무상불보리)며 이 믿을신자는 이것이 무상불보리예요. 무상과를 깨닫는 도리라는 말이지요. 信能永斷煩惱本(신능영단번뇌본)이며 이 믿을신자는 영원히 번뇌를 끊어버리는 근본이 되며 信能速證解脫門(신능속증해탈문)이라하시니 이 믿을신자는 능히 속히 해탈하는 문이라 하시니, 昔有善星比丘 侍佛(석유선성비구 시불)할새 옛날에 선성비구가 있는데, 선성비구는 부처님 사촌 동생이라고도 하지요? 라훌라라고도 하고 그러는데 사촌 동생이 맞을 것이어요. 선성비구가 부처님을 시봉할 때, 二十年(이십년)을 不離左右(불리좌우)호대 20년 동안 부처님 주변에서 떠나지 않아요. 항상 부처님 모시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盖謂無此一箇信字(개위무차일개신자)하야 대개는 20년 했지만 하나의 믿을신자가 없었기 때문에, 믿을 신자가 있어야 되는데, 뭐 믿은 것이 없었어요. 不成聖道(불성성도)하고 성도를 이루지 못하고, 生陷泥犁(생함니리)하니라. 생함아비지옥에 빠졌다. 이 말입니다. 무간지옥에 떨어졌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사촌 동생이라고 하더라도 허송세월을 하면 어디가요? 지옥에 떨어진다 그런 말이지요. 우리 이 법문을 듣는 여러분들도 만약 이 법문을 우습게 알고, 부처님 불법을 배웠는데, 지옥에 떨어지겠는가?그런 생각을 갖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선법을 배우고 고봉스님의 법문을 들었기 때문에 반드시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하시면 좋은 경험이 될 뿐만 아니라 좋은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내일 저녁은 휴강을 해야 되겠습니다. 모레 목요일에는 강의하고, 내일은 제가 해인사에 좀 갈일이 있어요. 해인사에는 60년대에 같이 공부하던 스님들의 모임이 있는데 해인사에서 모임이 있습니다. 저 지난번에도 모임이 있었는데 이 강의한다고 못갔는데, 내일은 할 수 없이 좀 빠져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부산 벡스코에서 부처님 사리, 불지 사리라고 그러지요? 이 불지 사리는 기원전 240여년전, 아쇼카 대왕이 불지사리를 동방나라 중국 땅에 모셨으면해서 18 스님들이 불지 사리를 모시고 중국에 왔으나 진나라의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할 때입니다. 중국에 들어 왔으나 세상이 너무 시끄럽고 전쟁이 흉횡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을 그 후 수백년이 지나서 땅에 묻어 었던 불지 사리가 방광을 하게 되고 그곳을 파서 부처님 사리를 발견을 하고 황제가 그 사리를 모시게 됐다고 그러지요? 그런 것이 죽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발견한지가 얼마 안됐어요.80년대초지요? 그 부처님 사리가 우리 나라에 오고 서울에서도 전시를 했지요? 그래서 부산에 벡스코에서 전시를 하는데 내일은 제가 오후 2시에 법문을 하는 날입니다. 시간을 꼭 내셔서, 멀리 계신 분들이 할 수 없겠지만, 오셔서 꼭 친견하시면 좋겠습니다. 중국에 가서 친견하자면 물론 여행하는 기쁨도 있겠지만 경비가 엄청 많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부산 여기까지 사리가 오셨으니까 이럴 때 친견하는 것은 참으로 공덕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좋은 인연이 있기를 바랍니다. 부처님과 좋은, 그야말로 좋은 큰 복덕의 인연이 있기를 바랍니다. 장산 합장. [28] 오늘은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示信翁居士洪上舍 其十一 (2) 신옹거사 에게 신옹거사라고 하는 것은 홍신옹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보통 ‘上舍’라고 ‘윗상’. ‘집사’자 를 쓰는데 상사라고 하는 것은 당신보다 아래인 사람에게 경칭으로 쓰는 말입니다. 今日新翁居士(금일신옹거사)는 雖處富貴之中(수처부귀지중)이나 오늘 신옹거사는 비록 부귀한 가운데도 있으나, 그러지요 能具如是決定之信(능구여신결정지신)이라 능히 결정적인 믿음을 갖추었다. 그랬어요. 昨於壬午歲(작어임오세)에 登山求見(등산구견)이라가 不納而回(불납이회)하고 지난 임오년에 산에 올라갔다가 나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서 又於次年冬(우어차년동)에 다음해 겨울에 拉直翁居士同訪(납직옹거사동방)하야 직옹거사와 함께 방문해서, 신옹거사가 직옹거사와 함께 왔다는 이야기이지요. 始得入門(시득입문)이러니 비로소 문안에 들어올 수 있었으니, 今又越一載(금우월일재)에 이제 또 한 해를 넘겨 齎糧裹糝(재량과삼)하고 식량을 가지고, 식량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에 스님들이 절에 가서 수행 할 때는 우리 나라에서도 자기 식량을 가지고 들어 갔어요. 중국에서도 식량이 귀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特來相從(특례상종)하야 특별히 찾아와서 , 乞受毗尼(걸수비니)하며 계를 받고, ‘毗尼’는 제가 지난번에 계율이라고 그랬었지요. 계율을 걸수 받기를 원하므로 그런 이야기이지요. 계율을 그러면 왜 乞(빌걸자)를 쓰느냐하면 계율이란 빈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계율을 비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계율을 받을 때 계사한테
걸수비니 라 하는 것은 계를 빌세. 願爲弟子(원위제자)할새 제자 되기를 원함 일새, 故以連日詰其端由(고이연일힐기단유)호니 짐짓 여러날 동안 그 일을 따져 물으니 그런고로 몇일 동안 그에게 그런 일을 따져 물으니 "왜 내 제자가 되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었단 말이지요. 힐문한다고. 그러지요. 그 단서와 이유를 물으니, 的有篤信趣道之志(적유독신취도지지)라. 的자는 확실히 그런 이야기이지요. 돈독한 신심과 도에 나갈 뜻이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래요 절에 스님 되러 오는 사람이라든가 , 이런 사람들에게 스님들이 그러지요 제가 중이 되러 왔습니다. 그러면 왜 스님이 되려고 하느냐?
維摩經(유마경)에 云(운)호대 유마경에 이르데 高原陸地(고원육지)에 不生蓮華(불생연화)하고 유마경에 이르기를 고원에서는 ‘고원’이란 높은 지대이지요. 높은 지대는 연꽃이 피어나지 아니하고, 卑濕汚泥(비습오니)에 乃生此華(내생차화)라하니 비습하고 낮고 습하고 汚泥 그리고 진흙땅에서 이 꽃이 피어난다 하니, 연꽃이 피어난다하니. 正謂此也(정위차야)로다 바로 이런 것을 바램이로다. 山僧(산승)이 산승이라고 하는 것은 당신 스스로를 말하는 것이지요. 고봉스님, 내가, 由是憮之(유시무지)하야 산승이 이로 말미암아서, 그런 이야기이지요. 將箇省力易修曾驗底話頭(장개성력역수증험저화두)하야 장차 일찍이 경험에 보았던 그런 얘기지요. 일찍이 경험에 보았던 화두, 兩手分付萬法歸一一歸何處(양수분부만법귀일일귀하처)하노니 두 손으로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를 분부하노니 그러니까 이 스님이 이젠 신옹에게 계를 주고
決能便恁麽信去(결능변임마신거)하며 결정코 능히 그렇게 믿어 공부해 가며 그렇게 공부해 갈 것이니라. 便恁麽疑去(변임마의거)어다 또 그렇게 믿어서 또 그렇게 공부해갈지어다. 결정코 믿음 하나로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에 대한 공부를 해가라. 그런 말씀이지요. 다음 구절 볼까요? 須知疑(수지의)는 以信爲體(이신위체)하고 모름지기 알라. 의심이라고하는 것은 믿음으로 체(體)를 삼고 믿음으로 체를 삼는다는 이야기이지요. 믿음이 없으면 안됩니다. 悟(오)는 ‘悟’ 라는 것은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以疑爲用(이의위용)이니 의심으로 용을 삶는다. ‘체’라고 하는 것은 몸 둥아리를 용 이라하는 것은 우리팔과 발 같은것이지요. 팔과발은 몸에 붙어서 마음대로 사용하지요. 몸이 없으면 팔도 있을 수 없고 발도 있을 수가 없지요. 몸이 있으나 팔과 다리가 없으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마치 ‘용’과 같다. (用)쓴다 쓸용이지요. 信有十分(신유십분)이면 疑得十分(의득십분)하고 疑得十分(의득십분)이면 悟得十分(오득십문)이라 믿음이 전체면 의심도 전체며 의심이 전체면 깨달음이 전체이니라. 믿음이 전체면 십분이라는것은 전체를 이야기하는것입니다. 십분지일이라하면 십분의하나고 십분이라는것은 전체를 말하는거지요. 믿음이 전체면 의도십분하고 의도전체고 의덕이 전체면 의덕이 전체고 의심이 또한 전체면 ‘오’도 십분이라. 깨달은 사람도 전체다. 그랬어요. 譬如水漲船高(비여수창선고)하고 비유컨대 물이 불으면 배가 높이 뜨고, 泥多佛大(니다불대)니라 진흙이 많으면 불상이 커지는 것과 같으니라. 우리나라에는 진흙 부처님이 흙으로 빚은 부처님이 많지 않지요. 중국에는 많습니다. 우리나라 흙으로 빚은 부처님 가운데 금산사 미륵대불이 제일 큽니다. 전부 진흙으로 부처님을 조성 했거든요. 西天此土(서천차토)에 서천은 인도를 말하는 것이죠. 서역과 이 땅에, 古今知識(고금지식)이 고금에 선지식이, 發揚此段光明(발양차단광명)호대 이 광명을 드날리되 이러한 광명을 드날린다. 莫不只是一箇決疑而已(막불지시일개결의이기)라 이 하나의 의심을 해결한 것 뿐이다. 또한 ‘광명’ 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깨닫는다는 것이 뭐냐? 모두 알고 보면 의심하나 해결하는 것이다. “이뭣고” “만법귀일 일귀하처‘ ’ 만가지 진리라 하는 것은 모두 전체, 다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러면 하나는 무엇으로 돌아가느냐? 어디로 돌아가느냐?. 그런 이야기이지요. 千疑萬疑 只是一疑(천의만의 지시일의)니 천가지 만가지 의심이 단지 이 하나의 의심일 뿐이니. 決此疑者(결차의자)는 이러한 의심을 해결하는 것은 更無餘疑(갱무여의)니라. 다른 의심이 없다. 오직 이 의심 하나로 의심을 해결하는 것이지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큰 의심을 가져야 큰 깨달음을 성취한다.
다음 구절을 볼까요 旣無餘疑(기무여의)인댄 이미 다른 의심이 없어진다면 卽與釋迦彌勒(즉여석가미륵)과 淨名龐老(정명방노)로 不增不減(부증불감)하며 이미 석가모니이나, 미륵부처님이나, 정명은 유마거사 이지요.방노라는 것은 방거사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유마거사와 방거사로 부증불감하며 그들로부터 더하지 않고 덜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하나의 의심으로써 깨달으면 석가모니부처님도, 미륵부처님도, 유마거사도, 방거사도,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와 같이 깨닫는다. 이 말이지요. 無二無別(무이무별) 하야 둘이 특별히 다르지 않아서, 同一眼見(동일안견)이며 한눈으로 똑같이 보는 것과 같으며, 同一耳聞(동일이문)이며 한가지로 또 들으며, 同一受用(동일수용)이며 또 한가지로 다 수용하며 同一出沒(동이출몰)하야 또 한가지로 태어나고 죽고하며 天堂地獄(천당지옥)에 任意逍遙(임의소요)하고 천당과 지옥도 자유자재로 다니며, 虎穴魔宮(호혈마궁)에 縱橫無礙(종횡무애)하야 호랑이 굴이나 마구니 궁전도 縱橫無礙 종횡으로 다녀도 걸림이 하나도 없어요. 깨달으면 마치 이와 같이 된다는 것이지요. 騰騰任運(등등임운)하며 任運騰騰(임운등등)하라니 자유스럽고 자유스러우며 또 자유스럽고 자유스럽나니. ‘임운등등’ ‘등등임운’ 같은 소리인데 ‘임운하다.’ 하는 것은 마음대로하며, 등등은 등등하다 살기 등등하다 할 때
등등해서 마음대로 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故(고)로 涅槃經(열반경)에 열반경에 이르기를, 云生滅(운생멸)이 滅己(멸기)하면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것이 다 멸해서 마치면, 寂滅(적멸)이 爲樂(위락)이라 하시니라. 적멸이 낙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태어나는 것이 참으로 좋은 것이고 또 죽는 것은 싫은 것이고 이런 이분법을 갖고 있는데 즉 깨닫고 나면 생멸이 멸이해서 적멸위락이라 전혀 그런데 구애 받지 않고 적멸됨이 낙이 된다, 그런 말씀이지요. 須知此樂(수지차락)은 모름지기 알라. 이 즐거움이 非妄念遷注情識之樂(비망념천주정식지락)이라 낙이 아님을 알 것이니라. 깨달음이라는 것은 망념, 천주,여기에 가서 살고, 저기에 가서 살고, 이 생각 저 생각, 또 이 음악 듣고 저 음악 듣고,이렇게 좋아하고 저렇게 좋아하고, 그런 것들이 아니다. 그 말이지요. 망념천주정식’이 즐거움이 아니니, 乃是眞淨無爲之樂耳(내시진정무위지락이)니라 진실로 참되고 깨끗한 무위낙이 될 것을 알 것이니라. 참되고 무위낙이 참으로 참됨을 알아야 하는것이지요. 이러한 즐거움으로 정말 즐거움을 사야된다. 망념이 정과식이 아니다 이 말이지요. 다음 구절을 보겠습니다. 夫子 云 夕死可矣(부자 운 석사가의)라하시고 증거가 있는 이야기 이지요 ‘조문도 석사의’ 아침에 도를 듣고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 그러니까 도라고 하는 것은,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먹고 사는데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것을 뭣에 쓰느냐 하지만
정말 진정한 참도는 정말로 우리들이 ‘참도’로 나간다면 거짓도 없고 항상 참되서, 명주알 같아서 세상사를 또렷이 볼 수 있는 그러한 세계가 열리는 겁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데, 아침에 도를 묻고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 하시고 顔回(안회)는 不改其樂(불개기악)하고 ‘기락’이 아니라 여기서는 ‘기악’입니다. 악기 할 때 ‘악’ ‘顔回’ 라고 하는 사람이 공자의 제자인데 우리나라 거문고와 같은 악기가 있나봐요. 그 악기를 즐겨 탔다고 했어요. 그것을 바꾸지 못하고 그것 타기를 버리지 않았다는 말이죠. 曾點(증점)은 舞詠而歸(무영이귀)하니 ‘曾點’도 제자 이지요 ‘증점’ 이라고 하는 사람도 춤추며 노래 부르고 돌아오니 咸佩此無生眞空之樂也矣(함패차무생진공지낙야의)니라 이는 모두 남이 없는 무위이지요. ‘무생’이라는 것은 무생이나 ‘무위’나 같은 소리이지요. 남이 없는 ‘참빔’ 의 ‘진공’ 진공이 낙이다. 진공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는 것. 그기에는 어떤 번뇌도 없고, 또 어떤 진해도 없고, 참으로 텅 비어서 고요적적한 세계 그런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苟或不疑不信(구혹불의불신)인댄 진실로 혹시라도 ‘불의불신’ 화두를 의심하지 않고 믿지 않을 진댄 饒你坐到彌勤下生(요니죄도미륵하생)이라도 그대가 미륵부처님이 하생할 때까지 앉는다 할지라도 앉아서 참선한다는 말이지요. 也只做得箇依草附木之精靈(야지주득개의초부목지정령)이며 그렇게 앉는다 할지라도 다만 공백한다. 하더라도 초목의 정령(精靈)되어 혼만 겨우 살아 있는 죽은 놈이리라. 혼만 겨우 살아 있으며, 魂不散底死漢(혼불산저사한)이리라. 죽은 놈이라 이말이지요. 敎中(교중)에 가르침 가운데 , 言二乘小果 雖入八萬劫大定(언이승소과 수입팔만겁대정)이나 말 가운데 이승소과는 적은 과를 얻거나, 과라는 것은 적은 깨달음이지요. 그리고 ‘승’ 이라하는 것은 삼승이 있는데 (보살. 연각. 성문) 보살승을 빼고 연각. 성문을 이승이라고 그러지요. 이승과 조금 깨달은 사람이라고 하면 팔만사천겁동안 정에 들었다고 하더라도 不信此事(불신차사)할새 이를 믿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去聖愈遠(거승유원)하야 성인이 가심이 오래 되어서 성인과 더욱 멀어져서 그런 이야기이지요. 常被佛訶(상피불가)라하시니 항상 부처님의 꾸지람을 듣는다 했으니 直欲發大信 起大疑(직욕발대신 기대의)하야 疑來疑去(의래의거)에 바로 큰 믿음과 큰 의심을 일으켜서 의심해가고 의심해 옴에, 一念萬年(일념만년)이며 萬年一念(만년일념)이라 의심하는 것만큼 의심해 가고 의심해 가는 만큼 깨닫는다 했으니 그런 의심으로만 오직 한 생각이 만년까지 가며 그 만년이 곧 일념이 되도록 하여야 된다. 그런 이야기이지요. 좋은 이야기이지요. “일념만년 만년일념” “일념만년 거”제가 “去”자를 많이 쓰고 좌우명으로 삼아서 글을 적어서 많은
‘한 생각이 만년동안 가도록 해라’ 좋은 말이니까 여러분께서 이런 말은 잊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음 구절을 보겠습니다. 的的要見 者一法子落着(저적요견 자일법자락착)인댄 ‘적적’이란 분명하고 분명한 ‘요견’이란 분명하고 분명히 봐서 일법을 볼진댄 如與人(여여인)으로 또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結了生死冤讎相似(결료생사원수상사)하야 마치 생사를 결단낼 원수처럼해서 그러니까 분명하고 분명한 것은 이 한법을 깨달을려고 한다면‘낙철’을 볼려고 한다면, 죽기를 사생결단하고 이와 같이 해야 되는것이지요. 원수처럼해서 의분을 갖고 공부하라는 이야기입니다. 心憤憤地 卽欲便與一刀兩段(심분분지 직욕변여일도양단)하야 마음이 분하고 분개해서 바로 일도양단 하고자하여 내가 왜 자꾸 망념에 끌려 다니는가? 절대로 망념에 끌려 다니지 않고 오직 한 생각으로 깨달아야겠다. 그런 이생각만 가져야지요. 그래서!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縱於造次顚沛之際(종어조차전패지제)라도 어떠한 경우라도 공부를 잡고 늘어져서, 皆是猛利着鞭之時節(개시맹리착변지시절)이니라 모든 것이 맹렬하고 치열하게해서 공부할 시절이 되어야 된다. 그러니까 항상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맹렬히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지요. 철저하게 그렇게 공부해야되는데 그런 공부를 않고 그냥 아무렇게나 뭐가 될려면 되겠지 그렇게 하면 안되겠지요. 박사가 되든 뭘하든 이렇게 공부를 해서 다 그렇게 되는것입니다. 若到不疑自疑(약도불의자의)하야 만약 의심하지도 않고 의심이 저절로 되어서, 寤寐無失(오매무실)하며 자나 깨나 잃지 않고, 有眼如盲(유안여맹)하고 눈뜨고 있으나 소견 같아서, 有耳如聾(유이여농)하야 또 귀가 있으나 귀머거리 같아요. 눈뜨고 있으나 소견 같고, 귀를 갖고 있으나 귀머거리 같고, 마치 어리석은 듯해서 늘 寤寐無失하게 그렇게 의심해가야 된다. 이런 말이지요. 또 不墮見聞窠臼(불타견문과구)니라. 절대로 함정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그랬어요. 함정에 떨어지지 말아야 되는니라 그런 말이지요. 함정에 떨어지면 어떤 함정에 떨어지면 결국 그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겠지요. 어떤 함정에도 떨어지지 말고,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한다고해서 솔깃해서 쫓아가고 어디가면 공부잘한다고 해서 쫓아가고 어느 절이 좋다 해서 쫓아가고, 어느절이 공양이 좋다고 하면 쫓아가고 그러면 안되겠지요. 猶是能所未忘(유시능소미망)하며 偸心未息이니 오히려 이것은 능소가 잊혀지지 않아서 ‘능소’라 하는 것을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능’과 ‘소’가 있는데 ‘능’은 능히 하는자. ‘소’는 받는자 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예를 들면 내가 부처님께 절을 한다면 절을 하는 사람은 능히 하는자, 소는 받는자 이지요. 부처님이지요. 주관과 객관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능소가 잊혀지지 않아서, 偸心未息(투심미식)이니 훔치려는 마음을 쉬지 못했음이니, 切宜精進中(절의정진중)에 간절히 정진하는 가운데, 倍加精進(배가정진)하야 더욱 배가 정진해 가지고, 直敎行不知行(직교행부지행)하고 다녀도 다니는 줄 모르고, 坐不知坐(좌부지좌)하며 앉아있어도 앉아 있는 줄 모르고, 東西不辨(동서불변)하고 동서도 판단하지 못하고, 南北不分(남불불분)하야 남북도 가리지 못해서, 不見有一法可當情(불견유일법가당정)니라. 한 법도 앉아서 한 법도 가히 정식에 떨어질 만한 것은 보지 말아야 된다. ‘정식’이라고 하는 것은 머릿속으로 헤아리고, 의선이라고 하지요> 뭐를 헤아려서 판단할려고 하는 그런데 떨어지지 말아야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떨어지면 결국 깨달음에 못 이르게 됩니다. 如箇無孔鐵鎚相似(여개무공철추상사)하야 마치 구멍없는 쇠망치와 같아서, 能疑所疑(능의소의)와 의심하는 자와 의심이 되는 것 화두죠, 의심이 되는 것 ‘화두’ 의심하는 자는 ‘나’ 나와 화두가 能疑는 나고 所疑는 화두죠. 內心外境(내심외경)이 안 마음이나 바깥 경계에, 雙忘雙泯(쌍망쌍민)하야 모두 다 잊어버린다. ‘쌍망’이나 ‘쌍민’이나 다 같은 말이죠. 둘다 잊어버려서 無無亦無(무무역무)니 모두 잊어서 잊을것 조차 없다는것 조차 없어진 자리니. 없어진 것조차 없다는 것 조차 없다는 말이지요. 到者裏(도자리)하야는 여기에 이르러서는, 擧足下足處(거족하족처)에 발을 들어서 도달하는 곳에, 切忌踏翻大海(절기답번대해)하며 대해를 밟아서 비친다는 것을 꺼려하며, 踢倒須彌(척도수미)하고 수미산을 차서 넘겨버리고, 折旋俯仰時(절선부앙시)에 어떤 경계에 딱 부딪혔을 때, 照顧(조고)하여 딱 돌아다 봐서, 觸瞎 達磨眼睛(촉할 달만안정)하고 달마의 눈을 딱 찔러서 멀게 하고, 磕破 釋迦鼻孔(개파석가비공)이니라 석가의 콧구멍을 깨뜨려야 할 것이니라 그랬어요. 석가모니부처님의 콧구멍을 깨뜨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부처님이 깨달은 그 자리를 내가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다음 구절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其或未然(기혹미연)인댄 혹 그렇지 않을 진댄 更與添箇注脚(변여점개주각)호리다 문득 더불어서 다시 주를 첨가하리로다. 주를 하나 더 단다 이말이지요. 僧問趙州和尙(승문조주화상)호대 어떤 스님이 조주 화상에게 묻데 萬法歸一(반법일귀)이어니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거니 一歸何處(일귀하처)닛고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趙州云(조주운) 조주스님이 답하길 我在靑州(아재청주)하야 作 一領布衫(작일령포삼)호니 내가 청주에 있을때 장삼을 하나 지어니, 重(중)이 七斤(칠근)이라하니 무게가 일곱근 이드라. 조주스님의 답입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 물으니 내가 청주에 있을 때 삼베로 장삼을 지었는데 그 장삼을 달아보니 일곱근이더라. 이것이 답입니다. 이것이 무슨 소리냐구요. 여러분들이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師云 (사운) 스승이 말씀하시길, 大小趙州(대소조주)여 조주 큰스님이시여! 조주시여! 약간 비아양하는 소리이지요. 拖泥帶水(타니대수)로다 물에 빠졌습니다. 조주 큰스님이시여 물속에 빠졌습니다. 그런 이야기이지요. 非特 不能爲者僧(비특 불능위자승)하야 특별히 그 중의 의정을 끊어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斬斷疑情(참단의정)이라 다 끊어주지만 못했을 뿐만 아니라, 亦乃賺磕天下衲僧(내역잠개천하납승)하야 또한 천하의 납승들을 모두 속여서, 死在葛藤窠裡(사재갈등과리)로다 모두다 갈등을 일으켜서 사지로 들어가게 했음이로다. 이것이 뭐야하면 ‘잘 못 대답했다’. 고봉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西峰則不然(서봉즉불연)하야 나는 그렇지 않아서, 今日(금일)에 오늘에 忽有人(홀유인)이 問 萬法歸一(문 만법귀일)이어니와 一歸何處(일귀하처)오하면 혹 어떤 중이 와서 내게 묻기를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하고 묻는다면 只向他道(지향타도)호대 그를 향해서 내가 이르데 ‘도’자는 말한다는 뜻이지요. 도를 말하는데 狗舐熱油鐺(구지열유당)이라호리니 개가 펄펄 끊는 기름 가마를 혓바닥으로 핥는다고 말할 것이다. 펄펄 끊는 기름 가마를 개가 못 핥겠지요. 뜨거워서 이것도 여러분이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무슨 소리인지? 信翁信翁(신오신옹)아 신옹 신옹이여 若向者裡(약향자리)하야 이 가운데 향해서는. 擔荷得去(담하득거)인댄 이 자리에서 의심을 챙길 수만 있다면 의심을 챙겨서 공부해 갈 수 있다면, ‘去’공부해 갈수 있다면 ‘擔’은 의심을 지고 간다는 이야기이지요. 의심을 지고 공부해 갈 수 있다면, 只者一箇信字(지자일개신자)도 단지 이 믿음 하나라도 , 也是眼中着屑(야시안중착설)이니라 또한 눈 속의 티끌이 되리라 그랬습니다. 눈속에 티끌 되는 것 이것조차도 의심을 갖는다는 것도, 다 눈 속에 티끌이 될 뿐이다 .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29]
또 꼭 불자라고서가 아니겠지만 황우석 박사님의 그 사태, 어느 것이 요사이 진실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한국과학이 어떤 면에 봐서는 상당히 많이 진척되어 있다. 모든 면에서 많이 발전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뉴스에 두 가지 집중 되는 것이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하나는 황우석 박사님의 논문진의 여부, 또 하나는 한국 농민이 1400명이나 홍콩 가서 너무 과격하게 해가지고 경찰에 모두 연행되어 가 있는 것. 이 두 가지인데 이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가 하면 한국 사람들은 상당히 성격이 좀 과격한 것 같아요. 어떤 사안을 신중히 생각하거나 상대방을 배려하는 생각이 전연 없다 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설사 내가 옳고 저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저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진의여부를 따져보기 전에 너무 그것을 몰아 붙인다든가 그것을 세상에 알려서 이 세상이 그야말로 온통 말들 하지요. 벌집 쑤셔 놓은 것 같다고. 지금 우리나라가 그런 형국입니다. 해마다 보면 12월이 되면 말이지요. 꼭 무슨 일이 일어나요. 한번 고사라도 지내야 될 것 같습니다. 자 본문 보겠습니다. 示 衆 其十二 법 어 12 兄弟家 十年二十年(형제가 십년이십년)으로 以至一生(이제일생)히 絶世忘緣(절세망연)하고 單明 此事(단명차사)호대 不透脫者(부투탈자)는 病在於何(병재어하)오. 형제들이여 십년 이십년 평생에 이르도록 세상과 인연을 끊고 오직 이일을 밝히되 밝혀내지 못한 것은 병이 어디 있는가? 그렇게 묻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십년 이십년 동안 참선을 했다면 깨달음이 있어야 되요. 분명 부처님이 6년 고행 수행해서 깨달으시고 고봉화상도 3년을 결사하시고 깨달음 바가 있다고 그랬어요. 적어도 3년 내지 6년, 10년, 동안을 하면 무엇인가는 얻은 바가 있어야 된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그러지요. 아마 정말 천치 바보가 아니고서야 십년동안 노력해서 안되는 것은 그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라는 격려이지요. 병이 어디 있으며, 本分衲僧(본분납승)은 試拈出看(시념출간)하라. 본분납승은 공부하는 자는 한번 내놔봐라 그랬지요. 본분을 아는 스님이라면 시험 삼아 한번 점검하고 내어 보아라. 내놔봐라 이런 말이지요. 莫是宿無靈骨麽아 (마시숙무령골마)아 숙세에 본분을 닦은 업이 없었느냐. 이 말이지요. 숙세는 과거이지요. 과거 전생에 네가 닦은 그 어떤 공부가 없었느냐. 불교는 윤회사상을 절대로 믿는 종교이기 때문에 과거에 닦은 바가 있어야 금생에도 그 만큼 닦아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지요. 자꾸 스님들한테 와서 ‘스님 저희 집안이 어떻겠어요. 제가 어떻게 되겠어요.’ 이런 것을 묻는데 사실은 답이 나와 있는 것이지요. 물어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살아온 것을 보면 과거 전생의 어떤 일을 했는가 알 수 있고, 내가 오늘날 살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 내일 즉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점쳐야 되지요. 그것을 남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지요. 답이 다 나와 있습니다. 즉 오늘의 현실 자신을 보면 과거도 보이고 미래도 보인다는 이야기이지요. 莫是不遇明師麽아(막시불우명사마)아 눈 밝은 스승을 만나지 못했는가? 그런 말이지요. 莫是一曝十寒麽(막시일폭십한마)아 또한 하루를 공부하고 열흘을 놀지를 안했는가? 여기 재미있는 말이 있지요. ‘一曝十寒’ 일폭은 하루 막, 그냥 ‘폭’자는 ‘쬐일폭’자인데 하루 햇빛을 쭉 쬐고서 열흘 동안 춥다. 이 말이 뭐냐 하면 하루 동안 공부하고 열흘 동안은 놀지 안했느냐. 이 말이지요. 莫是根劣志微微(막시근렬지미미)아 근기가 열등하고 미미하지는 안했는지를, 근기가 열등하다 하는 것은 근기가 열등한 사람은 스스로 알아야 되요. 내가 다짐했던 일들을 번번이 무르는 사람, 이 사람은 근기가 열등한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자꾸 한수 무르자고 하는 사람은, 프로들은 무르자고 하지 않지요.설사 실수를 했다해도 무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세상에는 실수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실수 하지요. 실수 안하면 성공하는데 즉 실수하기 때문에 가다가 자꾸 넘어지기 때문에 성공을 못하는 것이지요. 그런 이야기입니다. ‘열등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나하고 약속한 것을 저버리지 말라’ 그런 이야기이지요. ‘부처님께 약속한 것은 저버리지 말라.’ 인도에 가면 세 가지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그런 신을 믿는 힌두교, 힌두교 사상에 그런 것이 있답니다. 세 가지는 믿지 않아도 된다. 즉 지키지 않아도 된다. 첫째는 신하고 약속한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 둘째 장사하기 위해서 한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 셋째 결혼하기 위해서 거짓말 한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그렇게 따지고 보니까 모두가 지키지 않아도 될 일 뿐이지요. 모두가 정말로 정직하게 다 지키게 될 일인데 더구나 부처님하고 약속한 것은 안 지키면 안되겠지요. 莫是汨沒塵勞麽 (막시골몰진노마)아 하루 종일 번뇌 망상에 빠져있지는 안했는가? 莫是沈空滯寂麽 (막시심공체적마)아 하루종일 공적한 곳에 빠져있지는 않았는가? 莫是雜毒入心麽(막시잡독입심마)아 쓸데없이 잡된 삼독심에 빠져있지는 안했는가? 莫是時節未至麽(막시시절미지마)아 아직 시절 인연이 도래하지 안했는가? 莫是不疑言句麽 (막시불의언구마)아 화두를 열심히 점검하지 안했는가? 화두를 열심히 들지 안했는가? 그런 말이지요. 莫是未得謂得(막시미득위득)하며 얻지 못하고 얻었다하고 未證謂證麽아 (미증위증마)아 증득하지 못하고 증득했다 하지는 안했는가? 그런데 여기 지금 묻는 것이 말이지요. 정말 중요한 문제들입니다. 선승들한테는, 가끔 보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깨달은 척하고, 이것보다 더 죄악은 없습니다. 부처님이 그랬어요. 설사 외도나 무식한 사람이나 이 법을 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괜찮다. 부처님 말씀이 진리겠지요. 그런 사람은 제도가 된다는 말이지요. 부처님 진리를 알아듣고 이해하면, 그러나 부처님 진리를 속이는 자, 깨닫지 않고 깨달았다 하는 자, 그자는 영원히 구제 못한다. 그랬어요. 부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깨달은 척하는 것만큼 죄악이 없다는 것이지요. 若論膏肓之疾인댄(약논고황 지질)인댄 고황병이라는것 아실것입니다. 아마 고황병은 잘 고쳐지지 않는 병이지요. 만약 불치병을 논할진댄 고황병이 불치병이지요. 낫지 않으니까. 摠不在者裡(총부재자리)니라 어디에도 부재하다, 어디에도 있지 아니함이라 불황고황을 이 고질병을 이야기하자면 어디에도 있지 않다. 그럼 어디에 있느냐. 旣不在者裏(기부재자리)인댄 이미 있지 않을 진대는, 畢竟在甚麽處오 (필경재심처)오 咄 (돌)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병이 있었느냐 지금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이 말이지요. 그렇게 ‘돌’하시고 三條椽下(삼조연하)와 七尺單前(칠척단전)이로다. 세 개의 서까래 밑 일곱 자 방석 앞이니라. 그랬어요. 무슨 말씀인지 아세요 잘 음미 해 보세요. 세 개의 서까래 밑 일곱 자 방석 앞이니라. 내가 누우면 겨우 일곱자요. 또 앉으면 두자밖에 안되는 그 자리 즉 내 자리를 살펴라. 자기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를 살피면 바로 그 자리가 그 자리다. 아시겠지요? 여러분들께서 이런 조사스님 하신 말씀을 읽어보고, 또 읽어 보고 읽어 보고, 이해가 될 때까지 읽어봐야 됩니다. 의심하면 끝까지 의심해야 되요. 깨달아질 때까지, 다음 구절 보겠습니다. 若論此事(약논차사)인댄 만약 이일을 논 할 진대는 如登一座高山相似(여등일좌고산상사)하니 마치 높은 산에 올라 앉아있는 듯하니 높은 산에 올라가 앉아 있으면 어떻습니까? 좀 상그럽지요? 三面(삼면)은 平易(평이)하야 頃刻可上(경각가상)이라 삼면은 평이해요 삼면은 평이한데, 잠깐 동안 오을 수 있음이라. 높은 고산에 가서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냐하면 높은 산꼭대기 가서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 못 올라 앉지요. 우리 나라에는 그 히말라야 올라가는 사람이 많지요. 여러분들이 계셨는데 그 히말라야 올라가서 그 곳에 30분 있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30분도 못 있어요. 30분 어디 있습니까. 겨우 해봐야 사진 찍고 바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3분 5분 , 아무리 있어 봐도 10분 이상 못 있지요. 추울 뿐 아니라 산소가 부족하니까 모든 것이 부족하니까 그만큼 높은 산이 아니라도 높은 산의 꼭대기에 올라 앉아 있을 수가 없지요. 올라가면 바로 내려와야 되지요. 極是省力(극시성력)이며 지극이 이는 순수한 마음이 되면, 極是利便(극시이변)니라. 지극이 이는 쉽고 편리한 것이니라. 지극한 마음이면 다 편리하다. 어려울 것이 없다 올라갔다가 바로 내려오면 되고 若曰回光返照(약왈회광반조)하야 만약 회광반조한다면 내 빛을 내 스스로 한번 비추어 본다면, 비추어봐서, 그런 이야기이지요. 點檢將來(점검장래)인댄 장래를 점검할 진대는 장래를 점검한다는 것은 내 공부해져가는 그런 모습들을 점검해 가는 것이지요. 耳朶依前兩片皮(이타의전양편피)며 늘러진 귀는 여전히 조각의 가죽이며, 이렇게 회광반조해서 점검해 감이니까 늘어진 귀가 두 조각 가죽이다. 무슨 소리인지 아세요. 늘어진 귀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 귀가 늘어졌잖아요. 부처님 귀도 우리와 똑같이 양쪽에 하나씩 달려있지요. 보니까 두 조각 가죽으로 되어 있다 이 말이지요. 재미있는 말씀하셨죠. 牙齒依舊一具骨(아치의구일구골)이라 아치는 치아 이지요. 전부다 거꾸로 쓰였어요. 우리가 거꾸로 쓰든가 ‘아치’나 ‘치아’나 이 치아가 이빨은 어디에 붙어 있나 하면 뼈에 붙어있지요. 한가지의 갖춘 뼈라니까 한 가지 틀로 되어있는 뼈에 이빨이 쭉 박혀있습니다. 有甚交涉(유심교섭)이며 어디에! 교섭 할 것이며 어디에 이것을 교습한다. 이것은 맞을까 안 맞을까.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有甚用處(유심용처)리요 어느 용처에 쓰리오. 어느 곳에 쓸 것인가. 다 쓰는 곳은 있지요. 이빨은 밥을 먹기 위해서, 무엇을 씹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귀 바퀴는 왜 있는가하면 잘 들리라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보면 전부다 필요하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여름에 제일 싫어하는 것이 뭐냐 하면 모기라는 몸인데 그놈 좀 없었으면 좋겠어요. 자꾸 따라다니면서 나하고 무슨 인연이 있는지 피를 빨아 먹을 라고 달려드는데 모기와 사람하고는 참 무슨 원수인지 말이지요. 모기는 사람피를 빨아먹어야 되고 그 놈은 모기는 사람피를 빨아먹을 라고 달려들기
모기가 여름에 참 제일 싫어하는데 그도 필요하니까 있는 것일 것입니다. 내가 잘 모르겠지만 분명 필요한데가 있을 것입니다. 박살낸다고 하니까 이상하네요. 다음 구절 봅시다. 若是拏雲攫霧底漢子(약시나운확무저한자)라면 만약 구름을 잡고 안개를 움켜쥔 자라면 구름이 잡혀집니까? 구름은 잡혀지지 않지요. 그리고 안개를 움켜쥔다면 아무리 웅켜져도 움켜지겠습니까? 그 점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구름을 잡고 안개를 움켜쥐는 자라면 決定不墮者野狐窟中(결정불타자야호굴중)하야 결정코 떨어지지 않는다. 여우굴중에 떨어져서 않는다. 埋沒自己靈光(메몰자기영광)하며 자기 영광을 메몰 하지 않으며, 영광이라는 것은 자기 빛이지요. 자기 안에서 스스로 나는 빛, 여러분도 잘 보세요. 내 안에서 일어나는 빛 그것이 어떤 빛인가 여러분들께서 지금 제 이 법문을 강의를 들으시고 또 이 화면을 보고 세상 모든 것을 내가 눈으로 다보고 알고 느끼고 하는 것이 빛입니다. 이것이 영광이지요. 辜負出家本志(고부출가본지)하고 출가본분을 저버리지 않고, 直向那一面懸崖峭壁無捿泊處(직향나일면현애초벽무서박처) 하야 직향이라는 것은 바로 향하다. ‘나일면현애’ 일면현애초벽이라 하는 것은 가파른 깍아지른 절벽이지요. 그 가파르게 깎아지른 절벽을 딱 대면하고 서서 그런 모습이지요. 그렇게 하고 ‘초박처하야’ 그기에 겨우 귀틀어 있어요. 겨우 발로 겨우 밟고 서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발디딜 곳 없는 가파른 낭떠러지를 향해 서서 불조를 뛰어넘는 마음으로 立 超佛越祖心(초불월조심)하며 그기에 딱 서서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초월할 마음을 딱 저버리지 아니하면, 거기에 이르러서도 부처님을 초월한 마음을 내가 부처님 깨달은 것을 깨닫고 조사스님 깨달은 것을 깨달을 라고 하는 마음을 저버리면 안되지요. 여러분들이 공부하는데 어떠한 경우에 처하더라도 절대로 그런 마음을 저버리면 안됩니다. 세상이 조금 변했다고 해서 금방 마음이 변하고 그러면 안됩니다. 辦 久久無變志(변 구구무변지)하야 그렇게 해서 ‘구구무변지’절대로 오랫동안 변하지않는 뜻을 가져야 된다는 말이지요. 변하지 않는 뜻을 갖춘다. 이 말이지요. 절대 아무리 오래가더라도 변하지 않는 뜻을 갖추어서 不問上與不上(불문상여불상)과 得與不得(득여부득)이니라. 어떤 경계에 올라갔다거나 올라가지 않음과 얻고 얻지 않음을 묻지 않음이라. 그러니까 그렇게 공부하면 되었지 어떠한 경계에 올라갔느냐 올라가지 않았느냐 네가 공부를 잘하냐. 못하냐. 물을 필요가 없어요. 정말 매일 같이 과학도가 열심히 자기가 연구하는 것을 연구하고 또 연구하고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지 연구하면 결국은 결론을 얻게 되어있어요. 나와져있습니다. 부처님이 그랬습니다. 무엇이든지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은 다 이루어지느니라. 그랬습니다. 과학도가 열심히 연구하면 이루는 것에 목적에 두면 안되요. 물론 목적은 이루어서 결론을 보는 것이지만 그것은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하면, 정진하면 그 정진 속에 다 이루어져 있습니다.그 속에 그런 이야기이지요. 다음 구절 볼까요. 今日也 拌命跳(금일야 반명도) 하며 오늘도 목숨을 던질 것이며, 明日也 拌命跳(명일야 반명도)하야 내일도 목숨을 던져서 목숨을 던지는 일이 매일 같이 이어져요. 생사를 결단할려는 그 마음이 이와 같아져야 되는데 생사를 결정할려고 하는 마음이 이와 같지 않고 오늘 공부를 좀 하다가 앉아 있다가 오늘은 피곤하니까, 졸음이 많이 오니까, 오늘은 산란하니까, 이렇게 변명하는 사람은 절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이 목숨 전체를 다 던져서 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가지고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느냐. 跳來跳去(도래도거)에 목숨 걸고 가고 목숨 걸고 오매, 跳到人法俱忘(도도인법구망)하며 나와 법을 모두 잊어버린다. 나도 잊어버리고 법도 잊어버리고, 무엇을 이룬다 하는 것, 까지도 잊어버려요. 心識路絶(심식로절)하야 심식(心識)의 딱 끊어 졌다는 이야기이지요. 驀然踏翻大地(맥연답대지)하며 갑자기 대지가 무너져 버리며, 撞破虛空(당파허공)하면 허공을 처 부수면, 元來山卽自己(원래산즉자기)며 원래 산이 자신이며 산이 따로 있고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산이 나며 自己卽山(자기즉산)이리니 내가 곧 산이다 참 대단한 말씀을 하셨지요. 이런 말을 참 읽으면 참 속이 시원하지요. 山與自己(산여자기)도 猶是冤家(유시원가)어니와 오직 이것은 ‘원가하야’ 원수와 같은 것이지요. 산과 아와 법을 다 구분하는 것, 원수라는 것이지요. 구분이 없어야 되요. 하나가 되어야 되요. 若要究竟衲僧(약요구경납승)의 向上巴鼻(향상파비)인댄 만약 구경의 요체를 알고자하는 승려가 있다면 直須和座(직수화좌)하야 颺在他方世界(양재타방세계)하야사 始得(시득)다 모름지기 바로 자신의 자리를 다른 세계에 던져버려서 비로서 얻을 것이 있을 것이다. 내가 있는 모든 자리까지도 모두다 던져버렸을 때 비로소 무엇인가 얻는다. 이 말이지요. 우리가 무엇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 내 자리를 던지지 않고는 절대로 얻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 계산이 앞서면 주판부터 먼저 튕구고 앉아 있으면 무엇을 이루겠어요. 주판은 없어야 됩니다. 계산은 없어야 되요. 계산이 있으면
일생을 여러분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선인뿐만이 아니라 세상 살아가는 모습도 다 이와 같습니다. 전부를 던져야지 던지지 않고 무엇을 이루겠다는 마음을 갖는다면 헛꿈을 꾸고 있는 것이지요. 一二三四(일이삼사)와四三二一(사삼이일)이 鉤鎖連環(구쇄연환)하야 銀山鐵壁(은산철벽)이라 일이삼사와 사삼이일이 쇠사슬이, 선법을 말씀하신 분들이 이런 말씀을 많이 쓰세요. 쇠사슬이 엮인 ‘응산철벽’이니라. 그랬어요. 일.이.삼.사. 나, 사.삼.이.일 이나 일.이.삼.사.....백.천.억 천만..십만..... 아무리 엄청난 세계를 다 센다고 하더라도 그 세는것이 끝이 없어요. 거꾸로 세던 바로 세던 끝이 없다는 이야기 이지요. 이 세상은 이와 같이 끝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은산철벽이라, 覰見得破 跳得出(처견득파 도득출)하면
딱 텅 비어 있는 것을 딱 본다. 세상을 이 세상을 전부다 파해본다 말이지요.
大千沙界海中漚(대천사계해중구)요 대천세계 ‘대천사계해중구’요 삼천대천세계가 다 물거품이요. ‘해중구’ 바다가운데 물거품이요. 텅 비어있음을 보아 쳐부수어 뛰쳐나오면 삼천대천세계 바다의 물거품이요 一切聖賢(일체성현)이 如電拂(여전불)이어니와 일체현성이 다 마치 번개불과 같아요. 부처님이라든지 노자. 장자. 공자. 예수니 모두다 번개불 같은 것입니다. 잠시 번쩍 했을 뿐이지 그 존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말이지요. 若是虛見不破 跳不出(약시허견불파 도불출)인댄 만약 이와 같이 허공을 쳐부수지 못한다면 이런 것을 쳐부수지 못한다면 ‘도불출’ 뛰어 넘지 못한다면 이런 말이지요. 切須翻天覆地(절수본천복지)하며 離巢越窟(이소월굴)이니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간절히 천지를 뒤집어서 엎어서 귀신 소굴을 벗어나야 할 것이니라. 뒤집어 엎어가지고 뒤집어 업는다. 이 뜻이지요. 천지를 뒤 엎어 가지고 귀신 소굴을 전부다 벗어나야 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便就一歸何處上(변취일귀하처상)하야 문득 일귀하처의 화두지요. 일귀하처, 만법귀일 일귀하처 만법이 다 하나로 돌아간다.
문득 일귀하처의 화두에서 東擊西敲(동격서고)하며 동쪽을 치고 서쪽에 북을 울리듯이 동쪽에서 딱 북을 쳤는데 서쪽에서 북소리가 난다.
'동격서고‘ 라는 것은 동쪽에서 북을 쳤는데 서쪽에서 북소리가 들리다.
橫逼竪逼(횡핍숙핍)하야 쪼고 또 쪼아서 핍박하고 핍박한다. 핍박한다는 이야기이지요. 숙핍이나 횡핍이나 모로 돌리고 세로로 돌리고 막 돌려 버리는 것이지요. 逼來逼去(핍래핍거)에 돌려서 핍박하고 핍박하여 옴에 逼到無棲泊 不奈何處(핍도무서박 불나하처)하야 그렇게 해서 절대로 머물 수 없는 곳에 도달했어도 그런 이야기 이지요. 誠須重加猛利(성수중가맹리)하야 더욱더 모름지기 용맹심을 발휘해서 翻身一擲(번신일처)하면 悉皆成佛(실괴성불)이어니와 이 몸을 한번 번득여가지고 한번 딱 던져버리면 土塊泥團(토괴니단)이 悉皆成佛(실괴성불)이어니와 흙덩어리들도 다 성불하거니와, 흙덩어리가 다 성불한다는 말이지요. 참 묘한 이치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이치를 알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若是不尢兼不尢兼(약시불왕겸불왕겸) 하며 半進半出(반진반출)을 蛇呑蝦蟆 (사탄하마)인댄 뱀이 두꺼비를 먹지요. 능구렁이가 두꺼비를 먹는다는데 먹는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불왕겸 불왕겸’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두꺼비가 뱀을 물었는데 이것이 먹기가 곤란했든 모양이지요. 너무 커서, 삼켜야 될지, 말아야 될지, 그런 것입니다. ‘반진반출’ 나갈까 말까, 삼켜야 될까 말까, 나갈까 말까,
西峰(서봉)은 敢道驢年(감도려년)이라사 始得(시득)다호리라. 나는 감히 려년이라사 ‘나귀려’자 이지요. 나귀해 되어서 비로소 너희들이 도를 깨우치겠다 말하리라 그랬어요. 나귀해가 있습니까? 자.축.인.묘. 진.사.오.미. 신.유.술.해 열두해가 있는데 자년은 쥐.소 원숭이..해는 있지만은 나귀띠는 없지요 나귀 해는 그런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이렇게 해 가지고 공부해 가지고 깨달은다고 하면 감히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기를 “려년이라사,” 나귀해가 되어서 너희들이 깨닫겠다 말하겠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재미있는 말씀 많이 하시네요. 이와 같이 고봉화상은 한 말씀 한 말씀 보면 재미도 있거니와 음미해 볼 많은 말들이 참 많아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마칠까요.[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