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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1.28(安) 龜尾敎會 돌아가서 얻은 안식
聖經節: 눅 15:11-32
성도 여러분, 한주간도 안녕하십니까?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하늘의 평화가 임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2009년도 한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납니다.
잘 마무리 하시고 유종의 미를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1년간의 신앙 생활의 마무리는 연말기도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다음주 월요일부터 안식일까지 연말기도주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교인이라면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연중 두 집회가 있다면 연초에는 사경회고, 연말에는 기도주간입니다.
모쪼록 다음주 연말기도주일에 성도 여러분 모두 참석하셔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시면서
기도에 전념하시는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동리에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두 아들은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맏이는 장남답게 아버지를 잘 돕고 순종적이고, 가업을 잘 받드는, 보기에 성실해 보이는 사람이었고,
둘째는 공부보다는 놀기를 더 좋아하는 문제아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교훈을 간섭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처지를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보다 넓은 세상과 간섭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동경하는 꿈많은 신세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둘째는 마음에 결심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간섭을 받으며 이 시골에서 이대로 있다가는 크게 되기는 힘들다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실물, 198 “이 둘째 아들은 가정에서 아버지의 제재에 몹시 싫증이 났다. 그는 아버지가 자기의 자유를 구속한다고 생각했다.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돌보심을 오해하고 그는 자기의 기분을 좇아 살기로 결심하였다.”
드디어 그는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의 사후에, 자신에게 상속될 재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합니다.
신 21:17에는, 재산 상속시 장자에게 전재산의 2/3을, 차자에게 1/3을 나누어 줄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재산 상속은 당시에도 부모님 생전에 자녀에게 유산을 상속하는 예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아버지의 임종이 임박할 때 행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산을 요구하는 아들의 태도는 무정하고 냉담하고 무례한 것이었습니다.
아들의 됨됨이와 성격을 알고 있던 아버지는 극구 말려보았지만, 이미 굳은 결심을 한 둘째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그 돈을 들고 걱정하는 가족의 시선을 뒤로 한 채
의기양양하게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자유를 쟁취한 것을 기뻐하면서 먼 나라 큰 도시로 떠났습니다.
3증언, 101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재물을 받게 되었을 때에 이기적인 마음을 갖고 그는 아버지께로부터 멀리 떠나갔으니,
이는 그에게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기 위함이었다. 그는 제재를 멸시하였다. 그는 자기의 선택에 따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쾌락을 추구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
오늘 이 비유 가운데 아버지는 하나님, 집나간 아들은 하나님의 품을 뿌리치고 떠난 우리들 자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 둘째 아들과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계획적으로 떠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호 11:7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Ⅱ. 그러나... 막상 도시에 나온 이 둘째 아들은 처음의 그의 꿈을 져버리고 도시 생활이 주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허랑방탕한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눅 15:13) [공동번역]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 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갔다.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돈이 있는 그의 주위에 많은 친구들(술친구,여자친구...)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그는 쾌락 속에서 시간과 돈을 허비하는 생활이 수년이 흘렀습니다.
실물, 203 “놀기만 좋아하고 생각이 모자랐던 그 젊은이는 부친의 집을 떠날 때 부친의 마음속에 남겨 놓은 고통과 자식에 대한 연민을
조금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그의 방탕한 동무들과 춤추고 먹고 마시고 있을 때는 그의 고향집에 드리운 우울함에 대하여
거의 생각지 못했다. ”
우리도 우리 마음대로 살고자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세상의 삶을 즐기며살 때 하늘 아버지의 마음의 번민과 고통을,
우울함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년의 세월이 지나, 방탕한 아들은 가진 것을 다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예> 로또 대박으로 백만장자가 된 10대 소녀가 청소부로 전락한 드라틱한 얘기가 영국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영국 데일리 메일이
24일 보도한 내용은 이렇다. 16세 나이에 1900만파운드(한화 40억원) 로또에 당첨된 캘리 로저스(22)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돈을
물쓰듯 하다 6년만에 빈털터리가 돼 버렸다. 그녀는 현재 어머니 집에 얹혀살면서 청소 용역으로 연명하고 있다는 것. 로저스는
2003년 복권에 당첨돼 일약 십대 거부로 떠올랐다. 그녀는 당시 최연소 복권 당첨자였다. 하지만 고가의 집과 자동차 구매 등
사치스러운 생활로 재산을 탕진했고, 지금 중고자동차 한 대와 집 한채만 남았다. 이 집마저 경매를 통해 곧 매각할 예정이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기근까지 닥쳐왔습니다. 이 기근은 그 나라 전체를 엄습한 것이었습니다.
이제까지 부족함이 없이 온갖 즐거움과 자유를 누렸던 그는 ‘비로소’ 궁핍함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돈 때문에 모인 친구들은 돈이 없어지자 다 떠나고, 당장 먹을 것도 없게 된 탕자는 남의 집에 종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돼지를 치게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부정한 짐승이며 돼지고기를 먹지도 만지지도 않는다- 돼지치는 일 천시함).
좋던 세월 다 보내고 이제 탕자의 삶은 하루하루 고통과 괴로움 그것이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간섭을 떠나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아버지를 뿌리치고 집을 떠났지만
결국 허랑방탕한 몇해 타향살이의 끝은 그는 남의집 종살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의 신앙 생애 중에 종종 체험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종종 자유스럽게 살고자 하지만
결국에는 세상의 속박에 매여 마치 노예와도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람의 행복과 자유는 그리스도안에서만 가능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나마 먹을 것이 궁해지자,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동부지중해 연안에서 볼 수 있는 구주 콩나무의 열매) 주린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한때 호의호식하며 인생을 즐기던 그가 굶주림과 고독 속에서 아무에게도 동정을 받지못하며, 그저 죽지 못해 돼지의 먹이를
먹으며 짐승같은 생활을, 어쩌면 짐승보다 못한 생활을 하는... 얼마나 비참한 신세가 되었는가?
그러던 어느날 밤. 탕자는 돼지 여물통옆에 앉아있다가 자신의 신새를 한탄하게 되었습니다.
-> 무슨 노래를 했을까?
타향살이 몇 해든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떠난 십여년에 청춘만 늙~어
부평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해는 져서 어두운데”?, “나의 살던 고향은”?
내가 이게 뭔가?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내가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었는데...
탕자는 그의 상황이 너무도 절망적임과 동시에 어처구니없는 상황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제서야 고향 집과 고향의 아버지를 생각이 났습니다.
과거 자기가 아버지와 살던 때의 행복한 추억이 생각나고,
아버지의 간섭이 간섭이 아니라 사랑이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생 끝에 철이 든 것입니다.
이제 그 아들은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소크라테스) 너 자신을 알라 , (베이컨) 아는 것이 힘이다.
--> 오늘날 우리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신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집단 최면에 빠져있습니다. - 하면 된다. 불가능은 없다. -
우리는 자신을 너무 과대 평가하고 있습니다.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한계 상황에 부딪히게 해서 사람의 무능을 깨닫게 하신다.
탕자도 참을만 했을 때는 - 돼지라도 치면서 살 궁리를 했다. 더 못참게 되었을때 그는 아버지를 생각하였습니다.
그가 스스로 돌이켜 집으로 향하도록 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 역경이었습니다.
그에게 닥친 이러한 어려움은 그로 하여금 아버지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갖는 기회가 되었으며
자기의 처지에 대한 깊은 반성과 아버지의 집이 참 행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으며
아버지의 집을 향해 가도록 하는 동인(動因)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역경이 닥칠 때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는, 역경을 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역경을 통해 더 큰 뜻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약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왜 우리의 처지에 대해 생각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님을 왜 깨닫지 못하는가? 포기하지 마십시요.
오늘 우리가 우리의 처지를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실물 200 죄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롬 1:28). 외적으로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자신을 중심으로 사는 모든 생애는
낭비하는 생애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직도 하나님을 떠나 살기로 선택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는 아직도 그러한 사람을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감화를 끼치고 계시다. 가련한 형편에 빠진 탕자는 "스스로 돌이"켰다. 그는 자기의 고생은 자기의
어리석음의 결과임을 깨닫고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고 말 한다. 탕자는 비록 가련한 처지에 있었으나 자기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고 소망을 갖게 된다.
그를 집으로 이끌리게 한 것은 곧 아버지의 사랑이었다."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롬 2:4)신다.
한편, 아버지는 날마다 동구밖에 나와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압니다. 그의 성격과 됨됨이를 압니다. 돈을 들고 나설 때부터 결과는 예상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어떻게 될지는 떠날 때부터 미리 아셨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아들이 더욱 걱정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관심은 오직 집나간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우리의 처지와 형편을 아십니다.
하나님 없이 즐겁게 살아보겠다고 기세좋게 하나님을 등지고 떠나면 우리의 결국이 어떻게 될지 하나님은 이미 아십니다.
그러므로 더욱 하나님의 관심은 집나간 우리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
예화) 이눔아 니 돌아오거라
지난 밤에는 무서리가 남새밭을 덮었다.
이눔아 니 돌아오거라.
송아지 팔은 고리짝의 돈이사 없다가도 있지만
병정에서 성잃고 니는 하나뿐 내 자슥
해걸음 신작로길 돌아넘는 건 짐실은 소달구지
오늘도 니 방에 군불지펴 놨는데
지부리는 초저녁은 너무 짧고
밤은 또 왜 이리 속히 오는지...
이눔아 니 돌아오거라.
네 돌아올 때는 초승달 숨 넘어지고,
삼태성 하늘 가운데 자리할 무렵.
마루밑 검둥이는 웃마을 새집에 주고
니 집나간 그날부터 밤낮 사립문 열어놓았다.
이 눔아! 니 돌아오거라.
오늘밤은 니 돌아오거라. 이 눔아!
바로 그날도 -- 아버지는 나간 자식을 기다리며 동구밖에 서 있었습니다.
해가 서산에 질 때쯤이었을까? 온종일 기다리며 마을입구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에 한 거지가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한눈에 그가 집 나간 아들임을 알아 보았습니다.
실물, 203 “아직 “상거가 먼데”도 그의 부친은 아들의 모습을 분간했다. 사랑은 눈을 밝게한다. 여러 해 동안의 죄된 생애로
초췌해졌을지라도 그것이 아버지의 눈으로 하여금 그 아들을 몰라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측은히 여겨 달려가” 사랑의 팔로
그의 “목을”오랫동안 꼭“안”고 있었다.”
측은히 여겨(스플랑크니조마이) 도움을 주지않으면 마음이 아파 견딜수 없는 상태
-> 아들의 참회 고백 이전에 아버지가 불쌍히 여김
제일 좋은 옷 = 그 집의 첫 번째 옷.-> 죄의 용서되고 아들의 권리가 유효함을 보임
신을 신기라 - 자유인의 권리가 회복됨
당시 종들은 맨발로 다님 -> 끊어진 관계가 아버지의 주도로 다시 이어짐
1보감, 308 “그는 아들을 책망하지 아니하고, 그 아들이 죄된 행동으로 인하여 많은 고난을 당하 였으므로, 가장 부드러운 동정과 사랑으로
아들에게 그의 사랑의 증거와 용서의 표징을 나타내는 일을 서둘렀다. 비록 그의 아들이 쇠약하여졌고, 그 얼굴에는 그가 보낸 방탕한
삶의 표적이 역력하였으며, 거지의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고, 그의 맨발은 여행의 흙먼지로 더러워져 있었으나, 아버지의 가장 부드러운
동정은 아들이 그의 앞에 겸손하게 부복하였을 때 자극되었다. 그는 위엄을 갖추고 고자세를 취하거나 엄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는
아들로 하여금 그가 얼마나 깊이 타락했었는가를 느끼도록 하기 위하여 아들의 과거의 죄와 잘못들을 아들 앞에 열거하지 않았다.”
시 103: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여러분 우리가 가야할 고향은 어디입니까? 우리가 돌아가서 용서를 구해야 할 분은 누구이십니까?
호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욜 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COL 150 “그대의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라. 그리하면 그는 멀리까지 나와서 그대를 영접하실 것이다. 만일 그대가 회개하고 그분을 향해
한 걸음만 내 디딘다해도 그분은 재빨리 무한하신 사랑의 팔로 그대를 안아 영접하실 것이다. 그분의 귀는 통회하는 자의 부르짖음을 듣기
위해 열려 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의 종이 되어 있든지 간에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만 오면 거기에 참 쉼이 있습니다.
(마 11:28, 요 8:22)
오늘 용서의 주님, 사랑의 주님,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하늘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
예화)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쓴 작품 가운데 이런 내용의 소설이 있다(The Capital of the world). 스페인의 한 사람에게 파고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아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아들의 방종한 삶이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들과 다투게 되었고, 아들 파코는
가출해서 마드리드로 가버렸다. 뒤늦게 양심의 가책을 느낀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하고 아들과 화해하기로 다짐했다. 이 아버지는
‘엘리베랄’이라는 신문에 광고를 냈다. “파코, 화요일 정오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아버지는 약속한 날,
약속한 시간에 몬타나 호텔에 나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파코’라는 이름의 청소년들이 무려 800명이 나와서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코’라는 이름은 당시 스페인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었다.
자애로우신 예수님은 그분의 피를 흘려 우리의 모든 죄를 이미 다 용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파고처럼 용서의 약속을 믿고 구세주 예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음 주 기도주간이 우리 구미교우들에게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의 체험을 하고 심령에 안식과 정결함을 경험하는
자숙과 경건의 복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