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이의 군 생활
08년9월8일<월>은 민중이가 군대에 입대하는 날이다. 민중이의 키는 186Cm에 몸무게가 58Kg으로 체격이 약한데다가 눈도 좀 나쁘고 하여 은근히 공익요원을 기대하였는데 막상 2급을 받아 현역 입대를 하니 나는 민중이의 약한 체력을 단련하는데는 좋은 기회라 생각한 데 반하여 현경엄마는 날씨도 더운 철에 몸도 약하여 다칠까 봐 걱정을 많이 하였다.
우리는 가게 문은 갔다 와서 열기로 하고 논산훈련소로 차를 몰았다. 미리 인터넷으로 가는 길을 숙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순조롭게 잘 도착하였고 도착하기 전에 고기집에서 점심을 먹으며 입소시간에 맞추어 훈련소로 들어갔다.
훈련소 곳곳에는 프랑카드가 붙어 있는데 훈련병의 상호 존중 하고 인권침해 절대 금지 하라는 내용이 많아 역시 군대가 과거와 달리 민주군대로 거듭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소정의 입소식을 마치고 훈련병들은 무리를 지어 들어가고 연병장에 가족들만 남아 점점 멀어져 들어가는 민중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돌아왔다.
입대후 얼마동안 특히 현경엄마가 걱정을 많이 했고 나도 솔직히 조금은 염려스러웠다. 다행히 훈련기간에도 인터넷으로 민중이에게 용기를 주는 편지를 할 수 있었다. 한동안 매일같이 전 가족이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보내면 매일 프린터하여 훈련병들한테 나누어 주는 모양이었다.
다음 편지는 훈련소에 데려다 주고 다음 날 아침 민중이에게 쓴 편지다.
<훈련소에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와서 아들 민중에게>
너를 논산의 훈련소까지 데려다 주고 엄마와 아빠는 다른데 들리지 않고 곧장 대구에 도착하니 오후 5시20분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제법 가을의 운치가 느껴지는 길이었고 한적한 고속도로 차안에서 엄마와 아빠는 너에 대한 대화를 나누면서 다소 정감 있는 분위기의 시간이었단다. 그리고 도착하여 다른 날과 같이 가게문을 열고 장사를 했다. 밤 10시40분 까지. 만 20년을 키워 온 너를 고생스런 군대에 보내고 아무 일이 없을 리야 있겠냐마는 그래도 엄마 아빠는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해야만 너희들의 장래를 기약할 수 있지 않겠나 싶다. 너를 군대에 보내고 우리 가족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성심 성의껏 오늘을 보내야겠다고 이전보다 더욱 각오를 새롭게 해 본다.
너 역시 전혀 새로운 세상에 첫 발을 내딛으며 나름대로의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겠지만 엄마,아빠 역시 너를 보내고 인생 설계와 구상을 또 새롭게 다짐을 해 본다.
훈련소에 가 보고 아빠가 느낀 점은 할아버지의 세대가 식민지와 전쟁의 어둡고도 침체된 세대였고 아빠의 세대가 군사문화에 젖어 있었던 후진적인 세대였다면 너희의 세대는 참으로 자유분방한 앞 선 세대가 아닌 가 싶다.
훈련소 곳곳에 있는 표어와 프랑카드에는 상호 존중과 인권침해를 절대금지하는게 최우선으로 적혀 있었는데 이는 그만큼 군대가 많은 변화가 있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의 밝은 성격과 남에게 친절한 태도를 그대로 위축되지 말고 유지한다면 아무 것도 문제될 것이 없는 가운데 군대생활을 원만히 잘 할 것으로 믿는다. 엄마,아빠는 너를 약하다고 자꾸 걱정을 해 왔지만 너의 장점인 원만한 성격을 최대한 살린다면 모든 사람들이 너를 좋아할 것이다.
무릇 사회도 마찬가지지만 군대 역시도 사람이 모여서 유지되는 곳이 아니겠니. 상관이나 선배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않고 동료들과 잘 화합하고 아직 후배는 없겠지만 후배들에게도 배려를 잘 해주고 어려운 일은 솔선수범한다면 무난한 군생활이 보장되는 것이겠지.
훈련소 입소 하루가 지난 오늘 이 시간 아빠는 아침장사를 엄마와 같이 하고 엄마는 집에 들어 가고 아빠 혼자서 너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다. 이 편지가 바로 너에게 전달되지는 않을지라도 나중에 볼 것에 대비하여 미리 써 두는 것이다.
평소 같으면 아직도 침대에서 자고 있는 시간일텐데 많이 피곤하겠지.
밤늦게 까지 인터넷을 하고 아침 늦게 일어나다가도 사람이 긴장하면 왠 만한 것은 견딜 수 있으리라.
구호를 외치고 고함을 지를 때 항상 주의해라. 너는 목이 잘 쉬는 체질이라 너무 크게 소리를 지르지 말고 요령껏 하길 바란다.
그리고 입은 항상 꽉 다물고 눈은 크고 뜨고 또 귀는 항상 정확히 열어놓고 상관의 말을 정확히 듣고 행동하도록 해라.
또 구보를 할 때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해라. 정신을 다른데 놓고 걷거나 뛰다가 발을 헛디디면 다치는 수가 있다. 그리고 가지고 간 밴드를 미리 발가락에 감고 훈련에 임하는 게 좋겠다.
또 식사 시간에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잘 씹어서 삼키고 배가 고프다고 너무 급하게 먹지를 마라. 특히 너는 어려서부터 장이 좋지 않아서 배탈이 자주 났는데 조심을 많이 해야 한다. 또 훈련중에 몸이 아프면 소대장이나 분대장에게 즉시 보고를 하고 약을 먹거나 치료를 받고 또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힘이 들 경우 상관에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 무조건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란다.
오늘 좀 늦게 일어나 가게에서 아침대용으로 바나나와 요플레, 빵을 먹으며 바나나를 특히 좋아하는 너를 생각했다. 엄마가 바나나를 사 오면 너의 독차지였는데. 너가 먹지 않으면 상해서 버린 적이 몇 번 있었지.
5주간의 훈련을 마치면 너는 좀 더 튼튼한 엄마,아빠의 자랑스런 아들로 변해 있을 것이다. 유난히도 하얀 너의 얼굴과 약한 팔,다리는 구리 빛으로 변해 있을 것이고 몸과 마음이 지금보다는 훨씬 강해져 있을 것이다.
분명 그 5주간은 엄마,아빠의 튼튼한 아들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그 기회를 최대한 잘 활용하길 바란다.
그리고 어렵고 힘든 일이 발생하면 인생사를 살면서 좋은 경험을 한다고 생각하고 우리 가족들만의 지나간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보내길 바란다.
주어진 시간 잘 보내고 늘 건강하길 바라면서 이만 줄인다.
08년 9월 9일 아침, 가게에서 아빠로부터
1주일이 지난 9월16일<월> 민중이의 훈련부대 배치 내역이 문자로 들어 왔다.
민중이의 훈련부대는 25연대5중대1소대의 25번이었고, 다음날 인터넷 상에 7중대 단체 사진이 올라왔다. 참 그 사진을 보고는 눈물이 핑 돌았다. 입을 크게 벌리고 구호를 외치는 모습이었는데 왠지 좀 어설픈 표정에다가 양 뽈이 좀 들어가고 목과 입 사이를 통하는 동선을 보니 고된 훈련으로 살이 많이 빠졌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훈련기간에는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라 생각하기로 하고 현경이를 포함한 우리 가족 3명은 매일 교대로 열심히 인터넷으로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또 무사히 훈련기간을 마치기를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그리고 5주간의 훈련기간이 지나고 후반기 교육 중이던 11월8일<토> 현경엄마와 함께 전라남도 장성 땅에 위치한 공병학교에 면회를 갔다. 이 날은 아예 가게 앞에 아들 면회 때문에 하루 쉰다는 팻말을 붙여놓고 갔다.
미리 각종 음식을 준비해 가지고 그리고 11월5일이 민중이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민중이가 좋아하는 생일 케이크도 준비했다.
풍광 좋은 가을의 상무대에서 우리는 11시에 도착하여 5시간 가까이 함께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며 사진도 찍고 또 다시 민중이를 부대안으로 들여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몇 개월 사이에 민중이가 제법 튼튼해 졌음을 알 수 있었다.
11월24일<월> 자대배치가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특기는 지뢰제거반이라 해서 또 우리는 조금 걱정하였는데 금새 기우로 판명되었다.
민중이의 자대 주소는 강원도 인제군 남면 어론리 사서함 81-22호 이고 소속은 제 9627 부대 1중대 이병 김민중 이었다.
자대 배치가 되면서 소속 대대장과 중대장이 차례로 전화가 왔다. 안심하시라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민중이는 그 동안에 정기휴가를 2번 나왔고 또 포상휴가도 2번 나왔다. 상병을 달았고 얼마 있으면 병장을 단다. 그리고 2010년7월 제대를 하고 학교에 복학을 한다. 자대 배치후에는 작년 여름방학 때 면회를 갈려고 강원도 인제에 있는 숙박시설에 예약까지 하고 갈려고 했는데 훈련날자와 중복된 데다가 민중이가 하는 말이 잘 있으니 힘들게 오시지 말라고 하여 결국 못 가고 말았다.
이제 제대를 7개월 정도 남겨 둔 이 시점에 민중이의 타고 난 밝은 성격과 남에게 친절한 태도로 군 생활을 잘 마무리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현경엄마의 외부 활동
나는 다가올 미래보다는 오늘 이 순간과 지나가 버린 과거에 얽매이는 스타일인데 비하여 현경엄마는 앞으로 닥쳐올 미래에 대한 대비를 철두철미하게 하면서 개미처럼 열심히 일만 하는 스타일이다.
생각하면 96년도 가게를 처음 시작할 때도 당시 신문지상에는 앞으로 IMF를 예견하는 기사들이 많이 게재되었고 그러한 위기의식은 현경엄마로 하여금 무엇이라도 해서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마음이 강했었고 그리하여 무리수를 써서 가게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 결과 8년동안 현경엄마로서는 고생을 말도 못하게 하였지만 가정경제에는 많은 도움이 되었었고 그 연장선상에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방황하던 시절에 현경엄마의 가게에 대한 경험은 다시금 이 문구점을 차리는데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가게를 차리고 1년간 열심히 하여 투자비를 회수하고 그 후 매출이 감소되는 징후를 감지한 현경엄마로서는 이 가게만으로 미래를 대비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가게는 나에게 맡기고 다시금 생업전선에 나서는 것이다.
때마침 불어온 노인병원 급증과 간호사의 절대인원 부족에 따라 장롱속 간호사 면허증이 대거 현장 병원의 간호인력으로 나오던 07년10월 경남 창녕 부곡에 있는 온천병원에 근무를 시작으로 2년3개월 동안의 짧은 기간에 참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한 번은 강사 경력도 없는 상태에서 경산에 있는 어느 학원 강사를 몇 달 했는데 원장이 품성이 좋지 않아 강사료를 주지 않고 버티어서 애를 먹고 직접 받으러 가서 항의하여 결국 다 받아 낸 일도 있었다.
그리고 영천의 마야병원에서 프로그램 선생님으로 10개월 근무를 하면서 동시에 경신정보고등학교 시간 강사(일주일 3일), 간호보조학원 시간 강사(일주일 2일) 일을 소화해 내었다. 그리고 09년도 저무는 12월28일 위에 여러 가지의 알바를 정리하고 정식 간호사로 취직하였다. 현경엄마로서는 2년3개월 동안 적을 두고 일한 곳이 6군데나 되는 셈이다. 52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아픈 몸을 이끌고 저렇게 열성적으로 일하는 것이 참 대견하다기 보다는 몸이 더 아프지 않을 까 걱정되는 마음이 앞서기는 하지만 저 나이에 적당히 놀고 즐기면서 살지 못할 바에는 저렇게 하는 것도 건강에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로 했다.
갈수록 예전 만 못해가는 가게만 쳐다보면서 또 나로 인하여 발생되는 여러 가지 구속과 스트레스로부터 차라리 해방되어 돈 버는 재미라도 만끽하는 것도 삶의 하나의 새로운 돌파구라 생각하기로 마음을 고쳐 먹고 새로이 취업한 대현첨단요양 병원에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태워주고 돌아와 가게 문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