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꽃들에게 말 걸기
 
 
 
카페 게시글
이런詩(글)를 봤어요 스크랩 천재들은 사랑하는 방식도 파격적 /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허브 추천 0 조회 30 12.12.19 21: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천재들은 사랑하는 방식도 파격적 - ‘사랑의 대가는 거세’

 

천재들의 사랑은 1%가 다르다

영혼의 지적 대화에서 몸의 대화로 이어져

지적 권위 앞에서 사랑을 불태운 여인들과 뜨거운 사랑에 자극받는 거장들

 

 

지성사에 획을 그은 거장들 중에는 그 이름만큼이나 유명한 연애담을 가진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의 사랑은 나이와 인종, 심지어 성별을 뛰어넘는 경우도 많았으며, 그들이 가진 유명세만큼이나 세간의 화제를 몰고 다녔다. 그 중에도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마도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 결혼일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전후 세계에서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가장 대중적인 슈퍼스타 철학자였다. 그의 이름은 실존주의와 동의어처럼 취급되어왔으며, 그의 저서인 『존재와 무』는 실존주의의 경전처럼 여겨졌다. 그는 소설가로도 이름을 날렸으며, 노벨문학상을 거부하고 68혁명 등 현실문제에 과감하게 참여함으로써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또한 프랑스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의 거장이며, 페미니즘의 대모가 된 여자다. 그녀의 소설 또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녀의 대표작 『제2의 성』은 오늘날까지도 페미니즘의 경전으로 손꼽히고 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철학 교수 자격시험을 치루면서 시작되었다. 키 158㎝의 못생긴 남자 사르트르는 보름 동안 젊고 아름다운 보부아르와 함께 자격시험을 치렀다. 이 시험에서 사르트르는 수석을, 보부아르는 차석이면서 최연소 합격자가 된다.

 

“당신은 합격했소. 그러니 이제 당신은 나의 것이오.”

 

교수 자격을 얻은 날 소르본 대학 교정에서 사르트르가 그녀에게 한 말이다. 사르트르는 시험 과정에서 이미 그녀에게 사랑을 느꼈고, 그녀 또한 사르트르를 자신의 이상적인 남자로 생각하게 된다. 사실 당시 심사위원들은 보부아르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지만, 여자이기에 사르트르를 수석으로 선출했다고 한다. 하지만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에게 반한 순간을 ‘뤽상부르공원 분수 앞에서, 세 시간에 걸친 논박이 나의 패배로 끝났을 때’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에게는 지적인 남자가 이상향이었으며, 실제 사르트르는 죽을 때까지 그녀의 사상에 있어서도 근원적 역할을 했다.

 

사르트르는 군입대 직전 그녀에게 청혼했지만 거절당하고, 이후 계약 결혼을 제안하면서 본격적인 연인 관계로 접어들었다. 그들의 계약 연애는 이제까지 보아왔던 그 어떤 연애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소유했지만, 동시에 각자의 성생활을 허락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에게 거짓말하거나 속이지 말자고 약속하고 자신의 일이나 경험들은 물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행위까지도 솔직히 터놓자고 약속했다. 그들의 이 이상한 결혼은 사르트르가 죽는 날까지 51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끊임없이 신뢰하고, 서로의 원고를 모두 검토해주었다. 동시에 각자 다른 많은 연인들을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특히 사르트르의 연애 행각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으며, 보부아르의 동성 애인인 올가에게도 연정을 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올가의 동생인 완다, 보부아르의 제자인 비앙카, 러시아 출신 나타샤 등과도 관계를 맺었다. 보부아르도 이에 질세라 동성 연애는 물론 사르트르의 제자였던 보스트와 관계를 맺기도 하고, 미국 작가 넬슨 알그렌과 17년 동안 밀회를 즐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서로를 신뢰하고 허용할 뿐, 질투와 분노의 감정은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성을 앞세웠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는 남녀였고, 종종 질투와 위기가 따르곤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두 사람을 튼튼하게 묶어주는 대화와 지적 교감이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대화했고 지식을 교환했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에게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가 있는 것을 용인하면서도 ‘그의 지적 반려자’ 자리는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사르트르 또한 보부아르를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귀’라고 생각했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죽음을 ‘다시는 내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라 정의했을 정도다.

 

그들의 지적 교감은 세상을 똑같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게도 했다. 다음과 같은 보부아르의 말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들은 같은 도구, 같은 체계, 같은 열쇠를 사용했다. 때때로 한 사람이 시작한 문장을 다른 사람이 끝맺기도 했다. 누군가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지면 우리들은 똑같은 답을 할 때도 있었다.”

 

그들은 열망도 같았다. 그들은 사회 속에서 스스로를 실험하고자 했다. 자신들이 내세웠던 자유, 존재, 실존의 문제, 페미니즘 등을 끝없이 토론하고 또 경험을 통해 검증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시위에 참가해 인터뷰를 하고 있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그들은 언제나 같이 생각하고 같이 행동했으며, 그들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상징이 되었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가 될 수 있었고, 서로만 바라보는 부부보다 더 많은 대화와 더 많은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다. 둘 사이의 견고한 믿음을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변하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한 가지 사실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또한 내가 어떤 사람이 되더라도 난 그대 보부아르와 늘 함께하리라는 사실이라오.”

 

보부아르 또한 “나는 내 인생에서 확실한 성공 하나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사르트르와의 관계이다”라는 말로 둘 사이의 강한 신뢰와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사르트르가 죽고 6년 후 보부아르도 같은 묘지에 나란히 묻혔다.

 

 

그들보다 약간 앞선 거의 같은 시대에 또 하나의 불같은, 그러면서도 그들만큼이나 지적으로 강하게 타올랐던 연인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20세기 실존주의의 거장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그의 제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다.

 

대학 수업을 통해 34세의 유부남이었던 스타 강사 하이데거와 18세의 지적이고 열정적인 미녀 아렌트가 만났고,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결코 결혼을 깰 생각이 없었고, 상처받은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소개로 야스퍼스의 제자가 된다. 하이데거가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대부라면, 야스퍼스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대부다. 그들은 실존주의의 대표주자였으며, 일면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아렌트는 이 양대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서 배우고 익히며 자신의 철학을 단련시켜 나갔다.

 

나치 정권이 군림하자 그 둘의 운명은 정반대로 꼬여 나갔다. 당시 학장이 된 하이데거는 나치의 앞잡이가 되었고, 유태인이었던 아렌트는 망명을 해야 했던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은 1950년과 1952년, 1975년 등 단 세 번의 만남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아렌트는 하이데거를 마지막 만난 날 뉴욕에서 심장발작으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면 매정한 유부남 하이데거는 아렌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이 밤 이 아침,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빈틈없이 확인된 것 같아요. 그때 그곳에서 웨이터가 부르는 당신의 이름을 듣는 순간 마치 시간이 정지해버린 것 같았어요.”

 

세월이 한참 지나고 두 사람의 밀회가 있은 후 아렌트가 하이데거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이다. 적어도 그녀에게 하이데거는 스쳐 지나간 단순한 연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녀의 사상에는 하이데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으며, 전후에는 나치 앞잡이였던 하이데거를 적극 옹호하기도 했다. 하이데거 또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1923년에서 1928년까지의 기간이 나 자신에게는 가장 자극적이고 가장 침착하며 가장 파란만장한 시기였다.”

 

그는 아렌트가 없었다면 『존재와 시간』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오늘 날 한나 아렌트는 그의 스승들 못지않게 정치철학 분야의 거목으로 자리 잡고 있다.

 

 

프라이부르크에 있는 ‘한나 아렌트 거리’와 젊은 시절의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잠시 프라이부르크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전후에 아렌트가 다시 독일을 방문했을 때 바로 프라이부르크에서 하이데거를 다시 만났다.

 

 

하이데거만큼이나 유명하고 명석한 스승과 아렌트만큼이나 지적이고 명석한 여제자의 사랑은 중세에도 있었다. 오랜 역사 속에 수없이 회자되었던 아벨라르두스와 엘로이즈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아벨라르두스는 오늘날 스콜라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중세 대철학자이며, 탁월한 논리학자다. 그는 특히 대립되는 두 입장을 대립시켜 강의했는데, 이것이 이후 토론을 중시하는 스콜라철학의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다. 강사로 명성이 높았던 서른 중후반의 그는 당시 파리 전역에 소문난 미녀이며,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한 16세의 엘로이즈를 욕심냈다.

그는 엘로이즈를 키워준 숙부에게 자신이 직접 그녀를 가르치겠다고 접근했다. 당대 최고의 미녀와 최고의 지성이 만났고, 그들은 불타올랐다. 아벨라르두스는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책은 펼쳐져 있었지만, 철학 공부보다는 사랑의 이야기가 더 많았고, 학문의 설명보다는 입맞춤이 더 빈번했으며, 내 손은 나의 책으로 가는 일보다는 더 자주 그녀의 가슴으로 갔던 것이네. 사랑은 두 사람의 눈을 교과서의 문자 위를 더듬게 하지 않고 서로의 눈망울 속에 머물게 했네.”

 

그러나 그들의 뜨거운 사랑은 엘로이즈의 임신으로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 아벨라르두스는 엘로이즈에게 청혼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그녀는 당시 신학자요 철학자로 승승장구하던 그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숙부는 가문의 명예를 위해 결혼을 원했고, 둘은 비밀결혼식을 올렸다.

 

문제는 그 둘이 엘로이즈의 뜻에 따라 결혼 후 헤어진 것이다. 그녀의 숙부는 분개했고, 하수인을 시켜 아벨라르두스의 남성을 거세해버렸다. 아벨라르두스를 위한 엘로이즈의 희생은 오히려 그를 더 큰 불행으로 몰아넣고 만 것이다.

 

 

아벨라르두스와 엘로이즈의 묘.

아벨라르두스가 죽은 후 엘로이즈는 간절한 편지를 보내 그의 시신을 자신이 머물던 수도원으로 오게 만든다. 엘로이즈는 죽으며 자신의 연인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아벨라르두스는 수도사로, 엘로이즈는 수녀가 되어 15년 이상을 서로 다른 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떨어져 있으면서 간간히 편지를 주고받았다. 거세된 아벨라르두스는 그녀에게 그리스도 안에 귀의할 것을 권했고, 엘로이즈는 수녀가 된 것 또한 하나님이 아닌 당신의 명령에서였다고 강조했다. 아벨라르두스에 대한 멈추지 않는 사랑은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우여곡절 끝에 그의 곁에 묻혔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이들과 같은 지적 열망으로 가득한 열애를 목격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어쩌면 그것은 시대를 불문한 사건일 것이다. 단지 시대적 특성상 그 유효기간이라는 것에 더 큰 제약을 받기 쉽다. 현재 큰 반향을 일으키며 우리나라에서도 열화와 같은 관심을 받고 있는 지젝(Slavoj zizek)이 그 대표적인 경우가 아닐까?

 

 

 

지젝의 첫 번째 부인 살레츨과 현재 아내 요니.

첫 번째 부인은 미모를 겸비한 뛰어난 석학이었고, 두 번째 부인은 뛰어난 몸매와 모델 경력, 지적 능력을 갖춘 미녀다.

 

 

그는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을 접목시키면서, ‘동유럽의 기적’으로 불릴 만큼 세계의 이목을 받고 있는 철학자다. 그의 첫 번째 아내는 그가 이끌고 있는 이른바 ‘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의 일원이면서, 역시 탁월한 라캉 연구자로 알려진 레나타 살레츨(Renata Salecl)이었다.

그들의 결혼은 11살이라는 나이를 극복한 탁월한 지성들의 만남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그의 아내는 뛰어난 외모를 자랑하는 모델 출신의 아날리아 요니(Analia Hounie)다. 재미있는 점은 요니의 부모 또한 모두 라캉 정신분석가였으며, 그녀 자신도 라캉 전공으로 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지젝과 그녀의 나이 차이는 무려 30세나 된다. 남자라면 부러울 따름이다.

 

 

 

 

 

정신 치료 받다가 사랑에 빠져버린 여인들, 정식분석학 개척에 기여

 

프로이트, “그녀야말로 사실상 정신분석을 창시한 사람”

프로이트와 제자 칼 융, 여자 환자 사이에 두고 질투와 반목

 

정신과 의사와 환자가 치료과정에서 사랑에 빠진다? 심리 미스터리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실제로도 그런 일이 가능할까? 답은 ‘예스’다.

환자와의 신뢰관계를 형성해야 하는 심리 상담의 특성과 환자의 심리적 전의 등은 종종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빠질 수 있다. 그런 만큼 상담자들은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는 데 각별한 신경을 쓰게 된다. 무의식이라는 영역을 개척하며 20세기를 뒤흔들었던 정신분석학은 그 첫 사례부터가 그러했다.

 

프로이트가 아버지처럼 따르던 브로이어(Josef Breuer)는 ‘안나 오’라는 여인을 최면 치료하고 상담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프로이트와 의논하면서 두 사람은 서서히 무의식의 실체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녀는 물이 두려워 6주 동안 물을 못 마셨고, 모국어인 독일어를 잃어버리고 영어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로만 말을 했으며, 이유 없이 마른기침을 했다.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환각 증세와 더불어 팔다리가 마비되는 증상까지 보였다. 당시로써는 악마가 들렸다고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최면 치료를 하면서 도중에 안나 오는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했던 무의식 속의 불편한 감정들을 떠올렸고, 이에 대한 불평과 혐오감을 털어놓는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런 불편한 감정들을 이야기하고 나면, 어김없이 그 증세가 사라져버린다는 점이다. 가장 쉬운 예가 물과 개에 대한 사례다.

 

 

안나 오 (Anna O, 1859~1936)의 실명은 베르사 파펜하임(Bertha Pappenheim)이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빈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매력적이고 똑똑한 처녀로 사랑하는 아버지를 간병하고 아버지가 사망하는 과정 속에서 히스테리 증상을 보여 치료를 받았다. 오른쪽은 사회사업에 헌신할 당시의 모습이다.

 

 

그녀는 물을 전혀 마실 수 없었다고 한다. 물잔이 입술에 닿으면 자신도 모르게 잔을 밀어냈다. 그래서 6주가 넘게 과일만 먹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최면 치료 중에 그녀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여자 친구에 대해 비난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녀의 방에 들어갔더니 작은 개(그녀 말로는 끔찍한 짐승)가 잔에 든 물을 마시고 있더라는 것이다. 당시 그녀는 예의상 아무 말도 못했는데, 그때 쌓인 불쾌감과 울분을 마음껏 표현하고 난 뒤 그녀는 물을 달라고 해서 마시고 최면에서 깨어났다. 그 뒤부터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을 마실 수 있었고, 이런 증상이 재발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그 기분 나쁜 친구와 개에 대해 평소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의식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속에 그 기분 나쁜 사실들을 분명하게 저장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무의식이다. 그 무의식이 언제부터인가 현실의 신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물을 입에 대는 순간 개가 먹던 물에 대한 불쾌감이 물을 거부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무의식의 불쾌감을 해소해줌으로써 무의식이 불만을 접고 안정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로써 브로이어와 프로이트는 의식이 모르고 있는, 무의식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무의식이 의식보다 더 강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의식은 알아채지 못하고 있지만 신체조차도 마음대로 움직이는 무의식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안나 오의 수많은 사례들은 대부분이 이렇게 분명한 이유가 있었고, 무의식의 증거를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보통 안나 오의 사례가 실려 있는 책 『히스테리 연구(Studien uber Hysterie)』를 무의식 연구 또는 정신분석학의 시발점으로 본다.

 

이렇듯 브로이어와 프로이트에게 행운을 가져다준 사례의 주인공 안나 오.

프로이트가 “그녀야말로 사실상 정신분석을 창시한 사람”이라고 지적했을 만큼 정신분석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그녀는, 그러나 브로이어와의 치료과정에서 브로이어를 사랑하게 되고 상상 임신까지 하게 된다. 이에 당황스러웠던 브로이어는 부인과 함께 베스니로 이주해버렸다. 브로이어가 떠난 후 그녀는 여러 정신병원을 떠돌아야 했지만, 다행히 완치되어 유대인여성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불우한 이웃과 여성들을 위해 헌신한다.

 

프로이트의 수제자이며 분석심리학이라는 또 하나의 정신분석학을 여는 융 또한 치료자와의 사랑 이야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그는 아예 환자와 연인관계에 빠졌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프로이트와 불편한 관계가 되어버린다.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의 한 장면. 융은 슈필라인을 환자로 만났다.

 

하지만 그 둘은 상담과정을 통해 서로의 무의식에 접근하게 된다. 그것은 집단 무의식과 같은 신비체험이며 동시에 격렬한 성행위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사비나 슈필라인(Sabina Spielrein, 1885~1942)이다. 〈캐리비안의 해적〉의 여주인공 키이라 나이틀리가 베드신을 열연하고 적나라한 성행위 묘사로 예고편 심의에 걸려 이슈가 됐던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가 이들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영화에서는 융이 그녀를 치료하면서 처음 프로이트의 이론을 접목시켰고, 이를 계기로 프로이트와 가까워지게 되었다고 그리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실제 융과 강렬한 사랑에 빠졌고, 둘은 격렬하면서도 가학적이고 피학적인 성행위로 빠져들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어릴 적 아버지에게 받은 가해로 피학적 성충동을 느꼈으며, 죽음의 충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이후 프로이트에게 죽음의 충동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게 한다. 또한 그녀와 융의 격렬한 사랑과 신비로운 체험은 융에게 집단의식이라는 새로운 무의식을 정초해내게 한다. 하지만 융은 그녀의 그 격렬함을 두려워했고 그녀를 떠났다. 결국 융에 집착한 그녀는 그들의 연애를 프로이트에게 알렸고, 환자와의 거리를 강조했던 프로이트와 융은 멀어지게 된다. 물론 단순한 연애 사실이 프로이트와 융을 멀어지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융의 정신에 되살린 신비주의적 성향이 그 둘을 멀어지게 했다고 봐야 한다.

 

프로이트를 아버지처럼 따랐고, 프로이트 또한 자신의 후계자가 되기를 바랐던 수제자 칼 구스타프 융. 그러나 그들은 시작부터 결별이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단어 연상 검사를 통해 무의식적인 콤플렉스 등을 밝혀내는 데 몰두하고 있던 융은 그와 매우 유사한 방법인 자유연상법을 사용하는 프로이트에게 끌렸다. 시작은 얼핏 매우 유사해 보였지만, 프로이트는 확고한 기계론자의 접근법을 고수하며 과학적으로 밝힐 수 없는 것에 대한 적대감을 가졌고, 융은 어찌 보면 미신처럼 보이는 인간 정신이 가진 심령적인 면과 과학적으로 밝힐 수 없는 면에까지 식지 않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엄격한 과학주의자와 신비주의자 간의 어쩌면 메울 수 없는 간격이 그들을 돌아서게 만든 주요인일 것이다.

 

이렇듯 칼 융은 과학을 내세우는 많은 심리학자들과 다르게 비과학적이고 영적인 것까지 추구했으며, 그만큼 자신도 신비로운 경험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이론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원형(archetype)이니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이니 하는 그의 이론들은 특히 유물론적 사고에 입각한 사람들이라면 받아들이는 것이 거북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많은 상담 치료와 자신의 경험에 기반을 둔 것이며, 동시에 수천 년을 이어져 온 신화와 다양한 종교 등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르며 자기실현을 꿈꾸고, 심리적 안정과 치료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

 

프로이트에게 꿈이 성적 충동을 상징하는 것이고, 무의식은 외상이나 욕망 등의 어두운 것으로만 얼룩져 있는 것이었다면, 융에 있어서 꿈은 성적 충동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욕망들, 자신이 애써 피하고 있는 자신의 단점, 조상으로부터 전해져오는 원형이라는 신화와 비슷한 체계까지를 포함한다. 그런 이유로 융의 꿈 해석은 예지몽과 조상의 메시지 같은 신비로운 요소까지 해석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어려서부터 자주 신비로운 체험을 겪어야 했던 융으로서는 사비나 슈필라인과의 신비체험을 정신분석학에 반영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점에서 이미 프로이트와 융은 사상적 바탕 자체가 달랐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융에게 버림받은 이후 그녀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녀는 프로이트의 제자가 되어 최초의 여성 정신분석학자로서, 러시아에 처음 정신분석을 소개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아동정신분석의 개척자로서 자신의 길을 열어나갔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그녀는 시작부터 융에게 환자가 아니라 동등한 치료자요 동료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상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환자와 치료자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은, 아마도 대화가 통하고 마음이 오갈 수 있는 곳, 바로 그곳에서 사랑이 싹튼다는 것이 아닐까?

 

 

 

글 / 주현성

 

 

 

채널예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