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1일 임동에 있는 직장으로 가려고 탄 군용 지프차가 도청을 한바퀴 돌고 온 것이 문제가 되어 6월 30일 기관원들에 의해 연행되었다.
상무대에서 재판을 받고 광주교도소로 옮겨져 1980년 11월 30일 석방되었다.
형편이 어려워 광주로 나오다
나는 전남 담양군 무전면에서 7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농사라고 해봐야 서너 마지기밖에 짓지 않아 집안형편은 아주 어려웠다.
담양에서 중학교까지 나오고 집안일을 돌보다 19세 되던 해에 서울로 올라갔다. 외숙이 경영하는 스웨터 짜는 보세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살아가는 것은 시골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려웠다. 4년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다 다시 담양으로 내려왔다.
담양에서 중매결혼을 하고 그곳에서 살았는데 갈수록 시골에서 살아가는 것이 팍팍해 1978년도에 광주로 나왔다. 장사를 하고 싶었지만 자본도 없고 성격도 워낙 내성적이라서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마침 내가 살던 집주인의 권유로 집주인 동생이 경영하는 곳에서 새시일을 배우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새시일이 아주 전망이 좋았기 때문에 나는 열심히 일을 했다. 1980년 5월이 없었다면 지금은 넉넉하게 살고 있었을 텐데 그 일이 있고부터는 몸이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아 하고 싶은 일도 제대로 못 하는 실정이다.
우연히 차를 타고 시내로
1980년 5월 나는 임동에 있는 영창새시에서 근무를 했다. 내가 일한 곳은 직원이 9명 정도 되었는데 광주항쟁이 끝난 후 직장 동료 중에서 나를 포함해 3명이나 옥고를 치러야 했다.
1980년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공장 직원들은 21일 초파일날 쉬기 위해서 모두 근무했다. 당시 공사현장은 송암동에 있는 도시가스 부근이었다. 일을 마치고 시내버스를 타고 오는데 전남대병원 앞과 임동 요한병원 앞에서 얼룩무늬 옷을 입은 공수부대원들이 곤봉을 들고 학생차림의 젊은 사람들을 마구 때리며 어딘가로 끌고 갔다.
당장 먹고살기 바쁜 나날들이라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을 보고도 '어쩌면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저럴 수가 있을까?' 하는 안타까운 심정만 들었다.
5월 19, 20일도 별다른 일 없이 공장의 일만 했다.
5월 21일 집에서 쉬고 있는데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공장 앞에 물건이 많이 쌓여 있는데 데모가 일어나면 부서질 우려가 있으니 물건을 공장 안으로 들여 놓으라고 했다. 나는 전화를 받고 한 동네에 사는 직원 유계룡, 양일준 씨와 함께 공장으로 가려고 집을 나섰다. 정규 버스가 다니지 않아 공장까지 걸어서 가려던 참에 집 옆 공장에서 일하는 하영현 씨가 우리를 발견하고 지프에 타라고 했다. 그 차에는 서너 명이 타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공장까지 태워다준다고 했다. 우리 세 명은 그 차에 올라탔다. 차는 바로 공장으로 가지 않고 유동 삼거리를 거쳐 시내로 갔다. 시내 곳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사람이 연설을 하고 있었다. "공수들도 총을 들었으니 우리도 총으로 대결합시다"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차를 타고 다니면서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고 공장으로 갔다.
물건을 공장 안으로 들여놓고 오후 4시경 우리 세 명은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목인 전남대 앞에는 시위가 한창이었다. 계엄군은 롯데제과 쪽으로 진을 치고 있었고 시민들은 임동과 광주역 쪽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도로의 보도블럭 등을 깨거나 각목을 들고 최루탄 발사를 하는 계엄군들에 대항했다. 어찌나 최루탄을 쏘아대는지 우리는 피하는 데만 급급했다. 시위 도중에는 몰랐는데 시위가 잠잠해질 무렵 거리거리에는 승용차 몇 대가 불에 타고 있었다. 우리는 광주역을 지나 구 호남전기 쪽으로 돌아 집으로 갔다.
나는 총이 시민들 손에 들어온 이후로는 가족의 안전을 돌보기 위해 집에서만 보냈다. 당시 떠도는 얘기로는 '광주시내에 많은 간첩이 침투했다'고 했고 나도 전화까지 불통되자 큰일이 난 줄로만 알았다.
나와 동료 두 명은 가끔씩 만나 화투나 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간혹 집에서 가까운 서방 쪽으로 나가보면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동료 3명과 함께 연행
5월 27일 아침 공장에 출근을 했다. 출근해 보니 21일 지프차를 태워준 하영현 씨가 그의 친구 몇 명과 함께 잡혀갔다고 했다. 그는 총기를 공장에 보관하고 있다가 계엄군에게 잡혀갔다고 했다.
한참 후 무장을 한 열댓 명의 공수부대원들이 수색을 한다며 우리 공장으로 들어와 여기저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보자 나는 더욱 불안해졌다. 그러나 그날은 아무 일도 없었다.
6월 30일 광주가 다시 평정을 찾고 나도 공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기관원으로 보이는 세 명이 공장으로 와서 나와 양일준 씨를 찾았다. 잠깐 볼일이 있다며 우리를 데리고 나가더니 승용차에 태웠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들은 차 안에서부터 겁을 주기 시작했다.
"당신들 광주사태 때 총을 들었지? 어디다 숨겼어?"
한참을 협박조로 묻더니 우리를 임동 파출소로 데려갔다. 그들은 일반 형사들이 아니라 보안대에서 나온 사복을 입은 군인들이었다. 잠시 후, 전남대에서 일하던 같은 공장 직원인 유계룡 씨를 데려왔다. 임동파출소에서 보안대 형사들한테 일차적으로 두들겨맞고 나자 임동파출소에 있는 형사들도 덩달아 우리를 두들겨 팼다.
얼마 후 그들은 우리를 화정동에 있는 보안대로 끌고 갔다. 처음에 보안대 지하실로 끌고 가서 밤새도록 무릎을 꿇려놓고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면서 우리를 취조했다.
영창 안의 구타와 배고픔
우리가 끌려오게 된 것은 옆 공장 직원인 하영현 씨가 고문에 견디다 못해 21일 같은 차에 탄 사실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들은 우리에게 진술서를 쓰라고 했다. 나와 동료들은 21일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썼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다.
"거짓말 마라. 감춰둔 총을 내놔라."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며 야구방망이로 온몸을 두들겨팼다. 보안대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시 상무대로 끌려갔다. 상무대 헌병대 영창 안 7방으로 옮겨져 보안대에서와 똑같은 내용의 심문을 계속받았다.
어느 날인가 삼청교육대 사건으로 잡혀온 50여 명이 들어와 나는 7방에서 1방으로 옮겼다. 1방에는 5·18 관련자들이 많이 있었다. 나보다 먼저 들어온 사람들은 주동자라고 해서 훨씬 더한 고문을 받았다.
영창의 생활 중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배고픔이었다. 수감자들에게 주는 식사는 겨우 목숨이나 유지할 정도의 양이었다. 1개월 정도 지나자 수감자들은 몸이 쇠약해져 물에다 소금을 타서 먹는 경우도 있었다.
영창 안에서 가족들에게 연락도 못 하고 갇혀 있자니 세상의 법이라는 게 이런가 싶어 너무나 분하고 안타까웠다. 가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제일 궁금했다. 그런데 집안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재판을 받을 때 사선 변호사를 알선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구형 4년에 실형 2년을 선고받았다. 그때까지도 가족들과 직접 면회는 되지 않았다. 상무대에 갇힌 우리 수감자들은 실형을 받은 후 '우리는 군인이 아니니까 교도소로 옮겨달라'고 항의를 했다. 이리하여 11월말경 2백70여 명이 포승줄로 묶인 채 광주교도소로 옮겨졌다.
7-8장의 각서를 쓰고 11월 30일 석방
나는 광주교도소 4사 이층 8방에 수감되었다. 나와 함께 있었던 12-13명의 사람들은 5·18관계로 화순에서 잡혀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교도소 생활은 상무대 생활에 비하면 호텔이나 진배 없었다. 식사량도 훨씬 많았고 구타도 별로 없었다.
어느 날 교도관이 와서 내 이름을 불렀다. 수감자들 말로는 교도소에서 벗어나면 남한산성으로 간다는 말이 있어 나도 영낙없이 남한산성으로 끌려가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 70여 명을 교도소에서 다시 상무대 안에 있는 교회로 데리고 갔다.
교회 안에 모인 수감자들에게 군 장성급으로 보이는 사람이 "너희들은 오늘부로 훈방이다. 이 안에 있었던 일을 발설한다거나 앞으로도 나쁜 일을 하게 되면 정보원들이 뒤를 따라다니며 감시를 할 것이니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며 각서를 쓰라고 했다. 우리는 7-8장씩의 각서를 쓰고 11월 30일 풀려났다.
비록 억울하게 감방살이를 하고 나온 길이지만 지긋지긋한 고통에서 해방 되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상무대 앞에서 버스를 타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교도소에 있으면서도 면회 한번 못 했던 가족들은 나의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전세금 1백50만 원까지 다 써버린 상태에서 주위의 도움을 받으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몸이 불편했지만 가장인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1주일 후에 예전의 근무처에 연락하여 새시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거의 막노동이다시피 한 새시일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어려운 형편에 입원할 수도 없어 거의 단방약으로만 치료했다.
지금도 특별나게 배운 게 없고 몸도 성치 못해 날일로 새시일을 다닌다. 후에 알고 보니 당시에 함께 잡혔던 유계룡 씨는 9월 5일 석방되었고 양일준 씨는 과거의 전과가 있어 나보다 3개월 뒤에 석방되었다고 했다.
부상자 신고는 오월항쟁동지회에 했으나 1988년 국회의원 선거 때 그 사무실이 위치를 옮기고 또 유계룡 씨가 5·18 광주의거부상자회에 가입해 있어서 나도 5·18 광주의거부상자회를 나갔다. 지금도 월례회에 꼭 참석하곤 한다.
5·18을 생각하면 억울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러나 나 혼자만이 피해자가 아니라 광주시민 전체가 피해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광주항쟁의 진상을 밝혀내야 된다고 생각한다. (조사.정리 김정기)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