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구간 1999년 3월 21일(일) 비와 눈
정맥능선:윗갈치고개-비룡산(85분)-팔봉산 금강봉(35분)-오석산(200분)-
백화산(100분)-159봉(95분)-32번 도로 재(30분)
약 30.6Km 9시간 5분 소요
비가 내린다. 조금씩 오고 있는 가랑비가 청양의 천장호를 지날 때부터 굵어지기 시작한다. 비 올 때 산행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차 운행은 조심해야 하기 때문에 신경을 써서 운전을 했다. 금북정맥 종주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오늘 많이 걸어간다면 다음에 한번만 더 산행을 하면 된다. 산행 출발지까지는 차로 3시간이 넘는 거리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오늘 많이 진행할 것이다. 그래서 도시락도 준비하지 않았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 지하3층 지점에서 매몰된 박승현(당시 20세)씨는 물 한모금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377시간 20분 동안 있었는데 한 끼 굶는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번 산행을 마친 윗갈치 고개에 도착하니 반가운 마음이 든다. 고개 북쪽은 성연면!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하고 사랑하는 연인처럼 따뜻한 정을 느끼는 성연면을 바라보고 배낭을 매고 비를 맞으며 뚜벅뚜벅 걸어갔다.
희미하게 나있는 정맥능선에는 소나무가 베어져 있었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작은 봉우리를 오른 후 잡목과 싸우며 내려가니 산판길이 나왔다. 또 하나의 봉우리를 오르니 길이 뚜렷해 좋아졌다. 두 번을 오르고 내리는 능선은 완만히 오르게 되었다. 왼편의 무성한 나무의 가을빛을 띈 잎과 발밑의 나뭇잎이 어우러져 꼭 가을 산행을 하는 기분이다. 잠시 후 완만하게 오른 168.8봉에는 삼각점과 깃대가 세워져 있었다. 조금 더 나아가니 오른편의 가까운 산에서 요란한 기계 소리를 내며 산을 부수고 있어 씁쓸했다. 하지만 정맥능선은 장송이 우거지고 솔잎이 깔린 좋은 길이라 기분이 좋았다. 비 떨어지는 소리만이 온산에 가득한 정맥을 걸을 때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발걸음만 빨라질 뿐이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봉을 오르니 모호한 갈림길이 나타났다. 나침반 방향은 정확히 갈림길 중간을 가리킨다. 지도와 지형을 살펴보고 왼쪽으로 진행하니 내리막길이 이어지면서 낙원산악회 리본이 달려 있어 정확히 진행함을 확인해 줘 기뻤다. 사실 비오는 날 독도는 쉬운 일이 아니다.
금방 도착한 솔개재에는 쓰레기가 버려져 있었다. 계속 오르막길로 작은 봉을 오른 후 내리막길로 진행하니 바람이 몹시 불고 이젠 눈까지 내린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능선을 지날 때는 캄캄했고 치성 흔적이 있는 커다란 바위가 나타난다. 바위에 올라 가야할 정맥을 바라보니 구름위에 희미하게 비룡산이 윤곽을 드러냈다. 비룡산을 오르는 능선 주변에는 진달래의 꽃망울이 봄을 꿈꾸며 부풀고 있었고 성질 급한 진달래가 두 송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무를 베어내 전망이 좋은 봉에 올라서도 비오는 날이라 조망은 안 되었다. 조금 더 진행하니 바위가 나타나고 금방 고스락에 무덤이 있는 비룡산에 도착했다. 비룡산을 뒤로하고 한참 내려오니 성리와 금학리를 연결하는 십자로 잘록이가 나왔는데 고갯마루에 멋진 느티나무가 있었다. 곧이어 올라가는 정맥능선 길은 경운기도 다닐 수 있는 넓은 길이었다. 조금 올라가니 그 길은 성리를 향하고 있어 오른쪽 좁게 나있는 오솔길로 올라갔다. 얼마 후 기묘한 선바위가 눈길을 끈다. 계속하여 올바른 정맥능선을 타고 올라간 봉에서 가파르게 내려갔다가 경사가 급한 능선을 올라채 팔봉산 금강봉에 섰다. 지도에는 금강산으로 되어있지만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조선조 21대 영조임금 때 실학파 지리학자 신경준 선생이 우리나라 산줄기를 족보 식으로 알기 쉽게 기록한 지리서 산경표에 의하면 팔봉산은 금북정맥에 속한다고 분명히 기재되어있다. 이 금강봉은 팔봉산에서 뻗어나간 한 자락이다 팔봉산 고스락까지는 직선거리로 2.5km밖에 되지 않는다. 하나의 산줄기를 팔봉산과 금강산으로 나눈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인데도 아직까지 올바르게 고쳐지지 않으니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금강봉에서 올바르게 이어지는 정맥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건너편 비슷한 높이의 봉우리에 오른 후 방향을 왼쪽(남서쪽)으로 틀어 얼마를 나아가 고스락이 넓은 암반으로 이루어진 장군봉을 올라갔다. 지도에는 이 봉도 장군산으로 되어있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장군봉에서 내려가는 정맥은 가파른 너덜지대였다. 산을 내려오니 낮은 정맥능선을 경작지로 개간하여 수랑재로 찾아가는 길이 헷갈린다. 수랑재에 도착하니 비는 멎었지만 바람이 몹시 불어 무척 추웠다. 수랑재에서 몰래산을 오른 후 팔봉중학교 가까이 왔을 때 무참하게 파괴된 금북정맥의 모습에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정맥은 도로 확장공사로 마구 파헤쳐져 흉측한 모습을 보였다. 팔봉중학교부터 낮은 정맥능선을 걸어갔다. 100여기가 넘는 교회무덤을 지나니 경운기 길을 만나게 된다. 한동안 나아가니 정맥은 밭으로 변하고 북쪽의 팔봉산이 눈길을 끌었다. 팔봉산은 높이가 361m밖에 안되지만 바다 근처의 산이기 때문에 표고차가 없어 높은 산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운하를 파 유일하게 정맥능선이 끊어진 굴포 운하지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굴포 운하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운하로서 고려시대 때 천수만으로 유입하는 홍인천과 가로천과의 약 3km에 달하는 지역을 착통하였다. 굴포운항를 개착하게 된 요인은 삼남지방의 세곡미를 서울로 조운함에 있어 조운선단이 태안반도의 안흥량 관장항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다. 그러나 안흥량은 서해안상에 험한 장봉으로 인해 암초가 있고 급격한 조류로 인해 빈번히 조운선이 전복되고 파선으로 인하여 국가적 재정손실이 컸다. 그리하여 세곡미의 안전수송과 조운에 따른 시간적 거리를 단축시키려고 지금의 굴포운하 개착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고려 인종 때부터 굴포를 개착하여 조선중기 임진왜란 직전까지 비록 단속적이기는 하였지만 실로 400여 년간 수천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운하공사를 계속하였으니 개착지의 지질과 화강암층을 당시의 기술로는 암석을 뚫지 못하고 높은 간조의 차를 극복하지 못한 자연적인 요인으로 말미암아 성공치 못하였다. 아울러 조선 인조 때는 천수만에서 서해로 나가는 남면 신온리와 안면읍 창기리 사이의 개미목을 파 운하를 만들어 아쉬우나마 거리를 줄이고 안전을 도모했다. 이를 의항운하라 한다. 그래서 본래 육지였던 운하 아래의 땅은 안면도라는 섬이 되었다.
굴포운하를 지나자 정맥에는 가옥, 밭, 비닐하우스 등이 있어서 통과가 어려워 정맥 바로 왼쪽의 시멘트 도로를 따라 나아간 다음 붉은재에서 다시 산에 올라갔다. 희미한 길을 잡목과 싸우며 오르다가 바위에서 2개의 산악회 리본을 보았다. 그리고 정맥능선은 소나무를 마구 베어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오석산을 올라가니 삼각점은 있지만 깃대는 쓰러졌고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서해가 뚜렷하게 보였다. 바다를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이제 서해를 지키며 흐름을 멈추는 금북정맥의 종착지 안흥진까지도 멀지 않을 것이다. 백화산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두 산줄기로 갈리는 봉에서 왼쪽으로 가야됐고 곧 경운기도 갈 수 있는 십자로 잘록이가 나타났다. 넓은 길을 따라 산을 오르니 정맥 왼쪽에 쓰레기가 버려져 있었으며 희미한 좁은 길로 바뀌었다. 힘겹게 올라가 봉우리에 이르자 내리막길이 되었고 또다시 한참동안 오르는 길로 진행을 했다. 왼편에 관흥목장이 보이는 길로 오르다가 조망이 되는 능선에서 팔봉산과 금강봉이 잘 보였다. 그리고 팔봉산과 금강봉은 독립된 산이 아닌 하나의 산임을 확인시켜줬다. 어렵게 오른 230봉을 지나 내려가는 능선의 전망 좋은 바위에서 우뚝하게 드러난 백화산을 바라보니 암봉을 뽐내고 있었다.
시멘트 도로가 지나가는 십자로 잘록이에 내려서니 사유지이니 올라가면 고발하겠다는 접근금지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경고를 무시하고 오르니 지뢰조심 팻말까지 있었다. 긴장하며 올라가 백화산 고스락인 북봉에 닿으니 철조망에 지뢰표지판이 쭉 쳐 있다. 철망 옆에 있는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나아가 백화산 남봉에 올라섰다. 남봉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태극기가 꽂혀있고 표지석에다 봉화대가 있었다. 전망이 너무 좋아 15분간 머물렀다. 남쪽부터 북쪽까지 푸른 바다가 일렁거리고 오늘 처음 올라간 봉우리가 아스라이 어림되고 팔봉산과 금강봉이 뚜렷이 조망됐다. 태안읍이 발아래 있고 넓은 평야가 펼쳐있어 시원스러웠다. 서산은 한해 벌어 세 해 먹고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정도로 풍족한 산물이 있고 백화산에서 바라본 태안군은 국립공원답게 바다와 산과 평야와 도시가 어우러져 산수화보다 아름다운 경관이었다. 이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니 힘들고 고달픈 산행의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 것 같았다.
남봉에서 조금 내려오니 약수터가 있고 유서 깊은 사찰 태을암이 자리 잡고 있었다. 태을암에는 보물 432호의 마애삼존불상이 법당에 모셔져 있었다. 좀 더 내려오니 백조암의 기묘한 자태가 눈길을 끌었다. 정맥능선은 도로를 따라가서는 안 되는걸 알고 왼쪽으로 진행하여 산에 붙어 산을 내려와 603번 도로가 지나가는 모래기재에 도착했다. 모리기재 정맥에는 태안군 교육청이 있었다. 시계를 보니 16시 35분이기 때문에 좀 더 진행하기로 했다. 태안 여자 상업고등학교 뒷산을 지나자 정맥은 시멘트 도로 길로 한동안 나아가고 비포장도로로 군부대를 향한다. 부대 앞 정문에서 통과할 수가 없어 왼쪽으로 우회하여 산을 올라가 159.1봉 삼각점을 확인했다. 159.1봉에서는 건너편 동쪽의 백화산의 거대한 암봉이 돋보이고 있었다. 159.1봉에서 나아가는 정맥은 가파른 내리막길이 되었다가 오르막이 되어 작은 봉우리에 이른다. 왼쪽 아래로는 레미콘 회사가 퇴비산을 마구 깎아내 마치 커다란 요새가 들어선 듯하였다. 바로 소원면과 근흥면의 경계인 32번 도로가 지나가는 이름 모를 고개에 도착하여 산행을 마쳤다. 오늘 걸은 거리가 무려 30.6km나 되는 대단한 산행기록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