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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풍란애 원문보기 글쓴이: 세빙
아내의 눈물
1. 만 남
따사로운 태양이 캠퍼스 이곳저곳에 내리쬐고 있다. 겨우내 움 추렸던 소나무, 잣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 가지위에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긴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펴고, 우뚝 솟은 인문대 건물 앞뜰에는 얼어붙었던 땅위로 파릇한 잔디가 고개를 내민다. 봄의 향기를 풍기면서 다가오는 전령사는 봄바람도 아니고, 따사로운 봄볕도 아니다. 이곳저곳 의자와 잔디위에 옹기종기 앉아서 재잘거리는 여학생들의 가벼운 옷차림과 미소, 그리고 정겨운 이야기 속에서 풍겨 나온다.
먼 고향을 떠나오면서 낭만과 원대한 꿈을 안고 대학 캠퍼스를 찾아 온지 어언 2년이 지나고 3학년으로 입문하는 시점에서 휴학을 해야만 했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의 수술 때문이었다.
하루하루 땅을 일구어 자식의 뒷바라지를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나마 국립대학이라 1학기 등록금은 40만원, 책값은 5만원, 방세는 송아지 한 마리를 팔면 사글세 10달은 보낼 수 있었다. 그 외 생활비등을 마련하다 보면 당시 농사를 지어 도시로 종합대학을 보낸다는 것은 무척이나 고생을 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1년 동안 학업을 중단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하여 휴학을 결심했다.
전남대학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어머니의 수술은 성공이었다. 보름동안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통근치료를 해도 된다는 주치의 말에 어머니는 시골로 내려 가셨다.
휴학서류를 제출하고 학과장님, 지도교수, 선배님, 후배님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캠퍼스를 나서는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가 않았다. 비록 1년 후에 다시 돌아오겠지만 잠시 학업을 중단하고 사회인으로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무거운 부담감과 동료들보다 뒤떨어진다는 아쉬움이 가슴속 깊이 스며들고 왠지 서글픔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석양에 붉은 노을이 드리우고 서서히 어둠으로 향하는 시각에 발걸음을 재촉하여 일자리를 구하기 위하여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코너를 돌아 담 벽에 붙어있는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급구 가게에서 일할 사람 구함. xx화원’
“계세요!”
가볍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주인아주머니가 물 조리개를 들고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직원 구한다면서요?” “일을 할까합니다만..”
“혹시, 전에는 무얼 하셨나요? 이런 일을 해보셨나요?”
“처음입니다. 잠시 휴학하고 아르바이트 좀 하려 구요”
주인아주머니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 그럼, 내일부터 나올 수 있어요? 7시에 출근하여 점심은 여기서 함께 먹고 일하는 시간은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입니다. 보수는 월 40만원이구요”
이렇게 일할 자리를 구하고 난 후 집으로 들어왔다.
‘xx화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3평 남짓한 나의 자취방으로 들어와 나만의 공간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누웠다. 동쪽으로 조그맣게 나있는 창문과 그리고 덜렁하게 놓여있는 책상, 차곡차곡 쌓여있는 법률서적들이 어쩐지 주인을 찾아 부르는 것 같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는 했지만 오늘만큼은 그냥 조용히 있고 싶었다. 어느새 창문 너머로 둥그런 달빛이 스며들어 고요한 적막 속에 어머니의 품안이 그립기만 했다. 고향을 떠나 유학생활을 하면서 성공하겠다는 일념과 어떠한 어려움이 나에게 오더라도 꿋꿋하게 고난을 이기자고 수차례 다짐하면서 다시 한 번 굳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도 시골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의 굵은 손과 주름진 얼굴이 항상 가슴속 깊이 남아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그 다음 날,
첫 출근을 하기 위하여 일찍 일어났다. 아침밥을 준비하기 위하여 부엌으로 갔다. 쌀을 씻고 물을 부어 냄비에 넣어 연탄불에 올려놓고 어제 밤에 라면을 끓여 먹었던 그릇은 기름기가 남아있어서 헹구는 손이 미끄러웠다. 자취생활도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능란한 솜씨로 아침상을 준비하는데 얼마 걸리지 않는다. 냄비에 씻은 쌀을 넣고 물은 손등까지만 오르게 붇는다. 그리고 난 후 연탄불에 올려놓는다. 이후 다른 냄비에 묵은 김치를 썰어 넣고 고기가 없으니까 콩기름을 두어 방울 떨어뜨리고 석유난로에 올려놓고 끓인다. 김치찌개가 끓기 시작하면은 미원(당시에는 쇠고기다시다 보다 싸다)을 조금만 뿌리고 맛을 보면 바로 이 맛이야!
6시 50분에 ‘xx화원’에 들어섰다. 먼저 비좁은 가게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화분들을 밖으로 옮기고 가게 내부를 깨끗이 청소했다. 화분에 물도 주고 바닥에 물도 뿌리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4월의 따사로운 날씨에 유리창 너머로 가로수들이 늘어서 있고 나뭇가지에는 잎 새들이 가벼운 봄바람에 가냘프게 나부끼고 있었다. 도로에는 승용차, 시내버스, 오토바이들이 제각기 출근을 서두르고 인도에는 오고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창문 너머로 꽃을 감상하며 지나간다. 가게에는 아름다운 꽃들, 장미꽃, 안개꽃, 후레지아, 백합, 카네이션, 국화, 수선화 등 수 많은 꽃들이 제각기 특유한 향기를 내뿜으며 사람들을 유혹하였다. 물론, 그 꽃들 속에 묻혀있는 나는 향기로운 꽃향기에 취하여 있노라면 시간이 멈춰진 무릉도원이나 다름이 없었다.
‘xx화원’에서 일한지 보름째 되던 날이었다.
오후 5시가 지나서 하루해가 저물어 가는 시각에 석양에 기울어지는 태양빛이 가게 창문으로 비추어지고 책상위에 놓여있는 토플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 나는 책에 몰두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손님이 들어 온지도 몰랐다.
“실례합니다.”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든 순간 조그마한 키에 제법 복스럽고 유난히도 살결이 하얀 아가씨가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내 앞에 서있었다. 그리고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우며,
“저. 장미꽃 한 송이 주 세 요”
“장미꽃 한 송이만 필요하세요? 남자 친구에게 선물하시나 보죠?”
“아니에요. 친구 집에 가는 길에 빈손으로 가기가 뭐해서 꽃이나 사가지고 갈려 구요.”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꽃가위를 들고 장미꽃 한 송이를 꺼내 안개꽃을 약간 곁들어 예쁘게 포장을 했다.
“얼마죠?”
“오백 원입니다.”
그때 그녀는 일천 원 지폐를 꺼내 건네주었다. 천원을 받고 거스름돈 오백 원을 거슬려 주려고 하는데 거스름돈이 없었다. 가게를 비워놓고 바꾸기로 가기도 그렇고 해서
“저. 거스름돈이 없어서 그러는데 나중에 여길 지나갈 일이 있으면 그때 잊지 말고 주세요. 오늘은 그냥 가시구요”
그녀는 겸연쩍게 웃으면서
“친구 집에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드릴께요.”
“그렇게 하시죠. 7시에 가게 문을 닫으니까 그때까지만 오면 됩니다.”
그녀는 가게를 떠났다.
어느덧 땅거미가 드리워지고 하루 일과를 마치면서 가게를 정리하였다. 밖에 있는 화분들을 안으로 옮기고 셔터 문을 내렸다. 그때까지 그녀는 오지 않았다. 아마. 친구 집에서 지체하다보니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며칠이 지났다.
점심을 주인 집 안방에서 먹고 있을 때 주인아저씨가 잠시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정군”
주인아저씨 목소리였다.
“정군! 누가 찾아왔네. 예쁜 아가씨인데 자네 애인인가?”
하면서 농담 삼아 말을 건네 왔다.
‘누구지?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더구나 애인은........., 혹시, 그녀가 아닌가? 아니면 아침마다 출근길에 꽃을 사가는 시청직원인가?’
기대에 부풀어 가게로 나갔다. 그런데 이게 누구인가? 오백 원 아가씨였다.
“미안해요. 그때 시간 맞춰서 온다는 것이 늦어서 가게 문이 닫혀 있어서, 그냥 집으로 갔어요.”
“그래요. 난 기다렸는데........”
그런데 그녀의 손에는 봉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거, 호떡인데요. 이 앞에 호떡집에서 사왔는데, 좋아 하세요. 먹음직스러워 사왔어요. 미안하기도 하구요”
하면서 봉지를 내놓았다. 거기에는 이제 막 구어 낸 따끈따끈한 호떡이 김을 모락모락 나는 것이 제법 군침이 흘렀다. 아마 그때 그 시절의 호떡은 지금 생각해도 아주 맛있었던 것 같다.
그녀와 나는 오랜 친구가 된 것처럼 거리감 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먹서먹하지도 않았고 싫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주 좋아하지도 않았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를 만난 것처럼 그런 사이가 되었고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 왜 그리 할 이야기가 많았던지 모른다.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나갔다.
“우리 친구해요. 서로 위해줄 수 있는 그런 친구”
“좋아요. 서로 필요한 사람이 되면 더욱 좋겠죠?”
그녀는 다시 한 번 들린다고 말을 하고 떠났다. 싫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반할 정도로 푹 빠지지는 않았다. 그냥 그렇게 좋았다. 말을 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또렷또렷한 목소리, 부드럽고 하얀 살결 그게 마냥 좋았다.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책을 한권 들고 왔다. 그 책을 나에게 주면서 제안을 했다.
“제가 시간이 없어서 그러는데, 레 포트를 써주면 저녁식사를 근사하게 대접 할 께요.”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단지, 일하랴 숙제하랴 힘은 들겠지만 한 번 해보기로 했다. 그녀와 근사한 저녁식사를 한다는 기대감에 흔쾌히 승낙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막상 레 포트를 작성하려고 보니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가게를 보면서 손님을 맞아 꽃을 팔고 다 팔리면 꽃 직판장에 가서 꽃을 소매로 가져오고 또한 주문이 들어오면 자전거로 배달을 해주어야 하고 잠시 틈을 내어서 레 포트를 작성하다보니 5일이 지났다. 하여튼 약속한 날까지 밤잠을 자지 않고 완성하였다.
그날이었다.
가게 문을 닫을 무렵, 그녀가 왔다.
“레 포트 다 되었어요? 내일 교수님께 제출해야 되는데...”
“물론, 다 되었습니다. 저는 약속을 저의 신조로 삼고 있습니다. 아마, 훌륭한 점수를 받을 거예요”
“그래요. 그럼 가시죠. 고생 많았으니까 약속한 대로 근사한 저녁식사 하러 가요”
“뭘. 그까짓 거, 누워서 헤엄치기죠!”
그녀와 난 식당으로 갔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소주 한 병을 시켰다. 그리고는 나 석잔, 그녀는 넉 잔, 제법 취기가 올랐다.
“대단하시네요? 소주를 좋아 하나요?”
“네. 맥주보다는 소주가 최고죠!”
저녁식사를 마치고 지산유원지 전망대로 올라갔다. 전망대에 올라서서 시내 야경을 바라보니 마음이 뻥 뚫린 것 같았다. 하늘은 촘촘히 박혀있는 별들이 초로초롱 빛났고 시내가로등 불빛들, 자동차 불빛들, 모두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웠다. 모처럼 느끼는 희열일까? 아니면 모처럼 만의 여유일까? 너무 쫓기는 인생을 살아온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지도 모른다.
현실은 꿈이 아니고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자정이 가까웠다. 인적은 드물었고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낯 설은 남남 간에 너와 내가 만났는데....”
김정수의 ‘철없는 아내’라는 노래였다.
그녀는 나의 노래감상에 푹 빠져 있었다. 아마 노래솜씨가 감미로워서 그랬는지 계속 감상에 젖어 있었고 우리는 달과 별빛을 받으며 서서히 사랑에 빠져들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살며시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그녀의 볼에 입맞춤을 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렸다. 밤하늘에 빛나는 달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출 때 그녀의 볼은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서서히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2. 서울로 가는 길
1년을 쉬고 3학년에 복학을 했다. 이제는 앞으로 2년 동안의 대학캠퍼스 생활이 시작되었고 사회인으로서 성장하기 위하여 얼마만큼 알차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 때로는 낭만적인 꿈을 마음껏 펼쳐보고 싶고 때로는 취업을 하기 위하여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각오 속에 마음을 다시 한 번 가다듬기로 하였다.
그해 겨울이었다.
창문밖에 새 하얀 눈꽃송이가 펄펄 대지에 내리고 있었고 인적이 고요한 적막 속에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책을 가까이 하기엔 마냥 좋은 밤이었다.
‘우리 민법은 제2조 1항에서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쫒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 고 규정하여.... 하여....’ 고요함속에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조아리고 있으려니 문득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그녀가 아닐까?’
라는 기대감에 창문을 열어보니 하얀 눈송이를 온몸에 뒤집어 쓴 채로 그녀가 엷은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벌써 그녀를 보지 못한지 일주일이나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는 방으로 들어오는 순간 소주 한 잔을 하였는지 제법 술 냄새가 풍겼다.
“잘한다. 여자가 밤늦게까지 술 마시며 다니고, 정신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응?”
“미안해. 그럴 일이 좀 있어서...”
한동안 그녀를 나무랬다. 그러자 그녀는
“엄마가 나보고 결혼하래”
“누구하고?”
“거, 있잖아. 우리 오빠친구, 자주 우리 집에 놀러 온다고 한 사람.......”
“모 고등학교 교사란 사람”
“응”
“좋아하지도 않다면서...”
“하지만, 엄마는 직장 좋겠다. 인물 좋겠다. 마음에 꼭 들은 모양이야! 하 두, 엄마 성화에 화가나 소주 한 잔 했어.”
“나 집에 안 들어갈래..”
물론, 그녀의 어머니는 나와의 교제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학생신분이고 가정을 구성할 능력도 없고 그녀의 나이는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우리의 만남은 적극적으로 만류되었고 결혼이란?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집에서는 외출이 금지 되었고 외출할 때는 보고를 해야 했던 것이다. 오늘도 그녀는 모임이 있다 하여 몰래 나에게 왔던 것이다.
사랑과 결혼, 사랑과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부모님들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날 밤 오랫동안 이야기 하면서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어떠한 유혹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참고 견디자고 무언으로 약속하면서 그녀를 산수동 그녀의 친구 집으로 데려다 주고 뒤돌아 오는 길에 빌딩 위, 도로 위, 가로수 위에 끊임없이 내리고 있는 함박눈이 차곡차곡 쌓여지고 칠 흙같이 어두운 밤에 간간히 자동차만 엉금엉금 기어갈 뿐, 인적이 드문 인도 위에는 나의 발자국만 뿌드득 뿌드득 소리만 내고 있었다.
덧없이 시간은 흘렀다.
4학년이었다. 자취방 생활을 청산하고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시험공부에 전념하기 위하여 친구들과 같이 정보를 교환하고, 보다 더 공부에 매진하기 위해서였다.
시험이 끝나고 우리는 머리를 시킬 겸 완도 보길도의 여행길에 올랐다. 완도행 시외버스를 타고 완도에 도착하여 여객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12시가 다되어서였다. 거기에서 보길도로 들어가려면 카페리오 배를 타고 30분 소요된다. 이어 보길도에 도착하니 그 안에서 운행되는 버스가 있었다. 그 버스를 타고 20분정도 가다보니 윤선도의 유적지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윤선도는 조선중기 문신, 시조작가,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해옹(海翁), 본관은 해남이다. 그는 1638년 병자호란이 평정된 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경상도 영덕으로 귀양 갔다가 이듬 해 풀려나 보길도의 부용동과 금쇄동에 은거하였다. 1651년에는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를 지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보길도의 수려한 경관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 이 일대를 부용동이라 하고 격자봉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라 칭하고 심이정각, 세연정, 회수당, 석실 등을 지어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부용동을 둘러보고 바닷가로 뛰어들었다. 넓게 펼쳐져 있는 바닷가, 그리고 바닷가에는 매끄러운 조약돌이 수 없이 깔려져 있었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조약돌이 굴러왔는지, 그야말로 모래사장이 아니라 자갈사장이었다.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바닷물하며 출렁거리는 파도를 바라보면서 그녀와 나는 모처럼 만의 행복한 마음이었고 모든 잡념을 떨 구어 버리고 오늘은 우리 둘만의 시간이었다.
밤이 되었다.
하늘에는 그녀의 눈썹 같은 하얀 초승달이 높게 떠있었으며 그 주위에는 수많은 별들이 초롱초롱 몸맵시를 뽐내고 있었다. 적막한 가운데 간간히 들려오는 파도소리는 사랑의 노래였으며 도란도란 들려오는 텐트 속 연인들의 이야기는 달콤한 사랑의 마음이었다. 어디서 왔는지 5-6명의 젊은 학생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키타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은은하고 감미로운 노래 소리가 파도소리와 어우러져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우리는 그리 멀지않은 갯바위에서 저 머리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사랑의 속삭임을 나누었으며 우리의 정은 깊게 다두어지고 우리의 사랑은 그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는 그런 사랑으로 발전해갔다.
이듬해 겨울이었다.
종강을 하고 서울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시험도 시험이지만 그녀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우선 취직을 해야 했다. 정들었던 광주의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가는 길에 그녀를 만났다.
“숙아! 조금만 참아다오. 서울에 가면 회사가 많아 금방 취직이 될 꺼야. 그때까지만 참고 있어줘. 올라가면 전화 할 께!”
어쩌면 이몽룡이가 한양에 과거보러 갈 때 춘향이의 마음이 저러했을까? 사랑하는 ‘님’을 남겨두고 떠나는 나의 심정은 쓸쓸하고 공허하기만 했다.
잠시 서울에서 가까운 안양 셋째형 집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취업을 하기 위하여 여러 기업체에 원서를 접수했다.
보름째 되던 날이었다.
‘xx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다. 합격되었으니 면접시험에 참석하기를 통보해왔다. 강남 서초동에 있는 회사로써 직원 모두 스무 명가량 되는 조그마한 회사였다. 출근을 앞두고 광주에 내려갔다. 그리고 그녀를 만났다. 한 달만의 만남이었던가? 그녀는 무척 수척해 보였고 그녀의 어머니는 교편을 잡고 있는 오빠친구와 결혼을 해야 한다고 그동안의 어머니의 성화에 시달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나와의 결혼은 무조건 반대였다. 아직은 안정적인 직장도 없거니와 나이 차이도 한 살 차이여서 얘기도 꺼내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그녀는 괴로웠던 것이다. 그것보다도 막상 서울에 가면 거처할 방과 생활비는 무엇으로 해야 할지 현실적인 두려움이 앞섰다. 그렇다고 나의 집에서 이렇다 할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서울로 떠나야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녀는 괴로웠다. 부모님의 말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하는 사람을 따르자니 부모님께 불효를 하는 것이고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숙아! 현실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사는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느냐 는 말처럼 우리 젊음이 있으니까 같이 고생하자꾸나. 지금은 어머니께 불효가 될지언정 훗날 우리의 마음을 이해해줄 날이 있겠지...”
마침내 고속버스가 들어와 한참 망설이던 숙이는 집에서 나온 옷차림 그대로 나의 손을 붙잡고 버스에 오르고 말았다. 광주를 출발한 고속버스 차창너머로 세차게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우린 두 손을 꼭 잡고 어려울수록 사랑의 힘으로 헤쳐 나가자고 굳게 다짐했다.
우리는 서울 독산동에 도착하여 조그마한 단칸방을 구했다. 보증금 30만원에 월세 7만원인 두 세평 가량인 연탄 방이었다. 우리는 시장에서 이불하나, 숟가락 둘, 젓가락 둘, 밥그릇 둘, 냄비 하나, 쌀 등 꼭 필요한 살림살이를 사들였다. 그리고 우리만의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서울은 참 피곤한 도시다. 그리고 무척 바쁜 도시였다. 지방에서 한걸음 걷는 시간에 서울은 두 걸음 걷는다. 지방에서 새벽 6시에 일어나면 서울은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한다. 그만큼 한걸음 앞서는 도시였다. 시루 속에 콩나물처럼 밀집해 있는 지하철 속에서 삶의 생동감을 느꼈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누구를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지를 감내할 수 있는 그런 도시였다.
회사를 다닌 지 보름째 되던 날이었다.
조그마한 단칸방에는 햇빛도 들지 않는 반지하식의 방이어서 통풍이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연탄가스가 새어 들어왔다. 결국은 연탄불을 피우지 못하고 냉방에서 지내야만 했다. 따뜻한 남쪽지방에서 생활해온 우리로서는 견디기 힘든 겨울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는 생활비가 거의 떨어져 가고 앞으로의 살아갈 길이 막연했다.
하루는 숙이가 취직을 하겠다고 했다.
마침 서초동에 있는 삼풍백화점이 개점을 앞두고 직원을 채용했다. 그래서 숙이는 그 백화점에 이력서와 졸업증명서를 제출하고 합격자 통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소식이 없었다. 그러던 중 고생을 모르고 부유하게만 자라왔던 숙이는 몸살감기에 앓아눕고 말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끙끙 앓아누워있는 숙이의 야윈 얼굴을 바라보는 나의 두 눈에 눈물이 아른거렸다.
“숙아! 미안해. 이렇게 고생만 시킬 줄 알았다면 혼자서만 올라올걸 그랬어.”
“괜찮아! 내가 좋아서 선택한 길이었으며, 열심히 살면 언젠간 좋은 날이 올꺼야.”
우린 두 손을 꼭 잡고 말을 잇지 못했다.
앓아누워 있는 숙이를 방에 두고 부엌으로 갔다. 얼마 남지 않은 쌀을 꺼내어 씻고 냄비에 넣어 불에 얹어놓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때 어떻게 알았는지 광주에서 올라오신 숙이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어떻게 알고 찾아 왔을까?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단지 같은 마을에서 살았었던 친구뿐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숙이가 취직을 하기 위하여 고향에 있는 친구에게 졸업증명서를 보내달라고 편지를 했는데 그 친구가 어머니께 주소를 가르켜 주었던 것이다.
숙이의 어머니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앓아누워 있는 숙이를 부둥켜안고 서로가 울기 시작했다. 참으로 그 자리에 서있기가 민망했다. 아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식을 염려하는 모정이 이것이라 했는가.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서있을 수기 없었다.
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학창시절 숙이와 펑펑 쏟아지는 눈송이를 맞으며 대학캠퍼스를 거닐던 그때 그 함박눈은 참 솜털처럼 부드럽게만 느껴졌었는데, 오늘 서울에서의 이 함박눈은 왜 이다지도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텅 빈 가슴속에는 끊임없는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현실은 꿈이 아니라는 것!’
3. 신혼의 꿈
겨울이 지나고 봄기운이 완연한 3월에 접어들어 3월 19일로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 마침내 숙이의 어머니는 우리들의 사랑을 인정하고 어쩔 수없이 단념을 하고 결혼을 승낙한 것이다.
서울에 살면서 결혼식은 고향인 광주에서 하기로 했다.
결혼식 전날, 우리는 강남 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광주행 고속버스를 타기 위하여 숙이는 대합실 의자위에 앉아 있었고 나는 승차권을 구입하러 창구로 갔다. 그때 숙이가 나에게로 헐레벌떡 뛰어와서 신혼여행 가방을 도둑맞았다고 울먹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 신혼여행 가방 속에는 형에게 빌린 카메라와 옷 등이 들어 있었는데 한눈 판 사이에 들치기한테 고스란히 절취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서울에서는 눈뜨고 코 베어 간다.’는 말이 절실히 느껴지던 날이었다. 이제 막 우리들의 신혼 출발을 하는 시점에서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마냥 그 일에 집착할 수가 없었으며 마음만 상하기만 하여 가슴깊이 묻어 두기로 했다.
그 다음날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훗날 우리가 기반을 잡을 때 가기로 하고 생략하기로 했다. 어쩌면 일생에 한 번 있는 신혼여행을 가지 못하는 나의 마음이야 접어 두고라도 아내에게는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떳떳하지 못한 신랑을 만나서 남들도 다가는 신혼여행을 가지 못하는 마음이 오죽했으랴. 해외는커녕 제주도라도 가지 못하는 마음이 얼마나 씁쓸했겠는가?
친구들과 피로연을 무등 산장에서 치루고 그날 밤 우리는 마땅히 갈 때가 없었다.
결국, 연애시절에 거닐던 지산유원지 전망대에 올라 옛 추억을 되살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던 것은 무엇일까? 좋아하는 마음일까? 사랑하는 마음일까?
요즘 젊은 세대들은 결혼 조건으로 첫째는 풍부한 경제력이요, 둘째는 튼튼한 직업이요, 셋째는 사랑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서로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여기까지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아내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며, 내가 좋아하는 것은 아내도 좋아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사랑하는 마음인 것이다.
다음 날,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광주로 다시 올라와 처가 집으로 갔다. 달갑지 않게 맞이하는 장모님의 표정, 그리고 마음이 편하지 않은 나의 마음, 남들은 결혼하면 기쁘고, 즐겁고, 신혼의 꿈에 부풀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신혼의 즐거움보다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피부에 느껴지기 때문에 마음 한 구석은 씁쓸하기만 했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사랑의 힘으로 꿋꿋하게 헤쳐 나가기로 굳게 손을 잡았다.
서울 화양동에 전세 850만원인 방 한 칸에 신혼 방을 차렸다. 그리고 우리의 새로운 삶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내가 다니던 xx출판사의 회장과 전무가 자금을 빼돌려 잠적하는 바람에 부도가 났다. 결국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직장을 잃고 말았다. 이젠 가정을 이루고 있고 부양하는 아내도 있는데 앞으로의 생활이 막막하였다.
어느 날 같이 근무했던 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남양알로에 건강식품 대리점을 개점하였는데 당분간 나와서 일하면 어떻겠냐고 문의가 왔다. 몇 개월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라도 그 다음 날 출근을 했다.
007 가방을 하나 준비하여 알로에 건강식품을 팔기 위하여 영업사원으로 나섰다. 건강식품 하나를 팔면 30%의 이윤을 배당 받는다. 기본급은 전혀 없었다.
아침에 간단하게 회의를 하고 난 후 알로에 아보민, 알로에 엑기스, 알로에 화장품을 007가방에 가득 담아 낯 설은 서울 땅에서 물건 하나를 팔기 위하여 길거리로 나섰다.
내 나이 스물일곱, 대학을 다닐 때는 차마,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먹기 위하여 아니 살기 위하여 이보다 더한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늘엔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리고 아스팔트 위에는 섭씨 40도에 육박한 열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한 여름에 무거운 가방을 들고 길거리를 걷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새삼스럽게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나의 활동 무대는 압구정동이었다. 그래도 부유층이 밀집해 있는 지역을 공략하기로 했다. 그러나 나의 전략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구입했으며 방문판매를 한다는 것이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아파트, 빌딩, 사무실은 쫓겨나기 일쑤여서 결국 조그마한 옷가게, 지하상가, 상점들을 상대로 물건을 팔기 시작했다. 대부분 물건을 구입한 층은 서민층이었다. 옷가게 점원, 부동산 직원, 허스름한 구멍가게 등. 왜일까? 옛말에
‘초록은 동색이요, 가제는 게 편’이라는 말처럼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1달치 월급을 받고 사표를 냈다. 다시 한 번 시험공부를 해보라고 아내는 권했다.
결국 아내는 xx전자회사에 취직하고 나는 건국대학교 도서관으로 공부를 하러 다녔다.
어느 날이었다.
고향에서 장인어른, 장모님께서 서울에 올라왔다. 봉천동에 사는 큰아들 집을 경유하여 우리 집으로 온다고 했다. 아마도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올라왔던 모양이다. 모처럼 큰딸을 만나기 위하여 올라오신 장인어른, 장모님께 식사를 대접하기 위하여 결혼 예물이었던 아내의 금팔찌를 팔았다. 아내가 금은방에서 금팔찌를 내놓은 순간에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울쌍이 되었지만 한사코 슬픈 표정을 애써 감추려고 하는 것이 역력했다. 생활비는 거의 없고 모처럼 올라오신 부모님들에게 따뜻한 저녁식사를 대접하여 보내드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평소 우리는 한 달 생활비가 25,000원이다. 그나마 쌀은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덕분에 해결되지만 위 생활비로 꾸려나가다 보니 반찬은 거의 고추장과 간장뿐이다.
금팔찌를 팔고 받은 돈이 12만원이었다. 그 돈을 가지고 돼지고기와 과일을 샀다. 비록 우리는 고추장과 간장으로 생활할지언정 그 모습을 보여 드릴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에 장인어른과 장모님 그리고 큰처남 식구들, 이렇게 저녁식사를 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내는 부모님 앞에서 행복한 얼굴을 애써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다음 날
아내는 일찍 일어나 부모님 몰래 대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공중전화로 회사에 전화를 했다. 불가피하게 오늘 하루만 결근을 하겠다고 했다. 물론 부모님께서는 내가 직장에 다니고 있고 아내는 집에서 살림을 하고 있는 걸로 안다. 아침밥을 먹고 8시에 그동안 입지 않았던 양복을 꺼내 입었다. 출근을 한답시고 일어서는 나의 모습이 한심했다. 장인어른, 장모님께 작별인사를 하고 대문을 나섰다. 대문을 나서기는 나섰는데 갈 때가 없었다. 책가방이라도 가지고 나왔으면 공부를 하러 가겠지만 혹시나 부모님께서 직장을 그만둔 것을 의심할 것 같아서 빈손으로 나왔던지 길거리를 마냥 배회하기만 했다.
‘어디로 갈까?’
무작정 걷고 있는 내 신세가 애처로웠다. 사람은 일을 해야 만이 살아가는 맛이 나는데 일을 하지 못하고 마냥 방황하는 신세가 새삼스럽게 한심하기만 했고 내 자신이 밉기만 했다.
‘미리 더 열심히 준비했더라면 졸업하고 이런 신세가 되지 않았을 것을.......’
한강변을 걸으며 이리저리 사심에 잠기다가 오후 늦게 집으로 들어왔다.
가로수 은행잎이 노랗게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는 가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아침이면 아내를 회사로 보내고, 도시락을 챙긴 나는, 도서관으로 향하는 그런 힘든 생활이 반복된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힘들게 가정을 꾸려가는 아내를 위하여 자취생활에서 터득한 음식솜씨를 발휘하여 미역국을 끓여 아침 밥상을 들여갔다.
우린 밥상 앞에 앉았고 그리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아내는 미역국물을 한 숟가락 뜨고서
“너무 싱거운 것 같은데.”
“뭐가 싱겁다고 그래, 짜게 먹는 사람치고 멍청하더라!”
“그래. 난 짜게 먹으니까. 멍청하다. 어쩔래!”
하고 툭 쏘았다.
모처럼의 쉬는 일요일이라. 고생하는 아내를 위한다는 것이 무심코 나온 말이 화근이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화가 난 나는
“밥 안 먹어!”
하면서 숟가락을 툭 놓는다는 것이 미역국 그릇 가장자리에 정통으로 맞아버렸다.
이어 국그릇이 엎어지면서 미역 한 가닥이 튀어서 아내의 머리 위로 날아가 얹였고, 국물이 이마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화가 난 아내는
“내가 왜 엄마 말을 듣지 않고 서울로 올라와, 누구를 위해 이 고생을 한지 모르겠다”
하면서
곧 바로 살아온 인생 타령을 하면서 흐느끼기 시작했고 그걸 본 나는 방을 박차고 나오고 말았다. 화를 달래기 위하여 한 동안 골목에서 서성이다가 슈퍼로 달려가 소주 한 병을 들이 마시니 마음이 약간 가라앉았다. 가뜩이나 서로가 힘든 시기에 아내의 마음을 읽어주며 상처가 될 만한 말은 하지 말아야 했었다.
시간이 지나 마음을 가다듬고 소주 한 병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눈물이 얼룩진 얼굴을 훔치며 창가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고 엎지러진 미역국물은 방한가운데 그대로 방치해 있었다.
“미안해! 이렇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 내가 신경이 예민해졌나봐. 정말 미안해!”
하면서 걸레를 들고 방을 치우고 나서 사온 소주를 마시려고 하는데 갑자기 소주병을 뺏어서 그대로 병체로 들이 마시는 것이 아닌가.
‘그래, 얼마나 힘들고 답답했으면 그럴까. 마셔라. 마시고 마음이 안정되면 이해해주겠지’ 하는 마음에 말리지 않았다.
“자기야! 속 버리니까. 안주도 먹어”
하면서 김치를 살며시 내밀었다.
...................
얼마 후,
아내는 취기가 올라 왔고 나 또한 취하여 감정이 원래 상태로 돌아와 이야기하다가
“우리가 잘 살아보겠다고 부모님 반대를 뿌리치고 머나 먼 서울까지 왔는데, 싸우지 말자. 응! 속이 넓지 못해서 미안해!”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화를 낸 내가 미안해! 공부하느라 힘들 텐데.. 속 좁은 내가....”
하면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처럼 금방 돌아서 다시 원위치로 오는데 무심코 나온 말 한마디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다. 말조심 해야지........
아내가 임신을 하였다(아마, 일요일, 미역국 사건 때, 서로 소주 한 병씩을 마시고 비몽사몽간에 벌어진 일인 것 같다) 축복받지 않은 임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기를 갖는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무척 당황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아내는 아기를 낙태하려고 병원에 여러 번 갔다고 했다. 그때마다 귀중한 생명을 없앤다는 것이 죄책감이었으며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결국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의 공부를 위하여 남편의 꿈을 위하여 낙태하려고 결심했다. 병원에 들어서서 수술비용을 물었다. 수술비는 5만 원이라 하여 아내는 지갑을 열어보니 현금 4만 원밖에 없어서
‘이 생명은 엄마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태어날 생명이로 구나’
라고 생각하고 수술을 포기하고 돌아와 버렸다고 한다. 그런 일을 나중에서야 듣고 할 말을 잊었다. 그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우린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살기로 했다.
건국대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저녁 11시가 넘어서야 도서관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과일가게를 지날 때 문득 아내가 바나나가 먹고 싶다는 말이 생각났다. 걸음을 멈추고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보니 동전 7백 원이 있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주머니! 바나나 있습니까? 얼마죠?”
“ 어서 오세요. 1킬로에 2,500원입니다.”
“ 아주머니! 저에게 동전 7백 원 밖에 없는데 바나나 한 개만 팔 수 있습니까?”
과일가게 아주머니는 어이가 없었던지 그리 좋지 않은 표정으로 물끄러미 쳐다보더니만 바나나 한 개를 내주었다. 아마도 바나나 한 조각만 사가지고 간 사람은 한 번도 없었던 모양이다.
바나나 한 조각을 봉지에 담아 집으로 왔다. 아내는 직장에 다니느라 피곤했던지 충열 된 눈으로 나를 맞이했고 임신한 몸이라 뭐가 먹고 싶었던지 옆에는 밥그릇에 담겨있는 볶은 쌀을 먹고 있었다.(그때는 간식 대신 쌀을 후라이펜에 넣어 설탕을 약간 넣고 연탄불에 볶으면 고소한 먹거리가 된다. 쌀은 부모님이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니까. 얼마든지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숙아! 임신했을 때는 먹고 싶은 것이 많을 것인데 돈이 없다보니 하나밖에 사오지 못했어.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많이 사 올께! 응!”
아내는 봉지를 펼치고 바나나를 꺼내면서
“고마워! 이렇게 먹는 것보다는 난,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가 날 생각해 주는 마음이 더욱더 행복해!”
하면서 바나나를 먹고 있는 아내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다. 그러한 아내를 바라보는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으로 우리는 꼭 안은 채로 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세상 살아가는 방법이 왜 이렇게 힘들까? 머나 먼 서울 땅에 의지할 곳도 없이 빈 몸으로 올라와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그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 가려고하니 그리 삶이 순탄하지가 않았다.
그 해 10월로 접어들었다.
아내의 배는 불러오고 더 이상 직장을 다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고향인 광주로 이사하기로 결심했다. 이사비용이 없어서 친구에게 부탁했다. 마침 친구가 소유하고 있는 1톤 트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트럭은 영업용이 아니고 자가용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단속을 피하기 위하여 날이 어두어지면 출발하기로 했다.
10개월 전 서울로 올라오면서 꼭 꿈을 이루고 고향에 갈 때는 ‘錦衣還鄕(금의환향)’ 하겠다고 다짐했었건만 초라한 모습으로 고향 길에 오른 나의 심정은 착찹 하기만 했다.
이삿짐을 모두 실고 그동안 옆방에 살던, 특히 유난히도 우리를 챙겨주었던 다솜이 엄마와 작별을 했다. 같은 집에 세 들어 살면서 어려운 우리 사정을 제일 잘 알고 가까이서 항상 도와주었던 고마운 새댁이었다.
그날 밤 트럭운전을 하는 친구와 그 아내, 그 옆에 나의 아내가 타고 한사코 광주까지 따라가서 이삿짐을 풀어주겠다는 사촌동생과 나는 트럭 짐칸에 비집어 틀어 앉아 고속도로를 질주해 달렸다. 유난히도 달빛이 밝았다. 짧은 서울에서의 신혼 생활동안 즐거움보다는 쓰라림이 더 많았고 웃는 모습보다 고뇌의 모습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달빛을 가르며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트럭 속에서 멀어져 가는 서울 땅을 뒤로한 채 곰곰이 눈을 감았다. 나의 노력이 부족하였으며 더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신의 섭리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랫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4. 내가 가야할 길
광주에 도착하여 화정동에 조그마한 가게 하나를 얻었다. 서울에서의 전세금으로 여기에서는 방하나 딸린 가게를 얻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화장품 판매하는 가게를 개업했다. 이제는 몇 개월 후면 첫아이가 태어날 것이고 아이를 키우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이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말했다.
“여보! 이제는 아이도 태어날 것이고 나이도 서른이 다 되어가니까 이제까지의 공부는 접어두고 공무원으로 진로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까?”
“집안 살림은 조금도 걱정 말고 열심히 공부하길 바래. 난 당신을 열심히 뒷바라지 할 테니까.”
‘그렇다. 이제는 현실을 직시하자. 내 실력이 여기밖에 되지 않으니까 새로운 각오로 다시 다른 길을 선택하자. 이젠 나 혼자가 아니니까.’
이젠 어렴풋이 내가 가야할 방향이 어디인지를 느낄 수가 있었다.
아내는 화장품 가게를 꾸려나가면서 생활을 했다. 나는 그리 멀지 않은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오곤 했다.
아내는 1주일에 용돈을 500원으로 책정했다.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내가 용돈이 필요 없지만 담배는 피워야 했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오직 담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 ‘솔’이라는 담배 값이 500원이었는데 한 갑을 사면 하루 반 정도 버틸 수 있다.
하루는 새벽 2시에 독서실을 나오니 배가 남산만한 아내가 문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잠자지 않고 왜 나왔어! 몸도 힘 들 텐 데.”
“아니야, 잠도 오자않고 그래서 바람 좀 쐬려고 나왔어! 달도 참 밝네!”
적막이 감도는 밤,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었다. 한참 걷다가 난 담배꽁초를 발견하고 몸을 구부렸다.
“왜? 쓰레기 주우려고? 참. 착하기도 하네. 자기가 쓰레기 주워버리면 청소부 아저씨는 뭘 먹고 살 어?”
“그게 아니고, 필요할 때가 있어서......”
하고 휘갑을 쳐버렸다.
나는 아내 몰래 담배꽁초를 비닐봉지에 모았다. 그리고 담배가 떨어지면 그 담배꽁초를 풀어서 나무젓가락 두개를 가지고 한 개는 약간 두꺼운 종이 끝에 고정시키고 다른 한 개는 반대쪽 끝에 고정시켜 그 위에다가 얇은 창호지를 놓아 풀어놓은 담배가루를 얹고 나서 필터 하나를 끝에 넣어 말아서 풀로 붙이면 담배 한 개가 완성 된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비가 온 날은 실적이 떨어진다. 결국은 도서관에 출장가면 모래를 담아놓은 재떨이에 장초가 수북이 쌓여있다. 그날은 운이 좋은 날이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아차린 아내는
“그놈의 담배는 끊지. 몸에 좋지도 않은 담배를 왜 끊지 못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구박도 많이 받았다.
3월 29일이었다.
저녁밥을 먹고 잠시 있으려니 갑자기 아내가 진통이 시작되었다. 아마도 아이가 태어날 모양이었다. 아내를 데리고 급히 개인병원으로 갔다. 아내가 자주 다니던 ‘xxx산부인과’에 입원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6시간이 지나도 출산을 하지 못했다. 기다리는 동안 아내 머리맡에서 손을 잡고 있으려니 아내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워했다. 의사가 진찰을 한 후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하면서 나간 후 간호원이 방으로 들어왔다.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를 보다 못한 나는 잠시 복도로 나왔다. 이윽고 간호원이 나오더니만
“저기요. 아저씨 오기 전에 어떤 부부가 아이를 출산하고 나갔는데요, 아이 엄마 머리맡에서 앉아 있다가 갑자기 신랑이 뺨을 맞았거든요! 조심하세요. 아마 아내가 아이 낳을 때 제일 미운 사람이 남편이래요. 고통스러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나 봐요”
하면서 겁을 주었다.
“아가씨! 아무렴 신랑 뺨을 때리겠어요?”
‘진짜라니까요! 제가 왜 거짓말 하겠어요“
하고 ‘씩’ 웃더니만 1층으로 내려갔다. 방으로 들어가니 아내의 진통은 계속되었으며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서 힘을 북돋아 주었다. 이윽고 산부인과 의사가 들어와 구슬땀을 흘리면서 애를 써보았지만 어려웠다. 결국 의사는
“골반이 약해서 쉽지 않겠어요.”
하면서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할 수 없이 아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으며 택시를 잡으려고 기다려도 오늘따라 택시가 오지 않았다. 몇 분 후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고 기독교 병원으로 향했다.
기독교 병원에 도착하여 응급실을 거쳐 곧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 거기에서도 첫아이이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자연분만을 해야 한다고 의사들은 권했다. 그러나 4시간이 경과해도 어려울 것 같아 재왕절개를 하기로 결정했다.
잠시 후 아이가 태어났다.
건강한 사내아이였다. 이젠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된 셈이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으며 화장품 가게 수입은 겨우 20만원밖에 되지 않아 먹고살기에 빠듯하였다. 그래서 두어 달만 돈을 벌기로 했다. 사직공원에 위치한 ‘일동제약’이라는 대리점에서 봉고차를 운전하면서 일을 했다. 군산 김양식장에 들어가는 염산을 배달하기 위하여 날마다 군산을 왔다 갔다 하였다. 그리고는 퇴근 후 틈틈이 시험 준비를 하였다.
9월에 접어들어 내년 3월에 치루게 될 법원일반직 시험에 도전하기 위하여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광주고시학원에 입문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학원에 등록한 것은 처음이다. 학원에 다닌다는 것은 처음이었으며 가난하게 자란 나는 그만한 여력도 없었다.
광주고시학원에는 법원직, 검찰직반 강의를 시작하는데 학원생은 30여명정도 되었다. 대부분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일부는 재학생도 있었다. 내 나이 서른이었다. 학원생들 중에 나의 또래는 3명이었으며 스물아홉은 10명, 나머지는 거의 비슷비슷한 나이였다. 모두들 한 두 번은 시험의 쓴 고배를 마신 사람들이었다.
그 이듬해 시험을 치루고 합격자 발표에 나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낙방이었다. 나중에 성적열람을 해보니 합격 커트라인은 82점이었다. 그러나 나의 점수는 80.5였다. 평균 1.5가 부족하여 떨어지고 말았다. 병역을 면제 받은 나로서는 국가병역의무를 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한이 되기도 하였다. 방위만 받았어도 3점 가산하면 합격인데.....
그날 밤 같이 공부했던 k군은 합격했다. k군이 나의 처지를 익히 아는지라 정말 안타까운 마음으로 위로를 한답시고 소주 집으로 데리고 갔다. 쓰디쓴 소주잔을 기울이며 멀리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사코 k군은
“내가 떨어지고 네가 합격되었어야 하는데 미안하게 됐다”
라며 위로를 하였지만
“나의 실력이 부족하여 이렇게 되었는데 별소릴 다한다.”
며 소주만 연거푸 들이켰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소주방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승강장 슈퍼에서 소주 한 병과 쥐포 한 마리를 사서 혼자 마셨다. 집에 들어가기가 미안했으며 아내에게 무어라 변명을 할 것인가? 술이 많이 취했다.
‘그래도 걱정하고 있으니 빨리 들어가자’ 하는 생각에 골목길을 걸어서 올라가니 저 멀리 대문 앞에서 아이를 업고 있는 아내가 눈에 띄었다.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며 걸어오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내는 다가와서
“자기야! 다음 기회가 또 있잖아. 결혼하여 4년을 참아왔는데 앞으로 1년을 참지 못하겠어!”
“한 번만 더 고생하면 되잖아! 응!”
아내의 등에 업혀져 새롬새롬 잠들어 있는 아이를 바라보니 이 못난 아빠를 만나 가엽기 그지 없었다.
며칠이 지났다.
화장품가게도 잘 되지 않아 가게 정리를 하고 쌍촌동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아내는 시내 충장로 옷가게로 출근하기로 하고 아이를 광천동에 살고 계시는 장모님에게 잠시만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아내는 저녁 10시가 다되어서야 퇴근을 했으며 나는 조용한 집, 골방에서 공부를 했다.
어느 날
치과를 경영하고 있는 친구가 찾아왔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 둘도 없는 친구였다. 내가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을 익히 아는지라 위로를 한답시고 찾아왔던 것이다. 고마운 친구였다. 우리는 모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런데 가고난 후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화장대 서랍 안에 생활비를 넣어 두고 왔으니 어려울 때 가계에 보태라’
하면서 전화를 했던 모양이다. 아내가 나의 자존심 때문에 말을 못하다가 나중에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려 깊고, 깊이 생각하는 마음에 저절로 고개가 숙연해졌다. 고마운 친구였다.
이젠 이 시험은 마지막 시험이었다. 마지막 남은 한 번의 시험에 탈락한다면 더 이상 시험을 치루고 싶어도 치루지 못한다. 연령 제한이 만 30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항상 머릿속에 잠재해 있고 남들보다 5점을 앞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정신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자 아내는
“무슨 시험이든지 한 명을 채용하더라도 그 한 명이 바로 나다.”
라는 자신감으로 공부하라고 충고했다.
아내가 옷가게를 출근한지도 6개월이 지났다. 나는 내년 1월 말경에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작년에 시험 떨어지고 근무하고 있던 xxx변호사 사무실을 두기로 했다. 그 선배는 나의 처지를 잘 아는지라 2백만 원을 빌려주었다. 이자는 받지 않을 테니 합격 후에 갚으라고 하면서 선뜻 내주었다.
가을의 문턱에 접어드는 9월 20일경, 1백만 원을 아내에게 주고 1백만 원을 가지고 난 아내와 첫째아이를 남겨둔 채 속리산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무래도 3개월 동안의 시간으로 일생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집을 떠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떠나는 길에 아내는
“집 걱정은 하지 말고 시험공부에만 열중하고 항상 몸 건강히 하세요.” 라는 말을 하면서 울먹였다.
“앞으로 3개월 동안, 길면 긴 시간이지만, 짧으면 짧은 시간인데 그때까지만 참고 잘 지내, 울지 말고, 응!”
아쉬운 작별을 했다. 어쩌면 한 가정의 기둥으로서 지켜야 할 자리를 비워둔 채 떠나는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만은 한편으로는 잠시나마 무거운 가장의 책임을 묻어둔 채 시험공부에만 열중하는 것이 더 현명한지도 모른다. 내가 가장의 자격으로서 서있는 자리와 부족한 자격으로 서있는 자리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두 아이의 아빠의 자격이 되기 위해서는 잠시 헤어지는 마음이야 고통스럽겠지만 미래를 위하여 아니 우리 가정을 위하여 오늘의 슬픔을 접어 두기로 했다.
5. 속리산
첩첩이 쌓인 나무 숲속에 우뚝 솟은 3층 건물 하나가 있었다. 건물 뒤에는 산봉우리가 하늘을 찌르듯 솟아 있었으며 앞에는 맑은 물이 냇가를 이루어 아래로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소나무, 잣나무, 감나무 가지를 오고가는 산새들은 제각기 먹이를 구하느라 숨 가쁘게 지저귀고 맑은 시냇물 속에는 은빛 송사리 떼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헤엄치고 있었다.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기 위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찾아온 수험생들이 300명가량 되었다. 법원직, 검찰직공무원 시험을 전문적으로 강의하고 있는 ‘제일고시학원’은 각 과목 강사들이 하루에 한 과목씩 강의를 하기 위하여 서울에서 내려오곤 했다. 나는 제일고시학원에서 그리 멀지않은 황해동 민가에서 여장을 풀었다. 허리가 좋지 않은 나는 침대생활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총무과에 사정하여 간신히 온돌방인 민가를 차고 들어갈 수가 있었다. 산중이어서 그런지 민가는 대략 열대여섯 가구였으며 도로를 따라 곧바로 위로 올라가면 외 속리산이며 2킬로미터쯤 계속 올라가면 ‘법주사’라는 절이 있었다. 방은 두 칸으로 되어 있었으며 큰 방에는 나를 포함하여 3명이 생활하고 그 옆방에는 2명이 생활하고 있었다. 뒤뜰에는 풍성한 감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수험생들 중에는 3년 동안 여기에서 생활하면서 공부를 계속 해온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1년쯤 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난 3개월쯤 남겨놓고 새로이 시작 하려니 마음은 마냥 바쁘기만 하였고 낯 설은 곳이어서 그런지 환경적응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시험날짜는 얼마 남지 않았고 경쟁자들은 수 없이 많은데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이제는 마지막 시험이고 나이 제한으로 더 이상 시험을 치루고 싶어도 치루지 못하기 때문에 이번에는 기어코 합격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이 마음속에 가득 하였다.
‘제일고시학원’에서는 ‘신의 아들’로 불리워졌다. ‘신의 아들’은 나 혼자이며 ‘신의 딸’은 6명, 방위병 제대를 마친 사람은 가산점 3점으로 ‘장군의 아들’로 칭하였다. 시험 문항 수는 200문제이며 여기서 남들보다 10문제를 앞서야 한다. 아울러 원호대상자인 평균 10점을 먹고 들어가는 ‘번개의 아들’은 3명이었다.
가을은 서서히 깊어만 가고 제법 추운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시험은 한 달 정도 남아 있었으며 법 과목을 제외한 교양과목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강의를 받았다. 법 과목은 만점을 맞지만 교양과목이 문제다. 10년 이상을 손 놓아버렸던 국어 과목이 문제였다. 고등학교 때 배워보고 다루지 않았던 고문들....
어느 날 고향후배인 'L‘군이 시험도 얼마 남지 않았고 그동안 공부만 하느라 머리좀 시킬 겸 ’법주사‘에 다녀오자고 했다. 그는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이런 말을 했다.
“형님! 법주사에 가면 유명한 스님이 사주를 본다는데 관운이 있는지, 없는지, 한 번 봐보죠? 작년에 합격한 사람들 중에 거기에서 점을 보고 합격 했는데 족집게처럼 잘 맞추던데...”
“무슨 그런 말을, 그게 맞겠느냐! 모두 미신이지”
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도 믿던지, 믿지 않던지, 사주 한 번 보는데 어려울게 뭐가 있겠느냐 하는 생각에
“좋아! 바람 좀 쐬고 스트레스를 풀 겸 갔다 오자꾸나!”
하고 법주사로 올라갔다. 같은 집에 공부하는 동료들 4명을 동행하여 갔다. 먼저 내가 제일 연장자라 하여 첫 번째로 태어난 일시와 이름을 적어냈다. 그러자 그 스님은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가 사주를 뽑기 시작했다. 한 동안 말이 없더니 입을 열었다. 합격률은 80%, 낙방율은 20%라고 했다. 또한 북쪽으로 가지 말고 남쪽으로 가야만이 일생이 평탄하리라고 했다. 그리고 나머지 4명은 똑같이 50:50이라고 하면서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복채 1만원을 주라는 뜻이었다.
“형님은 좋겠수! 형님만 합격하고 우리는 낙방한다는 말이구먼.....”
“이것은 말 그대로 사주, 관상이며 열심히만 노력하면 자네도 합격 할꺼야! 쓸데없는 걱정 말고 최종 마무리나 잘 하세.”
우리 일행은 법주사를 내려왔다.
12월에 접어들어 눈이 유난히도 많이 내렸다. 산간지대이어서 그런지 매서운 눈보라가 세차게 불었으며 항상 대지 위에는 눈이 녹지 않고 계속 쌓여만 갔다. 눈보라가 그친 적막한 밤에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머나 먼 고향에 남겨놓고 온 아내와 아들 녀석이 떠올랐다. 오늘도 아내는 눈물을 흘리면서 지내고 있을까? 언젠가 집안 일이 걱정되어 전화를 걸었는데 아내가 목 메인 목소리로 통화를 했다. 어렴풋이 눈물을 억지로 참고 대화를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밤은 유난히도 집 생각이 났고 이렇게까지 하면서도 낙방이 되면 얼굴을 들고 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태어나게 될 둘째 아이를 갖고 몸도 힘이 들 텐데 옆에서 간호를 해주지도 못하고 마음만 아프기만 했다.
12월 하순에 전화가 왔다. 아내가 곧 둘째 아이를 출산하기 위하여 수술 날짜를 잡아 놓았다고 했다. 첫째 아이를 재왕절개 하여 낳았는지라 둘째 아이도 수술을 해야만 했다. 이 소식을 듣고 3개월 동안의 속리산 생활을 청산하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한 달을 아내 곁에서 최종 마무리를 하기로 마음먹고 속리산을 내려왔다. 하산하는 길에 ‘제일고시학원’을 뒤돌아보며 굳게 마음먹었다.
‘추억 속에 남아 있을 여기 이곳을 훗날 아내의 손을 잡고 다시 한 번 찾으리라’
6. 내가 서야할 자리
12월 21일 둘째 아이의 출산일이었다.
광주병원 산부인과에서 수술절차를 밟아놓고 부산하게 움직였다. 예전에 아내가 개인 병원인 ‘xxx산부인과’에서 첫째 아이를 출산할 때 자연분만을 하기 위하여 22시간을 고통 속에 지내다가 결국은 수술에 들어가기 위하여 ‘기독교병원’으로 옮겨서 거기에서도 4시간을 버티다가 자연분만을 하지 못하고 재왕절개로 출산을 했다. 어찌나 고생을 하였던지 이번에는 곧바로 수술로 들어갔다. 약 30분정도 시간이 흘렀다. 수술실 안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잠시 후 간호원이 아이를 안고 나오면서 보호자를 찾았다.
“보호자 분 계세요! 축하해요! 아들이에요!”
난 다급히 달려가 둘째 아이를 보았다. 제법 오똑한 코에 갸름한 얼굴이 엄마를 꼭 닮았다. 잠시 후 아내는 병실로 옮겨졌고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일주일 동안 병원 입원실에서 보냈다. 누워있는 아내를 간호하면서 작은 상을 방 한구석에 놓고서 시험공부를 계속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시험을 한 달 앞둔 나의 마음이 편안했으며 아내 또한 공부를 하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잃지 않고 고통을 참으며 위안을 삼았으리라.
아내는 둘째 아이를 옆에 재워놓고 누워있었고 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시간 맞추어 담당간호원이 들어와서 공부를 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제가 이제까지 병원개업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아이 낳으러 와서 간호하는 남편이 병원에서 상 펴놓고 공부하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하면서 겸연쩍게 미소를 지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아내와 둘째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총정리에 들어갔다. 아내는 서서히 몸이 회복되었으며 첫째 아이는 벌써 5살이었으며 둘째는 건강하게 아주 잘 자라 주었다.
시험 전날, 후배들과 같이 서울로 떠났다. 서울에 도착하여 여관에 투숙하여 내일 치루게 될 시험에 대비하여 꼭 한 번 더 보아야할 문제들을 다시 검토했다. 정독이 아닌 다독으로 넘어갔다. 잠자리가 바뀌면 쉽게 잠을 자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고민에 쌓였다.
‘어떻게 해야 잠을 잘 잘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 끝에 작년에 우황청심환도 먹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어서 후배를 데리고 여관 앞 생맥주 집으로 갔다. 생맥주를 먹게 되면 약간 취하여 잠은 잘 오고 새벽에 소변이 마려워 잠에서 일찍 깰 수 있기 때문이다.
후배 왈
“형님! 이것 먹고 공부한 것 다 까먹으면 어떡해요?”
“참. 별소릴 다 한다. 안주로 까마귀 고기만 먹지 않으면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마시기나 해! 내가 다 책임 질테니까.”
하고 큰 소리 쳐 놓았는데 그 후배는 낙방하고 그 이듬에 합격을 했다.
다음 날 일찍 시험장으로 갔다. 1월 하순이어서 그런지 날씨가 제법 추웠다. 1교시 시험이 시작되었다. 중요한 시간이었다. 아마 1교시가 끝나고 나면 대략 합격인지, 불합격인지, 판가름이 난다. 교양과목이 대부분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1교시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면서 마음속에는 평온한 기운이 감돌았다. 예전에 느끼지 못하는 이상한 성취욕구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학창시절부터 시험만 보아왔던 사람이라면 직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점심을 먹고 마지막 법 과목을 치루고 난 뒤 친구, 후배들과 같이 그동안의 마시고 싶어도 마시지 못한 소주를 기울이면서 시험에 대한 평가를 했다. 그런데 같이 시험을 치룬 친구, 후배들은 석연치 않은 얼굴이었다. 그 사연인즉, 예상외로 전년에 비하여 법 과목이 어렵게 출제되었다고 했다. 물론 나는 법 과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유리한 상황이었다. 상대평가이고 가산 점수가 없는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만큼 커트라인이 낮아질 것이며 수년 동안 법 과목만 공부했던 나에게는 그 보다 다 좋은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교양과목만 잘 소화하면 합격이나 다름없었다.
오랜만에 마신 소주이어서 그런지 얼큰하게 취한 상태로 광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고속도로를 한참을 질주해오고 있는데 소주를 과다하게 마신 탓인지 소변도 마렵고 속도 울렁거렸다. 고속버스가 정기적으로 쉬는 휴게소까지 기다리려니 도저히 참을 수 가 없었다. 참다못한 나는 슬그머니 기사 옆으로 가서
“선생님! 운전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제가요, 생리적으로 화장실을 자주 가는 편이어서 도저히 참을 수 가 없거든요, 한 번만 세워주시면 안될까요.”
“안됩니다. 고속도로에서 아무 곳이나 정차하면 큰일 납니다. 휴게소 외에는 안 됩니다.”
“죄송합니다만, 급해서 그러거든요. 모두들 잠들어 있고 밖에는 캄캄하니까, 한 번만 세워주세요”
라고 애걸복걸 하다 보니 마침내 기사아저씨는 마지못해 간이 승강장으로 버스를 세웠다.
고맙다는 인사도 할 겨를 없이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갔는데, 내 일행들을 포함하여 10명 정도가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버스에서 뒤 따라 내리는 것이 아닌가. 결국은 그 사람들을 내가 구제한 셈이 되었다.
광주에 도착하여 일행들과 터미널 부근 대포 집으로 들어가 홀가분하게 소주를 마시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결과야 어떻든, 일단 시험이 끝났다는 안도감에 모처럼 갖는 나만의 휴식이어서 그런지 마음은 평온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첫째아이가 “아빠! 아빠!”
하면서 입을 딱 벌리면서 반가워하였고 한 달이 지난 둘째 아이는 아빠 얼굴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롬새롬 잠이 들어 있었다. 아내는
“ 자기야! 그동안 고생 많았어! 결과가 어떻게 되든 최선을 다했으면 그걸로 만족해! 욕심이야 있지만 현재 열심히 살았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라고 한마디 했다.
2월 18일 합격자 발표를 하루 앞두고 시내 학원가에서는 그 전날 저녁 7시에 합격자 명단을 입수하여 미리 공고가 붙는다. 그래서 그 날 오후 6시에 합격자 명단을 보기 위하여 집을 나섰다. 나서는 길에 아내는
“자기야! 이번에는 꼭 될 꺼야! 걱정 말고 잘 다녀와! 합격하면 바로 전화 해줘!” 나보다 더 조바심을 갖는 사람은 아내였다.
집을 나서서 시내 학원가로 갔다. 시내 학원가에 도착하여 ‘학 원 사’ 가는 길목에서 바로 갈 수가 없었다. 긴장감 때문에 소주 집으로 들어갔다. 일단 소주 한 잔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기 위해서다. 콩나물에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숨을 길게 내뿜으며 눈을 감았다. 대학을 졸업하여 5년 동안 지내왔던 수많은 일들이 전광석화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려운 일도 많았으며 눈물도 많이 흘렸던 그 세월! 그러나 먼 미래를 생각하며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왔던 나! 그리고 아내! 아직 세상살이가 무언지 모르고 잘 자라는 지회! 승회! 우리 모두 나의 가족들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왔던 것 같다.
길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네 온 싸 인 불빛 아래서 밤거리를 배회하고 있었고 저만치 ‘학 원 사’ 벽보판 앞에는 합격자 명단을 보기 위하여 많은 수험생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빨리 달려가서 보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학원사가 멀리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주사위는 던져졌고 결과는 나와 있는데 ‘매를 맞더라도 빨리 맞는 것이 좋다.’ 라는 말을 세기며 일어선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 여전히 소주만 들이 키고 있었다. 어느덧 8시가 가까웠다. ‘학 원 사’ 앞에는 잠시 전에만 해도 수험생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제는 몇 명 남지 않은 수험생들만 있었다. 안경을 고쳐 쓰고 서서히 훑어 내려갔다.
‘xx지방법원 합격자 총 15명, 첫 번째, 두 번째,..........’
긴 안도의 숨이 나왔다. 벅찬 마음을 안고 공중 전화박스로 갔다. 제일 먼저 알려 주고 싶은 사람은 아내였다. 가만히 수화기를 들고 번호판을 눌렀다. 잠시 후
“당신이야! 지금 뭐하고 있어! 빨리 집에 오지 않고, 축하해!”
“어떻게 알았어?”
“동생이 미리 알고 전화해주어서 알았어!”
그러고 보면 내가 제일 늦게 알았으며 제일 늦게 전화를 해준 셈이 되었다.
훌훌 털어버리는 마음으로 집으로 왔다. 대문을 들어선 순간 아내는 힘껏 달려들어 안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자기야! 고생했어!”
라는 단 한마디 하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는 새벽이 밝아 올 때까지 그동안의 살아왔던 얘기들을 나누었다. 아내는 곤히 잠들어 있는 두 아이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제까지 흘렸던 그런 눈물이 아닌 기쁨의 눈물이었다.
--끝--
첫댓글 마지막 글이 제 마음을 울립니다.
몇칠전에 다녀가신 사모님의 모습이 아련히 그려지네요.
님의 인생을 제가 엿본듯^^*
추억은 아름다운 거라지만 참으로 진실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하신 두분이시네요*
두분을 뵙기에 제가 행복합니다*^^*
멋진 글 감사합니다^^*
참,아련히 스쳐가는 옛삶과 사랑은 늘 가슴속에 담고 살아 가렴니다.감사합니다
ㅎㅎ 아름다운 사랑을 하셨군요^^*
이런사랑 또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