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의 위기와 대안의 패러다임으로서 원효의 화쟁사상
제8강 정보화사회의 빛과 그늘 정보화사회는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퍼지이론 対 順不順
이도흠/한양대 국문과 강사
ahurum@hanmail.net
산사에도 인터넷이 들어왔다
깊은 골짝 산사에도 인터넷이 들어왔다. 스님은 선방에 앉아 미국의 CNN을 통해 미국 군인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장면을 생생히 본다. 한 미국인은 인터넷을 통해 한국의 산사를 관람한 후 미지의 스님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인터넷으로 설법을 하고 들으며 시주도 한다. 바야흐로 정보화의 물결은 산사까지 찾아들었다. 《디지털이다(Being Digital)≫의 저자 네그로폰테는 아톰에서 비트로 대전환하는 것의 위력을 설명하기 위하여 재미있는 비유를 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일당 1원 짜리 일을 하는 사람의 급여를 매일 두 배로 올려주면 한달 뒤엔 급여가 얼마일까? 처음엔 1원에 시작하였지만 그의 월급은 28일인 2월이라면 1억 3천여만원, 31일인 달에는 10억 7천여만원에 달한다. 디지털 시대의 우리는 28일에서 31일에 이르는 이 마지막 3일에 살고 있다는 것이 네그로폰테의 지적이다. 그만큼 디지털 시대의 변화는 급진적이다. 그 진폭과 깊이는 아날로그적 감각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우리는 지금 문명의 교차기에 있다. 산업사회는 탈산업사회, 정보화사회로 급속도로 전환하고 있다. 올드미디어는 뉴미디어로 속속 대체되고 있다. 현실이 아닌 사이버공간에서 쇼핑이 이루어지고 투자 상담이 오가며 성행위까지도 행한다. 도서관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고 교환한다. 아날로그로 저장되었거나 운영되었던 것들, 불경조차 속속 디지털화한다. 그리스 시대이래 모든 것을 진리와 허위, 옳음과 그름으로 나누던 이분법적 패러다임이 해체의 위협을 받고 카오스와 퍼지의 패러다임이 자리를 잡고 있다. 정보화사회, 뉴미디어시대, 사이버와 인터넷 시대, 디지털 시대, 카오스와 퍼지식 패러다임-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용어로 마땅한 것이 없으니 잠정적으로 정보화사회로 명명하고서 논의를 시작하기로 한다. 지금의 정보화사회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삶과 의식, 불교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정보화사회는 서양으로부터, 서양의 과학기술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러면 동양과 한국은 단순한 문명과 과학기술의 수입국으로 머물 것인가? 원효의 화쟁사상은 이에 대해 뭐라 답할까?
정치영역: 텔레데모크라시인가, 새로운 전체주의인가?
한 할아버지가 서울시가 만든 홈페이지에 손자의 도움을 받아 정책 하나를 이메일로 보냈다. 시장은 그것을 보고 좋은 생각이라 판단하여 그 다음 날 회의에서 채택하였고 그런 사실을 다시 이메일로 할아버지에게 보냈다. 그날 그 할아버지는 얼마나 마음 뿌듯하였을까? 몇날 며칠을 걸려 한 자 한 자 입력하다가 그 불경 원문이 어느 사이트에 올라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전문을 고스란히 내려받을 때 스님의 심정은 어떨까? 산업사회에서는 희귀본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원로학자 구실을 할 정도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자가 위세를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누구라도 몇 번 클릭만 하면 백과사전 수천 권 분량의 정보를 안방에 앉아서 접할 수 있다. 정보화사회는 지식과 권력의 원천인 정보를 공유하고 분점한다. 자연히 권력의 위계질서가 파괴되고 탈중심화한다. 누구든 컴퓨터를 통해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정책을 제안하고 자신이 원하는 후보와 정책에 투표를 하고 곧 바로 답, 또는 피드백을 확인할 수 있다. 직접 민주정치의 길이 다시 열린 것이다. 그러니 이 사회는 텔레데모크라시를 실현하여 대중의 정치참여를 고양하고 다양한 의사와 견해를 수렴할 수 있다. 반면에 몇몇 빅 브라더(big brother)가 정보를 독점하고 통제한다면 이 사회는 산업사회보다 훨씬 더 억압이 내재화한 전체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파워엘리트층은 정보와 채널을 독점하고 몰래 카메라가 개인의 사생활을 엿보듯 개인을 통제하고 있다. 우리의 비밀스런 잠자리까지도 몰래카메라로 감시되고 빅 브라더의 뜻에 어긋날 경우 ‘O양의 비디오’처럼 공개된다고 생각해 보라. 텔레데모크라시는 꿈일 뿐, 우리는 개인의 사생활마저도 철저히 감시되고 통제되는 사회로 가고 있다. 컴퓨터와 인공위성, 로보트공학을 결합한 이 메카니즘의 통제력과 조정력, 수용능력은 가히 상상을 불허한다. 예를 들어 CIA가 바늘 구멍 만한 몰래카메라로 제3세계의 한 지식인을 감시한다고 하자. 그의 모든 행위는 인공위성을 통하여 수신되어 미국의 CIA 본부에 저장된다. 그러다 어느 날 CIA의 한 요원이 그 필름 가운데 한 부분을 보여주며 계속 미국을 비판하는 글을 쓰고 그런 행동을 할 경우 인터넷에 올린다고 협박한다면 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그리고 디지털 격차(digital devide)는 양적인 면과 질적인 면 모두에서 현실화할 것이다. 양적인 면에서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설치하고 다룰 줄 아는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사이의 격차가 산업 사회의 계급 격차 이상의 불평등을 야기할 것이다. 질적인 면의 격차는 더욱 큰 문제이다. 디지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정보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 정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인터넷을 아무리 잘 하더라도 거기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양적인 정보를 모으는 데 급급한 집단과 정보를 모아 새로운 지식과 지혜를 창출하는 집단 사이의 격차는 새로운 지배관계를 설정할 것이다. 당연히 후자는 새로운 지식 계급으로 부상할 것이고 이들은 정보를 모아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면서 그렇지 못한 자들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정보화사회가 진행될수록 현재의 불평등과 독점, 억압구조가 산업사회보다 더 굳건하고 깊게 뿌리를 내릴 가능성 또한 크다.
경제영역: 빛의 속도로 거래하고 착취한다
경제와 사회 영역도 마찬가지이다. 정보화사회에서는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거래하고 소비한다.” 한국의 사무실에서 나스닥에 상장된 증권에 투자할 수 있다. 인터넷에 오른 남 캘리포니아의 요트를 사이버 머니로 구입하면 며칠 안에 그 요트가 주문자의 집에 당도한다. 정보혁명으로 산업구조가 유통과 전자, 통신 위주로 재편되고 공장자동화(FA), 사무자동화(OA), 가정자동화(HA)가 단행되었다. 세탁기 사용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매일매일 엄청난 양의 가사노동에서 벗어났는데 휴대전화로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는 집의 주부는 얼마나 자유로울까? 노동자들은 중금속으로 가득한 작업실에 로봇을 대신 보내고 남는 시간을 여가로 활용할 수 있다. 어둠은 경제의 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발전론자들은 전자매체의 확산으로 근대화와 산업화가 미진하였던 영역에도 이의 혜택이 고루 퍼지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케이블, 위성통신, 컴퓨터를 매개로 선진 중심국가에 의한 주변의 제3세계에 대한 잉여착취와 저발전과 억압과 통제는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빛의 속도로 거래한다는 것은 빛의 속도로 착취를 할 수 있음을 뜻한다. 헤지펀드는 우리나라가 IMF사태 때 당하였듯 하루만에 수백 억 달러를 빼내가 한 나라를 언제든 국가 부도의 위기에 놓이게 할 수 있다. 자동화는 노동의 억압에서 노동자를 구출할까? 정보화사회는 계획수립으로부터 작업의 감시, 평가에 이르기까지 전 노동의 공정을 기술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자동화가 지금의 추세로 진행될 경우 20%만이 노동을 하고 80%가 실업의 소외와 좌절감에서 나날을 연명할 ‘2 대 8의 사회’를 형성할 수 있다. 게다가 정보화사회는 아주 사소한 실수로도 핵전쟁과 같은 대형사고가 날 수 있는 위기의 사회이다. 보도가 되지 않을 뿐 지금도 병원이나 공장의 컴퓨터의 미세한 오류로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컴퓨터를 사용한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바이러스나 운영체제의 오류 하나로 오랜 세월의 연구나 노력을 한숨에 날려 본 경험이 있다.
사회문화영역: 쌍방향 소통을 하는 능동적 주체인가, 고독한 조난자인가?
산업사회의 대중문화 속에서 부품화하고 원자화하던 대중들의 위상이 바뀌고 있다. 그들은 영화든 텔레비전이든 작가의 의도대로 감상하고 해독하도록 강요되었다. 그들은 감독의 의도대로 웃고 울고 흥분하는, 욕망의 대상, 조작의 대상, 상품소비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보화사회에서 그들은 하이퍼텍스트를 만들면서, 쌍방향의 미디어를 활용하면서 스스로 미디어를 선택하고 미디어 텍스트를 창조하는 주체로 거듭나고 있다. 인터넷은 말 그대로 정보의 바다이다. 여기서 네티즌들은 항해를 하며 정보를 취합하여 단순히 양적 확대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창조한다. 인터넷을 통해 무한한 정보를 서로 나눌 수 있고 이로 새로운 정보를 무진장하게 창출할 수 있다. 이것은 인류가 창조한 어떤 매체보다 효과적이고 기하급수적이다. 사이버 공간은 익명성과 쌍방향소통으로 인하여 현실 공간에서 작용하던 가부장적 권력이 무너지는 장이기도 하다. 내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니 명예훼손이나 불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마음껏 포르노 사이트에 들어가 열람할 수 있고 특정인과 특정 기관을 비판하는 글을 올릴 수 있다. 어떤 사이트에선 순진하고 고독한 청년으로 행사할 수 있고 어떤 사이트에선 지적이고 예리함을 갖춘 지식인처럼 글을 쓸 수 있다. 이처럼 익명성과 다중정체성이 보장되기에 현실공간의 권력과 권위를 마음껏 조롱하고 풍자하고 공격할 수 있다. <딴지일보>를 비롯한 안티사이트의 등장은 이를 입증한다. 반면에 정보홍수는 개인을 무력화하고 소외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 인터넷 중독증은 식음을 전폐하고 인터넷 게임을 하다가 벌써 여러 사람이 죽을 정도로 새로운 문명병으로 부상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원조교제가 확산되고 음란물이 아무런 제재 없이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유통되면서 도덕은 황폐화하고 있다. 진지한 비판이 사라지고 인신공격성 비판과 장난으로 올리는 글들이 정보의 바다에 쓰레기를 떠다니게 한다. 인터넷은 개인의 사고와 삶을 단순화하고 있으며 개인을 더욱 고립시키고 있다. 인터넷을 떠도는 네티즌은 전 세계를 향하여 무한대로 열린 대화를 하는 어엿한 주체가 아니다. 그는 대화를 시도하지만 항상 혼자인, 인터넷 바다의 고독한 조난자일 뿐이다.
세계체제: 정보고속도로는 바리케이드 없는 식민고속도로
이들보다 더 강력하고 역기능이 심한 정보화사회의 최대 적은 인터넷 제국주의, 혹은 미디어 제국주의이다. 미국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점유율은 전 세계에 걸쳐 80%에 이르러 컴퓨터를 사용을 하든 사용을 하지 않든 그럴 때마다 엄청난 로열티를 미국에 지불한다. 인터넷은 기본통신규약, 즉 TCP/IP (Transmission Control Protocol/ Internet Protocol)에 따라 정보를 검색하고 그 정보를 내려 받거나 혹은 이를 통해 상업적 거래를 할 수 있는 세계컴퓨터조직망이다. 원래 인터넷은 1969년 미국국방성과 미국과학재단의 자금지원으로 미국국방성연구계획처에서 만들어진 최첨단 정보통신매체이다. 당초 국방 및 연구목적으로 개발되었으나 최근에는 파일 전송, 다른 컴퓨터 네트워크 및 컴퓨터 게시판에 대한 접속, 검색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인터넷은 이에 필요한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을 제공하고 있다. 인터넷의 정보를 관장하는 호스트 또한 80% 이상을 미국이 점하고 있다. 서부 개척시대에 인디안 땅에 깃발을 먼저 꽂은 백인이 그 땅을 소유하였듯, 미국은 도메인 닷 컴을 독점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한다.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마이크로 소프트, IBM, 엑슨 등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은 컴퓨터, 옥상의 위성통신 수신기, 케이블 등을 통하여 제3세계의 기업과 정부를 자기네가 마음대로 통제하고 조작할 수 있는 네트워크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또 이 네트워크는, 포스트모더니즘 비평이나 신자유주의에서 보듯, 관료와 지식인, 문화산업가와 비평가, 예술인 등 소위 지식인들을 포섭하여 첨병으로 활용하고 있다. 첨병들은 강단에서, 언론에서 미국식 가치, 양식, 상징, 이데올로기, 제도와 체제를 전파하는 전도사 역할을 한다. 이 네트워크에 들어온 자들의 결속은 점점 더 강화되고 이의 대외적 영향력은 점점 더 증가하였다. 이로 이제 제3세계에서는 국가조차 이 네트워크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으며, 오히려 거꾸로 이 네트워크가 제3세계의 국가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를 더욱 강화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미국은 케이블, 인공위성, 컴퓨터를 연계시켜 미국의 군사력과 정보력을 증강시켜 왔다. 미국은 80년에만 군사용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비용으로 30억달러를 지출하였다. 한때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COBOL을 개발한 주된 추진 세력도 미국 국방성이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은 위성통신 감청망인 에셜론(ECHELON)을 이용하여 전 세계를 대상으로 전화통화, 팩스, 이메일을 시간당 수십 억 건씩 도청하고 있다. 미국은 부인하였으나 미국 국가안보국의 직원인 웨인 메드슨은 에셜론이 정치인뿐만 아니라 고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고 테레사 수녀에서 국제사면위원회나 그린피스 등 영향력 있는 국제단체와 로마교황청도 도청했다고 주장하였다. 안보국의 주된 업무는 전세계에 걸쳐 거의 모든 통신망을 도, 감청하여 국가간, 기업간 그리고 표적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을 감시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이를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판독이 불가능한 암호를 개발하는 것이다. 사실 1960년대 전자기술혁명의 총아로 일컬어졌던 컬러 TV가 세계 각국의 대통령 선출방식을 바꾸고 그 선거결과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처럼 1990년대 정보통신기술혁명이 세계 모든 기업의 경영패턴을 변경시키고 기업경영의 세계화를 몰고 왔다. 이처럼 미국은 정보화사회의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중심에 의한 주변의 문화침투를 빠른 속도로 확대하고 잉여착취, 억압과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보화가 진행될수록 “문화적 동시화”, “미국 문화의 동시화”가 더욱 강화될 것이며 현재의 불평등은 더욱 심화할 것이다. 대신 제3세계의 독창적 문화와 사회적 창의성은 혼란을 겪으면서 차츰차츰 파괴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여 정보고속도로는 ‘식민고속도로’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식민고속도로의 속도는 거의 무한대로, 무역보호정책, 관세정책 등 제한속도가 있던 산업사회에서는 그 속도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고속도로를 거부하면 그 국가는, 산업사회에서 포장도로가 깔리지 않은 곳이 오지로 남은 것처럼, 낙후지역으로 남을 것이다. 문제는 브레이크를 걸거나 적절한 곳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는 것인데 거의 무한대의 속도가 용인되는 곳에서 이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며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저번 호에서 작지만 리눅스의 성공은 ‘연대’와 ‘공유’에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연대와 공유의 원칙 아래 우선 우리는, 미디어 제국주의의 본질, 제국주의와 종속국가와의 관계, 자본의 유입형태, 문화산업의 구조, 제도, 기술도입과정, 생산과정과 분배과정, 이데올로기의 침투과정, 문화생산물의 수입현황, 중심국가로부터 편입된 문화생산물의 내용과 형태, 다양한 계급들과 계층에 의한 문화표현과 상징, 소비양식에 대하여 파헤쳐야 한다. 그리고 헐리웃의 전쟁이나 공상과학 영화에 남성 백인만이 정의를 구현하고 인류를 구원한다는 백인우월주의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밝히듯, 미국의 대중문화 텍스트 속에 담긴 여러 신화와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 이에 대하여 대항신화를 형성해야 한다. 사이버 공간을 오가는 텍스트에 대하여 정치 해석을 우선하되 다양한 의미를 찾는 열린 읽기를 하여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다시 쓰기’를 감행하여 세계를 다시 구성하여야 한다. 초등학교 3,4 학년을 데리고 실험을 하였다.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읽고 거기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을 향하여 말했다. “얘들아,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잘 읽으면 거기에서 잘못을 찾을 수 있을 게다. 그것을 한번 찾아보아라.” 아이들은 처음엔 어리둥절하더니 이내 “산에 사는 토끼가 물에 사는 거북이와 느닷없이 만나는 것은 이상하다.”에서부터 “토끼가 잠을 자는 새에 거북이가 달려가 일등을 한 것은 비겁하다.”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적이 나왔다. 그것을 발표하게 한 다음 다시 아이들을 향하여 말하였다. “자, 발표 잘 들었지? 어느 것은 여러분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고 어느 것은 그르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 이번엔 너희들이 이솝이라고 생각하고 잘못을 고쳐 토끼와 거북이를 다시 쓰지 않겠니?” 아이들은 금세 눈을 반짝이며 신이 나서 썼고 그 이상으로 신명나게 발표를 하였다. 이 중 가장 많이 거론된 이야기가 거북이가 토끼를 깨우고 토끼는 이에 감동을 하여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들어가는 것으로 고친 것이었다. 그 전의 <토끼와 거북이>가 경쟁심을 부추기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품고 있는 담론이었다면 후자는 이와는 정반대로 그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담론을 형성한다. <토끼와 거북이>를 그대로 읽은 어린이와 어깨동무하고 가는 것으로 결말을 바꾼 어린이가 세상을 보는 눈은 엄청 다르리라고 본다. 이처럼 제국주의적 종속을 강화하고 있는 모든 제도적 틀, 제국주의적 신화를 전파하는 대중매체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감시하며 결국에는 해체해야 한다. 인터넷이 국가와 문명간의 대화를 늘리고 정보격차와 불평등을 해소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메일을 통하여 상대방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줄 수도 그의 눈물이 마르도록 따뜻하게 포옹해 줄 수도 없다. 광장이 사라진 시대에 노동자들은, 정의를 외치려는 자들은 어디에서 모여 외침을 전할까? 혹자는 마르코스가 성공한 예를 들어 인터넷 시대엔 게시판이 광장이라고 말할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서 전 세계를 향하여 투쟁하고 연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 공간에서 싸늘한 정보를 볼뿐이지 뜨거운 피와 불거진 목젖을 보지 못하지 않겠는가? 다가오는 미래에 인류는 인터넷과 컴퓨터를 이용하여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의족처럼 따스한 피가 흐르지 않는 창조일 뿐이다. 이것이 정보화사회, 새로운 문명의 빛과 그늘이다.
뉴미디어시대, 일방통행에서 쌍방향소통으로
라디오, 텔레비전 등 올드미디어는 감독이든 연출가든 시인이든 텍스트를 만든 자의 메시지를 수용자가 일방적으로 해독하도록 강요하는 시대였다. 라디오의 청자나 텔레비전의 시청자는 자동차 안이나 거실에서 방송을 듣고 보며 텍스트에 담긴 제작자의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전달받아야 하였다. 대중문화만이 아니다. 대통령후보의 연설도, 석학의 강의도,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소식도 올드 미디어를 통해서 전달받기에 이들에 대해서 일방적 해독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올드 미디어에서 수용자가 나름대로 해독할 자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올드 미디어의 일방통행 구조는 일상영역에까지 침투하여 수용자의 해독의 자율성이나 자유를 크게 위축시켰다. 일방통행으로 전달되는 방식이 일상화하면서 대중의 일상생활의 영역마저 일방통행의 메커니즘이 지배하게 되었다. 진리를 창달하고 정부와 맞서서 제4부로 기능을 하리라던 언론은 국가를 선전하고 지배층의 이념을 합리화하고 그들의 상징을 확대재생산하는 ‘국가기구’로 전락하였다. 귀족만이 누리던 문화를 대중에게 누리게 하여준 프로메테우스라 여겼던 대중문화는 문화를 상품화하고 물신화하였다. 그리고 거실의 흔들의자에 앉아 캔 맥주를 보며 프로야구 중계를 보는 노동자가 자신이 중산층이라 착각하여 사회변화를 바라지 않듯, 대중문화는 ‘반역을 향한 동경’마저 길들여 노동자를 보수화하였다. 그러나 뉴미디어의 가장 큰 특징은 쌍방소통의 미디어라는 점이다. 뉴미디어 시대에서 수용자는 제작자의 의도와 메시지를 전달받는 수동적 대중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해독하며, 이에서 더 나아가 발송자 또는 제작자를 향하여 메시지를 전하고 스스로 제작자가 될 수도 있다. 그는 컴퓨터 채팅을 하듯이 상대방이 보낸 텍스트에 대해서 자신의 해독과 가치평가, 다시쓰기를 곁들여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 상대방에게 다시 보낼 수 있다. 인터넷에 오른 텍스트에 손질을 하여 다시 하이퍼 텍스트를 만들 수 있으며 디지털 텔레비전으로 송출된 수천 수만 개의 채널 가운데 몇몇 프로그램을 내려 받은 다음 이를 조합하여 자신이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올드미디어 시대에는 패러다임도 실존주의나 마르크시즘, 현상학처럼 이분법적인 패러다임, 주체 중심의 사유가 지배하였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였으며 주체와 객체는 엄연히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면 뉴미디어에 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있을까?
사이버공간은 퍼지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사이버공간은 동일성을 해체한다. 이곳에서는 나와 남, 동일자와 타자,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다. 무수한 네트워킹 속에서 모든 것을 둘로 가르던 이분법은 자연스러이 사라진다. 내가 타인 속의 나와 대화를 하고 타인이 내 속의 그와 이메일을 주고받는 곳이다. 내가 합성하여 만든 비서가 내 문서를 작성해 주고 하루의 일과를 알려주듯 현실이 바로 환상으로 변하고 환상인가 하면 그것은 곧 현실이 된다. 언어기호를 넘어서서 이미지를 통하여 느끼고 생각하기에 상징계를 깨고 상상계를 지향한다. 누구든 마음대로 들어가고 자유로이 나가기에 모든 경계, 영토, 권위, 제도는 무너진다. 익명의 네티즌끼리 소통하면서 누구든 인종, 계급, 성, 사회적 위상, 학력을 묻지 않는다. 현실, 또는 아날로그식으로는 권력을 형성하던 요인들이 작용을 하지 않으니, 권력과 권력의 담론들은 이곳에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사이버 공간은 해방의 장이자 평등의 장이다. 아날로그형 인간이 집단과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충실하고자 한다면 디지털형 인간은 개인과 자아에 탐닉한다. 아날로그 인간이 명령과 위계질서를 따르고자 한다면 디지털형 인간은 이를 깨고 모험을 하고 해방을 하려 한다. 아날로그 인간이 구속에 얽매여 영토를 지키려고 한다면 디지털형 인간은 구속에서 벗어나 유목민으로 떠돌고자 한다. 그래서 미국 미네소타대 심리학과 마크 스나이더 교수는 현실과 가상세계를 넘나드는 사이버 시대의 인간형을 다양한 블록으로 자유자재로 모양을 만들 수 있는 레고와 비유해 ꡐ레고적 인간형ꡑ이라고 규정한다. 사이버 세계는 이분법을 비롯한 모든 경계를 넘어서려 한다. 여기서 나온 논리가 퍼지식 논리이다. 원래 디지털과 대립되는 것이 퍼지인데 이진법에 기초한 디지털이 이분법적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아날로그식 사고이고 퍼지의 논리가 사이버시대의 논리인 것은 아이러니하다. 서양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이래 ‘A or not-A’의 논리를 추구하였다. A가 아니면 나머지는 A가 아닌 것이어야 한다. 동일한 사물이 동일한 사물과 동시에 동일한 점에 속하면서 또한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즉 A이면서 A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모순율이다. 서구의 거의 모든 철학과 예술은 이 모순율을 인정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그러나 실제 세계는 ‘A and not-A’이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은 하면 답은 정확히 ‘Yes or No'로 갈리지 않는다. 물론 상당수가 손을 들었고 그에 못지 않은 사람들이 손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손을 들다가 만 사람, 손을 반쯤 들다 내린 사람이 꽤 존재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다. 사랑한다고 답한 이들도 100%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도, 싫어하는 마음도 있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강하기에 사랑한다는 쪽에 손을 든 것이다. 싫어한다고 손을 든 이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실제 세계는 A인 동시에 not-A인 것이 아니다. 퍼지이다. 그러기에 세탁기, 진공 청소기, 카메라, 캠코더, 헬리콥터 등에 퍼지의 원리를 응용하였더니 기계의 오류를 줄이고 기계의 지능지수를 높일 수 있었다.
따르기도 하고 따르지 않기도 해라
화쟁의 논리는 퍼지식의 논리로 이분법적 모순율을 거부한다. ‘A and not-A’의 논리, 곧 둘이 아니면서도 하나를 고수하지도 않으며[無二而不守一], 따르는 동시에 따르지 않는[順而不順] 논리가 화쟁의 논리이다.
따라서 하거나 따라서 하지 않고도 말한다’는 것은, 만일 마음에 직접 따라서 설법하면 삿된 집착을 움직일 수 없으며, 또 만일 마음에 따르지 않고 오직 설법만 하면 바른 믿음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바른 믿음을 얻어 본래의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하려면, 혹은 따라서 설하고 혹은 따르지 않고 설법하라는 것이다. 또 만일 직접 道理만 따라서 설법하면 바른 믿음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니, 그것은 그 사람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도리에 따르지 않고 설법한다면 어찌 올바른 이해를 낳으리요. 그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까닭이다. 올바른 믿음과 이해를 낳으려면 혹은 따라서 하고 혹은 따르지 않으면서 설법해야 하는 것이다.(順不順說者 若直順彼心說則不動邪執 設唯不順說者則不起正信 爲欲令彼得正信心 除本邪執故 須或順或不順說 又復直理說 不起正信 乖彼意故 不順理說 豈生正解 違道理故 爲得信解故 順不順說也) <<金剛三昧經論>>, <入實際品>, ≪韓國佛敎全書≫, 제1책, 638-상:
진리를 그 진리대로 전하면 그 세계는 중생의 이해 세계와는 너무도 멀리 떨어진 것이라 중생이 미처 이를 깨닫지 못하여 미혹한 마음 또한 버릴 수 없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그 뜻을 전하면 그것은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진리를 왜곡하여 바른 믿음을 일으키지 못한다. 진리에 철저히 입각하여 말하면 그것을 올바로 전달하여 참다운 이해와 믿음은 가져오되, 사람들마다 근기가 각기 다른데 천편일률이 되어 몰이해를 낳을 수 있다. 너무 근본에만 치우쳐 교조로 흐를 가능성도 있다. 소통의 관점에서 보아도 수신자와 발신자가 놓인 상황의 맥락을 무시한 발화는 곡해되기 쉽다. 반면에 전달자가 어떤 진리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자기 나름대로 상황의 맥락이나 수신자의 근기에 맞게 해석하여 전달하면 쉽게 이해시켜 수신자가 가지고 있던 선입관이나 편견을 깰 수 있되, 진리의 실체를 왜곡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리의 실상을 직시하되 상황의 맥락이나 수신자의 근기에 맞게 順而不順의 논법을 통하여 전하면 참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허위라 하는 것에도 일말의 진리가 담겨 있고 모두가 진리라고 하는 것에도 한 자락의 허위를 담고 있다. 그런데 각기 다른 견해로 맞설 때, 한 의견이 진리라는 이유로 이에 전적으로 동조하면 반대되는 의견에 담겨 있는 진리를 잃게 된다. 또 한 의견이 허위라는 이유로 이에 전적으로 반대하면 반대되는 의견에 담겨 있는 허위를 보지 못하게 된다. 또 두 견해를 모두 옳다고 하면 두 견해가 스스로 모순을 일으켜 다투며 두 견해에 있는 허위를 들여다 보지 못하게 된다. 반대로 두 견해가 모두 그르다고 하면 그 두 견해와 다투게 됨은 물론 두 견해에 담겨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올바로 진리를 전달하는 방법은 A and not-A, 즉 동조도 하지 않는 동시에 반대도 하지 않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조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겨있는 허위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고 반대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겨있는 진리를 잃지도 않는다. 반대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긴 근본 취지와 목적을 어기는 것이 아니고 동조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의 허위를 솎아내고 그에 담긴 도리를 제대로 받아들여 견해의 근본 뜻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순불순의 논법은 진정한 진리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이렇듯 어떤 대립이든 이런 대립과 다툼(諍)을 아우르고(和) 궁극적 진리의 바다에 이르는 방편은 순불순인 것이다. 그러니 화쟁은 서로 다른 것을 차이와 관계로 바라보고 뜻이 서로 통하는 것에 맞추는 회통(會通)의 논법이다.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되 부처의 진정한 뜻을 버리지 않는 것처럼, 여러 견해나 말씀의 핵심의미를 파악하여 하나, 한 맛의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크 스나이더 교수에 따르면 “타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행동을 꾸미기도 한다.”나 “상황과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다른 사람인 것처럼 행동한다.”에 “예.”라고 대답하는 이들은 디지털형 인간이다. 반면에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내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지는 않는다.”에 “예.”라고 대답하는 이들은 아날로그 인간형이다. 전 시대에는 후자와 같은 志士形 인물이 바람직한 인간형이었다. 그러나 지사는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는 A or not-A의 인간형이다. 그는 세계를 분별하여 보는 인간이다. 화쟁은 주와 객, 주체와 타자를 대립시키지도 분별시키지도 않는다. 양자를 융합하되 하나로 만들지도 않는다.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중간도 아니다. 주와 객, 주체와 타자가 서로를 비춰주어 서로를 드러내므로 스스로의 본질은 없고 다른 것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진리란 것은 진리가 아닌 것과 차이를 통하여 진리를 드러내고 진리가 아닌 것은 진리와 차이를 통하여 진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날로그 시대는 동일성에 바탕을 둔 배제의 담론이 지배한 역사였다. 그것의 해악은 폴 포트를 통해서 앞 장에서 논한 바 있다. 동일성, 우열의 철학은 갈등과 대립을 낳으며 우열을 설정하는 순간 타자에 대한 폭력을 부른다. 순불순은 인터넷을 통하여 네티즌들이 타자를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는 동일성의 사유를 깨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여 평화스러운 공존을 모색하는 것인 동시에, 이것과 저것, 서로 대립되는 것을 가르지 않고 모두를 부정하면서 긍정하고 긍정하면서도 부정하는 퍼지의 논리를 통하여 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사유구조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지금 상대방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라. 그 눈동자 한 가운데 자신의 모습이 들어가 앉아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그를 ‘눈부처’라 한다. 눈부처가 보이는데 상대방에게 해코지를 할 사람이 있을까? 눈부처가 보이는 순간 너와 나의 분별은 사라진다. 너 아니면 나인 것이 아니다. 너는 나인 동시에 너다. 그처럼 네티즌들이 분별심을 넘어 바라보고 서로를 따르기도 하고 따르지 않기도 할 때 정보화사회는 정녕 희망의 사회로 다가올 것이다. 나와 남, 작가와 독자, 발신자와 수신자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인터넷을 통하여 세계의 모든 이들과 네트워킹을 하는 것, 그리하여 내가 전혀 모르던 곳의 사람과 문화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며 내가 정보를 올린 것이 익명의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정보의 바다를 항해하여 정보를 모아 인류를 위하여 새로운 무엇을 창조하는 것, 그것이 바로 뉴미디어 시대에 맞는 패러다임이리라.
연재를 마치며
화쟁은 진정 새로운 세계의 패러다임이 될 수 있을까? 또 화쟁의 패러다임을 인류가 받아들인다고 세상이 변할까? 많은 사람들이 화쟁의 패러다임이 올바른 길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상부구조의 변화만으로 토대의 변화가 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비과학적 인식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토대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분명 토대는 변하고 있다. 아날로그 텔레비전이 일방향 소통을 하였다면 디지털 텔레비전은 쌍방향 소통을 한다. 자연 일방향의 원리나 패러다임은 무너지고 상생과 화쟁의 패러다임이 이들 토대에 대한 상부구조로 서리라. 더불어 필자가 확신하는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에 대하여 강의하는 날, 필자는 출석부 순서대로 서너 명의 학생의 이름을 부른 다음 “너희는 상놈의 자식이니 내 강의를 들을 자격이 없다. 미안하지만 조용히 나가달라.”라고 말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당사자들은 어쩔 줄 몰라 한다. 교실은 ‘썰렁’ 그 자체이다. 썰렁함이 어느 정도 강의실을 휩쓸고 지나갔다 생각하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한다. “여러분, 놀랐죠? 선생님이 잠깐 돌았나 생각한 사람들도 있을 게고. 중세의 야만을 조금이라도 맛보라고 그런 것입니다. 바로 200여 년 전만 해도 이런 무지막지한 말이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아니, 상놈은 아예 교육받을 엄두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통교육은, 만인이 자신의 지위나 신분에 관계없이 평등하다는 것은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대원칙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대성의 힘’입니다.” 차별을 정당화하는 중세적 세계관에 맞서 휴머니즘의 원칙을 외치던 이들은 당시 전 인류를 통틀어 몇 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은 보편적인 원칙이 되었다. 봉건제 생산양식에서 자본제 생산양식으로 토대가 변한 것이 주 요인이지만 어찌 그것만이라고 하겠는가? 화쟁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적 가능성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정당성이다. 정당성이 있으면 힘을 가지며 가능성도 따라간다. 하늘이 어둡다 어둡지 않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거기 별만 반짝인다면 나그네는 그 별을 따라 힘들지만, 더욱 자유롭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향하여 그리움과 사랑이 가득한 길을 걸으리라. 그것이 인생이요 역사요 예술이다. 오늘 세상은 타락의 극이다. 얼마 전만 해도 뇌물을 받은 정치인이 텔레비전에 비춰지면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정치인이 비리를 저지르니 이제 얼굴을 뻣뻣이 들고 정치적 음모라 외친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여학생에서 어엿한 자식과 남편을 둔 아줌마까지 환락에 몸을 던진다. 도덕을 지키는 자가 오히려 조롱의 대상이 되고 정의를 지킨 자가 핍박을 받고 성실한 자가 퇴출당하는 죽음의 시대이다. 그럼에도 나는 새 시대에 대해 희망을 가진다. 아직 무엇을 모르던 청년 때처럼 세상과 인간에 대해 낭만적으로 바라보아서가 아니다. 지금은 정녕 서로가 서로의 악마스러움을 드러내는 시대이지만, 곧 서로가 서로의 佛性을 드러내는 시대로 전환이 되리란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행정고시에 합격하였다는 소식을 듣는 그 순간 “야, 이제 고급 공무원이 되었으니 무지막지하게 뇌물을 받아 부귀영화를 누리고 그것을 상납도 하여 출세좀 해야겠다.”라고 맹세한 사람이 있을까? 촌지를 받지 않는 선생이 없다고 한국 사회가 온통 난리를 칠 때, 한 선생님의 고통에 찬, 그러나 아름다운 선택에 대해 들었다. 그 선생님은 촌지를 받지 않아 동료들로부터 너 혼자 깨끗한 척 하냐며 왕따를 당하였다. 신념과 사직서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를 보고 그의 아내가 묘안을 냈다. 그는 아내가 가르쳐준 대로 다음 학기에는 촌지를 받았다. 그는 받을 때마다 그것으로 책을 사선 ‘00어머니 기증 도서’라 써선 교실의 서가에 꽂았다. 그리 한 학기가 지나니 교실 전체가 책으로 빙 둘러싸더란다. 결국 그 선생님을 압박하고 조롱하던 다른 선생님들도 이에 감화를 받아 촌지를 받지 않기 시작하였고 받더라도 아이들을 위해 쓰더란다. 자신의 상관의 책상에서 그동안 받은 촌지의 명단과 그것을 기부한 고아원을 적은 메모를 보고 그 부서의 모든 기자가 설사 어쩔 수 없이 촌지를 받더라도 자신보다 가난한 자를 위하여 썼다는 이야기도 언론인이 된 제자로부터 들었다. 그렇다! 우리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다만 잘못된 정치, 올바르지 못한 지도자를 만나고 인간을 저버린 교육을 받고 타락한 문화를 대하면서 그 불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악마스러움만 서로 조장하지 않았던가? 타락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타락하게 하는 구조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그 구조를 화쟁의 구조로 바꾸어야 하지 않은가? 세상을 탓하기보다 내가 먼저 부처가 되려 한다면 세상 모든 이들이 자신 속에 내재한 부처를 드러내지 않겠는가?
출처:춤 이론 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