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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te.
이 글은 네이버 카페 주덕재(http://cafe.naver.com/joodeokjae)의 회원이신 ID 산곰님이 올리신 질문에 대한 답글이다.
* 산곰님의 질문.
카페지기님 전주최씨 족보 편찬 내역을 알려 주세요. 최초에서(초성일권에서부터) 최근까지 부탁드립니다.
* 카페지기의 답글.
전주최씨 문성공계 족보 발행 이력.
현재까지 전해오는 전주최씨 4대 계파의 족보 중에서 현대 족보의 시원(始原)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감찰공(監察公) 최세영(崔世榮, 중랑장공파 13세)이 만드신 우리 문성공(文成公) 최아(崔阿)계의 족보 초성일권(草成一卷)으로 알려져 있다.
문열공(文烈公) 최순작(崔純爵)계 전주최씨가 1567년(명종 22)에 감사공(監司公) 최홍한(崔弘僩, 첨추공파 14세)을 중심으로 융경보(隆慶譜) 상하 두 권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실물을 확인할 수 없어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그 시점이 1638년(인조 16) 대전 동학사에 현재의 전주최씨 4대 계파와 화순최씨 대표들이 모여서 지금과 같은 형태로 계파를 정리하고 화순최씨를 분리하기로 합의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융경보를 현재 족보의 시작점으로 볼 수는 없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전주최씨 각 종중은 융경보보다 훨씬 먼저부터 이미 여러 가지 형태의 족보를 가지고 있었고 그 족보들이 현재 족보의 기초자료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족보를 현재 족보의 시원으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있어온 족보들과 차이가 있다면 융경보는 아마도 옛날 족보들 중에서 규모가 크고 좀 더 체계적으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융경보가 상하 두 권으로 구성된 족보라고 한다면 100년 뒤에 만들어진 초성일권이 한 권에 불과한 것에 비추어 볼 때 그 규모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당시에는 아직 당최(唐崔, 문성공계, 문열공계, 복야공계) 전주최씨가 현재와 같은 계파로 나누어 정립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화순최씨들도 자신들을 전주최씨로 잘못알고 있었던 시점이므로 아마 당최 3대 계파와 화순최씨를 망라한 대동보 형태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또한 문열공계는 융경보 다음에 발행된 족보가 융경보를 발행했다는 시점으로부터 자그마치 178년이나 지난 1745년(영조 21)에 발행되었고 그 이후로 정기적으로 발행(up date)해 왔으므로 융경보를 현재의 족보를 연결할 수 있는 고리를 찾을 수 없고 현재 문열공계 족보의 시원은 1745년에 발행된 족보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우리 문성공계 족보는 1658년(효종 9) 각 종중으로 통문을 보내 자료를 수집하고 검토하여 1686년(숙종 12) 초성일권이 발행된 이후 초성일권을 뿌리로 하여 약 60년을 간격으로 정기적으로 발행되어 왔으므로 초성일권은 현대 족보의 시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686년(숙종 12) 1월 서울에서 감찰공이 초성일권(1권) 발행. (필사본)
1743년(영조 19) 7월 전주 정수사에서 건륭계해보(4권) 발행. (인쇄본)
1805년(순조 5) 여름 전주 종대(연촌공의 옛 집)에서 가경을축보(11권) 발행. (인쇄본)
그 이후에도 1896년(고종 33) 병신보(丙申譜)와 1936년 병자보(丙子譜)가 발행되었다고 하지만 문성공 산소의 진위(眞僞) 문제를 놓고 종중이 묘제파(墓祭派)와 단제파(壇祭派)로 분열되었고 1861년(철종 12) 안렴사공파와 대호군공파가 그리고 1863년(철종 14) 중랑장공파가 각각 따로 파보(派譜)를 만들므로 인하여 그 때부터 지금까지 문성공계 족보는 각 파를 중심으로 파보를 만들어 왔다.
따라서 문성공계 종중에서 정통성을 갖추어 발행된 대동보는 위의 초성일권(草成一券), 건륭계해보(乾隆癸亥譜), 가경을축보(嘉慶乙丑譜) 뿐이고 나머지는 파보에 정통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4대 계파가 다시 화동(和同)하여 종중이 대화합을 이루었으니 이제야말로 문성공계 전주최씨 대동보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1. 초성일권에 대하여.
초성일권은 처음부터 문성공계 대동보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문열공계와 통합 족보를 만들기 위하여 시작한 작업에서 문열공과 문성공의 세대(世代) 연결이 고증되지 아니하므로 어쩔 수 없이 문성공 이후를 분리하여 만들게 된 것이라는 것을 김칠공은 서문(序文)과 변오고증(辨誤考證)을 통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감찰공은 문성공계를 분리하여 별도로 족보를 만들어야 하는 당위성을 “황태사고사(黃太史故事)”에서 찾고 있는데 황태사가 말하기를 “족보를 꾸밈에 있어서 자신으로부터 8대조 이상의 선조에서 그 세대가 불명확하다면 억지로 끼워 맞추지 말고 명확한 선조에서 끊어 족보를 만드는 것이 옳다”고 했다고 한다.
한편 문열공계는 문성공계와 함께 대동보를 만들려고 했으나 고증에서 문제가 발생하므로 족보 발행을 포기하고 훗날 다시 시도하여 1745년에 처음으로 족보를 발행하게 됨으로 문성공계의 초성일권은 물론 두 번째 족보 건륭계해보 보다도 늦은 시기에 첫 족보가 완성되었다.
초성일권은 흔히 감찰공께서 만드신 것으로 알고 있으나 감찰공 혼자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서 많은 사람들이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 연구한 결과를 감찰공이 정리하신 것인데 인쇄를 하지 않고 붓으로 적어서 발행했기 때문에 그 수량이 많지 않았고 글씨는 감찰공의 아들 양정재공(養正齋公) 최방언(崔邦彦, 중랑장공파 14세)의 친필이라고 한다.
1658년에 시작된 초성일권 발행 작업은 30년 가까운 검토기간을 거쳐서 1686년에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는데 안렴사공파에서 인재공(訒齋公) 최현(崔晛, 제학공파 11세), 대호군공파에서 통정대부공(通政大夫公) 최택세(崔澤世, 춘방공파 11세), 중랑장공파에서 석계공(石溪公) 최명룡(崔命龍, 송애공파 10세) 등 각 종중을 대표하는 선조들이 고증 작업에 참여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초성일권(대동보)을 만들기 위하여 수단(收單)을 한다는 통문은 1658년에 각 종중으로 발송 했지만 1638년 대전 동학사 모임 이전부터 전주최씨 당최 종중에서는 대동보를 만들기 위한 조사와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 되었으며 특히 문열공계를 중심으로 활동이 활발하였다.
이는 당시 정계에서 크게 활동하던 지천공(遲川公) 최명길(崔鳴吉, 경절공파)과 그리고 그의 손자 명곡공(明谷公) 최석정(崔錫鼎, 경절공파) 등이 모두 영의정을 지내는 등 가문이 크게 번성했던 영향이 아닌가 짐작된다.
특히 현재 화순최씨 중에서 최원지(崔元之, 대호군공의 사위)의 후손들은 자신이 전주최씨인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는데 초성일권이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이를 바로잡아 화순최씨로 분리하였다.
그러나 당시 전국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화순최씨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자신들은 지금까지 조상 대대로 전주최씨라고 전해 들어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전주최씨가 아니라 화순최씨라고 하니 그 혼란이 어떠했겠는가?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초성일권은 조상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기 위하여 부풀리거나 과장하지 아니하고 또 당시 영의정을 두 명이나 배출한 명문과 억지로 통합하지 아니하고 오직 근거를 바탕으로 고증하여 확인된 내용만 수록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선조들의 노력과 역사인식으로 인하여 우리 문성공계는 어디에 내어 놓아도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족보를 가지게 되었으니 조상을 과장하고 부풀려서 신라(新羅)나 고조선(古朝鮮) 혹은 중국 삼황오제(三皇五帝)와 연결하려고 애를 많이 쓴 다른 가문의 족보와 비교하여 볼 때 무척 자랑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초성일권은 제목에서 말해주는 바와 같이 그 내용이 초솔(草率)하여 휘(諱)와 벼슬 정도만 수록하고 있으며 또 자손록도 수단 과정에서 검증이 잘못된 부분이 많아서 후대의 족보에서 바로잡은 곳이 많다.
특히 안렴사공파의 경우에는 2세 판도정랑공(版圖正郞公) 최전우(崔田雨)를 2세 휘(諱) 최군보(崔君甫)의 동생이 아니라 아들이라고 수록함으로 인하여 안렴사공파 전체가 한 세대 씩 낮게 수록되는 오류(誤謬)가 있다.
족보 초성일권은 전국에 산재한 여러 종중에서 필사(筆寫)하여 소장해 왔는데 오랜 세월로 모두 없어지고 현재까지 전해오는 것은 전남 담양에서 살고 있는 중랑장공파, 연촌공파, 산당공파 종중에 전해오는 담양가전본이 유일하게 확인되고 있다.
초성일권 담양가전본은 1976년 3월 대전에 있는 회상사에서 인쇄본으로 대량 발행되어 현재 종중의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소장하고 있으며 또 일부 전주최씨 인터넷 카페에 그 영인이 올라 있기도 하지만 인쇄 과정에서 오자(誤字)가 많고 페이지가 당겨지면서 다른 사람의 기사(記事)가 엉뚱한 사람에게 수록되는 등 잘못된 곳이 많다.
본 카페 장서각에는 인쇄본이 아닌 담양가전본 원본(原本)의 영인(影印)이 올라 있으니 필요하신 분께서는 그것을 참고하시기 바라며 혹 영인본 전체가 필요하신 분은 별도로 연락하여 주시기 바란다.
그러나 담양가전본은 원래 초성일권 전체가 아니다.
카페지기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감찰공이 발행하시고 양정재공이 적으신 족보 초성일권 경보진본(京譜眞本)은 초기(初起), 재기(再起), 삼기(三起)로 구성되어 모두 402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으나 필사자(筆寫者)가 자기 가문(家門)과 상관이 없는 3기 전체를 필사하지 않고 누락시켜 버림으로 인하여 194페이지의 반쪽짜리가 되어버렸다.
또 필사자는 자손록에서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에 대하여 약간의 가필(加筆)을 함으로 인하여 초성일권의 가치와 신뢰성을 크게 손상시켜 버렸다.
하지만 없어져버린 삼기를 제외한다면 가필된 정도가 경미한 수준에 불과하고 전체적인내용에 별다른 문제가 없으므로 자료로서 초성일권 나름의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양정재공이 필사하신 초성일권 경보진본은 적어도 4대 계파에 한 권씩은 배포되었을 것이고 또 각 종중에서 그것을 복사하여 소장해 왔을 것이므로 어딘가에는 경보진본 혹은 그것의 완전한 필사본이 전해오고 있을 가능성이 없지 않으므로 총 402페이지에 달하는 경보진본 혹은 그 필사본을 찾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건륭계해보에 관하여.
건륭계해보는 개인이 아닌 전주최씨 종중 이름으로 발행된 최초의 족보로 청(淸)나라 건륭(乾隆) 8년, 조선 영조 19년(1743년) 7월 하순에 전주에 있는 정수사(淨水寺)에서 인쇄 되었는데 정수사는 현재의 전북 완주군 상관면 만덕산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末寺) 정수사로 짐작된다.
건륭계해보는 최낙철(중랑장공파, 연촌공파, 남원종중 25세) 회장님이 경영하시는 계성제지주식회사 부설 종이박물관에 그 원본이 소장되어 있는데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카페지기가 계성제지의 승인을 득하여 전체를 영인했고 그 영인본이 본 카페 장서각에 올라 있으니 한 번 보시기 바란다.
건륭계해보는 모두 4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문을 통하여 초성일권을 발행한지 이미 60년이 흘렀으므로 이어서 발행한다고 그 취지를 설명하고 있어서 초성일권이 건륭계해보의 뿌리임을 밝히고 있다.
초성일권은 모두 3기까지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필사자가 3기를 누락시켜 버림으로 인하여 초기와 재기만 전해오고 있어서 13세까지(안렴사공파의 경우 12세까지) 밖에 수록하지 못한데 반하여 건륭계해보는 4기(四起)까지 있어서 대체로 21세까지 수록되어 있다. (4기는 물리적으로 25세까지 수록이 가능하다)
또 뒤쪽에 별보(別譜)를 만들어 아직 검증이 되지 아니한 자손록을 별도로 수록함으로 인하여 앞쪽의 자손록에서 검증의 충실도를 한층 높이고 있다.
건륭계해보는 초성일권과 달리 그 내용이 충실하고 또 많은 오류를 바로잡아 현재의 족보와 큰 차이가 없는 수준에 까지 이르렀다.
예를 들면 초성일권에서는 잘못 수록된 안렴사공파의 세대를 바로 잡았으며 또 대호군공파 사과공파 11세의 휘를
초성일권 |
귀손 貴孫 |
귀난 貴難 |
고온손 古溫孫 |
독온손 禿溫孫 |
귀인 貴仁 |
고읍손 古邑孫 |
귀영복 貴永福 |
송남 松男 |
무재 茂才 |
건륭 계해보 |
귀손 龜孫 |
귀난 龜蘭 |
곤손 崑孫 |
문손 文孫 |
귀인 龜仁 |
급손 岌孫 |
귀복 龜福 |
숭남 崧男 |
무재 茂才 |
라고 기록하여 초성일권의 수단(收單) 과정에서 언어(言語)로 전해오는 내용을 문자(文字)로 기록하면서 발생한 오류를 모두 바로 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3. 가경을축보에 관하여.
가경을축보는 1805년 여름 전주에 있는 전주최씨 종대에서 발행하였다.
문성공계 전주최씨 대동보로서는 절이나 다른 인쇄 가능한 기관에 의탁하지 아니하고 종중 소유의 종대에서 발행한 최초이자 마지막 대동보로 짐작 된다.
(후세에는 인쇄소에서 발행을 했으므로 종대에서 발행할 필요가 없어졌다)
가경을축보는 초성일권을 발행하고 60년(한 주갑) 후에 건륭계해보를 만들었으며 그로부터 다시 60년이 흘렀으므로 발행한다고 그 취지를 서문에서 밝히고 있어서 초성일권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가경을축보는 광주광역시에 사시는 최만호님(중랑장공파, 연촌공파 의령공파 24세)께서 소장하고 계신데 서문의 영인이 본 카페 장서각에 올라 있으니 한 번 보시기 바란다.
가경을축보는 초기에서 4기까지 모두 10권과 11권의 부편(附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 카페지기가 소장자 최만호님께 영인을 부탁드려 놓았다.
최만호님이 소장하신 가경을축보는 몇 권의 결권(缺卷)이 있다고 한다.
한편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실에는 가경을축보가 11권 모두 온전하게 소장되어 있으며 보존 상태도 아주 양호하다.
특히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가경을축보를 영인하여 영인본을 인터넷을 통하여 검색할 수도 있으니 관심이 있으신 분은 한 번 검색하여 보시기 바란다.(http://lib.aks.ac.kr/Web/)
가경을축보 서문에 의하면 1743년 발행된 건륭계해보가 청수사에서 발행되었는데 1805년 발행된 가경을축보는 전주 동쪽에 위치한 종대(完東宗垈)에서 발행 되었다.
즉 1743년에는 아직 종대가 없었으므로 사찰 청수사에 의탁하여 건륭계해보를 발행했으나 1805년에는 종중이 종대를 가지게 되었으므로 절에 의탁하지 않고 종대에서 직접 족보를 발행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완동종대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6번지에 위치한 전주최씨 중랑장공파 종대를 이르는 것으로 이상의 사실을 통하여 풍남동 종대는 1743년 ~ 1805년 사이 언젠가부터 문성공계 전주최씨 종대로 사용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경을축보 “전주최씨족보기사”에 이르기를
“전략 --- 계해년(1743년) 수보한지 이미 한 주갑(60년)이 지나서 ----[새로 족보를 발행할 것을] 호남의 제종(諸宗)이 선창(先倡)하여 ---- 봄에 위봉사에서 만나고, 여름에 개암사에서 만나고, 가을에 실상사에서 만난 회의 결과를 가지고 완동종대(完東宗垈)에서 기술자 12명이 1년간 노력한 끝에 인쇄를 완료했다. --- 후략”
라고 제작 과정을 설명하고 있으며 또 “초성일권 경보서”의 뒤를 이어 적은 글에 이르기를
又
“전략 ----[건륭계해보를 발행한지 한 주갑(60년)이 지나] 호남의 종장(宗丈) 제씨(梯氏), 제공(諸公)이 발문을 돌려 단자를 모아 전주 동쪽에 있는 선조 연촌공의 옛집(先祖烟村公完東舊第)에서 계해년 봄에 일을 시작하여(始事於癸亥春) 을축년 봄에 완료하였다(訖工於乙丑春)”
이상을 통하여 “완동종대(完東宗垈)”가 바로 “전주 동쪽에 있는 연촌공의 옛집(烟村公完東舊第)”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정리하여 보자면 현재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6번지에 위치한 전주최씨 중랑장공파 종대는 원래 전주 동쪽에 있는 연촌공(烟村公) 최덕지(崔德之, 중랑장공파 5세)의 옛날 집터 이었는데 1743년 ~ 1805년 사이의 언젠가부터 전주최씨 문성공계 종대로 사용되게 되었으며 종중이 묘제파와 단제파로 분열 되면서 현재와 같은 중랑장공파 종대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종중이 화동에 성공하여 대화합의 기틀이 마련되었으니 200년 이상 이룩하지 못한 대동보 제작을 다시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만약 새로 대동보를 만든다면 책으로 인쇄만 할 것이 아니라 전자족보를 만들어서 컴퓨터로 누구나 쉽게 열어 볼 수 있도록 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문성공계 전주최씨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전자족보를 그곳에 올려 둔다면 국내에서는 물론 멀리 미국이나 유럽 그리고 남미나 아프리카 오지에 나가 살고 있는 일가께서도 누구나 쉽게 접근하여 검색할 수 있으니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보다 인구가 적은 삼척진씨나 압해정씨 등의 가문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전자족보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