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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이 창덕궁에서 승하(癸亥 1863. 12. 8)하고, 닷새 뒤 흥선군 이하응(李昰應 1820 - 1899)의 둘째아들 명복(明福, 初諱 : 載晃, 諱:熙)이 익종(翼宗: 순조의 아들 孝明世子 追尊)의 대통을 이어 인정전에서 12세의 나이로 조선 제26대 임금으로 즉위하니 이이가 곧 고종이다. 대왕대비 조씨(神貞王后, 익종의 비)는 이해 12월 30일 전교를 내려 고종으로부터 그 위의 선과 3대에 걸친 관계에 대해 철종은 숙부, 헌종은 형, 익종은 아버지로 언명하므로써, 조정내의 논란을 진정시켰다. 고종이 등극한 과정을 KBS의 "명성황후"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계해년 철종 14년인 1863년 12월 8일 경진일. 철종이 오랜 병고 끝에 세상을 떠난다.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병상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다가 안동 김씨들의 막기 위해 조성하(조대비의 조카로 승후관의 벼슬에 있었다), 조영하로 궁궐을 엄중히 감시하게 하고, 궁중의 어른으로서 국새를 쥐고 영중추부사 정원용, 판중추부사 김홍근, 영의정 김좌근, 좌의정 조두순 등 중신들을 중희당에 소집시켰다. 철종의 후사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미리 후사를 정해놓지 못했던 안동 김씨 세력이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이미 흥선군과 밀약을 맺은 정원용이 왕위의 결정권을 조대비에게 넘긴다. 그러자 조대비도 지체없이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내가 결정을 내리겠소. 흥선군 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으로 하여금 익종(조대비의 남편)왕의 대통을 잇게 하시오."
조대비의 말이 떨어지자 영의정 김좌근을 비롯한 안동 김씨 세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조대비의 말은 흥선군 아들 이명복을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여 왕을 잇게 하겠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어 조대비는 이명복을 익성군에 봉한다는 언문교지를 내린다. 곧 영의정 김좌근, 도승지 민치상, 기사관 박해철과 김병익이 대왕대비의 교지를 채색된 가마에 싣고 흥선군의 집으로 향하였다. 흥선군의 집에 도착한 일행은 폐옥처럼 볼품없이 날고 황량한 흥선군의 집을 보고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실권을 쥐게 된 대원군은 국정이 부패하고 국력이 쇠미해진 원인이 양반지배계급과 척족권신들의 발호로 말미암아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탓이며 탐관오리의 농간속에 민심이 이탈된 때문이라 여기고는(남연군 묘 참고) 대 개혁을 단행했다. 당시 대원군의 심경을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천리를 끌어서 지척으로 하고 (종친의 권위회복) 태산을 깎아서 평지를 만들며 (안동 김씨의 축출)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겠다 (남인등용)
철종의 3년상이 끝나자 왕실 상하에서는 왕비의 책립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외척의 시달림을 뼈저리게 체험한 대원군은 좌의정 김병학의 딸과의 정혼도 파기하고 대왕대비가 관심을 두고 있던 영의정 조도순의 손녀도 거절한 채 외척발호의 우려가 없고 자기에게 순종하되 정치에 간여하지 않을 만한 인물을 고르기 위해 고심했다고 하는 것이 그 동안의 정설이었다. 또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세력을 제어하기 하기 위하여 대원군은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에 동참할 지지세력을 찾아야만 했는데 그것이 바로 여흥민씨라고 하기도 한다. 표에서 보았던 바와 같이 대원군은 민경혁의 딸을 어머니로, 민치구의 딸을 아내로 둔 대원군에게 있어서 그것은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즈음에 부대부인 민씨와 민승호 등이 명성황후를 추천하자 대원군은 부자지간에 동서관계가 된다하여 반대하였으나 이모저모 살펴본 뒤 다시없는 자리라 생각했다. TV 사국에서는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나타냈다.
(참고 : http://w01.crezio.com/drama/series/myungsung/planning/story.html). |
민자영(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얼굴빛에서 자신을 흡족해하는 마음을 읽어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민씨부인이 자주 감고당에 들러 오빠인 민승호와 비밀얘기를 나누는 것도 자영에겐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증거였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 민치록이 일찍 죽은 것과 어머니가 계실이라는 점이었다. 국법에는 과부가 단자를 내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편모 슬하에서 자란 규수가 국모의 재목이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대원군이 걱정하는 것도 바로 그 대목이었다. 꾀 많은 대원군은 그 점을 조대비를 이용하여 넘기로 계획한다. 조대비가 국혼 얘기를 꺼냈을 때의 일이다. 대원군이 이미 김병학의 딸과 정혼을 맺었다고 하자 조대비의 언성은 이내 높아졌다.
"김병학의 딸이라구요? 대감. 대감께서는 이 나라를 또 다시 안동 김문에 내맡길 작정이오!"
그러자 대원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 정혼한 상태이므로 약속을 어길 수는 없사옵니다. 일단 김병학의 딸에게도 간택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줘야 합니다. 다만 왕비를 간택하는 일은 왕실에서 담당하는 일이오니 혹 나중에 변경이 된다고 해도 김병학도 달리 할 말이 없을 것이옵니다."
"그렇겠지" 조대비는 조금 안심을 한 듯 그렇게 대답했다. 이어 대원군의 눈치를 살피며 조대비가 물었다.
"그렇다면 누구로 왕비를 삼는다?" 조대비의 물음에 대원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뢰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이번 국혼에 부친의 여읜 규수도 참여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올른지요?"
"부친을 여읜 규수요? 그건 국법에 없는 일이 아닙니까?" 조대비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전례에는 없사오나...대왕대비마마. 영의정 조두순 대감 댁에 출중한 규수가 있다는 풍문을 들었사온데..."
대원군의 말에 그제서야 조대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두순의 자신과 가장 가까운 대신이었다. 조두순의 딸이 왕비가 된다면 이득이 됐으면 됐지 자신에게 해로울 것이 없었다. 다만 조두순의 손녀딸은 조실부모하여 할아버지 손에 자랐다. 따라서 부친의 여읜 규수는 단자를 낼 수 없다는 국법에 따르자면 조두순의 딸도 이번 국혼에 참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조대비는 의미심장하게 웃고는 자신이 승정원에 조실부모한 규수의 단자도 받아들이라는 명을 내리겠다고 약속을 하게 된다. 대원군은 12월 9일 금혼령을 선포한다. 철종의 국상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단자를 내는 기간은 12월 20일까지였다. 승정원은 조실부모한 규수의 단자도 받아들이라는 대왕대비전의 명이 어리둥절했으나 그대로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자영도 단자를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원군은 가례도감을 설치하고 정사에 이경재 부사에 대원군의 장인 민치구를 임명한다. |
대원군은 대청 문쪽에 부대부인 민씨와 함께 서있었다. 재간택의 간선이 모두 끝나자 대왕대비 조씨와 두 대비 그리고 대원군은 삼간택에 올릴 규수들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대원군은 대왕대비 조씨에게 삼간택에 올릴 세 명의 규수를 뽑으라고 말했다. 그러자 대왕대비 조씨는 감고당의 민규수, 좌상 김병학의 영애 김규수, 영의정 조두순 대감 댁의 조규수를 뽑았다. 대원군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어 그 중에서 중전의 재목을 뽑아달라고 말했다. 형식적으로 삼간택을 하기는 하나 이미 삼간택에 올리면서 중전이 가려지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었다. 조대비는 자신의 입으로 조두순 대감의 손녀딸을 택하는 것이 민망하여 일부러 대원군에게 뽑으라고 말했다.
그러자 대원군은 "대왕대비마마. 신은 감고당의 민규수를 중전의 재목으로 점지하옵니다" 라고 아뢰었다. 순간 조대비의 눈이 커졌다. 대원군의 입에서 조두순 대감의 손녀딸이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던 것이다.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잘 고르셨소"라고 침통하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두 대비들 앞에서 대원군이 선택을 하면 무조건 따르겠다고 했으니 거부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완전히 속은 것을 뒤늦게 안 조대비는 칭병을 하고 며칠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다. 자리에 누운 조대비는 이 일을 다시 되돌릴 궁리를 생각하다 고종과 대원군을 불러 수렴청정을 거두겠다는 뜻을 밝힌다. 자신이 수렴청정을 거두겠다고 하면 대원군이 만류를 할 것이고, 그러면 그 기회를 노려 중전 간택문제를 새롭게 거론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원군의 입에서는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황송하옵니다. 삼가 대왕대비마마의 분부를 받들겠사옵니다."
한번의 만류도 없었다. 이번에도 완전히 조대비의 패배였다. 결국 조대비는 음력 2월 13일 중희당에서 대신들을 불러놓고 공식적으로 수렴청정 철폐를 선포했다. 혹 대신들의 만류가 있지 않을까 기대도 해보았지만 그것도 허사였다. 다만 영중추부사 정원용이 대왕대비 조씨의 업적을 형식적으로 치하할 뿐 거의 모든 대신들이 수렴청정의 철폐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1866년(丙寅 고종3) 3월 7일 민치록의 딸 민자영(紫英)을 고종의 왕비로 맞아들인다는 조칙이 반포되었고, 3월 9일 납채례(納采禮), 3월 11일 납징례(納徵禮), 3월 17일 고기례(告期禮), 3월 20일 책비례(冊妃禮)에 이어 21일 별궁에서 친영례(親迎禮), 22일 인정전에서 문무백관의 하례속에 상견례(相見禮)가 거행되었다. 이때 명성황후의 나이 16세(만 14세 6월)로 고종보다 1살 위였으며, 비운의 여인 명성황후의 국모로서의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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