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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리 정 치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 김태환 옮김 / 문학과 지성사 펴냄
목 차
자유의 위기
스마트 권력
두더지와 뱀
생정치
푸코의 딜레마
힐링 혹은 킬링
쇼크
친절한 빅브라더
감성 자본주의
게임화
빅데이터
주체를 넘어서
백치
자유의 그물을 넘어서 /김태환
자유의 위기
자유의 착취
자유는 결국 에피소드(막간극)로 끝날 것이다. 자유의 감정은 일정한 삶의 형태에서 다른 삶의 형태로 넘어가는 이행기에 나타나 이 새로운 삶의 형태 자체가 강제의 형식임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지속될 뿐이다. 그리하여 해방 뒤에 새로운 예속이 온다. 그것이 주체의 운명이다. 주체Subjekt는 문자 그대로 예속되어 있는 자인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자신이 예속된 존재로서의 서브젝트가 아니라 계속해서 스스로를 기획하고 창조해가는 자유로운 프로젝트Projekt라고 믿고 있다. 서브젝트에서 프로젝트로의 이행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한다. 그런데 이러한 프로젝트 자체가 강제의, 심지어 더 효과적인 예속화의 형식이다. 외적 강제나 억압에서 해방되었다고 믿는 프로젝트로서의 자아는 성과와 최적화의 강요라는 형식으로 작동하는 내적 자기 강제에 예속된다.
우리는 자유 자체가 강제를 생성하는 특수한 역사적 시기를 살고 있다. 할 수 있음의 자유는 심지어 명령과 금지를 만들어내는 해야 함의 규율보다 더 큰 강제를 낳는다. 해야 함에는 제한이 있지만, 할 수 있음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있음에서 유래하는 강제는 한계가 없다.
우울증이나 소진증후군 같은 심리적 질병은 자유가 직면한 깊은 위기의 표현이다. 그것은 오늘날 자유가 도처에서 강제로 역전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병리학적 표징이다. 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기는 성과주체는 실제로는 주인에 묶여 있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점에서 절대적 노예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노동을 강요하는 주인은 없다. 그는 벌거벗은 생명을 절대화하고 그러기에 노동한다. 벌거벗은 생명과 노동은 동전의 양면이다. 건강은 벌거벗은 생명의 이상이다.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목적에서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다. 자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어휘다. 사람들은 좋은 관계 속에서, 타인과의 행복한 공존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초래하는 개개인의 전면적 고립 상태는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
신자유주의는 자유 자체를 착취하는 매우 효율적이고 영리한 시스템이다. 여기서는 기분Emotion, 놀이, 커뮤니케이션 등 자유의 실천과 표현 형식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착취의 대상이 된다. 사람을 그의 의지에 반하여 착취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타자의 착취는 그다지 많은 성과를 올리지 못한다. 자유의 착취야말로 최상의 수익을 낳는다.
마르크스Karl Marx도 자유를 타자와의 좋은 관계라는 면에서 정의한다. “모든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체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소질을 … 온전히 발전시킬 수 있는 수단을 획득한다. 그러니까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개인의 자유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자유롭다는 것은 타인과 함께 자아를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는 성공적인 공동체와 동의어다.
개인적 자유는 마르크스에게 자본의 간계, 음모로 나타난다. 개인적 자유의 이념 위에 세워진 “자유 경쟁”은 “자본의 자기 관계, 즉 자본이 다른 자본과 맺는 관계이며, 자본이 자본으로서 취하는 실제적 태도”일 뿐이다. 자본은 자유 경쟁을 통해 자기 자신, 즉 또 다른 자본과 관계함으로써 자신의 증식을 추진한다. 자본은 개인적 자유를 수단으로 또 다른 자기 자신과 교접한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경쟁하는 사이에 자본은 스스로 증식해간다. 개인적 자유는 스스로의 증식을 추구하는 자본에 악용된다는 점에서 노예 상태와 다름없다. 그러니까 자본은 자신의 번식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착취하는 것이다. “자유 경쟁 속에서 자유롭게 해방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자본이다.” 개인의 자유를 통해 실현되는 것은 자본의 자유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개인은 자본의 성기로 전락한다. 개인의 자유는 자본에 “자동적인” 주체성을 부여하며 이로써 자본의 능동적 번식을 추동한다. 자본은 끊임없이 “살아 있는 새끼들”을 “친다.” 오늘날 과도한 개인의 자유는 결국 자본자체의 과잉을 의미할 따름이다.
자본의 독재
자본주의의 변이체인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를 경영자로만든다. 공산주의 혁명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타자에착취당하는 노동계급을 철폐한다. 모두가 자신에게 고용되어 스스로를 착취하는 노동자다. 모두가 주인인 동시에 노예다. 계급투쟁 역시 자기 자신과의 내적 투쟁으로 탈바꿈한다.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는 생산수단의 소유자에 의해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트 또는 노동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물질적 생산과정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스템은 더이상 계급시스템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적대하는 다수의계급으로 이루어져있지 않다. 이 시스템의 안정성은 바로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자유롭게 자기 자신을 기획하는 프로젝트로서 무한한 자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환상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사회 혁명이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의 계급적 구별을 전제로 한다면, 무계급적 자기 착취는 바로 사회 혁명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성과주체는 고립화되고, 이로 인해 공동의 행위를 할 수 있는 정치적 ‘우리’ 자체가 형성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에서 실패하는 사람은 사회나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리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바로 여기에 신자유주의적 지배 질서의 특별한 영리함이 있다.
신자유주의의 자기 착취적 질서 속에서 사람들의 공격성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겨냥한다. 이러한 자기 공격성으로 인해 피착취자는 혁명가가 아니라 우울증 환자가 된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을 위해서 일한다. 자본에서 생성되는 자본의 고유한 욕구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구라고 착각한다. 자본은 새로운 초월성, 새로운 예속의 형식이다. 우리는 삶이 어떤 외적 목적에 종속되지 않고 오직 삶 자체로 머물러 있는 차원, 즉 삶의 내재성에서 다시 추방당한다.
우리는 정말로 자유롭고자 하는 것일까? 자유롭지 않아도 되려고 신을 발명하지 않았던가? 신 앞에서 우리는 모두 빚[Schuld, 이 단어는 죄를 의미하기도 한다.]을 진 존재다. 그런데 빚은 자유를 파괴한다.
우리가 빚이 없다면, 즉 완전히 자유롭다면, 정말로 행동해야 한다. 어쩌면우리는 행동하지않아도 되려고, 즉 자유롭지않아도 되려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영원히 채무자로 머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액의부채는 우리가 자유로울 능력이 없다는 증거가 아닐까? 자본은 우리를 다시 채무자(죄인)로 만드는 새로운 신이 아닐까? 발터 벤야민WalterBenjamin은 자본주의를 종교로 파악한다. 자본주의는 “죄를 씻기는커녕 오히려 빚을 지우는 제의를 벌이는” 것이다. 죄를 씻을 길이 없기 때문에, 부자유의 상태가 영구화된다. “죄를 씻을 길을 알지 못하는 엄청난 부채의식은 빚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빚을 보편화하기 위해서 제의에 의존한다.”
투명성의 독재
디지털 네트워크는 처음에 무제한의 자유를 주는 매체로 환영받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초기의 열광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음이 오늘날 분명해졌다. 무제한의 자유와 커뮤니케이션은 이제 전면적 통제와 감시로 돌변한다. 소셜미디어 역시 점점 더 사회적 관계를 감시하고 가차 없이 착취하는 디지털 파놉티콘의 모습을 띠어간다. 우리는 규율사회의 파놉티콘에서 겨우 벗어났나 싶었는데, 그러기 무섭게 어느새 새로운 파놉티콘, 더 효율적인 파놉티콘으로 들어와 버렸다.
디지털 통제사회는 고도로 자유에 의존한다. 그것은 자발적인 자기 조명과 자기 노출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데이터는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민들 각자의 내적 욕구에 따라 빅브라더에게 넘겨진다. 여기에 디지털 파놉티콘의 효율성이 있다. 투명성 또한 정보의 자유라는 명분에 따라 장려되고 있다. 하지만 투명성은 사실 신자유주의의 요구일뿐이다. 투명성은 모든 것을 겉으로 드러내어 정보로 만든다. 오늘날의 비물질적 생산 양식 속에서 더 많은 정보와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은 곧 더높은 생산성과 가속화, 더 큰 성장을 의미한다. 정보는 감추어진 것이 없는 긍정성이며, 아무런 내면도 없는 까닭에 콘텍스트와 무관하게 유통시킬 수 있다. 그래서 정보의 순환 과정은 임의로 가속화할 수 있는 것이다.
비밀, 낯섦, 이질성은 무제한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에 투명성의 이름으로 해체된다. 커뮤니케이션은 매끄럽게 다듬어짐으로써, 즉 모든 문턱과 장벽, 틈이 제거됨으로써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사람들도 내면이없는 존재로 바뀌어간다. 내면은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고 느리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탈 내면화는 자발적인 노출을 통해 일어난다. 부정성으로서의 이질성과 낯섦은 탈 내면화되어 소통 가능하고 소비 가능한 차이나 다양성과 같은 긍정적 특징으로 전환된다. 투명성의 명령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순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전면적인 외면성을강요한다. 개방성은 궁극적으로 탈경계적 커뮤니케이션에 기여한다.
전면적 획일화는 투명성의 명령이 초래한 또 하나의 귀결이다. 전면적 네트워크화, 전면적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이미 평준화를 촉진한다. 그것은 마치 첩보 기관이 감시하고 조종하기도 전에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는 것 같은 효과를 낳는다. 오늘날에는 감시자 없이도 감시가 이루어진다. 커뮤니케이션은 보이지 않는 진행자에 의해 평평하게 다듬어지고 모두가 동의하는 지점으로 하향 조정된다. 이처럼 자발적인 일차적 감시는 첩보 기관에 의한 외적•이차적인 감시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신자유주의는 시민을 소비자로 만든다. 시민의 자유는 소비자의 수동성으로 대체된다. 소비자가 된 유권자는 정치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없다. 적극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해가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것이다. 그는 공동의 정치적 행동을 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궁시렁거리궁시렁 불평하면서 정치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따름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는 소비자와 똑같다. 정치가와 정당 역시 이러한 소비의 논리를 따른다. 그들은 “납품”의 의무를 지닌다. 그들은 유권자 고객에게 만족스러운 상품을 제공해야 하는 납품업자로 전락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정치가에게 요구하는 투명성은 정치적 요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요구되는 것은 정치적 결정 과정의 투명성이 아니다. 소비자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투명성의 명령은 정치가를 벌거벗기고 폭로하고 추문 속으로 몰아가는 데 기여할 뿐이다. 투명성의 요구는 참여하는 시민의 요구가 아니라 추문을 즐기는 수동적인 구경꾼의 요구다. 참여는 고객 불만, 환불 요청과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구경꾼과 소비자들이 거주하는 투명사회는 구경꾼 민주주의를 수립한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의 강요나 명령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노출한다.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떤 기회에 알게 될지 모른 채, 자발적으로 우리 자신에 관한 온갖 데이터와 정보를 웹에 올린다. 이러한 통제불능의 상태는 자유의 위기에 대한 증거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주위에 뿌리는 수많은 개인정보 앞에서는 개인 정보 보호라는 관념 자체가 무색해진다. 오늘날 디지털 심리정치는 수동적 감시단계에서 능동적 조종단계로 전진하는 중이며, 우리를 더깊은 자유의 위기 속으로 빠뜨린다. 자유의지 자체가 위기에 빠진다. 빅데이터는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동력학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을 획득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심리정치적 도구다. 이러한 지식은 지배를 위한 지식으로서, 이를 통해 개인의 심리 속에 파고들어 반성 이전의 층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가능해진다.
미래가 열려 있다는 것은 행동의 자유를 구성하는 본질적 요인이다. 빅데이터는 인간 행동에 대한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로써 미래는 계산하고 조종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디지털 심리정치는 자유로운 결정의 부정성을 사실 관계의 긍정성으로 탈바꿈시킨다. 인간 자체가 긍정화되어 양화하고 측정하고 조종할 수 있는 사물이 된다.
빅데이터는 인간의 종언, 자유의지의 종언을 선포한다. 모든 명령 체계와 지배 기술은 피지배자를 예속시키기 위한 고유한 성물Devotionalie을 만들어낸다. 성물은 지배 관계의 물질화로서 지배 관계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한다. 성물은 곧 예속됨Devot을 의미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일종의 디지털 성물이다. 스마트폰은 묵주처럼 예속화의 도구로 기능한다.
스마트폰과 묵주는 모두 자기검열과 자기통제에 사용된다. 지배는 감시 업무를 개개인에게 떠넘김으로써 효율성을 제고한다. ‘좋아요’는 디지털 아멘이다. 우리는 ‘좋아요’를 클릭하는 순간 스스로 지배에 예속되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효과적인 감시 도구일 뿐만 아니라, 모바일 고해실이기도하다. 페이스북은 디지털 교회, 글로벌한 디지털 시나고그Synagoge[유대교 예배당으로 본래 집회를 의미]이다.
스마트 권력
권력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현현한다. 가장 직접적 형태의 권력은 자유의 부정으로 나타난다.
권력은 심지어 자유를 이용할 수도 있다. 부정적 형태의 권력만이 의지를 꺾고 자유를 부정하는 폭력, 안된다고 말하는 폭력으로 발현된다. 오늘날 권력은 점점 더 허용적 형식을 취해간다. 너그럽게 허용하는 친절한 권력은 부정성을 벗어버리고 자유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신자유주의 권력의 기술은 섬세하고 유연하며 스마트한 형태를 취하며, 결국 사람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예속된 주체는 자신이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예속된 주체에게 지배 관계는 완전히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신자유주의적 권력 기술의 목표는 인간을 온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존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친절한 스마트 권력은 예속된 주체의 의지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종한다. 그것은 안 된다고 말하기보다 그러라고 말하는 권력이며, 억압적이기보다 유혹적인 권력이다.
그것은 긍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착취하려고 애쓴다. 그것은 금지하는 대신 유혹하며, 주체와 대적하는 대신 주체의 욕구에 부응한다. 스마트 권력은 심리를 훈육하거나 강제와 금지의 굴레에 묶어두지 않고, 오히려 심리에 착 감겨온다. 그것은 우리에게 침묵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털어놓으라고, 함께 나누라고, 참여하라고, 우리의 의견, 욕망, 소원, 선호를 전달하고 삶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끊임없이 자극한다. 이처럼 친절한 권력은 억압적 권력보다 더 막강하다. 이때 권력은 우리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오늘날 자유의 위기는 자유를 부정하고 억압하기보다 자유를 착취하는 권력을 상대해야 한다는 데서 비롯된다. 자유로운 결정은 미리 정해져 있는 가능성들에 대한 선택으로 전락한다.
스마트 권력은 우리의 의식적, 무의식적 사고를 읽고 분석한다. 그것은 우리들이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조직화하고 최적화하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권력이 제압해야 할 저항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배는 큰 힘을 소모할 필요도 없고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는다. 지배는 그냥 저절로 이루어진다. 스마트 권력은 호감을 사고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지배하려고 한다. 다음과 같은 경고 문구는 ‘좋아요’자본주의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
자유분방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자극하고 유혹하는 스마트 권력은 명령하고 위협하고 규제하는 권력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좋아요’ 버튼은 스마트 권력의 인장이다. 사람들은 소비하고 소통하면서, 즉 ‘좋아요’ 버튼을 누르면서, 스스로를 지배 관계 속에 빠뜨린다. 신자유주의는 ‘좋아요’자본주의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강제와 금지를 통해 작동하던 19세기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두더지와 뱀
규율사회는 다양한 감금 지대와 시설로 이루어진다. 가족, 학교, 감옥, 병영, 공장은 가두어두는 규율의 공간이다. 규율사회의 동물은 두더지다.
뱀은 규율사회의 뒤를 이은 신자유주의적 통제사회의 동물이다. 두더지와 달리 뱀은 닫힌 공간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움직임을 통해 공간을 열어간다. 두더지는 노동자다. 반면 뱀은 경영자다. 뱀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동물이다.
두더지에서 뱀으로, 즉 서브젝트에서 프로젝트로의 이행으로 완전히 새로운 삶의 형식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며, 그저 동일한 자본주의의 변이체, 더욱 첨예화된 자본주의가 등장할 뿐이다. 일정한 공간에 갇힌 두더지의 운동은 곧 생산성의 한계에 도달한다. 두더지가 규율에 따라 성실하게 노동한다고 해도 일정한 수준 이상의 생산성을 올리지는 못한다. 뱀은 새로운 운동 형식을 통해 이러한 제약을 극복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생산성을 더 높이기 위해 두더지 모델에서 뱀 모델로 전환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규율 체제는 마치 “몸”처럼 조직되어 있다. 그것은 생정치의 체제다. 반면 신자유주의 체제는 마치 “영혼”과 같은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심리정치가 이 체제의 통치 형식이 된다. 그것은 “회피할 수 없는 경쟁을 끊임없이 확산시킨다.” 이로써 “유익한 승부욕과 탁월한 행위 동기”가 촉발된다는 것이다. 모티베이션, 프로젝트, 경쟁, 최적화, 자발성은 모두 신자유주의 체제의 심리정치적 통치술에 속한다. 뱀은 무엇보다도 죄, 즉 신자유주의 체제가 지배 수단으로 사용하는 채무를 상징한다.
생정치
푸코Michel Foucault에 따르면 17C부터 이미 권력은 신과 같은 군주가 휘두르는 죽음의 권력이 아니라 규율 권력이 된다. 군주의 권력은 칼의 권력이다. 그것은 죽음의 위협으로 군림한다. 반면 규율 권력은 삶의 권력이다. 그것의 기능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완벽한 관철에 있다. 오랫동안 막강한 위력을 발휘해온 죽음의 위협은 “몸의 세심한 관리”와 “계산적인 계획”으로 대체된다.
군주의 권력에서 규율 권력으로의 이행은 생산 형식, 즉 농업 생산에서 산업 생산으로의 변화에 기인한다. 산업화의 진전은 몸을 기계생산에 적응시킬 필요성을 낳는다. 규율권력은 몸을 고문하는 대신 규범체계 속에 묶어둔다. 철저히 계산된 강제가 신체의 모든 부분을 관통하여 몸속에 자동화된 습관으로까지 새겨진다. 그리하여 몸은 생산 기계로 정비된다.
규율은 “신체활동을 정교하게 통제하고 그힘을 지속적으로 종속시키는 방법, 그것을 빠릿빠릿하게, 쓸모 있게 만드는 방법이다.”
규율 권력은 표준화하는 권력이다. 그것은 주체를 규범, 명령, 금지의 체계에 예속시키고, 일탈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요소를 제거한다. 바로 이러한 조련Abrichtung의 부정적 성격이 규율 권력의 본질적 요소다. 그 점에서 규율 권력은 군주의 권력과 인접 관계에 있다. 군주 권력도 부정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군주의 권력도 규율 권력도 타자 착취를 수행한다. 양자 모두 복종하는 주체를 만들어낸다. 규율 권력이 구사하는 훈육의 기술은 신체적인 차원을 넘어서 정신적인 영역에까지 파고든다. 영단어 “industry”에는 근면이라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Industrial School”은 비행 청소년의 교화 기관이다.
하지만 심리Psyche는 아직 규율 권력의 초점에 놓여있지 않다. 규율 권력이 구사하는 기술은 심리의 심층과 그 속에 숨어 있는 소망과 욕구, 갈망에까지 파고들어가 이를 좌지우지하기에는 너무 조악하다. 벤담의 빅브라더도 파놉티콘의 수감자들을 외적으로 관찰할 뿐이다.
규율 권력은 “인구”를 발견한다. 인구는 생산 및 재생산을 하는 무리로서, 세심하게 관리해야 할 대상이다. 여기에 생정치의 과업이 있다. 생정치는 번식, 출생률과 사망률, 건강 상태, 기대 수명 등을 규제하고 점검한다. 푸코도 명시적으로 “인구의 생정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생정치는 규율사회의 통치술이다. 하지만 그것은 심리를 착취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 인구 통계를 활용하는 생정치는 심리적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 점에서 통계는 빅데이터와 구별된다. 빅데이터는 개인의 심리 지도뿐만 아니라 집단적 심리 지도, 더 나아가 무의식의 심리 지도까지도 작성할 수 있게 해준다. 이로써 심리를 무의식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훤히 비추고 착취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푸코의 딜레마
푸코는 생정치를 명시적으로 자본주의의 규율 형식과 연관짓는다. 여기서 몸은 생산의 형식으로서 사회화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생정치다. 생물학적인 것, 신체적인 것, 몸이 중요하다.” 그것은 결국 아주 넓은 의미에서 신체의 정치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진화가 도달한 새로운 단계의 또 다른 변이체로서, 그것의 일차적 관심사는 “생물학적인것, 신체적인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오히려 심리에서 생산력을 발견한다. 이러한 심리와 심리정치로의 전환은 현대 자본주의의 생산 형식과도 긴밀한 관계가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것은 비물질적이고 비육체적인 생산형식이다. 여기서는 정보와 프로그램 같은 비사물적 대상이 주로 생산되며, 규율사회에서와는 달리 몸이 더 이상 생산력의 중심적 위치에 서지 못한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는 신체적 저항의 극복이 아니라 심리적, 정신적 과정의 최적화가 요구된다. 몸은 직접적인 생산 과정에서 해방되어 미적인 또는 건강 기술적인 최적화의 대상이 되어 정형외과의 침상에서 성형외과의 침상으로 자리를 옮긴다. 오늘날의 생산 과정에서 푸코의 “빠릿빠릿한 몸”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는 없다.
정형의학은 성형외과와피트니스센터에 밀려난다. 몸의 최적화는 단순한 미용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활동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섹스니스sexness와 피트니스fitness는 증식시키고 상품화하고 착취해야 할 새로운 경제적 자원으로 떠오른다.
베르나르 스티글레르BernardStiegler에 따르면, 생권력의 자리를 물려받은 것은 “심리 권력의 심리 기술”이다. 그가 말하는 심리 기술이란 텔레비전과 같이 사람들을 충동에 조종되는 미숙한 소비 동물로 만들어 결국 대중의 퇴행을 초래하는 “원격 지배” “프로그램 산업”을 말한다.
문제는 스티글레르가 TV를 지나치게 중시한다는 점이다. 그는 TV를 심리 기술의 거의 유일한 도구로 격상시킨다. 그 결과 그는 디지털 기술에 의존하는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를 파악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1980년대 초에 푸코는 “자아 기술”에 관심을 돌린다. 그가 말하는 자아 기술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 규칙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변모시키고 자신의 특수한 존재에 수정을 가하며 자신의 삶을 일정한 미적 가치와 일정 수준의 스타일을 갖춘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서 수행”하는 “의식적이고 의욕적인 실천”을 의미한다.
하지만 푸코는 신자유주의적 지배 체제가 자아의 기술을 완전히 포섭했다는 것, 신자유주의적 자아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자아의 부단한 최적화가 지배와 착취의 효율적 형식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적 성과주체는 “자기자신의경영자”로서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열정적으로 착취한다. 예술작품으로서의 자아는 아름다운, 하지만 기만적인 가상이다. 그러한 가상은 자아를 완벽하게 착취하려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의해 유지될 뿐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권력 기술은 섬세한 형식을 취한다. 직접적으로 개인을 예속시키지 않고, 개인이 자발적인 자기 제어를 통해 지배 관계를 내면에 전사轉寫하도록 유도한다. 개개인은 이렇게 내면에 전사된 지배 관계를 자유로 해석하게 된다. 여기서 자아의 최적화와 복종, 자유와 착취는 하나가 된다. 자기 착취라는 형식으로 자유와 착취를 결합시키는 이러한 권력 기술은 푸코의 시야 너머에 있다.
힐링 혹은 킬링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점점 더 세련된 자기착취 형식을 고안해낸다. 수많은 자기관리 워크숍, 모티베이션 워크숍, 인성세미나, 멘탈트레이닝 등이 끝없는 자아 최적화와 효율성 향상을 약속한다. 이러한 행사들은 우리의 노동시간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격 전체, 우리의 모든 관심, 우리의 삶 자체를 착취하려고 노리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에 조종된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은 인간을 발견하고 그 자체를 착취 대상으로 삼는다.
자아를최적화하라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은 시스템내에서 완벽하게 기능하라는 명령에 지나지 않는다. 효율성과 성과의 제고를 위해 심리적 억압, 약점, 실수 같은 것은 치료를 통해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비교 가능하고 측정 가능한 것으로 환원되고 시장 논리에 종속된다. 자아의 최적화를 추동하는 것은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시스템의 강제, 즉 양화 가능한 성공을 요구하는 시장 논리에서 유래한다.
규율사회의 실물 가치 창출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렸다. 오늘날의 금융자본주의에서는 심지어 가치의 극단적인 파괴가 진행된다. 신자유주의 체제와 함께 소진의 시대가 개막된다. 이제는 심리가 착취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우울증이나 소진증후군 같은 심리적 질병을 함께 가져온다.
자기계발서에서 통용되는 마법의 주문은 힐링이다. 힐링이란 효율과 성과의 이름으로 모든 기능적 약점과 정신적 억압을 치료를 통해 깨끗이 제거함으로써 자아의 최적화를 이루는것을 의미한다. 시스템의 최적화와 부합하는 부단한 자아 최적화는 파괴적이다. 그것은 결국 정신의 붕괴로 끝나고 만다. 자아 최적화는 완벽한 자아의 착취에 지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자아 최적화 이데올로기는 종교적, 광신적특징을 나타낸다. 그것은 새로운 형식의 예속화다. 자아를 대상으로 하는 끝없는 노력은 종교적 지배와 예속화의 기술인 프로테스탄트적 자기 성찰과 자기 검열을 닮아간다. 이제는 수색 대상이 죄가 아니라 부정적인 사고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자아는 또다시 자기 자신이라는 적과 씨름한다.
부정성은 삶을 생동하게하고, 고통은 경험의 본질적 부분을 이룬다. 삶이 긍정적 감정과 몰입 경험만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인간적 삶이 아니다. 인간의 영혼에 깊은 긴장을 선사하는 것은 바로 부정성이다.
끝없는 최적화의 명령은 고통마저 착취한다. 미국의 모티베이션 트레이너인 앤서니 로빈스Anthony Robbin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CANI Constant Never Ending Improvement. 부단히, 끝없이 개선할 것!”
긍정성의 폭력은 부정성의 폭력만큼이나 파괴적이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의식意識 산업을 활성화하며 이로써 결코 긍정 기계일 수 없는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체는 자아최적화의 명령, 즉 더 큰 성과를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강제 속에서 몰락해간다. 힐링은 킬링으로 귀결된다.
쇼크
음모론적인 구상을 바탕으로 하는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의 책 『쇼크 독트린』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주인공은 정신과의사인 이웬 카메론EwenCameron 박사다. 그는 쇼크를 줌으로써 인간의 뇌에 있는 나쁜 것을 파괴하고 지워버릴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백지 상태 위에 새로운 인격을 구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영혼은 폭력적인 “탈주조”와 “재주조” 과정 속에 던져진다. 다시 포맷되어 새롭게 씌어지는 것이다.
그 바탕에 놓인 생각은 선과 악의 이분법이다. 악은 깨끗이 지우고 선으로 대체해야 한다. 타자와 적에 대한 면역학적 방어라는 부정성의 원칙이 카메론 실험의 본질이다. 쇼크는 타자를 무장해제시키고 그런 상태에서 그의 영혼을 다른 이데올로기, 다른 서사로 재기술한다.
나오미 클라인의 두번째 주인공은 신자유주의 시장의 신학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박사다. 프리드먼에게 파국 뒤의 사회적 쇼크 상태는 사회를 신자유주의적으로 새롭게 주조할 수 있는 절호의찬스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체제는 쇼크에 의지하여 작동한다. 쇼크는 영혼을 탈주조하고 깨끗이 비워낸다. 쇼크는 영혼을 무방비 상태로 만든다. 저항력을 상실한 영혼은 급진적인 재프로그래밍 과정에 순순히 복종하게 된다.
프리드먼의 꿈은 사회를 ‘탈주조’하여 국가에 의한 규제, 무역 장벽, 고정 금리 같은 교란 요인이 깨끗이 제거된 순수 자본주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카메론과 마찬가지로 프리드먼 역시 경제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을 때 이러한 처녀성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오직 고통스러운 충격을 가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오직 ‘쓰디쓴 약’만이 해로운 왜곡과 교란 상태를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
클라인은 신자유주의 본연의 심리정치를 보지못한다. 쇼크 요법은 전형적인 규율 체제의 기술이다. 그것은 생정치적 강제조치 가운데 하나다.
반면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에서 지배적인 권력 기술은 긍정성이다. 그것은 부정적 위협 대신 긍정적 자극을 통해 작동하며, “쓴 약”이 아니라 “좋아요”를 주입한다. 영혼을 충격적으로 흔들어놓고 마비시키기보다 영혼에 아첨한다. 영혼에 반대하기보다 영혼을 유혹하고 영혼에 호의를 베푼다. 영혼을 “탈주조”하기보다 영혼이 욕망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을 세심하게 기록한다. 그것은 예측을 바탕으로 인간 행동에 선수를 친다. 행동을 가로막는 대신, 행동에 앞서 행동한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억압하기보다는 호감을 사고 욕구를 채워주려고 애쓰는 스마트 정치다.